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 속에서 유민준은 구급차에 실려 갔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히 남아 있었다.이때 신혜원이 다짜고짜 달려와서 온다연을 때리려고 했다.“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유민준이 다쳤어! 어떻게 책임질 거야?!”온다연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따귀를 때렸다.그녀는 거의 모든 힘을 다 썼다. 옆으로 휘청거리던 신혜원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네가 감히 나를 때려?”“내가 누군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죠?”신혜원은 고함을 지르며 온다연을 때리려고 했다. 그러나 뒤에서 한 손이 그녀를 붙잡았다.“신혜원 씨, 저지른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나 생각하시죠. 신씨 집안에는 꽤 큰 위기라고 생각되는데요.”신혜원은 무표정한 여자를 바라봤다. 온다연을 졸졸 따라다니는 도우미라도 생각했다.“네가 뭔데 나한테 큰 소리야? 38층에서 떨어져 볼래? 그 천한 목숨 신경 쓰는 사람이나 있을까?”장화연은 그녀를 확 밀치며 온다연의 상황부터 살펴봤다.“안 다치셨어요?”온다연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넋이 나간 신재원에게 물었다.“이러려고 나한테 접근한 거예요?”신재원은 이제야 정신 차리고 신혜원에게 물었다.“누나, 이게 무슨 상황이야? 나한테는 유씨 집안 사람이니까 잘 해보라고 했잖아.”“하, 유씨 집안 사람? 쟤는 그냥 그 집안에서 쫓겨난 개 같은 년이야.”“하지만 유강후 대표가...”“퉤! 유 대표의 여자친구는 은별 씨야. 쟤는 불쌍해서 입양한 개에 불과하다고. 천한 게 주제도 모르고 윤호 씨를 꼬셔? 죽여버릴 거야!”온다연은 동정이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나은별 씨한테 들은 말이에요? 가짜 정보로 총대를 메게 돼서 참 안 됐네요. 오윤호 씨의 정혼자 되시죠? 오윤호 씨는 참 운이 좋네요. 강간범이 돼서도 이렇게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니요.”이 말을 들은 신혜원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네가 먼저 옷 벗어 던지고 꼬신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너만 아니었어도 윤호 씨 집안 그렇게 안 됐어!”온다연
유민준보다도 자신의 사람을 건드린 신씨 집안에 더 화가 나 있었다.온다연에게 친구 두 명이 생긴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저 유치한 어린애들이라고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다.신씨 집안은 꽤 순종적이었다. 그의 앞에서도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런 집안에서 나온 친구 정도는 용납할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이런 일이 생기고 말았다.온다연이 위층에서 떨어진 화분에 부딪혀 죽을 뻔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그는 회의 중이었다. 신씨 집안의 책임자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화가 치밀어 오른 그는 자칫 상대를 회의실에서 죽여버릴 뻔했다. 사람들은 그가 유민준이 다친 것 때문에 화가 났는 줄 알았다. 만약 수술실에 있는 사람이 온다연이었다면 신씨 집안의 책임자는 그 자리에서 비명횡사했을 것이다.유민준이 온다연을 밀어냈다는 말을 듣고는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그는 신씨 집안을 어떻게 처리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계획 중 핏빛으로 물들지 않은 것은 없었다.유강후는 무릎 꿇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이렇게 작은 일도 처리하지 못하는데, 내가 널 남겨둬서 뭐 하지?”그는 몸을 흠칫 떨면서 말했다.“제 착오입니다. 실망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사건의 진위를 조사해 내겠습니다. 신씨 집안은 이런 일을 저지를 위인이 못 됩니다. 뒤에 배후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그는 잠깐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신씨 집안과 나씨 집안은 먼 친척 사이라고 합니다. 나씨 집안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이때 문이 열리고 나은별이 들어왔다. 그는 유강후를 보자마자 눈물부터 흘렸다.“민준이 얘기 나도 들었어. 신씨 집안에서 그렇게 됐다며... 나랑 진수를 봐서라도 한 번 용서해 주면 안 될까? 신씨 집안의 안주인이 내 어머니 사촌 동생이야... 내가 다 알아봤어. 그냥 단순 사고래. 재원이가 다연 씨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준다고 꽃을 사 왔는데,
온다연은 방 안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처럼 달려가서 유강후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아저씨, 저 무서워서 못 자겠어요...”이제야 분노의 기운이 줄어든 유강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괜찮아, 내가 있잖아.”온다연의 몸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유강후의 옷깃을 꼭 잡고 있었다.“저 자꾸만 화분이 떨어지는 꿈을 꿔요. 피가 사방에 흐르고 너무 아팠어요...”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제가 아저씨 곁에 있어서 미움을 사게 된 걸까요?”유강후는 손을 우뚝 멈추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야. 누가 감히 내 사람을 건드려.”장화연도 뒤이어 들어왔다. 그녀는 나은별을 힐끗 보고 나서 유강후에게 말했다.“다연 씨가 악몽을 꾸면서 식은땀을 많이 흘리셨어요. 이러다 또 아프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의사를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주 선생한테 연락해 줘.”그는 손을 들어 온다연의 이마를 만져봤다.“내가 곁에 있는데 뭐가 무서워.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하니까 안심하고 자. 내일이면 다 해결될 거야.”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눈만 감으면 민준 오빠가 쓰러진 모습으로 가득해요. 저 무서워요. 하루코 씨도 자꾸 생각나요.”이다 하루코의 자살을 목격한 온다연은 심각한 충격을 받아서 며칠이나 실명했다.이 일은 유강후에게도 큰 교훈이었다. 그는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온다연을 항상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도 이번 사고를 막지 못했다.그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온다연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끝까지 조사할 거야. 다연아, 무서워할 필요 없어. 널 힘들게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봐주지 않겠다고 했었잖아.”나은별은 두 사람의 대화를 똑똑히 듣고 있었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불을 뿜어낼 것 같았다.‘아까 그냥 확 죽여버려야 했는데...’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그녀는 걱정하는 표정으로 온다연에게 말했다.“다연 씨
온다연은 천천히 걸어가서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차가운 모습으로 나은별을 돌아보며 물었다.“아침에 화분 던진 사람 은별 씨 맞죠?”나은별은 안색이 확 변하면서 받아쳤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나 똑똑히 봤는데. 설마 발뺌할 생각이에요?”나은별은 그녀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처럼 말했다.“다연 씨 미쳤어요?”“내 앞에서 연기할 거 없어요. 나랑 아저씨가 어떤 사인지 발견하고 날 죽이려는 거잖아요. 아니에요?”나은별은 잠깐 침묵했다. 연기로 만들어진 나약함은 완전히 사라졌다.그녀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맞으면 어떡할 건데요? 나랑 강후 씨가 어떤 사인지 몰라요? 강후 씨는 다연 씨 말을 안 믿을 거예요.”“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나한테 더 흥미를 느끼고 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은별 씨랑 결혼 안 하게 할 재주는 있다는 말이죠.”나은별은 안색이 확 변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덤덤했다.“나대지 마요. 이건 나랑 강후 씨 사이의 일을 넘어선 집안끼리의 약속이니까요. 시간 때우는데 쓰는 장난감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난 강후 씨가 밖에서 반려동물 키우는 거 반대 안 해요. 자주 있는 일이잖아요. 유씨 집안에서도 신경 안 쓸 거예요. 어차피 나한테 돌아올 걸 다 아니까요.”온다연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평온한 얼굴로 나은별을 바라봤다.“혹시 연서라고 알아요? 아저씨가 좋아하는 사람은 연서라는 분이에요. 은별 씨랑 결혼한다고 해도 연서의 대용품으로 여겼을 뿐이에요. 그렇게 보면 은별 씨도 반려동물과 다름없지 않나요?”나은별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설마 연서가 누군지 몰라요? 하, 아니다. 다연 씨 말이 맞아요. 강후 씨는 연서를 제일 좋아해요. 버림받고 싶지 않으면 함부로 그 이름 언급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유씨 집안사람 앞에서도요.”‘유연서를 강후 씨가 좋아하는 사람으로 오해한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런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하지?’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재수 없는 년, 내가 먹여주고 키워준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는 거야?”심미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다시 한번 온다연의 뺨을 때렸다.“얼마나 지났다고 하령이를 이어서 민준이까지 이렇게 만들어? 너 때문에 우리 집안이 발칵 뒤집혔어! 네가 이러면 내 처지가 어떻게 돼?”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온다연을 때리려고 손을 들었다. 온다연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차갑게 말했다.“심미진 씨가 언제 저를 키워줬다고 그래요? 심미진 씨는 잘 알잖아요. 알면서 그런 말 하는 거 양심에 찔리지 않아요? 아니면 제가 유씨 집안에서 어떤 취급 받으며 살았는지 잊었어요? 유민준이랑 유하령이 저를 괴롭힐 때, 심미진 씨는 어디에 있었죠?”심미진은 순간 멍해졌다. 이게 정말 온다연인가 싶었다. 온다연이면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그녀는 화가 치밀어 얼굴이 붉어지며 소리쳤다.“온다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해?”온다연은 심미진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더 이상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전에도 말했다시피, 저희는 인연을 끊었어요. 심미진 씨는 더 이상 제 이모가 아니에요. 제가 무슨 일을 하든 심미진 씨와는 상관없어요. 그러니 앞으로 제 앞에서 예의 좀 지켜요. 저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 없으니까요.”나은별 앞에서 면박을 당한 심미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온다연을 가리키며 욕을 퍼부었다.“이 배은망덕한 것! 내가 없었으면 넌 벌써 죽었어! 길가에서 굶어 죽었을 거라고! 내가 널 숨겨주지 않았다면, 네 도박꾼 아버지가 진작 널 팔아버렸을 거야!”그녀는 말하다 말고 문득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걸 깨닫고 입을 틀어막았다.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놓치지 않고 듣고는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방금 뭐라고 하셨죠? 제 아버지요?”그녀의 아버지 온준용은 10년 전 첩과 첩의 아들도 함께 바다에 빠져서 죽었다고 했다.심미진은 잠시 멈칫하더니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내 뜻은... 너희 엄마가 죽고 나서 팔아넘기
온다연이 지금과 같은 처지가 된 건 유강후의 잘못도 있었다. 그녀는 유씨 집안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던 유강후의 말만 아니었어도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유강후를 포함한 유씨 집안사람 모두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온다연은 창가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아름다운 동상이라도 된 것처럼 연약한 몸집으로 가만히 서서 대화를 거절했다.오늘은 동짓날이다. 주한이 있을 때는 항상 양갈비를 사서 고소한 국물을 만들었다. 그녀와 주희는 곁에 서서 군침을 흘리고는 했다.주한은 국물에 당근과 상추도 넣었다. 그녀의 그릇에는 특별히 좋아하는 고추 양념도 넣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는 겨울과 연상 되는 맛이었다.거위 털 같은 눈은 겨울바람과 함께 마구 휘날렸다. 이 세상 전부 하얗게 뒤덮을 기세였다.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져 갔다.온다연이 계속 창가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장화연은 양털 카디건을 걸쳐줬다.“오늘 저녁 폭우가 내린답니다. 기온은 영하 20도로 떨어집니다. 따듯한 거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준비시키겠습니다.”온다연은 이제야 몸을 움직이며 구월이를 내려놓았다.“밖에 있는 사람들은 갔어요?”“네, 갔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여기에 들어올 리는 절대 없습니다.”“유민준은요?”“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셋째 도련님이 아직 안 돌아오신 걸 봐서는 심하게 다치신 것 같습니다.”온다연은 말없이 구월이를 쓰다듬었다.“집사님은 혹시 연서가 누군지 알아요?”장화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몸이 굳었다. 유연서와 유강후는 그녀가 어릴 적부터 키워온 아이들이다.그녀는 10대 때부터 두 사람을 보살펴왔다. 기억 속의 천재 소녀 유연서는 그녀를 화연 언니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좋은 것이 생기면 항상 그녀부터 챙겨주고는 했다.그러던 10년 전, 천재 소녀는 한낱 독감 때문에 비 오는 날 생을 마감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너무나도 아픈 일이라 유씨 집안사람도, 강씨 집안사람도 절대 언급하지 않았다. 이 정도
온다연은 고개를 돌렸다. 유강후는 마침 밖에서 들어오고 있었다.눈보라가 거셌는지 그의 어깨에는 눈꽃이 쌓여 있었다. 그는 냉기를 뿜어내며 무거운 표정으로 온다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온다연은 구월이를 내려놓고 그의 코트를 벗겨서 걸어놓았다. 그러고는 따듯한 차를 따라주면서 물었다.“민준 오빠는 어떻게 됐어요?”유강후는 한 손으로 찻잔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를 품에 안으며 입을 맞췄다.“아직 혼절 상태야.”“아저씨도 저 때문이라고 생각하죠. 제가 아니었으면 아무도 다치지 않았을 거예요.”그녀는 목이 완전히 드러나는 스웨터를 입고 고개를 숙였다. 뽀얀 목선에 드리워진 검은 머리카락은 아주 유혹적이었다.유강후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예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안고 침실에 가려고 했다. 그의 변화를 느낀 온다연은 황급히 말했다.“안 돼요. 저녁 먹을 시간 다 됐어요.”유강후는 그녀의 목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내가 더 급해.”걱정거리가 많았던 온다연은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그녀는 점점 더 세게 반항하면서 말했다.“싫어요. 지금 그럴 기분 아니에요. 억지로 이러는 거 싫어요.”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렸다.“유민준 때문에 그래?”“...네.”“허락도 없이 다른 남자를 생각하는 거야?”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병원에 있어야 하는 사람은 저니까요.”유강후는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그래서 걔가 좋다는 거야, 뭐야?”온다연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무 말도 안 했다. 축 늘어진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는 더욱 불쾌해졌다. 그는 그녀의 턱을 잡으면서 말했다.“앞으로 다시는 친구 얘기 꺼내지 마. 네가 이상한 친구를 사귀지만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야. 너한테는 나만 있으면 돼. 친구는 필요 없어, 알았지?”유강후는 강압적으로 그녀를 침실로 데려갔다.저녁 식사를 끝낸 장화연은 침실 문에 노크하려고 했다. 그러나 침실 문은 닫혀 있지 않았다. 문틈 사이로 신음과 온다연의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거
이렇게 3, 4일 동안 난리를 치다 보니, 유씨 집안사람들은 극도로 지쳐 있었다.새엄마 역할을 잘 해내고 싶어 했던 심미진도 사흘 밤낮을 새운 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휴게실에서 한숨을 내쉬며 앉아 있었다.유자성은 창가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는 얼굴이 잿빛이 되어 돌아서며 말했다.“제가 온다연을 데려올게요.”이 말을 들은 강해숙은 화가 치밀어 올라 소리쳤다.“안 돼! 난 그년을 보고 싶지 않아!”유자성은 계속해서 말했다.“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민준이 아무도 가까이 오게 하지 않아서 의사조차 접근하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은 아마 온다연만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온다연을 불러서 며칠간 돌보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약을 바꾸거나 검사를 하는 것도 어려울 겁니다.”심미진은 잠시 망설이며 말했다.“그건 강후 씨가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강해숙은 화가 나서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내리치며 말했다.“동의하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어. 민준이는 그년 때문에 다친 거니까, 와서 며칠 돌보는 건 당연한 일이야! 참 지독한 년이지. 민준이가 이렇게 다쳤는데도 얼굴 한 번 안 비추네. 천성이 나쁜 건 역시 어쩔 수 없어. 저건 집안 내력이야.”말을 마친 강해숙은 또 심미진을 흘겨봤다. 심미진은 난처한 듯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당장 강후한테 전화해서 그년을 데려오라고 해. 친조카를 놔두고 왜 남을 싸고돈단 말이냐! 강후 걔 유씨 집안사람이 맞기는 한지, 전화해서 물어봐!”유자성은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제가 전화해 볼게요.”유강후는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온다연은 사무실 소파에 앉아서 구월이와 놀고 있었다.유자성의 말을 듣고 유강후는 가볍게 응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온다연의 손에서 장난감을 빼앗으며 말했다.“이따가 나랑 같이 병원에 가서 민준이 좀 보자.”온다연은 가볍게 대답했다.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러자 유강후가 다시 물었다.“넌 가고 싶어? 가기 싫으면 가지 마. 안 가도 죽지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
“다연이가 전에 겪은 고통... 똑같이... 아니 그보다 수천 배로 돌려줘야 해.”“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유하령이 비명을 질렀다.“아빠가 죽었어요! 아빠가 모든 죄를 짊어졌잖아요. 제발... 저를 그렇게 만들지 마요!”하지만 유강후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사람이 죄를 씻고 싶어 했다고 해서 내가 용서해 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때 너희가 법을 피해 가며 사람을 괴롭혔지. 좋아. 지금 잘됐네. 정신병자들은 사람을 때리고 죽여도 법의 심판을 안 받아. 그러니까 네가 그런 벌을 받는 것도... 네 업보지.”유하령은 울부짖으며 욕을 퍼부었지만 유강후는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데리고 가. 하지만 일단 죽이지는 마.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잖아.”“네! 대표님!”그는 더는 뒤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식사하던 곳으로 돌아갔다.온다연은 그가 돌아오자마자 미리 까둔 귤 한 조각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얼른 먹어요. 입술이 다 터졌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물은 마셔야죠.”그녀는 다시 뜨거운 물을 따라 그의 손에 건넸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귤 한 조각을 조용히 입에 넣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유하령...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온다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 정도면 오히려 관대한 거네요. 하지만 제가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아저씨가 알아서 하세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었는데... 피곤하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속삭였다.“아니요. 아저씨가 있으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요. 오히려 제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유강후는 그녀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히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이 가슴 가득 퍼지며 왠지 모르게 조금은 덜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다연아... 유민준 걔는...”“전 걔랑은 끝났어요.”온다연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유민준이
온다연은 처음부터 유하령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유씨 집안이 다 무너지든 모두가 죽든 솔직히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유강후가 저렇게 무너져 있는 걸 보니... 그녀는 가슴이 죄여들 듯 아팠다.그건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은 사람이니 상처도 받고 아프고 지치고 힘들어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았기에 그래서 그녀는 그를 위해 조금씩 물러서기로 했다.후회가 되고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었다.그 순간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다연아, 다시는 네가 상처 안 받게 할게. 여기 바람이 좀 세네. 안으로 들어가자.”얼마 지나지 않아 장 비서가 따뜻한 팥죽과 집밥 느낌의 반찬들을 함께 보냈다. 팥죽이 양이 많지 않아서 온다연은 근처 음식점에 연락해 직접 빚은 만두를 더 주문했고 따뜻한 반찬도 한 상 가득 더 보냈다. 그리고 따라온 경호원들과 비서진도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었다.밥을 먹던 도중 누군가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와 유강후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유강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는 온다연을 향해 말했다.“잠깐 나갔다 올게. 너희끼리 먼저 먹고 있어.”온다연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앉히며 말했다.“넌 여기 있어. 잠깐이면 돼. 금방 올게.”그러더니 탁자 위에 있던 귤 하나를 들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까놔. 돌아와서 같이 먹자.”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괜찮으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유강후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 이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하고... 대표님, 정말 그냥 놔두실 겁니까? 설마... 진짜 용서해 줄 생각은 아니시죠?”유강후의 목
그때 유하령이 옆에서 갑자기 소리쳤다. “피... 피가 너무 많아. 아빠가 죽었어. 우리 아빠가 죽었다고요!”그 소리에 유재성이 갑자기 격하게 기침하더니 급기야 피를 토해냈다.유강후가 급히 그를 부축하며 외쳤다. “유하령 당장 끌어내. 간호사, 의사 불러요. 빨리!”유재성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네 큰형… 가서... 빨리 가서 봐...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서...”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현장으로 향했다.그리고 그곳엔 이미 숨이 멎은 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있었다. 의료진이 마지막 조치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게 늦은 상태였다.유민준은 그 곁에 무릎 꿇고 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복도와 방 안 바닥엔 핏물이 고여 있었다.유강후가 다가서자 의료진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유자성 씨는 휴게실에서 스스로 목을 그었습니다. 경동맥을 절단한 상태였고 발견 당시엔 이미 호흡이 없는 상태였습니다.”유강후는 멍하니 굳은 채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유강후라고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랴.어찌 됐든 자기 형이었고 어릴 땐 정말 서로 우애가 좋았다.진짜 틀어지기 시작한 건 유하령을 감싸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그 뒤로 천천히 멀어졌고 결국엔 남이 되어버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을 해친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하지만 유자성이 이런 방식으로 끝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는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료진이 유자성의 시신 위에 흰 천을 덮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때 유민준이 그의 옷깃을 잡고 울부짖었다.“작은아빠... 이게 진짜예요? 아빠 진짜... 진짜 죽은 거예요? 작은아빠, 아빠 아직 숨 쉬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나간 뒤에야 유강후는 고개를 돌렸고 차갑게 말했다.“민준아, 네가 아직 남자로 살고 싶다면... 아버지 장례 제대로 치러. 네가 맡은 회사 두
유재성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유자성을 보지 않았다.유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자식의 손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하지만 병실 문 앞에 이르자 그는 유하령과 유민준을 멈춰 세우고 단호하게 말했다.“문 앞에 무릎 꿇고 있어. 절대 일어서지 마. 그래야 할아버지가 마음을 돌리실 수 있어. 이 집에서 쫓겨나면... 너희는 진짜 끝장이야. 예전에 너희가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다 너희를 죽도록 밟고도 남을 사람들이야.”유하령이 뭔가 말하려 하자 유자성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특히 너, 유하령. 또 사고 치면... 바로 해외로 보내버릴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마. 오늘 이 사단... 절반은 네가 만든 거야.”유하령은 울먹이며 애원했다.“아빠... 잘못했어요. 정말이에요. 제발... 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쫓겨나는 건 싫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유자성은 그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네 엄마가 너무 일찍 떠났지. 그게 늘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 너무 오냐오냐했나 봐.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다 감췄고... 결국 오늘 이런 꼴이 났네. 다 내 책임이니 내가 다 짊어지고 갈게. 하령아, 성질 좀 고쳐. 앞으로 사람 대할 땐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 나쁜 생각 갖지 말고 받은 호의엔 반드시 보답해야 해. 부모 말고는 조건 없이 널 사랑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유하령과 유민준은 아버지의 말에 충격과 절망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의 눈앞에서 유자성은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여기 그대로 있어. 할아버지가 용서 안 하신다고 해도... 일어나지 마라. 난 짐 좀 챙기고 금방 올게.”그는 마지막으로 두 자식을 깊게 바라보고는 병원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30분쯤 지났을까.복도 저편에서 갑작스러운 비명이 터졌다.“사람이 자살했어요!”“피가... 피가 너무 많아!”“빨리 응급실로!”“늦었어요... 이미 숨이...”“유 회장님 장남이라잖아! 큰일 났어!”...유하령과 유
“제발... 제발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재산은 하나도 원하지 않아요. 단 한 푼도 바라지 않아요. 그냥... 그냥 본가에 남게 해 주세요. 아버지의 아들로 남게만 해 주세요...”하지만 유재성은 눈을 감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그만 가. 네 자식들 데리고 이 집을 나가. 네 호적은 이미 본가에서 정리하라고 지시했어. 앞으로 넌 유씨 가문의 자손이 아니야. 너희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나 유재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유자성은 긴 침묵 끝에 고개를 깊이 숙여 유재성을 향해 세 번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 평생 아버지의 아들이라 믿어왔습니다. 그게 제 자랑이었어요... 제가 유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니... 본가에서 쫓겨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럴 만큼 제가 큰 죄를 지은 거겠죠.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겠죠.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령이랑 민준이... 애들까지 함께 쫓아내진 말아 주세요. 애들은 아직 젊고 앞길이 먼 아이들이에요. 본가에서 내쳐진다는 건 그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 될 겁니다. 사람들 눈에 짓밟히고 손가락질당하며 살아야 해요.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전부 다 제 책임이에요. 제가 잘못 키웠습니다. 전부 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하지만 유재성은 싸늘하게 대답했다.“너랑 나... 부자지간 인연은 여기까지야.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만하고 그냥 가.”그제야 유하령의 표정이 무너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거짓말이죠? 우리 속이시는 거죠?”유민준도 조용히 무릎을 꿇었지만 아무 말 없이 유재성을 향해 조심스럽게 머리를 숙이며 절을 올렸다.“할아버지... 전 그동안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벌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제발...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앞으로는 제대로 살겠습니다.”그는 진심이었다.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고 철도 들었으며 맡은 두 회사 역
유자성은 입술을 달달 떨며 중얼거렸다.“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전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영원히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저 재산 같은 거 원하지 않아요. 한 푼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본가에서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그러나 유재성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이젠 됐어. 나는 너한테 줄 것도 빚진 것도 없어. 나도 오래 못 살아. 죽기 전까진... 더 이상 너희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유자성의 얼굴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고 그는 입술을 떨며 되뇌었다.“아버지... 제발, 절 쫓아내지 마세요...”그의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진실을 인정하고 있었다.그 친자확인서는 진짜였고 유재성의 말도 모두 사실이었다.그는 어릴 적부터 유재성 곁에서 자라났다.젓가락을 처음 쥐는 법, 글씨를 쓰는 법, 첫 출근 날의 마음가짐까지... 모든 것을 유재성이 직접 가르쳐줬다.그는 누구보다 유재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그래서 그는 마침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친자확인서는 진짜였어. 아버지가 나를 본가에서 내치려는 것도 진심이네. 그렇다면 나는 진짜... 본가 사람이 아니겠네.’그가 평생 자랑스러워했던 그 성씨와 신처럼 떠받들었던 아버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본가의 명예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모든 것과 그가 수없이 입 밖으로 칭찬했던 동생 유강후조차... 결국 단 한 번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그 모든 건 그의 친부모가 목숨으로 대신한 빚이었고 남이 던져준 은혜에 불과했다.오만하고 자존심 강했던 유자성... 태어나서 한 번도 고개 숙여본 적 없는 본가의 장남이 알고 보니 그저 남의 집에서 얹혀살던 양자에 불과했다.그 진실은 마치 뾰족한 바늘처럼 그의 모든 꿈과 자존심을 찢어버렸다.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 세상이 전부 거짓처럼 느껴졌고 지금 이 순간조차 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두 번이나 사정
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호복을 가다듬은 뒤 안으로 들어가 손에 쥔 약을 유강후에게 건넸다.“아버님께 이 약을 드려요.”유강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다연아...”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고 싶은 말은 집에 가서 해요. 난 원래 그렇게 대인배 아닌 사람이에요. 날 해쳤던 사람은 절대 쉽게 용서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분은 당신 아버지잖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물러서 줄 수 있어요. 아저씨, 제 마음 저버리지 마요.”그 말에 유강후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가까지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감춘 채 약 하나를 꺼내 유재성의 입에 넣어주었다.약을 삼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재성은 숨이 한결 편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강후야, 이게 무슨 약이냐?”유강후가 답했다.“곽 박사님이 다연이 몸조리하라고 주신 거예요. 다 먹지 않고 열 알 남겨뒀는데 혹시 몰라서요. 솔직히 저도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요. 그래도 해가 되진 않으니까요.”유재성의 눈빛이 반짝였다.“곽혜진? 그 여의사 말이야?”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그때 유하령은 온다연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너 지금 내 할아버지한테 무슨 약 먹인 거야? 우리 할아버지 몸은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 네 따위가 내놓은 천한 약 따위 함부로 먹이면 안 된다고!”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친자확인서를 집어 들었다. 대충 읽어본 그녀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 너... 너희 아버지가 유 회장님 친아들이 아니야?”유하령이 반박하기도 전에 온다연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와, 오늘 진짜 운수 대통이네. 어쩜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지?”유하령은 절규하듯 외쳤다.“그건 거짓말이야. 전부 조작이야. 우리 아빠가 본가 사람이 아니라니 말도 안 돼! 이건 다 네 계략이야. 온다연, 왜 날 이렇게까지 망치려고 해?”온다연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유하령, 넌 늘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 무
“네 아들 유민준... 그동안 무슨 사고들을 쳐왔는지 너도 잘 알겠지. 그나마 요 몇 년 좀 나아졌다 싶어서 내가 본가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두 회사를 맡긴 거야. 그 애 실력으로 그 두 회사 꾸려나가는 것도 벅찰 거야.”“그리고 네 딸 유하령은 어떤 인간인지 너 스스로 모르겠어? 예전 그 일들을 진짜 네 능력으로 덮은 줄 알아? 내가 평생 가장 미안한 사람은 현미와 강후야. 그 은혜 때문에 내 결혼을 망쳤고 내 딸을 희생시켰어. 다른 누구든 나를 원망해도 돼. 다 괜찮아.하지만 너, 유자성. 너만은 나한테 그럴 자격 없어.”유자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버지, 아버지가 결혼생활 망친 걸 제 탓으로 돌리실 순 없죠. 그리고 제 어머니도 죄 없는 분이었어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강현미도 그 자리에 있었을 리 없었겠죠.”그 말에 유재성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오랫동안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네 진심이었구나. 내가 평생 키워온 놈이 고작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었다니...”그는 분노 섞인 시선으로 유자성, 유민준, 유하령을 차례로 훑어보며 낮고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좋아. 그럼 지금 여기서 내가 이유를 설명해 주지.”“강후야, 책상 위에 있는 다른 서류봉투를 저놈한테 줘라.”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그 서류봉투를 유자성에게 던졌다.유자성은 그 안에 또 다른 유언장이 들어 있을 줄 알고 펼쳤지만 그 안엔 뜻밖에도 친자 확인서가 들어 있었다.그는 확인서의 이름과 결과를 보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절규하듯 외쳤다. “아니야.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옆에 있던 유하령도 깜짝 놀라 확인서를 낚아채더니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아니에요. 이건 조작이에요. 전부 다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려고 짠 계략이잖아요!”“분명 온다연이야! 그 여자... 분명 삼촌한테 뭔가 시킨 거야. 나를 망하게 하려고 다 내 모든 걸 빼앗으려고 한 거라고!”“닥쳐!”유강후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