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는 소파에 던져졌고 한 번 튀어 올랐다가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온다연은 주우려고 몸부림쳤지만 유강후는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차갑게 말했다.“한 번만 더 함부로 움직이면 지금 당장 바다에 던져버리겠어.”그러자 온다연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유강후가 어떤 성격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은 거의 전부 다 좋은 결말이 없었다.유강후가 바다에 던지겠다면 정말 던질 것이다.온다연이 가만히 있자 유강후는 옆에 있는 서랍에서 작은 약상자를 꺼내 소파 쪽으로 그녀를 끌고 가며 말했다.“앉아.”온다연은 그 작은 구리 상자를 보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유강후가 정말 상자를 바다에 던질까 봐 어쩔 수 없이 얌전히 앉아 있었다.“자. 손을 들어봐.”온다연은 순순히 손을 들었다.그녀는 옅은 파란색 잠옷 치마를 입었다. 치마의 소매는 팔꿈치에 닿았고 하얀 팔뚝만 드러났고 다소 보수적이었다.부드러운 조명이 그녀의 하얀 피부를 비추자 수정처럼 맑고 윤기가 났다.하얀 피부 때문에 다친 곳은 더 아찔하게 보여졌다.유강후는 이미 파랗게 멍든 곳을 누르면서 차갑게 말했다.“아파?”온다연의 관심은 온통 그 작은 상자에 쏠려 있었기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아니요.”사실 그녀는 정말 별로 아프지 않았다. 적어도 아까 맞았을 때와 비교하면 이 정도 고통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안 아픈 건가?’유강후의 시선은 아래로 향했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 진흙이 조금 묻은 작은 상자를 발견하고 차갑게 말했다.“또 쳐다보면 버리겠어.”온다연은 그제야 황급히 고개를 돌려 긴장한 표정으로 유강후를 쳐다보고는 말도 하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다.유강후는 상처가 난 곳에 소염제를 바르고 붕대로 상처 부위를 감았다.약을 바를 때 온다연은 아파서 얼굴을 찡그렸고 손도 떨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유강후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붕대를 감았고 시선은 그 반창고에 멈췄다.일반 반창고보다 조금 크고 귀여운
그녀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일어나서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양복 첫 번째 단추를 살짝 풀었다.양복 단추마저 어떤 재질의 보석으로 만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질감이 좋은 양복이었다. 그래서 온다연은 혹시나 망가질까 조심스럽게 그의 양복을 벗겼다. 그러자 실크 질감의 흰색 줄무늬 셔츠가 나타났다.셔츠 밑단을 정장 바지에 넣었기에 그는 어깨가 더욱 넓어 보였고 허리가 잘록해 보였다. 그의 몸매는 정말 나무랄 데가 없이 좋아 보였다.게다가 그는 원래부터 차갑게 생겼고 흰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그는 더욱 고상해 보였다.온다연은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려서 고개를 들지 못했고 넥타이를 손으로 잡고 있었지만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유강후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벌려 온다연의 부드럽고 작은 손을 잡았다. 그러자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가볍게 몸을 떨었다.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유강후의 어떤 터치에도 온다연은 매우 민감하게 느껴졌고 그에 따라 거부감도 컸다.넥타이를 풀자마자 온다연의 손은 급하게 움츠러들었고 넥타이를 움켜쥐고 입술을 깨물며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유강후는 온다연의 붉은 입술을 바라보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갈아입은 옷은 욕실 문 앞에 있는 바구니에 넣어두면 매일 사람이 와서 수거해 갈 것이야. 그쪽에 가도 마찬가지야.”‘그쪽에 간다고?’온다연은 살짝 멍해졌다.유강후는 온다연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내 몸에 있는 물건들은 다른 사람이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러니까 너도 일찍 물건들을 정리하는 법을 배워야 해.”온다연은 여전히 유강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그가 오늘 한 말들은 모두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또 감히 묻지 못했기에 알아들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유강후의 시선은 너무 씻은 나머지 하얗게 된 잠옷에 머물렀고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심미진은 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거야?”밖에서 집을 빌려 살고 아파도 챙겨주는 사람도 없고 옷이 낡아서 이렇게 되어도 버리
온다연은 초조해서 땀이 났고 저도 모르게 유강후를 따라 위층으로 걸어가며 시선은 줄곧 그의 손에 있는 작은 상자에서 맴돌았다.그러나 그녀는 유강후가 침실로 들어갈 때까지 다시 상자를 돌려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온다연은 문밖에 서서 유강후가 상자를 서랍에 넣고 자물쇠를 채우는 것까지 보았다.다급해진 온다연은 입술이 찢어질 정도로 깨물고 있었지만 또 감히 유강후의 방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입구에서 자신의 치맛자락을 꽉 잡고 눈시울을 붉혔다.그 상자는 그녀의 가장 소중한 물건 중 하나였다.처음에는 유하령이 가져갈까 봐 두려워서 땅속에 묻었는데 지금은 또 유강후의 손에 들어갈 줄은 전혀 몰랐다.유강후는 유하령보다 백 배 이상 무서운 사람이었다.온다연이 밖에서 초조해하는 모습을 본 유강후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들어와.”온다연은 자기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고 엉겁결에 계단을 쳐다보았다.이곳은 계단까지 대략 7, 8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고 좀 빨리 뛰면 1분 이내에 이 집에서 도망쳐 나갈 수 있었다.한참을 망설이다가 온다연은 방으로 들어갔다.유씨 가문의 전통에 따르면 정원 전체가 통일된 중국식 디자인이었고 심플하고 절제된 분위기 속에 호화로움이 넘쳤다.유강후의 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넓은 침실에는 심플하고 큼직큼직한 중국식 가구들이 놓여 있었고 땅은 옅은 색의 나무 바닥이었고 숨을 가볍게 들이마시면 고급 원목의 은은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유강후의 침대는 매우 컸고 그 위에 옅은 회색 침구가 깔려 있었다. 고귀하고 차가운 색상이었다. 꼭 마치 유강후라는 사람처럼 냉기가 차 넘쳤다.반쯤 걸어간 온다연은 더 이상 앞으로 가지 않으려 했다.바로 침대 옆에서 어두운 눈빛으로 서 있었는 유강후를 본 그녀는 두려웠다.애써 잊어버린 기억들이 아련하게 다시 얽히면서 온다연은 전에 없던 위험을 느꼈다.하지만 온다연은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했고 도망가려 하지도 않았다.온다연은 그 상자를 돌려받아야 했고 심지어 꼭
온다연은 깜짝 놀라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낮은 목소리로 애원했다.“삼촌, 안 돼요... 삼촌...”하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삼촌이라는 호칭을 들은 유강후는 더욱 심해졌다. 그는 한 손으로 온다연의 몸을 만지고 다른 한 손으로 온다연의 손을 잡은 다음 그녀의 손을 자기 몸에 가져다 댔다.온다연의 손에 느껴지는 사이즈와 뜨거운 온도에 온다연은 손이 심하게 떨렸다.온다연은 놀라서 혼비백산했고 거의 울 뻔했다.“삼촌, 안 돼요...”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유강후는 계속 했다가는 자기 몸이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았다.마치 온몸의 세포가 우쭐대며 그에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온다연은 네 여자야. 빨리 계속해.’하지만 유강후는 지금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온다연이 이렇게 말을 듣지 않고 거짓말도 하고 도망도 쳤으니 벌은 받아야 했다.유강후는 온다연의 부드러운 귓불을 무겁게 깨물고 쉬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오늘 이건 너에게 주는 벌이야. 또 얌전하게 굴지 않으면 반드시 널 호되게 혼내 주겠어.”그는 말을 마치고 잡고 있었던 온다연의 손을 놓아주고 몸을 일으켰다.유강후가 자기 옷을 다 정리했을 때 그는 평소 어둡고 냉혹한 눈빛이 돌아왔고 표정도 냉랭했다. 마치 방금 통제 불능하던 유강후의 모습은 온다연의 환상에 불과했던 것 같았다.하지만 온다연은 여전히 침대에 웅크리고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유강후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허리를 굽혀서 그녀를 안아서 다시 침대에 눕히고 말했다.“배고파?”온다연은 감히 머리도 들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요.”유강후는 온다연의 정수리를 내려보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추어올리고 온다연이 자기를 똑바로 바라보도록 강요했다.“다연아, 거짓말하는 애가 전혀 귀엽지 않지.”유강후의 눈빛은 예리한 칼처럼 차갑고 날카로웠고 온다연을 두렵게 했다. 온다연은 유강후가 또다시 갑자기 자기한테 덮칠까 봐 조심스럽게 말했다.“배가 조금 고파요.”당연히
그러자 온다연은 깜짝 놀라 얼른 그를 밀어내고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걸 발견하자 온다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나 온다연은 감히 유강후를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당황한 모습으로 말했다.“삼촌, 여기는 밖이라고요!유강후는 고교 시절 파란색과 흰색이 섞인 교복 치마를 입은 온다연의 모습을 보자 표정이 어두워졌다.교복을 입은 온다연이 방금 겁에 질린 채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니 그가 그때 몰래 키웠던 고양이가 생각났다. 당시 그 고양이도 지금의 온다연처럼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유강후는 눈을 몇 번 껌뻑이더니 온다연을 놓아주고 돌아서서 차에 올랐다.온다연도 뒷좌석 문을 열었다.아직 차에 오르지도 않았는데 유강후는 운전대에 내려놓은 두 손을 두드리며 말했다.“앞에 앉아.”아주 담담하지만 거역해서는 안 되는 말투였다.차 문을 잡고 있던 온다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이곳을 벗어난 다음에 앞에 앉으면 안 돼요?”이번에 유강후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하지 않으면 동의한 것이었기에 온다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온다연은 유강후와 엮이고 싶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들 사이를 오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 둘은 원래 다른 세상 사람이었기에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사이였다. 비록 유강후가 지금 그녀를 놀리는 것에 관심이 있더라도 조만간 자기 세상으로 돌아가야 했다.온다연은 뒷좌석에 웅크리고 앉아 존재감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대문을 나갈 때 그녀는 치마 속에 머리를 파묻고 경비원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기를 기도했다.이번에 하늘은 그녀의 기도를 들었다. 경비원은 유강호가 차를 몰고 나오는 것을 보고 크게 숨을 내쉬지도 못하고 재빨리 대문을 열어 차를 통행시켰다.얼마 가지 않아 유강후는 차를 길가에 세웠다.나무 그늘의 어둠 속에서 조수석에 앉은 온다연은 머리를 숙인 채 아래를 보고 있었고 부드럽고 하얀 손은 주먹을 쥐고 있었다.유강후의 시선은 반창고를 붙인 손등에 머물렀고 반창고의
온다연은 긴장한 나머지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고 말도 못 하고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녀의 속셈이 들통나자 수치심을 느꼈다.차 안의 분위기는 갈수록 숨이 막혔고 1분 1초가 고통스럽게 느껴졌다.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단독주택 별장 앞에 멈춰 섰다.중앙 광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땅값이 비싼 지역에서 이 별장은 심지어 150평이 넘었다. 유씨 가문의 부유함은 다시 한번 온다연의 상상을 벗어났다.정원은 비교적 소박하게 꾸며져 있었고 중앙에는 서너 명이 껴안을 수 있는 커다란 오동나무가 있었다. 큰 오동나무 때문에 정원 전체를 자연스럽게 빛과 그림자로 보이게 하여 아름다운 느낌을 주었다.온다연은 나무 밑에 서서 유강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함께 따라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온다연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눈치채자 유강후는 잠시 몸을 돌려 말했다.“안아 줘?”그렇게 말하고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바로 가던 길을 다시 갔다.온다연은 입술을 깨물고 어쩔 수 없이 유강후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문에 들어서자마자 온다연은 이곳이 바로 유강후가 자주 살고 있는 곳이라는 걸 알아차렸다.개인 스타일이 너무 뚜렷한 인테리어였다. 평범해 보이지만 고급스러움을 잃지 않는 가구는 하나하나가 은은한 진주처럼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차갑고 고급스러운 유강후를 연상케 했다.장화연은 입구에 서서 유강후를 향해 허리를 굽히면서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이 인사했다.“도련님!”그러자 유강후는 담담하게 말했다.“야식은 준비가 다 되었어?”“네. 준비되었어요. 온다연 씨의 방도 준비되었어요.”유강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옷방도 정리 좀 해줘. 다연이가 쓸 생활용품도 추가하고. 내가 자주 쓰는 브랜드로 준비해 줘. 그리고 내일 내 옷을 만들어주었든 그 사람보고 한 번 오라고 해.”장화연은 공손하게 대답했다.“네. 도련님.”뭔가 생각났는지 유강호는 계속하여 말했다.“내일 그 옷 브랜드 책임자들을 불러줘. 올 때 지금 시즌 신상품을 가지고
온다연은 깜짝 놀라 막 말을 하려는데 마침 유강후의 전화가 울렸다.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손을 거두고 휴대 전화를 들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나은별이었다.유강후는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다 먹었으면 자기 방으로 돌아가.”온다연이 묵을 방은 유강후 침실의 왼쪽에 있었다. 그리 크지 않았고 마치 유강후 침실에 달린 작은 방 같았다. 방에는 화장실과 작은 베란다가 있었다.방 전체의 가구는 바깥쪽과 마찬가지로 고급스러웠고 진주처럼 은은한 빛이 났다. 나무로 된 창문이 열리자 아주 은은한 계수나무 향기가 흘러들어왔다.온다연은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두툼한 원목 바닥을 맨발로 밟으니 시원하고 편했다.비록 이곳이 유강후의 집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온다연은 방안의 인테리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그녀가 어렸을 때 살던 방 같았다.방 안을 한 바퀴 돌고 온다연은 베란다로 나왔다.베란다는 크지는 않았으나 큰 천당조화가 있었고 모처럼 꽃까지 피었다. 이 꽃을 기르는 사람이 얼마나 세심하게 보살핀다는 걸 알 수 있었다.그 옆에는 부드러운 덩굴로 만든 흰색 책걸상이 있었고 책상 위에는 잡지 몇 권과 다기 세트가 있었다.온다연은 걸상에 앉으려 하자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고개를 들어 보니 유강후는 옆의 베란다에 앉아서 전화하고 있었다.그는 한 손으로 전화를 들고 한 손으로는 난간을 쥐고 있었고 시선은 온다연을 쭉 지켜보고 있었다.그리고 천천히 신발을 신지 않은 그녀의 발을 쳐다보았다.작고 하얀 발은 사이즈가 225mm 신도 못 신을 것 같았다.유강후의 시선을 눈치챈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발을 뒤로 움츠렸지만 그녀는 지금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기에 아무리 작은 발을 숨기려고 해도 여전히 유강후의 눈에 보였다.온다연은 불현듯 수치심을 느꼈고 조심스럽게 삼촌이라고 부르며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갔다.방안은 깔끔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고 유씨 가문에 있던 그 방보다 몇 배나 더 나은지 몰랐다. 침대에서 사용하는 실크 베개
하지만 문을 몇 번 두드렸으나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유강후는 얼굴을 찌푸리며 문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열렸다.유강후는 상자를 침대에 내려놓고 막 욕실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땅에 쓰러진 온다연을 발견했다.가냘픈 몸이 바닥에 웅크린 채 생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유강후의 마음은 무섭게 졸여왔고 재빨리 그녀를 안아 올려 침대에 눕혔다.“온다연!”유강후는 가볍게 그녀의 얼굴을 두드렸다.하지만 온다연은 아직 혼수상태라 당연히 대답하지 않았다.그녀의 작은 얼굴은 끔찍할 정도로 하얗게 질렸고 입술에도 핏기가 전혀 없었다.유강후는 그녀가 왜 욕실에 쓰러져 있는지 몰랐고 어쩔 수 없이 재빨리 전화 한 통 걸었다.“주 의사, 지금 제가 사는 곳으로 오세요. 빨리요.”주 의사는 이 근처에 살고 있는 한의사였고 거의 유강후의 개인 의사였다.의사를 기다릴 때 유강후는 따뜻한 수건을 가져와 온다연의 얼굴을 닦았다.온다연은 계속 식은땀을 흘렸다. 심지어 머리카락도, 목덜미와 옷까지 전부 흠뻑 젖었다.식은땀을 이렇게 많이 흘리는 사람을 처음 보았기에 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렸다.온다연은 몸이 너무 안 좋았기에 일주일에 심지어 두 번이라 탈이 났다. 정말 몸조리를 잘 해야 했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얼굴과 목을 따라 조금씩 그녀의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팔을 닦아주려고 하자 방금 그가 싼 붕대가 좀 더러워진 것을 보고 먼저 붕대를 떼어냈다.방금 궤짝 문에 맞힌 곳은 이미 퉁퉁 부었고 보기에 섬뜩했다.만약 다른 여자가 이런 상처를 입었다고 하면 진작에 아파서 견딜 수 없었을 텐데 온다연은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유강후는 입술을 오므리면서 눈에는 냉기가 더욱 독해졌다.‘왜 이렇게 고집이 센 걸까? 내 앞에서는 조금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걸까?’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들고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했지만 곁눈으로 손등에 있는 반창고를 발견했다.이건 아까 차에 있을 때 그 반창고가 아니었다. 언제 새것으로 바꿨는지는 모르겠지만 변두리에서 핏자국이 쭈뼛쭈
온다연은 영상 속 장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그러다 또 다른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무겁게 고개를 들어 옆에 서 있던 장화연을 바라보았다.장화연은 벽에 기대어 있었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말없이 서 있었다.온다연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다가가 추궁하고 싶었다.‘대체 강후 씨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걸 숨겨왔어요?’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말았다.장화연은 유강후의 사람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소리쳐봤자 장화연은 끝까지 그를 감싸기만 할 것이다.온다연은 알고 있었다.만약 장화연이 정말 자신을 도우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지난 1년이라는 시간은 진실을 털어놓기에 충분했을 것이다.하지만 장화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 순간, 마음속에서 ‘신뢰'라는 단어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온다연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장화연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창백하게 질린 온다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장화연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몸을 움직이려 하자, 온다연이 먼저 일어섰다.“장 집사님, 저 몸이 좀 안 좋아서 화장실에 다녀와야겠어요.”장화연은 그녀가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힘들어하는 줄 알고 조용히 말했다.“우림 도련님은 괜찮을 겁니다. 열이 떨어지기만 하면 곧 그룹 병원으로 옮길 거예요. 그쪽이 장비도 더 좋고, 의사들도 더 뛰어나니까요.”그럴듯한 위로를 들으며, 온다연은 주먹을 꼭 쥐었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화장실에 도착한 온다연은 손을 떨며 그 음성 메시지를 재생했다.“이 사람이 제 약혼녀입니다.”“온다연 씨 되시죠? 대표님께서 아주 각별히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아니요, 저는 진시현입니다.”“아, 맞다, 진시현 씨. 제가 착각했네요. 두 분, 안으로 들어가시죠. 불편한 부분이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근데, 유 대표님이 온다연이랑 이미 혼인신고 했다던데? 어떻게 된 거야?”“혼인신고? 진짜인지 누가 알아? 나도 들은 얘긴데,
두 시간이 지났다.아이에게 열이 났다는 걸 유강후도 알고 있었을 텐데, 그는 단 한 통의 전화도 없었다. 심지어 메시지 한 줄조차 없었다.도대체 무슨 일, 무슨 회의가 그렇게 바빠서, 전화 한 통조차 걸 시간이 없는 걸까?그는 항상 말해왔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바로 그녀와 아이라고.하지만 지금 온다연의 머릿속은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아이의 모습과 더불어, 전화 속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로 어지러웠다.그녀는 과연 그를 믿어야 할까, 아니면 자신이 들은 것을 믿어야 할까?유강후의 전화를 대신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그의 비서이거나 이권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남자였다.그녀가 혼란 속에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휴대전화의 알림음이 울렸다.‘틀림없이 강후 씨가 보낸 메시지일 거야!’그녀는 재빨리 메시지를 확인하며 초조함을 달래려 했다. 그러나 메시지는 낯선 번호에서 온 친구 추가 요청이었다.검은색 프로필 사진에는 두 개의 눈만 드러나 있었다. 그 눈은 마치 어둠 속에서 그녀를 노려보는 악몽 같았다.친구 요청 메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네가 원하는 답을 가지고 있어.]온다연은 프로필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무심결에 친구 요청을 수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상대방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여러 개의 영상과 사진을 보냈다.온다연은 아무 생각 없이 영상을 하나 눌러봤고, 곧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영상 속에는 유강후가 어떤 여자와 함께 아이를 데리고 놀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영상은 꽤 먼 거리에서 찍힌 듯했지만, 그가 유강후라는 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그는 여자를 품에 안고, 그녀의 품에 안긴 작은 아기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스치는 다정함은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깊은 온기를 담고 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은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아담하고 온화한 실루엣은 뚜렷했다.흰색 홈웨어를 입고 있었는데, 평소 온다연이 입
“그 빨간 점은 딱 심장을 겨냥한 위치였어요. 만약 그대로 맞았다면 분명 심장에 명중했을 겁니다. 설령 나은별 씨가 총알을 대신 맞았다고 해도, 그분의 키를 고려하면 그 상처는 턱 아래에 있어야 해요. 하지만 지금 그분의 상처는 왼쪽 가슴에서 어깨 쪽으로 치우쳐 있죠.”진시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제 판단으로는, 암살자가 나은별 씨가 나타난 걸 보고 즉시 무기의 위치를 조정한 겁니다.”그녀는 응급실 쪽을 한 번 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암살범이 왜 나은별 씨를 보고 갑자기 위치를 바꿨을까요? 대표님, 그 이유는 직접 조사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유강후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로 수술실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때 로운이 다가와 진시현을 안아 들고 수술실로 향했다.진시현은 몸을 살짝 비틀며 저항했다.“팀장님, 괜찮습니다. 제가 걸어갈 수 있어요.”하지만 로운은 무표정하게 단호히 말했다.“움직이지 마.”결국 진시현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그의 품에 안겨 수술실로 들어갔다.그 시각, 대형 주택 내부에서는 온다연이 안절부절못하며 초조해하고 있었다.우림이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오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아이가 오후 두세 시쯤 갑작스럽게 미열이 났다.처음에는 단순히 소화 문제일 거라 생각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주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태를 설명하고 소화제를 조금 먹였다.그러나 저녁 여섯 시가 되자 아이의 열이 갑자기 급상승했다.다급히 달려온 주 박사가 진찰한 결과, 폐렴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하지만 주 박사는 서양의학 전문의가 아닌 데다 전문 장비를 가져오지 않았기에 병원으로 즉시 데려가야 한다고 권했다.문제는 밖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집 주변에 수상한 사람들이 출몰해 장화연은 이 주택도 감시당하고 있을 가능성을 의심했다.그래서 병원에서 의사와 장비를 호출하려고 논의했지만, 전문 장비를 가져오는 과정에서 소란이 클 것 같았다.게다가 이 건
말을 마친 유강후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은별을 안아 들고, 거침없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옆에서 소이섭도 서둘러 따라붙었다. 가는 내내 나은별의 피는 멈출 기색이 없었다.소이섭이 간단히 응급 처치를 해보았지만, 효과는 미미했다.의식을 잃은 나은별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유강후, 은별 씨는 이런 사람이야. 널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고!”그는 차갑게 비꼬듯 말했다.“그 고아 출신 여자애 때문에 네가 은별 씨를 몇 번이나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지? 앞으로도 계속 몰아세울 거야?”유강후는 이를 악물며 낮게 소리쳤다.“닥쳐. 내가 뭘 하든 네가 훈계할 자격은 없어!”소이섭은 냉소를 지었다.“그래도 말해야겠어. 넌 은별 씨한테 너무나 많은 빚을 졌어. 어떻게 갚을 건데? 돈으로? 네가 가진 돈이 만능이라도 된다고 생각해?”그 순간, 유강후의 전화가 울렸다.화면에 뜬 이름은 온다연이었다.그녀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떨려 있었다.“강후 씨, 아이가 열이 펄펄 끓고 있어요. 너무 높아서 당장 병원에 데려가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어디예요?”유강후가 대답하려는 찰나, 소이섭이 낮게 속삭였다.“설마 은별 씨를 내버려두고, 그 고아 출신 여자애를 찾아가려는 건 아니겠지? 네 아들은 단순히 열이 나는 거고, 은별 씨는 지금 죽어가고 있어!”그다음 순간, 차갑고 무거운 총구가 소이섭의 머리 뒤에 닿았다.유강후는 전화를 손으로 가린 채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한마디만 더 하면 네 목숨은 끝이다.”소이섭은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총구를 치우고 나서 유강후는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다연아, 걱정하지 마. 지금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바로 못 가. 장 집사랑 병원으로 먼저 가 있어. 내가 끝나는 대로 바로 갈게.”하지만 온다연의 목소리에는 눈물이 배어 있었다.“주 박사님께서 진찰했는데, 대엽성 폐렴일 가능성이 크대요. 해열제도 소용이 없어서 아까 체온이 40도까지 올라갔어요. 빨리
술이 준비된 곳으로 걸음을 옮기니, 사람이 조금 뜸했다.진시현은 유강후의 팔을 조심스럽게 놓으며 공손하게 말했다.“대표님, 우리가 이렇게 있으면 사모님께서 보시고 오해하시는 건 아닐까요?”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는 지금까지 잘 해왔어.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오늘 맡은 역할만 제대로 해.”그는 방금 전 험담을 늘어놓던 사람들 쪽을 아주 잠깐 바라보더니 차가운 말투로 덧붙였다.“아까 수군거리던 사람들 찍어서 이권에게 보내서 처리하게 해.”진시현은 즉시 대답했다.“네, 대표님.”그녀가 살짝 고개를 들며 긴장된 표정을 띠었다.“김원도가 왔습니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다시 유강후의 팔을 친밀하게 잡고, 그의 몸에 기댔다.애교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강후 씨, 저 조금 추워요.”유강후는 손짓하자마자 누군가 부드러운 캐시미어 숄을 가져왔다.그는 직접 숄을 집어 들고 진시현의 어깨에 다정하게 걸쳐주었다.그리고 숄을 걸쳐주며 살짝 몸을 기울여, 마치 그녀에게 입을 맞추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조심해. 저 근처에도 몇 명이 있어.”진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대답했다.“네, 대표님.”그때 김원도가 다가왔다.그는 진시현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유 대표, 이분은 누구지?”유강후는 진시현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김씨 집안 사람이라면 강씨 집안의 휘장을 모를 리가 없겠지. 내 약혼녀야.”김원도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쓰다듬으며 낮게 웃었다.“유 대표는 정말 복이 많네.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곁에 있으니 오늘 밤에도 많은 여성분들이 마음 아파하겠어.”유강후는 김원도의 말을 무시한 채, 시선을 그에게서 돌려 방금 막 들어온 다른 남자를 바라보았다.그 남자는 김원도와 닮았지만, 그의 음험한 기운은 전혀 없었다.그는 유강후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원도에게 다가갔다.“형, 형도 여기 있었어?”김원도는 얼굴빛이 변하며 말했다.“김원혁, 네가 왜
비밀스럽게 진행되었지만, 결국 소문은 새어 나갔고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해 질 무렵, 유강후와 진시현이 뉴월드 호텔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그 자리는 단숨에 술렁거렸다.유강후는 말할 것도 없이 경원시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그는 권력자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인물로, 그의 출현은 곧바로 주목을 끌었다. 연회 주최자인 주경한은 유강후를 보자마자 반갑게 달려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유 대표님,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요즘 많이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제 연회에 참석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그가 한 발짝 더 다가서며 유강후의 옆에 서 있는 진시현에게 눈길을 돌렸다.그리고 단번에 그녀의 가슴 위에 달린 블루 사파이어 브로치를 알아차렸다.조명 아래에서, 브로치 가장자리의 Y 모양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주경한은 이 바닥에서 감각이 빠르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그는 한눈에 이것이 강씨 집안의 여주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임을 알아차리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 이분이 바로 사모님이시군요!”그러나 유강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단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주경한은 이미 소문으로 유강후가 요즘 한 아가씨를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그녀가 강씨 집안 여주인의 물건을 사용할 정도라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혹시 유 대표님, 곧 결혼이라도 하시려는 건가요?”유강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곧 합니다.”주경한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그럼 제가 빨리 축의금을 준비해야겠네요.”그는 진시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온다연 씨 되시죠? 대표님께서 아주 각별히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진시현은 유강후를 살짝 바라보았다.그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아니요, 저는 진시현입니다.”주경한은 순간 멈칫했지만, 곧 웃음을 터뜨렸다.“아, 맞다, 진시현 씨. 제가 착각했네요. 두 분, 안으로 들어가시죠
장화연의 얼굴에는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을 믿으셔야 합니다.”그 말은 온다연의 추측이 사실임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온다연의 심장은 순간적으로 꽉 조여들었고, 마치 뒤틀려버린 밧줄처럼 고통스러워 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그래서, 정말로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는 거네요.”장화연은 말했다.“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모님과 우림 도련님의 안전과도 관련이 있는 일이에요. 도련님께서는 사모님께서 걱정하실까 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셨지만, 저는 사모님께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이 점점 더 무서워질 만큼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본 장화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누군가 사모님의 안전을 담보로 도련님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 며칠 동안 도련님은 밖에 나가 사모님처럼 보이는 사람을 일부러 꾸며냈어요. 그렇게라도 설명해 드리면 조금은 나아지실까요?”장화연은 유강후 곁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며 그의 모든 행적을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다.그렇기에 그녀의 말은 묵직한 신뢰를 주었고, 때로는 유강후를 대신해 발언하는 권위도 있었다.온다연은 그런 그녀의 말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그 전화.그녀가 그렇게 오래 들었던 그 전화가 정말 거짓일 수 있을까?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강후 씨의 휴대폰을 다른 사람이 받을 수 있나요?”장화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사모님,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모든 건 도련님께서 돌아오신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워낙 복잡하니, 타인들의 이간질에 넘어가지 마세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제가 우림 도련님을 데려오겠습니다. 오늘 밤은 사모님께서 아이와 함께 주무세요.”곧 예쁜 아기가 방으로 안겨 들어왔다.아이가 들어오는 순간, 온다연은 조금이나마 마음이 평온해지는 걸 느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곤히 잠든 얼굴을 쓰다듬으며, 이마에 부드럽게
그는 수년 동안 유강후의 곁에서 그의 냉혹한 수완을 지켜보며 살아왔다.하지만 이번만큼은 유난히 매섭고 강렬했다.김씨 집안은 동양국에서 가장 유명한 재벌 중 하나로 손꼽혔다. 그런데 불과 한 달 만에 몰락했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하고 말았다.이 과정에서 소요된 막대한 자금과 수단, 그리고 상업계에 불어닥친 폭풍우 같은 소란은 평범한 이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이번 사건은 그가 유강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그리고 또 한 가지 확실히 깨닫게 했다.앞으로는 정말로 의지할 대상을 찾는다면, 온다연을 선택하는 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거라는 사실을.온다연의 방.장화연은 따뜻한 우유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온다연이 침대 모서리에 웅크린 채 몰래 눈물을 훔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방 안의 부드러운 조명 아래, 온다연의 빨갛게 부은 눈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녀는 분명 울고 있었다.장화연은 우유를 내려놓고 그녀 옆에 조용히 앉았다.“사모님, 도련님이 보고 싶으신 거예요?”온다연은 고개를 저으며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강후 씨가 왜 오늘 오지 않는 거죠? 정말 회사에서 회의 중인 걸까요?”장화연은 따뜻한 우유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악몽을 꾸셨죠? 이거 마시면 좀 나아질 거예요.”온다연은 우유를 받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강후 씨 오늘 너무 심했어요. 저한테 한 달간 휴학하라고 했어요. 이유는 단지 염지훈이 제 선생님이라는 것뿐인데, 저랑 상의도 없이 제 수업을 멋대로 중단시켰어요.”“원래는 그 사람과 크게 싸우려고 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결혼도 했고, 아기까지 있으니 앞으로는 모든 일을 잘 상의하며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참았어요. 그런데 강후 씨는...”온다연은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낮게 속삭였다.“혹시 다른 여자가 생긴 걸까요? 강후 씨는 다를 거라고 믿었는데, 결국 다른 재벌 자제들과 다를 게 없었네요
유강후는 온다연이 악몽에 시달린 줄 알고 가슴 아파하며 물었다.“다연아, 악몽 꿨어?”온다연은 가볍게 답하고선 말을 이었다.“다른 여자랑 같이 있는 꿈을 꿨어요.”하루 종일 전전긍긍하던 유강후는 온다연의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다른 여자랑 있을까 봐 걱정됐어? 꿈에서도 내 생각뿐이네?”온다연이 물었다.“어디에 있는지 왜 대답 안 해요?”“회사에서 미팅 중이었어. 아마 이틀 동안 바빠서 못 갈 거야. 아이랑 같이 잘 지낼...”“강후 씨.”온다연은 그의 말을 끊었고 곧바로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거짓말하고 있잖아요. 옆에 다른 여자 있죠?”유강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온다연의 흐느끼는 목소리에서는 그녀의 기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아까 전화했을 때 다 들었어요. 다른 여자랑...”온다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유강후는 그녀가 또 악몽을 꾼 줄 알고 걱정된 마음으로 장화연에게 전화를 걸었다.곧이어 핸드폰 너머로 장화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유강후는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지금 당장 다연이가 있는 방으로 가봐. 방금 통화했는데 악몽을 꿨는지 울고 있었어.”장화연이 답했다.“지금 바로 가볼게요.”“일이 복잡해져서 당분간은 못갈지도 몰라. 다연이랑 우림이 잘 돌봐줘. 절대 밖에 나가게 해서는 안 돼.”“알겠습니다.”“차라리 우림이를 옆에 데려다줘. 아이랑 같이 자면 마음이 편해질 거야.”“그럴게요.”장화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제 경호원을 통해서 들었는데 다연 씨가 나은별 씨를 만났다고 합니다. 아마 그때 안 좋은 얘기를 들었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다연 씨는 힘든 일을 마음속에 담아두는 분입니다. 도련님께 대한 오해가 생겼다면 그 마음을 달래는 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모릅니다. 두 분 어렵게 여기까지 온 만큼 서로에게 그 어떤 오해도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도련님, 나은별 씨가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