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열리자, 나은별은 이내 고개를 들고 온다연을 바라보았다.온다연이 입은 옷을 본 그녀는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다.온다연은 그녀와 거의 같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아리따운 모습으로 문어귀에 서 있었는데, 불빛 아래서 피부가 희다 못해 빛이 났다.나은별은 순간적으로 자기가 밀린다는 느낌을 받았다.게다가 온다연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소녀미는 그녀가 비싼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다.온다연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는 온다연의 눈에서 분노를 읽었다.이때 유강후가 온다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깼어? 이리 와.”온다연은 시선을 거두고 유강후에게 다가갔다.그녀가 가까이 가기도 전에 유강후가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뒤이어 그는 컴퓨터를 끄고 온다연을 자기 다리 위에 앉힌 후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에 키스했다.“왜 이렇게 예쁘게 입었어?”나은별은 창백한 얼굴에 당장 사람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온다연은 고개를 쳐들고 천진한 표정으로 유강후를 바라보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이러지 말아요. 사람이 있는데.”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느새 새끼손가락을 몰래 유강후의 새끼손가락에 걸었다. 빨간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은 마치 키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유강후는 그녀의 이런 잔꾀를 이내 알아차리고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입술에 뽀뽀했다.“잔꾀가 진짜 많아.”온다연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그의 어깨에 파묻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은별 씨가 있는데...”그녀는 말하면서 곁눈질로 나은별을 슬쩍 보았다.나은별은 화가 나서 얼굴까지 일그러졌다.온다연이 속으로 코웃음을 치다가 입을 열려는데, 나은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강후 씨, 두 사람...”유강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지극히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보다시피 우리 사귀어.”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우리 사귄 지 오래됐어. 은별 씨가 생각하는 대로야.”나은별은 유강후가 그 자리에서 인정할 줄은 몰랐다.그녀의 눈에 온다연
유강후가 어리둥절해하며 미처 입을 열기 전에 나은별이 소리를 질렀다.“이게 고양이 간식이야?”온다연은 순진무구하게 눈을 깜박였다.“네, 구월이 간식이에요. 장 집사님이 직접 구월이를 위해 만든 과자인데, 구월이가 좋아하는 벌레도 들어있어요.”나은별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강후 씨,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유강후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단지 혼내는 의미로 온다연의 종아리를 꼬집었다.그러고는 담담하게 말했다.“회의 중이라 네가 뭘 먹는지 몰랐어. 그런데 고양이가 먹을 수 있는 것이면 사람도 먹을 수 있어. 죽지 않아.”나은별은 안색이 변하더니 목을 잡고 구역질했다.이때 온다연이 또 입을 열었다.“은별 씨는 고양이 털 알레르기가 있지 않아요? 아침에 고양이 세 마리가 그 의자에서 잠을 잤었는데, 간지럽지 않으세요?”마침내 나은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갔다.나은별이 나가자 온다연은 유강후의 몸에서 내려왔다.그녀는 뾰로통해서 나은별이 앉았던 의자 앞으로 가서 양털 쿠션을 바닥에 던지고 남은 간식도 쓰레기통에 버렸다.유강후는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그런 그녀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잔뜩 화가 난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를 쏘아보았다.“왜 그 여자를 내 의자에 앉혔어요?”유강후는 앙탈을 부리는 그녀의 모습이 그저 귀엽고 웃겼다.그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덤덤하게 말했다.“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는데, 그 여자가 제 마음대로 뛰어 들어왔어.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어디 앉았는지 어떻게 알아?”그가 이 일을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을 보고, 온다연은 더욱 화가 났다.동그랗게 뜬 그녀의 예쁜 눈에 분노가 가득 찼다.“그리고 왜 그 여자에게 제 간식을 먹였어요? 장 집사님이 직접 저를 위해 만든 것인데 왜 그 여자에게 줬냐고요?”유강후는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나지막이 말했다.“구월이 간식이라며? 왜 또 네 간식이 된 거지?”온다연은 화를 주체할 수 없어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제 거예요. 장 집사님이
그렇게 한참 동안 끈적한 분위기가 지속됐다.결국 강해숙이 직접 가서 식사하라고 문을 두드려서야 유강후는 겨우 온다연을 놓아주었다.과격한 키스 때문에 온다연은 입술이 빨개지고 일부분 피부가 벗겨졌다. 그녀는 까진 부분이 아파서 줄곧 숨을 들이마셨다.“아파요. 다음에는 좀 살살해 줄래요?”정신이 혼미해진 그녀는 말소리도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나긋나긋했다.게다가 살짝 촉촉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모습이 무척 매력적이었다.유강후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쉰 목소리로 말했다.“밖에서 다른 사람을 이런 눈으로 보면 안 돼. 알았어?”온다연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발목을 만지며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여기도 까질 것 같네요. 왜 자꾸 여기를 잡아요? 아파 죽겠네.”유강후는 빨개진 그녀의 발목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왜 이렇게 여려?”그는 단지 발목을 살짝 잡았을 뿐 별로 힘을 쓰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됐지?그가 내린 결론은 자기가 통제력을 잃고 너무 힘을 쓴 것이 아니라 그녀가 너무 여리다는 것이다.유강후는 이런 느낌이 좋았다. 그녀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듯한 느낌은 주식시장을 조작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었다.그는 허리를 굽히고 신발을 주워 신겨주었다.“나은별 때문에 화내지 마. 그럴 가치가 없어. 그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야.”온다연은 콧방귀를 뀌며 나지막이 말했다.“그 여자가 자꾸 저를 건드리잖아요? 이게 다 아저씨 때문이에요. 그 여자가 아저씨를 좋아해서 생기는 일이라고요.”유강후는 그녀의 얼굴을 꼬집으며 사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이전에는 네가 이렇게 질투가 많은 걸 왜 몰랐지?”그러더니 그녀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온다연은 얼른 그의 몸에서 내려왔다.“강 대표님도 계시는데, 이러지 말아요.”유강후는 그녀의 긴장된 모습을 보고 일부러 놀렸다.“아직도 강 대표님이라고 불러? 곧 결혼할 텐데, 결혼 후에도 강 대표님이라고 부를 거야?”온다연은 얼굴이 확 붉어졌다.“누가 당신이랑 결혼한대요?”그녀
하지만 그녀는 어쨌든 좋은 집안에서 자란 아가씨라 멘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강했다.식사 시간 내내 그녀는 애써 분노를 억누르면서 계속해서 웃음을 머금고 강해숙과 이야기를 나누었다.식사가 끝난 후, 강해숙은 다실에서 차를 끓였다.온다연은 차향을 맡으니 속이 좀 편해져서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나은별은 오늘 말이 특별히 많았고, 고상하고 우아한 화제만 골라 가며 강해숙의 비위를 맞추었다.강해숙도 예의상 얘기를 이어갔지만 사실 이미 싫증이 난 것 같았다.그동안 강해숙과 지낸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강해숙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며 나은별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십중팔구는 아들의 체면을 봐서일 것이다.온다연은 강해숙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는 나은별의 모습이 좀 우습게 느껴졌다.잠시 후, 장화연이 들어와서 강해숙의 귀에 대고 뭐라고 말하자 그녀는 잠깐 실례한다고 말하고 일어나서 나갔다.강해숙이 나가자 나은별은 즉시 표정이 바뀌더니 일어나서 온다연 쪽으로 걸어왔다.온다연도 이 순간을 기다리다가 인내심을 거의 잃을 뻔했다.그녀는 조용히 나은별을 바라보며 그녀가 다가오기 전에 입을 열었다.“강 대표님은 은별 씨를 전혀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눈치채지 못했어요?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웃겼어요.”나은별은 온다연 앞에 다가와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경멸하는 말투로 말했다.“그게 뭐 어때서요? 적어도 제가 왔다고 신경 쓰셨잖아요? 왜냐하면 저는 나씨 가문의 아가씨니까. 하지만 다연 씨는 아무것도 없는 고아예요. 강 대표님의 눈에는 지금 안고 있는 고양이보다도 못한 존재죠.”온다연은 품속의 구월이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코웃음을 쳤다.“그래요? 하지만 아쉽게도 저는 강 대표님의 인정이 필요하지 않거든요. 유강후만 저를 인정하면 되니까요.”그녀는 나은별을 힐끗 쳐다보았다.“은별 씨, 저를 상대할 힘이 있으면 어떻게 유강후한테서 더 많은 실익을 챙길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게 나을 거예요. 어쨌든 유강후는 당신에게 미안한 마음을
장화연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무슨 일인데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 온다연 씨가 여기서 쉬고 있는데 그렇게 떠들면 지장이 되잖아. 규칙을 하나도 몰라!”하인은 그제야 온다연이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유강후는 임신한 온다연이 잠이 많아 하인들에게 특별히 하인들에게 조용한 환경을 만들어주라고 분부했다.그래서 하인들은 평소에 일할 때 온다연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했다.그녀는 이렇게 큰 소리로 말했으니 확실히 잘못했다고 느끼고 급히 사과했다.“죄송해요. 잠시 깜박했어요.”장화연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야단법석을 떨어?”하인이 급히 말했다.“왠지 모르지만, 오늘 문 앞에 길고양이들이 가득 몰려오더니 나은별 씨에게 미친 듯이 달려들어 옷을 찢고 얼굴에도 생채기를 냈어요.”“그 고양이들은 우리가 쫓아도 가지 않고, 정말 이상해요. 장 집사님, 빨리 가보세요. 나은별 씨는 어쨌든 손님이잖아요.”“알았어. 네가 나가서 도와줘.”장화연이 말을 자르자, 하인은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장화연이 가려 할 때, 온다연이 구월이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저도 가볼래요.”장화연은 두꺼운 패딩을 꺼내 그녀에게 걸쳐주고 흰색 스노우 부츠를 갈아 신게 했다.“바깥이 추우니 구경을 해도 따뜻하게 입어야 해요.”온다연이 입을 오므리고 웃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장 집사님, 캣민트를 얼마나 넣은 거예요? 조금만 넣어서 이 세 마리 고양이에게 시달림을 좀 받게 하면 된다고 했더니 이 근처의 길고양이를 모두 끌어오면 어떡해요?”장화연이 정색하며 말했다.“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 여자가 고양이를 끄는 체질이라서 그런 거죠.”이때 밖에서 여인의 비명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딱 들어도 나은별의 목소리였다.“나가봐요.”출입문을 나서자, 나은별이 길고양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보였다. 몇 마리는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 하인들이 아무리 잡아당겨도 떨어지지 않았다.게다가 맞은편 골목에서 계속 길고양이들이 달려오
유강후는 이를 바득 갈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론 문 앞에 너무 많은 고양이를 불러들이지 마. 길고양이들은 야생성이 강해서 혹시라도 다치면 어떡하려고?”온다연은 모르는 척하며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했다. “고양이들을 많이 부르다니, 내가 무슨 신선이라도 돼서 고양이를 불러들이겠어요? 은별 씨따라 온 거예요.”유강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장화연에게 말했다. “은별이한테 갈아입을 옷 좀 가져다주세요. 분명 옷에 뭔가 묻어서 이렇게 많은 고양이들이 따라온 걸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을 불러서 고양이를 쫓아내세요.”장화연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도련님.”이때, 나은별의 울부짖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강후 씨!”“나 고양이가 너무 무서워. 나 좀 도와줘!”“강후 씨, 나한테 이러면 안 돼!”“재민아, 한재민, 나 너무 무서워, 나 좀 구해줘!”...유강후는 몸이 굳어진 채 발걸음을 멈췄다.온다연은 유강후의 옷을 꼭 붙잡고 놓지 않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은별 씨부터 구해줘요. 아저씨가 필요한 것 같은데.”유강후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집 안으로 들어와서도 온다연은 그의 몸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의 목을 감싼 채 머리를 목덜미에 파묻으며 작게 말했다. “저 배고파요. 아저씨가 만들어준 떡국 먹고 싶어요.”유강후는 소파로 가서 그녀를 내려놓으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온다연, 다음부턴 이러지 마.”그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나갔다.온다연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문 채 그를 따라 현관까지 갔다.다만 그녀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문 앞에 서서 조용히 엿들었다.밖에는 고양이가 몇 마리 더 왔는지 사람들이 쫓아내고 있었다. 고양이 울음소리는 조금 처참했다.그리고 나은별의 울부짖는 소리도 똑같이 처참했다.잠시 후, 소란이 멈추고 온다연도 그만 꽃방으로 돌아갔다.꽃방은 꽤 넓었다. 강해숙도 이곳을 좋아하는
온다연은 순간 움찔했다. 드디어 얘기하려는 건가?유강후가 먼저 이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그녀는 왠지 모르게 미묘한 긴장감이 돌았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고 싶으면 말해도 돼요.”유강후는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이마를 그녀의 이마에 맞댔다.곧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재민은 한이준의 형이야. 어릴 때부터 나랑 같이 자랐고 모든 친구들 사이에서도 우리 둘이 제일 친했어.”“재민은 엄청 유능한 친구였어. 내가 봐도 내 능력에 전혀 뒤지지 않는 사람이었지. 재민이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한씨 가문의 사업은 진수의 손에서 빠른 속도로 성장했어.”그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지고 점점 깊어지더니 어느새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어느 해였나? 나, 한재민, 한이준, 송지원, 봉현수, 그리고 함께 자란 여자애들 몇 명이랑 같이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갔어. 그런데 중간에 사고가 났고 난 바다에 빠졌어.”그는 극심한 고통에 빠진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온다연의 허리를 더 세게 감싸안았다.온다연은 그를 안아주며 천천히 등을 두드려 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그만 해도 돼요.”유강후는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나 스스로 헤엄쳐 올라갈 수 있었어. 그런데 그날은 유난히 날씨가 나빴고 주위에서 상어 떼가 발견됐지. 재민은 우리 중에서 수영을 가장 잘했어. 혹시라도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재민이 먼저 구명보트를 타고 내려왔어.”“참 신기한 게, 평소엔 그 지역의 상어 떼들이 절대 요트를 공격하지 않는데, 그날은 미친 듯이 우리를 쫓아오더니 찢어버리려 했어. 결국 난 구출됐지만 재민은 그대로 사라졌어. 우린 며칠 동안 재민을 찾아다녔지만 흔적조차 찾지 못했어.”온다연은 그의 몸이 점점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그의 손도 떨리는 듯하더니 목소리마저 고통스러워졌다.온다연은 그의 손을 꼭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나은별이 조금 철이 없을 수 있지만 지나치게 잘못한 건 없어. 날 봐서라도 은별이랑 다투지 않을 수 있어?”온다연은 가슴 속에서 실망이 솟구치며 공허함과 아픔을 느꼈다.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나은별을 믿어요? 나은별이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유강후의 목소리는 가라앉은 채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들렸다. “너무 지나치지 않는다면...”“아저씨!” 온다연은 그의 말을 가로챘다.“만약 나은별이 날 다치게 했다면?”유강후는 몸이 뻣뻣해지더니 자세를 바로잡고 온다연을 바라보았다. “나은별이 너한테 무슨 짓 했어?”온다연은 잔뜩 긴장한 유강후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그래, 믿지 않겠지.’그는 나은별과 함께 자란 어린 시절의 친구로 서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지독히도 얽혀있을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구해준 은혜도 있었다.나은별을 믿지 않고 그녀를 믿을 리 없었다.마치 그녀가 주한만 믿는 것처럼.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손을 내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손가락, 나은별이 밟아서 부러졌어요.”그녀는 반쯤 감긴 눈으로 무심하게 말했다. 보기엔 거짓말하는 듯한 기색이 없었다.하지만 유강후는 되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새끼손가락에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말했다. “내가 그런 거잖아. 다연아, 귀여운 농담하지 마.”온다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강후를 조용히 바라보았다.그는 천천히 길게 내려온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꽤나 진지하게 말했다. “앞으로 나은별이 네 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할게, 그럼 되겠어?”온다연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그녀의 눈에서 차오르는 실망감에 유강후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온다연의 손을 꼭 잡은 채 말했다. “지난번에 나은별이 호텔에서 구월이를 다치게 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오늘 너도 복수했잖아. 은별이도 얼굴이 긁혔으니 이
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어르신, 그 부부의 일에 대해 또 아는 것이 있으신가요?”할머니는 잠시 망설이며 유강후를 쳐다보았다.“주한의 일을 조사하러 온 거 아니었어요? 그 여자애 일은 왜 묻는 거죠? 혹시 그 여자애를 본 적이 있어요?”“옷을 잘 차려입은 걸 보니 많이 배운 사람인 것 같은데, 왜 허튼수작을 하려는 거죠? 그 여자애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을 거니까 가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다른 방으로 들어가 매트 위에 무릎을 꿇고 염불하기 시작했다.이권이 아무리 좋을 말을 해도, 아들이 아무리 설득해도, 할머니는 마음을 굳게 먹고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한 시간이 지난 후에도 할머니는 한마디도 하려 하지 않았다.어찌할 도리가 없는 유강후와 이권은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떠나기 전에 유강후는 할머니에게 말했다.“어르신, 예전에 그 여자애에게 베푼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안심하고 이 집에 그냥 사십시오. 이 거리는 철거하지 않을 것이고, 며칠 뒤에 사람을 보내서 수리하고 정비할 것입니다. 이곳을 다시 개조해서 예전 모습으로 되돌려 놓겠습니다.”할머니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유강후를 쳐다보았다.“누구신데, 총각이 말한 대로 되는 거예요?”유강후가 나지막이 말했다.“됩니다. 안심하고 지내세요.”할머니는 잠시 망설이더니 일어섰다. 그녀는 낡은 수납장을 한참 동안 뒤져서 오래된 앨범을 찾아냈고, 그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서 유강후에게 건넸다.“그 두 아이의 어릴 적 사진이니 가져가세요. 사진이 유용하게 쓰여서 하루빨리 그 짐승 같은 놈을 잡았으면 좋겠네요.”유강후는 사진을 받아서 들었다.잘 보관하지 못해 색이 바랜 곳도 있었지만,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찍은 사진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사람이 많았는데, 온다연은 주한의 뒤에 서서 옆으로 깨끗한 얼굴을 내밀고 카메라를 향해 수줍게 웃고 있었다.사진 속의 온다연은 여덟아홉 살 정도 되는 것 같았고, 일자 앞머리를 자른 모습이 유난히 순해 보였다.유강후가 본
“비슷한 일을 겪고 가정환경도 비슷해서인지 두 꼬마는 남매처럼 늘 붙어 다녔어요.”“여자애는 1~2년 사라진 적이 있는데, 친척이 데려갔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그 집에서도 잘 지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돌아올 때가 많았어요.”이 말을 들은 이권은 저도 모르게 유강후를 쳐다보았다.어두운 불빛 아래서도 유강후의 하얗게 질린 얼굴과 불끈 쥔 주먹을 볼 수 있었다.“여자애는 머리카락이 잘린 채로 돌아온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남자애는 작은 의자를 가져와 여자애를 문밖에 앉히고 세심하고 다듬어 주었어요.”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듯한 말투로 말했다.“그렇게 착한 아이가 왜 그런 사나운 팔자를 타고났는지, 아껴주는 사람도 없고! 좀 큰 두 아이가 막내를 데리고 서로 의지하며 컸어요.”“막내는 병이 있었고, 병원비가 많이 들었어요. 남자애는 그림도 잘 그리고 피아노도 잘 쳐서 과외를 하러 다녔는데, 항상 깨끗하지 못하고 더러운 병에 걸렸다는 뜬소문이 돌면서 며칠 못 가서 잘렸어요.”여기까지 말한 할머니는 침묵하며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유강후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 후에는요? 후에는 어떻게 됐어요?”할머니는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그 후 남자애가 괴롭힘을 당해 죽었다고 들었어요. 원래 배상을 받기로 합의됐는데, 어찌 된 일인지 받지 못했대요.”이 말을 들은 유강후는 고개를 들고 이권을 지켜보았다.이권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나지막이 물었다.“그 후에는요?”“그 후에는 여자애가 그 어린아이를 맡았는데, 아직 미성년이라 쉽지 않은 것 같았어요. 가끔 저도 두 아이가 불쌍해서 고기와 채소를 넉넉하게 사서 조금씩 갖다주기도 했어요.”“여자애는 어렸지만 오기가 있어서 남의 물건을 잘 받지 않았어요...”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여자애는 점점 예뻐지고, 집안은 그런 형편이니 잘못된 길로 들어설까 봐 정말 걱정됐어요...”그녀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고, 유강
할머니는 뭔가 생각난 듯 유강후와 이권을 다시 한번 쳐다보더니 입을 다물었다.첫머리를 듣고 끝나 버리니 유강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이권은 급히 일어나서 할머니 아들을 한쪽으로 불러 또 돈을 찔러주었다.아들이 할머니 귀에 대고 뭐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그제야 다시 입을 열었다.“이 일은 그 아이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라 원래는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당신들이 그 모자가 공정한 평가를 받도록 도와주겠다고 하니 말할게요.”그녀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그 아이의 엄마는 둘째 아들을 낳은 후 자기 남편이 밖에 애인이 있고, 게다가 애인이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충격으로 정신이 나갔어요. 그 바람에 두 아이가 고생이었는데, 그때 큰애는 예닐곱 살, 작은애는 네댓 살에 불과했어요...”“하지만 남편은 아내가 미친 후 더욱 낯가죽이 두꺼워져 동성 애인을 공공연히 집에 데리고 왔어요. 정말 뻔뻔스럽기 짝이 없더군요.”“주한의 아버지는 정말 짐승 같은 놈이었어요.”“한번은 저녁에 그쪽을 지나다가 안에서 아이가 구슬피 우는 소리가 들려 들여다봤더니 그 아이가 아랫도리가 피투성이 된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어요...”할머니는 흥분하며 욕설을 퍼부었다.“짐승만도 못한 놈! 그때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것이 평생 후회돼요...”유강후와 이권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두 사람 모두 놀랍고 믿을 수 없는 눈빛이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그때 당시 이 거리에서 그 장면을 본 사람이 많았어요. 하지만 그때의 이웃들이 다 이사를 가서 조사하기 힘들 거예요.”“한번은 애가 심하게 반항하자, 그놈과 애인이 애를 거의 반죽음이 되도록 때리고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공중화장실에 버렸는데, 어떤 여자애가 구했대요.”할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그때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했고, 그 짐승은 질겁해서 도망치더니 감히 돌아오지 못했어요. 그때부터 그 남자애의 생활이 좀 나아졌어요.”“미쳐버린 엄마는 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 짐승이 한 짓을 알게 되어 몰래
이권은 조금 놀랐다.“하지만 지금은 저녁인데요...”유강후는 코트를 들고 일어서며 말했다.“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준비해서 나랑 같이 가.”유강후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성격이기에 이권이 아무리 반대해도 소용이 없다.한 시간 뒤, 유강후와 이권은 온다연이 이전에 살던 옛집 맞은편 골목 어귀에 나타났다.철거 예정이라 이곳의 도로와 담장은 보수되지 않은 상태였고, 비까지 내려 길이 매우 질퍽거렸다.가로등도 없고 근처의 고층 건물에서 나오는 불빛에 의존했다.이권은 한 손에 물건을 가득 들고, 다른 한 손에 방금 매점에서 구매한 손전등을 든 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일 다시 오는 게 어떨까요? 셋째 도련님, 길이 너무 형편없네요.”돌길에는 흙탕물이 넘쳐흘렀고, 양쪽의 집들은 비어 있는지 처마가 사람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허름했다.유강후는 그의 손에서 손전등을 낚아채더니 냉랭하게 말했다.“이 길이 걷기 어려워? 권아, 넌 그동안 너무 편안하게 살았어.”이권은 유강후의 그 비싼 옷이 아까워서 한 말인데, 그가 이렇게 나오니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손전등을 비추며 골목 끝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집 안에 불이 켜져 있었지만, 그들이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열어주는 사람이 없었다.두 사람이 속수무책일 때 옆집에서 누군가 나오더니 그들을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이 집 사람을 찾아왔어요?”이권이 급히 담배 한 대를 건넸다.“형씨, 이 집 할머니가 집에 안 계셔요?”그 사람은 담배를 받더니 약간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몰라요. 저는 그냥 물건을 가지러 잠깐 들렀을 뿐이에요.”“이 집은 할머니와 남편분이 수십 년 동안 살아온 집인데, 곧 철거에 들어가요. 아들이 몇 번이나 모셔가려고 왔지만 한사코 버티고 있어 철거팀과 주민위원회도 방법이 없나 봐요. 이 시각에 문을 두드리면 쫓아내려고 그러는 줄 알고 문을 열지 않을 거예요.”이권이 웃으며 말했다.“혹시 할머니 아드님 전화번호를 받
유강후는 몸이 약간 경직되어 있었다. 그녀는 까치발을 하고 고개를 쳐든 후 그의 턱에 뽀뽀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우리가 그 일은 하지 않았다고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는 그녀를 안아 들었고, 몇 걸음 만에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가 자주 묵던 방에 들어선 그는 침대에 앉아 그녀를 자기 다리에 올려놓은 후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온다연은 그의 시선에 머리가 쭈뼛 섰다.그녀는 유강후가 정말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온다연은 어떻게 해야 화를 풀어줄 수 있을지 몰라 가녀린 손으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입술을 깨물었다.“아저씨, 저, 저는 정말...”유강후는 굳은 얼굴로 젤리같이 매혹적인 그녀의 입술을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뽀뽀한 적은 있어?”온다연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연인도 아닌데 왜 뽀뽀를 하지?’하지만 이마에 뽀뽀한 적은 있다.그래서 그녀는 성실하게 대답했다.“이마에 뽀뽀한 적이 있어요.”그녀를 껴안은 유강후의 손에 갑자기 힘이 실렸다. 활활 타오르는 질투심 때문에 그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온다연은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잘못을 저지른 초등학생처럼 말랑말랑한 목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비위를 맞추고 용서를 빌려는 의미가 다분했다.하지만 질투심에 불타는 유강후는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응대하지 않았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예전처럼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그의 입술에 갖다 댔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이전에는 이 방법이 가장 잘 통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가 뽀뽀해 주면 다 해결됐다.하지만 오늘은 뽀뽀해 줘도 아무 반응이 없다. 그의 차가운 태도는 그녀를 서럽게 했다.온다연은 당황해서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이 말했다.“저를 상대하기 싫어요? 그러면 저는 먼저 돌아갈게요.”유강후는 여전히 말없이 차가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더욱 서러워진 온다연은 천천히 그의 몸에서 내려
온다연이 나지막이 말했다.“주희야, 남하윤 씨는 좋은 사람이고 너한테도 잘하니까 잘 만나 봐. 더 이상 그런 극단적인 짓을 하지 말고. 뭐가 소중한지를 알아야 해.”주희는 눈을 내리깐 채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고 나지막이 말했다.“누나는 그렇게 사는 게 좋아요?”온다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주희야, 내게는 사랑하는 아기가 있어.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 너도 앞으로 나아갈래?”조용히 웃는 주희, 웃는 모습이 우는 것 같았다.“누나, 예전에 우리 셋이 약속했잖아요. 누나가 집을 받으면 함께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가서 살기로. 이제 나는 돈이 부족하지 않으니 집을 받지 않아도 돼요. 나랑 함께 떠나는 게 어때요?”온다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유강후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옛날 일을 가지고 역겹게 굴지 마. 나와 다연은 아이가 있고 곧 결혼도 할 거야. 죽고 싶으면 혼자 조용히 죽어.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고.”주희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유강후를 가리켰다.“누구나 다 되지만 저 사람은 안 돼요. 유강후는 유씨 집안 사람이잖아요.”“형이 어떻게 죽었는지 잊었어요? 유씨 집안 사람한테 죽임을 당했잖아요. 누나가 다른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반대할 권리가 없지만 유씨 집안 사람은 안 돼요.”온다연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주희야, 그렇게 오랜 세월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너도 알잖아. 이제 아기가 생겼으니 쓸데없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 그 사람이 누구든 상관없고, 내 아이의 아빠면 돼.”주희는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누나는 우리 형과의 약속을 잊었네요. 스물다섯 살 때...”온다연이 직접 그의 말을 잘랐다.“그건 나와 네 형 사이의 일이니 너와 상관없어.”그녀는 주희 옆에 있는 남하윤을 쳐다보았다. 남하윤은 극히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그 시선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주희야, 나는 앞으로 내 아이와 함께 앞으로 나아갈 거야. 더 이상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을 거니까
이때 밖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이권이 뛰어 들어와 유강후의 손을 붙잡고 조용히 말렸다.“셋째 도련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이 사람이 죽으면 온다연 씨한테 뭐라고 설명하시겠어요?”유강후는 눈이 빨개지며 몸에서 독기를 내뿜더니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체형이 비슷한 사람을 찾아 얼굴이 바꾸면 돼. 어차피 다연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 알아보지 못할 거야.”그가 말하면서 손에 힘을 주자, 주희는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조금 전까지 발버둥 치던 그가 갑자기 조용해졌고 눈도 감았다.온다연이 만나기 싫어한다는 말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했다.이권은 곧 큰일 날 것 같아 필사적으로 유강후의 손을 잡아당기며 다급하게 말했다.“뭔가 하시더라도 여기서 하시면 안 돼요. 도련님, 손을 놓으세요.”이때 남하윤도 들어왔다.그녀도 이 장면을 보고 혼비백산하며 달려와 필사적으로 유강후의 팔을 잡아당겼다.“대표님, 제발 놔주세요. 주희가 성격이 안 좋아서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을 했을 거예요. 제가 즉시 데려가겠습니다.”하지만 그녀는 유강후를 움직일 수 없었다.엉겁결에 온다연이 생각난 남하윤이 즉시 소리쳤다.“대표님, 온다연 씨와 곧 결혼하실 텐데, 결혼 전에 인명 사고가 발생하는 건 좋지 않아요. 불길하잖아요.”“그리고 이곳은 병원이고, 온다연 씨가 바로 위층에 있어서 소동이 커지면 알게 될 거예요.”이 말을 들은 유강후는 눈에 더욱 독기가 서렸지만 천천히 손을 놓았다.이를 본 남하윤이 급히 주희를 붙들었다.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이건 마지막 경고야. 또 한 번 나와 온다연의 일에 참견하면 그때는 남씨 가문도 너를 지키지 못해.”그는 남하윤을 힐끗 보았다.“데려가요.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해요. 매번 선의를 베풀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다음에는 남하윤 씨 체면도 봐주지 않을 거예요.”말을 마친 그는 넥타이를 잡아당겼다.잠깐 사이에 그는 차분하고 존귀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방금 사람을
“3월 25일까지 한 달 남짓 남았는데, 그날이 정말 기대되네.”“그날이 되면 누나는 빨간색 스카프를 매고 형을 그리워할 거야.”“그 스카프는 누나가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형이 생일 선물로 준 것인데, 누나는 정말 좋아했어. 그때는 아까워 매지 않았지만 형이 죽은 후 매년 그날이 되면 그 스카프를 매고 형을 추모했어.”유강후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무척 기분 좋아진 주희는 계속해서 그를 자극했다.“누나가 입은 흰색 옷들은 당신이 골라준 거지? 불쌍하네. 이렇게 오래됐는데 누나가 어떤 색깔을 좋아하는지도 몰라. 누나는 빨간색을 좋아하고, 해바라기색도 좋아해...”유강후는 움직이는 그의 입술을 보면서 속에서 분노가 조금씩 치밀어 올랐다.온다연이 해바라기를 좋아한다는 건 알지만 그녀가 빨간색을 좋아한다는 건 처음 듣는 소리다.하지만 주희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온다연은 확실히 빨간색 스카프를 가지고 있다.버들개지가 흩날리던 어느 날 저녁, 본가의 대문 밖에 온다연이 검은색 옷차림으로 서 있었는데, 평소에 본 적이 없는 빨간색 스카프를 매고 있었다.그때는 봄인데도 날씨가 추워서 스카프를 매는 게 정상이었다.하지만 그녀가 그 스카프를 맸을 때 얼마나 예뻤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그날 저녁, 유강후가 차를 몰고 그녀의 곁을 지나갈 때 그녀의 머리카락과 옷이 바람에 휘날렸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유강후는 그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다.석양 아래서 먹물 같은 머리카락과 검은색 옷차림 때문인지, 피부가 눈보다 더 흰 것 같았고 입술은 짙은 붉은색을 띠었다. 버들개지가 눈송이처럼 그녀의 머리 위에 내려앉아 슬픈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그녀는 조금 전에 울었는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얌전히 거기 서서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당시 가슴이 쿵 하는 느낌이었다.바로 그 순간, 유강후는 인내심을 잃고 앞당겨 행동을 개시하기로 했다.그 후 얼마 지나지 않
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보더니 말했다.“여기서 아기를 좀 더 보고 있어. 전화 좀 받고 올게.”아기에게 정신이 팔린 온다연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그래요.”방에서 나온 유강후는 직접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남하윤은 주희의 병실에 없었다.주희는 창백한 얼굴로 병상에 기대어 앉아 사람을 갈기갈기 찢으려는 듯이 날이 선 눈빛으로 유강후를 쏘아보았다.유강후도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는 키가 큰 데다 카리스마가 있어 같은 높이에서 마주 보아도 상대방을 작아지게 한다.그런 그가 이렇게 내려다보면 상대방에게 한없이 비천한 느낌을 준다.주희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강후가 그렇게 보고 있으니, 마음속에서 비천하고 어두운 생각들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그는 지금처럼 자신의 출신과 무능함이 싫었던 적은 없다.하지만 유강후에게 이런 생각을 들키면 안 된다.그는 일부러 경멸의 눈빛을 지었다.“당신은 나를 구한 것을 후회하게 될 거야. 유강후, 나는 당신을 누나 곁에 두지 않을 거야.”유강후는 개미 한 마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어떻게 막을 건데?”“스타인 너의 인지도로? 아니면 남씨 집안 아가씨의 재력으로?”그는 말하면서 손가락에 낀 반지를 문지르더니 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솔직히 말해서, 너를 죽이는 것이 개미 한 마리를 죽이는 것보다 쉬워.”“그리고 남씨 집안은 절대 너를 위해 나와 맞서지 않을 거야.”“주희야, 좀 똑똑하게 굴어. 네 형의 은혜를 잊지 못하는 다연의 마음을 잘 이용하고 나랑 얘기할 때 예의를 갖추면 너한테 많은 득이 될 거야.”“스타가 아니라 엔터 회사를 차리는 것도 문제 되지 않아.”그는 거들먹거리면서 주희를 힐끗 보았다.경멸에 찬 그 모습은 더없이 모욕적이었다.“안타깝군. 온다연의 관심을 끌려고 투신자살할 생각을 하다니.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아무도 너를 존중하지 않아.”주희는 화가 나서 이마에 핏줄이 섰지만 억지로 분노를 참으로 코웃음을 쳤다.“다른 사람의 존중 따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