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진은 그녀를 노려보았다.“무슨 헛소리야? 내가 아들이라면 아들이지. 계집애를 낳는다면 네가 저주한 거야. 여자는 역시 아들을 낳아야 해. 네가 아들이었다면 네 아버지도 바람피우지 않았을 거고 네 엄마도 죽지 않았을 거야. 이게 다 네 잘못이야. 알아?”“그리고 유하령이 돌아왔는데, 그 애가 너를 때리고 욕하면 참아. 너 같은 말괄량이 계집애는 피부가 거칠어 몇 대 맞았다고 죽지는 않잖아. 절대 소란을 피우지 말아. 그러면 내가 유씨 가문에서 힘들어져.”심미진은 온다연이 요즘 밖에서 어디 사는지, 뭘 먹는지, 돈은 있는지 전혀 묻지 않고 잔소리만 해댔다.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있을 뿐 한마디 반박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잠시 후 휴게실에서 나왔다.나오자마자 온다연은 차가운 시선이 먼 곳에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고 천천히 걸어가 추가된 걸상에 앉았다.이렇게 큰 테이블에서 모든 사람의 의자가 마호가니 식탁과 세트로 된 것이었고 온다연만 낡은 원형 스툴에 앉았다.그 옆자리는 마침 유하령과 그 친구들이었다.그녀가 앉자마자 극히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후 씨, 이분이 그날 카페에서 만났던 조카야?”온다연은 그제야 유강후 옆에 앉은 나은별을 발견했다.흰 치마에 검은 머리의 그녀는 청초하고 달콤한 외모에 기품이 있고 교양 있는 모습이 유강후와 잘 어울렸다.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온다연을 바라보았다.“방금 강후 씨 차를 타고 왔어요?”이 말을 듣고 모든 사람이 놀란 눈으로 온다연을 쳐다보았다.유강후는 결벽증이 있어서 자기 방과 차에 아무나 들이지 않는다. 그의 기사와 나은별을 제외하고, 그의 어머니조차 그의 차를 타본 적이 없다.유강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려는데 온다연이 나지막이 대답했다.“방금 길가에서 삼촌을 만났는데 같은 방향이라 태워 주셨어요.”나은별은 빙그레 웃으며 다정하게 유강후의 팔짱을 끼더니 부드럽게 말했다.“그렇군요. 강후 씨가 결벽증이 심해서 제가 다른 사람과 많이 접촉해
“못 들었어? 쟤가 잠자리하는 걸로 사범대학 대학원에 들어갔대. 저 치마도 어쩌면 그렇게 받은 건지도 몰라.”“진짜 웃겨. 잠자리하고 겨우 짝퉁을 받았어?”“징그럽고 더러워. 수미 씨는 왜 이런 쓰레기를 우리 곁에 앉혔어? 짜증나게.”...온다연은 손톱이 살 속으로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고개를 들어 유하령을 바라보니 그녀는 극도로 혐오스럽고 경멸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걸상을 뒤로 힘껏 당겼고, 미처 일어서지 못한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테이블에 놓여 있던 주스가 가득 담긴 컵 두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빨간 주스가 치마에 뿌려져 지저분해졌다.모든 사람의 시선이 다시 온다연에게 집중됐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무릎에서 전해지는 심한 통증을 참으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유하령을 바라보았다.유하령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천박한 년’이라고 말하고는 중지를 내밀었다.이때 아무 말도 없던 유강후의 할머니가 싫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말했다.“옷을 갈아입으러 가지 않고 뭐해? 이 아이는 왜 계속 이렇게 덤벙대는지? 미진아, 너 시집온 지 몇 년 됐는데 아이가 아직도 이 모양이니? 망신스러운 바보짓만 하고 다녀.”얼굴이 빨개진 심미진은 온다연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운 후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빨리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 다시 오지 마. 창피해 죽겠어.”온다연은 무릎에서 전해지는 통증을 참으며 절뚝절뚝 홀에서 나갔다.하지만 그녀는 방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머리채를 잡혀 계단 뒤편의 창고로 끌려갔다.쾅 하고 문 닫는 소리에 이어 그녀는 바닥에 내던져졌고, 미처 일어나기 전에 따귀가 연거푸 날아왔다. 그녀는 머리가 윙윙 울리고 아프다 못해 약간 저렸다.“천한 년, 누가 널 오라 했어? 감히 우리 삼촌 차에 타? 뻔뻔한 년! 네 이모랑 똑같이 천박해.”온다연이 일어나려고 허우적대자 유하령은 그녀의 손등을 밟았다.하이힐은 그녀의 손등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온다연은 너무 아파서 시선이
온다연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손을 꽉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잠시 후, 그녀는 거즈를 가져다가 상처에 약을 바르고 나서 왼손으로 큰 반창고를 들고 왼쪽 귀 뒤쪽의 두피에 붙이고 빗으로 머리를 빗어 겨우 상처를 덮었다. 그리고 상처에 염증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소염제 두 알을 삼켰다. 이렇게 맞은 적은 처음이 아니었고, 회가 거듭되다 보니 이렇게 스스로 약을 바르는 것도 이골이 나기 시작했다.온다연은 다시 몸을 추스르고 쪼그려 앉아 장판 밑의 나무 마루를 뜯어 비닐로 코팅된 사진 몇 장을 꺼냈다. 어렸을 때 찍은 사진 두어 장이었는데, 어머니의 사진은 그녀의 손길이 닿아 다소 흐릿해졌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사진을 쓰다듬으며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엄마, 너무 아파요!”사진의 비닐 커버는 눈물에 젖었고, 사진 속에서 웃고 있던 어머니의 얼굴은 마치 그녀와 함께 울고 있는 것 같았다.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온다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온다연은 주위를 둘러보고 대문 밖을 확인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이 집은 비교적 뒤쪽에 있어 평소에도 사람이 많지 않았다.유씨 가문의 사람들은 오늘 모두 앞 홀에서 식사하고 있었고, 하인들 역시 모두 그곳에 갔기 때문에 이곳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온다연은 숨을 죽이며 살금살금 창고로 가서 작은 삽을 하나 들고 후원에 있는 작은 대나무 숲으로 갔다.익숙한 길이라, 그녀는 곧바로 물건을 묻어둔 곳을 찾아내어 삽을 들고 파기 시작했다.곧, 작은 놋쇠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막 떠나려는 순간, 옆에서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후 씨, 나 못 걷겠어. 술 마시니까 어지러워...”나은별의 목소리였다.온다연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 대나무 숲에 몸을 숨겼다.곧 두 사람의 그림자가 대나무 숲길에 나타났다. 이곳은 유강후의 방으로 가는 필수 통로였다.‘나은별이 취해서 유강후의 방에 가려는 것일까?’달빛이 밝게 비추는 가운데, 온다연은 숨을
달빛 아래, 온다연은 유강후의 얼굴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그의 외모는 정말 흠잡을 데가 없었다. 차가운 눈매, 높고 오뚝한 콧날, 매혹적이고 얇은 입술, 칼로 새긴 듯한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그 깊고 차가운 눈은 언제나 냉정한 기운을 풍겼다.‘정말 잘생겼네! 그러니 항상 여자들이 추파를 던지는 거겠지!’온다연이 멍해 있는 순간, 유강후는 이미 시선을 돌리고 뒤쪽에 손짓했다.“권아, 나은별 씨 좀 데려다줘. 술을 많이 마셨어.”나은별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강후 씨, 나를 보내려는 거야?”유강후는 담담하게 말했다.“너 취했어. 가서 푹 쉬어.”이때, 이권이 다가와서 말했다.“나은별 씨, 제가 모셔다드릴게요.”나은별은 눈물을 글썽이며 유강후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가 자신을 붙잡아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강후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돌아가.”나은별은 고개를 숙이고 낮게 말했다.“강후 씨, 보고 싶을 거야.”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했다.온다연은 그녀의 그 말을 엿듣고 있다가 그 자리에서 녹아버릴 것 같았다. 달빛 아래 두 연인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핑크빛 분위기가 감도는 두 사람을 보며 금방이라도 그 자리에서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 후, 유강후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 모르지만, 나은별이 뒤를 두 번, 세 번 돌아보며 걸어갔다.나은별이 떠난 후, 유강후는 뒤돌아보지 않고 온다연이 숨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온다연은 깜짝 놀라 무심코 뒤로 물러섰고, 그러다 갑자기 '탁'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였다.온다연은 긴장해서 손바닥에 땀이 나기 시작했고, 유강후를 더는 쳐다볼 수 없었다.“나와!”유강후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기운이 스며있어 마치 방금까지 나은별과 부드럽게 대화했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온다연이 움직이지 않자, 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가서 너를 끌어내야겠어?”
유강후는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면서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이런 자리엔 참석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예절은 배워야 해. 며칠 뒤에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실 거야.”온다연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그가 술에 취해 헛소리한다고 생각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충 대답했다.“알겠어요.”순순히 따르는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얇은 입술을 짓씹더니 덤덤히 말했다.“따라 와.”곧 그는 몸을 돌려 자신의 독채로 향했다.온다연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로 알고 그 자리에 멍하니 있었다.무슨 뜻일까?따라오라니? 그의 독채로 간다는 말인 걸까?몇 걸음 내디뎠지만 온다연이 따라오지 않자 유강후는 걸음을 멈추고 살짝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나한테 안겨서 가고 싶어?”온다연은 화들짝 놀랐지만 감히 걸음을 옮길 수는 없었다.유씨 일가 사람들은 모두 본관 쪽에 있고 오직 유강후만이 독립된 별장에서 살았다. 두 개 층으로 나뉘어져 있고 수백 평에 달하는 그곳은 그가 가끔 돌아와서 지내는 곳이었다.게다가 집사를 제외하면 아무도 그의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유하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그의 집에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건 아마 나은별뿐일 것이다.가장 중요한 건, 집사가 매일 낮마다 정해진 시간에 청소하러 그 별장에 간다는 점이었다. 그건 그의 집에 사람이 없다는 걸 의미했다. 그러니 지금 그곳에 간다면 유강후와 단둘이 있어야 했다.온다연은 그러기 싫었다.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온다연이 움직이지 않자 유강후는 몸을 돌려서 다시 돌아왔다.그는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 겨우 몇 걸음 만에 온다연의 앞에 섰다. 그는 온다연이 들고 있던 상자를 빼앗아갔고 온다연의 놀란 시선 속에서 성큼성큼 자신의 별장으로 향했다.상자를 빼앗긴 온다연은 초조한 마음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감히 시끄럽게 굴 수는 없었기에 다급히 유강후의 뒤를 따랐다.이내 그들은 유강후의 별장 문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온다연은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였다.문 앞에서
이때 온다연은 이미 상자를 잡은 상태였다. 무거운 강철 문이 팔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엄청난 통증이 전해지는 순간, 온다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러나 그녀는 상자를 꼭 쥔 채로 서둘러 그것을 몸 뒤로 감추며 경계하는 눈빛으로 유강후를 바라보았다.유강후는 그녀가 겨우 상자 하나 때문에 팔을 다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조금 전 소리를 들으면 꽤 심하게 다쳤을 텐데 말이다.그러나 온다연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상자에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유강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의 얇은 입술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환한 조명 아래 그의 잘생긴 이목구비가 유독 날카롭게 보여 쉽게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온다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천천히 오른쪽으로 움직였다.그곳에는 문이 있었다.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도망치기만 해봐!”한없이 차가운 목소리에서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졌다. 온다연은 몸을 흠칫 떨더니 본능적으로 발을 거두어들였다.유강후는 그녀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이리 줘 봐.”온다연은 유강후가 상자를 보겠다고 하자 너무 긴장한 나머지 손바닥이 축축이 젖어 들어갔다. 그녀는 연신 뒷걸음질 쳤고 결국엔 비싼 목재로 만들어진 가구에 등이 닿았다. 이제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유강후는 여전히 그녀에게로 가고 있었다. 온다연의 작고 가녀린 몸이 그의 커다란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졌다.엄청난 압박감에 온다연은 몸을 움츠렸다. 가구와 한 몸이라도 될 듯이 말이다.유강후에게서 나는 삼나무 향이 온다연을 완전히 감쌌다. 온다연은 그의 향기가 호흡을 통해 폐까지 가득 들어찬 뒤 온몸으로 뻗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안에서 싹을 틔울 것 같기도 했다.온다연은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 본능적으로 그의 향기를 맡지 않기 위해 손으로 자신의 코와 입을 막았다. 그러나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조금 전 문에 부딪혀 팔에 빨갛게 움푹 파여 들어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심지어 살갗이 까지고 멍이 파랗게 들어있었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는 소파에 던져졌고 한 번 튀어 올랐다가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온다연은 주우려고 몸부림쳤지만 유강후는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차갑게 말했다.“한 번만 더 함부로 움직이면 지금 당장 바다에 던져버리겠어.”그러자 온다연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유강후가 어떤 성격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은 거의 전부 다 좋은 결말이 없었다.유강후가 바다에 던지겠다면 정말 던질 것이다.온다연이 가만히 있자 유강후는 옆에 있는 서랍에서 작은 약상자를 꺼내 소파 쪽으로 그녀를 끌고 가며 말했다.“앉아.”온다연은 그 작은 구리 상자를 보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유강후가 정말 상자를 바다에 던질까 봐 어쩔 수 없이 얌전히 앉아 있었다.“자. 손을 들어봐.”온다연은 순순히 손을 들었다.그녀는 옅은 파란색 잠옷 치마를 입었다. 치마의 소매는 팔꿈치에 닿았고 하얀 팔뚝만 드러났고 다소 보수적이었다.부드러운 조명이 그녀의 하얀 피부를 비추자 수정처럼 맑고 윤기가 났다.하얀 피부 때문에 다친 곳은 더 아찔하게 보여졌다.유강후는 이미 파랗게 멍든 곳을 누르면서 차갑게 말했다.“아파?”온다연의 관심은 온통 그 작은 상자에 쏠려 있었기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아니요.”사실 그녀는 정말 별로 아프지 않았다. 적어도 아까 맞았을 때와 비교하면 이 정도 고통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안 아픈 건가?’유강후의 시선은 아래로 향했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 진흙이 조금 묻은 작은 상자를 발견하고 차갑게 말했다.“또 쳐다보면 버리겠어.”온다연은 그제야 황급히 고개를 돌려 긴장한 표정으로 유강후를 쳐다보고는 말도 하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다.유강후는 상처가 난 곳에 소염제를 바르고 붕대로 상처 부위를 감았다.약을 바를 때 온다연은 아파서 얼굴을 찡그렸고 손도 떨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유강후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붕대를 감았고 시선은 그 반창고에 멈췄다.일반 반창고보다 조금 크고 귀여운
그녀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일어나서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양복 첫 번째 단추를 살짝 풀었다.양복 단추마저 어떤 재질의 보석으로 만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질감이 좋은 양복이었다. 그래서 온다연은 혹시나 망가질까 조심스럽게 그의 양복을 벗겼다. 그러자 실크 질감의 흰색 줄무늬 셔츠가 나타났다.셔츠 밑단을 정장 바지에 넣었기에 그는 어깨가 더욱 넓어 보였고 허리가 잘록해 보였다. 그의 몸매는 정말 나무랄 데가 없이 좋아 보였다.게다가 그는 원래부터 차갑게 생겼고 흰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그는 더욱 고상해 보였다.온다연은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려서 고개를 들지 못했고 넥타이를 손으로 잡고 있었지만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유강후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벌려 온다연의 부드럽고 작은 손을 잡았다. 그러자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가볍게 몸을 떨었다.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유강후의 어떤 터치에도 온다연은 매우 민감하게 느껴졌고 그에 따라 거부감도 컸다.넥타이를 풀자마자 온다연의 손은 급하게 움츠러들었고 넥타이를 움켜쥐고 입술을 깨물며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유강후는 온다연의 붉은 입술을 바라보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갈아입은 옷은 욕실 문 앞에 있는 바구니에 넣어두면 매일 사람이 와서 수거해 갈 것이야. 그쪽에 가도 마찬가지야.”‘그쪽에 간다고?’온다연은 살짝 멍해졌다.유강후는 온다연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내 몸에 있는 물건들은 다른 사람이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러니까 너도 일찍 물건들을 정리하는 법을 배워야 해.”온다연은 여전히 유강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그가 오늘 한 말들은 모두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또 감히 묻지 못했기에 알아들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유강후의 시선은 너무 씻은 나머지 하얗게 된 잠옷에 머물렀고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심미진은 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거야?”밖에서 집을 빌려 살고 아파도 챙겨주는 사람도 없고 옷이 낡아서 이렇게 되어도 버리
그는 꿈에도 몰랐다. 그토록 존경하던 큰형님이 자기 자식들이 온다연을 괴롭히도록 내버려 두었다니. 온다연이 신고도 하고 저항도 해봤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다음번 더 잔인한 괴롭힘뿐이었다.그의 어린 온다연은 그렇게 10년을 고스란히 혼자 견뎌야 했다.‘유자성, 그 인간은 죽어 마땅해!’이런 생각들이 떠오르자 후회가 숨통을 조여왔다. 그는 온다연을 꽉 껴안았다. 그렇게 해야만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 같았다.그의 속마음을 알 리 없었던 온다연은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왜 내 사진을 그렇게 많이 찍었어요? 몰래 찍은 것 같던데.”유강후는 나지막이 말했다.“네가 어렸을 때 사람만 보면 도망가는데 나인들 무슨 수가 있겠어?”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그땐 내가 그렇게 어렸는데 어떻게...”유강후는 그녀를 더 꽉 껴안고 나지막이 말했다.“네 생각처럼 그렇게 일찍부터는 아니야. 네가 열세 살 때, 그때부터 널 진심으로 눈여겨보기 시작했어.”그의 말에 그녀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그래도 나랑 여덟 살 차이인데, 내가 열세 살이면 아저씨는 스물한 살이나 먹은 노인네잖아요. 근데 어떻게 그럴 수 있죠?”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내가 늙었다고?”온다연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하죠. 지금 서른하나잖아요. 서른 살이면 엄청 나이 든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그럼 지금 한번 확인해 볼래? 도대체 내가 늙었는지 아닌지...”온다연은 깜짝 놀라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나 몸이 끈적거려서 씻고 올게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하지만 두 걸음도 채 못 가 유강후에게 붙잡혔다.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바보야, 욕실이 어딘지 알아?”온다연은 불만스럽게 말했다.“나 혼자 찾아갈 수 있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내려와서 스스로 걸어가려고 했지만 유강후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가만히 있어!”온다연은 그제야 그에게 다시
온다연은 입을 다물었다.대가족은 집집마다 나름의 규칙이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녀도 강씨 가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섣불리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었다.하지만 마음 한편으론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온다연은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편이기에 유강후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금방 알아챘다.그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조용히 물었다.“내가 너무 심했던 것 같아?”온다연: “조금요.”유강후는 자리에 앉아 그녀가 자신의 어깨에 기대도록 하고 나직하게 말했다.“다연아, 규칙은 지키라고 있는 거지 동정심을 발휘하라고 있는 게 아니야. 강씨 가문은 엄청나게 커. 이 저택의 도우미, 관리인, 운전기사만 해도 이삼백 명은 된다고. 그러니 그 모든 걸 관리하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야. 만약 매일 각자 작은 실수를 하나씩만 해도, 하루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생길지 상상도 못 할걸? 그리고 내가 그녀를 해고한 건 오늘 일 때문만은 아니야.”“저 사람, 우리 집에서 몇 년이나 일했어. 그런데 작년에 내가 돌아왔을 때, 그 여자 아들이 학교에서 자기가 강씨 가문 방계 도련님이라고 으스대면서 애들을 괴롭힌다는 제보가 들어왔었어. 그때 집사가 경고를 줘서 겨우 조용해졌지만. 작년엔 내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는데, 이번에 돌아오자마자 또 같은 문제로 고발이 들어왔어. 그러니 이런 사람은 더 두고 볼 필요 없이 일찍 내보내는 게 맞아.”그는 온다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이제도 내가 냉정하다고 생각해?”온다연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까처럼 무섭게 하면 누구든 오해할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작은 얼굴을 꼬집으며 그녀를 안아 올려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나직하게 말했다.“이제 말해봐. 방금 뭘 생각했는데 그렇게 아파서 아예 기절한 거야?”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어렴풋한 기억의 조각들이 떠오르자 그녀는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옛날에 누가 나를 괴롭혔었어요?”온다연은 이마를 누르면서 말했다.“누군가가 나를 골목으로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내일 일은 내일 보자. 오늘은 첫날이니까 회장님한테 대충 둘러대고. 모두 가서 쉬어.”사람들이 가고 나서 유강후는 온다연에게 새 잠옷을 입히고 미지근한 물로 수건을 적셔 다시 얼굴을 닦아주었다.얼마 후, 온다연이 깨어났다.머리는 여전히 아팠고 그 장면들은 흐릿하면서도 너무 생생해서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유강후는 온다연이 깨어나자 부축해서 앉혀주고 등에 쿠션을 받쳐주었다.“머리 아직도 아파?”온다연은 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얼굴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또 땀을 많이 흘려서인지 목이 심하게 말랐다.그녀는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물, 물 마시고 싶어요.”유강후는 문으로 가서 밖에 서 있는 도우미에게 말했다.“물 좀 갖다 줘. 따뜻한 물로.”그녀가 곧 따뜻한 물을 가져왔다.목이 너무 말랐던 온다연은 물을 받자마자 크게 한 모금 마셨다.그리고는 바로 물을 뱉어내며 연신 숨을 들이쉬었다.“앗, 뜨거워, 뜨거워!”유강후는 그제야 보온병에 담긴 물이 펄펄 끓는 물이라는 것을 알아챘다.그는 곧바로 온다연의 턱을 잡고 화상을 입었는지 확인했다.그녀의 연약한 입안은 이미 뜨거운 물에 데어 하얗게 변하고 껍질이 벗겨져 있었다.그는 순간 격노하여 물컵을 바닥에 내던지며 소리쳤다.“당장 들어와!”도우미는 너무 놀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유강후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마실 물인데 물 온도 확인도 안 해?”그 사람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죄송합니다. 방금 오 집사가 모든 사람을 거실로 부르셔서 저만 여기 남아 시중을 들고 있었습니다. 거실 일이 신경 쓰여서 물 따르다가 정신이 없어서 뜨거운 물인지 찬물인지 미처 확인하지 못했습니다...”“가서 급여 정산하고 내일부터 나오지 마.”유강후는 차갑게 말했다.그 사람은 순간 당황하여 바로 무릎을 꿇고 울며 말했다.“도련님, 제발 자르지 마세요. 저는 강씨 가문
유강후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오늘 밤 누가 내 방에 왔었지?”오진숙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큰 사모님께서 밖에 잠깐 서 계셨을 뿐입니다. 어제 제가 집 안 구석구석 다 확인했는데 아무런 허점도 없었습니다. 이 사진첩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습니다!”유강후의 눈에 뚜렷한 살기가 스쳤다. 그가 차갑게 말했다.“모든 책임자와 일하는 사람들을 모두 거실로 불러서 내 앞에서 하나하나 조사해!”말을 마친 그는 온다연을 안고 안방으로 들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주치의가 도착했다. 진찰 후, 의사는 강한 자극으로 인한 실신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며 진정제를 처방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의사가 떠난 후, 진씨 가문에서 따라온 네 사람이 시중을 들려고 들어오려 하자 유강후는 차갑게 말했다.“댁 아가씨께서 이전에도 이렇게 실신한 적이 있었나?”그중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3년 전 처음 돌아왔을 때는 자주 그랬습니다. 그 후로는 점차 나아졌는데, 아마도 아가씨께서 무언가를 보고 예전 일을 떠올리신 것 같습니다.”유강후가 말했다.“오늘 일은 진 회장께는 알리지 마라. 알겠지?”책임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하지만 회장님께서는 아가씨 일은 사소한 것까지 매일 보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희는 해고입니다.”유강후는 문 앞 네 사람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훑었다. 그 압도적인 시선에 그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이 네 사람은 진씨 가문에서 가장 경력이 많고 솜씨 좋은, 두 남자와 두 여자로 이루어진 최정예 팀이었다.진수현은 딸의 이번 외출에 공을 많이 들였지만 유강후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계략이라면 유강후도 그에 못지않았다.이들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유강후의 손바닥 안이었다.유강후는 그들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역력해질 때까지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그제야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충성스럽고 책임감 강한 건 좋은 일이지. 난 이런 사람들을 존경해. 하지만, 너희도 알다시피 나랑 너희
“그 양반이 얘는 유씨 가문 사람 아니라고 했잖아. 뭘 걱정해...”“어린 게 꽤 예쁘장하네. 나이만 찼어도 오늘 맛 좀 봤을 텐데.”“이 조그맣고 보드라운 손은 남자 꼬시려고 있는 거야?”“바늘 가져와. 바늘을 손톱 밑에 찔러 넣어. 피는 안 나게 해야 돼. 이년의 그 상간녀 이모가 눈치채지 못하게.”“눈치채면 어쩔 건데? 상간녀가 자리에 올라도 유씨 가문에서 개처럼 기고 있잖아. 나쁜 년!”“상간녀의 조카면 똑같이 천박한 상간녀야. 태생이 남자 꼬시는 걸레라니까!”...화면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고 온다연의 머리는 점점 더 아파왔다.누군가 전기톱으로 그녀의 머리를 쪼개고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꺼내는 것 같았다.결국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낮게 신음하며 바닥에 쓰러졌다.이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들어와 보고는 깜짝 놀랐다.“빨리, 도련님께 알려! 빨리!”유강후는 저녁 식사 자리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어머니가 직접 온다연을 데리고 쇼핑을 갔고 집안에도 온통 유씨 가문 사람들뿐이었지만 그는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그는 대충 인사를 하고 연회장을 나섰다.그런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도우미 하나가 허겁지겁 뛰어나오다 그와 부딪혔다.그가 차갑게 물었다.“무슨 일로 이렇게 허둥대?”도우미가 다급하게 외쳤다.“도련님! 큰일 났어요! 진유나 씨가 쓰러지셨어요!”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유강후는 다급히 집 안으로 들어섰다.집에 들어서니 2층에 있던 집사 오진숙이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도련님, 진유나 씨가 옷 방에서 쓰러지셨습니다. 제가 감히 손댈 수 없어서 주치의에게 연락했습니다. 곧 도착하실 겁니다.”유강후는 단숨에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온다연은 옷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작은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고 이마와 턱, 심지어 목까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바닥에도 땀방울이 떨어져 작은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유강후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고 술기운도 싹 날아갔다.심장 깊은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 “오 집사님, 강후 씨는 자주 집에 돌아오지 않나요?” 오진숙은 공손히 대답했다. “도련님은 6, 7년 전만 해도 자주 돌아왔지만 그 뒤로는 대부분 집에 없으셨습니다. H국과 북아메리카를 오가며 지내셨죠.” “평소에 그를 따라다니는 집사셨나요?” 오진숙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전에는 장화연 집사께서 도련님을 보살펴 주셨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장 집사님께서 H국에 계셔서 그동안은 제가 이 집을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장화연?’ 진유나는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마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확 끊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잠시 후 그 느낌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뭔가 불쾌한 감정이 남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집 안의 인테리어는 전형적인 전통 스타일로 차분하고 고급스러웠다. 마치 유강후의 성격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했다. 진유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곧 흥미를 잃었다. 유강후는 생각보다 흥미로운 사람이 아니었고 비밀을 파낼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진유나는 옷장을 한 바퀴 돌며 살펴봤지만 특별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가 옷장의 마지막 칸을 열었을 때 순간 멈칫했다. 그곳에는 두 벌의 잠옷이 걸려 있었다. 순수한 색상의 비단 잠옷 긴 한 벌은 분명히 유강후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성용 잠옷이었다.‘이건 대체 누구의것일까?’두 벌의 잠옷은 서로 나란히 붙어 있었고 소매가 얽혀 있었는데 마치 두 사람이 서로를 포옹하고 있는 듯했다. 진유나는 호기심에 잠옷을 살짝 당겨 보았다. 그랬더니 두 벌의 잠옷이 한꺼번에 떨어지며 그 아래에 있던 몇 권의 앨범이 드러났다. 그녀는 앨범을 집어 들고 펼쳐 봤다. 그 안에는 유강후의 어린 시절을 담은 사진들이 있었다. 어릴 때의 유강후은 정말 예쁘고 잘생겼다고밖에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흰 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이나 짙은 남색 더블브레스트 코트를 입은 모습이나 또 학교
진유나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 여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부인, 안녕하세요.”강현미는 그 여자가 들고 있던 물과 약을 받아 들고는 진유나에게 말했다. “이 분은 내 비서 임청하야.”알고 보니 이 사람은 예전에 유강후가 후원해 준 그 여자였고 유강후의 고인이 된 친누나와 조금 닮아서 강현미는 그녀를 곁에 두고 자신의 개인 비서로 삼아 자식을 잃은 아픔을 위로하려 했다. 진유나는 예의상 임청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임청하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비록 태도는 공손했지만 얼굴에 번지는 미소는 진심이 담기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임청하는 강현미의 사람이라 그녀도 더 이상 말할 필요는 없었다. 강씨 가문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었기에 집사 하나의 마음을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강현미는 약을 먹고 연회장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진유나는 조용히 말했다.“먼저 가세요. 저는 강후 씨 방에 좀 가보고 싶어요.” 강현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근처에 있던 하인을 불렀다. “오 집사, 여기서 진유나 씨를 모시고 있어. 기억해. 진유나 씨는 평범한 손님이 아니야. 무엇을 하든 괜찮으니 강후가 화내지 않도록 잘 챙겨.” 오 집사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큰 사모님.” 조금 걸어 나가다가 강현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진유나를 한 번 바라봤다. 진유나는 여전히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강현미는 뒤돌아 임청하를 한 번 쳐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넌 그 애를 본 유일한 사람이니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 알겠어?” 임청하는 눈을 떨구고 온화하게 말했다. “네. 강 대표님.” 강현미는 담담히 말했다. “네 마음은 알겠다. 사실 몇 년 전 나도 내가 죽은 후에 네가 강후 옆에서 일하게 될 거로 생각했었어.” “하지만 지금은 달라. 그 아이는 죽지 않았고
강현미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신경 써줘서 고맙지만 내 일로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돼.”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예전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진유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거의 기억이 없어요. 그래도 나중에는 떠오를지도 모르죠.” 강현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강후가 너한테 예전에 너희가 함께했다는 얘기 한 적 있어?” 진유나는 이 주제가 나올 줄 몰라 순간 멈칫했다.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네. 말하긴 했어요. 하지만 자세한 얘기는 안 했어요. 그냥 예전에 우리가 사귀었고 오해로 헤어졌다고만 했어요. 그 후 제가 H국을 떠나 친부모님이 찾아왔고 그때부터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고 했죠. 그러다 강후 씨가 동남아시아에 와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됐고요.”사실 진유나는 유강후가 그렇게 말한 게 완전히 문제가 없는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유강후에게 강한 반응을 보였고 첫 만남에도 묘한 친숙함을 느꼈기 때문에 그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오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유강후가 계속 말하지 않았다. 강현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설명했구나. 이 아이는 너와 관련된 일만 생기면 항상 선을 넘는 행동을 많이 해.” 그녀는 몸을 돌려 진유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네가 말해봐. 넌 강후를 좋아하니? 강후에 대해서 어떤 느낌이 들어?” 진유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강 대표님, 만약 제가 그 사람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면 강후 씨와 함께 북아메리카로 올 이유가 있을까요? 저희 진씨 가문도 큰 집안인데 굳이 누군가와 혼인을 맺을 필요는 없으니까요.”강현미의 시선이 온전히 진유나에게 머물며 천천히 말했다. “네가 많이 달라졌구나. 진씨 가문에서 정말 훌륭하게 잘 자란 것 같아.”“하지만 한 가지 말해두고 싶어. 너희 사이의 오해는 예상보다 훨씬 컸고 그건 단순한 연인 사이의 싸움 같은 게 아니
진유나를 본 강씨 가문 어르신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우리 손자가 목숨을 건 듯 밥도 제대로 못 먹는다고 했더니 진씨 가문 따님은 역시 평범하지 않구나.” 진유나는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앞으로 나아가 전통 예법에 맞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강씨 가문 어르신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흐뭇하게 웃으며 가까이 다가와 진유나를 다시 한번 살펴보더니 감탄하듯 말했다. “참 곱게도 생겼구나. 우리 손자가 꿈에서도 잊지 못할 만하네.” 진유나는 과한 칭찬에 머쓱해져 서둘러 말했다. “할아버지, 저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렇게까지 좋게 봐주실 것까진 없어요.” 그러자 강씨 가문 어르신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평범하면 세상 사람들은 뭐가 되겠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점점 더 민망해진 진유나는 손끝을 살짝 움직여 유강후의 손을 몰래 감았다. 그러자 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자연스럽게 감싸 쥐고는 가볍게 자기 뒤로 끌어당겼다. “할아버지, 너무 부담 주지 마세요. 유나 씨가 놀라잖아요.”강씨 가문 어르신은 손자의 얼굴에 되찾은 생기와 자신감을 보며 기쁨과 안도 그리고 묘한 복잡한 감정이 뒤섞였다. 그는 유강후의 어깨를 힘 있게 두드리며 연달아 세 번이나 말했다. “좋다. 좋아! 정말 좋구나.” 반면 강현미는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담담하게 한마디만 남겼다. “두 사람 잘 지내도록 해라.” 그렇게 말한 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성대한 환영 연회가 열렸다. 거의 모든 강씨 가문의 일원이 참석한 자리였다.유강후가 그 자리의 중심이 되는 건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강씨 가문은 대대로 자손이 많지 않았고 강씨 가문 어르신의 직계는 더욱 그랬다. 그에게는 외동딸 강현미뿐이었고 강현미 역시 오직 유강후 하나만을 두었으니 그가 어디에 있든 특별한 존재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자리의 분위기가 점점 뜨거워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