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는 온다연의 차가운 손을 잡고 모든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그래, 병원에 가지 말고 집에 가자.”그는 이권이 건네는 담요를 침대에 깔고 온다연의 몸에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리고 최대한 누운 자세 그대로 안고 아래층에 내려갔다.그의 아우라에 경비는 왜 사람을 이런 식으로 안고 나가는지조차 묻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 병원에 가지 않고 한 한의원으로 향했다.노련한 한의사는 온다연의 상태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며 진찰을 시작했다.“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습니다. 내장이 손상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상태로 봤을 때 감염이 확실한 것 같군요. 치료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합니다.”한의사는 거의 죽어가는 온다연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저는 한의사라 수술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 저희가 치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다른 병원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그 순간, 온다연이 유강후의 옷깃을 잡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초점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한의사에게 말했다.“이곳에서 수술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술실 좀 빌리겠습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원에서 가장 뛰어난 외과 의사가 헬리콥터를 타고 이 작은 한의원에 도착했다. 50대가 되는 최고 전문가도 온다연의 상태에 놀라며 즉시 수술을 결정했다.그러나 그녀의 부상이 심각하고 하도 오래 방치되어서 한의원의 장비와 시설로는 수술을 진행할 수 없었다. 의사는 빨리 큰 병원으로 이송할 것을 권했다.온다연은 여전히 유강후의 옷깃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몸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허약했다. 유강후는 맞은편의 사립 병원을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다연아, 우리 병원에 가는 건 어때?”온다연은 입을 달싹거렸지만 소리를 내지 못했다. 분위기는 최고로 가라앉았고, 공기 중에는 죽음의 냄새가 감돌았다.한의사와 이권은 식은땀을 흘리며 유강후를 주시했다.
유강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말했다.“시세의 두 배를 주고 사들여.”이권은 그가 병원을 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미래 그룹에 이미 훨씬 좋은 병원이 있기 때문이다.이 병원은 그저 일시적으로 빌려 쓰는 것에 불과했다. 병원을 사들이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는 말이다.“이 병원은 투자할 가치가 없습니다. 규모가 너무 작고 장비도 뒤떨어져요. 전문가도 전부 외부에서 초빙해야 하는데...”“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유강후의 목소리는 매섭고 냉랭했다.“당장 가서 협상하지 않고 뭐해?”이권은 더 이상 말할 용기가 없어서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7시간이 지나고 온다연은 수술실에서 나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유강후는 그녀를 볼 수조차 없었다. 수술을 집도한 의사 중 한 명인 임교수는 유강후에게 익숙한 인물이었다. 그는 수술실에서 나와 고개를 흔들었다.“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가 최근 몇 년 동안 해본 수술 중 가장 어려운 수술이었어요. 사고가 나자마자 바로 이송되었다면 문제가 없었을 테지만, 지금은 감염이 너무 심해서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유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두어 번 빨고는 바로 비벼서 껐다.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교수님, 저한테 너무 중요한 사람이라 잘 부탁드립니다. 꼭 문제없이 회복되어야 합니다.”임교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지금은 환자가 스스로 버텨낼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이 며칠을 견뎌내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견디지 못하면...”임교수는 말을 멈추고 화제를 바꿨다.“수술 중 가장 강력한 항생제를 사용했습니다. 아주 드물게 사용하는 특효약입니다. 며칠 동안은 제가 직접 지켜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입니다. 부디 양해해 주세요.”국내 최고의 의사로 불리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유강후는 말을 잇지 않고 감사 인사만 한 후 병실을 나섰다.온다연이 입원해 있는 층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복도는 무섭도
이권은 USB를 건네면서 말했다.“여기 모든 영상이 담겨 있습니다.”유강후는 온다연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서리가 내린 듯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노트북을 가져와.”이권이 노트북을 가져오고 그는 USB 속에 담긴 영상 파일을 열었다. USB 안에는 수십 개의 영상이 있었다. 모두 온다연이 그동안 겪어온 학대와 폭력을 증명하는 자료였다.유강후는 무작위로 하나를 클릭했다. 오래 전의 영상인 듯했다. 화면 속 온다연은 13살이나 14살 정도로 보였고, 자그마한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주변에는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서 있었다.소리는 없었지만, 그들의 입 모양을 통해 얼마나 모욕적인 말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온다연은 구석에서 몸을 웅크린 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발길질과 욕설을 견뎌냈다.장소는 분명히 학교였지만 아무도 이를 막지 않았다. 화면을 통해서도 그녀의 절망이 느껴졌다.유강후는 물끄러미 영상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는 점점 더 강한 분노가 일고 있었다. 이권은 그가 주먹을 틀어쥔 것을 보고 무안한 표정으로 눈치를 봤다.첫 번째 영상은 10분 남짓 지속되었고, 곧 두 번째 영상이 재생되었다. 이번에는 대학교에서 찍힌 영상 같았다. 화면은 흐릿하고 심하게 흔들렸다.온다연은 하얀 치마를 입고 가방을 메고 있었다. 그녀는 한 걸음씩 계단 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네가 감히 준우 선배를 꼬셔? 너 죽여버릴 거야!”“너 우리 학교 남자랑 전부 잔 적 있다며? 그 더러운 주둥이로 준우 선배까지 유혹해?”온다연은 고개를 숙이고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발걸음은 여자들에게 밀려 점점 계단 끝으로 밀려갔다.이때 키 큰 여자가 화면에 나타나 그녀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온다연은 짧은 신음을 냈지만 여전히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다시 비속어가 난무하는 가운데 온다연은 계단에서 밀려 떨어졌다. 화면은 급격히 흔들리면서 멈췄다.이윽고 다음 영상이 재생되었다.이번에는 온다연이 도망치는 모습이었고, 역시나 화면은
이권도 방금 본 영상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제야 온다연의 인내심이 어디에서 왔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20살밖에 안 된 소녀가 갈비뼈가 두 대나 부러졌는데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동안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해왔기 때문이었다.그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산산조각 난 컴퓨터를 한 조각씩 주워 담았다.“이 영상들은 몇 명의 손을 거쳤는지 모릅니다. 영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촬영자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전부 찾아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유강후의 목소리는 지옥에서 전해지는 것처럼 싸늘했다.“찾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부 찾아내. 내 사람을 함부로 괴롭히도록 놔둘 수는 없지. 고씨 가문을 잡을 증거도 수집해. 백배, 천배로 되갚아주도록 하겠어.”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싸늘한 공기를 복도 전체에 퍼뜨렸다. 주변의 공기는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워서 소름이 돋았다.이때 중환자실의 문이 예고 없이 열리며 간호사가 뛰쳐나왔다.“환자가 깨어났어요. 빨리 임 교수님을 불러오세요.”이 말을 듣고 유강후는 벌떡 일어나면서 중환자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간호사가 문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안 돼요, 들어가면 안 됩니다. 외부인은 함부로 출입할 수 없다는 걸 아시잖아요.”“다연이 깨어났다고요?”“네, 깨어났지만 들어가시면 안 돼요. 임 교수님이 오셔서 확인한 후에 알려드릴 거예요.”하도 담배를 피워서 유강후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기세는 여전했기에 간호사는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게다가 담배 냄새도 심해서 더더욱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이때 임교수가 도착해 유강후에게 인사하고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중환자실의 문이 단단히 닫혀 있어서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한참 후에 임교수가 나왔다. 마스크를 벗은 그는 훨씬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참 운이 좋은 분이시네요. 특효약이 잘 들어서 예상보다 빠르게 버텨냈어요. 이제 중환자실에 3일 정도만 더 있으면 별일
3일 후 온다연은 정말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넓은 VIP 병실에는 침대가 하나만 놓여 있었다. 공기 청정기는 24시간 내내 작동했고, 창가와 협탁에는 장미꽃이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고즈넉하고 평화로워 보였다.유강후는 갓 끓인 야채죽을 들고 온다연에게 한 숟가락씩 천천히 먹여줬다. 온다연은 손에 주삿바늘을 꽂은 채 침대에 반쯤 기대어 있었다.며칠 동안 영양제만 맞아서일까, 그녀는 위가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야채죽 몇 숟가락에 배부른 것을 보면 말이다.더 이상 못 먹을 것 같았던 온다연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더는 못 먹겠어요.”그녀는 여전히 기운이 없었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깨어 있는 시간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 지금도 야채죽 몇 숟가락을 먹고 나니 또 피곤해졌다.유강후가 그릇을 내려놓으러 간 사이에 그녀는 이미 베개에 기대어 잠들었다. 며칠 사이에 부쩍 말라서 이전보다 더 작아 보였다.그녀의 얼굴은 원래도 작았지만, 이제는 유강후가 한 손으로 가릴 수 있을 정도였다. 깊이 잠든 것은 아닌지 그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속눈썹을 살짝 건드렸다. 정말로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이내 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뺨을 따라 미끄러지듯 지나가며 거의 보이지 않는 붉은 자국을 남겼다.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그녀의 몸에 자국을 남기는 것을 좋아했다. 끔찍할 정도로 강한 소유욕을 가지고 있는 그는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모두 것에 표식을 붙여야 했다.물건도 그렇고, 사람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이 손댄 것은 망가졌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유강후가 병실을 나서고,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이권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조씨 가문에서 또 수작을 부리고 있습니다. 조작된 영상을 온라인에 퍼뜨려 온다연 씨를 비방하고 있습니다.”유강후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증거 수집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이권이 대답했다.“고유정 씨에 대한 증거
유강후의 눈동자는 차갑고도 어두웠다. 막강한 매력을 가진 눈동자였다. 그의 눈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끝없는 심연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있던 찰나, 빙하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나를 그린 거야?”온다연은 화들짝 놀라며 종이를 구겨서 뒤로 숨겼다. 그리고 곧 뒤에 서 있던 사람이 유강후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초등학생처럼 말이다.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당황한 듯 말했다.“왜 출근 안 했어요...?”유강후는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 바닥에서 뭉개진 종이를 주워 펼쳐 보았다. 눈빛이 서서히 부드러워졌다.“잘 그렸네. 나보다 더 잘생겼어.”온다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 그래도 두 달간 유강후가 직접 돌봐 준 덕분에 전처럼 무서워하지는 않았다.잠시 침묵에 잠겼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삼촌이 더 잘생겼어요.”이건 진심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유강후의 외모가 뛰어난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그는 수많은 사람을 홀릴 수 있는 매력의 소유자였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까이하고 싶어지는 그런 잘생김이었다.반대로 유강후는 외모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그래도 온다연의 말을 들으니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더니,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을 천천히 쓰다듬었다.“오늘 점심 많이 안 먹었다며? 생선죽이 별로였어?”온다연의 식습관은 두 달 동안 점차 드러났다. 그녀는 가리는 음식이 꽤 많은 편이었다.예를 들어, 줄기보다는 잎이 많은 채소를 좋아하고, 표면이 거친 과일보다는 매끄럽고 예쁜 과일을 더 좋아했다. 고기는 잘 먹지 않았고, 특히 붉은 고기는 더더욱 먹지 않았다. 고기의 색깔이 진하면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그녀의 식성은 음식의 모양에 따라 결정되었다. 하지만 크게 앓고 나면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야 하는 법이다. 고기를 먹지 않으면 회
거의 두 달 동안 정성껏 돌본 결과 온다연의 상태는 드디어 호전되었다. 홀쭉했던 얼굴에도 살이 붙었고, 입술 색은 예전처럼 돌아가서 부드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 모습이 유강후에게 얼마나 유혹적이었는지 모른다.온다연은 그의 손길에 부쩍 익숙해졌다.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차라리 따르기로 한 모양이다. 그녀는 부드럽고 하얀 손을 한데 모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저 이제 먹고 싶은 거 막 먹어도 돼요?”유강후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한참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상태에 만족한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가끔은 먹어도 돼. 근데 기본적으로는 영양사의 식단을 따라.”“네...”온다연은 약간 실망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반짝이는 입술은 약간의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유강후는 그녀의 입술에 시선을 멈췄다. 그리고 점점 어두워지는 눈빛으로 그녀를 안아 들고 방 안에 들어갔다.침대에 닿기도 전에 그는 고개를 숙여 온다연의 입술을 물고 반복적으로 문질렀다. 곧 그의 손이 옷속으로 들어갔고, 온다연은 반사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그녀는 도망치거나 강하게 반항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자발적으로 맞춰주는 것도 불가능했다. 유강후의 기세는 무서울 정도로 강압적이었다. 온다연은 그를 따르는 것 외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의 손은 부드러운 피부를 타고 천천히 올라갔다.흉터가 남은 부위를 지나면서 그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는 흉터의 윤곽을 천천히 매만졌다. 온다연은 몸을 굳히며 그의 손을 잡았다.“그만해요. 보기 흉하잖아요.”유강후는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흉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전혀 흉하지 않아. 나중에 하나도 안 보이게 지워줄게.”말을 마친 그는 다시 입술을 맞췄다. 온다연은 머리를 젖힌 채 그저 견뎌내야 했다. 그의 손은 점점 더 위로 올라가더니 그녀의 가슴을 감싸려고 했다
온다연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몸을 일으킨 유강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조금 전의 기세는 사라졌고 평소의 차가운 눈빛이 다시 돌아왔다.“서쪽 교외에 온천 호텔이 생겼대. 이따가 출발해서 갈 거야.”침대에 엎드린 자세로 있던 온다연은 그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녀의 시야에는 그저 그의 정장 바지만 보였다. 한 번 스쳐본 것만으로도 조금 전의 열기가 떠올라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유강후는 그녀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귀 끝이 붉어진 것을 보고는 부드러운 표정이 잠시 스쳤다.“지금 갈까?”온다연의 몸은 약간 뜨거워졌다.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부끄러운 생각을 들킬까 봐서 말이다.그녀는 그의 셔츠를 꼭 잡고 차까지 안겨 갔다. 두 대의 벤틀리가 앞뒤로 천천히 병원을 빠져나와 차로 가득한 도로에 합류해서 평온하게 달렸다.온다연은 창밖의 번화한 도시를 묵묵히 바라봤다. 너무 오랜만에 나와서 그런지 빌딩만 봐도 새롭게 느껴졌다.가장 번화한 거리에 들어섰을 때, 앞자리에 있던 이권이 말했다.“앞에 있는 건물이 바로 미래 그룹 본사예요. 대단하죠?”창문을 통해 온다연은 커다란 빌딩들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적어도 20개 이상의 건물이 있었고, 가장 앞에 있는 건물이 제일 웅장했다. 그 건물의 위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미래 그룹’ 네 글자가 반짝이고 있었다.미래 그룹의 건물은 파란색을 기본으로 사용했다. 원래는 무겁고 답답한 느낌을 주는 색깔이 대규모로 연결된 모습은 너무나도 웅장해서 존경심이 생겨날 정도였다.온다연은 한동안 넋을 잃었다. 왠지 모르게 이 건물들이 유강후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을 쉴 수 없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었다.이때 이권이 약간 자랑스러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엄청 크죠? 미래 그룹은 대륙 최고 수준의 대기업이에요. 하지만 도련님에게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에요. 여러 나라에 대기업을 소유하고 있으니까요.”이권 말이 많다고 생각한 듯, 유강후는 미간
신중하게 정장을 고른 후 유강후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한 번 훑어보았다.뭔가 허전한 느낌에 곧바로 액세서리 상자를 열어 남성용 벨플라워 브로츠를 꺼내 정장 칼라에 꽂았다.유강후는 평소보다 젊어진 자신을 보며 왠지 모를 긴장감을 느꼈다.오늘 파티에 참석한 사람은 대부분은 온다연과 비슷한 또래의 재벌 2세였으니 젊은이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는 꾸며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곧 날이 저물었다.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크루즈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비록 약간의 비가 내렸지만 그들의 컨디션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파티의 주최자가 동국 왕자 연시온인 이유도 있지만 그 밖에도 오늘 크루즈에 거물이 나타난다는 소식에 빠짐없이 참석했다.오아시스 그룹은 대진 그룹보다 더 대단한 존재였다. 그러니 오아시스 그룹 대표와 친해지는 기회를 사람들이 놓칠 리가 없다.그 사람과 친해진다면 앞날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에 재벌 2세들은 비를 무릅쓰고라도 파티에 참석해 조금이라도 엮일 기회가 있는지 엿봤다.여러 대의 대형 헬기가 착륙하자 검은색 정장은 입은 수십 명의 경호원들이 내렸다.곧이어 맨 가운데의 해치가 열렸고 포스 넘치는 젊은 남자가 나타났다.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숨을 죽였다.그 남자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고 칼라에는 연보라색의 브로츠가 끼워졌다. 눈에 띄는 화려한 착장은 아니었지만 강한 강박감에 사람들은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시선을 피했다.마치 모든 것이 그의 발밑이라는 듯 당당했고 두려울 것 하나 없는 그 기세가 남달랐다.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하던 그때 또 다른 헬기 한 대가 착륙했고 헬기의 날개에는 대진 그룹의 로고가 인쇄되어 있었다.유강후는 헬기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고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온다연은 리틀 블랙 드레스를 입었는데 미니멀한 디자인은 그녀의 가는 허리와 늘씬한 다리를 부각했다. 심지어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피부를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연보락색의 귀걸이와 다이아몬드 목
“옷에 더러운 게 묻어서 그냥 버렸어요.”온다연은 관심 없다는 듯 코웃음 치며 돌아섰다.“이만 갈게요. 내일은 안 올 거예요.”그냥 가려다가 그래도 인사를 건네는 게 예의라 생각해서 찾아왔는데 들어오자마자 못 볼 꼴을 보게 되었다.‘왜 항상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지?’온다연은 곧장 밖으로 향했다. 안심은 귀까지 빨개진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작은 거실을 쳐다보고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입구에서 싸늘하게 모든 걸 지켜보던 안윤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러나 온다연이 다가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다연아, 내일 저녁에 파티 있는데 너도 갈 거지?”온다연은 줄곧 이런 것에 관심이 없었기에 듣자마자 고민도 없이 거절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안윤희가 말을 덧붙였다.“이번 파티는 좀 달라. 동국 왕자 연시온 씨가 주최했거든. 심지어 참석자는 전부 신국에서 명망 있는 후계자들이야. 가서 얼굴이라도 익히는 게 어때?”“어차피 곧 대진 그룹을 이어받아야 하잖아. 앞으로 이런 자리가 많을 텐데 계속 피하는 건 아니라고 봐.”온다연은 고민하다가 답했다.“알았어. 한번 가볼게.”아기 새처럼 영원히 진수현의 보살핌 하에 숨어서 사는 건 불가능한 노릇이니 이제는 슬슬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춰야 한다.그녀의 확답을 들은 안윤희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다음 날 점심, 유강후도 초대장을 받게 되었다.주최자가 연시온인걸 보고선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초대장을 쓰레기통에 버렸다.이권은 자연스레 쓰레기통에서 초대장을 꺼냈다.“다연 씨도 참석한다고 합니다.”유강후는 표정이 일그러졌다.“이런 파티에는 도대체 왜 참석하는 거야. 귀찮아죽겠네.”“대진 그룹의 후계자인데 참석해야죠. 이번 파티에 신국의 명망 있는 후계자들은 전부 참석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주최자는 연시온 씨입니다. 진씨 가문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으니 다연 씨가 참석하는 게 이상할 건 없죠.”“도련님, 가실 겁니까?”유강후는 단호
안윤희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머리를 정리하고선 유강후에게 차 한 잔을 따르며 부드럽게 말했다.“강 대표님, H국에서 수입해 온 녹차예요.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요.”흰 원피스와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에 하얀 피부까지 더해지니 온다연과 비슷해서 청순해 보였다.그러나 차를 건네자마자 유강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센 향수 냄새가 코를 강타했는데 차 향이 나는 향수를 썼는지 유난히 역겹게 느껴졌다.유강후는 녹차를 마시지 않지만, 진수현이 바로 앞에 있고 안심의 조카라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어 안윤희의 차를 건네받았다.그런데 손이 닿는 순간 찻잔이 미끄러져 떨어졌다.안윤희는 의도적으로 유강후의 손을 스치더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다 젖으셨네요.”안윤희는 급히 휴지를 집어 유강후 셔츠에 묻은 물기를 닦았다.그러나 유강후는 그녀의 손길이 닿는 순간 얼굴에 혐오감이 드러났다.“됐어. 어차피 녹차를 안 마시거든. 제발 좀 가만히 있어.”안윤희는 얼굴을 창백해진 채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다.그의 반응에 진수현은 눈살을 찌푸렸다.안윤희는 그가 보고 자란 아이라 얼마나 착하고 순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요즘 따라 실수를 자주 하고 행동이 이상해졌다.하지만 뭐가 됐든 그의 앞에서 안윤희에게 무안을 주는 건 잘못된 행동이었다.“윤희야, 강 대표랑 할 얘기가 있으니까 얼른 나가봐.”안윤희는 입술을 깨문 채 유강후를 힐끗 쳐다보았다.유강후는 외모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능력까지 좋았다. 진유나에게 청혼 선물이라며 건넨 예물은 진씨 가문을 살 수 있을 정도였다.‘왜 진유나 같은 X을 좋아하는 거지?’‘하여튼 진유나가 문제라니까. 염지훈도 모자라 이제는 강 대표까지 꼬시는 거야?’‘연약한 척? 그걸 누가 못해.’안윤희는 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대표님, 죄송해요. 오늘은 제가 실수를 범했네요. 다음번에는 최고급 차로 준비할게요.”그 말을 끝으로 안윤희는 흰 원피스를 휘날리
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회장님은 왜 유나 씨가 싫어할 거라고 확신하는 거죠?”진수현은 비웃는듯한 웃음을 보였다.“내 딸인데 모를 리가 없잖아요. 설마 강 대표님이 저보다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해요?”진수현은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어르신의 체면을 생각해서 여기까지만 할게요. 강 대표님, 진심으로 충고하는 데 그 마음을 접는 게 좋을 겁니다. 왜 이렇게까지 집착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딸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지훈이가 당장은 강 대표님보다 못하지만 속이 깊은 아이라 제가 택했습니다.”유강후는 적대감을 드러내더니 말투마저 싸늘하게 돌변했다.“그럼 회장님이 그분을 잘 지킬 수 있는지 두고 보겠습니다. 현재로선 저희 가장 큰 적이거든요.”그 말에 눈이 번쩍인 진수현은 단번에 유강후의 멱살을 잡았다.“어딜 감히.”유강후는 말없이 입가에 묻은 피를 닦고선 진수현을 밀어냈다.그러던 중 손목에 찬 검은 시계가 드러났다.이를 본 진수현은 흠칫하더니 그의 손목을 잡고 진지하게 물었다.“이 시계는 어디서 구한 거죠?”진수현은 안심이 그에게 선물한 시계인 걸 한눈에 알아봤다. 줄곧 그 시계를 사랑의 증표로 여겼기에 잘못 봤을 리가 없다. ‘왜 이 시계를 갖고 있는 거지?’얼마 전 안심은 그에게 진유나가 시계를 가져갔다고만 말했다. 어떤 걸 가져가는지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게 이 시계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심지어 진유나는 이 시계가 어떤 걸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유강후는 시계의 뜻을 모르는 듯 재빨리 손을 거두며 싸늘하게 말했다.“유나 씨가 선물해 준 겁니다. 회장님께서 아끼는 물건일지라도 다시 빼앗아 가는 건 상도덕에 어긋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평범한 시계일 뿐이잖아요.”“설마 그 정도 유치한 분은 아니시죠?”그 말을 들으니 시계를 돌려받는 건 더욱 불가능해졌다.진수현은 마음이 심란했다.그는 유강후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기회를 줄게요. 내 딸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거면 쟁취해 봐요. 다만 신
진수현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마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 유강후는 패기가 넘쳤다.사실 모든 조건만 따져봤을 때 유강후는 최고의 사윗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아들이 있었고 정말 사랑하는 연인도 있었다.진수현은 자신의 딸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사랑을 받길 원했다. 마음 정리조차 안된 남자에게 시집보내는 건 잊을 수 없는 일이고 다른 아이의 새엄마가 되는 건 더더욱 싫었다.염지훈을 사위로 택한 건 그의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진유나에 대한 감정이었고 눈빛만 봐도 뼛속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그 진심이 좋았다.“지금껏 아무도 감히 나한테 이런 태도로 말한 적이 없는데 강 대표님은 참 배짱이 크네요. 손에 주식이 좀 있다고 해서 제가 굽신거릴 줄 알았어요?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져요.”유강후는 눈을 내리깔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회장님은 아직도 저를 오해하고 계시네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머지않아 이 오해들이 완전히 풀릴 겁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건,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외부적인 요소 때문에 고민도 없이 저를 부정하는 건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한테도 경쟁할 기회를 주셔야죠.”“기회?”진수현은 웃음이 터졌다.“강 대표님이 생각하는 기회란 뭐죠? 상대를 잔인하게 처리하는 건가요? 갑자기 왜 청혼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사윗감으로 꼽은 사람이 있으니 괜한 희망을 갖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어차피 강 대표님은 노력해도 안 됩니다.”유강후는 주먹을 꽉 쥐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동국 신에너지 개발의 지분 50%, 말레이시아 해상 유전에서 오아시스 그룹이 차지하는 모든 지분, 그리고 오아시스 그룹이 갖고 있는 인근 해역 100년의 개발권과 운송권. 염지훈 씨는 이것들의 10분의 1도 내놓지 못할 겁니다. 회장님, 이렇게 봐도 제가 부족하나요?”진수현은 단호했다.“그게 중요한가요? 전 딸의 행복이 최우선인 사람이에요. 행복은 돈으로 해결되는 게
안윤희는 옆 거실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그러고선 밝은 미소를 지으며 안심에게 다가갔다.“이모, 저는 이모부랑 강 대표님에게 차 한잔 가져다드릴게요.”그 시각 안심은 방금 손에 넣은 핑크색의 다이아몬드 팔찌를 온다연에게 채워주며 끊임없이 예쁘다고 칭찬했다.그녀는 안윤희의 목소리를 듣고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뜸 물었다.“윤희야, 이거 어때? 유나한테 너무 잘 어울리지?”안윤희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그대로 얼어붙었다.그녀는 이 팔찌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건 동국 왕비가 차던 팔찌였는데 불과 얼마 전 경매에 나와 70억의 고가에 낙찰되었다.모든 여자의 로망이라고 불리는 팔찌를 안심이 갖고 있는 것조차도 놀라운데 평범한 선물인양 딸에게 건네는 그 모습을 보고 질투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안윤희는 진유나만 없다면 이 모든 게 본인의 소유라고 생각했다.‘왜 갑자기 나타나서 내 앞길을 막는 거야.’‘차라리 그냥 확 죽어버리지...’안윤희는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유나는 이모 닮아서 예쁘잖아요. 뭘 차든 다 잘 어울려요.”그 말을 들은 안심은 기분이 좋아진 듯 고개를 들어 안윤희를 바라봤다.“아참, 경매에 사파이어 귀걸이도 나왔어. 너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한 쌍 샀는데 집사님한테서 가져가.”안윤희는 눈을 내리깔았다.“고마워요, 이모. 저는 차 우리러 갈게요.”‘고작 사파이어 귀걸이로 내가 물러날 것 같아?’‘이거 받고 떨어지라는 느낌인가?’안윤희는 반드시 그녀가 소유했던 모든 것을 되찾기로 결심했다.그 시각 작은 거실. 진수현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강 대표님,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말도 없이 청혼이라뇨?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 아닌가요?”유강후는 공손한 태도를 유지한 채 태연하게 말했다.“유나 씨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진수현은 버럭 화를 냈다.“장난도 정도껏 해야죠,”그는 문 쪽을 힐끗 보고선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유나는 아직 모르니까 당장 그 지저분한 것들을 정리해서 가져가요. 괜히
‘그러니까 하루 종일 날 속였다는 거야?’‘아니, 설마 며칠 동안 속인 건가?’온다연은 최근 들어 지루 할때마다 유강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온갖 보기 싫은 자세를 취하기도 했고 방에 아무도 없을 땐 옷을 갈아입기도 했다.‘설마 다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온다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였다.“강 대표님, 사실 며칠 전부터 다 보였죠? 날 속이는 게 재밌어요?”눈물을 그렁이는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는 가슴이 아팠다. 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선 손을 뻗어 온다연의 눈물을 닦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울지 마요. 전보다 좋아진 건 사실이지만 아직 다 보이는 건 아니에요.”온다연은 그 말을 전혀 믿지 못하는 듯 유강후의 손을 뿌리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우리 친한 사이 아니잖아요. 함부로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이권이 밖에서 다급하게 외쳤다.“도련님, 회장님이랑 사모님께서 병문안 오셨습니다.”진수현과 안심이 찾아왔다.온다연은 재빨리 옷을 정리하고 눈물을 닦았다. 그녀가 창턱에서 뛰어내리려고 하자 유강후는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갑작스러운 행동에 온다연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우리 가족들이 왔잖아요.”유강후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제 막 입을 열려고 하자 온다연은 잽싸게 선방을 날렸다.“강 대표님, 저한테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지만 가족들 앞에서는 티 내지 마세요.”온다연은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저 다음 달에 약혼해요. 오늘은 강 대표님과 만나는 마지막 날이 되겠네요.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약혼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유강후는 표정이 어두워졌고 왠지 모를 살의가 느껴졌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꽉 쥔 주먹에는 서서히 핏줄이 튀어 올랐다.진씨 가문의 정보를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니 조금씩 단서를 얻었다.온다연은 정말 이곳에 약혼자가 있었다.그리고 그 상대의 성은 박, 이름
솔직히 말해서 온다연은 자신이 예전에 그를 짝사랑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유강후는 평범한 잘생김이 아니라 미친 듯이 잘생겼다. 수많은 여자들이 그의 뒤를 쫓아다녔다 한들 전혀 이상할게 없는 것처럼 말이다.자신의 짝사랑 상대가 그였다면 싫을 건 없었다.하지만 이제는 안된다. 곧 약혼하게 될 사람으로서 낯선 남자와 거리를 유지하는 게 올바른 행동이다.사실 그들의 관계는 이미 선을 넘고 있었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이때 등 뒤로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한숨을 쉬는 거예요?”온다연은 그제야 유강후가 뒤에 서 있었다는 걸 알아챘다.당황한 그녀는 재빨리 몸을 피하다가 유강후의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부딪혔다.유강후는 건장한 몸으로 그녀를 감쌌고 온다연은 순식간에 그의 그림자 속에 파묻혔다.때마침 붉은빛 노을이 두 사람 위로 늘어졌고 어느새 그들 사이에는 모호한 분위기가 맴돌았다.마치 평생 서로에게 얽혀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말이다.마음이 심란해진 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강 대표님, 솔직히 이제 다 보이는 거죠?”유강후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됐어요. 어차피 보이든 말든 상관없거든요. 내일부터 저는 오지 않을 겁니다. 최고의 간병인을 보내줄 테니 몸조리 잘하세요.”유강후는 진지한 표정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 부드러운 입술 위에 있던 점은 그녀에게 물려 하얗게 변했다.유강후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온다연, 내 허락 없이 이렇게 깨물면 안 된다고 했잖아.”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동시에 얼어붙었다.온다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예전 이름에 대해서 알고 있네요?”염지훈과 진수현이 얘기해준 적이 있어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온다연인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국에 온 이후로 그 이름을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강 대표가 이를 알고 있는 게 의아했다.
하지만 3년 동안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낸 후, 더 이상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지 않았다.그저 온다연이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고 눈앞에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안도감을 느꼈다. 딱 한 번만 안아보고 싶다는 간절함이 밀려왔지만 참아야만 한다.만약 온다연이 어느 날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면, 비참했던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한편으로는 어떻게 그녀의 용서를 얻어야 할지 몰랐다.결국 모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건 현재로서는 시간이 유일하다.온다연은 아무 말 없는 유강후를 바라봤다. 아직 그리움 속에서 허덕이는듯한 그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져 숨이 막혔다.“강 대표님이 사랑하는 그분... 저랑 많이 닮았나요?”‘그렇게 많이 닮았나? 눈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네.”그 한 글자에는 유강후의 진심이 담겨있었다.이미 예상한 반응이었지만 온다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고통스러운 느낌이 밀려와 너무 괴로웠다.‘얼마나 사랑하면 눈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걸까?’온다연은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불끈 쥐었다.최소 두 달은 걸릴 줄 알았는데 유강후는 예상보다 비교적 빨리 회복되었다.그의 상태를 들은 곽혜진은 또 이상한 약을 보내왔다. 유강후는 이를 복용했고 둘째 주에 곧바로 시력을 회복했다.다만 온다연의 얼굴을 똑똑히 보게 된 뒤로는 그녀와 헤어지는 게 아쉬워 못 보는 척 연기를 이어갔다.제일 고생하는 건 그의 연기에 맞춰야 하는 주변 사람들이다.때마침 이권이 서명할 서류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병실 문을 열어보니 유강후가 침대에 기대어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뚫어져라 지켜보는 모습이 보였다.그가 다가서자 유강후는 곧바로 싸늘한 눈빛과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나가.’하지만 지금 당장 서명해야 될 중요한 서류였기에 물러설 수가 없었다.이권은 중요한 사항이라며 여러 번 손짓했지만 유강후는 그를 무시한 채 침대에서 내려와 온다연에게 다가갔다.온다연은 창틀에 기대어 멍하니 바깥 바다를 바라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