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깜짝 놀라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낮은 목소리로 애원했다.“삼촌, 안 돼요... 삼촌...”하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삼촌이라는 호칭을 들은 유강후는 더욱 심해졌다. 그는 한 손으로 온다연의 몸을 만지고 다른 한 손으로 온다연의 손을 잡은 다음 그녀의 손을 자기 몸에 가져다 댔다.온다연의 손에 느껴지는 사이즈와 뜨거운 온도에 온다연은 손이 심하게 떨렸다.온다연은 놀라서 혼비백산했고 거의 울 뻔했다.“삼촌, 안 돼요...”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유강후는 계속 했다가는 자기 몸이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았다.마치 온몸의 세포가 우쭐대며 그에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온다연은 네 여자야. 빨리 계속해.’하지만 유강후는 지금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온다연이 이렇게 말을 듣지 않고 거짓말도 하고 도망도 쳤으니 벌은 받아야 했다.유강후는 온다연의 부드러운 귓불을 무겁게 깨물고 쉬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오늘 이건 너에게 주는 벌이야. 또 얌전하게 굴지 않으면 반드시 널 호되게 혼내 주겠어.”그는 말을 마치고 잡고 있었던 온다연의 손을 놓아주고 몸을 일으켰다.유강후가 자기 옷을 다 정리했을 때 그는 평소 어둡고 냉혹한 눈빛이 돌아왔고 표정도 냉랭했다. 마치 방금 통제 불능하던 유강후의 모습은 온다연의 환상에 불과했던 것 같았다.하지만 온다연은 여전히 침대에 웅크리고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유강후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허리를 굽혀서 그녀를 안아서 다시 침대에 눕히고 말했다.“배고파?”온다연은 감히 머리도 들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요.”유강후는 온다연의 정수리를 내려보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추어올리고 온다연이 자기를 똑바로 바라보도록 강요했다.“다연아, 거짓말하는 애가 전혀 귀엽지 않지.”유강후의 눈빛은 예리한 칼처럼 차갑고 날카로웠고 온다연을 두렵게 했다. 온다연은 유강후가 또다시 갑자기 자기한테 덮칠까 봐 조심스럽게 말했다.“배가 조금 고파요.”당연히
그러자 온다연은 깜짝 놀라 얼른 그를 밀어내고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걸 발견하자 온다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나 온다연은 감히 유강후를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당황한 모습으로 말했다.“삼촌, 여기는 밖이라고요!유강후는 고교 시절 파란색과 흰색이 섞인 교복 치마를 입은 온다연의 모습을 보자 표정이 어두워졌다.교복을 입은 온다연이 방금 겁에 질린 채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니 그가 그때 몰래 키웠던 고양이가 생각났다. 당시 그 고양이도 지금의 온다연처럼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유강후는 눈을 몇 번 껌뻑이더니 온다연을 놓아주고 돌아서서 차에 올랐다.온다연도 뒷좌석 문을 열었다.아직 차에 오르지도 않았는데 유강후는 운전대에 내려놓은 두 손을 두드리며 말했다.“앞에 앉아.”아주 담담하지만 거역해서는 안 되는 말투였다.차 문을 잡고 있던 온다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이곳을 벗어난 다음에 앞에 앉으면 안 돼요?”이번에 유강후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하지 않으면 동의한 것이었기에 온다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온다연은 유강후와 엮이고 싶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들 사이를 오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 둘은 원래 다른 세상 사람이었기에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사이였다. 비록 유강후가 지금 그녀를 놀리는 것에 관심이 있더라도 조만간 자기 세상으로 돌아가야 했다.온다연은 뒷좌석에 웅크리고 앉아 존재감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대문을 나갈 때 그녀는 치마 속에 머리를 파묻고 경비원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기를 기도했다.이번에 하늘은 그녀의 기도를 들었다. 경비원은 유강호가 차를 몰고 나오는 것을 보고 크게 숨을 내쉬지도 못하고 재빨리 대문을 열어 차를 통행시켰다.얼마 가지 않아 유강후는 차를 길가에 세웠다.나무 그늘의 어둠 속에서 조수석에 앉은 온다연은 머리를 숙인 채 아래를 보고 있었고 부드럽고 하얀 손은 주먹을 쥐고 있었다.유강후의 시선은 반창고를 붙인 손등에 머물렀고 반창고의
온다연은 긴장한 나머지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고 말도 못 하고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녀의 속셈이 들통나자 수치심을 느꼈다.차 안의 분위기는 갈수록 숨이 막혔고 1분 1초가 고통스럽게 느껴졌다.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단독주택 별장 앞에 멈춰 섰다.중앙 광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땅값이 비싼 지역에서 이 별장은 심지어 150평이 넘었다. 유씨 가문의 부유함은 다시 한번 온다연의 상상을 벗어났다.정원은 비교적 소박하게 꾸며져 있었고 중앙에는 서너 명이 껴안을 수 있는 커다란 오동나무가 있었다. 큰 오동나무 때문에 정원 전체를 자연스럽게 빛과 그림자로 보이게 하여 아름다운 느낌을 주었다.온다연은 나무 밑에 서서 유강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함께 따라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온다연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눈치채자 유강후는 잠시 몸을 돌려 말했다.“안아 줘?”그렇게 말하고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바로 가던 길을 다시 갔다.온다연은 입술을 깨물고 어쩔 수 없이 유강후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문에 들어서자마자 온다연은 이곳이 바로 유강후가 자주 살고 있는 곳이라는 걸 알아차렸다.개인 스타일이 너무 뚜렷한 인테리어였다. 평범해 보이지만 고급스러움을 잃지 않는 가구는 하나하나가 은은한 진주처럼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차갑고 고급스러운 유강후를 연상케 했다.장화연은 입구에 서서 유강후를 향해 허리를 굽히면서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이 인사했다.“도련님!”그러자 유강후는 담담하게 말했다.“야식은 준비가 다 되었어?”“네. 준비되었어요. 온다연 씨의 방도 준비되었어요.”유강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옷방도 정리 좀 해줘. 다연이가 쓸 생활용품도 추가하고. 내가 자주 쓰는 브랜드로 준비해 줘. 그리고 내일 내 옷을 만들어주었든 그 사람보고 한 번 오라고 해.”장화연은 공손하게 대답했다.“네. 도련님.”뭔가 생각났는지 유강호는 계속하여 말했다.“내일 그 옷 브랜드 책임자들을 불러줘. 올 때 지금 시즌 신상품을 가지고
온다연은 깜짝 놀라 막 말을 하려는데 마침 유강후의 전화가 울렸다.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손을 거두고 휴대 전화를 들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나은별이었다.유강후는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다 먹었으면 자기 방으로 돌아가.”온다연이 묵을 방은 유강후 침실의 왼쪽에 있었다. 그리 크지 않았고 마치 유강후 침실에 달린 작은 방 같았다. 방에는 화장실과 작은 베란다가 있었다.방 전체의 가구는 바깥쪽과 마찬가지로 고급스러웠고 진주처럼 은은한 빛이 났다. 나무로 된 창문이 열리자 아주 은은한 계수나무 향기가 흘러들어왔다.온다연은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두툼한 원목 바닥을 맨발로 밟으니 시원하고 편했다.비록 이곳이 유강후의 집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온다연은 방안의 인테리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그녀가 어렸을 때 살던 방 같았다.방 안을 한 바퀴 돌고 온다연은 베란다로 나왔다.베란다는 크지는 않았으나 큰 천당조화가 있었고 모처럼 꽃까지 피었다. 이 꽃을 기르는 사람이 얼마나 세심하게 보살핀다는 걸 알 수 있었다.그 옆에는 부드러운 덩굴로 만든 흰색 책걸상이 있었고 책상 위에는 잡지 몇 권과 다기 세트가 있었다.온다연은 걸상에 앉으려 하자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고개를 들어 보니 유강후는 옆의 베란다에 앉아서 전화하고 있었다.그는 한 손으로 전화를 들고 한 손으로는 난간을 쥐고 있었고 시선은 온다연을 쭉 지켜보고 있었다.그리고 천천히 신발을 신지 않은 그녀의 발을 쳐다보았다.작고 하얀 발은 사이즈가 225mm 신도 못 신을 것 같았다.유강후의 시선을 눈치챈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발을 뒤로 움츠렸지만 그녀는 지금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기에 아무리 작은 발을 숨기려고 해도 여전히 유강후의 눈에 보였다.온다연은 불현듯 수치심을 느꼈고 조심스럽게 삼촌이라고 부르며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갔다.방안은 깔끔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고 유씨 가문에 있던 그 방보다 몇 배나 더 나은지 몰랐다. 침대에서 사용하는 실크 베개
하지만 문을 몇 번 두드렸으나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유강후는 얼굴을 찌푸리며 문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열렸다.유강후는 상자를 침대에 내려놓고 막 욕실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땅에 쓰러진 온다연을 발견했다.가냘픈 몸이 바닥에 웅크린 채 생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유강후의 마음은 무섭게 졸여왔고 재빨리 그녀를 안아 올려 침대에 눕혔다.“온다연!”유강후는 가볍게 그녀의 얼굴을 두드렸다.하지만 온다연은 아직 혼수상태라 당연히 대답하지 않았다.그녀의 작은 얼굴은 끔찍할 정도로 하얗게 질렸고 입술에도 핏기가 전혀 없었다.유강후는 그녀가 왜 욕실에 쓰러져 있는지 몰랐고 어쩔 수 없이 재빨리 전화 한 통 걸었다.“주 의사, 지금 제가 사는 곳으로 오세요. 빨리요.”주 의사는 이 근처에 살고 있는 한의사였고 거의 유강후의 개인 의사였다.의사를 기다릴 때 유강후는 따뜻한 수건을 가져와 온다연의 얼굴을 닦았다.온다연은 계속 식은땀을 흘렸다. 심지어 머리카락도, 목덜미와 옷까지 전부 흠뻑 젖었다.식은땀을 이렇게 많이 흘리는 사람을 처음 보았기에 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렸다.온다연은 몸이 너무 안 좋았기에 일주일에 심지어 두 번이라 탈이 났다. 정말 몸조리를 잘 해야 했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얼굴과 목을 따라 조금씩 그녀의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팔을 닦아주려고 하자 방금 그가 싼 붕대가 좀 더러워진 것을 보고 먼저 붕대를 떼어냈다.방금 궤짝 문에 맞힌 곳은 이미 퉁퉁 부었고 보기에 섬뜩했다.만약 다른 여자가 이런 상처를 입었다고 하면 진작에 아파서 견딜 수 없었을 텐데 온다연은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유강후는 입술을 오므리면서 눈에는 냉기가 더욱 독해졌다.‘왜 이렇게 고집이 센 걸까? 내 앞에서는 조금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걸까?’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들고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했지만 곁눈으로 손등에 있는 반창고를 발견했다.이건 아까 차에 있을 때 그 반창고가 아니었다. 언제 새것으로 바꿨는지는 모르겠지만 변두리에서 핏자국이 쭈뼛쭈
유씨 가문에서 이제 누군가는 큰 봉변을 당하게 될 것이다.유강후는 어려서부터 중국과 서양의 사상교육을 전부 받았고 뼛속까지 지극히 전통적이지만 가족에 대한 애정이 아주 담담했다.말하자면 유강후는 도덕적인 속박감이 별로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장화연은 유강후가 친부모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한테 별 신경을 쓰지 않으리라 생각했다.장화연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자 유강후는 화가 아직 채 가시지 않았기에 더욱 무서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당장!”그러자 장화연은 이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바로 가져오겠습니다.”유강후의 시선은 줄곧 온다연의 손등 상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온다연의 팔을 살짝 잡아당겨 자세히 살펴보니 그녀의 교복 소매 변두리에 검푸른 자국이 조금 있었다.그의 눈빛은 매섭게 변했고 손은 나무 침대 머리를 꽉 잡았고 손등의 핏줄이 툭툭 튀었다.잠시 후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손을 온다연의 교복 단추 쪽으로 가져갔다.교복 단추가 풀렸다.온다연의 예쁘고 사랑스러운 몸매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녀의 몸매는 완벽한 각선미를 자랑했다.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 풍만한 가슴과 우유푸딩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온다연은 어떤 남자라도 유혹시킬 정도로 매력이 넘쳤다.하지만 이렇게 매력적인 몸의 곳곳에 멍이 들었다. 다리, 쇄골, 허리까지 합치면 최소 열 군데가 있어서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그중 가장 심한 대여섯 군데는 바로 가장 부드럽고 상처받기 쉬운 가슴과 배에 있었다. 당시 가해자의 악랄하고 지독한 심정을 알 수 있었다.유강후는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고, 풀었다가 또 쥐었다. 눈 속의 분노는 거의 사람을 죽여버릴 정도로 가득했다. 심지어 목의 핏줄까지 선명하게 보였다.그는 원래 온다연이 유씨 가문에서 단지 대접을 잘 받지 못할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리 크지 않은 유씨 저택에서 이렇게 많은 나쁜 자식들이 숨어있을 줄은 몰랐다.‘유씨 가문, 이젠 청소할 때도 됐어.’이때 밖에서 장화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주 의사가
그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유강후와 눈이 마주쳤고 유강후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못처럼 깊고 차가운 눈동자를 보았다.쉰 살이 넘는 한의사는 깜짝 놀랐다. 살면서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한 사람의 눈에 이렇게 심한 분노가 있는 것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그는 유강후가 너무 걱정할까 봐 부드러운 어조로 다시 말을 이어갔다.“비록 심각하지만 치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죠. 한약을 먹고 몸조리를 하면 돼요. 우선 이 여성분 마음속의 울분을 풀어줘야 해요. 서양 의학에서는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이 있잖아요. 그쪽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좋죠.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한의학과 서양 의학을 조합해서 치료를 받으면 놀라운 효과가 있을 거예요.”그는 말하며 다른 한 손을 꺼내 온다연의 다른 손의 맥을 짚으려다 그녀의 손등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늙은 한의사는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이건 어떻게 된 거죠?”그는 온다연의 손을 천천히 잡아당겨 상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이건 뾰족한 것에 찔린 게 아니라 꽤 둔탁한 물건에 의해 손등이 관통된 것 같네요. 마치 여자의 하이힐 같은 그런 물건일까요?”말이 떨어지자마자 주위의 공기가 더욱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보니 유강후의 눈빛은 사람을 잡아먹을 듯 무서웠고 목에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그러자 늙은 한의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그도 어느 정도 눈치가 있었다. 유씨 가문의 일은 그와 같은 사람이 상관할 수가 없었다.늙은 한의사는 온다연의 손등 상처를 간단하게 처리하고 처방을 써서 유강후에게 건네주었다.“잠시 후에 사람을 보내 약을 가져다드릴게요. 물 세 그릇에 약재를 넣고 한 그릇이 될 때까지 달여서 복용하세요. 하루에 세 번 드시고, 일단 한 달 동안 먹여 보십시오.”그는 또 약상자에서 이미 달인 약 한 봉지를 꺼내 건네주었다.“뜨거운 물에 데워서 마시게 하면 일시적으로 통증을 완화할 수 있어요.”유강후는 약을 받아서 집사에게 건네주었다.떠나기 전에 늙은 한의사는 참지 못하고 고개
여전히 흰색 줄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던 그는 깔끔하고 고귀해 보였다. 어렴풋한 밤빛에 보이는 뒷모습만으로도 사람에게 압박감을 주었다.그의 얼굴을 볼 수 없어도 온다연은 지금 그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었다.냉담하고 감정 기복이 없고 감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눈빛일 것이다.온다연는 조금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그녀의 기억네는 화장실에서 쓰러졌는데 지금은 침대에 있었다.‘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온다연는 무의식적으로 자기 옷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작은 얼굴은 금방 하얗게 변했다.입고 있었던 교복 치마는 사라졌고 그 대신 베이지색 실크 잠옷을 입고 있었다. 촉감이 매우 부드럽고 매끄러웠지만 온다연은 이 옷이 유강후가 자신에게 바꿔 입혔다고 생각하자 온몸이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게다가 위에서도 은은한 통증이 전해졌다.두 가지 느낌이 뒤섞이면서 온다연은 또 긴장한 나머지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이때 유강후가 전화를 끊고 방으로 들어갔다.온다연이 깬 것을 보고 침대로 걸어갔다.“깼어?”변함없이 잔잔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온다연은 감히 머리를 들어 그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침대 시트를 손에 꼭 쥐고 말했다.“네.”그사이에 온다 연은 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고 심지어 이마의 머리카락도 흠뻑 젖었다.유강후는 그녀의 축 처진 눈썹과 젖은 귀밑머리를 바라보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지금은 좀 어때? 아직도 많이 아파?”그러자 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삼촌, 저 안 아파요.”온화하고 부드러운 조명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어 화기애애할 법도 한데 온다연은 지금 유강후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고 주변 공기마저 압박감이 가득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몸에 있던 이불을 꽉 조이면서 자신을 단단히 감싸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제 옷은...”그녀는 방금 누가 자기에게 옷을 갈아입혔는지 알고 싶었지만 감히 직접 물어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말을 빙빙 돌려서 물어봤다.유강후는 당연히 온다연이
안윤희는 옆 거실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그러고선 밝은 미소를 지으며 안심에게 다가갔다.“이모, 저는 이모부랑 강 대표님에게 차 한잔 가져다드릴게요.”그 시각 안심은 방금 손에 넣은 핑크색의 다이아몬드 팔찌를 온다연에게 채워주며 끊임없이 예쁘다고 칭찬했다.그녀는 안윤희의 목소리를 듣고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뜸 물었다.“윤희야, 이거 어때? 유나한테 너무 잘 어울리지?”안윤희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그대로 얼어붙었다.그녀는 이 팔찌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건 동국 왕비가 차던 팔찌였는데 불과 얼마 전 경매에 나와 70억의 고가에 낙찰되었다.모든 여자의 로망이라고 불리는 팔찌를 안심이 갖고 있는 것조차도 놀라운데 평범한 선물인양 딸에게 건네는 그 모습을 보고 질투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안윤희는 진유나만 없다면 이 모든 게 본인의 소유라고 생각했다.‘왜 갑자기 나타나서 내 앞길을 막는 거야.’‘차라리 그냥 확 죽어버리지...’안윤희는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유나는 이모 닮아서 예쁘잖아요. 뭘 차든 다 잘 어울려요.”그 말을 들은 안심은 기분이 좋아진 듯 고개를 들어 안윤희를 바라봤다.“아참, 경매에 사파이어 귀걸이도 나왔어. 너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한 쌍 샀는데 집사님한테서 가져가.”안윤희는 눈을 내리깔았다.“고마워요, 이모. 저는 차 우리러 갈게요.”‘고작 사파이어 귀걸이로 내가 물러날 것 같아?’‘이거 받고 떨어지라는 느낌인가?’안윤희는 반드시 그녀가 소유했던 모든 것을 되찾기로 결심했다.그 시각 작은 거실. 진수현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강 대표님,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말도 없이 청혼이라뇨?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 아닌가요?”유강후는 공손한 태도를 유지한 채 태연하게 말했다.“유나 씨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진수현은 버럭 화를 냈다.“장난도 정도껏 해야죠,”그는 문 쪽을 힐끗 보고선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유나는 아직 모르니까 당장 그 지저분한 것들을 정리해서 가져가요. 괜히
‘그러니까 하루 종일 날 속였다는 거야?’‘아니, 설마 며칠 동안 속인 건가?’온다연은 최근 들어 지루 할때마다 유강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온갖 보기 싫은 자세를 취하기도 했고 방에 아무도 없을 땐 옷을 갈아입기도 했다.‘설마 다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온다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였다.“강 대표님, 사실 며칠 전부터 다 보였죠? 날 속이는 게 재밌어요?”눈물을 그렁이는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는 가슴이 아팠다. 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선 손을 뻗어 온다연의 눈물을 닦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울지 마요. 전보다 좋아진 건 사실이지만 아직 다 보이는 건 아니에요.”온다연은 그 말을 전혀 믿지 못하는 듯 유강후의 손을 뿌리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우리 친한 사이 아니잖아요. 함부로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이권이 밖에서 다급하게 외쳤다.“도련님, 회장님이랑 사모님께서 병문안 오셨습니다.”진수현과 안심이 찾아왔다.온다연은 재빨리 옷을 정리하고 눈물을 닦았다. 그녀가 창턱에서 뛰어내리려고 하자 유강후는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갑작스러운 행동에 온다연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우리 가족들이 왔잖아요.”유강후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제 막 입을 열려고 하자 온다연은 잽싸게 선방을 날렸다.“강 대표님, 저한테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지만 가족들 앞에서는 티 내지 마세요.”온다연은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저 다음 달에 약혼해요. 오늘은 강 대표님과 만나는 마지막 날이 되겠네요.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약혼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유강후는 표정이 어두워졌고 왠지 모를 살의가 느껴졌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꽉 쥔 주먹에는 서서히 핏줄이 튀어 올랐다.진씨 가문의 정보를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니 조금씩 단서를 얻었다.온다연은 정말 이곳에 약혼자가 있었다.그리고 그 상대의 성은 박, 이름
솔직히 말해서 온다연은 자신이 예전에 그를 짝사랑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유강후는 평범한 잘생김이 아니라 미친 듯이 잘생겼다. 수많은 여자들이 그의 뒤를 쫓아다녔다 한들 전혀 이상할게 없는 것처럼 말이다.자신의 짝사랑 상대가 그였다면 싫을 건 없었다.하지만 이제는 안된다. 곧 약혼하게 될 사람으로서 낯선 남자와 거리를 유지하는 게 올바른 행동이다.사실 그들의 관계는 이미 선을 넘고 있었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이때 등 뒤로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한숨을 쉬는 거예요?”온다연은 그제야 유강후가 뒤에 서 있었다는 걸 알아챘다.당황한 그녀는 재빨리 몸을 피하다가 유강후의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부딪혔다.유강후는 건장한 몸으로 그녀를 감쌌고 온다연은 순식간에 그의 그림자 속에 파묻혔다.때마침 붉은빛 노을이 두 사람 위로 늘어졌고 어느새 그들 사이에는 모호한 분위기가 맴돌았다.마치 평생 서로에게 얽혀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말이다.마음이 심란해진 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강 대표님, 솔직히 이제 다 보이는 거죠?”유강후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됐어요. 어차피 보이든 말든 상관없거든요. 내일부터 저는 오지 않을 겁니다. 최고의 간병인을 보내줄 테니 몸조리 잘하세요.”유강후는 진지한 표정으로 온다연을 바라봤다. 부드러운 입술 위에 있던 점은 그녀에게 물려 하얗게 변했다.유강후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온다연, 내 허락 없이 이렇게 깨물면 안 된다고 했잖아.”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동시에 얼어붙었다.온다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예전 이름에 대해서 알고 있네요?”염지훈과 진수현이 얘기해준 적이 있어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온다연인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국에 온 이후로 그 이름을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강 대표가 이를 알고 있는 게 의아했다.
하지만 3년 동안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낸 후, 더 이상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지 않았다.그저 온다연이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고 눈앞에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안도감을 느꼈다. 딱 한 번만 안아보고 싶다는 간절함이 밀려왔지만 참아야만 한다.만약 온다연이 어느 날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면, 비참했던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한편으로는 어떻게 그녀의 용서를 얻어야 할지 몰랐다.결국 모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건 현재로서는 시간이 유일하다.온다연은 아무 말 없는 유강후를 바라봤다. 아직 그리움 속에서 허덕이는듯한 그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져 숨이 막혔다.“강 대표님이 사랑하는 그분... 저랑 많이 닮았나요?”‘그렇게 많이 닮았나? 눈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네.”그 한 글자에는 유강후의 진심이 담겨있었다.이미 예상한 반응이었지만 온다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고통스러운 느낌이 밀려와 너무 괴로웠다.‘얼마나 사랑하면 눈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걸까?’온다연은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불끈 쥐었다.최소 두 달은 걸릴 줄 알았는데 유강후는 예상보다 비교적 빨리 회복되었다.그의 상태를 들은 곽혜진은 또 이상한 약을 보내왔다. 유강후는 이를 복용했고 둘째 주에 곧바로 시력을 회복했다.다만 온다연의 얼굴을 똑똑히 보게 된 뒤로는 그녀와 헤어지는 게 아쉬워 못 보는 척 연기를 이어갔다.제일 고생하는 건 그의 연기에 맞춰야 하는 주변 사람들이다.때마침 이권이 서명할 서류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병실 문을 열어보니 유강후가 침대에 기대어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뚫어져라 지켜보는 모습이 보였다.그가 다가서자 유강후는 곧바로 싸늘한 눈빛과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나가.’하지만 지금 당장 서명해야 될 중요한 서류였기에 물러설 수가 없었다.이권은 중요한 사항이라며 여러 번 손짓했지만 유강후는 그를 무시한 채 침대에서 내려와 온다연에게 다가갔다.온다연은 창틀에 기대어 멍하니 바깥 바다를 바라봤는데
얼굴은 물론이고 손까지 화상을 입은 듯 뜨거워지자 온다연은 대뜸 눈을 부릅뜨며 유강후를 밀어냈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유강후는 태연하게 답했다.“이렇게 부축하면 오히려 제가 더 불편해요. 그냥 손잡고 가는 게 훨씬 나을 거예요.”그 말을 끝으로 유강후는 정확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온다연은 그가 안 보이는 척 연기하는 건가 싶어 손을 들어 유강후의 눈앞에서 흔들었다.그러자 유강후는 그녀의 다른 한 손까지 잡고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형체 정도는 보이니까 흔들 필요 없어요. 아직 완전히 눈이 먼 수준은 아니거든요.”온다연은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민망함이 밀려와 곧바로 그를 끌고 식탁으로 향했다.진씨 가문의 셰프는 한국인이었다. 유강후는 음식들이 입맛에 맞는지 삼계탕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온다연은 옆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그를 지켜봤다.‘먹을 때는 꽤나 우아한데 왜 매번 행동은 제멋대로 하는 거지?’그녀는 유강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뚫어져라 쳐다봤다.‘잘생긴 건 인정. 그런데 뭔가 제정신이 아닌 느낌이랄까?’참다못한 유강후가 그릇을 내려놓고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언제까지 쳐다볼 거예요?”온다연은 그제야 자신이 실례를 범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곧바로 반박했다.“안 보인다면서요? 제가 강 대표님을 지켜보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유강후의 말투에는 애정이 묻어났다.“앞이 안 보여도 유나 씨가 계속 저를 쳐다보고 있는 건 느껴져요. 본능적으로 그냥 느낌이 온달까?”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온다연은 괜스레 당황함을 감췄다.“계속 안 봤거든요?”그녀는 시계 상자를 꺼내 유강후에게 건넸다.“선물이에요.”유강후는 상자를 더듬다가 열어보더니 안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촉감에 뭔가를 알아챘다.“시계?”그러자 온다연은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그림을 선물했잖아요. 저도 답례를 해야될 것 같아서 준비했어요. 선물만 꿀꺽하는 파렴치한 사람은 아니거든요.”유강후는 다이얼을 만져보며 무브먼트가 움직이는 소리에 귀
유강후는 흠칫하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왜 그렇게 생각해?”그러자 이권이 답했다.“솔직히 돌봐달라고 얘기했을때 충분히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잖아요. 싫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간병인을 보냈어도 되는데 직접 오겠다고 하는 걸 보면 본능적으로 도련님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입니다.”유강후는 그제야 기분이 조금 풀렸으나 여전히 동국 왕자가 신경 쓰였다.‘세기말 감성도 아니고 뭔 왕자야. 어이가 없네. 다연이한테 딴마음 품으면 죽여버릴 거야.’곰곰이 생각하던 유강후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집사가 방금 얘기한 동국 왕자, 설마 연씨 가문 후계가 중 한 명이야?”이권이 답했다.“연시온 씨입니다.”유강후는 여전히 쌀쌀맞았다.“그 사람이었구나. 유능한 건 맞는데 연씨 가문에는 후계자가 될 후보가 너무 많아서 아마 순위에도 못 들 거야. 가서 경고해. 다연이한테 치근덕거리면 연씨 가문의 후계자에서 제명해 버린다고.”“아시다시피 말레이시아 해상 유전 개발업체는 현재 저희와 연씨 가문과 협력하고 있습니다. 연씨 가문에서는 차기 후계자로 연시온 씨를 지명했고 이번 유전 개발 관련한 모든 사항도 전적으로 그분이 책임지고 있습니다.”이권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신국의 사업과 투자보다 훨씬 큰 유전이기에 그래서 당분간은 미움을 사지 않는 게 좋을듯합니다.”앞이 안 보일 뿐 유강후의 예리한 통찰력은 변함없었다.“잠깐만, 이건 처음부터 다연이를 위해서 준비한 프로젝트였잖아. 그럼 앞으로 다연이가 연시온이랑 컨택한다는 말이야? 내가 왜 이런 멍청한 짓을 했지?”“연시온에게 다른 일거리를 던져줘. 그럼 연씨 가문에서 어쩔 수 없이 프로젝트 담당자를 바꿀 거야. 이런 사소한 일에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아.”이권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연씨 가문의 세력도 만만치 않거든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답했다.“로운한테 맡겨. 정 안 되면 연씨 가문의 주식을 우리가 먹어 치우고 내가 직접 하면 되잖아.”“말레이시아
“이 집사님, 저희 대표님이 지금 앞이 안 보여서 많이 예민해요. 말이 거칠어도 너그럽게 양해해 주세요.”이권은 두툼한 가죽 가방을 꺼내 집사에게 건넸다.이를 본 집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아이고, 전 이런 거 못 받습니다. 강 대표님한테 그 어떤 불만도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이권은 가방을 강제로 그의 손에 쥐여주며 태연하게 말했다.“실은 이 집사님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집사는 여전히 받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돕겠습니다.”“일단 이것부터 받으시죠. 큰 부탁을 하려는 건 아닌데 부담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이 집사님한테는 쉬운 일입니다.”“어떤 부탁을 하시려는 거죠? 최대한 돕겠습니다.”이권은 병실 문을 힐끗 쳐다보고선 나지막이 말했다.“알다시피 저희 대표님이 최근에 실명해서 기분이 안 좋은 편이에요. 다름이 아니라 유나 씨에 관련한 일인데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제가 봤을 땐 저희 대표님이 유나 씨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거든요.”집사는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보였다.사실 진유나는 너무 아름다워서 그녀를 보는 사람마다 사랑에 빠지곤 했다. 그러니 오아시스 그룹의 대표를 사로잡는 것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유나 씨가 동국 왕자랑 저녁을 먹는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기분이 언짢아졌거든요. 어떻게 보면 집사님도 저랑 같은 일을 하는 입장이라 충분히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저희 같은 사람이 중간에서 비위를 맞추는 게 제일 힘들잖아요.”“그래서 말인데, 유나 씨에 대해서 뭔가를 알려줄 수는 없을까요?”집사는 기겁했다.“안 됩니다. 회장님이 알게 되면 전 죽은 목숨입니다.”그러자 이권이 차분하게 타일렀다.“대표님은 이성으로 유나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 진씨 가문에 대한 정보는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단지 유나 씨가 연애할 생각은 있는지, 아니면 결혼 계획은 있는지에 대해 궁금한 거예요.”“만약 두 분이 잘된다면 이 집사님은 분명
온다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선 손에 시계 상자를 든 채 쏜살같이 달아났다.진씨 가문 저택의 접대실.진수현은 동국에서 온 귀한 손님들과 함께 내년 협력 프로젝트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동국은 작은 크기에 비해 해상 자원이 풍부해서 가장 중요한 국제 항로와 해협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했다.진씨 가문과는 오랜 세월 협력해 왔고 매우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늘 온 사람은 동국의 미래 황실 후계자인 연시온이다. 그는 대범하고 유능하기로 소문이 자자했기에 진수현도 가문의 후계자를 그에게 소개해 주고 싶었다.안으로 들어선 온다연은 메인석에 앉아 있는 진수현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뭇사람들을 보았다.그녀가 들어서자 진수현은 흐뭇한 얼굴로 손짓했다.“여긴 내 딸이자 미래 진씨 가문의 후계자가 될 진유나예요. 인사들 나눠요.”연시온은 온다연을 보자마자 두 눈이 반짝였다.온다연은 하늘색 원피스를 입었는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 하나 걸치지 않았다. 심지어 화장도 안 했는데 그 얼굴과 분위기는 미인대회 우승자보다 더 아름다웠다.특히 그녀의 하얀 피부는 뒤로 넘긴 검은 머리카락과 대조되어 유난히 더 반짝였다.연시온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진씨 가문에서 후계자를 찾았다는 얘기는 이미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진수현 부부에게 꽁꽁 감춰져 그동안 아무도 후계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한때 동남아 일대에서는 남 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얼굴이 훼손되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라는 루머가 돌았다.그러나 현실은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매료시키는 미모의 여인이었다.안심의 복제판인 수준이다.외모로만 따졌을 땐 안심이 훨씬 더 뛰어났지만 진유나에게서는 소유하고 싶다는 치명적인 매력이 느껴졌다.단언컨대 승부심이 강한 남자라면 이런 여자에게 승부욕을 느끼기 마련이다.온다연은 연시온의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웠지만 예의상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협상이 절반 이상 진행된 때에 온다연이 더해지면서 예정보다 시간이 더
온다연은 불순한 생각을 하는 자신을 한 대 치고 싶었다.욕실로 가서 찬물로 샤워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침실을 나서자 마침 집사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강 대표님이 보낸 선물입니다. 사과의 의미로 보냈다는데 한번 열어보시죠.”온다연은 곧바로 다가가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 들어있는 건 뜻밖에도 해바라기 유화였다.A4용지보다 작은 크기의 이 유화는 거장 모비크가 전성기 시절에 그린 걸작으로, 예전에 자가드 경매에서 160억의 고가에 낙찰됐다.이 그림은 모비크가 자신의 딸과 아들을 위해 그린 그림으로 원래는 두 개가 있었다. 하지만 그중 하나가 불에 타버렸고 남은 하나가 유일무이한 작품이 되면서 그 가치는 헤아릴 수 없는 정도였다.온다연은 줄곧 가장 좋아하는 꽃으로 해바라기를 꼽았다. 게다가 그녀의 우상인 모비크의 작품이니 보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결국 그녀는 거절하지 않고 그의 선물을 받았다.입을 맞춘 거에 대해 뺨을 때렸으니 그 일은 정리된 셈이었다. 하지만 본인 때문에 눈을 다쳤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조금 들었고 선물까지 받았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온다연은 잠시 고민한 후 걸음을 옮기더니 진수현의 수집실로 걸어가 값비싼 골동품 시계 하나를 골랐다.그녀가 시계 상자를 들고나오는 것을 보고, 안심은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그 시계는 안심이 진수현에게 준 선물이었고 그들 부부의 사랑을 입증하는 증표나 다름없었다. 진수현한테 그 시계는 대대로 물려줄 가치가 있는 소중한 물건이었기에 미래 사위에게 선물하려고 지금껏 아껴뒀다.염지훈도 이 시계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고 진수현에게 여러 번 암시했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했다. 사실 진수현은 매번 온다연에게 물었는데 그때마다 온다연은 명확한 거절 의사를 밝혔다.그러던 그녀가 예상치 못하게 스스로 이 시계를 꺼냈다.안심의 시선을 눈치챈 온다연은 어설프게 시계 상자를 뒤로 숨기더니 태연한 척하며 입을 열었다.“강 대표님이 비싼 그림을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