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어둠 속에서 보이는 발코니 위의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순간, 그녀는 여러 해 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은 열등감이 다시금 되살아났다.그녀는 수많은 밤을 이렇듯 어둠 속에 몰래 서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미물과 같은 자세로 마음속 태양을 바라보곤 했다.그 시절의 그녀는 언젠가 유강후의 품에 안겨 입술을 맞출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꿈에서도 해본 적 없는 상상이었다.하지만 그날이 실제로 찾아왔을 때, 그녀는 어쩐지 슬픈 기분이 들었다. 잠시 거리가 가까워졌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그녀는 비참한 장난감일 뿐이고, 여전히 어둠 속에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재일 뿐이었다.온다연은 유강후가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담배를 몹시 힘겹게 피우는 것처럼 보였다. 주황빛 불꽃은 희미하게 빛나다가 금세 사라졌다.한 개비를 다 피울 즈음, 나은별이 뒤에서 나타나 그를 껴안았다. 그러다가 나은별이 먼저 그를 놓아주었고, 두 사람은 무언가를 이야기하다가 곧 집 안으로 들어갔다.온다연은 멍하니 서서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산 정상의 바람은 거세었고 눈도 많이 내렸다. 마치 이 눈이 그녀 마음속의 상처로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그녀는 점점 그 상처가 아프게 느껴졌다. 이 고통은 어린 시절 심미진이 그녀를 버렸을 때보다 더 심했다.온다연은 밝게 빛나는 창문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유강후가 전화를 받았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부드러웠다.“왜 이 시간까지 안 자고 있었어?”눈보라 속에서 온다연은 추위에 몸을 떨며 휴대폰을 꽉 쥐었다.“아저씨 어디예요? 저 잠이 안 나와요. 아저씨 보고 싶어요.”유강후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갑지 않았다.“볼 일이 있어서 나왔어. 오늘은 못 돌아가. 얼른 자고 내일 아침에 보자. 네가 깨어날 때 쯤에는 집에 있을 거야.”온다연은 가슴이 답답했다. 휴대폰을 쥔 손은 관절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었다.‘
염지훈은 눈썹을 튕기며 온다연의 어깨를 감쌌다.“이런 집 좋아해?”“별 보이는 지붕이 엄청 예쁠 것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이랑 누워서 별 보면 로맨틱할 것 같지 않아요? 가을의 노을도, 겨울의 눈도 예쁠 거예요.”“안목 좋네. 우리 형한테 부탁하면 여기 집 알아보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닌데, 말해줄까?”온다연은 시선을 거두며 담담하게 말했다.“아니에요. 저한테 무슨 자격이 있다고...”이런 곳은 나은별처럼 재벌가 출신의 사람만 지낼 자격 있었다. 어둠 속에서 피어난 잡초 같은 그녀는 당연히 자격이 없었다.염지훈은 미소를 거두고 그녀의 이마를 작게 튕겼다.“무슨 소리를 아는 거야? 별걸 다 자격으로 나누고 있어.”온다연은 말없이 손난로를 얼굴에 댔다.“지훈 씨 술 좋아해요? 제가 술 사줄까요?”“나한테 뭐 해줄 돈 없다며?”온다연은 시선을 숙이며 담담하게 말했다.“술 살 돈은 있어요. 갈래요?”염지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눈은?”지금 내리는 눈은 전부 심장에 떨어지는 것 같아서 아프던 참이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차에 올라타며 말했다.“안 봐요. 이만 돌아가요.”염지훈도 당연히 그녀의 이상을 보아냈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온다연은 항상 이상한 여자였기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차는 금방 돌아서 산기슭에 도착했다. 그리고 온다연 집 근처에 있는 거리로 향했다.눈 오는 날에도 이곳은 사람 냄새를 물씬 풍겼다. 그들은 자그마한 야장에 들어가 술안주를 주문했다.어두컴컴한 조명 속에서 사장은 온다연에게 친절하게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그러게요. 오랜만이에요.”사장은 빠르게 움직이면서 온다연의 곁에 있는 남자를 힐끗 봤다.“이쪽은 남자친구예요? 잘 생겼네요.”온다연은 싱긋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염지훈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주변을 빙 둘러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나한테 사준다는 게 이런 거였어?”온다연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며 말했다.“안 먹겠으면 구경이나 해요. 저는
그는 키가 헌칠하고 몸집도 큰 편이어서 작은 소파가 그에게는 너무 비좁아 한 쪽 다리를 구부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러니 시각적으로는 다리가 더 길어 보였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다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 속 담겨있는 깊은 뜻은 점점 짙어만 갔다.한참 뒤 온다연이 유리잔 두 개를 찾아내 끓인 맥주를 따라주자,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기가 네 집이야?”따뜻한 수증기가 피어오르자 온다연의 눈이 스르르 풀렸다. 그녀는 산에서 내려온 후 지금까지 정신이 매우 혼란스러웠고, 머릿속은 생각들이 마구 엉켜있어 끊임없이 윙윙거리며 두통에 시달렸고 그녀가 한 말과 행동은 모두 본능에 맡겨있었다.그런데 지금 따스한 술기운에 취해 눈가가 촉촉해졌고 가슴이 답답하며 무디게 아팠다.그녀는 뜨거운 맥주를 한 모금 크게 마신 후 가슴이 점차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지훈 씨는 이렇게 초라한 곳은 처음이죠?”그녀는 한 층의 얇은 스웨터만 입고 있었고, 베이지색은 그녀의 우유 같은 피부색을 더 희게, 칠흑 같은 머릿결을 더 검게 받침 해 주었고, 빨갛고 도톰한 입술은 마치 키스를 유도하는 것처럼 매혹적으로 느껴졌다.그녀가 현재 입고 있는 옷은 모두 유강후가 직접 골라준 것이었고, 품질과 디자인 모두 최상급이었으며 딱 봐도 가격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이런 차림을 한 온다연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주변의 낡고 허름한 환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이제 술을 좀 마시더니 손바닥만 한 얼굴이 보기 좋게 홍조를 띠고 또렷하고 촉촉한 눈망울도 너무나 사랑스러웠다.염지훈의 노골적인 시선에도 그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술잔을 들고 한 모금 더 마셨다.“와서 드셔보세요. 맥주를 이런 방법으로 끓이니까 또 다른 별미에요.”염지훈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온다연은 무언가가 생각난 듯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 깜빡했네요, 지훈 씨도 명문 가문에서 나온 도련님이니깐 이렇게 싼 음식은 먹어본 적이 없으시죠? 하지만 가끔 드
염지훈은 가슴이 약간 뭉클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유씨 가문에 얼마나 있었어?”온다연은 손을 빼내고 술을 한 모금 더 마시며 담담하게 말했다.“기억 안 나요,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거의 돌아가지 않았어요.”염지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녀를 보며 가슴이 깊게 아파졌다.“네 친이모는 널 상관 안 해?”온다연은 멈칫하더니 가슴이 욱신거렸고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아마 나의 존재가 그녀를 힘들게 했을걸요. 내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겠죠.”염지훈은 또 물었다.“이 셋집을 구한지 얼마 됐어?”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염지훈은 그녀를 꼿꼿이 쳐다보며 말했다.“4, 5년 됐니?”다른 건 말할 것도 없고, 이 작은 전기 히터만 해도 꽤 오래된 것이었다. 다른 가구들은 전에 살던 주민이 남긴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전기 히터는 틀림없이 그녀가 산 것이었다.이렇게 낡을 때까지 썼으니 최소 4, 5년은 되었다.즉, 온다연은 열다섯 살 무렵부터 밖에서 혼자 살아왔다.온다연은 대답 대신 술잔을 들고 천천히 한 모금을 다 마신 후 입을 열었다.“염지훈 씨, 만약 저의 처지가 초라하다고 느껴지시면 앞으로 저를 상대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곳은 확실히 좀 작고 형편없으니깐요.”염지훈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그녀를 한참 바라본 후에야 말했다.“유씨 가문이 널 신경 쓰지 않는데, 그럼 유강후는 왜 또 널 그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는 거지?”유강후라는 세 글자에 온다연은 시선을 내리깔며 침착하게 말했다.“제가 밖에서 죽어버리면 유씨 가문의 체면에 손상될까 봐 그랬나 보네요.”염지훈은 그녀의 술잔을 가져가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나랑 사귀자, 다연아. 내가 널 잘 돌볼 수 있어.”온다연은 그가 이런 말을 꺼낸 사실이 전혀 놀랍지 않다는 듯 그를 한 눈 가볍게 쳐다보고는 조용히 말했다.“그럼 유하령 씨와의 결혼은요? 그녀를 실망하게 할 건가요?”염지훈은
잠시 어리둥절해진 온다연은 상황 파악이 되자 등골이 오싹했다.‘망했어!’그녀는 원래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고작 맥주를 조금 마시고 잠이 들것은 예상하지 못했다.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 그녀는 염지훈과 하룻밤을 같이 보낸 셈이니,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유강후라면 충분히 그녀를 토막 낼 수 있었다.유강후는 소유욕이 매우 강한 편이라 그가 자신의 물건이라고 생각되면, 좋아하지 않는 물건이라도 그의 태그를 붙이는 순간부터 절대 다른 사람이 손을 대도록 허락하지 않는 사람이었다.특히 지금은 그녀에게 조금 관심 있는 상태여서, 그녀가 다른 남자와 밤새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홧김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다.또 밤새 함께 있는 남자의 신분은 그의 친조카의 남자 친구인 염지훈이어서 사태는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그는 아마 그녀를 목 졸라 죽일 것이었다.염지훈도 문 두드리는 소리에 부스스 깨어났고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어느 버릇없는 놈이 아침부터 문을 두드리고 난리야.”온다연은 목소리를 낮추어 경고했다.“목소릴 낮춰요, 제 아저씨예요!”염지훈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웃긴 상황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온다연을 쳐다보았다.“너 쫄았어? 너도나도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하룻밤 같이 지내면 뭐 어때? 기껏해야 나보고 너에게 책임지라고 하겠지. 뭐가 그렇게 당황스러워?”그때, 입구에서 또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무겁게 문을 두드려댔다.온다연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골치가 아파 일어나 여기저기 둘러보고 창밖도 내다보았다.염지훈은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나보고 여기서 뛰어내리라고? 네 아저씨가 그렇게 무서워?”온다연은 눈이 번쩍 뜨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뛰어도 돼요?”하지만 그녀는 여기가 4층이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안돼, 안돼...”이때 문을 더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성난 남성의 목소리와 함께 들려왔다.“야, 온다연!”유강후의 목소리에는 이미 노기가 서려 있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급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염지훈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손을 뻗어 빗장을 당기려고 했다.온다연은 체념한 듯 조용히 눈을 감았고 머릿속엔 온통 잠시 후에 벌어질 처참한 사태와 피투성이인 두 사람을 그리고 있었다.그런데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뚝 그쳤고 곧이어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염지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온다연, 오늘 이후 나에게 합리적인 설명을 하는 게 좋을 거야.”온다연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듣고 긴장 때문에 팽팽했던 신경이 단번에 홀가분해졌다. 그녀는 염지훈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지훈 씨, 미안해요. 그리고 어젯밤에 같이 있어 줘서 고마웠고, 제가 신세 진 셈 쳐요.”부드러운 목소리 속에는 약간의 불안감도 있는 듯했다.염지훈은 조금 겁먹은 그녀의 모습이 마치 잘못을 저질러 선생님에게 혼난 초등학생 같아 마음이 약해졌다.“온다연, 넌 열 살도 열다섯 살도 아닌 스무 살이야, 너에겐 연애할 권리가 있어, 네 아저씨는 널 평생 신경 쓸 수 없잖아.”온다연은 눈을 내리깔고 가볍게 “네”라고 대답했다.염지훈은 지금 그녀의 얌전한 모습이 어젯밤에 같이 술을 마신 온다연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고, 잠시 생각해 보아도 어느 때가 진짜 온다연의 본모습인지 알 수 없었다.그런데 어느 모습이든 다 사람의 마음을 짠하게 했다.그는 ‘쯧’하고는 어두운 눈매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리 와.”온다연은 그를 쳐다만 보다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몰라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염지훈은 앞으로 몇 발짝 나아가 그녀를 살포시 안아주며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말했다.“기억해 둬, 네가 나에게 얼마나 많은 신세를 졌는지. 첫째, 나는 살면서 지금까지 어제처럼 아무 이유 없이 누구와 시간을 함께한 적이 없었고, 둘째, 나는 이렇게 누군가를 피해 다니며 지낸 적이 없어.”온다연은 그를 밀어내고 걱정스러운 듯 문 쪽을 바라보았다.“어서 가봐요. 그는 이따가 꼭 다시 돌아
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겁고 숨 막히는 공기 속에서 사람을 익사시킬 듯한 아슬아슬한 기운이 감돌았다.유강후의 얄팍한 입술이 극도의 분노에 딱딱하고 차갑게 굳어졌고, 소파에 웅크리고 있는 온다연을 바라보는 눈에는 검은 노기가 새어 나올 정도로 짙었다. 그는 그녀의 가는 목을 비틀어 꺾고 싶은 무서운 충동을 간신히 억제했다.‘아무도 감히 나를 거역하지 못했어, 아무도!’어제저녁에 그녀의 전화를 받고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껴 다시 걸었을 때는 이미 전원이 꺼져 있는 상태였다.서둘러 한 집의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돌아왔을 때, 장화연은 죽은 듯이 자고 있었고, 온다연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장화연은 수년 동안 그의 곁에서 근무했고 이렇게 큰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자기 전 온다연이 준 우유를 한 잔 마셨을 뿐이다.‘그녀는 일부러 그랬어, 무조건 고의야!’눈보라가 휘몰아치던 밤, 그는 지난번에 그녀가 부딪혔던 광경을 떠올리며 이와 같은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이유 없는 공포와 분노로 이성의 끈을 놓아버릴 뻔했던 그의 첫 반응은 심미진이 있는 병원을 찾았다.하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자신의 셋방에서 술과 구운 음식들을 즐기고 있었다.그는 예리한 눈빛으로 한사코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그 창백하고 갸름한 얼굴은 인형같이 정교하고 연약해 보였고, 칠흑 같은 눈매는 수줍음과 솔직한 감정을 담고 있었지만, 이 여리여리한 외모 아래 숨겨진 센 고집은 유강후만이 알고 있었다.그는 곁눈질로 탁자 위의 술잔을 보았다.‘두 개.’그 외에 테이블 위에는 여러 가지 술병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그 위에 놓인 시계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그의 눈빛이 돌연히 얼음장같이 차가워지더니 안에 검은색의 악기가 보일락말락 하였다.그는 걸어가 그 시계를 집었다.PK의 클래식 남성용 기계 시계였고 예매 값은 26억 원에 달하며, 한정판으로 전 세계에 도합 10개밖에 안 되었고, 그중 1개는 현재 그의 캐비닛에 보관되어 있었다.그는 눈을 감고 한
은빛이 도는 반지가 그의 손에 끼어 있었는데, 사이즈가 그에게 조금 큰 것 같았고, 반지 위에는 ‘ㅇㅂ’라는 글자가 보일 듯 말 듯 새겨져 있었다.‘ㅇㅂ’, 나은별의 초성이었다.‘반지에 이름을 새길 정도로 가까워지셨나?’가슴에서 다시 강렬한 통증이 전해지면서 팔다리로 조금씩 퍼져 나갔고, 나중에는 뼛속까지 아픔이 스며드는 듯했다.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며 얼굴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유강후는 고집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가둬두었던 마음속의 맹수가 곧 제압을 뚫고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온다연, 한 번만 기회를 더 줄게, 누가 네 남자 친구야?”“잘 생각하고 대답해, 만약 답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과도 네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거야.”가시 돋친 말과 떨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온다연이 한눈만 올려다봐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 수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자신의 고통에 이성을 잃어 이를 악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차피 아저씬 아니니까 신경 좀 꺼주세요.”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갑자기 그에게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고, 몇 걸음 만에 침실 입구에 도착했다.‘쿵!’ 하는 소리와 함께 유강후가 발로 걷어차자 침실 문이 그대로 열렸다.그리고 온다연을 큰 힘으로 침대에 내동댕이쳤다.다음 순간, 그의 큰 몸이 그녀를 완전히 덮어 버렸다.얇은 옷감은 너무나도 쉽게 벗겨졌고 차가운 공기에 여린 피부가 노출되자 온다연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아저씨!”그러나 유강후는 못 들은 척 눈시울을 붉히며, 그녀의 머리를 누르고 입술을 거의 물어뜯듯이 키스했다.무언가를 의식한 듯 버둥거리던 온다연은 단 몇 번 만에 완전히 제압당했다.유강후는 한 손으로 그녀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에 구속하고,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벨트를 풀어 거칠게 땅바닥에 던졌다.그녀는 질겁하여 눈을 크게 뜨고 빌어댔다.“싫어요, 제발 하지 마세요! 제발!”그녀가 용서를 비는 나른한 목소리와 희고 부드러운 몸결이 강렬한 독약처럼 유강후를 자극했고, 시간은
집에 들어선 후, 유강후는 시원한 연고를 가져와 온다연에게 발라주었다.그런데 장화연이 어쩌다 이 장면을 보게 될 줄이야. 온다연은 한순간 얼굴을 들 수가 없었고, 밥도 먹지 않고 숨어 있었다.유강후도 너무 후회되어 그녀를 끌어안고 한참을 달랬다.저녁에 아기 보러 병원에 갈 때까지 이 상황은 계속됐다. 아이의 상태가 좋아진 것을 보고 온다연은 그제야 겨우 화를 풀었다.이튿날 아침 유강후가 침실에서 나오니 이권이 벌써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셋째 도련님, 인터넷을 좀 보세요. 온다연 씨가 인터넷 스타가 됐어요.”유강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인터넷 스타라니, 무슨 소리야?”이권은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건넸다.“일단 보세요. 제가 처리하고 있긴 하지만, 실검을 세 번이나 눌렀는데도 상황이 정리가 안 돼요.”‘상간녀가 보석 가게에서 본처를 때렸다’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라가 있었고, 그 아래에 비슷한 댓글이 가득 달렸다.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동영상을 열었다.어제 온다연이 보석 가게에서 나은별과 싸우는 장면이었다.동영상만 보면, 확실히 온다연이 먼저 때렸다. 게다가 온다연은 날뛰고 있고, 나은별은 한 번도 반격하지 않은 채 처참하게 맞는 모습이었다.동영상은 온다연이 나은별을 때리는 데서부터 시작돼 조아영이 그녀를 끌어낼 때까지 1분여 동안 지속됐다.중간에 편집 흔적이 전혀 없어 딱 봐도 원본 영상이었다.‘좋아요’가 600만 개 이상, 리트윗이 300만 개 이상에 달하고, 댓글 창은 온통 욕하는 말들로 도배됐다.[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상간녀가 이렇게 대놓고 날뛰어도 되는 거야?][이건 너무 심하잖아. 상간녀가 누군지 신상 털어!][진짜 뻔뻔스럽군. 유부남을 꼬신 주제에 감히 이렇게 날뛰다니. 이 여자와 부모의 신상을 털어 온 가족이 고개를 쳐들고 다니지 못하게 해야 해.][본처가 진짜 나약하네. 내가 저 여자라면 그 자리에서 상간녀 머리를 부숴버렸을 거야.][상간녀가 어려 보이는
유강후는 좀 세게 때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너무 심한 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고작 몇 번 때린 것이 이렇게 빨갛게 부어오를 줄은 몰랐다.“많이 아파? 집에 가서 약을 바르자.”‘당연히 아프죠.’온다연은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지 못할 정도로 아프고 몹시 서러웠다.“화를 내도 된다면서요... 아저씨는 말한 대로 하지 않고 전혀 신용을 지키지 않아요.”유강후는 어이없었다.“화를 내도 된다고 했지, 반지를 던져도 된다고는 하지 않았어. 오늘은 세게 때린 것도 아니야. 또 한 번 반지를 던지고 나랑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때는 아예 의자에 앉지 못하게 엉덩이를 부숴버릴 거야.”온다연도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기에 고개를 숙이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그녀는 한참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아저씨도 저를 때렸으니 맞비긴 셈이에요. 만약 아이를 보지 못하게 하면, 저도 아저씨의 점수를 깎아버리고 영원히 보지 않을 거예요.”유강후는 걸어가면서 말했다.“이렇게 말을 잘 듣는데 왜 아기를 못 보게 하겠어? 오늘 나한테 순순히 반지를 끼워준 것을 봐서 벌을 취소할게.”“하지만 그 점수라는 게 뭔지 나한테 알려줘.”온다연은 그의 어깨에 엎드려 통증을 참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아저씨만 저를 벌할 수 있는 줄 알아요? 저도 아저씨를 벌할 수 있어요.”유강후는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무슨 벌인데?”온다연이 코웃음을 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저한테 점수를 적는 공책이 있어요. 모두 100점인데, 아저씨가 잘하면 가산점이 붙고 잘못하면 감점이 돼요.”그녀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원래 70점이었는데, 20점 깎여서 지금 50점이에요. 0점 혹은 마이너스 점수가 되면 저는 아저씨를 버릴 거예요.”유강후는 웃음을 참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 하면 가산점이 붙고, 어떻게 하면 감점이 되는지 말해봐.”온다연이 정색하며 말했다.“예를 들면, 그웬을 데려다 아기를 살린 것은 589점, 주희를 구한 것은 50점, 저에게 불고기를 만들어준 것은
그는 손을 내밀고 반지를 보며 느릿느릿 말했다.“네가 자발적으로 나한테 반지를 끼워줬잖아. 반지를 끼워준 건 프러포즈한 것과 같으니, 앞으로 네가 나를 책임져야 해.”온다연은 그의 말을 들으며 어딘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그의 강요에 못 이겨 끼워준 것인데, 어떻게 그녀가 프러포즈한 것이 되는지?그녀는 눈을 비비며 울먹거렸다.“아저씨가 끼워달라고 했잖아요.”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살짝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그게 그거지. 별 차이 없어. 내가 끼워달라고 말했더니 네가 바로 끼워줬잖아. 이게 자발적인 것이 아니고 뭐니?”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알지만, 아이를 못 보게 할까 봐 걱정인 온다연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유강후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반지도 꼈으니 결혼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온다연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혼인신고를 해야 결혼했다고 볼 수 있다.하지만 결혼반지를 나눠 껴도 결혼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부부가 된 거니까.그녀가 말을 하지 않자, 유강후는 눈빛이 흔들리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네가 프러포즈했고 내가 받아줬으면 결혼한 것이나 다름없어. 결혼했으면 영원히 서로의 곁에 있어야 하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 안 돼. 알았지?”온다연은 뭔가 잘못된 것 같으면서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결혼했으면 둘이 같이 잘 지내야 한다.그녀는 눈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약간 서러웠다.“다시는 나은별을 만지면 안 돼요. 저는 그 여자가 싫어요.”그녀는 또 한마디 덧붙였다.“살짝 닿는 것도 안 돼요.”“만나도 3m 거리를 유지해야 해요.”유강후는 그녀가 덫에 걸린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화제를 돌렸다.“아까 나은별이 너한테 어쨌길래 머리가 터질 정도로 쳤어? 온통 유리 조각이던데, 손은 다치지 않았어?”유강후는 말하면서 온다연의 손을 당겨다 자세히 검사했다.그는 그녀의 희고 보드라운 손에 상처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유강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아무리 화가 나도 반지를 버리거나 결혼 문제를 가지고 장난치면 안 돼. 알았어?”온다연은 일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가 허리를 꽉 잡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제가 아니라 아저씨가 장난쳤잖아요. 아직도 나은별을 마음에 담고 있어요?”그녀는 너무 서러웠다.“아직도 그 여자가 좋으면, 아기를 데리고 떠날 테니 그 여자랑 사세요!”유강후는 화가 나면서도 웃겼다.“내가 언제 나은별을 생각했다고 그래? 뭘 보고 이러는 거야? 내가 나은별을 잡아당긴 것 때문에?”온다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은별이 유강후의 품에 기대어 있던 것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 여자를 안고 있었잖아요. 가슴에 기대고 있던데요.”유강후는 웃음이 나왔다. 알고 보니, 질투하는 것이었다.어린 것이 질투심은 왜 이렇게 강한지?“질투 났어?”온다연은 몹시 화가 났다.“누가 질투해요? 놔요. 저는 갈래요.”유강후는 그녀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으며 이를 악물었다.“내가 언제 나은별을 안았고, 언제 내 몸에 기대게 했는데? 똑똑히 말해봐.”그는 나은별을 바닥에서 잡아당겨 일으킨 후 온다연이 바로 폭발했던 기억밖에 없다.이 말을 들은 온다연은 더욱 화가 나서 얼굴까지 빨개졌다.“아저씨가 그 여자를 안았고, 그 여자가 아저씨 품에 기대어 있는 것을 똑똑히 봤는데도 인정하지 않을 거예요? 아저씨는 이제 불합격이에요. 미워요. 이거 놔요.”발버둥 치다가 방금 맞은 곳을 건드렸다. 얼얼한 통증에 그녀는 눈물이 핑 돌았고, 엉겁결에 손으로 맞은 곳을 가렸다.유강후는 그녀의 동작을 보고 방금 너무 세게 때려서 부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그녀의 몸을 뒤집은 후, 치마를 올리고 살펴보려 했다.온다연은 그가 또 엉덩이를 때리려는 줄 알고 놀라서 그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그만 때려요. 아파요.”“반지를 주워 왔잖아요. 또 때리면 다시는 당신을 안 볼 거예요.”유강후는 손을 빼며 말했다.“붓지 않았는지 보려고
유강후는 괴로워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참았다.“10일.”“온다연, 너 계속 이러면 아기 퇴원하는 날에도 못 볼 줄 알아.”그 말을 듣고 얼어붙은 온다연은 재빨리 그의 손을 놓았다.유강후가 어떤 사람인지 온다연은 알고 있다. 정말 그를 화가게 한다면 아마 한 달 동안 아기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온다연은 어쩔 수 없이 분노를 꾹 참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고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억울해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심하게 때려서 그런지 유강후는 온다연의 걷는 자세가 살짝 잘못된 걸 발견했다.하지만 결혼반지를 던지고 걷어찼던 행동을 생각하면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했다.온다연은 울며 겨자 먹기로 문을 열었는데 밖에는 수많은 경호원들이 서 있었다.이권도 그곳에 있었지만 감히 나서서 말을 건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엉덩이를 맞은 걸 모든 사람이 들었다고 생각하니 분하면서도 수치스러웠다그러나 반지를 주워 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유강후가 아기로 협박을 하니 그의 장단에 맞춰주는 게 현재로서는 최선이다.온다연은 유강후에 대한 호감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전에는 70점이었다면 이제는 50점밖에 되지 않았다.온다연은 씩씩거리며 눈물을 닦고선 마지못해 바닥에 있는 반지를 주웠다.온다연이 휴게실로 돌아오자 유강후는 자연스레 손을 내밀었다.“끼워줘.”그 모습은 어찌나 무자비하고 싸늘한지 마치 인정머리 없는 제왕 같았다.온다연은 화가 나서 반지를 다시 던져 버리고 싶었지만 아기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울분을 참으며 유강후에게 반지를 끼웠다.유강후는 반지를 한번 꼼꼼히 확인하더니 스크래치가 없는 걸 보고선 마음속의 분노가 절반 가라앉았다.그는 자리에 앉아 온다연을 품에 끌어안았다.“뭘 잘못했는지 알겠어?”온다연은 대답하기 싫은 듯 고개를 숙이고 계속 눈물을 닦았다.온다연의 빨갛게 부은 눈과 눈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보니 유강후도 마음이 반쯤 풀렸다. 그는 손을 뻗어 온다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네가 말해봐.
유강후는 그저 말없이 가만히 온다연을 쳐다봤고 온다연은 그의 손에 피가 날 정도로 세게 깨물고서야 힘을 풀었다.유강후는 곧바로 다시 그녀의 부드러운 엉덩이를 내리쳤다.심지어 전보다 더 무자비해졌다.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온다연은 목 놓아 울부짖었다.“미워요. 이거 놓으란 말이에요.”“날 때릴 자격이 없잖아요.”유강후는 얼굴빛 변한 온다연을 보고선 가슴이 아픈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또 함부로 버릴 거야?”온다연은 유강후가 미워 죽을 것 같았다. 울분이 치밀어 올라 더욱이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버릴 거예요. 평생 찾지 못하게 바다에 던질 거라고요. 때려죽이든 마음대로 해요.”일말의 작은 연민은 온다연의 말에 순식간에 사라졌다.유강후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손까지 떨었다.결혼반지라는 중요하고 소중한 물건을 함부로 버렸으면서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온다연이 이해되지 않았다.유강후는 손을 들어 세게 두 번 정도 내리쳤다.전보다 훨씬 힘을 주어서 그런지 온다연은 괴로움에 손발을 마구 휘저으며 숨이 넘어갈 지경으로 울었다.울면서도 잊지 않고 유강후를 비난했다.“분명히 은별 씨 편을 들었으면서...”“차라리 때려죽여요. 그러면 은별 씨랑 결혼해도 되잖아요.”“우리 이제 그만해요.”...온다연이 말할수록 유강후의 분노는 더욱 커져갔고 끝내 또 세게 때렸다.분노와 두려움, 공포와 고통의 감정이 뒤섞이자 저도 모르게 주한의 이름이 튀어나왔다.“너무 아파... 주한아, 나 좀 도와줘.”“그만 때려요.... 아픈단 말이에요.”...유강후의 손은 허공에 굳어버렸다.주한... 온다연은 주한에게 도움을 청했다.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유강후는 숨이 멎을듯한 고통이 찾아왔다.“방금 뭐라고 했어?”온다연은 심하게 울부짖은 탓에 목소리가 잔뜩 쉬었다.“뭐라 하든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요. 아저씨는 나 괴롭히고 때릴 줄밖에 모르잖아요. 싫어요. 아저씨같은 사람이랑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거 놔요.”유강후는 이마에 핏줄이 솟을
온다연은 유강후에게 안긴 방금 전의 상황이 왠지 모르게 민망했다.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으니 마치 유강후가 키우는 고양이나 심심할 때 가지고 노는 장난감과 별반 다를게 없는 느낌이었다. 수치심과 분노가 한꺼번에 몰려온 온다연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싫어요.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유강후는 고집불통인 온다연의 모습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눈앞에 있는 반지는 그가 이 생에 받은 것 중에 가장 소중하고 아끼는 물건이다. 이런 마음도 모른 채 온다연은 필요 없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바닥에 내팽개쳤다.마치 누군가가 그의 심장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발로 여러 번 짓밟는 격이다.유강후는 머리가 피가 쏠릴 정도로 화가 나서 소리쳤다.“주우라고.”온다연은 유강후가 화난 걸 알았지만 그녀도 같은 상황이기에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분명히 나은별을 밀어낼 수 있었음에도 유강후는 기댈 수 있게 팔을 내어주었다.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그렇게 신경이 쓰이는 거면 차라리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온하랑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떨었다.“싫어요. 그리고 제가 나은별 씨를 먼저 때렸어요. 아저씨가 아끼는 사람을 때려서 가슴이 아파요? 그럼 다시 날 때리면 되겠네.”유강후는 점점 더 화가 치밀었다.“네가 언제 가슴 아프다고 했어?”욕하고 때리는 건 얼마든지 해도 되지만, 유독 이 반지를 떨어뜨린 건 용납할 수 없었다.이건 그의 마음과 진심을 짓밟는 것과 다름없는 해동이다.“주워서 깨끗하게 닦아.”유강후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온다연 마음속의 작은 화산이 완전히 폭발하였고 곧바로 눈앞의 반지를 발로 차버렸다.“주울 생각 없어요. 그리고 이렇게 싼 반지는 아저씨한테 어울리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나은별 씨한테 더 비싼 거로 사달라고 하세요.”온다연의 발차기에 반지는 더 멀리 날아갔다.유강후는 너무 화가 나서 목의 핏줄이 터져 나올 정도로 으르릉거렸다.“온다연, 넌 오늘 혼 좀 나야겠다.”그
나은별은 손톱이 살을 피고들 정도로 주먹을 불끈 쥐며 나지막하게 말했다.“강후 씨, 이제 내 말은 믿지도 않는 거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다연 씨가 먼저 손쓴 걸 봤는데도 여전히 내 문제라는 거야?”유강후는 그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싸늘한 시선으로 조아영을 바라봤다.“조세진이 그쪽 아버지?”조아영은 극심한 고통에 식은땀을 흘렸지만 차마 유강후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맞아요.”유강후의 말투는 단호했다.“아버지한테 전해. 파산할 거니까 미리 마음 준비하라고.”조아영은 너무 놀라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울부짖었다.“대표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유강후는 무자비했다.“들리는 그대로야. 오늘부터 조씨 가문은 너 때문에 파산하게 될 거야. 기대해.”조아영은 고개를 번쩍 들고 마지막으로 발악했다.“분명히 저 여자가 먼저 때렸는데 왜 우리가 이런 불이익을 받아야 하죠?”유강후의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먼저 때렸다고? 그래서 뭐? 내가 있는 한 다연이가 사람을 때려죽여도 잘했다고 칭찬할 거야. 너 같은 인간을 수없이 많이 봤어. 내가 너보다 지위가 낮았다면 그런 표정이랑 행동으로 말했을까?”이런 사람에게 더 이상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유강후는 곧바로 경호원에게 말했다.“은별이는 병원으로 데려가고, 다른 사람 전부 다 내보내. 당장.”나은별은 씩씩거리며 말했다.“강후 씨, 이럴 필요까지는 없잖아.”유강후는 못 들은 척 무시하고선 뒤를 돌아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며 경호원에게 말했다.“내가 왔을 때 여기에 사람이 남아있으면 너희들도 끝장인 줄 알아.”경호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답했다.“네, 도련님.”나은별은 멀어지는 유강후의 훤칠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고 눈에서는 악의가 번쩍였다.‘유강후, 날 이렇게 대한다는 거지? 두고 봐, 나도 더는 안 참아.’경호원들은 나은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의무적으로 그녀를 부축했다.“얼른 가시죠. 도련님이 분부했으니 저희는
유강후는 밀어내고 싶었지만 나은별을 중심을 잡지 못하는 듯 계속 비틀거렸다.밀어내려고 할수록 나은별은 그의 옷을 한사코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온다연의 눈에 비친 이 장면은 마치 서로에게 감정이 남아있는 연인 같았다.순간 어려서부터 각별한 사이로 자라온 소꿉친구 사이에 제3자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고 생각했다.나은별의 말대로 유강후는 어쩌면 일시적인 감정 때문에 지금처럼 행동하는 걸 수도 있다.온다연은 주먹을 불끈 쥐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내가 때렸어요. 왜요? 가슴 아파요?”그 말에 화가 난 유강후는 목소리마저 가라앉았다.“온다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온다연은 싸늘하게 웃었다.“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당사자가 제일 잘 알겠죠.”이때 반지를 수정하려고 자리를 잠깐 비운 직원이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수정된 반지와 함께 걸어왔다.“다연 씨, 요청하신 대로 수정이 완료되었습니다.”온다연은 번쩍 돌리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이제 필요 없으니까 환불해 줘요.”유강후는 화가 치밀어 몸을 떨었다.“그러기만 해봐.”온다연은 시선은 여전히 그의 팔에 기대어있는 나은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두 사람 결혼해요. 아주 천생연분이네.”그 말을 한 뒤 직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환불해 줘요. 이제 필요 없어졌거든요.”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 직원은 정석대로 안내했다.“죄송합니다. 이니셜이 새겨진 특별 제작한 반지라 환불이 불가합니다.”화를 주체할 수 없었던 온다연은 앞으로 걸어가더니 반지를 집고 땅바닥에 내던졌다.“그럼 버릴게요.”단단한 반지가 바닥에 닿자 몇 미터 높이로 튕겨 나갔다가 다시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유강후는 자신이 더없이 아끼고 사랑하는 물건이 버려지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몸을 떨었다.그는 단호하게 말했다.“온다연, 당장 주워.”온다연은 차가운 표정으로 힐끗 보고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분노로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된 유강후는 단번에 나은별을 밀어내고 앞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