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천천히 걸어가서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차가운 모습으로 나은별을 돌아보며 물었다.“아침에 화분 던진 사람 은별 씨 맞죠?”나은별은 안색이 확 변하면서 받아쳤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나 똑똑히 봤는데. 설마 발뺌할 생각이에요?”나은별은 그녀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처럼 말했다.“다연 씨 미쳤어요?”“내 앞에서 연기할 거 없어요. 나랑 아저씨가 어떤 사인지 발견하고 날 죽이려는 거잖아요. 아니에요?”나은별은 잠깐 침묵했다. 연기로 만들어진 나약함은 완전히 사라졌다.그녀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맞으면 어떡할 건데요? 나랑 강후 씨가 어떤 사인지 몰라요? 강후 씨는 다연 씨 말을 안 믿을 거예요.”“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나한테 더 흥미를 느끼고 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은별 씨랑 결혼 안 하게 할 재주는 있다는 말이죠.”나은별은 안색이 확 변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덤덤했다.“나대지 마요. 이건 나랑 강후 씨 사이의 일을 넘어선 집안끼리의 약속이니까요. 시간 때우는데 쓰는 장난감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난 강후 씨가 밖에서 반려동물 키우는 거 반대 안 해요. 자주 있는 일이잖아요. 유씨 집안에서도 신경 안 쓸 거예요. 어차피 나한테 돌아올 걸 다 아니까요.”온다연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평온한 얼굴로 나은별을 바라봤다.“혹시 연서라고 알아요? 아저씨가 좋아하는 사람은 연서라는 분이에요. 은별 씨랑 결혼한다고 해도 연서의 대용품으로 여겼을 뿐이에요. 그렇게 보면 은별 씨도 반려동물과 다름없지 않나요?”나은별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설마 연서가 누군지 몰라요? 하, 아니다. 다연 씨 말이 맞아요. 강후 씨는 연서를 제일 좋아해요. 버림받고 싶지 않으면 함부로 그 이름 언급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유씨 집안사람 앞에서도요.”‘유연서를 강후 씨가 좋아하는 사람으로 오해한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런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하지?’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재수 없는 년, 내가 먹여주고 키워준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는 거야?”심미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다시 한번 온다연의 뺨을 때렸다.“얼마나 지났다고 하령이를 이어서 민준이까지 이렇게 만들어? 너 때문에 우리 집안이 발칵 뒤집혔어! 네가 이러면 내 처지가 어떻게 돼?”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온다연을 때리려고 손을 들었다. 온다연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차갑게 말했다.“심미진 씨가 언제 저를 키워줬다고 그래요? 심미진 씨는 잘 알잖아요. 알면서 그런 말 하는 거 양심에 찔리지 않아요? 아니면 제가 유씨 집안에서 어떤 취급 받으며 살았는지 잊었어요? 유민준이랑 유하령이 저를 괴롭힐 때, 심미진 씨는 어디에 있었죠?”심미진은 순간 멍해졌다. 이게 정말 온다연인가 싶었다. 온다연이면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그녀는 화가 치밀어 얼굴이 붉어지며 소리쳤다.“온다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해?”온다연은 심미진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더 이상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전에도 말했다시피, 저희는 인연을 끊었어요. 심미진 씨는 더 이상 제 이모가 아니에요. 제가 무슨 일을 하든 심미진 씨와는 상관없어요. 그러니 앞으로 제 앞에서 예의 좀 지켜요. 저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 없으니까요.”나은별 앞에서 면박을 당한 심미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온다연을 가리키며 욕을 퍼부었다.“이 배은망덕한 것! 내가 없었으면 넌 벌써 죽었어! 길가에서 굶어 죽었을 거라고! 내가 널 숨겨주지 않았다면, 네 도박꾼 아버지가 진작 널 팔아버렸을 거야!”그녀는 말하다 말고 문득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걸 깨닫고 입을 틀어막았다.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놓치지 않고 듣고는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방금 뭐라고 하셨죠? 제 아버지요?”그녀의 아버지 온준용은 10년 전 첩과 첩의 아들도 함께 바다에 빠져서 죽었다고 했다.심미진은 잠시 멈칫하더니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내 뜻은... 너희 엄마가 죽고 나서 팔아넘기
온다연이 지금과 같은 처지가 된 건 유강후의 잘못도 있었다. 그녀는 유씨 집안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던 유강후의 말만 아니었어도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유강후를 포함한 유씨 집안사람 모두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온다연은 창가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아름다운 동상이라도 된 것처럼 연약한 몸집으로 가만히 서서 대화를 거절했다.오늘은 동짓날이다. 주한이 있을 때는 항상 양갈비를 사서 고소한 국물을 만들었다. 그녀와 주희는 곁에 서서 군침을 흘리고는 했다.주한은 국물에 당근과 상추도 넣었다. 그녀의 그릇에는 특별히 좋아하는 고추 양념도 넣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는 겨울과 연상 되는 맛이었다.거위 털 같은 눈은 겨울바람과 함께 마구 휘날렸다. 이 세상 전부 하얗게 뒤덮을 기세였다.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져 갔다.온다연이 계속 창가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장화연은 양털 카디건을 걸쳐줬다.“오늘 저녁 폭우가 내린답니다. 기온은 영하 20도로 떨어집니다. 따듯한 거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준비시키겠습니다.”온다연은 이제야 몸을 움직이며 구월이를 내려놓았다.“밖에 있는 사람들은 갔어요?”“네, 갔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여기에 들어올 리는 절대 없습니다.”“유민준은요?”“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셋째 도련님이 아직 안 돌아오신 걸 봐서는 심하게 다치신 것 같습니다.”온다연은 말없이 구월이를 쓰다듬었다.“집사님은 혹시 연서가 누군지 알아요?”장화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몸이 굳었다. 유연서와 유강후는 그녀가 어릴 적부터 키워온 아이들이다.그녀는 10대 때부터 두 사람을 보살펴왔다. 기억 속의 천재 소녀 유연서는 그녀를 화연 언니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좋은 것이 생기면 항상 그녀부터 챙겨주고는 했다.그러던 10년 전, 천재 소녀는 한낱 독감 때문에 비 오는 날 생을 마감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너무나도 아픈 일이라 유씨 집안사람도, 강씨 집안사람도 절대 언급하지 않았다. 이 정도
온다연은 고개를 돌렸다. 유강후는 마침 밖에서 들어오고 있었다.눈보라가 거셌는지 그의 어깨에는 눈꽃이 쌓여 있었다. 그는 냉기를 뿜어내며 무거운 표정으로 온다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온다연은 구월이를 내려놓고 그의 코트를 벗겨서 걸어놓았다. 그러고는 따듯한 차를 따라주면서 물었다.“민준 오빠는 어떻게 됐어요?”유강후는 한 손으로 찻잔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를 품에 안으며 입을 맞췄다.“아직 혼절 상태야.”“아저씨도 저 때문이라고 생각하죠. 제가 아니었으면 아무도 다치지 않았을 거예요.”그녀는 목이 완전히 드러나는 스웨터를 입고 고개를 숙였다. 뽀얀 목선에 드리워진 검은 머리카락은 아주 유혹적이었다.유강후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예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안고 침실에 가려고 했다. 그의 변화를 느낀 온다연은 황급히 말했다.“안 돼요. 저녁 먹을 시간 다 됐어요.”유강후는 그녀의 목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내가 더 급해.”걱정거리가 많았던 온다연은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그녀는 점점 더 세게 반항하면서 말했다.“싫어요. 지금 그럴 기분 아니에요. 억지로 이러는 거 싫어요.”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렸다.“유민준 때문에 그래?”“...네.”“허락도 없이 다른 남자를 생각하는 거야?”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병원에 있어야 하는 사람은 저니까요.”유강후는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그래서 걔가 좋다는 거야, 뭐야?”온다연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무 말도 안 했다. 축 늘어진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는 더욱 불쾌해졌다. 그는 그녀의 턱을 잡으면서 말했다.“앞으로 다시는 친구 얘기 꺼내지 마. 네가 이상한 친구를 사귀지만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야. 너한테는 나만 있으면 돼. 친구는 필요 없어, 알았지?”유강후는 강압적으로 그녀를 침실로 데려갔다.저녁 식사를 끝낸 장화연은 침실 문에 노크하려고 했다. 그러나 침실 문은 닫혀 있지 않았다. 문틈 사이로 신음과 온다연의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거
이렇게 3, 4일 동안 난리를 치다 보니, 유씨 집안사람들은 극도로 지쳐 있었다.새엄마 역할을 잘 해내고 싶어 했던 심미진도 사흘 밤낮을 새운 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휴게실에서 한숨을 내쉬며 앉아 있었다.유자성은 창가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는 얼굴이 잿빛이 되어 돌아서며 말했다.“제가 온다연을 데려올게요.”이 말을 들은 강해숙은 화가 치밀어 올라 소리쳤다.“안 돼! 난 그년을 보고 싶지 않아!”유자성은 계속해서 말했다.“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민준이 아무도 가까이 오게 하지 않아서 의사조차 접근하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은 아마 온다연만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온다연을 불러서 며칠간 돌보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약을 바꾸거나 검사를 하는 것도 어려울 겁니다.”심미진은 잠시 망설이며 말했다.“그건 강후 씨가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강해숙은 화가 나서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내리치며 말했다.“동의하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어. 민준이는 그년 때문에 다친 거니까, 와서 며칠 돌보는 건 당연한 일이야! 참 지독한 년이지. 민준이가 이렇게 다쳤는데도 얼굴 한 번 안 비추네. 천성이 나쁜 건 역시 어쩔 수 없어. 저건 집안 내력이야.”말을 마친 강해숙은 또 심미진을 흘겨봤다. 심미진은 난처한 듯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당장 강후한테 전화해서 그년을 데려오라고 해. 친조카를 놔두고 왜 남을 싸고돈단 말이냐! 강후 걔 유씨 집안사람이 맞기는 한지, 전화해서 물어봐!”유자성은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제가 전화해 볼게요.”유강후는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온다연은 사무실 소파에 앉아서 구월이와 놀고 있었다.유자성의 말을 듣고 유강후는 가볍게 응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온다연의 손에서 장난감을 빼앗으며 말했다.“이따가 나랑 같이 병원에 가서 민준이 좀 보자.”온다연은 가볍게 대답했다.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러자 유강후가 다시 물었다.“넌 가고 싶어? 가기 싫으면 가지 마. 안 가도 죽지
유강후는 싸늘한 시선으로 유민준을 보았다.그는 키가 컸고, 또 유민준은 침대에 기대어 누워있었던지라 유강후가 그를 내려다볼 때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유민준은 어릴 때부터 그를 두려워했었다. 비록 어릴 때 일과 만났던 사람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유강후를 보며 느끼는 두려움은 뼛속까지 새겨진 두려움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그가 내려다보니 유민준은 등골이 서늘해졌다.다만 유민준의 시선이 다시 한번 온다연의 손을 잡은 유강후의 손으로 갔다. 순간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유강후에 대한 두려움마저 이겨버렸다.“그 손 놓으세요! 다연이는 제 여자친구예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유민준, 정말로 기억 상실이어야 할 거야. 그러지 않았다면 당장 아프리카 정글 같은 곳에 던져 버렸을 거니까.”지금 유민준의 머릿속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오직 온다연만 남았다.온다연을 보았을 때 수많은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령 완전히 기억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온다연에 관한 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그는 머리가 아팠다. 고통스럽게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감쌌다.옆에 있던 간호사들이 놀라 얼른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그러나 유민준은 미쳐버린 사람처럼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공격했고 심지어 병원 의료 기계마저 밀쳐 망가뜨렸다.그는 고통스러운 눈길로 온다연을 보았다.“다연아, 내가 잘 못 했어. 내가 다 미안해. 그러니까 나한테서 그만 멀어지면 안 돼?”온다연은 이성을 잃은 그의 모습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유강후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자신을 무서워하며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 숨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유강후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그는 머리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을 신경 쓸 겨를이 없이 링거 줄을 확 빼며 그녀에게 달려갔다.대체 어디서 이런 힘이 솟아났는지 모르겠지만 유강후를 밀어낸 뒤 뒤에 있던 온다연을 꽉 끌어안았다.그리곤 다급하고 불안함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다연아, 예전의 일은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너한테
그러나 격렬한 통증이 밀려와 유민준은 머리를 감싸며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었다.“다연아... 가지 마...”놀라 멍하니 서 있던 사람들도 정신을 차리고 얼른 그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하지만 유민준은 여전히 자기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유강후는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온다연의 손을 잡고 가버렸다.막 문밖으로 나왔을 때 최금영이 마침 휴식실에서 나왔다.그녀는 잔뜩 언짢은 시선으로 온다연을 보며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온다연, 민준이 곁에 있어 주지 않고 또 어디를 가는 거냐?”온다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최금영이 계속 말을 이었다.“민준이는 너 때문에 다친 거다. 며칠이나 지났는데 병문안도 안 오고, 양심은 있는 거니?”온다연이 입을 열려고 하자 유강후가 강대한 기세를 내뿜으며 그녀의 팔을 꽉 잡았다.“하실 말씀이 있으면 저한테 하세요. 온다연한테 하지 마시고요. 저한테 심한 말을 하셔도 상관없으니까요.”온다연은 최금영을 보며 다소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할머님, 민준 오빠가 절 위해 다친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민준 오빠한테 빚을 진 건 아니잖아요. 저랑 민준 오빠는 이 일로 더는 서로 빚진 것이 없는 거예요.”최금영은 분노가 치밀었다.“천박한 X, 감히 내 앞에서 그딴 말을 해?! 민준이는 너 없이는 못 산다고 난리인데, 너는 감히 민준이를 피하는 거냐! 안 된다, 못 간다! 당장 여기 남아서 민준이 곁에 있어 줘! 민준이 잘 보살펴주면 나중에 내가 널 민준이 내연녀 정도로는 허락해주마. 만약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한다면 내연녀도 꿈 깨!”“아, 그리고 경고하나 하지. 넌 그냥 내연녀, 딱 그 정도일 뿐이다. 민준이는 절대 너랑 결혼하지 않을 거야. 민준이가 결혼해야 할 사람은 오직 집안 수준이 맞는 부잣집 딸 뿐이지. 만약 계속 민준이를 홀려서 민준이가 결혼하겠다고 난리를 피운다면, 그땐 가만두지 않을 거다!”이때 심미진도 거들었다.“다연아, 얼른 가서 민준이를 챙겨줘. 민준이가 널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온다연은 유강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품에 파고들었다.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무서워요. 할머님이 절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으로 보고 계셨어요.”유강후는 얼른 그녀를 안고 엘리베이터 벽으로 밀친 채 한참 키스하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제야 입술을 떼며 말했다.“앞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거나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전부 해. 설령 네가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있으니까.”온다연은 처음으로 유씨 집안사람들에게 화를 내어봤던지라 속이 조금 후련하기도 하여 미소를 지었다.“만약 그 사람들이 아저씨랑 제가 이런 사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요?”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와 유강후의 사이는 원래부터 떳떳한 사이가 아니었다.그녀는 대용품이자 놀이 상대였기에 유강후가 그녀와의 사이를 밝힐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유강후는 이런 그녀의 생각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쏙 들어간 그녀의 보조개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이때 또 한 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왔다. 온다연은 얼른 그의 허리에 올린 손을 내렸다.“누가 와요.”유강후는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그도 손을 내리며 그녀의 턱을 잡고 뽀뽀했다.“뭘 두려워하는 거지?”‘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어차피 내 일에 유씨 가문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는데 말이야.'원래는 일단 먼저 한재민과 나은별 사이를 밝힐 생각이었지만 다소 마음이 급해진 그는 일찍 그녀와의 사이를 공개하고 싶었다.하지만 공개 후 온다연이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는 생각을 하니 항상 거침없이 과단성 있게 행동하던 그는 다소 망설이게 되었다.그는 그녀를 꼭꼭 숨겨두어 평생 지켜주고 싶었다.이때 발걸음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며 온다연은 긴장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났다. 얼굴이 다소 발그레해졌다.“여기서는 안 돼요. 사람이 있잖아요.”유강후는 그녀를 놓아줄 사람이 아니었다
예전의 기억만 떠올리면 느껴지는 행복에 안심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짓게 되었고 온다연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온화하게 말했다.“우리 딸, 지훈이가 생각난 거야? 북아메리카 쪽에서 아주 순조롭게 일 진행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한 달 뒤면 돌아올 거야. 곧 올 거란다.”온다연은 꾸물꾸물 일어나더니 안심의 다리를 베면서 작게 물었다.“엄마, 저는 꼭 염지훈 씨랑 결혼해야 하는 거예요?”안심은 딸이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몰랐다.“어릴 때부터 약속한 거잖니. 그리고 몇 년 동안 지훈이가 널 계속 보살펴 주고 있기도 했고 내가 보기엔 두 사람 어느 정도 서로에게 감정이 있었던 같던데. 아니었니? 그건 왜 갑자기 물어보는 거니?”온다연은 시선을 내리깐 채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만지작거렸다.머릿속에 온통 유강후와 키스했던 장면이 떠올라 얼굴이 더 붉게 물들어버렸다.“별건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요.”그녀는 재벌 가문이라면 정략결혼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호의호식하면서 자랐으니 당연히 어른이 되면 가문의 미래와 그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염지훈과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염지훈 어머니의 가문은 신국에서도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 비록 진씨 가문보다는 못했지만 염지훈은 3년 동안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내며 신국의 젊은 세대 중 단연 독보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 점으로 가문의 부족함을 충분히 메울 수 있었다.제일 중요한 것은 그녀의 부모님이 염지훈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이다.그녀가 바꿔치기 되어 어딘가로 사라진 후에도 그녀의 부모님은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았기에 그녀는 진수현과 안심의 외동딸이 되었다. 앞으로 진씨 가문을 이어받아야 할 사람도 그녀였기에 염지훈은 최고의 강력한 조력자였다.하지만 정말로 이대로 염지훈과 결혼해도 되는 것일까?그녀는 나직하게 말했다.“염지훈 씨는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안심은 멍 때리는 딸을 보더니 무언가 눈치챈 듯 웃으며 말했다.“다연이는 지훈이가 싫어?”온다연은
온다연은 유강후는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고 어느새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모두 성인이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라면...”말을 마치기도 전에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버린 그녀는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리곤 얼른 일어나 도망치듯 나가버렸다.그녀는 지금 신분이 달랐기에 당연히 막아서는 사람이 없었고 병원 밖에는 진씨 가문의 경호원과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빠르게 차에 올라탄 그녀는 여전히 얼굴이 빨간 상태였고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집으로 가요. 빨리요!”진씨 가문 저택에 도착하고 나서도 그녀의 빨간 얼굴은 식을 줄을 몰랐다.마침 집에 있었던 안심은 자신의 딸이 허둥지둥 방으로 올라가는 모습에 걱정되어 따라 올라갔다. 온다연이 지내고 있는 방은 2층에 있었고 전통 느낌이 물씬 나는 아늑한 방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엔 아주 예쁘게 손질된 야자나무가 있었고 그 나무 주위로 빨간 장미가 예쁘게 피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은은한 장미 향이 정원에 가득 퍼지고 있었다.비록 화려한 인테리어는 아니었지만 전통 느낌이 나는 인테리어였고 벽은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밝고 활기가 느껴지는 색으로 칠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전부 온다연이 그간 받았던 상과 작품이 걸려 있었고 다른 한쪽 벽에는 아주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도자기 같은 것은 당연히 있었고 소파에 대충 내려놓은 작은 부채도 전부 유명한 장인이 만든 것이었으니 진수현 부부가 딸을 얼마나 아끼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문을 열자 안심은 침대에 엎드려 누워있는 온다연을 보게 되었다.그녀의 각도에선 마침 온다연의 빨개진 두 귀가 보였다. 늘 온순하고 얌전했던 온다연은 예의를 저버리는 일은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지만 병원에 다녀온 뒤로 들어올 때부터 허둥지둥하더니 목소리에서도 떨림이 느껴져 안심은 다소 걱정되기 시작했다.안심은 가까이 다가가 딸의 침대에 앉아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러니? 안 좋은 일이라도 있은 거니?”온다연은 자기 얼굴을 만졌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설마 지금 날 그 사람으로 착각한 건가?'자신에게 놀란 온다연은 그를 밀어내곤 이내 그의 뺨을 때려버렸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놀라면서도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변태예요?”화가 난 상태로 때린 것이라 손아귀엔 힘이 꽤나 들어갔고 유강후의 입가는 터져 피가 새어 나왔다.유강후는 입가에 흐른 피를 만지며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괜찮아, 때리라고 해. 잊어도 상관없어. 내 눈앞에만 있으면 돼.'‘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하기보다 지금이 더 좋으니까. 이걸로 이미 충분해.'‘내가 너무 성급했던 거야. 그러니 다 내 잘못인 거야.'아침에 찾아온 상담사가 이미 그에게 말을 해줬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온다연이 천천히 그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라고. 그 후에 다시 천천히 기억을 되찾게 하는 것이라고.만약 갑자기 모든 걸 떠올리게 한다면 온다연은 버티지 못할 것이고 겨우 다시 쌓아 올린 심리적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져 가볍게는 심한 우울증에 걸릴 수 있고 심하면 자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던지라 그는 당연히 의사의 말에 협조해야 했다.죽음의 문턱까지 갔지만 그녀가 살아만 있다면 그는 뭐든 참을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었다. 방금은 그저 그녀가 흐느끼는 소리에 가슴이 너무도 아파 참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유강후는 담담하게 말했다.“방금은 충동이었어요. 미안해요, 유나 씨. 뺨 한 대로 부족한 것 같다면 더 때려도 돼요.”온다연은 너무도 심란했다. 염지훈과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만 그와는 그저 이마만 맞대봤을 뿐이다. 아무리 참을 수 없다고 해도 손만 잡은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녀를 안았을 뿐만 아니라 허벅지에 앉혀 키스하지 않았는가.“오아시스 그룹의 대표님이라는 사람이 여자를 처음 보는 건가요?”유강후는 동문서답했다.“유나 씨는 정말로 아무런 느낌도 없는 건가요?”예전에 아주 행복했을 때 온다연은 항상 먼저 그에게 달려와 키스를 했었고 더 행복했
온다연의 기억은 억지로 지워졌기에 3년 동안 점차 과거의 인연과 일들을 잊게 되었고 과거의 고통도 잊게 된 것이다.하지만 이런 최면은 부작용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예전에 익숙했던 사람과 일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머리가 엄청 아플 것. 중요한 기억일수록 그에 따른 고통은 더 심했다.어쩐지 그녀가 어제 자신을 보았을 때 고통스러워하며 혼절했던 것이 이해가 갔다. 그런데 이번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니 분명 무언가가 떠오른 것이다.공기 중에 피어오르는 계화 향기에 유강후는 바로 아침 메뉴에 계화 디저트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손을 뻗어 계화 디저트를 찾으려고 했지만 실수록 뜨거운 계화 디저트를 쏟게 되었고 전부 그의 손등에 쏟아져 버렸다.그는 언성을 높였다.“오늘 아침은 누가 가져온 거지?”이권은 소리를 듣고 바로 달려 들어왔지만 오자마자 눈물 흘리는 온다연과 화가 난 유강후를 맞이하게 되었고 다급하게 대답해 주었다.“아침은 저희 쪽 주방장이 만든 겁니다. 여기서 만든 음식인데 혹시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주방장은 저희가 경원시에서 데리고 온 주방장입니다.”유강후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계화 디저트를 만들라고 했지?”이권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주방장은 장 집사님이 준 식단대로 만든 겁니다. 전부 사모... 즐겨 드시는 음식입니다.”유강후의 목소리엔 서늘함만 남았다.“앞으로 이 디저트는 만들지 말라고 해. 당장 가져가!”이권은 하는 수 없이 사람을 불러 계화 디저트를 버렸다. 가기 전 그는 화상을 입은 유강후의 손등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도련님, 손등이...”유강후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듯했다.“신경 쓰지 말고 나가!”말을 마친 그는 테이블을 만지며 천천히 온다연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손끝에 닿은 눈물에 유강후는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조금 전 뜨거운 물에 뎄을 때는 별다른 감각이 없었지만 온다연의 눈물을 만지니 너무도 아팠다.그는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눈물
온다연은 자신의 옷을 살펴보았다.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깨, 깼어요?”유강후의 두 눈은 초점이 잡히지 않았고 그는 그저 흐릿한 형체만 보일 뿐이었다.온다연의 목소리를 들은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아침에 일어났을 때 깊이 잠든 것 같아서 간호사에게 잠옷으로 갈아입혀 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내가 갈아입힌 게 아니에요.”온다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었고 자신이 속 좁은 사람처럼 느껴져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전, 전 강 대표님한테 따져 물을 생각은 ...”유강후는 조금 잠겨버린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설령 내가 갈아입혔다고 해도 보이지 않으니까.”그는 뜸을 들이다가 계속 말을 이었다.“아마 일시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걸 거예요.”온다연은 고개를 확 들었다.“앞이 안 보이는 거예요?”어쩐지 그의 눈빛이 이상했던 것이 이해가 갔다. 그녀는 자신이 입은 옷에 문제가 있는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네, 의사가 왔다가 가긴 했었는데 2, 3개월이 지나야 보일 수 있다더군요. 그러니 며칠 간은 잘 부탁드려요.”그는 아주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마치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너무도 태연한 모습이었지만 온다연은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에서 조금의 기쁨이 느껴졌다. 아마도 잘못들은 게 아닐까 싶었다. 가만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좋은 점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편하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간 뒤 창문을 열어 신선한 공기를 마셨다. 그리고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자 하얀 속살이 살짝 드러났다.바로 이때 그는 어디선가 시선을 느끼게 되었다. 황급히 옷을 내리고 고개를 돌렸을 땐 눈을 감은 채 침대에 기대고 있는 유강후의 모습이 보였다. 착각한 것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얼른 화장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옷 갈아입고 나왔을 때 유강후는 이미 침대 끝에 앉
“저희는 애초에 진씨 가문에 손님으로 방문한 겁니다. 그런데 뱀에게 물려버렸네요. 진씨 가문 저택은 신국에서 제일 안전한 곳이라고 하지 않았나요?”진수현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고 눈앞에서 싸울 것 같은 분위기에 온다연은 얼른 진수현을 말렸다.“아빠, 제가 할게요. 제가 잘 보살펴 드릴 수 있어요.”그녀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한 유강후를 보았다. 잘생긴 얼굴에 핏기 하나도 없이 창백하니 저도 모르게 가슴이 아팠고 결국 나직하게 말했다.“그때 그 뱀은 절 물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강 대표님이 저를 지켜주려다가 대신 물린 거예요. 만약 강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전 이 자리에 서 있을 수도 없었을 거예요.”진수현은 소중한 딸의 손을 잡았다.“하지만 나랑 네 엄마는 네가 다른 사람 시중을 드는 건 원치 않는단다.”온다연이 말했다.“아빠, 그럼 이렇게 해요. 일단은 방법이 없고 저도 할 수 있는 게 딱히 없으니까 아마 간호를 해도 옆에서 지켜보는 것뿐일 거예요. 절대 힘들게 움직이는 일은 하지 않을 거예요.”이렇게까지 말하니 진수현은 아무리 그녀가 아까워도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그날 밤, 온다연은 유강후의 곁을 지켜주었다. 병실은 아주 컸고 화장실과 작은 주방도 따로 있었지만 간병인이 머물 방은 없었기에 유강후의 침대 옆에 작은 간이침대를 놓고 지내야 했다.병실의 환경은 아주 좋았다. 바다가 훤히 보이는 방이었던지라 창문을 열면 시원한 바닷소리와 갈매기가 짖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공기 중에 소독수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는 것이 아니었다면 누구도 이곳이 병원임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온다연은 창문을 열고 밤바다를 보며 멍 때렸다.그녀는 강 대표라는 사람에게서 익숙함을 느꼈고 게다가 그는 예전에 그녀와 알던 사이인 것 같았다.‘정말로 아는 사이였나? 심지어 아주 깊은 사이였나?'하지만 진수현이 알아봐 준 자료와 염지훈의 입에서 알게 된 정보에서는 그녀는 H 국에서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부모님이 그녀를 버리고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며 조금 힘
이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진 회장님, 설마 저희를 의심하고 계시는 건 아니죠? 이런 맹독을 지닌 뱀에게 저희 대표님이 두 번이나 물려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인데, 지금 저희가 그 뱀을 가지고 들어왔다고 의심하시는 건가요?”이 말을 하는 이권도 사실은 계속 불안해하고 있었다.비록 미리 해독제를 먹고 곽혜진이 준 혈청을 주입했다고 해도 유강후는 두 번이나 물리게 되었으니 상황을 알 수 없었다.이권은 다급하게 화장실로 갔다. 다시 화장실에서 나왔을 땐 이권은 전보다 편안해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방금 그는 화장실에서 곽혜진에게 연락해 물어보았었다. 그녀가 준 혈청은 아주 귀한 것이었고 미리 주입하면 효과가 더 좋다고 했다. 이틀에서 사흘 내에 열 마리가 되는 독사에게 물리지 않는 한 큰 문제가 없을 거라는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부작용은 있다고 했다. 대부분 2, 3개월이 지나야 몸 상태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응급실 안에 있는 의사들은 아주 바쁘게 움직였다. 각종 검사와 채혈까지 하고 나서야 그들은 한숨 돌리게 되었고 동시에 이 결과는 신국의 의료계를 떠들썩하게 되었다.오초사에게 두 번이나 물렸지만 사망하지 않은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오초사는 맹독을 지닌 독사였고 설령 조금이라도 그 독이 몸에 들어간다면 식물인간이 되거나 몸 어느 한 부분이 장애를 가지게 될 가능성이 아주 컸다. 그랬기에 연구원들은 주삿바늘을 들고 유강후의 피를 뽑아 연구를 해보려고 했지만 이권이 그들을 막아섰다.연구원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신국의 고위층에 연락해 유강후의 피를 뽑아 연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전부 거부당했다. 물론 이것은 전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같은 시각 두 시간 동안 응급실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유강후는 드디어 나오게 되었고 의사와 간호사들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신국 재계의 거물과 정치계의 거물이었으니 말이다.두 사람은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그가 방금 응급 치료한 사람이 신분이
가짜는 아닌 것이 확실했고 극독을 가진 독사라 한번 물리게 되면 반 시간 내에 치료받지 못하면 영원히 눈을 뜰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만약 정말로 물리게 된다면 두 사람은 그야말로 운이 없는 것이었다.하지만 이 뱀은 섬에서만 존재했고 그 수도 몇 마리 되지 않았다. 설령 그 섬에 간다고 해도 뱀을 만날 확률은 아주 낮았고 게다가 뱀은 그 섬에서 벗어나면 며칠 지나지 않아 죽어버린다고 했다. 그런데 왜 진씨 가문 저택에 있는 것일까? 그러나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오초사는 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움직임이 빨랐고 몸을 용수철처럼 쓰면서 어떻게든 먹이를 사냥한다고 했다.온다연은 경악하며 말했다.“얼른 뛰어요! 빨리요!”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고 오초사는 용수철처럼 뛰어오르더니 화살처럼 날아왔다. 유강후가 몸을 돌리자 뱀은 그의 등에 이빨을 박아넣어 버렸다.온다연은 소리를 질렀다.“안돼!”말을 마치자마자 그녀의 동공이 다시 떨렸다.“얼른 뛰어요! 빨리요!”하지만 시간은 없었고 땅에 있던 또 다른 오초사가 똑같이 날아왔다. 이번에 목표는 온다연이었다.이때 유강후가 몸을 확 구부리더니 온다연을 바닥에 넘어지게 했고 몸으로 온다연을 지켜주었다. 목표를 잃은 뱀은 유강후의 팔을 깨물었다.온다연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초사에게 한 번이라도 물리면 살아남기 힘들다고 했는데 유강후는 두 번이나 물렸기 때문이다. 분명 한번 물릴 수 있었는데 말이다.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는 비틀대기 시작했고 점차 정신이 흐릿해졌다.온다연은 빠르게 그의 등 뒤로 갔다. 두 뱀은 그의 등과 팔에 매달려 이빨을 빼지 않으려고 했다. 이런 뱀이 한번 사람을 물기만 한다면 앞으로 오랫동안 독성을 잃게 된다. 비록 무섭기는 했지만 그녀는 빠르게 두 뱀을 잡아당겨 떼어냈고 처음 만져보는 미끈거리는 촉감에 더 큰 두려움을 느끼면서 이성을 잃고 뱀을 땅에 여러 차례 내리쳤다.드디어 뱀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이상함을 감지한 이권과 경호원이 달려왔다. 바닥에
그 순간 유강후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멍하니 구경하고 있던 온다연은 그대로 그의 그윽한 두 눈과 눈 마주쳐 버렸다.몽롱한 불빛 아래서 본 남자의 얼굴은 다소 공격성이 있어 보였지만 이목구비가 더 뚜렷해져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잘생겨 보였다. 얼굴이 빨개진 온다연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강 대표님, 시간도 늦었는데 이만 들어가는 건 어때요?”유강후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나직하게 말했다.“진유나 씨, 내가 아는 사람이랑 정말 많이 닮았네요.”온다연은 궁금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친구예요?”온다연은 순간 가슴이 조여오면서 답답해졌고 머리도 아팠다.‘아니면 애인? 그것도 아니면 그 아이의 엄마?'‘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어쩐지 계속 나를 보는 눈빛에 애틋함이 담겨 있다고 했더니 내가 그 사람을 닮아서였구나...'그렇게 생각한 온다연은 가슴이 더 답답해졌지만 멋대로 자리를 뜰 수 없었던지라 말을 이었다.“사랑하는 사람이 이혼하자고 했어요? 아이도 큰 것 같은데 왜 이혼하자고 한 거예요?”유강후는 가만히 서서 그녀를 보았다. 그는 이미 최선을 다해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참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슴이 아프기 시작했다.바닷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오며 바닥에 있던 낙엽을 쓸어 갔고 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책에 적힌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천리 길도 아니고 바로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 서 있는데 그 사람이 그 마음을 모른다는 것이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이혼하지 않았어요. 제 사전에는 사별만 있지 이혼이라는 두 단어는 존재하지 않거든요.”온다연은 시선을 내리깔며 작게 물었다.“강 대표님이 순정남일 줄은 몰랐네요. 그럼 아내분은 어디에 있는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치 1초라도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면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몇 년 전에 오해로 내 곁을 떠나버렸어요. 아주 멀리 도망가 숨어버렸거든요. 아직도 찾아오지 못했어요.”왜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