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 속에서 유민준은 구급차에 실려 갔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히 남아 있었다.이때 신혜원이 다짜고짜 달려와서 온다연을 때리려고 했다.“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유민준이 다쳤어! 어떻게 책임질 거야?!”온다연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따귀를 때렸다.그녀는 거의 모든 힘을 다 썼다. 옆으로 휘청거리던 신혜원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네가 감히 나를 때려?”“내가 누군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죠?”신혜원은 고함을 지르며 온다연을 때리려고 했다. 그러나 뒤에서 한 손이 그녀를 붙잡았다.“신혜원 씨, 저지른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나 생각하시죠. 신씨 집안에는 꽤 큰 위기라고 생각되는데요.”신혜원은 무표정한 여자를 바라봤다. 온다연을 졸졸 따라다니는 도우미라도 생각했다.“네가 뭔데 나한테 큰 소리야? 38층에서 떨어져 볼래? 그 천한 목숨 신경 쓰는 사람이나 있을까?”장화연은 그녀를 확 밀치며 온다연의 상황부터 살펴봤다.“안 다치셨어요?”온다연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넋이 나간 신재원에게 물었다.“이러려고 나한테 접근한 거예요?”신재원은 이제야 정신 차리고 신혜원에게 물었다.“누나, 이게 무슨 상황이야? 나한테는 유씨 집안 사람이니까 잘 해보라고 했잖아.”“하, 유씨 집안 사람? 쟤는 그냥 그 집안에서 쫓겨난 개 같은 년이야.”“하지만 유강후 대표가...”“퉤! 유 대표의 여자친구는 은별 씨야. 쟤는 불쌍해서 입양한 개에 불과하다고. 천한 게 주제도 모르고 윤호 씨를 꼬셔? 죽여버릴 거야!”온다연은 동정이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나은별 씨한테 들은 말이에요? 가짜 정보로 총대를 메게 돼서 참 안 됐네요. 오윤호 씨의 정혼자 되시죠? 오윤호 씨는 참 운이 좋네요. 강간범이 돼서도 이렇게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니요.”이 말을 들은 신혜원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네가 먼저 옷 벗어 던지고 꼬신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너만 아니었어도 윤호 씨 집안 그렇게 안 됐어!”온다연
유민준보다도 자신의 사람을 건드린 신씨 집안에 더 화가 나 있었다.온다연에게 친구 두 명이 생긴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저 유치한 어린애들이라고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다.신씨 집안은 꽤 순종적이었다. 그의 앞에서도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런 집안에서 나온 친구 정도는 용납할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이런 일이 생기고 말았다.온다연이 위층에서 떨어진 화분에 부딪혀 죽을 뻔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그는 회의 중이었다. 신씨 집안의 책임자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화가 치밀어 오른 그는 자칫 상대를 회의실에서 죽여버릴 뻔했다. 사람들은 그가 유민준이 다친 것 때문에 화가 났는 줄 알았다. 만약 수술실에 있는 사람이 온다연이었다면 신씨 집안의 책임자는 그 자리에서 비명횡사했을 것이다.유민준이 온다연을 밀어냈다는 말을 듣고는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그는 신씨 집안을 어떻게 처리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계획 중 핏빛으로 물들지 않은 것은 없었다.유강후는 무릎 꿇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이렇게 작은 일도 처리하지 못하는데, 내가 널 남겨둬서 뭐 하지?”그는 몸을 흠칫 떨면서 말했다.“제 착오입니다. 실망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사건의 진위를 조사해 내겠습니다. 신씨 집안은 이런 일을 저지를 위인이 못 됩니다. 뒤에 배후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그는 잠깐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신씨 집안과 나씨 집안은 먼 친척 사이라고 합니다. 나씨 집안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이때 문이 열리고 나은별이 들어왔다. 그는 유강후를 보자마자 눈물부터 흘렸다.“민준이 얘기 나도 들었어. 신씨 집안에서 그렇게 됐다며... 나랑 진수를 봐서라도 한 번 용서해 주면 안 될까? 신씨 집안의 안주인이 내 어머니 사촌 동생이야... 내가 다 알아봤어. 그냥 단순 사고래. 재원이가 다연 씨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준다고 꽃을 사 왔는데,
온다연은 방 안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처럼 달려가서 유강후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아저씨, 저 무서워서 못 자겠어요...”이제야 분노의 기운이 줄어든 유강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괜찮아, 내가 있잖아.”온다연의 몸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유강후의 옷깃을 꼭 잡고 있었다.“저 자꾸만 화분이 떨어지는 꿈을 꿔요. 피가 사방에 흐르고 너무 아팠어요...”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제가 아저씨 곁에 있어서 미움을 사게 된 걸까요?”유강후는 손을 우뚝 멈추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야. 누가 감히 내 사람을 건드려.”장화연도 뒤이어 들어왔다. 그녀는 나은별을 힐끗 보고 나서 유강후에게 말했다.“다연 씨가 악몽을 꾸면서 식은땀을 많이 흘리셨어요. 이러다 또 아프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의사를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주 선생한테 연락해 줘.”그는 손을 들어 온다연의 이마를 만져봤다.“내가 곁에 있는데 뭐가 무서워.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하니까 안심하고 자. 내일이면 다 해결될 거야.”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눈만 감으면 민준 오빠가 쓰러진 모습으로 가득해요. 저 무서워요. 하루코 씨도 자꾸 생각나요.”이다 하루코의 자살을 목격한 온다연은 심각한 충격을 받아서 며칠이나 실명했다.이 일은 유강후에게도 큰 교훈이었다. 그는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온다연을 항상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도 이번 사고를 막지 못했다.그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온다연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끝까지 조사할 거야. 다연아, 무서워할 필요 없어. 널 힘들게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봐주지 않겠다고 했었잖아.”나은별은 두 사람의 대화를 똑똑히 듣고 있었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불을 뿜어낼 것 같았다.‘아까 그냥 확 죽여버려야 했는데...’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그녀는 걱정하는 표정으로 온다연에게 말했다.“다연 씨
온다연은 천천히 걸어가서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차가운 모습으로 나은별을 돌아보며 물었다.“아침에 화분 던진 사람 은별 씨 맞죠?”나은별은 안색이 확 변하면서 받아쳤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나 똑똑히 봤는데. 설마 발뺌할 생각이에요?”나은별은 그녀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처럼 말했다.“다연 씨 미쳤어요?”“내 앞에서 연기할 거 없어요. 나랑 아저씨가 어떤 사인지 발견하고 날 죽이려는 거잖아요. 아니에요?”나은별은 잠깐 침묵했다. 연기로 만들어진 나약함은 완전히 사라졌다.그녀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맞으면 어떡할 건데요? 나랑 강후 씨가 어떤 사인지 몰라요? 강후 씨는 다연 씨 말을 안 믿을 거예요.”“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나한테 더 흥미를 느끼고 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은별 씨랑 결혼 안 하게 할 재주는 있다는 말이죠.”나은별은 안색이 확 변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덤덤했다.“나대지 마요. 이건 나랑 강후 씨 사이의 일을 넘어선 집안끼리의 약속이니까요. 시간 때우는데 쓰는 장난감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난 강후 씨가 밖에서 반려동물 키우는 거 반대 안 해요. 자주 있는 일이잖아요. 유씨 집안에서도 신경 안 쓸 거예요. 어차피 나한테 돌아올 걸 다 아니까요.”온다연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평온한 얼굴로 나은별을 바라봤다.“혹시 연서라고 알아요? 아저씨가 좋아하는 사람은 연서라는 분이에요. 은별 씨랑 결혼한다고 해도 연서의 대용품으로 여겼을 뿐이에요. 그렇게 보면 은별 씨도 반려동물과 다름없지 않나요?”나은별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설마 연서가 누군지 몰라요? 하, 아니다. 다연 씨 말이 맞아요. 강후 씨는 연서를 제일 좋아해요. 버림받고 싶지 않으면 함부로 그 이름 언급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유씨 집안사람 앞에서도요.”‘유연서를 강후 씨가 좋아하는 사람으로 오해한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런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하지?’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재수 없는 년, 내가 먹여주고 키워준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는 거야?”심미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다시 한번 온다연의 뺨을 때렸다.“얼마나 지났다고 하령이를 이어서 민준이까지 이렇게 만들어? 너 때문에 우리 집안이 발칵 뒤집혔어! 네가 이러면 내 처지가 어떻게 돼?”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온다연을 때리려고 손을 들었다. 온다연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차갑게 말했다.“심미진 씨가 언제 저를 키워줬다고 그래요? 심미진 씨는 잘 알잖아요. 알면서 그런 말 하는 거 양심에 찔리지 않아요? 아니면 제가 유씨 집안에서 어떤 취급 받으며 살았는지 잊었어요? 유민준이랑 유하령이 저를 괴롭힐 때, 심미진 씨는 어디에 있었죠?”심미진은 순간 멍해졌다. 이게 정말 온다연인가 싶었다. 온다연이면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그녀는 화가 치밀어 얼굴이 붉어지며 소리쳤다.“온다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해?”온다연은 심미진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더 이상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전에도 말했다시피, 저희는 인연을 끊었어요. 심미진 씨는 더 이상 제 이모가 아니에요. 제가 무슨 일을 하든 심미진 씨와는 상관없어요. 그러니 앞으로 제 앞에서 예의 좀 지켜요. 저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 없으니까요.”나은별 앞에서 면박을 당한 심미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온다연을 가리키며 욕을 퍼부었다.“이 배은망덕한 것! 내가 없었으면 넌 벌써 죽었어! 길가에서 굶어 죽었을 거라고! 내가 널 숨겨주지 않았다면, 네 도박꾼 아버지가 진작 널 팔아버렸을 거야!”그녀는 말하다 말고 문득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걸 깨닫고 입을 틀어막았다.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놓치지 않고 듣고는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방금 뭐라고 하셨죠? 제 아버지요?”그녀의 아버지 온준용은 10년 전 첩과 첩의 아들도 함께 바다에 빠져서 죽었다고 했다.심미진은 잠시 멈칫하더니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내 뜻은... 너희 엄마가 죽고 나서 팔아넘기
온다연이 지금과 같은 처지가 된 건 유강후의 잘못도 있었다. 그녀는 유씨 집안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던 유강후의 말만 아니었어도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유강후를 포함한 유씨 집안사람 모두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온다연은 창가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아름다운 동상이라도 된 것처럼 연약한 몸집으로 가만히 서서 대화를 거절했다.오늘은 동짓날이다. 주한이 있을 때는 항상 양갈비를 사서 고소한 국물을 만들었다. 그녀와 주희는 곁에 서서 군침을 흘리고는 했다.주한은 국물에 당근과 상추도 넣었다. 그녀의 그릇에는 특별히 좋아하는 고추 양념도 넣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는 겨울과 연상 되는 맛이었다.거위 털 같은 눈은 겨울바람과 함께 마구 휘날렸다. 이 세상 전부 하얗게 뒤덮을 기세였다.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져 갔다.온다연이 계속 창가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장화연은 양털 카디건을 걸쳐줬다.“오늘 저녁 폭우가 내린답니다. 기온은 영하 20도로 떨어집니다. 따듯한 거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준비시키겠습니다.”온다연은 이제야 몸을 움직이며 구월이를 내려놓았다.“밖에 있는 사람들은 갔어요?”“네, 갔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여기에 들어올 리는 절대 없습니다.”“유민준은요?”“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셋째 도련님이 아직 안 돌아오신 걸 봐서는 심하게 다치신 것 같습니다.”온다연은 말없이 구월이를 쓰다듬었다.“집사님은 혹시 연서가 누군지 알아요?”장화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몸이 굳었다. 유연서와 유강후는 그녀가 어릴 적부터 키워온 아이들이다.그녀는 10대 때부터 두 사람을 보살펴왔다. 기억 속의 천재 소녀 유연서는 그녀를 화연 언니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좋은 것이 생기면 항상 그녀부터 챙겨주고는 했다.그러던 10년 전, 천재 소녀는 한낱 독감 때문에 비 오는 날 생을 마감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너무나도 아픈 일이라 유씨 집안사람도, 강씨 집안사람도 절대 언급하지 않았다. 이 정도
온다연은 고개를 돌렸다. 유강후는 마침 밖에서 들어오고 있었다.눈보라가 거셌는지 그의 어깨에는 눈꽃이 쌓여 있었다. 그는 냉기를 뿜어내며 무거운 표정으로 온다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온다연은 구월이를 내려놓고 그의 코트를 벗겨서 걸어놓았다. 그러고는 따듯한 차를 따라주면서 물었다.“민준 오빠는 어떻게 됐어요?”유강후는 한 손으로 찻잔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를 품에 안으며 입을 맞췄다.“아직 혼절 상태야.”“아저씨도 저 때문이라고 생각하죠. 제가 아니었으면 아무도 다치지 않았을 거예요.”그녀는 목이 완전히 드러나는 스웨터를 입고 고개를 숙였다. 뽀얀 목선에 드리워진 검은 머리카락은 아주 유혹적이었다.유강후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예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안고 침실에 가려고 했다. 그의 변화를 느낀 온다연은 황급히 말했다.“안 돼요. 저녁 먹을 시간 다 됐어요.”유강후는 그녀의 목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내가 더 급해.”걱정거리가 많았던 온다연은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그녀는 점점 더 세게 반항하면서 말했다.“싫어요. 지금 그럴 기분 아니에요. 억지로 이러는 거 싫어요.”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렸다.“유민준 때문에 그래?”“...네.”“허락도 없이 다른 남자를 생각하는 거야?”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병원에 있어야 하는 사람은 저니까요.”유강후는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그래서 걔가 좋다는 거야, 뭐야?”온다연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무 말도 안 했다. 축 늘어진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는 더욱 불쾌해졌다. 그는 그녀의 턱을 잡으면서 말했다.“앞으로 다시는 친구 얘기 꺼내지 마. 네가 이상한 친구를 사귀지만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야. 너한테는 나만 있으면 돼. 친구는 필요 없어, 알았지?”유강후는 강압적으로 그녀를 침실로 데려갔다.저녁 식사를 끝낸 장화연은 침실 문에 노크하려고 했다. 그러나 침실 문은 닫혀 있지 않았다. 문틈 사이로 신음과 온다연의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거
이렇게 3, 4일 동안 난리를 치다 보니, 유씨 집안사람들은 극도로 지쳐 있었다.새엄마 역할을 잘 해내고 싶어 했던 심미진도 사흘 밤낮을 새운 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휴게실에서 한숨을 내쉬며 앉아 있었다.유자성은 창가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는 얼굴이 잿빛이 되어 돌아서며 말했다.“제가 온다연을 데려올게요.”이 말을 들은 강해숙은 화가 치밀어 올라 소리쳤다.“안 돼! 난 그년을 보고 싶지 않아!”유자성은 계속해서 말했다.“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민준이 아무도 가까이 오게 하지 않아서 의사조차 접근하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은 아마 온다연만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온다연을 불러서 며칠간 돌보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약을 바꾸거나 검사를 하는 것도 어려울 겁니다.”심미진은 잠시 망설이며 말했다.“그건 강후 씨가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강해숙은 화가 나서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내리치며 말했다.“동의하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어. 민준이는 그년 때문에 다친 거니까, 와서 며칠 돌보는 건 당연한 일이야! 참 지독한 년이지. 민준이가 이렇게 다쳤는데도 얼굴 한 번 안 비추네. 천성이 나쁜 건 역시 어쩔 수 없어. 저건 집안 내력이야.”말을 마친 강해숙은 또 심미진을 흘겨봤다. 심미진은 난처한 듯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당장 강후한테 전화해서 그년을 데려오라고 해. 친조카를 놔두고 왜 남을 싸고돈단 말이냐! 강후 걔 유씨 집안사람이 맞기는 한지, 전화해서 물어봐!”유자성은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제가 전화해 볼게요.”유강후는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온다연은 사무실 소파에 앉아서 구월이와 놀고 있었다.유자성의 말을 듣고 유강후는 가볍게 응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온다연의 손에서 장난감을 빼앗으며 말했다.“이따가 나랑 같이 병원에 가서 민준이 좀 보자.”온다연은 가볍게 대답했다.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러자 유강후가 다시 물었다.“넌 가고 싶어? 가기 싫으면 가지 마. 안 가도 죽지
온다연이 너무 안쓰러워 덩달아 괴로움이 밀려온 유강후는 끊임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아니야. 다연이는 최고의 엄마야.”“우리 아이는 다연이를 엄청 좋아해. 그러니까 계속 꿈에 나타나잖아.”“울고 싶으면 울어. 참지 않아도 돼.”온다연은 울먹였다.“꼭 돌아오겠죠? 강후 씨, 아이는 다시 절 찾아올 거예요. 맞죠?”“그런데 꿈속에는 신발 한 켤레도 없이 맨발이었어요. 너무 불쌍해요.”꿈속의 장면이 떠오른 온다연은 가슴이 터질 듯 울부짖었다.“그곳이 너무 춥대요. 왜 데리러 안 오냐고 원망하는데...”“강후 씨, 아이가 추워하나 봐요.”“나 너무 힘들어요.”“괴로워요.”...극심한 괴로움과 고통은 몸의 경련을 일으켰다.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느새 유강후의 옷자락을 적셨다.그는 온다연의 피와 살에 녹아들듯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돌아올 거야. 무조건 돌아오니까 걱정하지 마. 다연아, 이제 그만 아파해.”...한참 동안 울다가 지쳐버린 온다연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흐느꼈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안방 문을 열려 있었는데 침대는 깨끗이 치워졌고 도우미 몇 명이 바닥에 엎드려 뭔가를 찾고 있었다.그에게 안겨있던 온다연은 발버둥 치다가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처음 팔찌가 부러진 곳에 무릎을 꿇더니 나무판자 틈을 따라 조금씩 이동하며 찾았다.온다연이 움직이는 방향 따라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마침내 호박석은 바닥과 벽이 맞닿은 틈새에서 발견됐다.온다연은 그것을 손에 쥔 채 미친 사람처럼 울고 웃었다.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아예 몰랐던 도우미들은 고개를 들 엄두조차 나지 않아 푹 숙인 채 입을 닫았다.유강후는 그녀 앞에 무릎을 반쯤 꿇고 품에 안았다.“다연아, 이제 찾았으니까 좀 쉴래?”온다연은 호박석에 담긴 아이의 체온이라도 느끼려는듯 손에 꽉 쥔채 놓지 않았다.“강후 씨, 아이가 잠든 곳에 가고 싶어요.”온다연은 몸이 너무
‘호박석에 들어있는 게 정말 아이의 머리카락이라고?’온다연이 차고 있던 팔찌는 엊그제 영문도 모른 채 끊어졌고 그때 호박석을 잃어버렸다.그걸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온다연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아이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유일한 증거를 잃어버렸으니 죄책감이 밀려왔고 반드시 다시 찾으리라 다짐했다.‘찾아야 돼. 아직 그 방에 있을 거야.’온다연은 허둥지둥 침대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어갔다.이를 본 장화연도 얼른 뒤따라가며 그녀를 말렸다.“다연 씨, 건강이 회복되면 언제든지 아이를 만날 수 있어요. 지금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잖아요. 이대로 나가면 다칠 겁니다.”온다연은 주저 없이 장화연을 밀어냈다.“비켜요. 장 집사님이 참견할 일이 아니잖아요.”장화연은 경호원에게 눈치를 주고선 여전히 온다연을 부축했다.“그럼 뭐라도 좀 먹고 가세요. 엄마가 힘없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아이도 속상해할 겁니다.”그 말을 듣고 멈칫한 온다연은 곧바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내가 초라한 모습을 보이면 아이도 싫어하겠지?’‘하긴 이런 엄마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온다연은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죽 먹을게요. 줘요.”장화연은 그녀를 작은 식탁으로 부축해 갔다.“아직 뜨거우니까 천천히 드세요.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온다연은 죽을 필사적으로 입에 밀어 넣었다.너무 급하게 먹은 탓에 속이 안 좋은지 곧바로 심한 기침을 이어갔다.장화연을 다급하게 죽그릇을 옆으로 치웠다.“이렇게 드시면 안 됩니다.”때마침 병실로 돌아온 유강후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기침하고 있는 온다연을 발견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는 다급하게 달려오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유강후는 병실에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고는 단호하게 호통쳤다.“사람이 몇인데 이런 일도 똑바로 못하면 어쩌자는 거야. 한 명을 케어하는 게 어려워?”병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문 채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이때 온다연이 유강후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그러고선 팔찌를 뚫어져라 쳐
장화연은 한숨을 내쉬며 진지하게 답했다.“다연 씨는 가족이 없잖아요. 아이가 유일한 희망인데 지금은...”“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도련님은 무조건 다연 씨의 편을 들어야 합니다. 망설임 없는 확고한 모습을 보여줘야 다연 씨는 안정감을 느낄 겁니다.”“잠드신 것 같은데 침대로 옮기시죠.”유강후는 신생아를 안은 듯 조심스럽게 온다연을 침대로 옮겼다.온다연의 연약함은 깃털과도 같아서 그가 조금만 힘을 줘도 금방 찢어질 게 틀림없다.하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소리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유강후는 침대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마치 이렇게 하면 온다연이 그에게 잡혀 영원히 도망칠 수 없을 것처럼 말이다.어느새 유강후도 잠이 들었다.꿈속에는 그는 온다연과 두 아이를 낳았다.아들은 유강후를 닮고 딸은 온다연을 닮았는데 두 아이가 유강후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안아달라고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그들은 평범한 부부처럼 밤에는 격렬한 사랑을 나누고 아침에는 달콤한 입맞춤으로 하루를 시작했다.유강후는 매일 그녀에게 해바라기 한 송이를 선물했고, 온다연은 늘 밝은 미소와 부드러운 포옹으로 그에게 보답했다.그러던 어느 날 온다연이 선물이라며 그림을 주었다. 그림에는 해바라기로 가득한 꽃밭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걷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담겨있었다.온다연은 이 그림의 이름은 ‘영원한 사랑’이라고 얘기했다.심장이 터질듯한 행복감이 밀려온 유강후는 이대로 떠나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자존심만 세우던 그는 비로소 자신의 고귀함을 벗어던지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남은 여생을 함께 해달라고 부탁할 용기가 생겼다.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듯이 가질 수 없는 게 제일 비참하다.그 시각 온다연도 꿈을 꾸고 있었다.꿈속의 온다연은 어두운 방에 갇혀 있었고 누군가에게 손을 밟혔다.유강후는 싸늘하게 말했다.“그러게 내 말을 들었어야지. 이건 벌이야.”나은별은 그의 곁에 기대어 애교를 부리며 웃었다.“강후 씨, 벌이 너무 가벼운데? 말 잘
하지만 이제 온다연에게 아이는 없다.아니, 어쩌면 오래전부터 이미 없었을 수도 있다.온다연은 더 이상 유강후가 본인을 속이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고 그와 따지려는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이미 모든 것에 실망했으니 다시 누군가는 사랑할 능력과 용기조차 없었다.따스한 햇볕과 달리 그녀의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이 세상은 온다연에게 너무 각박했고 살고픈 희망을 가질때 쯤 잔인하게 짓밟아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유강후는 차가운 온다연의 손을 어루만지더니 담요를 가져다 덮어주며 말했다.“아침 바람은 쌀쌀하니까 여기에 앉아 있지 마.”그가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향기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온다연은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나은별을 만나고 왔겠지?’‘이 향기는... 나은별에게서 나는 건가?’‘역시나 나보다는 나은별이 더 중요하구나. 전화 한 통에 밤새도록 자리를 비운 걸 보면...’‘됐다. 누굴 좋아하든 마음대로 해.’온다연은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이때 장화연이 죽과 함께 아침밥을 챙겨왔다.“도련님, 이쪽에서 드세요. 제가 다연 씨를 돌볼게요.”“내가 할게. 죽 이리 줘.”유강후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올려 소파 등받이에 기대게 한 후 푹신한 쿠션을 그녀의 허리 뒤에 놓아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만들어줬다.그럼에도 온다연은 힘이 없는 듯 똑바로 앉아 있지 못했다.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쿠션 두 개를 더 가져와 그녀를 지탱했고 모든 걸 마친 후 그는 죽을 가지러 걸음을 옮겼다.마침 장화연은 죽을 그릇에 옮겨 닮고 있었다.유강후는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위가 안 좋으니까 앞으로 이것보다 좀 더 부드럽게 만들어줘.”“알겠습니다. 이것도 2시간이나 고아서 만든 죽입니다.”“다연이 언제 깨어났어?”장화연은 온다연을 힐끗 쳐다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깨어난 지 여섯시간쯤 되었습니다. 눈을 뜨고도 지금껏 계속 말이 없었고 아침부터 저쪽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합니다.”그녀는
한바탕 난리 후 의사도 진땀을 뺐다.다행히 검사 결과 큰 문제는 없었다.보름이 넘도록 쉬지 못한 데다가 온다연이 걱정되어 줄곧 긴장한 상태였으니 몸이 지쳐 쓰러진 게 틀림없다.이런 상황에서도 온다연의 곁을 지키려고 하자 의사는 안된다며 강제로 수면제 한 알을 먹였다.곧이어 이권과 장화연도 들어왔다.장화연은 초췌한 모습의 유강후를 보며 가슴이 미어졌지만 표정만은 담담했다.“오늘은 푹 쉬세요. 다연 씨의 곁은 제가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유강후는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눈뜨면 바로 불러.”이권이 걱정스럽게 말했다.“도련님, 아무 생각 말고 얼른 주무세요. 이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어르신의 손에 죽을지도 모릅니다.”유강후는 여전히 온다연이 걱정되어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수면제를 먹은 탓에 잠이 쏟아졌다.곧이어 깊은 잠에 빠졌다.그러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약병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간호사가 시야가 들어왔다.간호사는 잠에서 깬 유강후를 보더니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방금 누가 에센스 하나를 깨뜨려서 제 몸에 향이 배었습니다.”유강후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으니까 나가봐.”그렇게 말하고 그는 일어나 침대에서 나왔다.그래도 억지로라도 깊은 잠을 자고 나니 몸이 한결 개운해졌다.유강후는 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을 확인하고서야 자신이 아홉시간 정도 잤다는 걸 알아챘다.바깥은 이미 해가 뜨고 날이 밝았다.기분이 언짢아진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이권, 들어와.”서둘러 안으로 들어온 이권은 안색이 많이 좋아진 유강후를 보며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컨디션 좋아 보이네요. 어제는 정말 표정이 않았는데...”“왜 안 깨웠어?”유강후의 말투에서는 언짢음이 담겨있었다.“깊이 자고 계시길래 일부러 안 깨웠습니다. 도련님, 거의 1년 넘게 맘 편히 잠을 못 주무셨잖아요. 다연 씨는 장 집사님이 지키고 있으니...”“이권!”유강후는 싸늘했다.“이제 제멋대로 행동하는구나? 이번 달
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렸다.“네 말은 배에 탄 사람 들중에 문제가 있다는 거야?”유강후는 단 한 번도 탑승한 사람들에 대해 의심한 적이 없다.그 배는 유강후의 소유였기에 당시 초청을 받은 사람들도 그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이었다.굳이 꼽자면 소씨 가문과 유씨 가문의 사이가 어색한 것 빼고는 거의 다 유씨 가문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집안이다.집안의 뿌리까지 서로 얽혀있는 사이랄까?아무리 소씨 가문과 관계가 어색하다고 한들 가문 후계자가 유강후의 소꿉친구이니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비록 능력이 많이 모자랐지만 책임감이 있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이니까.이권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저는 단지 수상쩍은 생각이 들 뿐입니다. 도련님이 물에 들어갔을 때 마침 상어 떼가 나타났잖아요. 배에 타고 있던 그 많은 사람들 중 한재민 씨만 도련님을 발견한 것도 뭔가 좀 걸립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계획 살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타깃은 도련님이 아닌 한재민 씨죠...”“듣기로는 그날 한재민 씨가 나은별 씨와 엄청 크게 다퉜다고 합니다.”유강후는 눈빛이 반짝였다.“이 일이 나은별이랑 관련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야?”이권이 답했다.“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그 답을 들은 유강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나은별이 성격이 더러운 건 사실이야. 우리 어렸을 때부터 친구인 건 알지? 내가 아는 나은별은 그런 일을 계획할 사람이 아니야. 재민이의 아이까지 임신했는데 굳이 그럴 이유가 없잖아.”그는 잠시 망설였다.“권아, 앞으로 이 일은 언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솔직히 내 친구를 의심하고 싶지 않아. 만에 하나 정말 크게 싸웠다 해도 상대를 죽일 만큼은 아닐 거야.”이권은 말문이 막혔다.바로 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나은별이 걸어온 전화였기에 이권은 자연스레 스피커폰으로 돌렸다.통화가 연결되자 곧이어 연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후 씨, 나 보러 와줘. 응?”“어제 꿈꿨는데 계속 그 장면이 떠올라서 너무 괴로워.”“재민 씨
이권은 재빨리 입을 닫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유강후는 자고 있는 온다연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자리 좀 지켜줘. 다연이 눈뜨면 바로 연락하고.”장화연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답했다.“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지는 마세요. 다연 씨는 지금 대표님이 필요합니다.”유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온다연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선 곧바로 병실을 나갔다.장화연은 그들을 배웅했다.그 시각 침대 위의 온다연은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피곤한 듯 다시 눈을 감았다.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권은 유강후가 나오자 재빨리 옆에서 다가갔다.“도련님, 헬기는 준비했습니다.”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통보하는 거야? 제멋대로 결정하는 거 보니까 미래 그룹의 대표를 해도 되겠어.”“그래도 도련님을 대신해 총을 막았으니 적어도 한번은 찾아가는 게 예의라고 생각합니다.”유강후는 말없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피우지 않고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경원은 매우 컸고 반짝이는 네온 불빛과 아름다운 야경을 자랑했다.한때 유강후는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 도시마저 그의 발밑에 있다고 느꼈다.그러나 현실은 아이를 지키지 못했고 온다연의 마음을 사로잡지도 못했다.만약 지금 가진 모든 것으로 아이의 생명을 바꾸고 온다연의 마음과 환심을 얻을 수 있다면 주저 없이 내놓을 준비도 되어있다.하지만 이 세상에 만약은 없다.담배 연기가 가라앉고 불꽃이 반쯤 꺼졌을 때 유강후가 입을 열었다.“권아, 넌 와이프랑 사이가 좋아?”“성격이 예민한 것 말고는 괜찮아요.”“와이프 임신했다며? 몇 개월이야?”이권의 얼굴에는 금세 미소가 떠올랐다.“3개월이요. 임신해서 그런지 더 예민하더라고요.”유강후는 한참이 지나서야 답했다.“아이가 태어나면 큰 선물을 줄게. 권아, 나는 네가 정말 부럽다.”밝은 불빛과 달리 유강후는 오히려 밤의 어둠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울고
“다연아,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아이는 다시 생길 거야. 너만 건강하다면 반드시 선물처럼 찾아올 거야.”...드디어 차가 병원에 도착했고 온다연은 급히 응급실로 옮겨졌다.검사 결과 급성 위경련으로 이미 약했던 위가 강한 자극을 받아 대량의 출혈을 일으켜 피를 토해낸 것이다.곧이어 응급 처치 및 수혈이 시작됐다.장장 두 시간 정도 지속되었다.그 후 온다연은 병실로 옮겨졌지만 밤이 될 때까지도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의사도 이런 상황이 의외인 듯 다시 한번 정밀 검사를 진행했다.진찰을 마친 의사는 진지하게 말했다.“위출혈로 찾아오는 환자는 지금도 많습니다. 다만 그 심각도에 따라서 상황이 나뉘죠. 대량의 피를 토해낸 심각한 경우라면 30분 이내에 쇼크로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다연 씨의 경우 이미 심한 위궤양 증세를 보이고 있으니 절대 자극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보통 출혈이 끝나고 상태가 점차 호전되면 5시간 안에 의식을 되찾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열 시간이 지나도록 눈을 감고 있네요.”“대표님, 제 생각에 다연 씨는 스스로 코마 상태에 빠진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깨어나고 싶지 않은 거죠. 현실을 마주하기가 두려운 모양입니다. 시간을 좀 더 주시죠.”의사가 떠난 후 유강후는 오랫동안 온다연의 침대 앞에 앉아 있었다.그는 손으로 온다연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온다연은 학교 다닐 때보다 훨씬 말랐고 성격도 많이 변해 있었다.어쩌면 아이가 바뀐 걸 알아채고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다가 더는 견디지 못해 육체적인 고통으로 이어진 것 같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손을 잡고 자신의 얼굴에 대고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치지 말자. 우리 함께 맞서 싸우자.”...얼마 후 장화연이 들어왔다.유강후는 외로운 조각상처럼 홀로 온다연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세 시간 전에 봤던 모습과 똑같이 자세조차 바꾸지 않은 그를 보며 장화연은 가슴이 아팠다.그녀는 앞으로 나서서 유
그 말과 함께 온다연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이렇게 빌게요. 제발 아이를 다른 사람한테 주지마요. 안 그러면 확 죽어버릴 거예요.”“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요. 제발 아이만...”유강후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애써 이성을 유지하며 온다연을 일으켰다.“다연아, 거짓말이 아니야. 저 아이는 우리 아들이 아니라니까?”온다연은 그를 바라봤다.“말했잖아요. 우림이랑 유전자 검사해 봤다고요. 혈연관계가 없다는 결과를 이미 확인했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날 속일 거예요?”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했다.“저 아이가 내 아들이 아니라면 진짜 아들은요? 누구한테 줬어요?”유강후는 말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그러나 온다연은 여전히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고 점점 더 과격해졌다.“말하라고요. 내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냐고요.”어느새 유강후의 눈에도 슬픔이 차올랐지만 입을 꾹 닫은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왜 대답을 못 해요? 말해줘요. 내 아이는 어디에 있는지.”“말하라고!”이때 뒤에 서 있던 이권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도련님, 이제 사실대로 말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큰일 날 것 같습니다.”온다연은 고개를 돌리더니 이권을 쳐다보며 물었다.“이권 씨는 알고 있죠?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줘요.”“이권, 입 닫아.”유강후가 단호하게 호통을 쳤지만 이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다연 씨, 아이는 죽었어요.”“그 작은 아이가 5개월 동안 살아있을 리가 없잖아요.”“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련님의 손바닥 위에서 마지막 숨이 끊겼습니다.”그 말은 날벼락처럼 날아가 온다연의 가슴을 후벼 찧었다.‘죽었다고?’‘내 아들이 죽었다고?’그녀의 눈빛은 서서히 생기를 잃었고 마치 영혼 전체가 고통에 휩싸인 것처럼 공허하고 슬퍼졌다.‘아니야. 분명히 건강을 되찾고 있었어.’‘거짓말하는 게 분명해. 세상이 지금 날 속이고 있는 거야.’심장이 멎은 듯 숨이 막혀온 온다연은 몸을 떨면서 중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