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이 대답할 새도 없이, 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아 홱 끌어당기며 그녀를 품 안에 가뒀다.온다연이 들고 있던 찻잔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유강후는 조각난 잔을 한 번 흘겨보더니 그녀의 신발에 묻은 피를 발견했다.그리고 몸을 숙여 그녀의 신발을 벗겨내어 한쪽으로 던지곤, 그녀를 번쩍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그는 낮고 깊은 목소리로 물었다.“다연아, 앞으로도 이런 일을 겪을 수 있어. 무섭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가슴에 기대어 부드럽게 대답했다.“무섭죠.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강후 씨, 당신은 이제 혼자가 아니에요. 당신에겐 내가 있고, 우림이가 있어요. 우리가 영원히 당신과 함께할 거예요.”유강후의 마음속은 거센 물결처럼 흔들렸고, 그의 눈동자 속 감정은 서서히 넘쳐흘렀다.“다연아, 너 영원하다는 말이 뭔지 알아?”온다연은 조용히 말했다.“알아요. 이생 동안 당신 곁을 지키는 거요.”유강후는 더욱 진지하게 말했다.“그럼 맹세해. 어떤 일이 있어도, 정말 어떤 일이 있어도 날 떠나지 않겠다고.”온다연은 그를 힘껏 안으며 대답했다.“맹세할게요.”유강후는 낮고 강렬한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씩 말했다.“오늘 네가 한 말을 꼭 기억해. 어떤 일이 있어도 날 떠나지 않겠다고.”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이제 차를 마실 수 있겠어요?”유강후는 찻잔을 받아 단숨에 비웠다.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강렬하게 덮쳤다.차의 은은한 향기가 입술과 입술 사이를 스쳐갔다. 키스는 여전히 강압적이고 거칠었지만, 온다연은 이번만큼은 그의 키스에 욕망이 아닌 다른 감정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그녀는 천천히 그에게 응답했다.그 키스는 사실 완벽하지 않았다. 공기 중엔 여전히 피 냄새가 가득했고, 그녀는 방금 전까지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그럼에도 그녀는 이것이 유강후와 나눈 키스 중 가장 특별하다고 느꼈다.그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모든 것이 변할 거라
온다연은 그 메시지를 수업 중에 받았다.그녀는 메시지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수업이 끝나고 모두가 강의실을 떠난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잠시 생각한 뒤, 그녀는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대체 누구세요?]처음엔 이 번호가 장난이라고 생각했다.유하령이나 나은별 같은 사람이 일부러 그녀를 불쾌하게 하려고 꾸민 일이라고 여겼다.하지만 최근 들어 이 번호에서 보내오는 메시지 빈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비록 온준용이 이미 죽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며칠 전 묘지에서 본 그 뒷모습이 떠오르자 마음 한구석에 의심이 피어났다.짐을 챙겨 강의실을 나서려던 순간, 휴대폰에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메시지를 열어보니 사진 한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사진 속에는 13~14세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책상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얼굴 옆모습이 청순하고 색이 바랜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책상과 교복이 낡아 보여 주변 환경이 열악함을 짐작하게 했다.하지만 온다연의 시선은 사진 속 흐릿하게 처리된 어른의 모습에 멈췄다. 그 실루엣만으로도 그녀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온준용이었다.그녀는 숨을 삼켰다.그가 살아 있었다니!가족을 버리고 떠났던 그 남자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니!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착한 딸아, 이 아이가 네 동생 준휘란다.]순간, 과거의 끔찍한 기억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녀를 향한 온준용의 학대가 영화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녀의 손은 저절로 떨리기 시작했다.온다연은 거의 확신했다. 사진 속 소년의 상처는 온준용이 때린 자국이라는 것을.아들을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이렇게 착해 보이는 아이마저 폭행하다니.과거의 비참했던 기억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온다연의 마음속엔 깊은 혐오와 분노가 치밀었다.‘저런 인간이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지?’딸에게는 관심조차 없었고 본처를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첩과 아들을 낳아 놓고도 폭행을 일삼는 사람이라니.그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었다.그 순간, 또 다른 메시지
“반장, 나 이따가 또 수업 있어서 그러는데 교수님께 못 간다고 전해줘. 무슨 일이 있으면 내일 얘기해.”반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교수님께서 이번엔 졸업 논문과 관련된 중요한 일이라고 하셨어.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어쩔 수 없이 온다연은 교수 연구실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염지훈이 여유로운 자세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넥타이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손에서는 은색 라이터를 장난감처럼 돌리고 있었다.온다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정성스럽게 포장된 상자를 그녀 앞으로 밀었다.“이 집 케이크 맛있더라. 한번 먹어봐.”온다연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 케이크 먹으라고 날 부른 거예요?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아무 일도 없으면 저 수업 가야 해요.”염지훈은 느긋하게 그녀를 한 번 훑어보고 나지막이 말했다.“먹어봐. 네가 가던 케이크 가게 것보다 훨씬 맛있어. 가정식 전문점에서 만든 거야.”온다연은 마음이 복잡한 상태였다. 그가 또 별거 아닌 걸로 트집을 잡는 게 싫어 등을 돌리고 나가려 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그녀는 화면을 보고, 낯선 번호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직감적으로 누가 전화했는지 알아챘다.주저 없이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상대는 집요했다.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또 끊었다.두세 번 같은 일이 반복된 뒤, 염지훈이 그녀의 휴대폰을 낚아채더니 받아버렸다.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건 온다연이 너무나도 잘 아는 목소리였다.“착한 딸, 왜 아빠 전화를 안 받니? 아빠 보고 싶지 않아?”염지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의외라는 표정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온다연은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들고 눈으로 말을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뭘 바라는 거예요?”온준용은 웃으며 말했다.“그야 당연히 내 딸을 보고 싶어서지. 이렇게 오랜만인데, 아빠가 널 보고 싶지 않겠니?”온다연은 휴대폰을 꽉 쥐었는데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변했다.“보고 싶다고요? 엄마가 남긴 집이 값나가니 가져가고 싶
“다연이 아버지이신가요?”핸드폰 너머로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왔다.“유 대표?”염지훈은 차가웠다.“제가 누구인지가 중요한가요? 다연이 아버지가 맞냐고 물었습니다.”온준용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나일세.”염지훈이 계속 말을 이었다.“다연이를 만나고 싶은가요?”“난 다연이 아빠야. 딸을 만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지.”눈을 가늘게 뜬 염지훈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화양대 맞은편 카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한 시간 내에 도착하지 않으면 없던 일로 하죠.”염지훈은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이를 본 온다연은 재빨리 핸드폰을 가로챘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그쪽이 뭔데 함부로 결정하냐고요. 그럴 자격 없잖아요.”염지훈은 손에 든 라이터를 돌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럼 유강후는 너 대신 결정해도 된다는 거야? 사사건건 간섭하고 통제하는데도 잘 버티고 있는걸 보면 꽤 마음에 드나 봐?”그의 얼굴엔 슬픈 기색이 언뜻 스쳐 지나갔으나 이내 곧 여유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얼마나 좋아해?”염지훈은 허리를 굽히더니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아니면... 아이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강후 옆에 있는 거야?”온다연은 그의 손을 탁 쳐서 떼어내고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화를 냈다.“뭐가 됐든 그쪽이 참견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예전에 지훈 씨를 이용했던 건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당연히 보상도 할 거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이렇게 함부로 손을 써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에요.”염지훈은 입가를 올리더니 태연하게 말했다.“눈을 부릅뜬 모습이 생각보다 귀엽네.”온다연은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지만 민망함에 되레 버럭했다.“미쳤어요?”화가 난 그녀의 모습에 염지훈도 멈칫했다.“됐어. 가자, 네 아빠 상대하러 가야지.”온다연이 답했다.“내 일에 끼어들지 마세요.”“저런 인간을 계속 아빠로 생각하는 거야?”온다연은 쉽사리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했다.“생각하든 말든 지훈 씨랑은 상관없는 일이
온다연은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어떻게 이름까지 알고 있는 거죠? 설마 나 뒷조사했어요?”염지훈은 여유롭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응.”온다연에 대해 뒷조사했고 이제는 그녀가 온준용의 딸이 아니라고 의심했다.그는 이미 부하들을 시켜 진수현의 딸이 요절한 진짜 이유를 조사하게 했다.현재까지 알려진 소식에 의하면 진수현의 딸이 숨진 건 사실이다. 게다가 진수현은 딸의 죽음을 직접 지켜보고 장례식까지 치렀다고 한다.하지만 염지훈은 이 결과를 믿지 않았다.이 세상에 똑같게 생긴 사람이 있다고 생각조차 않았다.그림을 입수했으니 이제는 어머니의 이름으로 신국에 찾아가 안심을 만날 계획을 세웠다.만약 온다연이 안심과 진수현의 딸인 게 밝혀진다면 정정당당하게 그녀를 약혼녀로 맞이할 수 있다.이를 생각한 염지훈은 손을 뻗어 온다연의 볼을 꼬집었다.“아빠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사람이야. 가자, 내가 처리해 줄게.”온다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어떻게 도와주려고요?”염지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숨이 끊길 정도로 때리면 되지.”염지훈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온준용 같은 사람은 죽어도 마땅했으니까.그러나 온다연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장난할 기분 아니에요. 좋은 인간이 아닌 건 사실이지만 때려죽이는 것보다 고생을 좀 시키고 싶네요.”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전 강후 씨에게 이 일을 알리고 싶지 않아요. 만약 지훈 씨가 정말로 절 도와주고 싶은 거면 비밀로 해주세요.”온다연은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초라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제야 빛을 보고 있는데 뭣 같은 온준용이 아빠라는 자격을 들먹이며 찾아왔다. 그녀는 유강후가 이런 사소한 일에 정신이 팔리는걸 원치 않았고 나아가 자신의 아들이 외할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는 게 싫었다.염지훈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유강후가 그렇게 신경 쓰여? 비밀을 지켜주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공짜가 아니라서...”온다연은 고민
카페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온준용이 나타났다.십 년 만에 만난 온준용은 많이 늙었고 옷차림도 예전에 비해 초라했다.그리고 여전히 그에게서는 역겨운 술 냄새가 났다.온준용은 온다연을 보자마자 그리웠다는 듯 애틋한 눈빛을 드러내며 안으려고 팔을 뻗었다. 그러나 온다연은 재빨리 옆으로 몸을 피했다.그러자 온준용은 뒤에 있던 남자아이를 끌어당기며 말했다.“준휘야, 인사해야지. 누나라고 부르면 돼.”그 아이는 수련한 외모에 비해 매우 야위었다. 입고 있는 교복도 많이 낡았고 손과 목 곳곳에 딱지가 앉은 상처가 남아있었다.“누나.”그는 눈치를 살피며 온다연을 누나라고 부르고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온다연은 그에게서 자신의 그림자를 본 듯 가슴이 미어졌다.동시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킬 수가 없었다.“설마 또 때렸어요?”온준용은 눈빛을 피하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아니야. 이제 손버릇 고쳤어.”온다연은 아이의 몸에 난 상처를 가리키며 물었다.“그럼 이건 뭐죠?”온준용은 변명을 늘어놓았다.“혼자 뛰어놀다가 다친 거야. 워낙 덤벙거리는 아이라서 하루 멀다 하게 다쳐서 들어와.”온다연은 지금껏 온준용은 죽은 사람으로 생각해 왔기에 그에게 일말의 기대조차 품지 않았다.하지만 상처투성이가 된 아이를 보니 온준용이 했던 파렴치한 일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온준용은 거의 매일 술에 찌들어 살았고 단지 아들을 못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엄마를 죽도록 때렸다. 화가 풀리지 않는 날에는 악마의 손길이 온다연에게 닿았고 모든 순간이 고통스러웠다.아들이 생기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지금의 상황을 보니 개 버릇 남 못 준다는 얘기가 맞다.온준용처럼 천성이 악한 사람은 지옥에 가는 것도 과분하다.온다연은 그를 감옥에 처넣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심호흡하며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어릴 때부터 저한테 관심이 없었잖아요.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도 연락 한 통 없던 사람이 갑자기 왜 저를 만나려고 하는 거죠? 원하는 게 뭐예요?”온준용은 재
온준휘는 실망과 혐오가 가득한 눈빛으로 문밖에 온준용을 바라봤다.그러고선 다시 고개를 돌려 말을 이었다.“저 인간한테는 아무런 희망이 없어요. 비록 내 아빠인 건 맞지만 저런 쓰레기는 진작에 죽어야 하는데...”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그녀는 눈앞의 이 남자아이가 이런 험한 말을 하는 게 너무 의외였다.그러나 내연녀가 임신한 채로 집안을 당당하게 돌아다닌 걸 생각하면 온준휘에게 호감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네 엄마는?”온준휘는 씁쓸함을 드러내며 나지막하게 답했다.“모르겠어요. 아마 죽었겠죠? 몇 년 전에 저 인간이 빚에 시달리면서 엄마를 다른 사람한테 팔았거든요.”“원래는 저도 같이 팔려 갈 운명이었는데 병 때문에 몸이 안 좋아서 사려는 사람이 없었어요. 덕분에 목숨을 건진 거죠.”온다연은 분노를 억제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짐승만도 못한 놈.’유부남과 바람피운 여자도 좋은 사람인 건 아니지만 온준용은 정말 인간 말종이다.내연녀는 벌을 받았다 쳐도 어떻게 친아들인 온준휘까지 괴롭힐 수 있냐는 말이다.도박 빚을 갚으려고 아들을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인간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온준휘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절대 한 푼도 주지 마세요. 얼마가 됐든 무조건 그 돈으로 도박해서 더 큰 빚을 지게 될 거예요.”그는 멈칫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우리 엄마가 누나 엄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대충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를 동생으로 생각해 달라거나 도와달라고 부탁할 마음은 없어요. 다만 엄마가 저지른 행동에 대해서는 언젠가 꼭 사과하고 싶었어요.”그 말을 끝으로 온준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온다연에게 허리 숙여 사과했다.예상치 못한 행동과 말에 온다연은 기분이 착잡했다.그녀의 시선은 온준휘의 손에 닿았다. 애써 옷으로 감춘 상처가 얼핏 보였고 가냘픈 손목은 여기저기 긁혀 말이 아니었다.온다연은 그의 손을 잡고 소매를 위로 쓸어올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팔뚝 전체에 보기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사람을 압도할 만큼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니 온준용도 본능적으로 꼬리를 낮췄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험한 말을 내뱉었다.“온다연, 이제 돈 좀 생겼다고 아빠는 안중에도 없는 거야? 너도 참 효녀다.”“아빠랑 동생은 힘들게 살고 있는 게 너는 어쩜 이렇게 뻔뻔하니?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온다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염지훈이 말을 가로챘다.“유강후가 지금 사람 보내서 널 찾고 있대. 이 일을 알리고 싶지 않으면 여기는 나한테 맡기고 넌 얼른 돌아가서 수업해.”온다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온준용을 힐끗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절대 한 푼도 주지마요. 그리고 이런 인간을 혼내주려고 손을 쓰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니까 대충 마무리만 부탁할게요.”염지훈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웃으며 말했다.“지금 걱정해 주는 거야? 내가 그런 것도 모르는 멍청한 사람으로 보여? 걱정하지 말고 얼른 수업하러 가.”온다연은 말을 덧붙였다.“저 아이는 건드리지 마세요.”염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답했다.“빨리 가. 곧 있으면 유강후가 찾아올 거야.”온다연은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아니나 다를까 온다연이 떠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유강후의 경호원이 땀에 젖은 얼굴로 그녀에게 달려왔다.“사모님, 왜 수업 들으러 안 가셨어요?”온다연은 손에 든 커피를 흔들며 답했다.“커피 사려고 잠깐 밖에 나왔어요. 왜요?”그제야 경호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대표님한테 연락 좀 해주세요. 한 시간 내내 연락이 안 돼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납치된 줄 알고 지금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그들이 말하고 있을 때 위로 헬기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들어보니 대형 헬기 한 대가 화양대 활주로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헬기 뒤쪽에는 강씨 가문의 금빛 배지가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났다.유강후가 온 게 틀림없다.온다연은 그제야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무리 터치해도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주머니에서 잘못 눌려 핸드폰이 완전
그 남자는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달랐다.이런 화려한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깨끗한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고 얼굴 또한 맑고 단정했다.눈빛은 밝으면서도 약간의 풋풋함이 스며 있었으며 눈가에 찍힌 작은 ‘눈물점’은 마치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자리해 묘한 감성을 풍겼다.놀랍게도 그의 모습은 온다연이 알고 있던 주한과 무려 7,8할이나 닮아 있었다.온다연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고 그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임정아는 온다연이 그를 바라보며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를 마음에 들어 한 줄 알고 미소를 띠며 말했다.“참, 역시 어린 여자애들은 다 이런 스타일 좋아하더라. 저 사람 최근 대세인 주혜성이랑 닮았잖아요. 저 사람 고르는 손님이 정말 많다니까요? 근데 다연 씨도 이런 스타일을 좋아할 줄은 몰랐어요!”그러더니 손짓하며 그를 불렀다.“야, 너, 이리 와봐!”그 남자는 주위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다가왔다.부드러운 조명이 그의 몸을 감싸며 마치 석양빛을 두른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그 모습은 온다연에게 과거 학교 끝난 오후, 교문 앞에서 손을 흔들던 주한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그는 항상 따뜻한 미소로 이렇게 말했다.“다연아, 오늘 저녁은 단팥죽 만들어 줄게.”금세 남자는 온다연 앞에 섰다.“안녕하세요. 저는 허한이라고 합니다.”‘주한? 허한?’온다연은 잠시 멍해지며 중얼거렸다.“한아...”허언도 잠시 멍해지더니 귀 끝이 빨개졌다.“한아라고 불러도 괜찮아요.”온다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예전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호텔에서 술을 팔던 일을 했었기에 이런 곳의 규칙은 잘 알고 있었다.“여기엔 무슨 술이 있어요?”허한은 테이블 위의 메뉴판을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원하는 거 아무거나 고르세요.”그러자 온다연은 몇 병을 대충 골랐고 임정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술을 마시겠다고요? 미쳤어요? 다연 씨 몸 생각은 안 해요?”하지만 온다연은 대답하지 않고 허한을 바라보며 멍한 눈빛으로 있었다.
“자, 내가 오늘 예쁘게 꾸며줄게요!”임정아는 온다연의 작은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몇 번 꼬집고는 감탄했다.“역시 유강후, 뭘 좀 알긴 아네요. 매일 이렇게 탱탱하고 물기 가득한 미모의 여자를 끌어안고 있으니 놓을 리가 없죠!”“흥, 저런 개 같은 남자들은 누리는 것만 좋아해요. 오늘은 우리도 누려보자고요! 그 인간 생각은 그만하고 내가 남자 모델 열 명 불러줄게요. 다들 잘생기고 말도 잘하고 심지어 복근도 빵빵한 애들로다가.”온다연은 피부가 워낙 좋고 얼굴형도 예뻐서 임정아가 간단히 손만 봐줬을 뿐인데도 이미 돋보였다.모든 준비가 끝나자 임정아는 그녀를 끌고 자신의 빨간 페라리로 향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한 클럽 앞에 멈춰 섰다.이곳의 단골인 듯 임정아가 들어서자마자 매니저는 나와 반겼다.곧 임정아는 장갑을 벗어 매니저에게 던지며 말했다.“내 동생 기분 풀러 왔어요. 새로 들어온 애들 있으면 순수하고 깨끗한 애들로 골라서 데려와요. 술은 필요 없고 음료로 대신해 줘요.”그러면서 온다연을 슬쩍 바라보며 덧붙였다.“내 동생은 술 못 마시거든요.”매니저는 온다연을 보고 눈빛을 반짝였다.“새로 계약한 모델분이신가요? 완전히 대세 얼굴인데요. 정아 씨 안목은 역시 최고입니다!”임정아는 온다연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며 경고하듯 말했다.“헛소리 하지 마요. 이 친구는 이런 업계 사람이 아니니까. 건드릴 생각도 하지 마요.”그러나 매니저는 여전히 온다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에이, 꼭 업계 사람이 아니어도 되잖아요. 제가 보너스 많이 챙겨드릴게요. 7대3, 어때요?”임정아는 그에게 침을 뱉는 시늉을 하며 단호히 말했다.“닥쳐요. 이 애는 술자리 나가는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망상은 여기서 끝내요. 계속 이러면 저 그냥 갈 거예요?”매니저는 그제야 아쉬운 듯 시선을 거두었다.그렇게 임정아는 온다연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가요. 내가 오늘 제대로 된 세상을 보여줄게요. 어떤 게 진짜 미의 향연인지 알게 될 거예요.”
그러고는 아쉬운 듯 말했다.“입술 위의 그 작은 점, 정말 아쉽네요. 사실 굉장히 매력적이었는데 뭔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느낌이었거든요. 이제 없어지니까 좀 어색해요!”“근데 말이에요...”임정아는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요즘 우리 사이에서 눈가 밑에 작은 눈물점 찍는 게 유행이거든요. 뭔가 절망에 빠진 것 같은 감성이 있는데 다연 씨처럼 이런 분위기를 가진 사람한테 딱 어울리는 것 같아요!”온다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그냥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나랑 안 어울려요.”임정아는 온다연의 얼굴을 억지로 돌려 정면을 바라보게 하며 말했다.“하려면 확실히 바꿔야죠. 게다가 이건 그냥 화장을 하는 정도예요. 약물 효과가 두세 달 정도밖에 안 가니까 시간이 지나면 점도 자연스럽게 흐려질 거예요.”온다연은 결국 묵묵히 동의했다.미용실에서 나온 뒤 온다연은 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어깨에 닿는 짧은 머리는 그녀를 더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로 만들어 딱 고등학생 같은 느낌을 줬다.그런데 새로 찍은 눈가의 작은 점이 얼굴 전체에 묘한 매력을 더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임정아는 감탄하며 고개를 저었다.“이렇게 좋은 조건을 가지고도 배우를 안 한다니 정말 안타깝네요. 이 얼굴을 사람들에게 안 보여준다는 건 완전 재능 낭비라니까요?!”“있잖아요, 배우 해볼 생각 없어요? 내가 보장하는데 지금의 주혜성보다 훨씬 더 뜰 거예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다연 씨 팬이 될걸요?”그러나 온다연은 살짝 지친 기색으로 말했다.“쉴 수 있는 곳 좀 찾아줄래요? 잠깐만이라도 자고 싶어요.”임정아는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요, 가요.”그날 온다연은 저녁이 될 때까지 푹 잠들었다.눈을 뜨자마자 임정아는 그녀를 드레스룸으로 끌고 갔다.온다연은 처음으로 연예인의 드레스룸을 보게 되었고 그 규모에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수백 평에 달하는 공간은 각종 명품 브랜드의 최신 시즌 의상들로 가득 차 있었고 화려한
유강후는 자신이 그녀를 더 많이 바라보다가 위험한 감정이 깊어질까 두려워 일부러 유씨 가문을 떠나 따로 거처를 마련했었다.심미진이 그래도 친이모였기에 온다연에게 큰 관심을 주진 못해도 가볍게 잔소리를 들을 정도는 될 거라 생각했다.그러나 유하령과 그 무리들이 그렇게 잔인할 줄은 유강후도 몰랐다.그는 자신이 정말로 큰 착각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끔찍할 만큼 잘못된 판단이었다.염지훈의 말 중 하나는 또 맞았다.온준용이 그녀의 친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일부러 깊게 파헤치지 않았다.온다연의 부모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그녀가 이 생에서 의지해야 할 사람은 원래부터 부모가 아니었다.그녀의 세상에는 오직 그만이 있어야 했다.유강후는 온다연이 두고 간 외투를 끌어안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마치 조각상처럼 미동도 없이 말이다.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 엄두를 내지 못했다....임정아는 온다연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가는 길에 별장 근처에 있는 미용실의 유리창을 통해 자신의 모습이 비친 것을 본 온다연이 걸음을 멈췄다.그녀는 한참 동안 유리창을 바라보더니 낮게 말했다.“정아 씨, 나 이 미용실에 들어가고 싶어요.”임정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참 신기하네요. 이런 상황에서도 미용을 하고 싶어 하다니.”그러면서 그녀의 부드럽고 매끄러운 뺨을 살짝 꼬집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얼굴이 이렇게 예쁘고 탱탱한데, 미용 스타들도 다 이길 것 같은데 굳이 뭐하러 가요?”하지만 온다연은 대꾸하지 않고 미용실 문을 밀고 들어갔다.그러고는 자신을 반기러 온 미용사에게 말했다.“작은 시술을 받고 싶어요.”뒤이어 온다연은 자신의 입술을 가리켰다.“여기에 작은 점이 있는데 없애주세요.”미용사는 그녀의 입술 위에 있는 바늘구멍만큼 작은 점을 살펴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이 점은 굉장히 작고 위치도 참 좋네요. 미모를 방해하기는커녕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어주는걸요. 없앨 필요가 없어요!”그때, 안으로 들
염지훈은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유씨 가문에서 지내온 세월 동안, 다연이는 매일같이 괴롭힘을 당하며 살아왔어요. 그게 다 당신 덕분이고요. 유강후 씨, 무슨 구세주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마요. 그때 다연이를 괴롭힌 사람들을 모두 제거했다고 한들, 당신이야말로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으니까!”그는 피 섞인 침을 뱉으며 냉소적으로 덧붙였다.“열세 살이던 해에, 심미진이 다연이를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 했던 걸 당신이 막았잖아요. 강제로 다연이를 남게 했었죠. 그런데 남게 한 다음엔 뭘 했죠? 방치하고 대놓고 유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해서 더 큰 괴롭힘을 받게 만들었잖아요!”“유강후 씨, 당신은 자격이 없어요!”그는 천천히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조롱이 섞인 눈빛으로 말했다.“그리고 사실 알고 있었잖아요. 온준용이 다연이의 친부가 아니라는 걸. 하지만 당신은 그걸 이용해서 다연이를 자기 곁에 가두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다연이가 그렇게 아름다운 건 다연이의 유전자가 특별하기 때문이겠죠. 다연이의 친부모를 찾아주면, 그 사람들이 다연이의 편에 서서 다연이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까 봐, 그래서 다연이가 당신의 통제에서 벗어날까 봐 두려웠던 거잖아요!”그러자 눈빛이 싸늘해지며 유강후가 말했다.“염지훈, 오늘 여기서 죽고 싶은 거야? 입 닥쳐!”하지만 염지훈은 비웃음을 터뜨렸다.“뭐예요, 내가 당신 약점 건드리니까 심장이 떨려요? 겁나요?”“유강후 씨, 정말 잘도 계획했네요. 하지만 그 아름다운 꿈은 곧 끝나게 될 겁니다.”“그리고 난 당신과 달라요. 나는 다연이를 데려가서 당신 곁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할 겁니다!”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단호히 말했다.“난 다연이를 존중해 줄 거예요. 자유를 줄 거고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응원할 거예요.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보며 새로운 삶을 탐험하도록 도와줄 겁니다. 당신처럼 병적으로 다연이를 가둬두는 짓은 하지 않고요.”그 순간, 차가운 무언가가 그의 머리에 닿았다.유강후는
경호원들은 두 사람이 마주 선 모습에서 싸움이 일어날 것을 직감했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문 앞에 서 있었다.유강후는 낮게 포효했다.“나가! 이건 우리 두 사람 일이야. 너희들은 끼어들지 마!”염지훈은 비웃으며 말했다.“의외로 남자답게 행동할 때도 있네요.”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손목시계를 풀어 바닥에 던지고 손목을 한 번 돌렸다.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않고 조금씩 풀어냈다.오랜만에 이런 싸움에 대한 충동을 느꼈다.오늘 이 방 안에서 유강후와 염지훈 중 한 사람은 반드시 쓰러질 것이었다.그리고 그 사람은 절대 유강후 자신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염지훈이 반응할 틈도 없이 유강후는 표범처럼 그에게 덤벼들었다.염지훈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강렬한 펀치를 한 대 맞고도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문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경호원들은 방 안에서 두 명의 권위 높은 남자가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며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아무도 싸움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한참 뒤, 유강후가 간신히 우위를 점했다.그는 입가의 피를 닦고 일어서며 염지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어이, 내가 이미 경고했지. 다연이는 네가 넘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다시 다연이한테 다가가기만 하면 내가 죽여버릴 거야!”염지훈은 피를 뱉어내며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오늘 겨우 이겼다고 승리한 줄 알아요? 웃기지 마요. 그쪽은 다연이 옆에 설 자격이 없으니까. 그쪽이 하는 사랑은 결국 다연이를 가두는 감옥을 만드는 것이었으니까.”“학교에 보내면서도 다연이가 금융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자 모든 금융 수업을 끊어버린 것. 다연이의 그림을 대가들이 감탄했을 때, 그 대가들의 전시 제안을 막아버린 것. 이런 것들은 다연이에게조차 숨긴 게 바로 그쪽이에요.”“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다연이의 날개를 꺾고 깃털을 뽑아버리며 그쪽 곁에만 묶어두려 한 거죠. 개인 소유물로 만들기 위해서.”“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은별과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고 나은별의 집안에 대
“짝!”다음 순간, 강렬한 뺨 소리가 울리며 온다연의 손바닥이 염지훈의 얼굴에 꽂혔다.거의 모든 힘을 쏟아 때린 탓에 염지훈의 머리가 옆으로 살짝 돌아갔다.입가에서는 피가 흘렀다.염지훈은 손으로 상처를 닦으며 혀를 차고 말했다.“꽤 달콤하네.”분노가 차오른 온다연은 펄쩍 날뛰며 욕설을 내뱉었다.“진짜 미쳤어요? 내가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요. 사람 말 못 알아들어요?”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로 화장실로 뛰어갔다.그러고는 입술이 닳도록 씻은 뒤에야 다시 나왔다.그러자 염지훈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단지 한 번 스친 것뿐인데 그렇게 날 싫어할 필요 있어?”온다연은 문을 가리키며 낮게 소리쳤다.“나가요!”염지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온다연, 그 사람은 네가 그렇게 할 가치가 없어.”“뒷말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알려주는 거야. 그 사람이 한 짓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고.”온다연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그건 나와 그 사람의 문제지 지훈 씨가 상관할 일 아니에요.”염지훈은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온다연은 다시 문을 가리키며 단호하게 외쳤다.“나가요. 보고 싶지 않으니까. 염지훈 씨,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유강후 씨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염지훈 씨를 좋아할 일은 없어요.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마찬가지로요.”순간 가슴이 조여오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염지훈의 눈빛은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내가 그렇게 한심해 보여?”온다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듯 말했다.“나가라니까요. 내 말 안 들려요?”“온다연!”갑자기 염지훈은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잡았다.“나랑 같이 가자. 내가 너를 이 도시에서 데리고 나갈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줄게. 유강후, 그놈 곁에...”끝내 그는 말을 멈췄다.온다연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어쨌든 그놈은 자격이 없어.”이번에 온다연은 그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그녀는 눈을 내리깔
그러다 임정아는 갑작스레 두려움에 사로잡혀 비명을 질렀다.“다연 씨!”그 순간, 온다연의 입에서 선혈이 쏟아졌고 얼굴은 유령처럼 새하얘졌다.임정아는 다급히 다가가며 말했다.“뭐가 이렇게 급해요! 그냥 가능성을 말한 거지 사실이라고 한 건 아니잖아요!”창백한 얼굴을 한 채 뒤이어 온다연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정아 씨, 함부로 말하지 마요. 내 아이는 살아 있어요. 그저 다른 사람에게 있을 뿐이지...”눈앞이 깜깜해져 휘청거리더니 온다연의 몸은 이내 균형을 잃고 쓰러질 듯 흔들렸다.“내가 데려올 거예요. 반드시...”이 말을 끝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임정아는 깜짝 놀라 외쳤다.“여기! 빨리 119 좀 불러줘요!”그러자 임정아의 매니저가 급히 들어와 온다연을 부축하며 바깥으로 옮겼다.이때, 옆에서 구경하던 여배우 한 명이 온다연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어머, 이 사람 내 그 싸구려 동생이 말하던 여자친구 아니야? 왜 쓰러졌지?”그러면서 바로 전화를 걸었다.“염지훈, 네가 찾아다니던 여자친구... 내가 어디 있는지 알아.”“정보비는 2억, 한 푼도 깎지 마!”...온다연은 눈을 떴을 때,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방은 깨끗하고 밝았으며 침대 머리맡에는 백합꽃이 꽂혀 있었다.창가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말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고 잘생긴 얼굴엔 약간의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온다연이 깨어난 것을 보자 그는 본래의 태도를 되찾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약간 헝클어진 앞머리가 그의 매력을 더 돋보이게 했다.“깼네?”염지훈은 다가와 뜨거운 물을 따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물 좀 마셔.”온다연은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지훈 씨가 왜 여기 있어요?”염지훈은 살짝 비웃는 듯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네 지도교수가 그러더라. 휴학했다면서. 잘 다니던 학교를 왜 갑자기 휴학한 거야? 혹시 유강후가 널 가둬뒀어?”유강후의 이름이 언급되자 온다연의
온다연은 체구가 작고 연약해 보여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반면 유강후는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에다 차가운 표정까지 더해지니 교통경찰은 두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상황을 믿게 되었다.교통경찰은 곧바로 말했다.“혹시 신분증 좀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유강후는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저희는 부부입니다. 지금 말다툼 중이니 제발 끼어들지 말아 주세요.”그러자 온다연은 바로 외쳤다.“아니에요! 저 이 사람 몰라요. 경찰관님, 저 도와주세요!”이 말을 끝내자마자 온다연은 힘껏 유강후의 손을 뿌리치고 바로 차에서 내려 몇 걸음 만에 계단으로 뛰어올랐다.유강후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경찰이 제지했다.“일단 검문에 협조해 주시죠!”이미 육교 위로 올라가고 있는 온다연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더니 유강후는 경찰을 매몰차게 밀치며 말했다.“비켜!”이 말에 경찰들도 얼굴빛이 바뀌며 강경하게 그를 붙잡았다.“신분증을 보여주시지 않으면 경찰서로 모셔야겠습니다!”이때 뒤따라온 경호원들이 황급히 차에서 내려와 경찰에게 신분증을 건넸다.“죄송합니다. 여기 신분증입니다!”경찰은 신분증을 꼼꼼히 확인한 후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되돌려주며 말했다.“다음부터는 주차나 정차를 신중히 하세요.”하지만 그사이 온다연은 이미 육교 중간에 서 있었다.유강후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따라가. 놓치지 말고!”그러나 이곳은 번화가였고 따라잡기란 쉽지 않았다.경호원이 뒤쫓아 갔을 때, 온다연은 이미 맞은편 쇼핑몰로 들어가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두 시간 후, 온다연은 시 외곽의 한 영상 제작소 대형 세트장에 나타났다.그녀의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은 임정아는 화가 나서 들고 있던 밀크티를 바닥에 던져버렸다.“그 사람, 인간도 아니에요!”“다연 씨 아들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다니... 다연 씨를 뭘로 본 거예요?”“전화했을 때부터 안 좋은 일이 생긴 줄 알았어요. 그래도 이건 너무 지나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