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들었어? 쟤가 잠자리하는 걸로 사범대학 대학원에 들어갔대. 저 치마도 어쩌면 그렇게 받은 건지도 몰라.”“진짜 웃겨. 잠자리하고 겨우 짝퉁을 받았어?”“징그럽고 더러워. 수미 씨는 왜 이런 쓰레기를 우리 곁에 앉혔어? 짜증나게.”...온다연은 손톱이 살 속으로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고개를 들어 유하령을 바라보니 그녀는 극도로 혐오스럽고 경멸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걸상을 뒤로 힘껏 당겼고, 미처 일어서지 못한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테이블에 놓여 있던 주스가 가득 담긴 컵 두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빨간 주스가 치마에 뿌려져 지저분해졌다.모든 사람의 시선이 다시 온다연에게 집중됐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무릎에서 전해지는 심한 통증을 참으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유하령을 바라보았다.유하령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천박한 년’이라고 말하고는 중지를 내밀었다.이때 아무 말도 없던 유강후의 할머니가 싫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말했다.“옷을 갈아입으러 가지 않고 뭐해? 이 아이는 왜 계속 이렇게 덤벙대는지? 미진아, 너 시집온 지 몇 년 됐는데 아이가 아직도 이 모양이니? 망신스러운 바보짓만 하고 다녀.”얼굴이 빨개진 심미진은 온다연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운 후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빨리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 다시 오지 마. 창피해 죽겠어.”온다연은 무릎에서 전해지는 통증을 참으며 절뚝절뚝 홀에서 나갔다.하지만 그녀는 방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머리채를 잡혀 계단 뒤편의 창고로 끌려갔다.쾅 하고 문 닫는 소리에 이어 그녀는 바닥에 내던져졌고, 미처 일어나기 전에 따귀가 연거푸 날아왔다. 그녀는 머리가 윙윙 울리고 아프다 못해 약간 저렸다.“천한 년, 누가 널 오라 했어? 감히 우리 삼촌 차에 타? 뻔뻔한 년! 네 이모랑 똑같이 천박해.”온다연이 일어나려고 허우적대자 유하령은 그녀의 손등을 밟았다.하이힐은 그녀의 손등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온다연은 너무 아파서 시선이
온다연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손을 꽉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잠시 후, 그녀는 거즈를 가져다가 상처에 약을 바르고 나서 왼손으로 큰 반창고를 들고 왼쪽 귀 뒤쪽의 두피에 붙이고 빗으로 머리를 빗어 겨우 상처를 덮었다. 그리고 상처에 염증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소염제 두 알을 삼켰다. 이렇게 맞은 적은 처음이 아니었고, 회가 거듭되다 보니 이렇게 스스로 약을 바르는 것도 이골이 나기 시작했다.온다연은 다시 몸을 추스르고 쪼그려 앉아 장판 밑의 나무 마루를 뜯어 비닐로 코팅된 사진 몇 장을 꺼냈다. 어렸을 때 찍은 사진 두어 장이었는데, 어머니의 사진은 그녀의 손길이 닿아 다소 흐릿해졌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사진을 쓰다듬으며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엄마, 너무 아파요!”사진의 비닐 커버는 눈물에 젖었고, 사진 속에서 웃고 있던 어머니의 얼굴은 마치 그녀와 함께 울고 있는 것 같았다.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온다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온다연은 주위를 둘러보고 대문 밖을 확인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이 집은 비교적 뒤쪽에 있어 평소에도 사람이 많지 않았다.유씨 가문의 사람들은 오늘 모두 앞 홀에서 식사하고 있었고, 하인들 역시 모두 그곳에 갔기 때문에 이곳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온다연은 숨을 죽이며 살금살금 창고로 가서 작은 삽을 하나 들고 후원에 있는 작은 대나무 숲으로 갔다.익숙한 길이라, 그녀는 곧바로 물건을 묻어둔 곳을 찾아내어 삽을 들고 파기 시작했다.곧, 작은 놋쇠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막 떠나려는 순간, 옆에서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후 씨, 나 못 걷겠어. 술 마시니까 어지러워...”나은별의 목소리였다.온다연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 대나무 숲에 몸을 숨겼다.곧 두 사람의 그림자가 대나무 숲길에 나타났다. 이곳은 유강후의 방으로 가는 필수 통로였다.‘나은별이 취해서 유강후의 방에 가려는 것일까?’달빛이 밝게 비추는 가운데, 온다연은 숨을
달빛 아래, 온다연은 유강후의 얼굴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그의 외모는 정말 흠잡을 데가 없었다. 차가운 눈매, 높고 오뚝한 콧날, 매혹적이고 얇은 입술, 칼로 새긴 듯한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그 깊고 차가운 눈은 언제나 냉정한 기운을 풍겼다.‘정말 잘생겼네! 그러니 항상 여자들이 추파를 던지는 거겠지!’온다연이 멍해 있는 순간, 유강후는 이미 시선을 돌리고 뒤쪽에 손짓했다.“권아, 나은별 씨 좀 데려다줘. 술을 많이 마셨어.”나은별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강후 씨, 나를 보내려는 거야?”유강후는 담담하게 말했다.“너 취했어. 가서 푹 쉬어.”이때, 이권이 다가와서 말했다.“나은별 씨, 제가 모셔다드릴게요.”나은별은 눈물을 글썽이며 유강후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가 자신을 붙잡아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강후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돌아가.”나은별은 고개를 숙이고 낮게 말했다.“강후 씨, 보고 싶을 거야.”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했다.온다연은 그녀의 그 말을 엿듣고 있다가 그 자리에서 녹아버릴 것 같았다. 달빛 아래 두 연인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핑크빛 분위기가 감도는 두 사람을 보며 금방이라도 그 자리에서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 후, 유강후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 모르지만, 나은별이 뒤를 두 번, 세 번 돌아보며 걸어갔다.나은별이 떠난 후, 유강후는 뒤돌아보지 않고 온다연이 숨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온다연은 깜짝 놀라 무심코 뒤로 물러섰고, 그러다 갑자기 '탁'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였다.온다연은 긴장해서 손바닥에 땀이 나기 시작했고, 유강후를 더는 쳐다볼 수 없었다.“나와!”유강후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기운이 스며있어 마치 방금까지 나은별과 부드럽게 대화했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온다연이 움직이지 않자, 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가서 너를 끌어내야겠어?”
유강후는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면서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이런 자리엔 참석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예절은 배워야 해. 며칠 뒤에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실 거야.”온다연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그가 술에 취해 헛소리한다고 생각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충 대답했다.“알겠어요.”순순히 따르는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얇은 입술을 짓씹더니 덤덤히 말했다.“따라 와.”곧 그는 몸을 돌려 자신의 독채로 향했다.온다연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로 알고 그 자리에 멍하니 있었다.무슨 뜻일까?따라오라니? 그의 독채로 간다는 말인 걸까?몇 걸음 내디뎠지만 온다연이 따라오지 않자 유강후는 걸음을 멈추고 살짝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나한테 안겨서 가고 싶어?”온다연은 화들짝 놀랐지만 감히 걸음을 옮길 수는 없었다.유씨 일가 사람들은 모두 본관 쪽에 있고 오직 유강후만이 독립된 별장에서 살았다. 두 개 층으로 나뉘어져 있고 수백 평에 달하는 그곳은 그가 가끔 돌아와서 지내는 곳이었다.게다가 집사를 제외하면 아무도 그의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유하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그의 집에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건 아마 나은별뿐일 것이다.가장 중요한 건, 집사가 매일 낮마다 정해진 시간에 청소하러 그 별장에 간다는 점이었다. 그건 그의 집에 사람이 없다는 걸 의미했다. 그러니 지금 그곳에 간다면 유강후와 단둘이 있어야 했다.온다연은 그러기 싫었다.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온다연이 움직이지 않자 유강후는 몸을 돌려서 다시 돌아왔다.그는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 겨우 몇 걸음 만에 온다연의 앞에 섰다. 그는 온다연이 들고 있던 상자를 빼앗아갔고 온다연의 놀란 시선 속에서 성큼성큼 자신의 별장으로 향했다.상자를 빼앗긴 온다연은 초조한 마음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감히 시끄럽게 굴 수는 없었기에 다급히 유강후의 뒤를 따랐다.이내 그들은 유강후의 별장 문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온다연은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였다.문 앞에서
이때 온다연은 이미 상자를 잡은 상태였다. 무거운 강철 문이 팔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엄청난 통증이 전해지는 순간, 온다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러나 그녀는 상자를 꼭 쥔 채로 서둘러 그것을 몸 뒤로 감추며 경계하는 눈빛으로 유강후를 바라보았다.유강후는 그녀가 겨우 상자 하나 때문에 팔을 다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조금 전 소리를 들으면 꽤 심하게 다쳤을 텐데 말이다.그러나 온다연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상자에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유강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의 얇은 입술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환한 조명 아래 그의 잘생긴 이목구비가 유독 날카롭게 보여 쉽게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온다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천천히 오른쪽으로 움직였다.그곳에는 문이 있었다.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도망치기만 해봐!”한없이 차가운 목소리에서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졌다. 온다연은 몸을 흠칫 떨더니 본능적으로 발을 거두어들였다.유강후는 그녀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이리 줘 봐.”온다연은 유강후가 상자를 보겠다고 하자 너무 긴장한 나머지 손바닥이 축축이 젖어 들어갔다. 그녀는 연신 뒷걸음질 쳤고 결국엔 비싼 목재로 만들어진 가구에 등이 닿았다. 이제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유강후는 여전히 그녀에게로 가고 있었다. 온다연의 작고 가녀린 몸이 그의 커다란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졌다.엄청난 압박감에 온다연은 몸을 움츠렸다. 가구와 한 몸이라도 될 듯이 말이다.유강후에게서 나는 삼나무 향이 온다연을 완전히 감쌌다. 온다연은 그의 향기가 호흡을 통해 폐까지 가득 들어찬 뒤 온몸으로 뻗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안에서 싹을 틔울 것 같기도 했다.온다연은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 본능적으로 그의 향기를 맡지 않기 위해 손으로 자신의 코와 입을 막았다. 그러나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조금 전 문에 부딪혀 팔에 빨갛게 움푹 파여 들어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심지어 살갗이 까지고 멍이 파랗게 들어있었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는 소파에 던져졌고 한 번 튀어 올랐다가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온다연은 주우려고 몸부림쳤지만 유강후는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차갑게 말했다.“한 번만 더 함부로 움직이면 지금 당장 바다에 던져버리겠어.”그러자 온다연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유강후가 어떤 성격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은 거의 전부 다 좋은 결말이 없었다.유강후가 바다에 던지겠다면 정말 던질 것이다.온다연이 가만히 있자 유강후는 옆에 있는 서랍에서 작은 약상자를 꺼내 소파 쪽으로 그녀를 끌고 가며 말했다.“앉아.”온다연은 그 작은 구리 상자를 보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유강후가 정말 상자를 바다에 던질까 봐 어쩔 수 없이 얌전히 앉아 있었다.“자. 손을 들어봐.”온다연은 순순히 손을 들었다.그녀는 옅은 파란색 잠옷 치마를 입었다. 치마의 소매는 팔꿈치에 닿았고 하얀 팔뚝만 드러났고 다소 보수적이었다.부드러운 조명이 그녀의 하얀 피부를 비추자 수정처럼 맑고 윤기가 났다.하얀 피부 때문에 다친 곳은 더 아찔하게 보여졌다.유강후는 이미 파랗게 멍든 곳을 누르면서 차갑게 말했다.“아파?”온다연의 관심은 온통 그 작은 상자에 쏠려 있었기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아니요.”사실 그녀는 정말 별로 아프지 않았다. 적어도 아까 맞았을 때와 비교하면 이 정도 고통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안 아픈 건가?’유강후의 시선은 아래로 향했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 진흙이 조금 묻은 작은 상자를 발견하고 차갑게 말했다.“또 쳐다보면 버리겠어.”온다연은 그제야 황급히 고개를 돌려 긴장한 표정으로 유강후를 쳐다보고는 말도 하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다.유강후는 상처가 난 곳에 소염제를 바르고 붕대로 상처 부위를 감았다.약을 바를 때 온다연은 아파서 얼굴을 찡그렸고 손도 떨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유강후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붕대를 감았고 시선은 그 반창고에 멈췄다.일반 반창고보다 조금 크고 귀여운
그녀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일어나서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양복 첫 번째 단추를 살짝 풀었다.양복 단추마저 어떤 재질의 보석으로 만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질감이 좋은 양복이었다. 그래서 온다연은 혹시나 망가질까 조심스럽게 그의 양복을 벗겼다. 그러자 실크 질감의 흰색 줄무늬 셔츠가 나타났다.셔츠 밑단을 정장 바지에 넣었기에 그는 어깨가 더욱 넓어 보였고 허리가 잘록해 보였다. 그의 몸매는 정말 나무랄 데가 없이 좋아 보였다.게다가 그는 원래부터 차갑게 생겼고 흰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그는 더욱 고상해 보였다.온다연은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려서 고개를 들지 못했고 넥타이를 손으로 잡고 있었지만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유강후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벌려 온다연의 부드럽고 작은 손을 잡았다. 그러자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가볍게 몸을 떨었다.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유강후의 어떤 터치에도 온다연은 매우 민감하게 느껴졌고 그에 따라 거부감도 컸다.넥타이를 풀자마자 온다연의 손은 급하게 움츠러들었고 넥타이를 움켜쥐고 입술을 깨물며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유강후는 온다연의 붉은 입술을 바라보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갈아입은 옷은 욕실 문 앞에 있는 바구니에 넣어두면 매일 사람이 와서 수거해 갈 것이야. 그쪽에 가도 마찬가지야.”‘그쪽에 간다고?’온다연은 살짝 멍해졌다.유강후는 온다연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내 몸에 있는 물건들은 다른 사람이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러니까 너도 일찍 물건들을 정리하는 법을 배워야 해.”온다연은 여전히 유강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그가 오늘 한 말들은 모두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또 감히 묻지 못했기에 알아들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유강후의 시선은 너무 씻은 나머지 하얗게 된 잠옷에 머물렀고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심미진은 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거야?”밖에서 집을 빌려 살고 아파도 챙겨주는 사람도 없고 옷이 낡아서 이렇게 되어도 버리
온다연은 초조해서 땀이 났고 저도 모르게 유강후를 따라 위층으로 걸어가며 시선은 줄곧 그의 손에 있는 작은 상자에서 맴돌았다.그러나 그녀는 유강후가 침실로 들어갈 때까지 다시 상자를 돌려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온다연은 문밖에 서서 유강후가 상자를 서랍에 넣고 자물쇠를 채우는 것까지 보았다.다급해진 온다연은 입술이 찢어질 정도로 깨물고 있었지만 또 감히 유강후의 방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입구에서 자신의 치맛자락을 꽉 잡고 눈시울을 붉혔다.그 상자는 그녀의 가장 소중한 물건 중 하나였다.처음에는 유하령이 가져갈까 봐 두려워서 땅속에 묻었는데 지금은 또 유강후의 손에 들어갈 줄은 전혀 몰랐다.유강후는 유하령보다 백 배 이상 무서운 사람이었다.온다연이 밖에서 초조해하는 모습을 본 유강후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들어와.”온다연은 자기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고 엉겁결에 계단을 쳐다보았다.이곳은 계단까지 대략 7, 8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고 좀 빨리 뛰면 1분 이내에 이 집에서 도망쳐 나갈 수 있었다.한참을 망설이다가 온다연은 방으로 들어갔다.유씨 가문의 전통에 따르면 정원 전체가 통일된 중국식 디자인이었고 심플하고 절제된 분위기 속에 호화로움이 넘쳤다.유강후의 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넓은 침실에는 심플하고 큼직큼직한 중국식 가구들이 놓여 있었고 땅은 옅은 색의 나무 바닥이었고 숨을 가볍게 들이마시면 고급 원목의 은은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유강후의 침대는 매우 컸고 그 위에 옅은 회색 침구가 깔려 있었다. 고귀하고 차가운 색상이었다. 꼭 마치 유강후라는 사람처럼 냉기가 차 넘쳤다.반쯤 걸어간 온다연은 더 이상 앞으로 가지 않으려 했다.바로 침대 옆에서 어두운 눈빛으로 서 있었는 유강후를 본 그녀는 두려웠다.애써 잊어버린 기억들이 아련하게 다시 얽히면서 온다연은 전에 없던 위험을 느꼈다.하지만 온다연은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했고 도망가려 하지도 않았다.온다연은 그 상자를 돌려받아야 했고 심지어 꼭
온다연은 영상 속 장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그러다 또 다른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무겁게 고개를 들어 옆에 서 있던 장화연을 바라보았다.장화연은 벽에 기대어 있었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말없이 서 있었다.온다연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다가가 추궁하고 싶었다.‘대체 강후 씨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걸 숨겨왔어요?’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말았다.장화연은 유강후의 사람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소리쳐봤자 장화연은 끝까지 그를 감싸기만 할 것이다.온다연은 알고 있었다.만약 장화연이 정말 자신을 도우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지난 1년이라는 시간은 진실을 털어놓기에 충분했을 것이다.하지만 장화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 순간, 마음속에서 ‘신뢰'라는 단어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온다연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장화연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창백하게 질린 온다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장화연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몸을 움직이려 하자, 온다연이 먼저 일어섰다.“장 집사님, 저 몸이 좀 안 좋아서 화장실에 다녀와야겠어요.”장화연은 그녀가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힘들어하는 줄 알고 조용히 말했다.“우림 도련님은 괜찮을 겁니다. 열이 떨어지기만 하면 곧 그룹 병원으로 옮길 거예요. 그쪽이 장비도 더 좋고, 의사들도 더 뛰어나니까요.”그럴듯한 위로를 들으며, 온다연은 주먹을 꼭 쥐었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화장실에 도착한 온다연은 손을 떨며 그 음성 메시지를 재생했다.“이 사람이 제 약혼녀입니다.”“온다연 씨 되시죠? 대표님께서 아주 각별히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아니요, 저는 진시현입니다.”“아, 맞다, 진시현 씨. 제가 착각했네요. 두 분, 안으로 들어가시죠. 불편한 부분이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근데, 유 대표님이 온다연이랑 이미 혼인신고 했다던데? 어떻게 된 거야?”“혼인신고? 진짜인지 누가 알아? 나도 들은 얘긴데,
두 시간이 지났다.아이에게 열이 났다는 걸 유강후도 알고 있었을 텐데, 그는 단 한 통의 전화도 없었다. 심지어 메시지 한 줄조차 없었다.도대체 무슨 일, 무슨 회의가 그렇게 바빠서, 전화 한 통조차 걸 시간이 없는 걸까?그는 항상 말해왔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바로 그녀와 아이라고.하지만 지금 온다연의 머릿속은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아이의 모습과 더불어, 전화 속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로 어지러웠다.그녀는 과연 그를 믿어야 할까, 아니면 자신이 들은 것을 믿어야 할까?유강후의 전화를 대신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그의 비서이거나 이권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남자였다.그녀가 혼란 속에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휴대전화의 알림음이 울렸다.‘틀림없이 강후 씨가 보낸 메시지일 거야!’그녀는 재빨리 메시지를 확인하며 초조함을 달래려 했다. 그러나 메시지는 낯선 번호에서 온 친구 추가 요청이었다.검은색 프로필 사진에는 두 개의 눈만 드러나 있었다. 그 눈은 마치 어둠 속에서 그녀를 노려보는 악몽 같았다.친구 요청 메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네가 원하는 답을 가지고 있어.]온다연은 프로필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무심결에 친구 요청을 수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상대방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여러 개의 영상과 사진을 보냈다.온다연은 아무 생각 없이 영상을 하나 눌러봤고, 곧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영상 속에는 유강후가 어떤 여자와 함께 아이를 데리고 놀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영상은 꽤 먼 거리에서 찍힌 듯했지만, 그가 유강후라는 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그는 여자를 품에 안고, 그녀의 품에 안긴 작은 아기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스치는 다정함은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깊은 온기를 담고 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은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아담하고 온화한 실루엣은 뚜렷했다.흰색 홈웨어를 입고 있었는데, 평소 온다연이 입
“그 빨간 점은 딱 심장을 겨냥한 위치였어요. 만약 그대로 맞았다면 분명 심장에 명중했을 겁니다. 설령 나은별 씨가 총알을 대신 맞았다고 해도, 그분의 키를 고려하면 그 상처는 턱 아래에 있어야 해요. 하지만 지금 그분의 상처는 왼쪽 가슴에서 어깨 쪽으로 치우쳐 있죠.”진시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제 판단으로는, 암살자가 나은별 씨가 나타난 걸 보고 즉시 무기의 위치를 조정한 겁니다.”그녀는 응급실 쪽을 한 번 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암살범이 왜 나은별 씨를 보고 갑자기 위치를 바꿨을까요? 대표님, 그 이유는 직접 조사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유강후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로 수술실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때 로운이 다가와 진시현을 안아 들고 수술실로 향했다.진시현은 몸을 살짝 비틀며 저항했다.“팀장님, 괜찮습니다. 제가 걸어갈 수 있어요.”하지만 로운은 무표정하게 단호히 말했다.“움직이지 마.”결국 진시현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그의 품에 안겨 수술실로 들어갔다.그 시각, 대형 주택 내부에서는 온다연이 안절부절못하며 초조해하고 있었다.우림이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오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아이가 오후 두세 시쯤 갑작스럽게 미열이 났다.처음에는 단순히 소화 문제일 거라 생각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주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태를 설명하고 소화제를 조금 먹였다.그러나 저녁 여섯 시가 되자 아이의 열이 갑자기 급상승했다.다급히 달려온 주 박사가 진찰한 결과, 폐렴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하지만 주 박사는 서양의학 전문의가 아닌 데다 전문 장비를 가져오지 않았기에 병원으로 즉시 데려가야 한다고 권했다.문제는 밖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집 주변에 수상한 사람들이 출몰해 장화연은 이 주택도 감시당하고 있을 가능성을 의심했다.그래서 병원에서 의사와 장비를 호출하려고 논의했지만, 전문 장비를 가져오는 과정에서 소란이 클 것 같았다.게다가 이 건
말을 마친 유강후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은별을 안아 들고, 거침없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옆에서 소이섭도 서둘러 따라붙었다. 가는 내내 나은별의 피는 멈출 기색이 없었다.소이섭이 간단히 응급 처치를 해보았지만, 효과는 미미했다.의식을 잃은 나은별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유강후, 은별 씨는 이런 사람이야. 널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고!”그는 차갑게 비꼬듯 말했다.“그 고아 출신 여자애 때문에 네가 은별 씨를 몇 번이나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지? 앞으로도 계속 몰아세울 거야?”유강후는 이를 악물며 낮게 소리쳤다.“닥쳐. 내가 뭘 하든 네가 훈계할 자격은 없어!”소이섭은 냉소를 지었다.“그래도 말해야겠어. 넌 은별 씨한테 너무나 많은 빚을 졌어. 어떻게 갚을 건데? 돈으로? 네가 가진 돈이 만능이라도 된다고 생각해?”그 순간, 유강후의 전화가 울렸다.화면에 뜬 이름은 온다연이었다.그녀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떨려 있었다.“강후 씨, 아이가 열이 펄펄 끓고 있어요. 너무 높아서 당장 병원에 데려가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어디예요?”유강후가 대답하려는 찰나, 소이섭이 낮게 속삭였다.“설마 은별 씨를 내버려두고, 그 고아 출신 여자애를 찾아가려는 건 아니겠지? 네 아들은 단순히 열이 나는 거고, 은별 씨는 지금 죽어가고 있어!”그다음 순간, 차갑고 무거운 총구가 소이섭의 머리 뒤에 닿았다.유강후는 전화를 손으로 가린 채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한마디만 더 하면 네 목숨은 끝이다.”소이섭은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총구를 치우고 나서 유강후는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다연아, 걱정하지 마. 지금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바로 못 가. 장 집사랑 병원으로 먼저 가 있어. 내가 끝나는 대로 바로 갈게.”하지만 온다연의 목소리에는 눈물이 배어 있었다.“주 박사님께서 진찰했는데, 대엽성 폐렴일 가능성이 크대요. 해열제도 소용이 없어서 아까 체온이 40도까지 올라갔어요. 빨리
술이 준비된 곳으로 걸음을 옮기니, 사람이 조금 뜸했다.진시현은 유강후의 팔을 조심스럽게 놓으며 공손하게 말했다.“대표님, 우리가 이렇게 있으면 사모님께서 보시고 오해하시는 건 아닐까요?”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는 지금까지 잘 해왔어.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오늘 맡은 역할만 제대로 해.”그는 방금 전 험담을 늘어놓던 사람들 쪽을 아주 잠깐 바라보더니 차가운 말투로 덧붙였다.“아까 수군거리던 사람들 찍어서 이권에게 보내서 처리하게 해.”진시현은 즉시 대답했다.“네, 대표님.”그녀가 살짝 고개를 들며 긴장된 표정을 띠었다.“김원도가 왔습니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다시 유강후의 팔을 친밀하게 잡고, 그의 몸에 기댔다.애교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강후 씨, 저 조금 추워요.”유강후는 손짓하자마자 누군가 부드러운 캐시미어 숄을 가져왔다.그는 직접 숄을 집어 들고 진시현의 어깨에 다정하게 걸쳐주었다.그리고 숄을 걸쳐주며 살짝 몸을 기울여, 마치 그녀에게 입을 맞추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조심해. 저 근처에도 몇 명이 있어.”진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대답했다.“네, 대표님.”그때 김원도가 다가왔다.그는 진시현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유 대표, 이분은 누구지?”유강후는 진시현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김씨 집안 사람이라면 강씨 집안의 휘장을 모를 리가 없겠지. 내 약혼녀야.”김원도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쓰다듬으며 낮게 웃었다.“유 대표는 정말 복이 많네.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곁에 있으니 오늘 밤에도 많은 여성분들이 마음 아파하겠어.”유강후는 김원도의 말을 무시한 채, 시선을 그에게서 돌려 방금 막 들어온 다른 남자를 바라보았다.그 남자는 김원도와 닮았지만, 그의 음험한 기운은 전혀 없었다.그는 유강후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원도에게 다가갔다.“형, 형도 여기 있었어?”김원도는 얼굴빛이 변하며 말했다.“김원혁, 네가 왜
비밀스럽게 진행되었지만, 결국 소문은 새어 나갔고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해 질 무렵, 유강후와 진시현이 뉴월드 호텔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그 자리는 단숨에 술렁거렸다.유강후는 말할 것도 없이 경원시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그는 권력자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인물로, 그의 출현은 곧바로 주목을 끌었다. 연회 주최자인 주경한은 유강후를 보자마자 반갑게 달려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유 대표님,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요즘 많이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제 연회에 참석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그가 한 발짝 더 다가서며 유강후의 옆에 서 있는 진시현에게 눈길을 돌렸다.그리고 단번에 그녀의 가슴 위에 달린 블루 사파이어 브로치를 알아차렸다.조명 아래에서, 브로치 가장자리의 Y 모양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주경한은 이 바닥에서 감각이 빠르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그는 한눈에 이것이 강씨 집안의 여주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임을 알아차리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 이분이 바로 사모님이시군요!”그러나 유강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단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주경한은 이미 소문으로 유강후가 요즘 한 아가씨를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그녀가 강씨 집안 여주인의 물건을 사용할 정도라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혹시 유 대표님, 곧 결혼이라도 하시려는 건가요?”유강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곧 합니다.”주경한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그럼 제가 빨리 축의금을 준비해야겠네요.”그는 진시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온다연 씨 되시죠? 대표님께서 아주 각별히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진시현은 유강후를 살짝 바라보았다.그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아니요, 저는 진시현입니다.”주경한은 순간 멈칫했지만, 곧 웃음을 터뜨렸다.“아, 맞다, 진시현 씨. 제가 착각했네요. 두 분, 안으로 들어가시죠
장화연의 얼굴에는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을 믿으셔야 합니다.”그 말은 온다연의 추측이 사실임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온다연의 심장은 순간적으로 꽉 조여들었고, 마치 뒤틀려버린 밧줄처럼 고통스러워 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그래서, 정말로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는 거네요.”장화연은 말했다.“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모님과 우림 도련님의 안전과도 관련이 있는 일이에요. 도련님께서는 사모님께서 걱정하실까 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셨지만, 저는 사모님께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이 점점 더 무서워질 만큼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본 장화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누군가 사모님의 안전을 담보로 도련님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 며칠 동안 도련님은 밖에 나가 사모님처럼 보이는 사람을 일부러 꾸며냈어요. 그렇게라도 설명해 드리면 조금은 나아지실까요?”장화연은 유강후 곁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며 그의 모든 행적을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다.그렇기에 그녀의 말은 묵직한 신뢰를 주었고, 때로는 유강후를 대신해 발언하는 권위도 있었다.온다연은 그런 그녀의 말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그 전화.그녀가 그렇게 오래 들었던 그 전화가 정말 거짓일 수 있을까?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강후 씨의 휴대폰을 다른 사람이 받을 수 있나요?”장화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사모님,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모든 건 도련님께서 돌아오신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워낙 복잡하니, 타인들의 이간질에 넘어가지 마세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제가 우림 도련님을 데려오겠습니다. 오늘 밤은 사모님께서 아이와 함께 주무세요.”곧 예쁜 아기가 방으로 안겨 들어왔다.아이가 들어오는 순간, 온다연은 조금이나마 마음이 평온해지는 걸 느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곤히 잠든 얼굴을 쓰다듬으며, 이마에 부드럽게
그는 수년 동안 유강후의 곁에서 그의 냉혹한 수완을 지켜보며 살아왔다.하지만 이번만큼은 유난히 매섭고 강렬했다.김씨 집안은 동양국에서 가장 유명한 재벌 중 하나로 손꼽혔다. 그런데 불과 한 달 만에 몰락했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하고 말았다.이 과정에서 소요된 막대한 자금과 수단, 그리고 상업계에 불어닥친 폭풍우 같은 소란은 평범한 이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이번 사건은 그가 유강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그리고 또 한 가지 확실히 깨닫게 했다.앞으로는 정말로 의지할 대상을 찾는다면, 온다연을 선택하는 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거라는 사실을.온다연의 방.장화연은 따뜻한 우유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온다연이 침대 모서리에 웅크린 채 몰래 눈물을 훔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방 안의 부드러운 조명 아래, 온다연의 빨갛게 부은 눈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녀는 분명 울고 있었다.장화연은 우유를 내려놓고 그녀 옆에 조용히 앉았다.“사모님, 도련님이 보고 싶으신 거예요?”온다연은 고개를 저으며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강후 씨가 왜 오늘 오지 않는 거죠? 정말 회사에서 회의 중인 걸까요?”장화연은 따뜻한 우유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악몽을 꾸셨죠? 이거 마시면 좀 나아질 거예요.”온다연은 우유를 받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강후 씨 오늘 너무 심했어요. 저한테 한 달간 휴학하라고 했어요. 이유는 단지 염지훈이 제 선생님이라는 것뿐인데, 저랑 상의도 없이 제 수업을 멋대로 중단시켰어요.”“원래는 그 사람과 크게 싸우려고 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결혼도 했고, 아기까지 있으니 앞으로는 모든 일을 잘 상의하며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참았어요. 그런데 강후 씨는...”온다연은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낮게 속삭였다.“혹시 다른 여자가 생긴 걸까요? 강후 씨는 다를 거라고 믿었는데, 결국 다른 재벌 자제들과 다를 게 없었네요
유강후는 온다연이 악몽에 시달린 줄 알고 가슴 아파하며 물었다.“다연아, 악몽 꿨어?”온다연은 가볍게 답하고선 말을 이었다.“다른 여자랑 같이 있는 꿈을 꿨어요.”하루 종일 전전긍긍하던 유강후는 온다연의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다른 여자랑 있을까 봐 걱정됐어? 꿈에서도 내 생각뿐이네?”온다연이 물었다.“어디에 있는지 왜 대답 안 해요?”“회사에서 미팅 중이었어. 아마 이틀 동안 바빠서 못 갈 거야. 아이랑 같이 잘 지낼...”“강후 씨.”온다연은 그의 말을 끊었고 곧바로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거짓말하고 있잖아요. 옆에 다른 여자 있죠?”유강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온다연의 흐느끼는 목소리에서는 그녀의 기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아까 전화했을 때 다 들었어요. 다른 여자랑...”온다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유강후는 그녀가 또 악몽을 꾼 줄 알고 걱정된 마음으로 장화연에게 전화를 걸었다.곧이어 핸드폰 너머로 장화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유강후는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지금 당장 다연이가 있는 방으로 가봐. 방금 통화했는데 악몽을 꿨는지 울고 있었어.”장화연이 답했다.“지금 바로 가볼게요.”“일이 복잡해져서 당분간은 못갈지도 몰라. 다연이랑 우림이 잘 돌봐줘. 절대 밖에 나가게 해서는 안 돼.”“알겠습니다.”“차라리 우림이를 옆에 데려다줘. 아이랑 같이 자면 마음이 편해질 거야.”“그럴게요.”장화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제 경호원을 통해서 들었는데 다연 씨가 나은별 씨를 만났다고 합니다. 아마 그때 안 좋은 얘기를 들었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다연 씨는 힘든 일을 마음속에 담아두는 분입니다. 도련님께 대한 오해가 생겼다면 그 마음을 달래는 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모릅니다. 두 분 어렵게 여기까지 온 만큼 서로에게 그 어떤 오해도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도련님, 나은별 씨가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