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권은 여전히 불안한 듯 말했다.“하지만 저는 김원도가 예전보다 더 미쳐버린 것 같아요. 이번에 심상치 않은 의도로 왔을 겁니다. 셋째 도련님, 다연 씨를 당분간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강씨 집안으로 피신시키는 것이 어떨까요?”유강후는 그 말을 가로막았다.“이권, 너도 이제 겁이 많아졌나? 나이가 들어서?”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내 아내와 자식이 숨을 이유는 없어.”이어 명령을 내렸다.“중산 가문과 마츠시타 가문에 연락해. 김원도와 이다가 무너지기만 하면, 강씨 가문이 동양국과 동아시아 시장은 모두 넘기겠다고 약속해. 해도 근처의 유전 개발 역시 협력하겠다고.”이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이미 김씨 가문과 유전 개발에 수천억 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는데요!”“뭐가 문제야.”유강후의 눈빛은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내 아내와 자식을 건드리겠다고? 그게 천황이라 해도 죽여버릴 거야. 어둠 속에서 장난질을 치다니, 죽고 싶은 모양이지.”“동양국의 몇몇 가문들, 이제 순위를 다시 정할 때가 왔어.”그때 전화가 울렸다. 확인하니, 발신자는 다름 아닌 김원도였다.그의 눈빛은 차갑게 변했다.“감히 나를 직접 찾아오다니, 정말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전화를 받자, 반대편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 대표, 오랜만이야!”상당히 유창하게 말했는데, 그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챌 수 없을 정도였다.유강후는 차갑게 대꾸했다.“무슨 바람이 불어서 H국까지 왔어?” 김원도가 비웃듯이 웃으며 말했다.“오랜만에 봐도 유 대표는 여전히 유머러스하군. 왜, 내가 H국에 오면 안 되지? 같은 동창이었으니, 오늘 밤 술이나 한잔하면서 옛 이야기를 나누자.”유강후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얼마나 좋은 술이냐에 달렸지. 난 술에 까다로워서 아무 술이나 마시지 않거든.”김원도는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유 대표, 설마 내가 술 한 병 살 돈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유강후는 경멸스럽게 말했다.“돈은 많을지
말을 마친 그는 다시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봐봐, 너는 그놈을 그렇게 사랑했는데, 유강후는 너를 쳐다보지도 않았어. 유강후 눈에 너는 개만도 못했지. 하지만 나는 널 그렇게 사랑했는데, 너는 죽으려고 했어!”“이 세상에서 널 사랑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나뿐이라고!”그는 책상으로 다가가 회색 항아리를 열고, 그 안의 재를 손가락에 조금 묻혀 차에 넣었다. 그리고 그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잔을 꽉 움켜쥔 그의 눈은 핏빛으로 가득했다.“유강후, 넌 항상 날 짓눌렀어. 학교에서도, 지금도. 언제나 잘난 척하며 날 깔보고, 꼭 한 번은 날 짓밟아야 직성이 풀리더군. 하지만 이번엔 다를 거야. 널 사랑하는 여자를 죽여서라도 하루코를 위해 복수하고, 네 강씨 집안을 철저히 짓밟아버리겠어!”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남자는 순식간에 평소의 표정을 되찾았다.“들어와.”문이 열리자, 이다 이치로와 임도현이 들어왔다.임도현은 경원시의 유명 연예 기획사 소속 매니저로, 최근 동양국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동양국 최대 재벌의 후계자 김원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인맥을 동원해 찾아온 것이다.임도현은 억지로 웃으며 몇 장의 사진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김원도 님, 안녕하십니까. 이 사진들은 유강후가 가장 신경 쓰는 여자들입니다. 이쪽은 유강후의 약혼녀 나은별입니다. 요즘 유강후가 어떤 여자를 집에 들인 후로 두 사람이 다툼이 잦아진 것 같긴 합니다만, 아직 얼마나 감정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그리고 이쪽이 갇혀 있는 여자입니다. 굉장히 아끼고 있어서 그 한옥 밖으로 잘 내보내지 않는다더군요. 하지만 이런 가문 출신들이 얼마나 진심일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잠깐의 흥미일 수도 있죠.”“마지막으로 이쪽은 유하령이라는 아이로, 유강후의 조카입니다. 유강후가 많이 아끼는 사람인데, 최근에 다리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 중입니다.”김원도는 사진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다가 나은별의 사진을 집어 들었다. 그의 표정은 서늘하고 냉혹했다.“이 여
그 남자는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나이는 오십을 넘은 듯했지만, 세련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딱 봐도 엘리트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온다연의 손목을 너무 강하게 잡고 있어, 무례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온다연은 살짝 찌푸리며 기본적인 예의를 유지한 채 말했다.“아마 사람을 착각하신 것 같네요. 저는 안씨가 아닙니다.”이상했다. 정 교장도 그녀에게 안 씨 성이냐고 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혹시 자신과 그 사람이 닮은 걸까?남자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급히 손을 놓으며 사과했다.“미안합니다. 고인의 후손을 만난 줄 알고 착각했네요.”그는 방금 모비크와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둘의 관계가 꽤 가까워 보였다.온다연은 더 문제 삼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괜찮습니다.”그때 모비크가 서툰 중국어로 그녀에게 말했다.“다연아, 이분은 내 친구 문명원이라고 해. 신국 국립대학의 교장이기도 해. 한 작품을 가져왔는데, 네가 흥미를 가질 것 같아.”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림 위에 덮여 있던 흰 천을 걷어냈다. 그 아래에는 시간이 느껴지는 오래된 유화 한 점이 드러났다. 사실적인 화풍의 그림이었다.그림 속 소녀는 검은 머리에 눈처럼 하얀 피부, 섬세한 이목구비를 지녔다.복고풍의 화려한 공주 드레스를 입고 끝없이 펼쳐진 붉은 장미밭에 서 있었으며, 두 팔에는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그녀의 붉은 입술과 눈부신 피부는 더욱 선명하게 대비되었다.온다연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첫 번째 이유는 그 화가의 실력 때문이었다. 그림은 고상하고 정교하며, 소녀의 피부 아래 보이는 미세한 모세혈관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이 정도의 작품이라면 분명 대가의 손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었다.두 번째 이유는 그림 속 소녀가 자신과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온다연은 무심코 중얼거렸다.“이거... 저인가요?”그러고 나서 스스로도 당황하며 말을 고쳤다.“아, 아니에요. 그럴
“다만, 그 사람도 자신을 그 안에 가둬버렸어요. 두 사람 모두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 셈이죠. 들리는 말로는, 그 사람도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새었다고 해요.”이 이야기를 들은 온다연은 왜인지 마음이 답답해졌다. 분명 소설 같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인데도, 왠지 모르게 울고 싶어졌다.그녀는 무심코 물었다.“이름이 뭐예요?”문명원이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안심이에요.”온다연은 다시 물었다.“그 사람은요? 안심 씨 남편인가요? 이름이 뭐예요?”문명원은 살짝 찡그리며 대답을 피했다.“더는 말하기 곤란해요. 다연 씨가 모비크의 제자이기도 하고, 안심 씨와 조금 닮았기에 이만큼 말한 거니 더는 묻지 마요.”온다연은 자신이 무례했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가라앉지 않아, 그녀는 안심이라는 이름을 휴대폰에 검색해 보았다.그러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그래서 다시 안심, 신국, 사원이라는 키워드를 입력해 검색해 보았다. 뜻밖에도 몇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비록 정보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 속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안심은 신국의 명문가인 안씨 가문의 막내딸이었다.안씨 가문이 몰락한 후, 신국의 최고 재벌인 진씨 가문에 의해 입양되었고, 이후 진씨 가문의 상속자와 결혼했다는 것이었다.안심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지만, 진씨 가문에 대한 정보는 풍부했다.진씨 가문은 동남아시아에서 유명한 초대형 재벌로, 겉으로는 매우 조용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상당히 넓은 것으로 나타났다.온다연은 한참 동안 정보를 읽다가 흥미를 잃고 휴대폰을 닫으려던 찰나, 갑자기 메시지 한 통이 툭 튀어나왔다.[내 사랑하는 딸아, 내가 누군지 알겠니?]온다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순간적으로 온몸의 혈액이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급히 메시지의 발신 번호를 확인했지만, 그저 알 수 없는 IP 주소일 뿐이었다.진짜 발신 정보는 감춰져 있
길을 가는 내내 온다연은 여러 번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매번 뒤를 돌아보아도, 가끔 지나치는 행인들 외에는 수상한 곳이 없었다.장화연 역시 그녀가 종종 뒤를 보는 것을 눈치챘다.“사모님,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온다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알 수 없는 그 메시지를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너무 과민한 것은 아닌지 싶었다. 그래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누군가 우리를 따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장화연이 말했다. “사실 우리를 따라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온다연은 몸을 딱 굳혔다. “누구요?”장화연은 뒤쪽 가까이에 있는 평복 차림의 경호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셋째 도련님께서 안심하지 못해 이 길에만 여러 명의 경호원을 배치했습니다. 지금 그들을 알아차렸다면, 그들의 업무가 잘 수행된 것입니다.”경호원들일까?온다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가슴 속에 쌓인 의혹과 불안감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이 좁은 골목은 고작 십 분이면 걸어서 지나갈 수 있는 길이었지만, 온다연은 오늘 저녁 이 길이 조금은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녀와 유강후는 이미 혼인신고를 마쳤고, 이제 그녀는 그의 정식 아내였다. 그녀는 유강후의 가문을 진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당연히 장화연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백과사전을 뒤지는 것보다 훨씬 더 믿을 만했다.그녀는 장화연의 팔을 친근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집사님, 강씨 집안에 대해, 강후 씨의 외할아버지에 대해 좀 말씀해 주세요.”장화연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이제야 알고 싶으십니까?”온다연은 그녀의 팔을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말했다. “전에는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특별히 묻고 싶지 않았죠.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우리는 이제 부부니까요.”장화연이 말했다. “강씨 집안은 아주 큰 가문입니다. 전체 가족의 역사가 백 년이 넘고, 북미에서 매우 유명하면서도 극도로 조용한 집안입니다. 며칠 후 셋째 도련님이 사모님을 데리고
장화연이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말을 했지만, 온다연은 들을수록 더욱 침묵에 빠졌다.그녀는 그저 고아였다. 솔직히 말해서, 유강후와 결혼하고 아이까지 있지만, 신분과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에서 그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유강후는 그녀를 귀여워했고 이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모든 강씨 집안 식구들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그녀는 자신의 출신과 가문 때문에 그들의 아들 우림이가 강씨 집안 사람들에게 무시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욱이 영원히 유강후의 뒤에 숨어 보호를 받기를 원치도 않았다.그녀와 유강후 사이의 길은 정말 길고도 험난했다. 하지만 그들은 굳건히 걸어갈 것이다!한옥에 돌아와서야 장화연은 자신이 너무 많은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온다연은 계속해서 침묵하고 있었다.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온다연은 이미 아기방으로 갔다. 몇 달 된 아기는 사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잠을 자며 보낸다. 지금도 역시 자고 있었다.온다연은 아이를 안고 잠시 누워있다가 일어나 조금 먹었다. 그리고 가져온 모든 책들을 서재로 옮겼다.그녀는 유강후 몰래 두 개의 외국어 과목을 새로 선택했는데, 지금은 막 입문 단계라 꽤 어려웠다.다행히 요즘은 온라인에 원어민 1:1 지도가 있어서 네이티브 화자를 통해 발음도 교정받을 수 있었다.외국어를 배우고 나서는 복습과 미리 선택한 다른 과목들을 공부했다.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온다연은 결국 책상 위에 엎드려 잠들었다.유강후가 들어서자마자 서재의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그는 양복 재킷을 벗으며 물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장화연은 그의 옷을 받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오늘 제가 실수했습니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했고, 사모님이 다소 기분이 좋지 않아 지금까지 공부하고 있습니다.”유강후가 손을 멈추며 물었다. “무슨 말을?”장화연이 대답했다. “사모님이 강씨 집안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고, 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사모님께서 아무 말씀이 없는 걸로 보아,
유강후는 부드럽게 온다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 보고 싶었어?”온다연은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아니거든요? 우림이가 보고 싶어 해서 물어본 거예요.”유강후는 애교부리는 온다연이 너무 사랑스러웠다.섬세하고 부드러운 모습은 그의 본능을 불러일으켰다.유강후는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 허리를 감싼 채 키스를 퍼부었다.몸에 밴 술 냄새가 싫었던 온다연은 있는 힘껏 유강후를 밀어냈다.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유강후가 아니다.그는 온다연이 입술을 깨물고서야 손을 놓았고 온다연은 숨을 헐떡이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술 마셨어요? 냄새나요.”유강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의 턱을 치켜들었다.“그래서 싫다는 거야?”사실 술은 몇 모금 마시지도 않았지만 상황이 그런지라 몸에서는 여전히 술 냄새가 났다.온다연은 그의 몸을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곧바로 표정을 잔뜩 일그러졌다.왜냐하면 술 냄새 외에 은은한 향수 냄새도 느껴졌다.“향수 냄새가 나는데... 아저씨, 나 지금 기분 나빠졌어요.”그 말을 끝으로 온다연은 등을 돌렸다.여자가 있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는걸 알면서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가 없었다.유강후는 팔을 뻗더니 곧바로 그녀를 무릎 위에 앉혔다.“질투해?”온다연은 얼굴을 돌리며 그를 무시했다.그러자 유강후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한편으로는 질투하고 있는 온다연의 모습이 귀여운지 애정 어린 눈길로 한참이나 그녀를 관찰했다.“예전에는 왜 네가 이렇게 질투가 많은지 몰랐지?”저녁 파티는 한이준과 함께 참석했고 두 사람 모두 여자 파트너가 있었다.유강후는 이권이 준비한 새 비서를 동행했고 한이준은 갓 계약한 신인 아티스트를 데려왔다.물론 김원도도 파트너가 있었다.새 비서는 온다연과 닮은 외모로 단번에 김원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저녁 내내 예의주시하던 김원도는 그들이 호텔을 떠나자 곧바로 다른 차로 조용히 뒤를 밟았다.유강후는 차라리 잘됐다 싶어 일부러 그들은
온다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아저씨는 몰라요. 나 같은 사람이 아저씨의 곁에서 어떤 시선과 압박감을 견뎌야 하는지.”온다연은 멈칫하더니 조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아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열심히 노력할 거예요.”유강후는 그녀를 품에 안고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다연아, 부담감 느낄 필요 없어. 다른 사람의 시선과 의견에 흔들릴 필요도 없고. 넌 이제 강씨 가문의 사모님이야. 누가 너한테 사사건건 시비를 걸면 충분히 꺼지라고 말할 능력이 있다니까?”유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온다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샤워하러 가자.”온다연은 그의 품에서 발버둥 쳤다.“전 이미 씻었어요. 너무 졸려서 자고 싶어요.”하루 종일 공부한 것도 피곤한데 유강후를 기다리느라 밤을 새서 그런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기세였다.어쩔 수 없이 침실로 향한 유강후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은은한 조명을 켰다.그러고선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먼저자. 금방 올게.”유강후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온다연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정말 지치고 피곤했는지 침대맡에 놓인 핸드폰이 계속 깜박이는 것조차 발견하지 못했다.유강후는 핸드폰을 집어들고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입력했다.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건 99+ 빨간 아이콘이 떠오른 카톡이었다.유강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카톡을 확인했고 곧바로 표정이 굳어졌다.친구 요청이 40개가 넘었고, 그중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낯선 사람이 보낸 메시지도 많이 있었다.그는 대충 아무거나 하나 클릭했다.[안녕? 난 3학년이고 유화 동아리 회장 이승기야. 우리 동아리에 가입해 줘서 너무 고마워. 내일 오후 동아리에서 유화 전시회 활동이 있으니까 꼭 참석해 줘.]‘뭐야? 이 유치한 자식은.’유강후는 기분 나쁜 티를 넘기며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다연아, 안녕? 난 옆 반 구지성. 이번 주말에 반끼리 소개팅 있는 거 알아? 내 파트너가 되어줄래?]유강후는 카톡
그건 꿈이 아니었던 건가?그녀는 흐릿한 화면 속의 작은 점을 바라보며 가슴이 격하게 요동쳤고, 눈시울을 붉히며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화면을 보고 있었다.흥분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임수진이 안경테를 쓸어올리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엄밀히 말하면, 아직 배아 단계지만 심장은 이미 형성되었고 점차 손, 발과 기타 신체 기관들이 형성될 것입니다.”“오늘부터 2주마다 산전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제가 직접 검사를 진행할 것입니다. 검사를 받는 날짜가 아니어도 몸에 이상이 느껴지면 즉시 병원으로 오세요.”“그리고 임신 초기 3개월 동안 술과 부부관계를 금지해야 합니다.”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임신부가 허약한 체질인 데다 쌍둥이를 가졌으니 출산할 때까지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아요.”그녀는 온다연의 목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키스 흔적을 의식한 듯 유강후를 힐끗 보며 헛기침했다.“대표님, 작은 사모님이 정말 미인이셔서 참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절제하셔야 합니다. 초기 3개월이 특히 중요하니 절대 함부로 하시면 안 된다는 걸 명심하세요.”유강후가 나지막이 대답했다.“알겠습니다.”“박사님, 제 아내가 몸이 약하다고 하셨는데, 쌍둥이를 임신하면 혹시...”“아니요.”임수진이 단호하게 말했다.“사모님이 허약한 체질이긴 하지만 임신이나 출산이 불가능한 상태는 아닙니다. 영양 관리를 철저히 하고 적절한 운동을 견지한다면 쌍둥이 출산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말을 마친 임수진이 일어서며 말했다.“검사 결과에 이상이 없으니 귀가하셔도 됩니다.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임수진이 나간 후에도 온다연은 초음파 모니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모니터는 이미 바탕화면으로 바뀌었지만, 그 흐릿한 형상은 이미 그녀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유강후가 다가가 안으려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제 정신이 돌아온 듯 그의 옷깃을 잡고 마구 때리며 울부짖었다.
그녀의 단호한 모습을 보니 단순히 성질을 부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지금의 온다연은 예전의 온다연이 아니다. 유강후는 그녀가 정말 기억을 되찾으면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리라 예상했다.그렇다고 놓아줄 리 없는 유강후는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붙잡았다.“어딜 가려고?”온다연은 벗어나려 했지만 몸이 완전히 그의 품속에 갇혀 단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었다. 분노가 폭발한 그녀는 유강후를 향해 소리 질렀다.“유강후 씨, 당장 놓아요. 더 험한 말을 듣기 전에.”사실 그녀도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다. 단지 유강후가 있는 이곳을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괴롭고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마주하기 싫었으니까.그녀는 그저 조용한 곳에서 과거를 깨끗이 정리하고, 유강후와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할지 잘 생각해 보고 싶었다.하지만 유강후는 기회조차 주지 않고, 그녀를 들어 올려 침대에 앉혔다.“다연아, 좀 진정해. 정말 임신이야. 우리 아이가 생겼다고. 거짓말이 아니야.”온다연이 코웃음을 쳤다.“당신의 수단을 이길 수 없겠지만 나도 더 이상 예전의 온다연이 아니에요. 이전처럼 괴롭힐 생각은 하지 말라고요. 나를 괴롭히면 그게 누구든 아버지가 가만두지 않으실 거예요.”얼음장같이 차가운 그녀의 얼굴과 증오로 가득 찬 눈빛을 보고, 유강후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는 온다연이 언젠가는 모든 것을 기억해 낼 것임을 알았고, 그녀의 과격한 반응에 대처할 방법도 생각해 뒀다.하지만 온다연이 아이를 가진 시점에 이 일이 터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이는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일이고, 셀 수 없이 수많은 밤에 절에서 무릎 꿇고 신명께 빌었던 일이다. 그러니 이 두 아이에게 약간의 문제라도 생기는 것을 절대 허용할 수 없다.그는 억지로 그녀의 손을 잡고 이마에 키스하며 속삭였다.“다연아, 너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어. 누가 감히 너를 괴롭히겠어? 기억이 돌아왔다면 네가 나의 아내였다는 것도 알았겠네. 우리는 혼인신고도 했어. 그러니까 얘기 좀 하자. 내가 다 설명할 수
유강후의 과거 행각을 생각하면 용서라는 단어조차 입에 올리기 싫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죽었다고 알려진 지 3년 만에 유강후는 그녀를 다시 찾아냈다.게다가 이제 결혼 얘기가 오가는 단계까지 와버렸다.누군가의 농간인지, 하늘의 뜻인지 모르지만 이제 인연을 완전히 끊기는 어려울 것이다.하지만 과거의 상처가 그대로 있고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걸 지워버릴 수 있단 말인가?고통으로 생기를 잃은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마음속에 벌써 답이 있었지만 어떤 일도 그의 기쁜 심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다연아, 우리...”짝!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강후의 얼굴에 따귀가 날아왔다. 방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얼어붙었고 유강후도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기억이 돌아온 거야?”온다연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나가요!”이때 이권이 입을 열었다.“온다연 씨, 밤새 의식이 없으셔서 대표님께서 줄곧 곁을 지키셨습니다. 게다가 임신...”온다연이 이권을 노려보았다.“이권 씨도 공범이니 당장 여기서 나가세요.”이권도 멍해졌다. 그는 온다연이 무언가를 기억해 냈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지만,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유강후가 나지막이 물었다.“다연아, 뭔가 기억났어?”온다연은 눈을 감은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네, 다 생각났어요. 저를 버리고 나은별을 선택했잖아요. 그런데 왜 다시 찾아온 거예요?”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파서 침대보를 꽉 움켜쥐었다. 어찌나 세게 힘이 주었는지 손톱에 피가 돌지 않아 하얗게 변했다.그가 자신을 김원도에게 넘기던 장면이 떠오르자, 그녀는 무슨 이유가 있었든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나가요. 당신 얼굴을 보기 싫어요.”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면서 유강후는 심장이 쿡쿡 찌르듯 아
“부인이 지금 임신 3주차인데, 아직은 배아 상태라 약 1cm에 불과하고 상태가 좀 불안정합니다.”온다연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는 것이 꿈이었던 유강후는 너무 큰 기쁨에 심장이 마구 뛰고 정신이 혼미했다.이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온다연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최소 1~2년은 걸릴 것이라 예상했는데, 고작 3~4개월 만에 아이를 갖게 된 것이다.그런데 태아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지난번 온다연의 유산 사건이 기억에 생생한 유강후는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태아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건 무슨 뜻이죠?”임수진이 약간 당황하며 설명했다.“대표님,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흔히 발생하는 일입니다. 조금만 상태가 나빠져도 유산 징후가 나타날 수 있어요.”“별문제는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배아 발육 상태가 양호하고 태아 심음도 정상입니다.”“쌍둥이라고요?”유강후는 귀를 의심했다.그는 문득 곽혜진이 준 약이 생각났다. 자기도 쌍둥이였다는 사실과 겹치자, 다시 기분이 황홀해져 입가에 피어오르는 미소를 주체할 수 없었다.그는 임수진의 손목을 꽉 잡고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박사님, 그게 정말입니까?”임수진이 미간을 찌푸렸다.“대표님, 손을 좀 놓고 얘기해요.”유강후는 급히 손을 풀어주었다. 흥분해서 목소리까지 떨리기는 평생 처음이다.“죄송합니다, 박사님. 정말 쌍둥이예요?”임수진이 틀림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정말이죠. 제가 30년간 의사로 일하면서 몇 번 실수한 적은 있지만, 쌍둥이를 잘못 판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유강후는 너무 흥분해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는 애써 진정하고 한참 후에야 나지막이 말했다.“감사합니다, 박사님. 제 아내는 언제쯤 깨어날 수 있을까요?”임수진은 아직도 혼수 상태인 온다연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몸에 특별한 이상은 없어서 지금쯤 깨어나야 하는데...”“제 아내는 이전에 최면 당한 적이 있는데, 그로 인해 과거의 대부분 기
온다연은 얼굴이 창백했고, 몸이 물에서 막 건져낸 것처럼 식은땀에 젖어있었다.강씨 가문의 새 안주인임을 즉각 알아본 그들은 삽시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방금 그들이 한 뒷담화를 온다연이 다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온다연이 극심한 통증을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의사, 의사를 불러주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그녀는 길고 긴 꿈속으로 빠져들었다.경원시에 사는 동안 겪었던 고난들이 오래된 영화처럼 기억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과정은 너무나도 길고 아팠다.최면 당한 이후로 종종 나타나는 신경성 통증보다는 마음속 고통이 훨씬 더 컸다.그녀가 양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모습, 평생 그녀를 지켜주던 소년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수단으로 괴롭힘당하는 모습, 결국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이 영화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그녀가 유하령에게 짓밟히는 모습도 보였다. 수도 없는 모욕을 당하며 찜통 같은 물탱크에 갇히고, 영하 20℃ 이하의 혹한에 밖으로 내쫓기는 날들이 이어졌다. 젖은 옷이 살갗에 얼어붙어 떼려고 하면 피부가 뜯겨 나갔다.광기 어린 유민준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낮이면 유하령을 도와 그녀를 유린하고 밤이면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며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다.그녀는 또다른 자신의 모습도 보았다. 마치 관음증 환자처럼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유강후를 훔쳐보고 노트북에 그의 이름을 가득 쓰고,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유씨 저택의 대나무 숲에 파묻는 모습이었다.너무 춥고 고통스러운 그 기나긴 나날을 그녀는 하수구의 쥐처럼 연명하며 살았다.그러던 어느 날, 유강후가 그녀를 품에 안고 다독이며 아프면 울고 싫으면 거절하고 괴롭히는 자에게는 백배 천배로 갚아주라고 말했다.하지만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이 없었고, 유강후는 그녀를 지극히 사랑하는 듯했지만 나은별과 애매한 관계를 유지했다.그녀가 임신했다가 유산하는 모습, 나은별과 바꾸기 위해 끌려가는 장면도
그녀가 자리에 앉기 바쁘게 한국계 여성 손님 세 명이 들어왔다. 구석진 창가에 앉은 온다연을 발견하지 못한 세 사람은 거침없이 뒷담화를 하기 시작했다.“이상하네. 유강후의 친부가 오지 않았어. 강 대표님이 이혼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장인어른 생신날에 사위가 왜 오지 않았을까? 이건 좀 말이 안 되는데.”“내가 국내에서 생활한 기간이 길어서 그에 관해 들은 바가 있어.”“어떻게 된 건지 어서 말해봐.”“유강후의 부친은 H국에서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쥔 고위급 정계 인사이고 유강후의 친형도 정계에 몸담고 있었는데, 3년 전 알 수 없는 이유로 외진 지역으로 발령 났고, 직급이 말단에서 다시 시작한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낮아졌대.”“그리고 그 형에게 딸이 한 명 있는데,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한쪽 다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 갇혀서 지금까지도 출소하지 못하고 있대.”“어떻게 그런 일이... 아버지가 그렇게 큰 권력을 가졌는데, 왜 아들과 손녀를 구하지 않지?”“그건 모르는 소리야. 듣기로는, 유강후가 친형과의 갈등 때문에 뒤에서 훼방을 놓았고, 아주 큰 힘을 들여서 부친의 권력으로도 어찌 할 수 없게 만들었대.”“쯧쯧, 진짜 잔인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뒤에서 유강후를 ‘살아있는 저승사자’라고 부르나 봐. 자기 친형도 봐주지 않을 정도이니.”“또 하나 있어. 유강후는 경원시에 있을 때 약혼녀가 있었어. 나은별이라고, 나씨 가문의 따님이었지. 그때 사람들은 둘이 반드시 결혼할 거라 생각했는데 유강후가 모두의 예상을 깨버렸어. 집에 얹혀살던 여자에게 홀딱 빠져 나은별과 파혼하고 두 가문의 협력 관계마저 무너뜨려 버렸어.”“그 얘기는 나도 들었어. 그 여자는 그 집 양딸이었고 유강후를 아저씨라고 불렀다는데, 어떻게 두 사람이 그런 사이가 됐는지 몰라.”“어머, 대박 사건! 자세히 말해봐...”그들은 최대한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지만 공간이 작다 보니 한 글자도 빠짐없이 온다연의 귀에 들어왔다.그녀는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고,
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그 시각 유강후는 로운의 보고 사항을 듣고 있어 그녀를 쫓아가지 못했다.차에 올라서야 온다연의 분노를 알아챈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왜 그래요? 요즘 따라 이상하게 화를 자주 내네요?”온다연은 지난 며칠 동안 감정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 툭하면 화가 났고 그럴 때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다.아니나 다를까 이때도 온다연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나중에 우리의 아이한테도 이렇게 대한다면 정말 화날 것 같아요.”유강후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그녀를 안아 올려 무릎에 앉히고선 나지막하게 말했다.“딸이라면 애지중지 키우는 게 맞지만, 아들이라면 우림처럼 키울 거예요.”온다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러는 이유를 이해하지만 기분이 썩 풀리지는 않았다.마음속에 남은 찝찝함 때문에 그녀는 유강후에게서 내려와 차 문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그러자 유강후가 속삭였다.“생각해 봐요. 우리의 아이는 강씨 가문과 진씨 가문을 책임져야 해요. 어쩌면 유씨 가문까지 물려받을 텐데 현실적으로 밝게 자라는 건 불가능해요. 부모로서 보통 아이처럼 행복하게 자라길 누구보다 바라지만 이런 가문에서 태어나는 순간 사명감을 가져야 해요. 어려서부터 부족할 것 없이 자랐다면 당연히 그에 맞는 대가를 치러야죠.”온다연은 괴로웠다.하지만 유강후의 말은 모두 일리가 있었고 그 역시 똑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봐 걱정되었다.온다연은 나지막이 물었다.“강후 씨도 이렇게 자란 거예요?”그는 무덤덤하게 답했다.“비슷했죠. 엄마랑 함께 있는 시간은 하루에 두 시간밖에 없었어요. 때로는 반년 동안 얼굴을 못 볼 때도 많았어요. 열 살 이후에 특수학교를 다니면서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고 그때부터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어요. 그런 생활도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진 거죠.”마음이 괴로웠던 온다연은 그의 손을 잡았다.“미안해요. 화를 내면 안 됐던 건데...”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무
실제로 온다연이 서 있는 곳은 에어컨 통풍구 바로 맞은편이었다.온다연이 몸을 돌리는 순간 그 연예인은 갑자기 선글라스를 벗더니 이곳을 멀리서 바라봤다.유강후는 싸늘한 시선으로 출구를 바라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시끄러우니까 커튼 닫아.”곧 커튼이 닫히고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환호성도 밖으로 나가며 점점 사라졌다.환호성이 완전이 사라졌을 때, 이권이 뛰어 들어와서 우림의 비행기가 착륙했다고 말했다.그러자 유강후는 온다연의 손을 잡았다.“가요. 우림이가 도착한 것 같네요.”그들이 막 일어났을 때 강양호는 이미 문을 나섰다.“드디어 우리 손자가 왔네. 어찌나 보고 싶던지.”온다연은 나지막이 속삭였다.“할아버지는 아이를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할아버지는 누구보다 우리가 빨리 아이를 갖길 바랄 거예요. 그래서 우림이를 유독 더 아끼고 친손주처럼 생각하는 거죠.”출구는 바로 휴게실 밖에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보기만 해도 정예로운 일행이 나타났다.선두에 선 사람은 로운이었고 그는 우림의 손을 잡고 있었다.멀리서 유강후를 발견한 우림은 로운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달려왔다.유강후 앞에 오자마자 ‘아빠’라고 부르더니 강양호를 보고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할아버지.”강양호는 기쁨에 겨워 허리를 굽히더니 아이를 껴안으며 미소를 지었다.“우리 손자 왔어? 얼른 할아버지랑 집 가자. 할아버지가 우림이 주려고 선물을 잔뜩 준비했어.”우림은 유강후를 힐끗 쳐다보고선 곧바로 시선을 도려 옆에 있는 온다연에게 머물렀다.“엄마.”온다연은 아이의 얼굴을 꼬집으며 말했다.“얼른 내려와. 할아버지 이제 연세 있으셔서 오래 못 안아.”우림은 온다연을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엄마라고 불렀고 아무리 바로잡고 고치려도 해도 바뀌지 않았다.마치 어려서부터 온다연에게 의존감이 있는 듯 강향호의 품에서 바로 내려와 온다연을 향해 팔을 뻗었다.“엄마. 안아줘요.”온다연이 안아주자 우림은 그녀의
물론 온다연도 예쁜 편이지만 이 세상에는 예쁜 여자가 너무나 많다. 게다가 유강후의 외모, 재산, 권력으로 봤을 때 그가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있다.솔직히 말해서 온다연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 않은가?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유는 없어요. 그냥 유나 씨면 돼요.”역시나 아무도 온다연을 대체할 수 없었다.운명의 실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엮여 있었고 그들은 평생 얽히게 될 운명이었다.두 사람은 말을 멈추고 조용히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한참 후에야 온다연이 입을 열었다.“H국에는 언제쯤 갈 거예요?”“날씨가 좀 시원해지면 갈까요? 경원은 여름보다 가을이 더 예뻐요.”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원을 그리며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혜린의 아이가 너무 귀여워요. 안고 있으면 폭신하고 볼살도 가득해서...”그녀는 어제 아이를 더 오래 껴안지 못한 게 아쉬운 듯 유강후의 아랫배를 쓰다듬더니 낮은 목소리로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우리도 아이가 있으면 좋을텐데...”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생길 거예요.”유강후는 그 꿈을 기억했고 곧 아이가 돌아올 거라는 예감이 생겼다.이때 온다연이 말했다.“꿈에 종종 아이가 나타나는데 왜 자기를 버렸냐며 저한테 물어봐요. 꿈이라서 얼굴조차 선명하게 보지 못하니까 마음이 너무 괴로웠어요.”“그런데 최근에는 꿈속에서 아이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어요. 남자 아이였는데 강후 씨랑 많이 닮았어요.”“예전에 우리에게 아이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예요.”유강후의 눈에는 고통이 스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다연의 손을 꽉 감쌌다.이곳은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서 공항 입구에 도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람들이 입구에 모여들어 좁은 통로를 막고 있었다.유강후는 표정이 일그러졌다.“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곧 기사가 돌아왔다.“대표님, 잠시 후 연예인 한 명이 도착한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