“다연이 아버지이신가요?”핸드폰 너머로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 대표?”염지훈은 차가웠다.“제가 누구인지가 중요한가요? 다연이 아버지가 맞냐고 물었습니다.”온준용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나일세.”염지훈이 계속 말을 이었다.“다연이를 만나고 싶은가요?”“난 다연이 아빠야. 딸을 만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지.”눈을 가늘게 뜬 염지훈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화양대 맞은편 카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한 시간 내에 도착하지 않으면 없던 일로 하죠.”염지훈은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이를 본 온다연은 재빨리 핸드폰을 가로챘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그쪽이 뭔데 함부로 결정하냐고요. 그럴 자격 없잖아요.”염지훈은 손에 든 라이터를 돌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럼 유강후는 너 대신 결정해도 된다는 거야? 사사건건 간섭하고 통제하는데도 잘 버티고 있는걸 보면 꽤 마음에 드나 봐?”그의 얼굴엔 슬픈 기색이 언뜻 스쳐 지나갔으나 이내 곧 여유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얼마나 좋아해?”염지훈은 허리를 굽히더니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아니면... 아이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강후 옆에 있는 거야?”온다연은 그의 손을 탁 쳐서 떼어내고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화를 냈다.“뭐가 됐든 그쪽이 참견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예전에 지훈 씨를 이용했던 건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당연히 보상도 할 거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이렇게 함부로 손을 써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에요.”염지훈은 입가를 올리더니 태연하게 말했다.“눈을 부릅뜬 모습이 생각보다 귀엽네.”온다연은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지만 민망함에 되레 버럭했다.“미쳤어요?”화가 난 그녀의 모습에 염지훈도 멈칫했다.“됐어. 가자, 네 아빠 상대하러 가야지.”온다연이 답했다.“내 일에 끼어들지 마세요.”“저런 인간을 계속 아빠로 생각하는 거야?”온다연은 쉽사리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했다.“생각하든 말든 지훈 씨랑은 상관없는 일이
온다연은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어떻게 이름까지 알고 있는 거죠? 설마 나 뒷조사했어요?”염지훈은 여유롭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응.”온다연에 대해 뒷조사했고 이제는 그녀가 온준용의 딸이 아니라고 의심했다.그는 이미 부하들을 시켜 진수현의 딸이 요절한 진짜 이유를 조사하게 했다.현재까지 알려진 소식에 의하면 진수현의 딸이 숨진 건 사실이다. 게다가 진수현은 딸의 죽음을 직접 지켜보고 장례식까지 치렀다고 한다.하지만 염지훈은 이 결과를 믿지 않았다.이 세상에 똑같게 생긴 사람이 있다고 생각조차 않았다.그림을 입수했으니 이제는 어머니의 이름으로 신국에 찾아가 안심을 만날 계획을 세웠다.만약 온다연이 안심과 진수현의 딸인 게 밝혀진다면 정정당당하게 그녀를 약혼녀로 맞이할 수 있다.이를 생각한 염지훈은 손을 뻗어 온다연의 볼을 꼬집었다.“아빠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사람이야. 가자, 내가 처리해 줄게.”온다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어떻게 도와주려고요?”염지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숨이 끊길 정도로 때리면 되지.”염지훈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온준용 같은 사람은 죽어도 마땅했으니까.그러나 온다연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장난할 기분 아니에요. 좋은 인간이 아닌 건 사실이지만 때려죽이는 것보다 고생을 좀 시키고 싶네요.”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전 강후 씨에게 이 일을 알리고 싶지 않아요. 만약 지훈 씨가 정말로 절 도와주고 싶은 거면 비밀로 해주세요.”온다연은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초라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제야 빛을 보고 있는데 뭣 같은 온준용이 아빠라는 자격을 들먹이며 찾아왔다. 그녀는 유강후가 이런 사소한 일에 정신이 팔리는걸 원치 않았고 나아가 자신의 아들이 외할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는 게 싫었다.염지훈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유강후가 그렇게 신경 쓰여? 비밀을 지켜주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공짜가 아니라서...”온다연은 고민
카페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온준용이 나타났다.십 년 만에 만난 온준용은 많이 늙었고 옷차림도 예전에 비해 초라했다.그리고 여전히 그에게서는 역겨운 술 냄새가 났다.온준용은 온다연을 보자마자 그리웠다는 듯 애틋한 눈빛을 드러내며 안으려고 팔을 뻗었다. 그러나 온다연은 재빨리 옆으로 몸을 피했다.그러자 온준용은 뒤에 있던 남자아이를 끌어당기며 말했다.“준휘야, 인사해야지. 누나라고 부르면 돼.”그 아이는 수련한 외모에 비해 매우 야위었다. 입고 있는 교복도 많이 낡았고 손과 목 곳곳에 딱지가 앉은 상처가 남아있었다.“누나.”그는 눈치를 살피며 온다연을 누나라고 부르고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온다연은 그에게서 자신의 그림자를 본 듯 가슴이 미어졌다.동시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킬 수가 없었다.“설마 또 때렸어요?”온준용은 눈빛을 피하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아니야. 이제 손버릇 고쳤어.”온다연은 아이의 몸에 난 상처를 가리키며 물었다.“그럼 이건 뭐죠?”온준용은 변명을 늘어놓았다.“혼자 뛰어놀다가 다친 거야. 워낙 덤벙거리는 아이라서 하루 멀다 하게 다쳐서 들어와.”온다연은 지금껏 온준용은 죽은 사람으로 생각해 왔기에 그에게 일말의 기대조차 품지 않았다.하지만 상처투성이가 된 아이를 보니 온준용이 했던 파렴치한 일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온준용은 거의 매일 술에 찌들어 살았고 단지 아들을 못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엄마를 죽도록 때렸다. 화가 풀리지 않는 날에는 악마의 손길이 온다연에게 닿았고 모든 순간이 고통스러웠다.아들이 생기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지금의 상황을 보니 개 버릇 남 못 준다는 얘기가 맞다.온준용처럼 천성이 악한 사람은 지옥에 가는 것도 과분하다.온다연은 그를 감옥에 처넣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심호흡하며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어릴 때부터 저한테 관심이 없었잖아요.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도 연락 한 통 없던 사람이 갑자기 왜 저를 만나려고 하는 거죠? 원하는 게 뭐예요?”온준용은 재
온준휘는 실망과 혐오가 가득한 눈빛으로 문밖에 온준용을 바라봤다.그러고선 다시 고개를 돌려 말을 이었다.“저 인간한테는 아무런 희망이 없어요. 비록 내 아빠인 건 맞지만 저런 쓰레기는 진작에 죽어야 하는데...”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그녀는 눈앞의 이 남자아이가 이런 험한 말을 하는 게 너무 의외였다.그러나 내연녀가 임신한 채로 집안을 당당하게 돌아다닌 걸 생각하면 온준휘에게 호감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네 엄마는?”온준휘는 씁쓸함을 드러내며 나지막하게 답했다.“모르겠어요. 아마 죽었겠죠? 몇 년 전에 저 인간이 빚에 시달리면서 엄마를 다른 사람한테 팔았거든요.”“원래는 저도 같이 팔려 갈 운명이었는데 병 때문에 몸이 안 좋아서 사려는 사람이 없었어요. 덕분에 목숨을 건진 거죠.”온다연은 분노를 억제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짐승만도 못한 놈.’유부남과 바람피운 여자도 좋은 사람인 건 아니지만 온준용은 정말 인간 말종이다.내연녀는 벌을 받았다 쳐도 어떻게 친아들인 온준휘까지 괴롭힐 수 있냐는 말이다.도박 빚을 갚으려고 아들을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인간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온준휘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절대 한 푼도 주지 마세요. 얼마가 됐든 무조건 그 돈으로 도박해서 더 큰 빚을 지게 될 거예요.”그는 멈칫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우리 엄마가 누나 엄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대충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를 동생으로 생각해 달라거나 도와달라고 부탁할 마음은 없어요. 다만 엄마가 저지른 행동에 대해서는 언젠가 꼭 사과하고 싶었어요.”그 말을 끝으로 온준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온다연에게 허리 숙여 사과했다.예상치 못한 행동과 말에 온다연은 기분이 착잡했다.그녀의 시선은 온준휘의 손에 닿았다. 애써 옷으로 감춘 상처가 얼핏 보였고 가냘픈 손목은 여기저기 긁혀 말이 아니었다.온다연은 그의 손을 잡고 소매를 위로 쓸어올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팔뚝 전체에 보기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사람을 압도할 만큼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니 온준용도 본능적으로 꼬리를 낮췄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험한 말을 내뱉었다.“온다연, 이제 돈 좀 생겼다고 아빠는 안중에도 없는 거야? 너도 참 효녀다.”“아빠랑 동생은 힘들게 살고 있는 게 너는 어쩜 이렇게 뻔뻔하니?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온다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염지훈이 말을 가로챘다.“유강후가 지금 사람 보내서 널 찾고 있대. 이 일을 알리고 싶지 않으면 여기는 나한테 맡기고 넌 얼른 돌아가서 수업해.”온다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온준용을 힐끗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절대 한 푼도 주지마요. 그리고 이런 인간을 혼내주려고 손을 쓰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니까 대충 마무리만 부탁할게요.”염지훈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웃으며 말했다.“지금 걱정해 주는 거야? 내가 그런 것도 모르는 멍청한 사람으로 보여? 걱정하지 말고 얼른 수업하러 가.”온다연은 말을 덧붙였다.“저 아이는 건드리지 마세요.”염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답했다.“빨리 가. 곧 있으면 유강후가 찾아올 거야.”온다연은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아니나 다를까 온다연이 떠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유강후의 경호원이 땀에 젖은 얼굴로 그녀에게 달려왔다.“사모님, 왜 수업 들으러 안 가셨어요?”온다연은 손에 든 커피를 흔들며 답했다.“커피 사려고 잠깐 밖에 나왔어요. 왜요?”그제야 경호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대표님한테 연락 좀 해주세요. 한 시간 내내 연락이 안 돼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납치된 줄 알고 지금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그들이 말하고 있을 때 위로 헬기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들어보니 대형 헬기 한 대가 화양대 활주로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헬기 뒤쪽에는 강씨 가문의 금빛 배지가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났다.유강후가 온 게 틀림없다.온다연은 그제야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무리 터치해도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주머니에서 잘못 눌려 핸드폰이 완전
염지훈은 소리를 지르고 있는 온준용을 바닥에 내리치며 불쾌함을 드러냈다.“짜증 나. 시끄러워 죽겠네. 일단 입부터 찢어.”그러자 여럿이 우르르 몰려들었다.한바탕 주먹다짐이 벌어졌고 온준용의 목소리는 점차 조용해졌다.이 정도면 괜찮겠다싶었던 염지훈은 그만하라고 눈치를 줬다.“됐어, 때려죽이지는 마.”그의 명령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손을 뗐다.온준용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숨을 헐떡였다.“너... 너 누구야? 유강후가 보낸 사람이 아니지?”염지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고작 그런 인간이 날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너 이거 납치야. 불법이라고.”염지훈은 한 걸음 한 걸음 온준용에게 다가가더니 지그시 그의 손을 밟았다.“불법? 너 같은 인간의 입에서 불법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게 참 신기하네.”“악.”온준용은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아파. 이거 놔.”“아파?”염지훈은 더욱 세게 짓밟았다.“고작 이걸로 아프다고? 예전에 온다연을 때릴 땐 이런 생각을 못 했나 봐? 다연이가 얼마나 아플지 생각해 봤어?”온준용은 겁을 질린 채로 발악했다.“온다연이 계획한 일이야? 자기 엄마대신 복수하려고 날 죽이려는 거네.”‘온다연 엄마?’염지훈은 다른 발로 온준용을 짓밟으며 생각에 잠겼다.“너 같은 구제 불능 쓰레기는 이렇게 쉽게 죽으면 안 되지.”그는 넥타이를 잡아당기더니 곧이어 재킷을 벗었다.“며칠 동안 교수 노릇하며 성질 좀 죽였더니 손이 근질근질하네. 역시 나는 이런 일이 제일 짜릿해.”염지훈은 벗은 재킷을 옆으로 던지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온준용에게 주먹을 날렸다.이런 경우가 처음이었던 온준용은 주먹 한 방에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그러자 옆에 있던 부하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말렸다.“도련님, 살살하세요. 괜히 여기서 죽으면 일이 복잡해집니다.”염지훈은 발로 온준용의 가슴을 짓밟으며 명령했다.“죽지 않을 정도로만 때려. 이대로 죽어버리면 내가 많이 아쉽지.”한차례의 주먹질과 발
학교에 도착한 온다연은 부랴부랴 활주로 입구로 달려갔고 마침내 헬기가 굉음을 내며 착륙했다.곧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서둘러 내려왔다.제일 선두에 선 사람은 바로 유강후다.헬기를 탈 때 얼마나 조급했는지 유강후는 외투조차 챙겨입지 않았고 오늘 아침 온다연이 골라준 검은 셔츠 한 장만 입은 채 걸어왔다.유강후는 입구에 서 있는 온다연의 작은 그림자를 보고서야 긴장하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그는 걸음을 멈추고 말없이 뚫어져라 온다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유강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사실 그는 매우 중요한 프로젝트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학교에서 온다연이 보이지 않는다는 경호원의 연락을 받았다.본능적으로 킬러의 표적이 됐다는 생각에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손에 든 계약서를 집어 던지고 무작정 학교로 달려오며 온다연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단 한 번도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연락 두절된 일분일초가 유강후에게는 고통이었다.온다연이 겁을 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강후는 그녀가 지하 암살 조직의 타깃이 됐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모른다고 해서 위험이 곁에 없는 건 아니다.게다가 최근에 로운은 임무를 받은 킬러 몇 명이 경원에 도착했다고 전했다.비록 그 중 세명은 로운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되었지만 남은 두 명에 대해서는 아는 정보가 없다.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온다연이 연락두절됐다.헬기에서 유강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 아무도 모른다.유강후의 걱정을 알 리가 없었던 온다연은 활주로 입구에 서서 순진한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유강후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온다연을 혼내고 싶었다.그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온다연은 재빨리 달려가 그의 팔을 껴안았다.“갑자기 왜 왔어요?”유강후의 표정은 더없이 어두웠다.“핸드폰은 왜 꺼놨어?”그 질문을 들으니 온다연은 그가 연락되지 않아 화가 났다는 걸 알아챘다.설령 그렇다 한들 헬기까지 동원해서 찾으러 오는 건 솔직히 오바다.
유강후는 차갑고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염지훈이 교수로 나타나서 네 곁을 맴도는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걔는 처음부터 좋은 의도가 없었어.”온다연은 안색이 변했다.“그 사람은 원래 두 학교의 교수님이었어요.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요.”유강후는 여전히 싸늘했다.“내가 한번 결정한 일에 대해 절대 번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지?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자.”말을 마친 그는 온다연이 보는 앞에서 지도교사에게 전화를 걸어 휴학을 신청했다.온다연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뒤돌아 뛰쳐나갔다.유강후는 도망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명령했다.“따라가서 집으로 데려가.”“알겠습니다. 대표님.”이때 이권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도련님, 사실대로 다연 씨에게 말하는 건 어떨까요?”유강후의 눈에 어둠이 번쩍였고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안돼. 이다 하루코의 일이 다연이에게 얼마나 큰 심리적 영향을 끼쳤는지 알지? 마음을 다잡고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푼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이제 막 밝아지기 시작했는데 그걸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그의 눈에는 알 수 없는 착잡함이 드러났다.“권아, 넌 옆에서 지켜봤으니까 잘 알잖아. 다연이가 마음을 여는데 1년이 걸렸어. 이제야 빛을 보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사실대로 얘기하겠니.”이권이 말했다.“하지만 이럴수록 도련님에 대한 오해가 깊어질 겁니다.”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옆에서 많이 달래주면 돼. 모든 일이 완벽하게 마무리되면 솔직하게 얘기할 거야.”이권은 한숨을 내쉬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이때 유강후의 핸드폰이 울렸고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로운이었다.“대표님, 킬러 두 명이 더 나타났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두 사람과 합류했습니다.”“사모님과 진시현 씨가 있는 한옥을 노리고 있습니다. 워낙 치밀한 녀석들이라 위치를 파악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다만 한옥에 있는 사람을 노리는건 확실합니다.”“아무래도 사모님의 정체가 노출된 것 같습니다.”진시현은 온다연과 매우 닮은 이권의
“부인이 지금 임신 3주차인데, 아직은 배아 상태라 약 1cm에 불과하고 상태가 좀 불안정합니다.”온다연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는 것이 꿈이었던 유강후는 너무 큰 기쁨에 심장이 마구 뛰고 정신이 혼미했다.이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온다연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최소 1~2년은 걸릴 것이라 예상했는데, 고작 3~4개월 만에 아이를 갖게 된 것이다.그런데 태아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지난번 온다연의 유산 사건이 기억에 생생한 유강후는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태아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건 무슨 뜻이죠?”임수진이 약간 당황하며 설명했다.“대표님,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흔히 발생하는 일입니다. 조금만 상태가 나빠져도 유산 징후가 나타날 수 있어요.”“별문제는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배아 발육 상태가 양호하고 태아 심음도 정상입니다.”“쌍둥이라고요?”유강후는 귀를 의심했다.그는 문득 곽혜진이 준 약이 생각났다. 자기도 쌍둥이였다는 사실과 겹치자, 다시 기분이 황홀해져 입가에 피어오르는 미소를 주체할 수 없었다.그는 임수진의 손목을 꽉 잡고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박사님, 그게 정말입니까?”임수진이 미간을 찌푸렸다.“대표님, 손을 좀 놓고 얘기해요.”유강후는 급히 손을 풀어주었다. 흥분해서 목소리까지 떨리기는 평생 처음이다.“죄송합니다, 박사님. 정말 쌍둥이예요?”임수진이 틀림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정말이죠. 제가 30년간 의사로 일하면서 몇 번 실수한 적은 있지만, 쌍둥이를 잘못 판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유강후는 너무 흥분해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는 애써 진정하고 한참 후에야 나지막이 말했다.“감사합니다, 박사님. 제 아내는 언제쯤 깨어날 수 있을까요?”임수진은 아직도 혼수 상태인 온다연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몸에 특별한 이상은 없어서 지금쯤 깨어나야 하는데...”“제 아내는 이전에 최면 당한 적이 있는데, 그로 인해 과거의 대부분 기
온다연은 얼굴이 창백했고, 몸이 물에서 막 건져낸 것처럼 식은땀에 젖어있었다.강씨 가문의 새 안주인임을 즉각 알아본 그들은 삽시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방금 그들이 한 뒷담화를 온다연이 다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온다연이 극심한 통증을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의사, 의사를 불러주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그녀는 길고 긴 꿈속으로 빠져들었다.경원시에 사는 동안 겪었던 고난들이 오래된 영화처럼 기억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과정은 너무나도 길고 아팠다.최면 당한 이후로 종종 나타나는 신경성 통증보다는 마음속 고통이 훨씬 더 컸다.그녀가 양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모습, 평생 그녀를 지켜주던 소년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수단으로 괴롭힘당하는 모습, 결국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이 영화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그녀가 유하령에게 짓밟히는 모습도 보였다. 수도 없는 모욕을 당하며 찜통 같은 물탱크에 갇히고, 영하 20℃ 이하의 혹한에 밖으로 내쫓기는 날들이 이어졌다. 젖은 옷이 살갗에 얼어붙어 떼려고 하면 피부가 뜯겨 나갔다.광기 어린 유민준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낮이면 유하령을 도와 그녀를 유린하고 밤이면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며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다.그녀는 또다른 자신의 모습도 보았다. 마치 관음증 환자처럼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유강후를 훔쳐보고 노트북에 그의 이름을 가득 쓰고,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유씨 저택의 대나무 숲에 파묻는 모습이었다.너무 춥고 고통스러운 그 기나긴 나날을 그녀는 하수구의 쥐처럼 연명하며 살았다.그러던 어느 날, 유강후가 그녀를 품에 안고 다독이며 아프면 울고 싫으면 거절하고 괴롭히는 자에게는 백배 천배로 갚아주라고 말했다.하지만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이 없었고, 유강후는 그녀를 지극히 사랑하는 듯했지만 나은별과 애매한 관계를 유지했다.그녀가 임신했다가 유산하는 모습, 나은별과 바꾸기 위해 끌려가는 장면도
그녀가 자리에 앉기 바쁘게 한국계 여성 손님 세 명이 들어왔다. 구석진 창가에 앉은 온다연을 발견하지 못한 세 사람은 거침없이 뒷담화를 하기 시작했다.“이상하네. 유강후의 친부가 오지 않았어. 강 대표님이 이혼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장인어른 생신날에 사위가 왜 오지 않았을까? 이건 좀 말이 안 되는데.”“내가 국내에서 생활한 기간이 길어서 그에 관해 들은 바가 있어.”“어떻게 된 건지 어서 말해봐.”“유강후의 부친은 H국에서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쥔 고위급 정계 인사이고 유강후의 친형도 정계에 몸담고 있었는데, 3년 전 알 수 없는 이유로 외진 지역으로 발령 났고, 직급이 말단에서 다시 시작한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낮아졌대.”“그리고 그 형에게 딸이 한 명 있는데,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한쪽 다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 갇혀서 지금까지도 출소하지 못하고 있대.”“어떻게 그런 일이... 아버지가 그렇게 큰 권력을 가졌는데, 왜 아들과 손녀를 구하지 않지?”“그건 모르는 소리야. 듣기로는, 유강후가 친형과의 갈등 때문에 뒤에서 훼방을 놓았고, 아주 큰 힘을 들여서 부친의 권력으로도 어찌 할 수 없게 만들었대.”“쯧쯧, 진짜 잔인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뒤에서 유강후를 ‘살아있는 저승사자’라고 부르나 봐. 자기 친형도 봐주지 않을 정도이니.”“또 하나 있어. 유강후는 경원시에 있을 때 약혼녀가 있었어. 나은별이라고, 나씨 가문의 따님이었지. 그때 사람들은 둘이 반드시 결혼할 거라 생각했는데 유강후가 모두의 예상을 깨버렸어. 집에 얹혀살던 여자에게 홀딱 빠져 나은별과 파혼하고 두 가문의 협력 관계마저 무너뜨려 버렸어.”“그 얘기는 나도 들었어. 그 여자는 그 집 양딸이었고 유강후를 아저씨라고 불렀다는데, 어떻게 두 사람이 그런 사이가 됐는지 몰라.”“어머, 대박 사건! 자세히 말해봐...”그들은 최대한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지만 공간이 작다 보니 한 글자도 빠짐없이 온다연의 귀에 들어왔다.그녀는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고,
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그 시각 유강후는 로운의 보고 사항을 듣고 있어 그녀를 쫓아가지 못했다.차에 올라서야 온다연의 분노를 알아챈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왜 그래요? 요즘 따라 이상하게 화를 자주 내네요?”온다연은 지난 며칠 동안 감정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 툭하면 화가 났고 그럴 때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다.아니나 다를까 이때도 온다연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나중에 우리의 아이한테도 이렇게 대한다면 정말 화날 것 같아요.”유강후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그녀를 안아 올려 무릎에 앉히고선 나지막하게 말했다.“딸이라면 애지중지 키우는 게 맞지만, 아들이라면 우림처럼 키울 거예요.”온다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러는 이유를 이해하지만 기분이 썩 풀리지는 않았다.마음속에 남은 찝찝함 때문에 그녀는 유강후에게서 내려와 차 문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그러자 유강후가 속삭였다.“생각해 봐요. 우리의 아이는 강씨 가문과 진씨 가문을 책임져야 해요. 어쩌면 유씨 가문까지 물려받을 텐데 현실적으로 밝게 자라는 건 불가능해요. 부모로서 보통 아이처럼 행복하게 자라길 누구보다 바라지만 이런 가문에서 태어나는 순간 사명감을 가져야 해요. 어려서부터 부족할 것 없이 자랐다면 당연히 그에 맞는 대가를 치러야죠.”온다연은 괴로웠다.하지만 유강후의 말은 모두 일리가 있었고 그 역시 똑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봐 걱정되었다.온다연은 나지막이 물었다.“강후 씨도 이렇게 자란 거예요?”그는 무덤덤하게 답했다.“비슷했죠. 엄마랑 함께 있는 시간은 하루에 두 시간밖에 없었어요. 때로는 반년 동안 얼굴을 못 볼 때도 많았어요. 열 살 이후에 특수학교를 다니면서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고 그때부터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어요. 그런 생활도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진 거죠.”마음이 괴로웠던 온다연은 그의 손을 잡았다.“미안해요. 화를 내면 안 됐던 건데...”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무
실제로 온다연이 서 있는 곳은 에어컨 통풍구 바로 맞은편이었다.온다연이 몸을 돌리는 순간 그 연예인은 갑자기 선글라스를 벗더니 이곳을 멀리서 바라봤다.유강후는 싸늘한 시선으로 출구를 바라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시끄러우니까 커튼 닫아.”곧 커튼이 닫히고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환호성도 밖으로 나가며 점점 사라졌다.환호성이 완전이 사라졌을 때, 이권이 뛰어 들어와서 우림의 비행기가 착륙했다고 말했다.그러자 유강후는 온다연의 손을 잡았다.“가요. 우림이가 도착한 것 같네요.”그들이 막 일어났을 때 강양호는 이미 문을 나섰다.“드디어 우리 손자가 왔네. 어찌나 보고 싶던지.”온다연은 나지막이 속삭였다.“할아버지는 아이를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할아버지는 누구보다 우리가 빨리 아이를 갖길 바랄 거예요. 그래서 우림이를 유독 더 아끼고 친손주처럼 생각하는 거죠.”출구는 바로 휴게실 밖에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보기만 해도 정예로운 일행이 나타났다.선두에 선 사람은 로운이었고 그는 우림의 손을 잡고 있었다.멀리서 유강후를 발견한 우림은 로운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달려왔다.유강후 앞에 오자마자 ‘아빠’라고 부르더니 강양호를 보고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할아버지.”강양호는 기쁨에 겨워 허리를 굽히더니 아이를 껴안으며 미소를 지었다.“우리 손자 왔어? 얼른 할아버지랑 집 가자. 할아버지가 우림이 주려고 선물을 잔뜩 준비했어.”우림은 유강후를 힐끗 쳐다보고선 곧바로 시선을 도려 옆에 있는 온다연에게 머물렀다.“엄마.”온다연은 아이의 얼굴을 꼬집으며 말했다.“얼른 내려와. 할아버지 이제 연세 있으셔서 오래 못 안아.”우림은 온다연을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엄마라고 불렀고 아무리 바로잡고 고치려도 해도 바뀌지 않았다.마치 어려서부터 온다연에게 의존감이 있는 듯 강향호의 품에서 바로 내려와 온다연을 향해 팔을 뻗었다.“엄마. 안아줘요.”온다연이 안아주자 우림은 그녀의
물론 온다연도 예쁜 편이지만 이 세상에는 예쁜 여자가 너무나 많다. 게다가 유강후의 외모, 재산, 권력으로 봤을 때 그가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있다.솔직히 말해서 온다연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 않은가?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유는 없어요. 그냥 유나 씨면 돼요.”역시나 아무도 온다연을 대체할 수 없었다.운명의 실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엮여 있었고 그들은 평생 얽히게 될 운명이었다.두 사람은 말을 멈추고 조용히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한참 후에야 온다연이 입을 열었다.“H국에는 언제쯤 갈 거예요?”“날씨가 좀 시원해지면 갈까요? 경원은 여름보다 가을이 더 예뻐요.”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원을 그리며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혜린의 아이가 너무 귀여워요. 안고 있으면 폭신하고 볼살도 가득해서...”그녀는 어제 아이를 더 오래 껴안지 못한 게 아쉬운 듯 유강후의 아랫배를 쓰다듬더니 낮은 목소리로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우리도 아이가 있으면 좋을텐데...”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생길 거예요.”유강후는 그 꿈을 기억했고 곧 아이가 돌아올 거라는 예감이 생겼다.이때 온다연이 말했다.“꿈에 종종 아이가 나타나는데 왜 자기를 버렸냐며 저한테 물어봐요. 꿈이라서 얼굴조차 선명하게 보지 못하니까 마음이 너무 괴로웠어요.”“그런데 최근에는 꿈속에서 아이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어요. 남자 아이였는데 강후 씨랑 많이 닮았어요.”“예전에 우리에게 아이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예요.”유강후의 눈에는 고통이 스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다연의 손을 꽉 감쌌다.이곳은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서 공항 입구에 도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람들이 입구에 모여들어 좁은 통로를 막고 있었다.유강후는 표정이 일그러졌다.“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곧 기사가 돌아왔다.“대표님, 잠시 후 연예인 한 명이 도착한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그
다음 날 새벽, 유강후는 공항으로 떠나려고 했다.인기척을 느낀 온다연은 잠결에 옷을 움켜쥐며 말했다.“왜 안 깨웠어요?”유강후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너무 깊이 잠든 것 같아서 안 깨웠어요. 혼자 가도 되니까 더 자요.”확실히 지난 이틀 동안 잠이 늘었다. 어제 저녁에는 야식도 먹지 않고 집에 오자마자 잠들었다.유강후는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온 온다연을 보며 며칠간 너무 무리했다는 생각에 어젯밤에는 그녀를 껴안고 있을 뿐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공항이랑 가까워요.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이미 집에 돌아왔을걸요?”온다연은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왔다.“십 분만 기다려요.”그녀는 캐주얼한 옷을 갈아입고선 가볍게 화장을 한 후 10분 만에 준비를 마쳤다.밖으로 나가보니 강양호가 이미 차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우림이는 아직 애잖아요. 할아버지가 직접 마중 가실 필요는 없어요.”강양호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말투가 그게 뭐니? 내가 우리 증손자 데리러 가겠다는 데 불만 있어?”“그게 아니라 아직 6시밖에 안 된 이른 시간이잖아요. 그냥 편히 집에서 쉬세요. 이번에는 우림이도 오래 있다가 갈 거니까 충분히 같이 있을 수 있어요.”강양호는 심기가 불편했다.“우리 집안 독자인데 당연히 직접 마중가야지. 너희가 아이를 여러 명 낳았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하겠니?”유강후는 인내심 있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지금 적극적으로 임신 준비 중이잖아요.”강양호는 그를 힐끗 쳐다봤다.“생일에 내 친구들도 많이 올 거다. 다들 자식과 손주가 있고 증손자까지 여러 명이란다. 나만 우림이 하나잖니.”“내 체면은 우림이가 받쳐주는 거야. 넌 믿을 구석이 없구나.”바보가 아닌 이상 그 말속에 숨긴 뜻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온다연은 단번에 강양호가 아이를 낳으라고 재촉하는 걸 알 수 있었다.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서둘러 뒤에 있는 차로 걸어갔다.차량 행렬이 빠르게 저택을 빠
얼마 후 온다연이 입을 열었다.“강후 씨, 이 팔찌를 엄청 좋아하네요?”온다연은 이 팔찌에 달린 호박석이 그녀가 잃어버렸던 것과 똑같다는 걸 이상하게 생각했다.처음에는 유강후가 팔찌에 달린 호박석 가져갔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그가 다시 구슬을 꿰어주고 나서야 이 호박석은 처음부터 두 조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온다연은 나지막이 물었다.“우리 커플템이었어요? 똑같아서 예전부터 물어보고 싶었어요.”유강후의 눈에는 깊은 고통이 스치고 지나갔다.“우리한테도 아이가 있었다면...”온다연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아이가 있었다고요?”유강후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손에 있는 작은 구슬을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를 좋아해요?”“당연하죠. 살이 통통하게 오른 귀여운 아이를 볼 때마다 깨물고 싶은 충동을 느껴요.”유강후는 다시 자신의 어깨에 기대라며 손짓하고선 조용히 말했다.“곧 어르신 생신이잖아요. 내일 우림이가 온다는데 같이 마중 나갈래요?”온다연이 답했다.“좋아요.”온다연은 그 아이에게 설명할 수 없는 친근함을 느꼈다. 아이를 보자마자 온다연은 그녀와 아이 사이에 끊을 수 없다는 관계가 있다는 걸 느꼈다.처음에는 유강후의 친아들인 줄 알고 기쁘면서도 괴로웠으나 나중에 단지 절친에게 부탁받은 고아라는 걸 알고선 몹시 아쉽고 슬펐다.그녀는 착하고 어린아이에게 부모가 없다는 사실이 참 안타까웠다.이를 생각하던 온다연은 한숨을 내쉬었다.“보고 싶네요. 양씨 가문에 간 지도 꽤 됐고 로운 씨가 제사까지 지내게 했으니 자기가 강후 씨의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똑똑한데 모를 리가 없잖아요.”유강후가 답했다.“보통 아이와 달리 우림이는 IQ가 180을 넘어요.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해도 아직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니 깊이 생각할 수는 없을 거예요.”온다연은 멍을 때리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나중에 양씨 가문으로 돌아갈까요?”유강후는 단호했다.“당연하죠. 전 우림이가 소유해야 할 모든 것을 되찾도록
생리가 끝난 지 이틀밖에 안 됐으니 임신일 리가 없다.유강후도 무슨 생각이 났는지 실망하는 듯한 눈빛을 드러냈다.잠시 후 임혜린이 아이와 함께 나왔는데 금방 씻어서인지 아이 특유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임동현은 밝은 노란색 잠옷으로 갈아입었는데 유난히 더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게다가 조금 졸린 상태였기에 손을 내밀어 도우미 이모가 건넨 젖병을 받아 들고는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보면 볼수록 아이가 너무 귀여웠던 온다연은 참지 못하고 어린 녀석을 품에 안고선 젖병을 잡아주었다.아이는 젖병을 빨며 동그랗고 커다란 눈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치명적인 귀여움이었다.온다연은 고개를 숙여 아이의 이마에 뽀뽀하며 부드럽게 물었다.“졸려?”아무리 똑똑한들 결국에는 두 살 남짓의 아이였기에 그는 온다연을 잠시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엄마’라고 불렀다.온다연은 순간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에 흠칫했다.문득 그녀에게도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온다연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유강후를 바라봤다. 그도 온다연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빛에는 슬픔과 고통이 담겨있었다.온다연은 입을 벙끗했지만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러자 아이가 그녀의 얼굴을 만지며 부드럽게 말했다.“엄마...”임혜린은 아이가 정말 잠들려고 하자 서둘러 그를 데려갔다.“졸리면 아무한테나 엄마라고 한다니까? 하여튼 나쁜 버릇이 들었어.”온다연은 아이를 선뜻 건네지 않았다.“잠깐 안고있어도 돼?”갑자기 뭔가 떠오른 임혜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유강후를 힐끗 쳐다봤다.평소 차갑기만 하던 유강후는 제자리에 서서 꼼짝하지 않고 온다연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눈빛은 매우 복잡했다. 애정과 사랑이 가득 담겼지만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워 울부짖는 것 같았다.임혜린은 순간 그가 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절제절레 흔들며 침실로 돌아갔다.유강후는 그렇게 한참 동안 온다연을 바라봤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