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씨 가문에서 이제 누군가는 큰 봉변을 당하게 될 것이다.유강후는 어려서부터 중국과 서양의 사상교육을 전부 받았고 뼛속까지 지극히 전통적이지만 가족에 대한 애정이 아주 담담했다.말하자면 유강후는 도덕적인 속박감이 별로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장화연은 유강후가 친부모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한테 별 신경을 쓰지 않으리라 생각했다.장화연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자 유강후는 화가 아직 채 가시지 않았기에 더욱 무서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당장!”그러자 장화연은 이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바로 가져오겠습니다.”유강후의 시선은 줄곧 온다연의 손등 상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온다연의 팔을 살짝 잡아당겨 자세히 살펴보니 그녀의 교복 소매 변두리에 검푸른 자국이 조금 있었다.그의 눈빛은 매섭게 변했고 손은 나무 침대 머리를 꽉 잡았고 손등의 핏줄이 툭툭 튀었다.잠시 후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손을 온다연의 교복 단추 쪽으로 가져갔다.교복 단추가 풀렸다.온다연의 예쁘고 사랑스러운 몸매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녀의 몸매는 완벽한 각선미를 자랑했다.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 풍만한 가슴과 우유푸딩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온다연은 어떤 남자라도 유혹시킬 정도로 매력이 넘쳤다.하지만 이렇게 매력적인 몸의 곳곳에 멍이 들었다. 다리, 쇄골, 허리까지 합치면 최소 열 군데가 있어서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그중 가장 심한 대여섯 군데는 바로 가장 부드럽고 상처받기 쉬운 가슴과 배에 있었다. 당시 가해자의 악랄하고 지독한 심정을 알 수 있었다.유강후는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고, 풀었다가 또 쥐었다. 눈 속의 분노는 거의 사람을 죽여버릴 정도로 가득했다. 심지어 목의 핏줄까지 선명하게 보였다.그는 원래 온다연이 유씨 가문에서 단지 대접을 잘 받지 못할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리 크지 않은 유씨 저택에서 이렇게 많은 나쁜 자식들이 숨어있을 줄은 몰랐다.‘유씨 가문, 이젠 청소할 때도 됐어.’이때 밖에서 장화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 주 의사가
그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유강후와 눈이 마주쳤고 유강후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못처럼 깊고 차가운 눈동자를 보았다.쉰 살이 넘는 한의사는 깜짝 놀랐다. 살면서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한 사람의 눈에 이렇게 심한 분노가 있는 것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그는 유강후가 너무 걱정할까 봐 부드러운 어조로 다시 말을 이어갔다.“비록 심각하지만 치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죠. 한약을 먹고 몸조리를 하면 돼요. 우선 이 여성분 마음속의 울분을 풀어줘야 해요. 서양 의학에서는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이 있잖아요. 그쪽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좋죠.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한의학과 서양 의학을 조합해서 치료를 받으면 놀라운 효과가 있을 거예요.”그는 말하며 다른 한 손을 꺼내 온다연의 다른 손의 맥을 짚으려다 그녀의 손등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늙은 한의사는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이건 어떻게 된 거죠?”그는 온다연의 손을 천천히 잡아당겨 상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이건 뾰족한 것에 찔린 게 아니라 꽤 둔탁한 물건에 의해 손등이 관통된 것 같네요. 마치 여자의 하이힐 같은 그런 물건일까요?”말이 떨어지자마자 주위의 공기가 더욱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보니 유강후의 눈빛은 사람을 잡아먹을 듯 무서웠고 목에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그러자 늙은 한의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그도 어느 정도 눈치가 있었다. 유씨 가문의 일은 그와 같은 사람이 상관할 수가 없었다.늙은 한의사는 온다연의 손등 상처를 간단하게 처리하고 처방을 써서 유강후에게 건네주었다.“잠시 후에 사람을 보내 약을 가져다드릴게요. 물 세 그릇에 약재를 넣고 한 그릇이 될 때까지 달여서 복용하세요. 하루에 세 번 드시고, 일단 한 달 동안 먹여 보십시오.”그는 또 약상자에서 이미 달인 약 한 봉지를 꺼내 건네주었다.“뜨거운 물에 데워서 마시게 하면 일시적으로 통증을 완화할 수 있어요.”유강후는 약을 받아서 집사에게 건네주었다.떠나기 전에 늙은 한의사는 참지 못하고 고개
여전히 흰색 줄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던 그는 깔끔하고 고귀해 보였다. 어렴풋한 밤빛에 보이는 뒷모습만으로도 사람에게 압박감을 주었다.그의 얼굴을 볼 수 없어도 온다연은 지금 그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었다.냉담하고 감정 기복이 없고 감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눈빛일 것이다.온다연는 조금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그녀의 기억네는 화장실에서 쓰러졌는데 지금은 침대에 있었다.‘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온다연는 무의식적으로 자기 옷을 바라보았고 그러자 작은 얼굴은 금방 하얗게 변했다.입고 있었던 교복 치마는 사라졌고 그 대신 베이지색 실크 잠옷을 입고 있었다. 촉감이 매우 부드럽고 매끄러웠지만 온다연은 이 옷이 유강후가 자신에게 바꿔 입혔다고 생각하자 온몸이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게다가 위에서도 은은한 통증이 전해졌다.두 가지 느낌이 뒤섞이면서 온다연은 또 긴장한 나머지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이때 유강후가 전화를 끊고 방으로 들어갔다.온다연이 깬 것을 보고 침대로 걸어갔다.“깼어?”변함없이 잔잔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온다연은 감히 머리를 들어 그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침대 시트를 손에 꼭 쥐고 말했다.“네.”그사이에 온다 연은 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고 심지어 이마의 머리카락도 흠뻑 젖었다.유강후는 그녀의 축 처진 눈썹과 젖은 귀밑머리를 바라보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지금은 좀 어때? 아직도 많이 아파?”그러자 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삼촌, 저 안 아파요.”온화하고 부드러운 조명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어 화기애애할 법도 한데 온다연은 지금 유강후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고 주변 공기마저 압박감이 가득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몸에 있던 이불을 꽉 조이면서 자신을 단단히 감싸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제 옷은...”그녀는 방금 누가 자기에게 옷을 갈아입혔는지 알고 싶었지만 감히 직접 물어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말을 빙빙 돌려서 물어봤다.유강후는 당연히 온다연이
온다연은 눈이 반짝였고 찌푸렸던 미간이 살짝 펴졌다.그녀의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린 유강후의 눈빛은 많이 부드러워졌고 그는 온다연에게 한약을 건네며 말했다.“먼저 이 약을 먹어.”사실 온다연은 먼저 디저트를 먹은 다음 한약을 먹고 싶었다. 그래야 위가 덜 아프지만 지금 유강후가 이미 손에 약을 들고 있었으니 그녀는 먹을 수밖에 없었다.쓰고 매운 약 즙이 위로 흘러 들어가자 온다연은 곧 속이 메스껍고 토할 것 같았다.온다연은 구토하는 느낌을 억누르고 싶었지만 이런 생리적인 고통은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그녀는 혹시 침대에 토할 것 같아 얼른 입을 가리고 화장실로 쏜살같이 뛰어갔다.토하고 나니 온다연은 한결 편안해졌고 입을 헹구고 돌아서니 유강후가 문 앞에 서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이 방은 원래 크지 않았기에 화장실도 작은 편이었다. 유강후는 존재감이 워낙 컸기에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온다연에게 큰 압박감을 주었다.그녀는 유강후의 차갑고 어두운 눈동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세면대에 몸을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일부러 토한 게 아니에요. 공복에 약을 먹는 건 너무 힘들어요.”유강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온다연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할 때 입을 열었다.“그러면 먼저 가서 뭐 좀 먹어. 위가 좀 나아지면 다시 약을 먹으면 돼.”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다연아, 방금 네가 공복에 약을 먹으면 토한다고 나한테 미리 말했으면 나도 널 강요하지 않았을 거야.”온다연은 고개를 숙인 채 눈시울이 붉어졌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요.”계화 디저트는 매우 달고 설탕에 절인 계란은 온다연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유강후가 바로 곁에서 있으니 온다연은 조금씩 먹어야 했다.온다연이 다 먹자 유강후는 그녀에게 휴지를 건네주며 말했다.“30분 후에 약을 먹어.”온다연은 유강후가 자신에게 휴지를 건네줄 줄은 몰랐기에 재빨리 휴지를 받으며 말했다.“삼촌, 고마워요.”
온다연은 유강후가 손등에 있는 붕대를 벗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는 궤짝 문에 부딪힌 곳을 살펴본 후 침대 머리맡에서 연고를 집어 들어 그녀에게 발라주었다.그러자 온다연은 부은 곳이 시원하고 편안해졌다.온다연이 미처 손을 움츠리기도 전에 유강후는 갑자기 그녀를 허공에 안아 올렸다.온다연은 깜짝 놀라서 그의 품에서 발버둥 치면서 살짝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삼촌...”유강후는 그녀를 안고 밖으로 걸어 나가면서 말했다.“움직이지 마.”그의 목소리에는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온다연은 원래 그를 두려워했고 지금은 그의 품에 안겨있으니 긴장해서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보이지 않는 족쇄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마치 맨땅에서 끝없는 촉수가 자라서 솟아올라 그녀의 팔다리를 감쌌고 감을수록 더욱 조여들고 점점 온몸을 휘감아 피와 살 속으로 들어가서 그녀가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느낌이 들었다.숨을 들이쉬자 온통 유강후의 몸에서 나는 냄새였다. 조금씩 그녀의 오장육부에 스며들어 마치 그녀의 유전자에 새겨질 듯이 짙고 강렬했다.온다연은 너무 놀라서 몸을 떨었고 필사적으로 호흡을 가다듬고 이 치명적인 기운을 물리치려고 했다.유강후는 그녀를 안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온다연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딱딱한 뼈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말랐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안방 욕실로 들어갔다.넓은 욕실 중앙에는 타원형 욕조가 놓여 있었고 이미 뜨거운 물이 놓여 있었다. 파란 물 위에는 부드러운 거품이 떠 있었고 공기 중에는 은은한 장미향이 났다.유강후는 허리를 굽혀 온다연을 욕조 안에 넣은 다음 그녀의 다친 손을 끌어내어 욕조 바깥에 걸쳤다.고개를 들고 나서야 온다연의 작은 얼굴이 붉게 질려 당황한 채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그녀의 작은 턱을 움켜쥐고 강제로 입을 열게 했다.“숨을 들이쉬어.”온다연은 왜 숨을 들이쉬어야 하는지 몰랐다. 이곳은 수영장도 아닌데 굳이 숨을 참을 필요는 없었다.비록 이상하기는
아마도 유강후와 함께 지낸 지 너무 오래되니까 말하는 어조가 모두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장화연도 말투가 냉담하고 감정 기복이 없었다.온다연은 집사도 유강후의 명령을 받고 들어온 것을 알았기에 아예 그녀가 하게 내버려뒀다.젖은 잠옷을 벗으니 온몸이 멍투성이가 된 자기 모습을 떠올린 온다연은 집사를 황급히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없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길을 걷다가 넘어진 거예요.”얘기하니까 더 어색해졌고 온다연은 바로 후회했다.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온다연 씨는 앞으로 걸을 때 조심해요.”장화연은 말하고 온다연을 마사지해 주기 시작했다.장화연은 손재주가 아주 좋았고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고 전문 안마사보다 더 대단했다.온다연은 편안함을 느꼈고 심지어 졸렸다. 잠결에 그녀는 집사도 이렇게 유강후를 마사지 해줬을까 생각했다.한참이 지나자 장화연은 온다연을 욕실에서 안고 나왔다.유강후는 잠이 든 온다연을 받아서 자기 침대에 눕히고는 이불을 살며시 끌어당겼다.집사는 유강후가 극히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귀 뒤쪽에 머리카락과 두피가 조금 벗겨졌어요. 누군가가 온다연 씨의 머리를 뒤로 잡아당겼을 거예요. 그래서 씻는 데 오래 걸렸고 드라이도 좀 시간이 필요했어요.”유강후는 몸이 굳어졌고 눈에는 애써 억눌렀던 분노가 다시 타올랐고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먼저 나가 있어.”“네. 이권 씨가 이미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집사는 그렇게 말하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며칠 동안 두려워서 잠을 잘 자지 못하였고 또 어쩌면 약을 먹어서 그런지, 아니면 반신욕을 해서 그런지 온다연은 깊은 잠에 빠졌다.유강후는 묵묵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온다연은 아주 얌전하게 잠들었다. 작은 얼굴에 그림 같은 눈썹은 보기만 해도 손으로 어루만지고 싶었다.게다가 온다연의 작고 부드러운 몸집은 아주 사랑스러웠다.유강후는 손을 뻗어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갖다 댔고 손끝은 가냘
한참이 지나자 유강후는 안방에서 걸어 나왔다.이권은 거의 30분을 기다렸다.그는 손에 들고 있던 USB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이건 방금 복사한 CCTV 영상입니다. 제가 똑똑히 봤어요. 의자를 걷어찬 사람은 유하령 씨의 친구예요. 영상은 온다연 씨가 거실을 떠난 뒤부터는 없어요. 건물 구역의 CCTV는 데이터가 7일에 한 번씩 리셋된다고 해요. 제가 도착했을 때 마침 12시가 지났어요.”유강후는 끔찍하게 차가운 안색으로 USB 안의 영상을 TV에 재생했다.화면 안에서 유강후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유하령의 친구가 일부러 온다연의 의자를 발로 걷어찼고 온다연은 바닥에 넘어지자 다른 두 여학생은 그녀에게 음료수를 뿌렸고 온다연의 모습이 여지없이 초라해 보였다.하지만 온다연의 친이모인 심미진은 창피한 듯 온다연을 일으켜 세우고 몇 마디 말하자 온다연은 바로 자리를 떠났다.그는 온다연이 떠날 때 손등이 온전한 것을 똑똑히 보았다.그 뒤에 장면은 유씨 가문 사람들이 회식을 하는 장면이었다. 계속 사람들이 왔다 갔다 했고 30분 뒤에 유강후도 화면에 나타났다.유강후는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르며 차가운 눈으로 유하령의 옆에 있는 두 여학생을 가리키며 물었다.“이 두 여자는 누구야?”이권은 자세히 바라보다가 이 두 여학생의 신분을 알아보았다.“왼쪽은 이화평의 손녀인 이효진이고 오른쪽은 무한테크의 따님인 고유정이라고 하죠. 두 사람은 모두 유하령 씨가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예요.”“이 두 여자를 조사해.”유강후의 눈빛은 얼음 굴에서 막 얼어버린 듯 차가웠고 눈에 비친 분노를 느낀 이권은 등골이 오싹해졌다.이권도 오랫동안 유강후의 곁에서 일하면서 유강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유강후는 일하는 수단이 항상 악랄하고 머리가 똑똑했고 무서울 정도로 냉정했다. 그래서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다.지난번에 유강후가 이런 표정을 지은 것은 몇 년 전 미국에 처음 갔을 때 상대방이 뒤에서 나쁜 짓을 해서 그가 설립한 회
게다가 유강후의 침대 시트는 평평하지 않았고 사람 모양의 움푹 들어간 자리가 있었다.온다연은 머리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나더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자신이 뜻밖에도 유강후의 침대에서 하룻밤을 자게 될 줄은 죽어도 몰랐다. 심지어 깊은 잠을 편안히 잤다. 요 몇 년 동안 가장 만족스럽게 잤다고 할 수 있었고 습관적인 불면증조차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이건 꿈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통증을 느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놀라움과 후회스러운 감정 때문에 온다연은 앉아서 한참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그리고 온다연은 침대 옆에 가지런히 잘 다려진 치마가 놓여 있는 걸 보았다.색상과 스타일이 모두 며칠 전에 유강후가 보내온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온다연은 이대로 나갈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그리고 그녀는 침대를 정리하고 침대 시트도 최대한 평평하게 만든 다음 커튼을 열었다.창밖에는 뜻밖에도 아주 아름답게 심어진 흰 장미가 가득했고 아침 햇살에 수줍어하는 듯했다.어쩐지 온다연은 이 방에서 장미 향기가 난다고 여겼다. 알고 보니 밖에 이렇게 품질이 좋은 흰 장미가 가득 있었다.이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집사가 밖에서 말했다.“온다연 씨, 깨셨으면 나와서 아침을 드세요.”그 말을 듣고 온다연은 조심스럽게 나가서 거실을 둘러보았다. 유강후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온다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집사는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셋째 도련님은 회사에 갔어요. 아마 10시 후에나 돌아오실 거예요. 온다연 씨는 먼저 아침을 드시고 집 주위를 둘러보셔도 좋아요. 10시가 지나면 재봉사가 와서 사이즈를 재 드릴 거예요.”온다연은 입술을 깨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장 집사님, 제 삼촌의 뜻은 제가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야 하나요?”집사는 전혀 기복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마도 그럴 거예요. 온다연 씨, 아침 식사는 식당
유강후는 밀어내고 싶었지만 나은별을 중심을 잡지 못하는 듯 계속 비틀거렸다.밀어내려고 할수록 나은별은 그의 옷을 한사코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온다연의 눈에 비친 이 장면은 마치 서로에게 감정이 남아있는 연인 같았다.순간 어려서부터 각별한 사이로 자라온 소꿉친구 사이에 제3자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고 생각했다.나은별의 말대로 유강후는 어쩌면 일시적인 감정 때문에 지금처럼 행동하는 걸 수도 있다.온다연은 주먹을 불끈 쥐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내가 때렸어요. 왜요? 가슴 아파요?”그 말에 화가 난 유강후는 목소리마저 가라앉았다.“온다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온다연은 싸늘하게 웃었다.“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당사자가 제일 잘 알겠죠.”이때 반지를 수정하려고 자리를 잠깐 비운 직원이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수정된 반지와 함께 걸어왔다.“다연 씨, 요청하신 대로 수정이 완료되었습니다.”온다연은 번쩍 돌리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이제 필요 없으니까 환불해 줘요.”유강후는 화가 치밀어 몸을 떨었다.“그러기만 해봐.”온다연은 시선은 여전히 그의 팔에 기대어있는 나은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두 사람 결혼해요. 아주 천생연분이네.”그 말을 한 뒤 직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환불해 줘요. 이제 필요 없어졌거든요.”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 직원은 정석대로 안내했다.“죄송합니다. 이니셜이 새겨진 특별 제작한 반지라 환불이 불가합니다.”화를 주체할 수 없었던 온다연은 앞으로 걸어가더니 반지를 집고 땅바닥에 내던졌다.“그럼 버릴게요.”단단한 반지가 바닥에 닿자 몇 미터 높이로 튕겨 나갔다가 다시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유강후는 자신이 더없이 아끼고 사랑하는 물건이 버려지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몸을 떨었다.그는 단호하게 말했다.“온다연, 당장 주워.”온다연은 차가운 표정으로 힐끗 보고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분노로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된 유강후는 단번에 나은별을 밀어내고 앞으로 걸어갔다
온다연의 눈에 비친 살기는 두피를 저리게 했고, 손에 칼이 있었다면 주저 없이 나은별을 찔렀을 것이라고 모두가 확신했다.사람들은 온다연처럼 몸집이 작은 여자가 어디서 폭발적인 힘이 나왔는지 몰랐고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큰 악의를 품고 있는데 이해되지 않았다.조아영은 체면을 잃었다는 생각에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온다연을 때릴 기세였다.“미친X. 남의 남자 친구를 뺏은 주제에 뭐가 그렇게 당당해서 사람을 때려?”“하여튼 가정 교육을 못 받으면 이렇다니까. 세컨드인 걸 아무리 즐겨도 그렇지 어떻게 당사자 여자 친구를 떄려?”“내가 오늘 너 죽여버릴 거야.”그러나 조아영의 손이 온다연에 닿기도 전에 손목이 잡혔다.우드득하는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조아영은 반대편 벽에 내동댕이쳐졌다.불과 몇 초안에 일어난 일에 다들 눈을 의심하여 그대로 얼어붙었다.그들 사이에 무슨 갈등이 있는지 주위 사람들은 몰랐으나 눈앞의 이 훤칠한 남자가 마치 조아영을 잡아먹으려는 것처럼 살벌하다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누군가 핸드폰을 꺼내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유강후는 온다연을 끌어당겨 몸 곳곳을 확인했다.다친 곳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버럭했다.“왜 가만히 있어. 다른 사람이 때리려고 하면 소리라도 질러야지.”이때 옆에 있던 조아영이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눈 잘못됐어요? 저 여자가 은별이를 때렸다고요. 은별이가 어떻게 맞았는지 두 눈 뜨고 똑바로 봐봐요.”유강후는 그제야 바닥에 앉아 있는 나은별이 눈에 들어왔다.평소의 매력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이고 머리는 정신 나간 여자처럼 헝클어져 있었다.유강후는 온다연이 누군가를 때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우리 다연이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야.”이때 옆에 있던 직원이 용기 내 입을 열었다.“대표님, 저희가 봤습니다. 이 여성분이 먼저 손을 쓴 게...”“닥쳐.”유강후는 버럭 호통을 쳤다.“내가 말하라고 했어?
온다연은 망설임 없이 여자의 손목을 덥석 잡고 뒤로 힘껏 밀쳤다.힐을 신은 여자는 두어 걸음 뒷걸음질 치더니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온다연은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누구신데 남 일에 참견하는 거죠? 경고하는데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예요. 안 그러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겁니다.”넘어질 뻔하던 일행을 나은별이 부축했다.여자는 나약해 보이는 온다연이 감히 밀쳐낼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듯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그럼에도 분을 이기지 못하고 또 달려들어 온다연을 치려고 했다.이때 나은별이 팔을 붙잡았다.“조아영, 그만해. 때릴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야.”나은별은 온다연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었다.“내가 화내면서 뺨 한 대 치길 바랐던 건 아니죠? 솔직히 그 모습을 강후 씨가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잖아요. 내가 유하령처럼 멍청해 보여요?”“온다연, 내가 너처럼 천한 여자를 한두 번 본 것 같아? 매달려도 소용없으니까 포기해. 유씨 가문이랑 강씨 가문에서 두 사람의 결혼을 응원할까? 너처럼 가진 것 하나없는 인간이 무슨 자격으로 강후 씨랑 만나.”“유하령이 말해줬으니까 순진한 척 그만해. 너 복수하려고 강후 씨를 만나는 거잖아. 엄청 친한 친구가 있었다며? 널 구하려고 다른 사람 손에 죽었다던데 맞아? 죽기 전에 영상까지 찍혔다며? 아참, 유하령이 그 영상을 나한테 보내줬어.”온다연은 고개를 번쩍 들어 죽일 듯이 나은별을 노려봤다.나은별은 대수롭지 않은 듯 피식 웃고선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그 남자애가 너한테 소중한 존재라고 들었어. 죽은 사람의 마지막 체면을 지켜주고 싶으면 좋은 말로 할 때 강후 씨 곁에서 떨어져. 안 그러면 내가 그 영상 인터넷에 확 뿌려버릴 거야. 죽어서도 고통스럽게...”짝.온다연은 나은별의 따귀를 세게 한 대 갈겼다.눈빛에는 독기가 가득했고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듯 살벌했다.“유하령이랑 똑같은 인간인 줄은 몰랐네요. 당신 같은 인간은 살 자격도 없어요.”나은별은 그대로 얼어붙었다.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나은별은 이권을 여러 번 찾아가 유강후가 왜 만나주지 않느냐고 물었다.이권도 처음에는 예의 바르게 대했지만 찾는 횟수가 많아짐에 따라 저도 모르게 피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더는 참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이실직고하게 되었고 온다연이 싫어해서 만나지 않는다고 얘기했다.그 후로는 나은별의 전화를 아예 받지 않았다.나씨 가문과 유씨 가문의 혼담이 취소된 걸 누가 소문냈는지 유강후에게 아기가 생겼고 그 상대가 나씨 가문의 아가씨가 아니라는 것까지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다.그 이후로 나은별과 나씨 가문은 경원의 가장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온갖 조롱과 유언비어가 난무했고 유강후와 결혼하는 건 나씨 가문의 일방적인 바람이었을 뿐 유강후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은별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소문이 퍼지는 가운데 나씨 가문의 투자자들은 하나둘씩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고 회사는 지금 매우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가장 역겨운 점은 예전에 빌붙으려고 양손 가득 선물 챙겨서 찾아오던 사람들이 갑자기 증발이라도 한 듯 문전성시를 이루던 나씨 가문은 하루아침에 적막해졌다.배은망덕한 사람들의 행동에 화가 치밀어 오른 나씨 가문 어르신은 명절날에도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나은별은 이런 상황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을 알고 있다.사람들이 추측하며 수군거릴 때 아무런 대처 없이 묵인한 유강후가 그 원인의 중심이다.그동안 나씨 가문을 통해 미래 그룹에 빌붙으려던 사람들까지 발걸음을 멈췄다.나은별은 그런 사람들을 미워하는 건 아니다.이익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다. 하늘에서 땅이 아닌 지옥으로 떨어지는 케이스를 수없이 많이 봐왔기에 이런 우여곡절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이익 때문에 등을 돌린 인간이 아닌 사건의 원흉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나은별은 온다연이 유강후에게 빌붙어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초라한 자신에 비해 전보다 안색도 좋아지고 예쁜 얼굴마저 더 정교해진 온다연이 몹시 눈에 거슬렸다.게다가 입고 있는 옷의 패턴
온다연은 순순히 그의 품에 안겨 몰래 눈물을 닦았다.“보석상에서 가지러 가도 된다고 연락왔는데 아직 안 갔어요. 결혼식 며칠 전에 가려고요.”그 말을 들은 유강후는 설레는 마음에 심장이 뛰었다.“지금 가지러 가자. 어떤 건지 너무 보고 싶어.”옷 갈아입을 때 유강후는 특별히 가장 마음에 드는 슈트를 입었다.그러고는 온다연에게 넥타이를 골라달라고 부탁했다.온다연은 너무도 많은 넥타이에 흠칫하다가 다시 신중하게 골랐다.유강후는 캐비닛 앞에 서서 열심히 넥타이를 고르는 온다연이 귀여운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온다연이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을 때 유강후는 이런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외출 준비할 때 아내인 온다연이 옷과 넥타이를 골라주며 신경 써주는 이 상황을 수년동안 기다렸다.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상상이 현실로 되었고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온다연은 매우 열심히 넥타이를 골라주고 있다.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당장이라도 침대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어젯밤 너무 무리한 탓에 차마 그러지 못했다.유강후는 뒤에서 온다연을 끌어안고선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골랐어?”온다연은 회색 넥타이를 꺼냈다.“오늘 입은 옷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예뻐요.”유강후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예쁜 건 딱히 중요하지 않아. 다연이가 좋아하면 그게 뭐든 나도 좋아.”온다연은 얼굴이 발그레해졌다.“아저씨, 그만해요.”빨갛게 달아오른 온다연의 귀를 본 유강후는 더 이상 참지 못했고 그녀의 머리를 잡고선 한참이나 키스를 한 후에야 놓아주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보석상에 도착했다.임정아는 안목이 좋을 뿐만 아니라 여러 주얼리 브랜드의 모델이기도 하다. 온다연은 가성비가 좋고 흔치 않은 남성용 반지를 골랐다.온다연이 집 사려고 모아둔 금액이었으니 싼값은 아니었다.하지만 유강후가 마음에 안 들어 할 수 도 있으니 긴장된 마음을 늦추지 못했다. 어쨌든 지금 입고 있는 옷과 시계에 비하면 훨씬 싼 값이니까.그런데 의외로 유강후는 매우 좋
온다연의 기분을 단번에 알아차린 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상자 중 하나를 가져와 안에 들어있는 반지를 꺼냈다.“다른 건 싫으면 안 가져도 돼. 그래도 이건 껴야지.”유강후의 손에 있는 것과 비슷해 보이는 아주 평범한 은반지였다.온다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거두었다.“지금은 끼고 싶지 않아요.”거부하는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는 불안함이 밀려왔다.“왜? 나랑 결혼하는 게 싫어?”온다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비싼 물건이에요. 난 제대로 된 반지 하나도 살 수 없는데... 아저씨한테 너무 불공평하잖아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는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선 진지하게 말했다.“다연이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이렇게 준비할 수밖에 없었어. 많이 부족한데 이해해 줄 거지?”온다연이 답했다.“저도 반지를 준비했는데... 아저씨가 준비한 거에 비하면 너무 초라해요.”유강후의 눈빛이 반짝였다.“날 위해서 반지를 준비했다고?”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에 주문했어요. 하지만 엄청 싼 거여서...”보름전, 온다연은 임정아에게 부탁해 남자 반지를 하나 주문했다.온다연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 중에서 가장 비쌌지만 유강후가 오늘 준비한 보석들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금액이었다.결혼하게 되면 이런 선물이 오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유강후가 이렇게 많이 준비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한 세트당 수십억에 버금갔으니 그저 막막했다.막말로 온다연이 집 한 채를 팔아도 보석 한 세트조차 살 수 없었으니 얼마나 비참한 현실인가.유강후는 온다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이건 예물이 아니라 다연이의 재산이야.”“결혼식 날 다연이는 영운산의 별장에서 출발할 거야. 그때 이 혼수들을 들고 나한테 시집오는 거지.”“영운산에 있는 별장이랑 경원에 있는 모든 부동산, 그리고 우리가 예전에 묵었던 온천 호텔까지 전
유강후는 돌아보며 사랑스럽게 온다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내가 한가한 줄 알아? 설마 내가 만든 음식을 아무나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오늘 아침과 점심만 해도 중요한 미팅이 여러 개 있는데 온다연을 위해 전부 저녁으로 미뤘다.미래 그룹도 규모가 크지만 수중에는 다른 투자 건들도 많았기에 하루 스케줄이 꽉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최근 들어 온다연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거의 모든 미팅을 저녁으로 옮기기 일쑤였다. 사실 온다연에게 고기를 먹이려고 준비한 시간에 미팅했다면 적어도 두 개는 끝냈을 것이다. 이렇게 바쁜 유강후가 다른 사람에게 요리를 해줄 만큼 에너지와 시간이 있을까?온다연은 이런 줄도 모르고 그저 조그마한 얼굴을 그의 품에 파묻으며 말했다.“아무튼 다른 사람한테 해주면 화낼 거예요. 그것도 엄청. 절대 안 풀릴걸요?”유강후는 일부러 놀렸다.“다연이가 화낼 때는 어떤 표정인지 궁금하네? 음...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한번 요리해 줘 볼까?”온다연은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선 몸을 휙 돌리고 떠났다.“어디가? 남은 고기 먹고 가야지.”화가 난 온다연은 씩씩거리며 말했다.“안 먹어요. 다른 사람 줘요.”유강후는 그 모습마저 귀여운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심술쟁이네. 참 다루기 힘든 성격이야.”“장난이니까 얼른 와서 먹어. 난 이따가 다른 일정 때문에 나가봐야 돼.”점심 식사 후, 사람들이 우르르 찾아왔는데 저마다 아름답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들고 왔고 그 바람에 서재는 선물들로 꽉 찼다.장화연도 다락방에서 유난히 화려해 보이는 상자들을 꺼내왔다.거의 대부분이 보석인데 그것도 최상급이라 큼직한 서재는 순식간에 보석 전시장이 되었다.유강후는 사람을 시켜 방금 배달된 선물 상자들을 모두 열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엄마가 다연이 주려고 준비한 선물인데 마음에 들어?”온다연은 보석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우아한 컬러와 디자인만 봐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시중에서
온다연이 어떤 삶을 보냈는지 알게 된 유강후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착잡한 기분이 들었고 마음이 쓰라렸다.하여 아예 그릴을 사게 되었고 직접 가장 신선한 소고기를 골라 양념에 재워놓았다.깻잎마저도 유강후가 세심하게 고른 후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씻었다.이제 막 굽기 시작했는데 온다연이 그 향기를 맡고 내려온 것이다.고기를 바라보는 온다연의 눈빛을 보면서 유강후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신했다.유강후는 온다연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며 말했다.“난 다연이가 뭘 좋아하는지 다 알고 있어.”고소한 향기는 점점 더 짙어졌고 먹고 싶어서 안달 난 온다연은 옆에서 끊임없이 유강후를 재촉했다.“아저씨, 이제 됐어요. 고기 익었다고요.”그 말을 끝으로 온다연은 재빨리 손을 뻗었다.그런데 이때 유강후가 그녀의 손에서 젓가락을 빼앗아 갔다.“내가 할 테니까 넌 저기 앉아서 기다려.”유강후는 잘 구운 소고기를 깻잎에 싸서 비법 소스를 살짝 묻힌 뒤 온다연에게 먹어주었다.“먹어봐.”온다연은 재빨리 입을 벌렸고 어찌나 흥분했는지 하마터면 혀를 씹을뻔했다.유강후가 직접 고른 국내산 소고기는 비계와 살코기가 적당하게 섞인 최상급인 만큼 일반 소고기에 비해 차원이 달랐다.게다가 장인에게 직접 받아온 듯한 비법 소스를 찍으니 맛이 단연 일품이다.온다연은 한입 먹고선 곧바로 쌈을 싸 유강후에게 건넸다.“아저씨, 얼른 먹어요. 엄청 맛있어요.”쌈을 받아서 먹은 유강후는 온다연이 왜 이렇게 고기를 좋아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유강후가 굽는 족족 온다연은 전부 먹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고기 한 접시를 클리어했다.온다연은 더 먹고 싶은 듯 다른 접시를 애타게 바라봤지만 유강후는 허락하지 않았다.맛있는 음식 앞에서 자제력을 잃는 게 일상이었기에 위가 아플까 봐 걱정되어 원하는 대로 먹게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하지만 애처롭게 바라보는 온다연의 눈빛을 감당하지 못했다.결국 고기 세 점을 집어 그릴에 올려놓았다.“마지막이야. 더 이상 먹으면 안
유강후는 언짢아하며 눈살을 찌푸렸다.“온다연, 집에서 슬리퍼 신어야 한다고 내가 여러 번 말했지?”온다연은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가장 좋아하는 소고기와 깻잎이 눈앞에 있는데 슬리퍼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그녀는 덜 익은 소고기를 보며 군침을 삼켰다.“엄청 맛있을 것 같아요.”말하면서 저도 모르게 고기 한 점을 집어 들었다.이때 유강후가 그녀를 번쩍 안으며 테이블에 앉히더니 도우미로부터 슬리퍼를 받아와 온다연에게 신겨주었다.“온다연, 앞으로 맨발로 돌아다니면 혼날 줄 알아.”온다연은 고기에 정신이 팔린 지 오래였다. 그녀는 공기 중에 가득 찬 음식 향기를 들이마시며 침을 삼켰다.“아저씨, 왜 갑자기 집에서 고기를 구울 생각을 했어요?”유강후의 결벽증은 온다연도 알고 있다.예전에 본가에 있을 때, 집사 외에는 아무도 그의 방에 들어갈 수 없었고 음식을 반입하는 건 더욱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지금 이 한옥에서도 늘 음식 냄새에 집안에 배는 걸 싫어하던 사람이다.그런 사람이 그릴을 사서 고기를 굽고 있으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유강후는 먹고 싶어 안달 난 온다연의 모습이 귀여운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선 그녀의 두 볼을 꼬집었다.“어떤 아기고양이가 고기 먹는 걸 좋아해서 그릴 하나 샀어.”“밖은 아직 추우니까 오늘은 일단 여기서 먹자. 나중에 날이 따뜻해지면 마당에서 구워 먹어도 되고.”온다연은 시선을 거두고 조심스럽게 유강후를 바라봤다.“아저씨, 집에 음식 냄새 배는 걸 싫어하잖아요? 그리고 제가 이거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유강후는 아침 일찍 메일에 로그인하여 온다연과 주한이 주고받은 과거의 이메일을 전부 읽었다.보면 볼수록 질투도 나고 착잡한 심정이지만 그럼에도 온다연의 취향을 알 수 있는 건 전부 꼼꼼히 메모해 두었다.온다연은 요리에 재능이 없어 지난 수년 동안 주한이 그녀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해주었다.그들이 주고받은 메일을 보면 주한은 요리 솜씨가 좋아서 아주 평범한 재료들로 맛있는 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