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나이는 오십을 넘은 듯했지만, 세련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딱 봐도 엘리트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온다연의 손목을 너무 강하게 잡고 있어, 무례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온다연은 살짝 찌푸리며 기본적인 예의를 유지한 채 말했다.“아마 사람을 착각하신 것 같네요. 저는 안씨가 아닙니다.”이상했다. 정 교장도 그녀에게 안 씨 성이냐고 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혹시 자신과 그 사람이 닮은 걸까?남자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급히 손을 놓으며 사과했다.“미안합니다. 고인의 후손을 만난 줄 알고 착각했네요.”그는 방금 모비크와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둘의 관계가 꽤 가까워 보였다.온다연은 더 문제 삼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괜찮습니다.”그때 모비크가 서툰 중국어로 그녀에게 말했다.“다연아, 이분은 내 친구 문명원이라고 해. 신국 국립대학의 교장이기도 해. 한 작품을 가져왔는데, 네가 흥미를 가질 것 같아.”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림 위에 덮여 있던 흰 천을 걷어냈다. 그 아래에는 시간이 느껴지는 오래된 유화 한 점이 드러났다. 사실적인 화풍의 그림이었다.그림 속 소녀는 검은 머리에 눈처럼 하얀 피부, 섬세한 이목구비를 지녔다.복고풍의 화려한 공주 드레스를 입고 끝없이 펼쳐진 붉은 장미밭에 서 있었으며, 두 팔에는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그녀의 붉은 입술과 눈부신 피부는 더욱 선명하게 대비되었다.온다연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첫 번째 이유는 그 화가의 실력 때문이었다. 그림은 고상하고 정교하며, 소녀의 피부 아래 보이는 미세한 모세혈관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이 정도의 작품이라면 분명 대가의 손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었다.두 번째 이유는 그림 속 소녀가 자신과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온다연은 무심코 중얼거렸다.“이거... 저인가요?”그러고 나서 스스로도 당황하며 말을 고쳤다.“아, 아니에요. 그럴
“다만, 그 사람도 자신을 그 안에 가둬버렸어요. 두 사람 모두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 셈이죠. 들리는 말로는, 그 사람도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새었다고 해요.”이 이야기를 들은 온다연은 왜인지 마음이 답답해졌다. 분명 소설 같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인데도, 왠지 모르게 울고 싶어졌다.그녀는 무심코 물었다.“이름이 뭐예요?”문명원이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안심이에요.”온다연은 다시 물었다.“그 사람은요? 안심 씨 남편인가요? 이름이 뭐예요?”문명원은 살짝 찡그리며 대답을 피했다.“더는 말하기 곤란해요. 다연 씨가 모비크의 제자이기도 하고, 안심 씨와 조금 닮았기에 이만큼 말한 거니 더는 묻지 마요.”온다연은 자신이 무례했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가라앉지 않아, 그녀는 안심이라는 이름을 휴대폰에 검색해 보았다.그러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그래서 다시 안심, 신국, 사원이라는 키워드를 입력해 검색해 보았다. 뜻밖에도 몇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비록 정보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 속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안심은 신국의 명문가인 안씨 가문의 막내딸이었다.안씨 가문이 몰락한 후, 신국의 최고 재벌인 진씨 가문에 의해 입양되었고, 이후 진씨 가문의 상속자와 결혼했다는 것이었다.안심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지만, 진씨 가문에 대한 정보는 풍부했다.진씨 가문은 동남아시아에서 유명한 초대형 재벌로, 겉으로는 매우 조용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상당히 넓은 것으로 나타났다.온다연은 한참 동안 정보를 읽다가 흥미를 잃고 휴대폰을 닫으려던 찰나, 갑자기 메시지 한 통이 툭 튀어나왔다.[내 사랑하는 딸아, 내가 누군지 알겠니?]온다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순간적으로 온몸의 혈액이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급히 메시지의 발신 번호를 확인했지만, 그저 알 수 없는 IP 주소일 뿐이었다.진짜 발신 정보는 감춰져 있
길을 가는 내내 온다연은 여러 번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매번 뒤를 돌아보아도, 가끔 지나치는 행인들 외에는 수상한 곳이 없었다.장화연 역시 그녀가 종종 뒤를 보는 것을 눈치챘다.“사모님,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온다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알 수 없는 그 메시지를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너무 과민한 것은 아닌지 싶었다. 그래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누군가 우리를 따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장화연이 말했다. “사실 우리를 따라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온다연은 몸을 딱 굳혔다. “누구요?”장화연은 뒤쪽 가까이에 있는 평복 차림의 경호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셋째 도련님께서 안심하지 못해 이 길에만 여러 명의 경호원을 배치했습니다. 지금 그들을 알아차렸다면, 그들의 업무가 잘 수행된 것입니다.”경호원들일까?온다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가슴 속에 쌓인 의혹과 불안감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이 좁은 골목은 고작 십 분이면 걸어서 지나갈 수 있는 길이었지만, 온다연은 오늘 저녁 이 길이 조금은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녀와 유강후는 이미 혼인신고를 마쳤고, 이제 그녀는 그의 정식 아내였다. 그녀는 유강후의 가문을 진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당연히 장화연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백과사전을 뒤지는 것보다 훨씬 더 믿을 만했다.그녀는 장화연의 팔을 친근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집사님, 강씨 집안에 대해, 강후 씨의 외할아버지에 대해 좀 말씀해 주세요.”장화연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이제야 알고 싶으십니까?”온다연은 그녀의 팔을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말했다. “전에는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특별히 묻고 싶지 않았죠.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우리는 이제 부부니까요.”장화연이 말했다. “강씨 집안은 아주 큰 가문입니다. 전체 가족의 역사가 백 년이 넘고, 북미에서 매우 유명하면서도 극도로 조용한 집안입니다. 며칠 후 셋째 도련님이 사모님을 데리고
장화연이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말을 했지만, 온다연은 들을수록 더욱 침묵에 빠졌다.그녀는 그저 고아였다. 솔직히 말해서, 유강후와 결혼하고 아이까지 있지만, 신분과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에서 그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유강후는 그녀를 귀여워했고 이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모든 강씨 집안 식구들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그녀는 자신의 출신과 가문 때문에 그들의 아들 우림이가 강씨 집안 사람들에게 무시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욱이 영원히 유강후의 뒤에 숨어 보호를 받기를 원치도 않았다.그녀와 유강후 사이의 길은 정말 길고도 험난했다. 하지만 그들은 굳건히 걸어갈 것이다!한옥에 돌아와서야 장화연은 자신이 너무 많은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온다연은 계속해서 침묵하고 있었다.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온다연은 이미 아기방으로 갔다. 몇 달 된 아기는 사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잠을 자며 보낸다. 지금도 역시 자고 있었다.온다연은 아이를 안고 잠시 누워있다가 일어나 조금 먹었다. 그리고 가져온 모든 책들을 서재로 옮겼다.그녀는 유강후 몰래 두 개의 외국어 과목을 새로 선택했는데, 지금은 막 입문 단계라 꽤 어려웠다.다행히 요즘은 온라인에 원어민 1:1 지도가 있어서 네이티브 화자를 통해 발음도 교정받을 수 있었다.외국어를 배우고 나서는 복습과 미리 선택한 다른 과목들을 공부했다.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온다연은 결국 책상 위에 엎드려 잠들었다.유강후가 들어서자마자 서재의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그는 양복 재킷을 벗으며 물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장화연은 그의 옷을 받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오늘 제가 실수했습니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했고, 사모님이 다소 기분이 좋지 않아 지금까지 공부하고 있습니다.”유강후가 손을 멈추며 물었다. “무슨 말을?”장화연이 대답했다. “사모님이 강씨 집안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고, 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사모님께서 아무 말씀이 없는 걸로 보아,
유강후는 부드럽게 온다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 보고 싶었어?”온다연은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아니거든요? 우림이가 보고 싶어 해서 물어본 거예요.”유강후는 애교부리는 온다연이 너무 사랑스러웠다.섬세하고 부드러운 모습은 그의 본능을 불러일으켰다.유강후는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 허리를 감싼 채 키스를 퍼부었다.몸에 밴 술 냄새가 싫었던 온다연은 있는 힘껏 유강후를 밀어냈다.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유강후가 아니다.그는 온다연이 입술을 깨물고서야 손을 놓았고 온다연은 숨을 헐떡이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술 마셨어요? 냄새나요.”유강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의 턱을 치켜들었다.“그래서 싫다는 거야?”사실 술은 몇 모금 마시지도 않았지만 상황이 그런지라 몸에서는 여전히 술 냄새가 났다.온다연은 그의 몸을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곧바로 표정을 잔뜩 일그러졌다.왜냐하면 술 냄새 외에 은은한 향수 냄새도 느껴졌다.“향수 냄새가 나는데... 아저씨, 나 지금 기분 나빠졌어요.”그 말을 끝으로 온다연은 등을 돌렸다.여자가 있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는걸 알면서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가 없었다.유강후는 팔을 뻗더니 곧바로 그녀를 무릎 위에 앉혔다.“질투해?”온다연은 얼굴을 돌리며 그를 무시했다.그러자 유강후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한편으로는 질투하고 있는 온다연의 모습이 귀여운지 애정 어린 눈길로 한참이나 그녀를 관찰했다.“예전에는 왜 네가 이렇게 질투가 많은지 몰랐지?”저녁 파티는 한이준과 함께 참석했고 두 사람 모두 여자 파트너가 있었다.유강후는 이권이 준비한 새 비서를 동행했고 한이준은 갓 계약한 신인 아티스트를 데려왔다.물론 김원도도 파트너가 있었다.새 비서는 온다연과 닮은 외모로 단번에 김원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저녁 내내 예의주시하던 김원도는 그들이 호텔을 떠나자 곧바로 다른 차로 조용히 뒤를 밟았다.유강후는 차라리 잘됐다 싶어 일부러 그들은
온다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아저씨는 몰라요. 나 같은 사람이 아저씨의 곁에서 어떤 시선과 압박감을 견뎌야 하는지.”온다연은 멈칫하더니 조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아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열심히 노력할 거예요.”유강후는 그녀를 품에 안고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다연아, 부담감 느낄 필요 없어. 다른 사람의 시선과 의견에 흔들릴 필요도 없고. 넌 이제 강씨 가문의 사모님이야. 누가 너한테 사사건건 시비를 걸면 충분히 꺼지라고 말할 능력이 있다니까?”유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온다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샤워하러 가자.”온다연은 그의 품에서 발버둥 쳤다.“전 이미 씻었어요. 너무 졸려서 자고 싶어요.”하루 종일 공부한 것도 피곤한데 유강후를 기다리느라 밤을 새서 그런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기세였다.어쩔 수 없이 침실로 향한 유강후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은은한 조명을 켰다.그러고선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먼저자. 금방 올게.”유강후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온다연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정말 지치고 피곤했는지 침대맡에 놓인 핸드폰이 계속 깜박이는 것조차 발견하지 못했다.유강후는 핸드폰을 집어들고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입력했다.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건 99+ 빨간 아이콘이 떠오른 카톡이었다.유강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카톡을 확인했고 곧바로 표정이 굳어졌다.친구 요청이 40개가 넘었고, 그중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낯선 사람이 보낸 메시지도 많이 있었다.그는 대충 아무거나 하나 클릭했다.[안녕? 난 3학년이고 유화 동아리 회장 이승기야. 우리 동아리에 가입해 줘서 너무 고마워. 내일 오후 동아리에서 유화 전시회 활동이 있으니까 꼭 참석해 줘.]‘뭐야? 이 유치한 자식은.’유강후는 기분 나쁜 티를 넘기며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다연아, 안녕? 난 옆 반 구지성. 이번 주말에 반끼리 소개팅 있는 거 알아? 내 파트너가 되어줄래?]유강후는 카톡
푹 자고 있던 온다연은 목이 따끔거리는 느낌에 비몽사몽 눈을 떴다.그러자 바로 앞에 있는 유강후가 보였고 또 시작됐구나 싶어 체념했다.웬만하면 거절하고 싶지 않았지만 너무 피곤한 탓에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유강후를 밀어냈다.“하지 마요. 오늘은 너무 힘들어요...”질투의 화신이 된 유강후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감히 다른 남자한테 연락처를 알려줘? 이승기? 구지성? 누군지 똑바로 말해.”정신을 차리지 못한 온다연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남자?’‘이승기는 또 뭐야.’낮에 실험을 하거나 동아리에 가입하며 연락처를 알려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전부 같은 반 친구일 뿐 사적인 대화를 나눈 적은 전혀 없었다.턱이 조금 아파온 온다연은 손을 뻗어 유강후를 제지했다. “아프니까 하지 마요. 자고 싶어요...”유강후의 눈에는 분노가 이글거렸다.“온다연. 이제는 내 말이 말 같지 않아?”그러자 온다연은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더니 몽롱한 눈빛으로 말했다.“피곤하니까 딱 한 번만 해요. 부족한 건 내일 해줄게요.”그 말을 끝으로 온다연은 고개를 살짝 들더니 부드러운 입술로 유강후에게 입을 맞췄다.유강후는 어안이 벙벙한 동시에 마음이 반쯤 누그러졌다.‘이제는 먼저 달려드네.’마음이 누그러든 건 사실이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다른 남자에게 연락처를 알려준 건 참을 수가 없었다.생각할수록 화가 난 유강후는 강렬하고 무자비한 움직임으로 온다연을 대했다.그러자 온다연은 고통에 몸을 떨며 나지막하게 울부짖었다.“너무 아파요...”유강후는 그녀의 귀를 깨물며 거칠게 행동했다.“잘못했으면 혼나야지.”온다연은 아파서 애원하기 시작했다.“살살해줘요.”성욕이 강한 유강후는 사랑을 나눌 때 결코 양보란 없었다. 다만 온다연이 저항 없이 꼬리를 낮추고 애원할 때면 아주 조금이나마 행동이 부드러워진다.온다연은 고통을 참으며 두 다리로 그를 감쌌다.“여보, 살살...”‘여보’라는 호칭에
유강후는 태연하게 답했다.“오늘 결석한다고 내가 오전에 학교에 연락했어.”전시회든 남자 동기든 그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처음에 온다연을 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한 이유는 아이와 보내는 시간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관심사를 갖게 될 기회를 주고 싶었다. 물론 체계적인 금융 지식을 배우게 하는 것도 이유 중의 하나다.절대 남자 동기와 연락처를 주고받거나 소개팅하라고 지원해 주는 게 아니었다.온다연이 똑바로 행동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학교를 그만두게 할 수 있었다.그 어떤 동의도 없이 멋대로 결석 신청한 유강후의 모습에 온다연은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왜 마음대로 결정해요? 전 무조건 학교 갈 거예요. 오늘 중요한 수업이 있다고요. 다른 학교 교수님이 강의하러 온다고 해서 일주일 동안 기다렸단 말이에요.”오늘 수업은 전공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오전 내내 결석을 했기에 뒤처진 만큼 따라잡으려면 며칠간 고생을 해야 한다. 말을 마친 온다연은 그를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결코 이대로 순순히 놓아줄 유강후가 아니다.“동아리 가입했어?”유강후에게 잡혀 꼼짝달싹 못 한 온다연은 조바심이 밀려왔다.“아저씨, 얼른 놔요. 이러다가 정말 지각이에요.”유강후의 표정은 순식간에 돌변했다.“결석 신청했다고 말했잖아. 못 가.”지난 며칠간 온다연은 공부 때문에 유강후를 푸대접했고 그는 아무런 원망도 없이 꾹 참았다.그러나 배려해 주는 마음도 모른 채 다른 남자에게 연락처를 알려줬으니 유강후는 눈이 완전히 뒤집혔다.온다연은 점점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의 마지노선을 넘어버렸다.아무리 생각해도 찝찝했던 유강후는 아침 일찍 화양대 공식 블로그를 확인했다.그 결과 분노가 더욱 심해졌다.블로그에는 ‘고백의 창’이라는 카테고리가 있었는데 들어가 보니 온다연에 관한 많은 게시물들이 쏟아져 나왔다.그중 대부분은 온다연이 수업 들을 때 몰래 찍은 것처럼 보였고 퀸카라는 타이틀과 함께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렸다.심지어 댓글에
“부인이 지금 임신 3주차인데, 아직은 배아 상태라 약 1cm에 불과하고 상태가 좀 불안정합니다.”온다연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는 것이 꿈이었던 유강후는 너무 큰 기쁨에 심장이 마구 뛰고 정신이 혼미했다.이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온다연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최소 1~2년은 걸릴 것이라 예상했는데, 고작 3~4개월 만에 아이를 갖게 된 것이다.그런데 태아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지난번 온다연의 유산 사건이 기억에 생생한 유강후는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태아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건 무슨 뜻이죠?”임수진이 약간 당황하며 설명했다.“대표님,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흔히 발생하는 일입니다. 조금만 상태가 나빠져도 유산 징후가 나타날 수 있어요.”“별문제는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배아 발육 상태가 양호하고 태아 심음도 정상입니다.”“쌍둥이라고요?”유강후는 귀를 의심했다.그는 문득 곽혜진이 준 약이 생각났다. 자기도 쌍둥이였다는 사실과 겹치자, 다시 기분이 황홀해져 입가에 피어오르는 미소를 주체할 수 없었다.그는 임수진의 손목을 꽉 잡고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박사님, 그게 정말입니까?”임수진이 미간을 찌푸렸다.“대표님, 손을 좀 놓고 얘기해요.”유강후는 급히 손을 풀어주었다. 흥분해서 목소리까지 떨리기는 평생 처음이다.“죄송합니다, 박사님. 정말 쌍둥이예요?”임수진이 틀림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정말이죠. 제가 30년간 의사로 일하면서 몇 번 실수한 적은 있지만, 쌍둥이를 잘못 판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유강후는 너무 흥분해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는 애써 진정하고 한참 후에야 나지막이 말했다.“감사합니다, 박사님. 제 아내는 언제쯤 깨어날 수 있을까요?”임수진은 아직도 혼수 상태인 온다연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몸에 특별한 이상은 없어서 지금쯤 깨어나야 하는데...”“제 아내는 이전에 최면 당한 적이 있는데, 그로 인해 과거의 대부분 기
온다연은 얼굴이 창백했고, 몸이 물에서 막 건져낸 것처럼 식은땀에 젖어있었다.강씨 가문의 새 안주인임을 즉각 알아본 그들은 삽시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방금 그들이 한 뒷담화를 온다연이 다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온다연이 극심한 통증을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의사, 의사를 불러주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그녀는 길고 긴 꿈속으로 빠져들었다.경원시에 사는 동안 겪었던 고난들이 오래된 영화처럼 기억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과정은 너무나도 길고 아팠다.최면 당한 이후로 종종 나타나는 신경성 통증보다는 마음속 고통이 훨씬 더 컸다.그녀가 양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모습, 평생 그녀를 지켜주던 소년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수단으로 괴롭힘당하는 모습, 결국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이 영화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그녀가 유하령에게 짓밟히는 모습도 보였다. 수도 없는 모욕을 당하며 찜통 같은 물탱크에 갇히고, 영하 20℃ 이하의 혹한에 밖으로 내쫓기는 날들이 이어졌다. 젖은 옷이 살갗에 얼어붙어 떼려고 하면 피부가 뜯겨 나갔다.광기 어린 유민준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낮이면 유하령을 도와 그녀를 유린하고 밤이면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며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다.그녀는 또다른 자신의 모습도 보았다. 마치 관음증 환자처럼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유강후를 훔쳐보고 노트북에 그의 이름을 가득 쓰고,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유씨 저택의 대나무 숲에 파묻는 모습이었다.너무 춥고 고통스러운 그 기나긴 나날을 그녀는 하수구의 쥐처럼 연명하며 살았다.그러던 어느 날, 유강후가 그녀를 품에 안고 다독이며 아프면 울고 싫으면 거절하고 괴롭히는 자에게는 백배 천배로 갚아주라고 말했다.하지만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실감이 없었고, 유강후는 그녀를 지극히 사랑하는 듯했지만 나은별과 애매한 관계를 유지했다.그녀가 임신했다가 유산하는 모습, 나은별과 바꾸기 위해 끌려가는 장면도
그녀가 자리에 앉기 바쁘게 한국계 여성 손님 세 명이 들어왔다. 구석진 창가에 앉은 온다연을 발견하지 못한 세 사람은 거침없이 뒷담화를 하기 시작했다.“이상하네. 유강후의 친부가 오지 않았어. 강 대표님이 이혼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장인어른 생신날에 사위가 왜 오지 않았을까? 이건 좀 말이 안 되는데.”“내가 국내에서 생활한 기간이 길어서 그에 관해 들은 바가 있어.”“어떻게 된 건지 어서 말해봐.”“유강후의 부친은 H국에서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쥔 고위급 정계 인사이고 유강후의 친형도 정계에 몸담고 있었는데, 3년 전 알 수 없는 이유로 외진 지역으로 발령 났고, 직급이 말단에서 다시 시작한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낮아졌대.”“그리고 그 형에게 딸이 한 명 있는데,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한쪽 다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 갇혀서 지금까지도 출소하지 못하고 있대.”“어떻게 그런 일이... 아버지가 그렇게 큰 권력을 가졌는데, 왜 아들과 손녀를 구하지 않지?”“그건 모르는 소리야. 듣기로는, 유강후가 친형과의 갈등 때문에 뒤에서 훼방을 놓았고, 아주 큰 힘을 들여서 부친의 권력으로도 어찌 할 수 없게 만들었대.”“쯧쯧, 진짜 잔인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뒤에서 유강후를 ‘살아있는 저승사자’라고 부르나 봐. 자기 친형도 봐주지 않을 정도이니.”“또 하나 있어. 유강후는 경원시에 있을 때 약혼녀가 있었어. 나은별이라고, 나씨 가문의 따님이었지. 그때 사람들은 둘이 반드시 결혼할 거라 생각했는데 유강후가 모두의 예상을 깨버렸어. 집에 얹혀살던 여자에게 홀딱 빠져 나은별과 파혼하고 두 가문의 협력 관계마저 무너뜨려 버렸어.”“그 얘기는 나도 들었어. 그 여자는 그 집 양딸이었고 유강후를 아저씨라고 불렀다는데, 어떻게 두 사람이 그런 사이가 됐는지 몰라.”“어머, 대박 사건! 자세히 말해봐...”그들은 최대한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지만 공간이 작다 보니 한 글자도 빠짐없이 온다연의 귀에 들어왔다.그녀는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고,
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그 시각 유강후는 로운의 보고 사항을 듣고 있어 그녀를 쫓아가지 못했다.차에 올라서야 온다연의 분노를 알아챈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왜 그래요? 요즘 따라 이상하게 화를 자주 내네요?”온다연은 지난 며칠 동안 감정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 툭하면 화가 났고 그럴 때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다.아니나 다를까 이때도 온다연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나중에 우리의 아이한테도 이렇게 대한다면 정말 화날 것 같아요.”유강후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그녀를 안아 올려 무릎에 앉히고선 나지막하게 말했다.“딸이라면 애지중지 키우는 게 맞지만, 아들이라면 우림처럼 키울 거예요.”온다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러는 이유를 이해하지만 기분이 썩 풀리지는 않았다.마음속에 남은 찝찝함 때문에 그녀는 유강후에게서 내려와 차 문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그러자 유강후가 속삭였다.“생각해 봐요. 우리의 아이는 강씨 가문과 진씨 가문을 책임져야 해요. 어쩌면 유씨 가문까지 물려받을 텐데 현실적으로 밝게 자라는 건 불가능해요. 부모로서 보통 아이처럼 행복하게 자라길 누구보다 바라지만 이런 가문에서 태어나는 순간 사명감을 가져야 해요. 어려서부터 부족할 것 없이 자랐다면 당연히 그에 맞는 대가를 치러야죠.”온다연은 괴로웠다.하지만 유강후의 말은 모두 일리가 있었고 그 역시 똑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을까 봐 걱정되었다.온다연은 나지막이 물었다.“강후 씨도 이렇게 자란 거예요?”그는 무덤덤하게 답했다.“비슷했죠. 엄마랑 함께 있는 시간은 하루에 두 시간밖에 없었어요. 때로는 반년 동안 얼굴을 못 볼 때도 많았어요. 열 살 이후에 특수학교를 다니면서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고 그때부터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어요. 그런 생활도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진 거죠.”마음이 괴로웠던 온다연은 그의 손을 잡았다.“미안해요. 화를 내면 안 됐던 건데...”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무
실제로 온다연이 서 있는 곳은 에어컨 통풍구 바로 맞은편이었다.온다연이 몸을 돌리는 순간 그 연예인은 갑자기 선글라스를 벗더니 이곳을 멀리서 바라봤다.유강후는 싸늘한 시선으로 출구를 바라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시끄러우니까 커튼 닫아.”곧 커튼이 닫히고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환호성도 밖으로 나가며 점점 사라졌다.환호성이 완전이 사라졌을 때, 이권이 뛰어 들어와서 우림의 비행기가 착륙했다고 말했다.그러자 유강후는 온다연의 손을 잡았다.“가요. 우림이가 도착한 것 같네요.”그들이 막 일어났을 때 강양호는 이미 문을 나섰다.“드디어 우리 손자가 왔네. 어찌나 보고 싶던지.”온다연은 나지막이 속삭였다.“할아버지는 아이를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할아버지는 누구보다 우리가 빨리 아이를 갖길 바랄 거예요. 그래서 우림이를 유독 더 아끼고 친손주처럼 생각하는 거죠.”출구는 바로 휴게실 밖에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보기만 해도 정예로운 일행이 나타났다.선두에 선 사람은 로운이었고 그는 우림의 손을 잡고 있었다.멀리서 유강후를 발견한 우림은 로운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달려왔다.유강후 앞에 오자마자 ‘아빠’라고 부르더니 강양호를 보고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할아버지.”강양호는 기쁨에 겨워 허리를 굽히더니 아이를 껴안으며 미소를 지었다.“우리 손자 왔어? 얼른 할아버지랑 집 가자. 할아버지가 우림이 주려고 선물을 잔뜩 준비했어.”우림은 유강후를 힐끗 쳐다보고선 곧바로 시선을 도려 옆에 있는 온다연에게 머물렀다.“엄마.”온다연은 아이의 얼굴을 꼬집으며 말했다.“얼른 내려와. 할아버지 이제 연세 있으셔서 오래 못 안아.”우림은 온다연을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엄마라고 불렀고 아무리 바로잡고 고치려도 해도 바뀌지 않았다.마치 어려서부터 온다연에게 의존감이 있는 듯 강향호의 품에서 바로 내려와 온다연을 향해 팔을 뻗었다.“엄마. 안아줘요.”온다연이 안아주자 우림은 그녀의
물론 온다연도 예쁜 편이지만 이 세상에는 예쁜 여자가 너무나 많다. 게다가 유강후의 외모, 재산, 권력으로 봤을 때 그가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있다.솔직히 말해서 온다연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 않은가?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유는 없어요. 그냥 유나 씨면 돼요.”역시나 아무도 온다연을 대체할 수 없었다.운명의 실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엮여 있었고 그들은 평생 얽히게 될 운명이었다.두 사람은 말을 멈추고 조용히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한참 후에야 온다연이 입을 열었다.“H국에는 언제쯤 갈 거예요?”“날씨가 좀 시원해지면 갈까요? 경원은 여름보다 가을이 더 예뻐요.”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원을 그리며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혜린의 아이가 너무 귀여워요. 안고 있으면 폭신하고 볼살도 가득해서...”그녀는 어제 아이를 더 오래 껴안지 못한 게 아쉬운 듯 유강후의 아랫배를 쓰다듬더니 낮은 목소리로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우리도 아이가 있으면 좋을텐데...”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생길 거예요.”유강후는 그 꿈을 기억했고 곧 아이가 돌아올 거라는 예감이 생겼다.이때 온다연이 말했다.“꿈에 종종 아이가 나타나는데 왜 자기를 버렸냐며 저한테 물어봐요. 꿈이라서 얼굴조차 선명하게 보지 못하니까 마음이 너무 괴로웠어요.”“그런데 최근에는 꿈속에서 아이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어요. 남자 아이였는데 강후 씨랑 많이 닮았어요.”“예전에 우리에게 아이가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예요.”유강후의 눈에는 고통이 스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다연의 손을 꽉 감쌌다.이곳은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서 공항 입구에 도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람들이 입구에 모여들어 좁은 통로를 막고 있었다.유강후는 표정이 일그러졌다.“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곧 기사가 돌아왔다.“대표님, 잠시 후 연예인 한 명이 도착한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그
다음 날 새벽, 유강후는 공항으로 떠나려고 했다.인기척을 느낀 온다연은 잠결에 옷을 움켜쥐며 말했다.“왜 안 깨웠어요?”유강후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너무 깊이 잠든 것 같아서 안 깨웠어요. 혼자 가도 되니까 더 자요.”확실히 지난 이틀 동안 잠이 늘었다. 어제 저녁에는 야식도 먹지 않고 집에 오자마자 잠들었다.유강후는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온 온다연을 보며 며칠간 너무 무리했다는 생각에 어젯밤에는 그녀를 껴안고 있을 뿐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공항이랑 가까워요.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이미 집에 돌아왔을걸요?”온다연은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왔다.“십 분만 기다려요.”그녀는 캐주얼한 옷을 갈아입고선 가볍게 화장을 한 후 10분 만에 준비를 마쳤다.밖으로 나가보니 강양호가 이미 차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우림이는 아직 애잖아요. 할아버지가 직접 마중 가실 필요는 없어요.”강양호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말투가 그게 뭐니? 내가 우리 증손자 데리러 가겠다는 데 불만 있어?”“그게 아니라 아직 6시밖에 안 된 이른 시간이잖아요. 그냥 편히 집에서 쉬세요. 이번에는 우림이도 오래 있다가 갈 거니까 충분히 같이 있을 수 있어요.”강양호는 심기가 불편했다.“우리 집안 독자인데 당연히 직접 마중가야지. 너희가 아이를 여러 명 낳았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하겠니?”유강후는 인내심 있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서 지금 적극적으로 임신 준비 중이잖아요.”강양호는 그를 힐끗 쳐다봤다.“생일에 내 친구들도 많이 올 거다. 다들 자식과 손주가 있고 증손자까지 여러 명이란다. 나만 우림이 하나잖니.”“내 체면은 우림이가 받쳐주는 거야. 넌 믿을 구석이 없구나.”바보가 아닌 이상 그 말속에 숨긴 뜻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온다연은 단번에 강양호가 아이를 낳으라고 재촉하는 걸 알 수 있었다.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서둘러 뒤에 있는 차로 걸어갔다.차량 행렬이 빠르게 저택을 빠
얼마 후 온다연이 입을 열었다.“강후 씨, 이 팔찌를 엄청 좋아하네요?”온다연은 이 팔찌에 달린 호박석이 그녀가 잃어버렸던 것과 똑같다는 걸 이상하게 생각했다.처음에는 유강후가 팔찌에 달린 호박석 가져갔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그가 다시 구슬을 꿰어주고 나서야 이 호박석은 처음부터 두 조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온다연은 나지막이 물었다.“우리 커플템이었어요? 똑같아서 예전부터 물어보고 싶었어요.”유강후의 눈에는 깊은 고통이 스치고 지나갔다.“우리한테도 아이가 있었다면...”온다연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아이가 있었다고요?”유강후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손에 있는 작은 구슬을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이를 좋아해요?”“당연하죠. 살이 통통하게 오른 귀여운 아이를 볼 때마다 깨물고 싶은 충동을 느껴요.”유강후는 다시 자신의 어깨에 기대라며 손짓하고선 조용히 말했다.“곧 어르신 생신이잖아요. 내일 우림이가 온다는데 같이 마중 나갈래요?”온다연이 답했다.“좋아요.”온다연은 그 아이에게 설명할 수 없는 친근함을 느꼈다. 아이를 보자마자 온다연은 그녀와 아이 사이에 끊을 수 없다는 관계가 있다는 걸 느꼈다.처음에는 유강후의 친아들인 줄 알고 기쁘면서도 괴로웠으나 나중에 단지 절친에게 부탁받은 고아라는 걸 알고선 몹시 아쉽고 슬펐다.그녀는 착하고 어린아이에게 부모가 없다는 사실이 참 안타까웠다.이를 생각하던 온다연은 한숨을 내쉬었다.“보고 싶네요. 양씨 가문에 간 지도 꽤 됐고 로운 씨가 제사까지 지내게 했으니 자기가 강후 씨의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아채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똑똑한데 모를 리가 없잖아요.”유강후가 답했다.“보통 아이와 달리 우림이는 IQ가 180을 넘어요.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해도 아직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니 깊이 생각할 수는 없을 거예요.”온다연은 멍을 때리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나중에 양씨 가문으로 돌아갈까요?”유강후는 단호했다.“당연하죠. 전 우림이가 소유해야 할 모든 것을 되찾도록
생리가 끝난 지 이틀밖에 안 됐으니 임신일 리가 없다.유강후도 무슨 생각이 났는지 실망하는 듯한 눈빛을 드러냈다.잠시 후 임혜린이 아이와 함께 나왔는데 금방 씻어서인지 아이 특유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임동현은 밝은 노란색 잠옷으로 갈아입었는데 유난히 더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게다가 조금 졸린 상태였기에 손을 내밀어 도우미 이모가 건넨 젖병을 받아 들고는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보면 볼수록 아이가 너무 귀여웠던 온다연은 참지 못하고 어린 녀석을 품에 안고선 젖병을 잡아주었다.아이는 젖병을 빨며 동그랗고 커다란 눈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치명적인 귀여움이었다.온다연은 고개를 숙여 아이의 이마에 뽀뽀하며 부드럽게 물었다.“졸려?”아무리 똑똑한들 결국에는 두 살 남짓의 아이였기에 그는 온다연을 잠시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엄마’라고 불렀다.온다연은 순간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에 흠칫했다.문득 그녀에게도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온다연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유강후를 바라봤다. 그도 온다연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빛에는 슬픔과 고통이 담겨있었다.온다연은 입을 벙끗했지만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러자 아이가 그녀의 얼굴을 만지며 부드럽게 말했다.“엄마...”임혜린은 아이가 정말 잠들려고 하자 서둘러 그를 데려갔다.“졸리면 아무한테나 엄마라고 한다니까? 하여튼 나쁜 버릇이 들었어.”온다연은 아이를 선뜻 건네지 않았다.“잠깐 안고있어도 돼?”갑자기 뭔가 떠오른 임혜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유강후를 힐끗 쳐다봤다.평소 차갑기만 하던 유강후는 제자리에 서서 꼼짝하지 않고 온다연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눈빛은 매우 복잡했다. 애정과 사랑이 가득 담겼지만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워 울부짖는 것 같았다.임혜린은 순간 그가 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절제절레 흔들며 침실로 돌아갔다.유강후는 그렇게 한참 동안 온다연을 바라봤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