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염지훈과는 별로 친하지 않아서 말을 길게 늘어놓기 불편했다. 그녀는 그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밤에 마시면 살찔까 봐서요.”“뭐? 얼굴이 내 손바닥보다도 작으면서, 유강후 씨 참 사람 보살필 줄 모르네. 나였으면 적어도 70kg은 만들었을 거야.”“70kg요? 그러면 저 정방형 되는 거 아니에요?”“하하, 건강하면 됐지.”염지훈은 우유를 빼앗아 들더니 직접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한 입만 마셔봐. 달콤해서 맛있을 거야.”온다연은 속는 셈 치고 조금만 마셔봤다. 그러고는 금방 눈을 반짝이며 한 모금 더 마셨다. 상상하던 우유 맛과 달리 훨씬 고소하고 달콤했다.이때 염지훈이 컵을 다시 가져가서 온다연이 썼던 빨대로 한 모금 마셨다.“괜찮네. 다들 좋아할 만해.”말을 마친 그는 다시 우유를 온다연에게 건네줬다. 하지만 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받아서 들지 않았다.그는 불쾌한 듯 말했다.“왜, 내가 입 댄 거라 싫어?”“조금요.”“입 댄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알아서 해. 만약 버리면 너도 같이 버릴 줄 알아.”온다연은 그를 바라보지 않고 빨대를 빼냈다. 그리고 뚜껑을 열고 그 채로 마셨다.“정말 맛있어요. 이렇게 맛있는 우유를 어떻게 버리겠어요.”그녀는 우유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홀짝대는 걸 보니, 이런 우유는 처음 먹어보는 듯했다.염지훈은 손을 뻗어 그녀의 입술에 묻은 거품을 닦아내 혀끝으로 스쳤다.“이렇게 하면 더 맛있지.”온다연은 귀 끝이 빨개졌다. 그녀는 컵을 꽉 잡으며 말했다.“마시고 싶으면 가져가서 마셔요. 왜 이러는 거예요...”염지훈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처음 마셔보는 것처럼 구는 게 귀여워서.”염지훈이 보기에 너무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온다연은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이런 우유가 처음이긴 해요.”“유강후가 이런 것도 안 먹여? 설마 몸에 안 좋다고?”온다연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컵을 꽉
낯설고도 가벼운 감정이지만, 염지훈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온다연을 가엾게 여긴다는 것을 말이다.이 연약해 보이는 소녀는 재벌가에서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보다 못한 삶을 겪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귀 뒤로 넘겨주며 물었다.“너 혹시 유씨 집안에서 구박받았어?”이 말을 들은 온다연은 몸을 흠칫 떨다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니요.”관찰력이 뛰어난 염지훈은 그녀의 작은 몸짓과 표정 변화를 전부 보고 있었다. 그녀의 부정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유강후는 꽤 잘해주는 것 같던데? 네가 사는 그 집도 아끼는 곳이라며. 평소에는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는다고 들었어. 널 그곳에 머물게 한 걸 보면 신경 쓴다는 뜻 아닐까?”유강후가 언급되자, 온다연은 또다시 마음이 아팠다. 차 안에는 바람이 불지 않았고 난방도 빵빵한 데 한기가 느껴져서 몸을 떨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이제 산에 가서 눈을 볼 수 있을까요?”염지훈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다가 손도 대지 않은 가방에 신경이 쏠렸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또다시 알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왠지 모르겠지만, 그는 온다연을 볼 때마다 불쌍하다고 느꼈다. 진정으로 마음이 아픈 불쌍함이었다.그는 그녀가 유씨 집안에서 이토록 힘들게 살고 있을 줄 몰랐다. 그래서 괜히 간식을 담은 가방을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편의점에 있는 건 이런 것들뿐이야. 먹거리랑 손난로는 꼭 챙겨. 필요할 거야.”말을 마친 그는 차를 출발시켰다.가는 길 동안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서로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산기슭에 도착했을 때, 온다연이 물었다.“영운산 정상에 별 보이는 지붕이 있는 별장이 있나요?”염지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대답했다.“이제 막 지어진 그 집? 아직 공식적으로 판매되지 않았을걸? 하지만 팔리기 시작해도 쉽게 살 수 없을
온다연은 어둠 속에서 보이는 발코니 위의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순간, 그녀는 여러 해 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은 열등감이 다시금 되살아났다.그녀는 수많은 밤을 이렇듯 어둠 속에 몰래 서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미물과 같은 자세로 마음속 태양을 바라보곤 했다.그 시절의 그녀는 언젠가 유강후의 품에 안겨 입술을 맞출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꿈에서도 해본 적 없는 상상이었다.하지만 그날이 실제로 찾아왔을 때, 그녀는 어쩐지 슬픈 기분이 들었다. 잠시 거리가 가까워졌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그녀는 비참한 장난감일 뿐이고, 여전히 어둠 속에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재일 뿐이었다.온다연은 유강후가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담배를 몹시 힘겹게 피우는 것처럼 보였다. 주황빛 불꽃은 희미하게 빛나다가 금세 사라졌다.한 개비를 다 피울 즈음, 나은별이 뒤에서 나타나 그를 껴안았다. 그러다가 나은별이 먼저 그를 놓아주었고, 두 사람은 무언가를 이야기하다가 곧 집 안으로 들어갔다.온다연은 멍하니 서서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산 정상의 바람은 거세었고 눈도 많이 내렸다. 마치 이 눈이 그녀 마음속의 상처로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그녀는 점점 그 상처가 아프게 느껴졌다. 이 고통은 어린 시절 심미진이 그녀를 버렸을 때보다 더 심했다.온다연은 밝게 빛나는 창문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유강후가 전화를 받았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부드러웠다.“왜 이 시간까지 안 자고 있었어?”눈보라 속에서 온다연은 추위에 몸을 떨며 휴대폰을 꽉 쥐었다.“아저씨 어디예요? 저 잠이 안 나와요. 아저씨 보고 싶어요.”유강후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갑지 않았다.“볼 일이 있어서 나왔어. 오늘은 못 돌아가. 얼른 자고 내일 아침에 보자. 네가 깨어날 때 쯤에는 집에 있을 거야.”온다연은 가슴이 답답했다. 휴대폰을 쥔 손은 관절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었다.‘
염지훈은 눈썹을 튕기며 온다연의 어깨를 감쌌다.“이런 집 좋아해?”“별 보이는 지붕이 엄청 예쁠 것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이랑 누워서 별 보면 로맨틱할 것 같지 않아요? 가을의 노을도, 겨울의 눈도 예쁠 거예요.”“안목 좋네. 우리 형한테 부탁하면 여기 집 알아보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닌데, 말해줄까?”온다연은 시선을 거두며 담담하게 말했다.“아니에요. 저한테 무슨 자격이 있다고...”이런 곳은 나은별처럼 재벌가 출신의 사람만 지낼 자격 있었다. 어둠 속에서 피어난 잡초 같은 그녀는 당연히 자격이 없었다.염지훈은 미소를 거두고 그녀의 이마를 작게 튕겼다.“무슨 소리를 아는 거야? 별걸 다 자격으로 나누고 있어.”온다연은 말없이 손난로를 얼굴에 댔다.“지훈 씨 술 좋아해요? 제가 술 사줄까요?”“나한테 뭐 해줄 돈 없다며?”온다연은 시선을 숙이며 담담하게 말했다.“술 살 돈은 있어요. 갈래요?”염지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눈은?”지금 내리는 눈은 전부 심장에 떨어지는 것 같아서 아프던 참이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차에 올라타며 말했다.“안 봐요. 이만 돌아가요.”염지훈도 당연히 그녀의 이상을 보아냈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 온다연은 항상 이상한 여자였기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차는 금방 돌아서 산기슭에 도착했다. 그리고 온다연 집 근처에 있는 거리로 향했다.눈 오는 날에도 이곳은 사람 냄새를 물씬 풍겼다. 그들은 자그마한 야장에 들어가 술안주를 주문했다.어두컴컴한 조명 속에서 사장은 온다연에게 친절하게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그러게요. 오랜만이에요.”사장은 빠르게 움직이면서 온다연의 곁에 있는 남자를 힐끗 봤다.“이쪽은 남자친구예요? 잘 생겼네요.”온다연은 싱긋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염지훈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주변을 빙 둘러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나한테 사준다는 게 이런 거였어?”온다연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며 말했다.“안 먹겠으면 구경이나 해요. 저는
그는 키가 헌칠하고 몸집도 큰 편이어서 작은 소파가 그에게는 너무 비좁아 한 쪽 다리를 구부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러니 시각적으로는 다리가 더 길어 보였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다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 속 담겨있는 깊은 뜻은 점점 짙어만 갔다.한참 뒤 온다연이 유리잔 두 개를 찾아내 끓인 맥주를 따라주자,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기가 네 집이야?”따뜻한 수증기가 피어오르자 온다연의 눈이 스르르 풀렸다. 그녀는 산에서 내려온 후 지금까지 정신이 매우 혼란스러웠고, 머릿속은 생각들이 마구 엉켜있어 끊임없이 윙윙거리며 두통에 시달렸고 그녀가 한 말과 행동은 모두 본능에 맡겨있었다.그런데 지금 따스한 술기운에 취해 눈가가 촉촉해졌고 가슴이 답답하며 무디게 아팠다.그녀는 뜨거운 맥주를 한 모금 크게 마신 후 가슴이 점차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지훈 씨는 이렇게 초라한 곳은 처음이죠?”그녀는 한 층의 얇은 스웨터만 입고 있었고, 베이지색은 그녀의 우유 같은 피부색을 더 희게, 칠흑 같은 머릿결을 더 검게 받침 해 주었고, 빨갛고 도톰한 입술은 마치 키스를 유도하는 것처럼 매혹적으로 느껴졌다.그녀가 현재 입고 있는 옷은 모두 유강후가 직접 골라준 것이었고, 품질과 디자인 모두 최상급이었으며 딱 봐도 가격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이런 차림을 한 온다연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주변의 낡고 허름한 환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이제 술을 좀 마시더니 손바닥만 한 얼굴이 보기 좋게 홍조를 띠고 또렷하고 촉촉한 눈망울도 너무나 사랑스러웠다.염지훈의 노골적인 시선에도 그녀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술잔을 들고 한 모금 더 마셨다.“와서 드셔보세요. 맥주를 이런 방법으로 끓이니까 또 다른 별미에요.”염지훈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온다연은 무언가가 생각난 듯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 깜빡했네요, 지훈 씨도 명문 가문에서 나온 도련님이니깐 이렇게 싼 음식은 먹어본 적이 없으시죠? 하지만 가끔 드
염지훈은 가슴이 약간 뭉클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유씨 가문에 얼마나 있었어?”온다연은 손을 빼내고 술을 한 모금 더 마시며 담담하게 말했다.“기억 안 나요,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거의 돌아가지 않았어요.”염지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녀를 보며 가슴이 깊게 아파졌다.“네 친이모는 널 상관 안 해?”온다연은 멈칫하더니 가슴이 욱신거렸고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이내 다시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아마 나의 존재가 그녀를 힘들게 했을걸요. 내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겠죠.”염지훈은 또 물었다.“이 셋집을 구한지 얼마 됐어?”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염지훈은 그녀를 꼿꼿이 쳐다보며 말했다.“4, 5년 됐니?”다른 건 말할 것도 없고, 이 작은 전기 히터만 해도 꽤 오래된 것이었다. 다른 가구들은 전에 살던 주민이 남긴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전기 히터는 틀림없이 그녀가 산 것이었다.이렇게 낡을 때까지 썼으니 최소 4, 5년은 되었다.즉, 온다연은 열다섯 살 무렵부터 밖에서 혼자 살아왔다.온다연은 대답 대신 술잔을 들고 천천히 한 모금을 다 마신 후 입을 열었다.“염지훈 씨, 만약 저의 처지가 초라하다고 느껴지시면 앞으로 저를 상대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곳은 확실히 좀 작고 형편없으니깐요.”염지훈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그녀를 한참 바라본 후에야 말했다.“유씨 가문이 널 신경 쓰지 않는데, 그럼 유강후는 왜 또 널 그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는 거지?”유강후라는 세 글자에 온다연은 시선을 내리깔며 침착하게 말했다.“제가 밖에서 죽어버리면 유씨 가문의 체면에 손상될까 봐 그랬나 보네요.”염지훈은 그녀의 술잔을 가져가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나랑 사귀자, 다연아. 내가 널 잘 돌볼 수 있어.”온다연은 그가 이런 말을 꺼낸 사실이 전혀 놀랍지 않다는 듯 그를 한 눈 가볍게 쳐다보고는 조용히 말했다.“그럼 유하령 씨와의 결혼은요? 그녀를 실망하게 할 건가요?”염지훈은
잠시 어리둥절해진 온다연은 상황 파악이 되자 등골이 오싹했다.‘망했어!’그녀는 원래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고작 맥주를 조금 마시고 잠이 들것은 예상하지 못했다.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 그녀는 염지훈과 하룻밤을 같이 보낸 셈이니,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유강후라면 충분히 그녀를 토막 낼 수 있었다.유강후는 소유욕이 매우 강한 편이라 그가 자신의 물건이라고 생각되면, 좋아하지 않는 물건이라도 그의 태그를 붙이는 순간부터 절대 다른 사람이 손을 대도록 허락하지 않는 사람이었다.특히 지금은 그녀에게 조금 관심 있는 상태여서, 그녀가 다른 남자와 밤새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홧김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랐다.또 밤새 함께 있는 남자의 신분은 그의 친조카의 남자 친구인 염지훈이어서 사태는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그는 아마 그녀를 목 졸라 죽일 것이었다.염지훈도 문 두드리는 소리에 부스스 깨어났고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어느 버릇없는 놈이 아침부터 문을 두드리고 난리야.”온다연은 목소리를 낮추어 경고했다.“목소릴 낮춰요, 제 아저씨예요!”염지훈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웃긴 상황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온다연을 쳐다보았다.“너 쫄았어? 너도나도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하룻밤 같이 지내면 뭐 어때? 기껏해야 나보고 너에게 책임지라고 하겠지. 뭐가 그렇게 당황스러워?”그때, 입구에서 또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무겁게 문을 두드려댔다.온다연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골치가 아파 일어나 여기저기 둘러보고 창밖도 내다보았다.염지훈은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나보고 여기서 뛰어내리라고? 네 아저씨가 그렇게 무서워?”온다연은 눈이 번쩍 뜨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뛰어도 돼요?”하지만 그녀는 여기가 4층이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안돼, 안돼...”이때 문을 더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성난 남성의 목소리와 함께 들려왔다.“야, 온다연!”유강후의 목소리에는 이미 노기가 서려 있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급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염지훈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손을 뻗어 빗장을 당기려고 했다.온다연은 체념한 듯 조용히 눈을 감았고 머릿속엔 온통 잠시 후에 벌어질 처참한 사태와 피투성이인 두 사람을 그리고 있었다.그런데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뚝 그쳤고 곧이어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염지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온다연, 오늘 이후 나에게 합리적인 설명을 하는 게 좋을 거야.”온다연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듣고 긴장 때문에 팽팽했던 신경이 단번에 홀가분해졌다. 그녀는 염지훈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지훈 씨, 미안해요. 그리고 어젯밤에 같이 있어 줘서 고마웠고, 제가 신세 진 셈 쳐요.”부드러운 목소리 속에는 약간의 불안감도 있는 듯했다.염지훈은 조금 겁먹은 그녀의 모습이 마치 잘못을 저질러 선생님에게 혼난 초등학생 같아 마음이 약해졌다.“온다연, 넌 열 살도 열다섯 살도 아닌 스무 살이야, 너에겐 연애할 권리가 있어, 네 아저씨는 널 평생 신경 쓸 수 없잖아.”온다연은 눈을 내리깔고 가볍게 “네”라고 대답했다.염지훈은 지금 그녀의 얌전한 모습이 어젯밤에 같이 술을 마신 온다연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고, 잠시 생각해 보아도 어느 때가 진짜 온다연의 본모습인지 알 수 없었다.그런데 어느 모습이든 다 사람의 마음을 짠하게 했다.그는 ‘쯧’하고는 어두운 눈매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리 와.”온다연은 그를 쳐다만 보다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몰라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염지훈은 앞으로 몇 발짝 나아가 그녀를 살포시 안아주며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말했다.“기억해 둬, 네가 나에게 얼마나 많은 신세를 졌는지. 첫째, 나는 살면서 지금까지 어제처럼 아무 이유 없이 누구와 시간을 함께한 적이 없었고, 둘째, 나는 이렇게 누군가를 피해 다니며 지낸 적이 없어.”온다연은 그를 밀어내고 걱정스러운 듯 문 쪽을 바라보았다.“어서 가봐요. 그는 이따가 꼭 다시 돌아
자연스레 유강후도 주성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곧바로 흰머리 한두 가닥을 보게 되었다.그는 겁에 질린 채로 재빨리 다가가 온다연의 손목을 잡고 흔들었다.“다연아.”그러나 온다연은 여전히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유강후는 그녀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아직 뜨거웠다.가슴을 쥐어뜯듯 고통이 밀려왔다.유강후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모든 상황을 설명해 줬고 심지어 아이까지 보여줬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지를 몰랐다.이때 주성원이 입을 열었다.“다연 씨의 현재 상태는 매우 심각합니다.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돌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네요.”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실대로 말했다.“대표님, 병원에 데려가 정밀검사를 받는 게 어떠신지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위에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 자칫하다가 암으로 발전될 수도 있으니 검사를...”유강후는 고개를 휙 돌렸다.“뭐라고요?”주성원은 말을 이었다.“장난으로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 일만 30, 40년 해왔는데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다연 씨는 위에 문제가 생긴 게 확실합니다.”“왜 이렇게 짧은 시간에 상태가 악화된 거죠? 불과 한두 달밖에...”순간 유강후의 머릿속에는 막연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어쩌면 온다연이 아이가 없어진 걸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그저 이런 추측이 스쳐 지나갔을 뿐, 곧바로 그에게 부정을 당했다.유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다연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시잖아요. 굉장히 내성적이고 뭐든 속에 담아두는 성향이에요. 제가 아무리 옆에서 달래도 절대 입을 열지 않거든요. 아마 최근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이렇게 된 것 같네요.”“혹시 다연이의 입을 열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주성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이건 대표님이 공들여 유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연 씨는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 어쩌면 마음의 병을 앓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대화를 최대한 많이 하는 게 좋습니다. 속에 담아둔
온다연은 심장이 도려내는 듯한 고통에 비틀거리며 비웃었다.“대면이라뇨? 이번에는 또 어떤 연극을 하려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협조하길 원하는 거죠?”그녀는 천천히 침대 위 아이를 바라보았다.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요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의 맑은 눈동자가 보였다.아이는 참으로 순하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 아이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었다.그녀의 마음은 누군가 마구잡이로 흔들어대는 것처럼 아팠다.내장이 모두 뒤틀리는 듯한 통증에 온다연은 견딜 수 없었다.지금 당장이라도 유강후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왜 자신의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는지, 그리고 침대 위의 이 아이는 누구의 아이인지.하지만 만약 지금 모든 것을 폭로한다면, 유강후가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쩌겠는가?그가 침대 위의 아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상상만으로도 두려웠다.유강후는 차갑고 냉혹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아이 하나 없애는 건 그에게 아무것도 아닐 터였다.온다연이 아이를 보며 움직이지 않자 유강후는 다가와 아이를 품에 안고 그녀의 앞으로 걸어왔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이 깼어. 안아 줘.”그는 아이를 온다연에게 건네려 했다.하지만 온다연은 받아들이지 않고 유강후를 밀쳐냈다.“꺼져요. 내 앞에서 위선 떠는 거 짜증 나니까!”그녀의 목소리가 다소 컸는지라 놀란 아이는 ‘와아’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던 유강후는 아이를 그녀에게 억지로 넘기려 했다.두 사람의 실랑이 끝에 결국 아이는 품에서 벗어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순간 두 사람 모두 얼어붙었다.온다연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아이를 안아 올려 다친 곳이 있는지 확인했다.다행히 방바닥에는 두툼한 카펫이 깔려 있었고 아이도 옷을 두껍게 입고 있어 크게 다치지 않았다.그러나 충격을 받은 아이는 더욱 크게 울기 시작했다.온다연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달랬다.그러나 왜인지 평소에는 얌전했던 아이가 이번에는 좀처럼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유강후는 장화연에
“내가 낳은 아이라고요?”온다연은 유강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그의 영혼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어떻게 거짓말을 하면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수 있지? 난 대체 얼마나 어리석었길래 이 사람의 모든 행동을 사랑이라 믿었고 진심이라고 여겼던 걸까?’갑자기 온몸이 지치는 듯한 피로감에 휩싸이더니 온다연은 차갑게 말했다.“아저씨, 나 속이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요?”유강후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빛에 잠깐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널 속인 적 없어.”“속인 적 없다고요?”온다연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앞에 섰다.눈빛이 마치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을 평가하듯 차갑고 날카로웠다.유강후의 몸에 커다란 구멍이라도 뚫으려는 듯 온다연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웃음소리는 점점 커졌고 마침내 눈물까지 흘러내렸다.“속인 적 없다니... 아저씨, 아저씨 입에서 진실된 말이 단 하나라도 나온 적이 있긴 해요?”“하늘을 걸고 맹세해봐요. 날 속인 적 없다고. 정말 진실만 말했었다고요!”“할 수 있겠어요?”그녀는 한 번도 이렇게까지 감정을 폭발시킨 적이 없었다.목이 터질 듯 외치는 모습은 보는 사람마저 불안하게 만들었다.하여 유강후는 온다연의 이마에 손을 대며 물었다.“어디 아픈 거 아니야? 주성원 선생님 부를까?”“손 치워요!”온다연은 그의 손을 세게 쳐내며 격렬히 숨을 몰아쉬었다.‘참을 만큼 참았어.’다정하면서도 유강후의 몸에서는 여전히 달달한 향수 냄새가 났다.역겨웠다. 정말 끔찍하게 역겨웠다.그와 얽혔던 모든 기억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그녀의 심장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온다연은 유강후를 밀쳐냈다.“아저씨는 정말 역겨워요. 진짜 끔찍해요!”순간 유강후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창백한 온다연의 얼굴을 보며 그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온다연, 지금 무슨 말 하고 있는지 알아? 방금 한 말 당장 취소해.”그러자 온다연은 차가운 웃음을
“예전에는 작은 도련님을 앞에 데려다만 놓으면 꼭 안아서 놓으려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만지려고도 하지 않아요.”잠시 망설이던 장화연이 이어 말했다.“사모님이 아마 이 아이가 자기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아버린 것 같아요.”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유강후는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그리고 장화연은 떨어진 핸드폰을 주워 건네며 말했다.“차라리 이제 사실을 사모님에게 말하는 게 어때요?”유강후는 마음이 죄어드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안 돼. 견디지 못할 거야. 정말 죽을 만큼 아파할 거라고...”장화연은 한숨을 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이제는 제 말을 믿지도 않고 제게 응답도 하지 않아요. 진시현 씨 일은 직접 사모님에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유강후는 고개를 돌려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방 안에서 온다연은 유강후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아이의 볼을 살짝 건드리며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이제 이 아이만 보면 자신의 아들이 그 여자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그 고통은 마치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듯했고 유강후에 대한 증오가 점점 깊어졌다.그의 무정함과 거짓말이 더욱 미웠다.장화연을 시켜서 외부의 여자가 자신의 대역이라는 말이나, 누군가 그녀를 암살하려 했기에 보호를 위해 대역을 세웠다는 말까지 하게 만들다니.온다연은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이런 허술한 거짓말을 대체 어떻게 만들어낸 걸까? 설령 누군가 내 목숨을 노렸다 해도 어떻게 내 아들을 그 대역한테 맡길 수 있어? 웃겨서 정말!’그의 입에서는 한 마디의 진실도 나오지 않았다.온다연은 멍하니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너는 내 아기가 아니지만 명목상 내 아이니까 정말 좋긴 해. 걱정 마. 내가 널 포기하지 않을 거야. 작은 희망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널 데리고 나갈 거야.”“하지만 지금은 널 좋아한다는 걸 티 내면 안 돼. 그렇지 않으면 아저씨가 널 이용해 날 또 옥죌 거니까.”“그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이야. 내가 얼마나 괴
병원에서.며칠간의 치료와 정성 어린 간호 끝에 나은별은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그녀는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며 소이섭이 깎아준 사과를 받아들었다.“그 사람은 어떻게 처리했어요?”소이섭은 안경을 살짝 고쳐 쓰며 차가운 눈빛을 번뜩였다.“죽었어. 너무 많은 걸 아는 사람은 살려둘 수 없지.”나은별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그 사람... 강후 씨 비서였잖아요. 갑자기 죽으면 의심을 사지 않을까요?”그러자 소이섭은 냉소적으로 대답했다.“강후는 지금 온다연이라는 여자애를 찾느라 온 세상을 뒤지고 있어. 이런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야.”곧 나은별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이번 수는 제대로 먹혔네요. 비서를 이용해 강후 씨의 말을 왜곡해서 아래 사람들에게 전달하게 하고 강후 씨가 온준휘를 구하지 않으려 한다는 오해를 만들었잖아요. 그 결과 온준휘는 골든타임을 놓쳐 죽게 됐고 지금 온다연의 눈에는 강후 씨가 살인범이나 다름없겠죠.”“온다연은 어릴 때부터 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했어요. 자신이 잠깐 돌봐줬다는 이유만으로 심미진이 온다연을 학대하고 유하령이 괴롭히게 놔뒀는데도 아직도 심미진을 잊지 못하더라고요. 그런 애가 가장 중시하는 건 가족이에요. 그런데 온준휘가 강후 씨의 무관심으로 죽었다고 믿고 있으니... 온다연이 강후 씨를 용서할 리 없겠죠.”“게다가 온다연은 강후 씨가 자기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버렸다고 믿고 있어요. 이제 강후 씨를 더더욱 용서하지 못할 거예요.”“근데 정말 보고 싶어요. 그 여자가 자기 아이가 사실 이미 죽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만 해도 속이 시원해!”소이섭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차갑게 말했다.“지금은 온다연이 그 사실을 알게 하면 안 돼. 김원도와 계획한 대로 모든 걸 진행해야 해. 하지만 걱정 마. 온다연이 너한테 그런 짓을 했던 만큼 내가 온다연한테 그보다 더한 고통을 줄 거니까.”나은별은 이를 드러내며 비웃었다.“온다연 따위가 감히 나와 경쟁
유강후는 온다연이 다른 남자를 위해 애원하는 모습을 보며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만약 내가 안 된다고 하면?”온다연은 침묵했다.그녀의 손에는 지금 그를 위협할 만한 아무것도 없었다. 유강후가 지금 신경 쓰는 건 아마 그녀의 목숨뿐일 것이다.그도 그럴 것이 유강후는 아직 온다연을 완전히 가지고 놀지 못했다.한참을 망설인 끝에 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나쁜 소식을 들으면 나는 이곳에서 뛰어내릴 거예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으니까. 정말로... 너무 지쳤어요.”그녀의 눈에 가득한 피로감은 거짓이 아니었다.유강후는 가슴 한가운데가 쥐어짜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녀가 또다시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그를 위협하니 말이다.며칠 동안 그녀를 찾기 위해 유강후는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했다.염지훈과 그녀가 한 방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그럼에도 온다연이 김원도의 사람들에게 노출될까 봐 그는 끊임없이 조바심을 냈다.몇 차례 그녀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유강후는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그런 상황 속에서 아무도 그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몰랐다.사실 유강후는 한 번도 이렇게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어린 시절 임씨 가문의 미치광이가 유강후를 방 안에 가둬두고 불을 지를 때도, 납치되어 피를 뽑히고 총구가 이마에 겨눠졌을 때도, 심지어 고층 건물에서 떠밀려 죽음이 코앞에 닥쳤을 때도 그는 이렇게 두려워하지 않았다.하지만 온다연이 어딘가에서 고통받거나 모욕당할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는 미칠 지경이었다.심지어 그녀가 살해되었다는 거짓 소식을 들었을 때는 순간 삶의 의욕마저 잃어버릴 뻔했다.이런 이유로 그는 염지훈을 죽이지 않았다.그의 평소 성격대로라면 염지훈은 이미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비록 온다연을 데리고 갔지만 염지훈은 그녀를 김원도의 광기에서 철저히 보호했다.그런 점에서 염지훈을 죽이는 대신 단지 한 번 심하게 때리는 것으로 끝낸 것이다.물론 유강후는 여전히 염지훈을
그 대답을 들은 유강후는 애써 참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다.그는 천천히 온다연의 목에 감긴 붕대를 쓰다듬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참 안됐군. 너는 평생 나와 함께할 수밖에 없어. 죽어도 내 무덤에 묻혀야 하고 묘비에는 내 이름이 새겨질 거야.”이내 유강후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낮게 물었다.“온다연, 네가 내 곁을 떠나 있었던 날들이 며칠인지 기억이라도 나?”온다연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답했다.“기억도 안 나고 알고 싶지도 않아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아저씨 곁에 없는 동안 훨씬 자유로웠다는 거예요.”유강후는 그 말에 가슴이 너무 아파 견딜 수 없었지만 차분히 온다연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하지만 네가 그랬잖아. 절대 날 떠나지 않겠다고.”그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고 그 눈빛 속의 감정은 더없이 서늘해 그녀의 숨을 막히게 했다.온다연은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런 말 다 잊어버리세요.”그 순간, 유강후는 갑자기 그녀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며 말했다.“온다연,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그는 한 단어 한 단어를 곱씹어가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만약 이 일이 10년 전이었다면 난 염지훈을 내 손으로 죽였을 거고 너도 직접 목을 졸라 끝냈을 거야.”“5년 전이었다면 네 존재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웠겠지. 그리고 널 평생 감옥 같은 곳에 가둬뒀을 거야.”“하지만 지금은 내가 좀 나이를 먹었으니 참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 너 때문에 물러나 주는 거야. 이번 한 번만. 단 한 번뿐이야.”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경고했다.“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널 새장 속에 가둬둘 거야. 내 말 하나하나 다 진짜니까 의심하지 마.”그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온다연은 그의 말에서 뼛속까지 서늘해지는 차가움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유강후의 손을 피해버렸다.그가 하는 말이 진심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유강후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
그러자 이내 수화기 너머에서 염지호의 잔뜩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뭐라고?”유강후는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당장 이난과 연락하고 직접 와서 확인하세요.”그 말을 끝으로 그는 전화를 끊고 온다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전화했어. 그러니까 이제 칼 내려놔.”온다연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칼을 내려놓았다.칼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유강후 또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재빠르게 그녀에게 다가가 상처를 확인했다.칼날은 매우 날카로웠고 그로 인해 생긴 상처는 생각보다 많이 깊었다. 만약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큰일이 날 뻔했다.유강후는 그녀를 재빨리 안아 들고 성큼성큼 밖으로 향했다.차에 오르자마자 유강후는 경호원이 건넨 붕대를 건네받더니 온다연의 상처를 간단히 응급으로 처치를 해줬다. 그리고는 곧바로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상처는 꽤 깊어서 열 몇 바늘을 꿰매고 지혈제를 맞은 후에야 겨우 피가 멈췄다.그제야 유강후는 안도하며 온다연의 손에 시선을 돌렸고 그제야 아까 자신에게 밟힌 손가락 중 하나가 부어오른 것을 발견했다.그것은 바로 예전에 문에 끼어 부러졌던 그녀의 새끼손가락이었다.온다연의 손가락을 본 유강후의 심장이 다시 철렁 내려앉았고 그녀의 손을 잡고 한참 들여다보다가 낮게 물었다.“아프지? 왜 안 말했어?”온다연은 그런 유강후를 조롱하듯 대답했다.“말하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말하면 아저씨가 절 걱정이라도 해줄 것 같았어요?”“게다가 이 손가락도 아저씨가 부러뜨린 거잖아요. 한 번 더 부러진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겠어요?”유강후는 그녀의 눈에 깃든 증오의 감정을 보고 마음이 저려오는 듯했고 마치 누군가 그의 가슴을 쥐어뜯는 기분이 들었다.이내 그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온다연, 말 그런 식으로 하지 마.”하지만 온다연은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연기는 그만하죠. 구역질 나니까.”유강후는 그녀가 화가 난 상태라는 걸 알고 더 이상 대응하지 않고 곧바로 의사를 불러 검사를 요청했다.결국 예
온다연은 옆에서 모든 장면을 보고 있었고 겁에 잔뜩 질려 얼어붙은 채로 유강후의 팔을 붙잡으며 외쳤다.“그만해요! 제발 그만두세요!”하지만 그녀는 곧 경호원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염지훈은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유강후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혹시 당신이 신이라도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다른 사람의 생사까지 결정할 수 있는 줄 아시나 본데 그건 틀렸습니다. 유강후 씨가 이럴수록 온다연은 당신을 더 증오할 겁니다. 다연이를 보세요. 당신을 쳐다보는 것조차 싫어하지 않나요?”“유강후 씨가 아무리 다연이를 억지로 데려가도 쟤는 어떻게든 당신을 떠날 방법만 찾을 겁니다!”“당신 같은 사람은 절대 사람의 진심 어린 마음을 얻을 자격이 없거든요.”그 말에 유강후의 눈빛은 더욱 살기를 띠었고 그는 발을 들어 다시 염지훈을 거세게 찼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무자비했다.염지훈은 거친 기침을 하며 피를 미친 듯이 뱉어냈고 온다연은 깜짝 놀라 경호원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철저히 제압당해 꼼짝도 할 수 없었다.이 순간, 유강후는 온다연의 눈에 핏빛으로 물든 악마처럼 보였다. 그의 통제 불가능한 모습은 마치 염지훈을 죽일 작정인 것 같았다.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반드시 막아야 했다. 순간, 온다연의 시야에 방금 테이블 위에 놓였던 과도가 들어왔다.그러자 온다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집어 자신의 목에 갖다 댔고 경호원들은 깜짝 놀라 달려들며 외쳤다.“사모님, 안 됩니다!”“사모님, 칼 내려놓으세요!”온다연은 한 발짝 물러섰고 손에 힘을 주어 칼끝을 목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다가오지 마세요!”유강후는 갑작스러운 행동을 보이는 온다연을 보고는 충격에 몸이 굳었다.하지만 온다연의 목에는 이미 날카로운 칼날이 깊이 박혀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온다연의 목에서 흐르는 피를 본 유강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칼 내려놔. 온다연.”그러나 온다연은 벽 쪽으로 물러서며 단호하게 말했다.“다가오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