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눈에 띄는 유강후이다 보니 연회홀에 나타나자마자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모든 화제도 그를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었다.모든 사람을 훑어본 온다연의 시야에 심미진과 유하령이 잡혔다.심미진의 눈빛이 그녀에게 닿았을 때, 그녀는 당황함과 놀라움으로 가득했고 유하령은 감출 수 없는 악의 가득 찬 눈동자로 그녀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았다.오늘 이 자리에 유강후화 유재성이 없었다면, 유하령이 달려와 그녀의 뺨을 칠 것임을 온다연은 잘 알고 있었다. 유하령의 옆에는 그녀의 친구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녀들도 마찬가지로 악의에 찬 눈길로 온다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온다온이 고개를 가볍게 늘어뜨리며 뽀송한 이마를 가린 앞머리를 정리했다. 앞머리로 가려 다른 사람이 그녀의 표정을 잘 확인할 수 없게 하고 싶었다.유강후가 강요하지 않았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불쾌함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유강후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내 옆에 앉아.”자리는 지정석이었다. 유강후의 자리는 유재성의 오른쪽이었는데, 그 옆에는 유자성이 앉아 있었다.온다연을 본 유자성이 티가 나게 미간을 좁히며 담담히 말했다.“셋째가 오니, 다연이도 집에 돌아오네.”그가 고개를 돌려 사용인에게 지시했다.“수미 씨, 자리 하나 추가하죠.”진수미는 유씨 가문에서 오랫동안 일한 사용인으로, 유씨 가문에 대해 잘 알고 있어 자연히 온다연의 지위도 알고 있었다.그녀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온다연을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공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가씨가 돌아오셨으니 의자를 하나 추가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제일 끝에 있는 테이블에 착석해 주셔야겠습니다.”말이 끝나자, 유하령과 그녀의 친구들이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유하령은 혐오스럽지 짝이 없는 경멸의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심미진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다연아, 잠깐 나 좀 보자.”이내 그녀들은 휴게실로 왔다.
심미진은 그녀를 노려보았다.“무슨 헛소리야? 내가 아들이라면 아들이지. 계집애를 낳는다면 네가 저주한 거야. 여자는 역시 아들을 낳아야 해. 네가 아들이었다면 네 아버지도 바람피우지 않았을 거고 네 엄마도 죽지 않았을 거야. 이게 다 네 잘못이야. 알아?”“그리고 유하령이 돌아왔는데, 그 애가 너를 때리고 욕하면 참아. 너 같은 말괄량이 계집애는 피부가 거칠어 몇 대 맞았다고 죽지는 않잖아. 절대 소란을 피우지 말아. 그러면 내가 유씨 가문에서 힘들어져.”심미진은 온다연이 요즘 밖에서 어디 사는지, 뭘 먹는지, 돈은 있는지 전혀 묻지 않고 잔소리만 해댔다.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있을 뿐 한마디 반박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잠시 후 휴게실에서 나왔다.나오자마자 온다연은 차가운 시선이 먼 곳에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고 천천히 걸어가 추가된 걸상에 앉았다.이렇게 큰 테이블에서 모든 사람의 의자가 마호가니 식탁과 세트로 된 것이었고 온다연만 낡은 원형 스툴에 앉았다.그 옆자리는 마침 유하령과 그 친구들이었다.그녀가 앉자마자 극히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후 씨, 이분이 그날 카페에서 만났던 조카야?”온다연은 그제야 유강후 옆에 앉은 나은별을 발견했다.흰 치마에 검은 머리의 그녀는 청초하고 달콤한 외모에 기품이 있고 교양 있는 모습이 유강후와 잘 어울렸다.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온다연을 바라보았다.“방금 강후 씨 차를 타고 왔어요?”이 말을 듣고 모든 사람이 놀란 눈으로 온다연을 쳐다보았다.유강후는 결벽증이 있어서 자기 방과 차에 아무나 들이지 않는다. 그의 기사와 나은별을 제외하고, 그의 어머니조차 그의 차를 타본 적이 없다.유강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려는데 온다연이 나지막이 대답했다.“방금 길가에서 삼촌을 만났는데 같은 방향이라 태워 주셨어요.”나은별은 빙그레 웃으며 다정하게 유강후의 팔짱을 끼더니 부드럽게 말했다.“그렇군요. 강후 씨가 결벽증이 심해서 제가 다른 사람과 많이 접촉해
“못 들었어? 쟤가 잠자리하는 걸로 사범대학 대학원에 들어갔대. 저 치마도 어쩌면 그렇게 받은 건지도 몰라.”“진짜 웃겨. 잠자리하고 겨우 짝퉁을 받았어?”“징그럽고 더러워. 수미 씨는 왜 이런 쓰레기를 우리 곁에 앉혔어? 짜증나게.”...온다연은 손톱이 살 속으로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고개를 들어 유하령을 바라보니 그녀는 극도로 혐오스럽고 경멸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걸상을 뒤로 힘껏 당겼고, 미처 일어서지 못한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테이블에 놓여 있던 주스가 가득 담긴 컵 두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빨간 주스가 치마에 뿌려져 지저분해졌다.모든 사람의 시선이 다시 온다연에게 집중됐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무릎에서 전해지는 심한 통증을 참으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유하령을 바라보았다.유하령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천박한 년’이라고 말하고는 중지를 내밀었다.이때 아무 말도 없던 유강후의 할머니가 싫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말했다.“옷을 갈아입으러 가지 않고 뭐해? 이 아이는 왜 계속 이렇게 덤벙대는지? 미진아, 너 시집온 지 몇 년 됐는데 아이가 아직도 이 모양이니? 망신스러운 바보짓만 하고 다녀.”얼굴이 빨개진 심미진은 온다연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운 후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빨리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 다시 오지 마. 창피해 죽겠어.”온다연은 무릎에서 전해지는 통증을 참으며 절뚝절뚝 홀에서 나갔다.하지만 그녀는 방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머리채를 잡혀 계단 뒤편의 창고로 끌려갔다.쾅 하고 문 닫는 소리에 이어 그녀는 바닥에 내던져졌고, 미처 일어나기 전에 따귀가 연거푸 날아왔다. 그녀는 머리가 윙윙 울리고 아프다 못해 약간 저렸다.“천한 년, 누가 널 오라 했어? 감히 우리 삼촌 차에 타? 뻔뻔한 년! 네 이모랑 똑같이 천박해.”온다연이 일어나려고 허우적대자 유하령은 그녀의 손등을 밟았다.하이힐은 그녀의 손등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온다연은 너무 아파서 시선이
온다연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손을 꽉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잠시 후, 그녀는 거즈를 가져다가 상처에 약을 바르고 나서 왼손으로 큰 반창고를 들고 왼쪽 귀 뒤쪽의 두피에 붙이고 빗으로 머리를 빗어 겨우 상처를 덮었다. 그리고 상처에 염증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소염제 두 알을 삼켰다. 이렇게 맞은 적은 처음이 아니었고, 회가 거듭되다 보니 이렇게 스스로 약을 바르는 것도 이골이 나기 시작했다.온다연은 다시 몸을 추스르고 쪼그려 앉아 장판 밑의 나무 마루를 뜯어 비닐로 코팅된 사진 몇 장을 꺼냈다. 어렸을 때 찍은 사진 두어 장이었는데, 어머니의 사진은 그녀의 손길이 닿아 다소 흐릿해졌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사진을 쓰다듬으며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엄마, 너무 아파요!”사진의 비닐 커버는 눈물에 젖었고, 사진 속에서 웃고 있던 어머니의 얼굴은 마치 그녀와 함께 울고 있는 것 같았다.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온다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온다연은 주위를 둘러보고 대문 밖을 확인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이 집은 비교적 뒤쪽에 있어 평소에도 사람이 많지 않았다.유씨 가문의 사람들은 오늘 모두 앞 홀에서 식사하고 있었고, 하인들 역시 모두 그곳에 갔기 때문에 이곳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온다연은 숨을 죽이며 살금살금 창고로 가서 작은 삽을 하나 들고 후원에 있는 작은 대나무 숲으로 갔다.익숙한 길이라, 그녀는 곧바로 물건을 묻어둔 곳을 찾아내어 삽을 들고 파기 시작했다.곧, 작은 놋쇠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막 떠나려는 순간, 옆에서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후 씨, 나 못 걷겠어. 술 마시니까 어지러워...”나은별의 목소리였다.온다연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 대나무 숲에 몸을 숨겼다.곧 두 사람의 그림자가 대나무 숲길에 나타났다. 이곳은 유강후의 방으로 가는 필수 통로였다.‘나은별이 취해서 유강후의 방에 가려는 것일까?’달빛이 밝게 비추는 가운데, 온다연은 숨을
달빛 아래, 온다연은 유강후의 얼굴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그의 외모는 정말 흠잡을 데가 없었다. 차가운 눈매, 높고 오뚝한 콧날, 매혹적이고 얇은 입술, 칼로 새긴 듯한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그 깊고 차가운 눈은 언제나 냉정한 기운을 풍겼다.‘정말 잘생겼네! 그러니 항상 여자들이 추파를 던지는 거겠지!’온다연이 멍해 있는 순간, 유강후는 이미 시선을 돌리고 뒤쪽에 손짓했다.“권아, 나은별 씨 좀 데려다줘. 술을 많이 마셨어.”나은별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강후 씨, 나를 보내려는 거야?”유강후는 담담하게 말했다.“너 취했어. 가서 푹 쉬어.”이때, 이권이 다가와서 말했다.“나은별 씨, 제가 모셔다드릴게요.”나은별은 눈물을 글썽이며 유강후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가 자신을 붙잡아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강후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돌아가.”나은별은 고개를 숙이고 낮게 말했다.“강후 씨, 보고 싶을 거야.”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했다.온다연은 그녀의 그 말을 엿듣고 있다가 그 자리에서 녹아버릴 것 같았다. 달빛 아래 두 연인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핑크빛 분위기가 감도는 두 사람을 보며 금방이라도 그 자리에서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 후, 유강후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 모르지만, 나은별이 뒤를 두 번, 세 번 돌아보며 걸어갔다.나은별이 떠난 후, 유강후는 뒤돌아보지 않고 온다연이 숨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온다연은 깜짝 놀라 무심코 뒤로 물러섰고, 그러다 갑자기 '탁'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였다.온다연은 긴장해서 손바닥에 땀이 나기 시작했고, 유강후를 더는 쳐다볼 수 없었다.“나와!”유강후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기운이 스며있어 마치 방금까지 나은별과 부드럽게 대화했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온다연이 움직이지 않자, 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가서 너를 끌어내야겠어?”
유강후는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면서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이런 자리엔 참석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예절은 배워야 해. 며칠 뒤에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실 거야.”온다연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그가 술에 취해 헛소리한다고 생각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충 대답했다.“알겠어요.”순순히 따르는 그녀의 모습에 유강후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얇은 입술을 짓씹더니 덤덤히 말했다.“따라 와.”곧 그는 몸을 돌려 자신의 독채로 향했다.온다연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로 알고 그 자리에 멍하니 있었다.무슨 뜻일까?따라오라니? 그의 독채로 간다는 말인 걸까?몇 걸음 내디뎠지만 온다연이 따라오지 않자 유강후는 걸음을 멈추고 살짝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나한테 안겨서 가고 싶어?”온다연은 화들짝 놀랐지만 감히 걸음을 옮길 수는 없었다.유씨 일가 사람들은 모두 본관 쪽에 있고 오직 유강후만이 독립된 별장에서 살았다. 두 개 층으로 나뉘어져 있고 수백 평에 달하는 그곳은 그가 가끔 돌아와서 지내는 곳이었다.게다가 집사를 제외하면 아무도 그의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유하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그의 집에 발을 들일 수 있었던 건 아마 나은별뿐일 것이다.가장 중요한 건, 집사가 매일 낮마다 정해진 시간에 청소하러 그 별장에 간다는 점이었다. 그건 그의 집에 사람이 없다는 걸 의미했다. 그러니 지금 그곳에 간다면 유강후와 단둘이 있어야 했다.온다연은 그러기 싫었다.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온다연이 움직이지 않자 유강후는 몸을 돌려서 다시 돌아왔다.그는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 겨우 몇 걸음 만에 온다연의 앞에 섰다. 그는 온다연이 들고 있던 상자를 빼앗아갔고 온다연의 놀란 시선 속에서 성큼성큼 자신의 별장으로 향했다.상자를 빼앗긴 온다연은 초조한 마음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감히 시끄럽게 굴 수는 없었기에 다급히 유강후의 뒤를 따랐다.이내 그들은 유강후의 별장 문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온다연은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였다.문 앞에서
이때 온다연은 이미 상자를 잡은 상태였다. 무거운 강철 문이 팔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엄청난 통증이 전해지는 순간, 온다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러나 그녀는 상자를 꼭 쥔 채로 서둘러 그것을 몸 뒤로 감추며 경계하는 눈빛으로 유강후를 바라보았다.유강후는 그녀가 겨우 상자 하나 때문에 팔을 다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조금 전 소리를 들으면 꽤 심하게 다쳤을 텐데 말이다.그러나 온다연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상자에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유강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의 얇은 입술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환한 조명 아래 그의 잘생긴 이목구비가 유독 날카롭게 보여 쉽게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온다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천천히 오른쪽으로 움직였다.그곳에는 문이 있었다.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도망치기만 해봐!”한없이 차가운 목소리에서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졌다. 온다연은 몸을 흠칫 떨더니 본능적으로 발을 거두어들였다.유강후는 그녀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이리 줘 봐.”온다연은 유강후가 상자를 보겠다고 하자 너무 긴장한 나머지 손바닥이 축축이 젖어 들어갔다. 그녀는 연신 뒷걸음질 쳤고 결국엔 비싼 목재로 만들어진 가구에 등이 닿았다. 이제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유강후는 여전히 그녀에게로 가고 있었다. 온다연의 작고 가녀린 몸이 그의 커다란 그림자에 완전히 가려졌다.엄청난 압박감에 온다연은 몸을 움츠렸다. 가구와 한 몸이라도 될 듯이 말이다.유강후에게서 나는 삼나무 향이 온다연을 완전히 감쌌다. 온다연은 그의 향기가 호흡을 통해 폐까지 가득 들어찬 뒤 온몸으로 뻗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안에서 싹을 틔울 것 같기도 했다.온다연은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 본능적으로 그의 향기를 맡지 않기 위해 손으로 자신의 코와 입을 막았다. 그러나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조금 전 문에 부딪혀 팔에 빨갛게 움푹 파여 들어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심지어 살갗이 까지고 멍이 파랗게 들어있었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는 소파에 던져졌고 한 번 튀어 올랐다가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온다연은 주우려고 몸부림쳤지만 유강후는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차갑게 말했다.“한 번만 더 함부로 움직이면 지금 당장 바다에 던져버리겠어.”그러자 온다연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유강후가 어떤 성격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은 거의 전부 다 좋은 결말이 없었다.유강후가 바다에 던지겠다면 정말 던질 것이다.온다연이 가만히 있자 유강후는 옆에 있는 서랍에서 작은 약상자를 꺼내 소파 쪽으로 그녀를 끌고 가며 말했다.“앉아.”온다연은 그 작은 구리 상자를 보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유강후가 정말 상자를 바다에 던질까 봐 어쩔 수 없이 얌전히 앉아 있었다.“자. 손을 들어봐.”온다연은 순순히 손을 들었다.그녀는 옅은 파란색 잠옷 치마를 입었다. 치마의 소매는 팔꿈치에 닿았고 하얀 팔뚝만 드러났고 다소 보수적이었다.부드러운 조명이 그녀의 하얀 피부를 비추자 수정처럼 맑고 윤기가 났다.하얀 피부 때문에 다친 곳은 더 아찔하게 보여졌다.유강후는 이미 파랗게 멍든 곳을 누르면서 차갑게 말했다.“아파?”온다연의 관심은 온통 그 작은 상자에 쏠려 있었기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아니요.”사실 그녀는 정말 별로 아프지 않았다. 적어도 아까 맞았을 때와 비교하면 이 정도 고통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안 아픈 건가?’유강후의 시선은 아래로 향했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 진흙이 조금 묻은 작은 상자를 발견하고 차갑게 말했다.“또 쳐다보면 버리겠어.”온다연은 그제야 황급히 고개를 돌려 긴장한 표정으로 유강후를 쳐다보고는 말도 하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다.유강후는 상처가 난 곳에 소염제를 바르고 붕대로 상처 부위를 감았다.약을 바를 때 온다연은 아파서 얼굴을 찡그렸고 손도 떨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유강후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붕대를 감았고 시선은 그 반창고에 멈췄다.일반 반창고보다 조금 크고 귀여운
술이 준비된 곳으로 걸음을 옮기니, 사람이 조금 뜸했다.진시현은 유강후의 팔을 조심스럽게 놓으며 공손하게 말했다.“대표님, 우리가 이렇게 있으면 사모님께서 보시고 오해하시는 건 아닐까요?”유강후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는 지금까지 잘 해왔어.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오늘 맡은 역할만 제대로 해.”그는 방금 전 험담을 늘어놓던 사람들 쪽을 아주 잠깐 바라보더니 차가운 말투로 덧붙였다.“아까 수군거리던 사람들 찍어서 이권에게 보내서 처리하게 해.”진시현은 즉시 대답했다.“네, 대표님.”그녀가 살짝 고개를 들며 긴장된 표정을 띠었다.“김원도가 왔습니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다시 유강후의 팔을 친밀하게 잡고, 그의 몸에 기댔다.애교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강후 씨, 저 조금 추워요.”유강후는 손짓하자마자 누군가 부드러운 캐시미어 숄을 가져왔다.그는 직접 숄을 집어 들고 진시현의 어깨에 다정하게 걸쳐주었다.그리고 숄을 걸쳐주며 살짝 몸을 기울여, 마치 그녀에게 입을 맞추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조심해. 저 근처에도 몇 명이 있어.”진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대답했다.“네, 대표님.”그때 김원도가 다가왔다.그는 진시현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유 대표, 이분은 누구지?”유강후는 진시현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김씨 집안 사람이라면 강씨 집안의 휘장을 모를 리가 없겠지. 내 약혼녀야.”김원도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쓰다듬으며 낮게 웃었다.“유 대표는 정말 복이 많네.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곁에 있으니 오늘 밤에도 많은 여성분들이 마음 아파하겠어.”유강후는 김원도의 말을 무시한 채, 시선을 그에게서 돌려 방금 막 들어온 다른 남자를 바라보았다.그 남자는 김원도와 닮았지만, 그의 음험한 기운은 전혀 없었다.그는 유강후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원도에게 다가갔다.“형, 형도 여기 있었어?”김원도는 얼굴빛이 변하며 말했다.“김원혁, 네가 왜
비밀스럽게 진행되었지만, 결국 소문은 새어 나갔고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해 질 무렵, 유강후와 진시현이 뉴월드 호텔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그 자리는 단숨에 술렁거렸다.유강후는 말할 것도 없이 경원시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그는 권력자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인물로, 그의 출현은 곧바로 주목을 끌었다. 연회 주최자인 주경한은 유강후를 보자마자 반갑게 달려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유 대표님,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요즘 많이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제 연회에 참석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그가 한 발짝 더 다가서며 유강후의 옆에 서 있는 진시현에게 눈길을 돌렸다.그리고 단번에 그녀의 가슴 위에 달린 블루 사파이어 브로치를 알아차렸다.조명 아래에서, 브로치 가장자리의 Y 모양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주경한은 이 바닥에서 감각이 빠르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그는 한눈에 이것이 강씨 집안의 여주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임을 알아차리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 이분이 바로 사모님이시군요!”그러나 유강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단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주경한은 이미 소문으로 유강후가 요즘 한 아가씨를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그녀가 강씨 집안 여주인의 물건을 사용할 정도라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혹시 유 대표님, 곧 결혼이라도 하시려는 건가요?”유강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곧 합니다.”주경한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그럼 제가 빨리 축의금을 준비해야겠네요.”그는 진시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온다연 씨 되시죠? 대표님께서 아주 각별히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진시현은 유강후를 살짝 바라보았다.그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아니요, 저는 진시현입니다.”주경한은 순간 멈칫했지만, 곧 웃음을 터뜨렸다.“아, 맞다, 진시현 씨. 제가 착각했네요. 두 분, 안으로 들어가시죠
장화연의 얼굴에는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사모님, 도련님을 믿으셔야 합니다.”그 말은 온다연의 추측이 사실임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온다연의 심장은 순간적으로 꽉 조여들었고, 마치 뒤틀려버린 밧줄처럼 고통스러워 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그래서, 정말로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는 거네요.”장화연은 말했다.“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모님과 우림 도련님의 안전과도 관련이 있는 일이에요. 도련님께서는 사모님께서 걱정하실까 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하셨지만, 저는 사모님께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이 점점 더 무서워질 만큼 하얗게 질려가는 것을 본 장화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누군가 사모님의 안전을 담보로 도련님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 며칠 동안 도련님은 밖에 나가 사모님처럼 보이는 사람을 일부러 꾸며냈어요. 그렇게라도 설명해 드리면 조금은 나아지실까요?”장화연은 유강후 곁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며 그의 모든 행적을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다.그렇기에 그녀의 말은 묵직한 신뢰를 주었고, 때로는 유강후를 대신해 발언하는 권위도 있었다.온다연은 그런 그녀의 말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하지만 그 전화.그녀가 그렇게 오래 들었던 그 전화가 정말 거짓일 수 있을까?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강후 씨의 휴대폰을 다른 사람이 받을 수 있나요?”장화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사모님,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모든 건 도련님께서 돌아오신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워낙 복잡하니, 타인들의 이간질에 넘어가지 마세요.”그녀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제가 우림 도련님을 데려오겠습니다. 오늘 밤은 사모님께서 아이와 함께 주무세요.”곧 예쁜 아기가 방으로 안겨 들어왔다.아이가 들어오는 순간, 온다연은 조금이나마 마음이 평온해지는 걸 느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곤히 잠든 얼굴을 쓰다듬으며, 이마에 부드럽게
그는 수년 동안 유강후의 곁에서 그의 냉혹한 수완을 지켜보며 살아왔다.하지만 이번만큼은 유난히 매섭고 강렬했다.김씨 집안은 동양국에서 가장 유명한 재벌 중 하나로 손꼽혔다. 그런데 불과 한 달 만에 몰락했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하고 말았다.이 과정에서 소요된 막대한 자금과 수단, 그리고 상업계에 불어닥친 폭풍우 같은 소란은 평범한 이들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이번 사건은 그가 유강후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그리고 또 한 가지 확실히 깨닫게 했다.앞으로는 정말로 의지할 대상을 찾는다면, 온다연을 선택하는 게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거라는 사실을.온다연의 방.장화연은 따뜻한 우유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온다연이 침대 모서리에 웅크린 채 몰래 눈물을 훔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방 안의 부드러운 조명 아래, 온다연의 빨갛게 부은 눈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녀는 분명 울고 있었다.장화연은 우유를 내려놓고 그녀 옆에 조용히 앉았다.“사모님, 도련님이 보고 싶으신 거예요?”온다연은 고개를 저으며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강후 씨가 왜 오늘 오지 않는 거죠? 정말 회사에서 회의 중인 걸까요?”장화연은 따뜻한 우유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악몽을 꾸셨죠? 이거 마시면 좀 나아질 거예요.”온다연은 우유를 받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강후 씨 오늘 너무 심했어요. 저한테 한 달간 휴학하라고 했어요. 이유는 단지 염지훈이 제 선생님이라는 것뿐인데, 저랑 상의도 없이 제 수업을 멋대로 중단시켰어요.”“원래는 그 사람과 크게 싸우려고 했어요. 하지만 우리가 결혼도 했고, 아기까지 있으니 앞으로는 모든 일을 잘 상의하며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참았어요. 그런데 강후 씨는...”온다연은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낮게 속삭였다.“혹시 다른 여자가 생긴 걸까요? 강후 씨는 다를 거라고 믿었는데, 결국 다른 재벌 자제들과 다를 게 없었네요
유강후는 온다연이 악몽에 시달린 줄 알고 가슴 아파하며 물었다.“다연아, 악몽 꿨어?”온다연은 가볍게 답하고선 말을 이었다.“다른 여자랑 같이 있는 꿈을 꿨어요.”하루 종일 전전긍긍하던 유강후는 온다연의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다른 여자랑 있을까 봐 걱정됐어? 꿈에서도 내 생각뿐이네?”온다연이 물었다.“어디에 있는지 왜 대답 안 해요?”“회사에서 미팅 중이었어. 아마 이틀 동안 바빠서 못 갈 거야. 아이랑 같이 잘 지낼...”“강후 씨.”온다연은 그의 말을 끊었고 곧바로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거짓말하고 있잖아요. 옆에 다른 여자 있죠?”유강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온다연의 흐느끼는 목소리에서는 그녀의 기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아까 전화했을 때 다 들었어요. 다른 여자랑...”온다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유강후는 그녀가 또 악몽을 꾼 줄 알고 걱정된 마음으로 장화연에게 전화를 걸었다.곧이어 핸드폰 너머로 장화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련님?”유강후는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지금 당장 다연이가 있는 방으로 가봐. 방금 통화했는데 악몽을 꿨는지 울고 있었어.”장화연이 답했다.“지금 바로 가볼게요.”“일이 복잡해져서 당분간은 못갈지도 몰라. 다연이랑 우림이 잘 돌봐줘. 절대 밖에 나가게 해서는 안 돼.”“알겠습니다.”“차라리 우림이를 옆에 데려다줘. 아이랑 같이 자면 마음이 편해질 거야.”“그럴게요.”장화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제 경호원을 통해서 들었는데 다연 씨가 나은별 씨를 만났다고 합니다. 아마 그때 안 좋은 얘기를 들었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다연 씨는 힘든 일을 마음속에 담아두는 분입니다. 도련님께 대한 오해가 생겼다면 그 마음을 달래는 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모릅니다. 두 분 어렵게 여기까지 온 만큼 서로에게 그 어떤 오해도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도련님, 나은별 씨가 무슨
부검 결과 여자는 죽기 직전에 성폭행을 당했고 체내에서 5개의 DNA가 검출되었다.대역은 온다연처럼 보이기 위해 평소 그녀가 입는 것과 똑같은 옷을 입었다.유강후는 온다연과 매우 닮은 그 얼굴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멘탈이 무너졌다.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는 내면 깊숙이 잠재되어 있던 공포과 패닉을 느꼈다.만약 죽은 사람이 정말 온다연이라면 유강후는 자신이 어떤 미친 행동을 저지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전례 없는 살인 충동이 밀려왔고 그는 김원도와 김씨 가문의 뼈까지 가루로 만들리라 다짐했다.위험하고 불안함 밤이 시작되었다. 수십 대의 헬기와 수많은 경찰이 동시에 파견되어 한옥 주변의 모든 곳을 샅샅이 수사했다.하지만 효과는 미미했고 전문 킬러라서 그런지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유강후는 한옥에 들어온 이후로 밖에 나가지 않았다.그럼에도 여전히 누군가 그의 핸드폰으로 사진을 보내왔다.사진에 찍힌 사람은 그와 진시현인데 얼굴 정면이 아주 선명하게 찍혔다.실리콘 가면을 쓴 진시현의 얼굴은 온다연과 똑같았다.이건 과시가 아니라 경고다.말할 것도 없이 유강후는 단번에 사진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알아챘다.김원도는 언제든지 죽일 수 있으니 사진 속의 여자를 잘 지키라고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다.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 유강후는 외투를 옆으로 던져놓고 다시 소파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이권은 진시현에게 차 한 잔 타오라고 시켰다.“도련님,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다연 씨는 안전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그쪽으로 이동하는 게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그는 홍차를 유강후에게 건넸다.“며칠 동안은 외출을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통화도 줄이시고요. 현재로서는 모두가 안전하는게 가장 중요합니다.”이권의 말이 매우 일리가 있고 사실이지만 유강후는 귀에 거슬렸다.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기도 했다. 김원도 한 명으로도 충분히 혼란스러운데 똑같은 인간이 여러 명이 나타났다면 온다연을 지켜줄 수 있을까?걱정은 자
온다연과 매우 흡사해 보이는 여자가 그들에게 공순하게 인사하며 말을 건넸다.“대표님, 방금 전화가 여러 통 왔는데 이 비서님이랑 안에서 회의 중이셔서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유강후는 곧바로 핸드폰을 확인했고 그곳에는 온다연이 걸어온 부재중전화가 찍혀있었다.한 시간 전에 걸려 온 전화였다.유강후는 시간을 확인했고 지금은 새벽 3시 45분이다.이때 이권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다연 씨가 도련님이 보고 싶은가 봐요.”줄곧 정색하던 유강후는 그제야 표정이 조금 풀렸고 곧바로 온다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핸드폰은 꺼져있었다.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옷걸이에서 코트를 빼내더니 곧장 밖으로 걸어갔다.이때 이권이 말렸다.“도련님, 안 됩니다. 저희를 지켜보는 시선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지 않습니까. 다연 씨 쪽은 안전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 집사도 옆을 지키고 있으니 안심하세요.”“우림 도련님도 그쪽으로 보냈습니다. 도련님이 옆에 계시니 다연 씨의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을 겁니다.”유강후는 입술을 깨물었고 눈빛에 드러난 분노와 원망은 점점 더 짙어졌다.‘김원도, 내 손으로 널 죽여버릴 거야.’금융위기가 닥쳤을 때도 유강후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고 결코 발을 빼거나 물러선 적이 없었다.그런데 이제는 김원도 때문에 피하는 신세가 되었다.게다가 아내와 아이의 목숨으로 위협하고 있으니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죽여버릴 거야.’물론 김원도도 좋은 날만 보낸 건 아니다.불과 한 달 만에 미래그룹은 김씨 가문의 시장 점유율 70%를 먹어 치웠고 김신 그룹은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인지도가 조금이라도 있는 기업이라면 미래 그룹과 김신 그룹이 대치 상황이라는 걸 눈치챘기에 아무도 섣불리 김신 그룹의 손을 잡지 않았다.김신 그룹의 주가는 한순간에 폭락하였고 보름도 채 안 되어 시가총액이 3분의 1로 줄어들었다.그뿐만 아니라 동양국의 다른 가문에서는 김씨 가문의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다.더불어 김원도의 아버지는 자신에게 혼외 자식이 두
두 경호원은 온다연의 신분을 알고 있었고 더욱이 그녀가 유강후의 목숨과도 다름없다는 사람인 걸 알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사모님.”집에 돌아와 보니 장화연도 있었다.게다가 아이를 데리고 함께 이곳으로 왔다.온다연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최근에 공부하느라 바쁜 데다가 저녁에는 유강후와 함께 시간을 보냈으니 며칠 동안 아이에게 다가갈 틈이 없었다.온다연은 유강후가 왜 그녀와 아이를 이곳에 데려왔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장화연은 한옥의 인테리어를 바꾸려고 하는데 페인트 냄새가 아이한테 안 좋을 것 같아 이곳에 잠깐 머무는 거라고 설명해 줬다.비록 의심이 들었지만 별생각은 하지 않았다.사실 아이가 옆에 있다면 어디에서 지내던 그녀에게는 똑같았다.온다연은 아이가 잠들 때까지 놀아줬고 늦은 시간이 되었지만 유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한편으로는 유강후가 제멋대로 휴학 신청을 한 게 너무 화가 났다.염지훈이 교수로 온 게 온다연의 잘못도 아닌데 왜 갑자기 수업을 못 듣게 하냐는 말이다.생각하면 할수록 터무니없고 불합리한 결정이다.그러다가 잠이 든 온다연은 잠결에 옆을 만졌고 텅 비어 있는 느낌에 공허함이 밀려와 괴로웠다.온다연은 핸드폰을 꺼내 유강후와의 카톡 대화창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진지하게 얘기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고민 끝에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여러 번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네 번째 시도를 했을 땐 통화가 연결됐으나 들려오는 건 여자의 목소리였다.온다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환청이 들리는 건가 싶어 귀를 의심했다.“누구세요?”그러자 전화가 바로 끊겼다.온다연은 굴하지 않고 다시 걸었지만 유강후는 받지 않았다.숨이 막혀온 온다연은 잘못 들은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다시 한번 걸었을 때 통화가 연결됐고 이상한 기계음이 흘렀다.그러고선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선명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희미한 남자의 목소리는 유강후가 틀림없다.그들이 나눴던 사랑처럼 핸드폰 너머로는 서로에게 엉켜있는
온다연은 나은별의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 그녀의 얼굴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있다면 기뻐해야 하지 않나요? 왜 은별 씨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죠?”온다연은 유강후가 설명해 줬던 당시의 상황과 더불어 문득 이상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평소 안전하기로 소문난 바다였는데 왜 갑자기 상어가 나타나 인간을 공격했을까?온다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나은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그 사람이 살아있는 걸 원하지 않나 봐요? 아니면 그 죽음이 은별 씨와 연관이 있는 건가?”사실 모든 건 온다연의 추측에 불과했는데 나은별은 생각지도 못한 반응을 보이더니 손을 들어 그녀를 때리려고 했다.온다연은 단번에 팔을 뻗어 나은별의 손목을 잡았고 동시에 따귀를 날렸다.뺨 때리는 소리가 울리자 룸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나은별은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로 사악한 눈빛을 드러냈다.“재민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어떻게 그 죽음이 저랑 연결됐다고 얘기할 수가 있죠? 심보가 고약하니까 이런 터무니없는 추측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거예요. 마음 좀 곱게 먹으세요.”온다연은 피식 보고선 태연하게 말했다.“사랑하는 사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면 그 타이밍에 강후 씨와 결혼하려고 발악했을까요?”“처음부터 은별 씨는 한재민을 좋아한 게 아니잖아요. 단지 뱃속에 있는 아이한테 그럴듯한 아빠를 찾아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온다연은 말하면서 무심코 소이섭을 쳐다봤다.그런데 뜻밖에도 소이섭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온다연, 또 헛소리하면 내가 너 가만두지 않을 거야.”소이섭이 화를 내며 온다연을 향해 손을 뻗었다.다행히 경호원이 다가와 소이섭의 손목을 잡으며 경고했다.“미리 충고드리는데 그쪽은 저한테 상대가 안 됩니다. 정말 사모님을 때리실 겁니까?”유강후의 경호원은 하나같이 특전사에 버금갔기에 소이섭은 본인이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할 수 없이 그저 온다연을 째려보며 말했다.“은별이는 지금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