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온다연은 아프다고 말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무작정 화를 내는 유강후를 째려보았다.얼마나 지났을까, 유강후는 온다연을 놓아주고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아 의자 위에 앉혔다.그는 숨을 헐떡이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나를 화나게 하지 마. 너한테 좋을 게 없어.”온다연은 눈살을 찌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강후는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치켜들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대답해!”그러자 온다연은 눈을 깜빡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요.”유강후는 만족스러운 듯 그녀 곁에 앉아 책상 위의 물티슈를 꺼내 흙이 묻지도 않은 그녀의 발을 닦았다.그리고 하얗고 보드라운 발에 두 가닥의 핏자국이 생긴 것을 보자 유강후는 눈썹을 약간 찡그리며 말했다.“앞으로 맨발로 정원에서 뛰어다니지 마.”이때 장화연은 잘 다린 한약을 들고나왔다. 검은 한약은 하얀 도자기 그릇에 담겨있었고 보기만 해도 엄청 쓸 것 같았다.“너무 뜨겁지 않습니다. 다연 씨 지금 먹어요.”온다연은 그 약을 보자 안색이 어두워지면서 몸도 저절로 움츠러들었다.유강후는 사탕 한 알을 그녀에게 건네면서 말했다.“입에 넣고 있으면 안 쓸 거야.”온다연은 고분고분 그의 말을 듣고 사탕을 깨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한약의 맛을 덮을 수 없었다. 게다가 왜 갑자기 한 그릇이 더 많아졌는지 모른다. 예전보다 더 쓰고 토하고 싶게 만드는 맛이었다.유강후 옆에 있는 매 순간순간 모두 고통스러웠다. 온다연이 약을 다 먹자 유강후는 만족스러운 듯 그녀를 자기 무릎 위에 앉히고 그녀의 앙증맞은 발을 몇 번 주무르더니 장화연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가져와.”그러자 장화연은 이내 방에서 예쁜 상자를 들고나왔다.심플한 검은색 디자인의 상자였지만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상자 위에는 블루 다이아몬드가 박혔고 가치가 상당했다.온다연은 상자를 받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 저는 필요 없어요.”그러자 장화연은 상자를 들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다연
그러자 상자에 있던 화려한 액세서리들이 바닥에 쏟아졌다.석양이 비추자 더욱 눈 부신 빛을 발했다.유강후는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온다연의 손을 강제로 잡고 억지로 그녀의 중지에 반지를 끼웠다.마침 사이즈가 딱 맞았다.장화연은 액세서리를 치우면서 말했다.“다연 씨, 이건 사모님의 혼수 액세서리에요. 지금은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지고 있죠. 이 반지는 특별히 다연 씨 사이즈에 맞게 고친 건데 싫어하면 안 되죠.”온다연은 그 반지를 끼자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반지를 뺐다.유강후는 안색이 어두워지며 말했다.“다시 껴.”온다연은 반지가 아니라 마치 폭탄을 쥐고 있는 것처럼 괴로웠다. 그녀는 유강후의 물건을 원하지 않는다.유강후가 고양이를 데려간 일 때문에 온다연은 이미 그에 대한 신뢰가 깨진 상태였다.온다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유강후에게 반지를 건넸다.“아저씨, 이런 물건은 은별 언니에게 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유강후는 그 반지를 보면서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그리고 전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온다연, 한 번만 더 말할게. 다시 껴.”하지만 온다연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어. 나를 자극하지 마.”그러자 온다연은 나지막이 말했다.“저는 이걸 받기 싫어요.”이 반지는 나은별의 것이다. 만약 온다연이 이 반지를 끼면 그녀는 내연녀가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친 셈이다.온다연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바로 내연녀이다.온다연은 유강후가 왜 그녀에게 이렇게 비싼 물건을 주는지 몰랐지만 그녀는 좋아하지도 않고 받기도 싫었다. 특히 반지 같은 물건은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다. 유강후는 진짜 그 의미를 모를까?유강후는 온다연이 움직이지 않자 다시 강제적으로 그녀에게 반지를 끼워주려고 했다. 하지만 온다연은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강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유강후는 이런 온다연을
온다연은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지?유강후는 갑자기 온다연의 턱을 치켜들며 자기를 똑바로 바라보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온다연은 쳐다보지 않고 오히려 눈을 감았다.“아저씨는 모든 것을 다 가졌는데 저는 아무것도 없어요.”유일하게 갖고 싶었던 고양이마저 방금 빼앗겼다.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온다연을 바라봤다. 곧 화를 낼 것 같은 분위기였다.이때 그는 갑자기 온다연을 놓아주더니 그녀를 한쪽으로 밀고 일어섰다.그리고 온다연을 내려다보면서 차갑게 말했다. 유강후의 기에 눌려 온다연은 고개를 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온다연, 정말 제멋대로네.”온다연은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쥔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유강후는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낮지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게임이라고 생각해. 이제 시작이야. 게임 룰과 언제 끝나는지는 내가 결정할 거야.”유강후는 그녀의 부드러운 뺨을 살살 어루만지며 말했다.“내 취향은 변한 적이 없어.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면 20년 동안 계속 그것만 먹을 수 있거든.”온다연은 순간 얼굴이 종잇장처럼 창백해졌고 몸도 떨리기 시작했다. 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당으로 걸어 나갔다.온다연은 유강후가 떠난 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저녁이 되자 밖은 점점 어두워졌다.공기 중에는 아직도 유강후의 몸에서 나는 옅은 우디향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고급스러우면서도 매력적인 향기였다.바람이 불자 온다연은 추워서 의자에 웅크리고 앉았다.장화연은 담요를 가져와 그녀에게 걸치고 담담하게 말했다.“아까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 보석들은 사모님이 도련님에게 남겨준 물건들이라 도련님이 굉장히 아끼는 거예요.”온다연은 무뚝뚝하게 마당 밖으로 뻗어 자란 나뭇가지를 보며 말했다.“제 것이 아닌 걸 가지는 건 훔치는 거와 마찬가지예요. 어차피 다시 돌려줘야 해요.”장화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나 끝내 말하지 않았다.그리고 연속 3일 동안 유강후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장
온다연은 여기에서 유민준을 만날 줄 몰랐다. 그녀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오빠, 왜 여기에 있어요?”유민준은 잘생긴 데다 멋진 수트까지 입고 있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분명 그를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때 온다연은 유민준의 손을 뿌리쳤다.유민준은 들뜬 마음에 온다연의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계속 찾았어. 아무 일도 없는 건 알겠지만 왜 전화하지 않았어?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잖아...”유민준이 너무 힘을 주며 온다연의 손을 쥐자 온다연은 너무 아팠다. 그녀는 손을 빼면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했다.“오빠, 다들 쳐다봐요...”유민준은 온다연의 의사는 묻지 않고 그녀를 바로 옆 작은 정자로 끌고 갔다.그곳에 있는 대나무 장식이 마침 사람들의 시야를 가릴 수 있었다. 온다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유민준은 온다연을 안고 싶었지만 온다연은 피했다. 그는 온다연의 예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예전보다 더 예뻐졌다며 감탄했다. 하지만 살이 너무 빠져서 옷이 커 보였다.유민준은 안쓰러운 듯 온다연을 쳐다보면서 다급하게 물었다.“혹시 여기서 알바해? 집에도 안 가고 학교에서도 연락 안 된다고 하고 다들 너를 찾아다니는 거 몰라?”온다연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유민준은 감격에 겨워 그녀를 껴안았다.“다연아, 혹시 일부러 나를 피해 다니는 거야? 내가 약혼한다는 사실을 듣고 일부러 숨어 다니는 거냐고? 화 풀어. 내가 약혼했다고 해도 널 버리지 않을거야...”유강후의 힘이 너무 세서 온다연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온다연은 유민준이 너무 이상해 보였다.‘약혼하든 안 하든 나랑 무슨 상관이지?’온다연이 숨어다니는 이유는 유민준 때문이 아닌데 말이다. 그녀는 힘차게 유강후를 밀쳐내고 심하게 기침했다.유민준은 온다연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네가 사고를 쳤다는 건 알아. 무한테크 그룹의 딸 고유정을 때렸다며? 하지만 숨어다니지 말았어야 했어. 나를 찾아와야지. 내가 다
온다연은 유민준을 정말 싫어했다. 이렇게 안고 있으면 온다연은 집에 돌아가서 샤워를 열 번이라도 할 것이다. 온다연은 계속 피하면서 유민준을 뿌리치려고 했다.“둘이 뭐해?”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유민준은 재빨리 온다연을 놓아줬다.“삼촌, 왔어요?”유민준은 옷을 정리하고 애써 침착한 척하며 온다연을 자기 뒤로 숨겼다. 온다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3일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유강후를 보게 되었다.그는 검은색 수트를 차려입고 차분하고 도도한 분위기를 뽐냈다.유강후는 온다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너무 살벌해서 온다연은 겁에 질려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솔직히 유민준도 충분히 잘생겼지만 유강후와 비하면 살짝 아쉬웠다. 두 사람은 비슷하게 생겼지만 유강후는 훨씬 더 고급스러웠다.유강후는 서 있기만 해도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그의 우월한 비주얼은 물론 막강한 카리스마만으로도 사람들은 그를 우러러보게 된다.그리고 그의 옆에 서 있는 여자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톱스타 임정아는 예쁘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오늘 입은 머메이드 치마는 그녀의 늘씬한 몸매를 더 부각해 줬다. 임정아는 목과 손목에 연한 파란색 다이아몬드 액세서리를 하고 있었고 무심코 손을 들 때마다 커다란 파란색 다이아몬드 반지를 드러냈다.그날 유강후가 선물해 준 것과 똑같은 반지였다.유강후와 임정아는 천생연분처럼 너무 잘 어울려 보였다.어쩐지 요즘 연예 뉴스에 두 사람의 스캔들이 계속 있더라니. 알고 보니 소문이 전부 거짓은 아니었다.온다연은 고개를 푹 떨구고 옷을 꽉 움켜쥔 채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이렇게 빨리 새 여자가 생겼다고?’유강후는 몇 초 동안 온다연을 바라보다가 다시 유민준을 쳐다봤다.“곧 파티가 시작될 건데 여기서 뭐 해?”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고 아무런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마치 온다연을 모르는 것처럼 그녀와 얽힌 적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유민준과 온다연이 함께 있는 것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표정이
유강후는 포스가 넘쳤고 임정아는 매력적이고 섹시했다.온다연은 넋을 놓고 두 사람을 쳐다봤다. 골목 입구에 다다르자 임정아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온다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남녀노소 모두 반할 것 같은 환한 미소였다.온다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두 사람은 이미 사라졌다.바람이 불어오자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또 자세히 들어보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온다연은 갑자기 그녀를 제외하고 온 세상이 바삐 돌아가는 것 같았다. 천천히 별장으로 걸어가자 장화연이 흰색 장미 화분 십여 개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았다.온다연은 방금 꽃밭에서 따온 작은 아이리스꽃 한 움큼을 장화연에게 선물해 주었다. 하지만 장화연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다연 씨, 이 꽃을 꽂아둘까요?”온다연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꽃잎을 어루만지며 말했다.“장 집사님한테 선물하려고 가져온 거예요.”장화연은 잠깐 어리둥절해졌다.“감사합니다.”하지만 여전히 무표정이었고 말투에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이때 온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이리스의 꽃말은 과묵하지만 우아한 영혼이란 뜻이에요.”그 말을 듣자 장화연은 드디어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그녀는 가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흰 장미를 다른 꽃으로 바꿀까요? 해바라기 같은 건 어떠세요?”온다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오늘 여기서 유씨 가문 파티가 열리나요?”“도련님이 최근에 큰 프로젝트를 맡게 됐어요. 오늘 이곳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저녁에 파티도 열릴 예정입니다.”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쩐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오더라니. 고씨 가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침실로 들어온 온다연은 핸드폰을 꺼내 카카오톡에 남은 잔액을 보며 잠시 멍을 때리다가 다시 일어나 캐주얼한 흰색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옷이 살짝 두꺼워서 요즘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외출하려고 할 때 장화연이 물었다.“추워요? 왜 이렇게 많이 입었어요?”그러자 온다연
온다연은 여러 가지 핑계를 둘러댔지만 주희는 온다연이 입원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유씨 가문 사람들이 그녀를 가두었다고 굳게 믿었다.온다연이 마지막으로 상처를 보여주고 나서야 주희는 겨우 믿었다. 그녀는 카드를 주희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카드 안에 몇백만 원이 있으니 먼저 써. 수술 비용은 내가 다시 방법을 생각해 볼게.”주희는 안색이 변하더니 단칼에 거절했다.“싫어요. 제가 알아서 할 거예요. 게다가 당분간은 적합한 골수를 찾을 수 없어요.”주희는 온다연을 끌어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누나, 몇 년 동안 정말 수고했어요. 앞으로 절대 누나를 고생시키지 않을 거예요.”주희는 최근 키가 많이 자랐다. 이미 온다연보다 한 뼘 정도 더 컸다. 이렇게 온다연을 안고 있으면 온다연이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아이가 되었다.온다연은 주희가 소유욕으로 가득 찬 자세로 그녀를 안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주희의 눈빛도 예전처럼 순수하지만은 않았다.“누나, 유씨 가문에서 그렇게 누나를 대했는데 돌아가지 마세요. 이모도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누나를 데리고 간 건 사실...”“주희야!”온다연은 주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렸을 때의 촉감이 아니라 약간 따가웠다.“됐어. 주희야, 그만해. 이모는 지금 나의 유일한 가족이야.”주희는 여전히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았다.“누나, 저야말로 누나의 유일한 가족이에요.”“그래. 알았어. 너도 내 가족이야. 그러니깐 이제 나를 좀 놔줄래? 너무 꽉 안아서 숨 막혀.”주희는 그제야 온다연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문지르면서 애교를 부렸다.“좀 더 안고 싶은데 안지도 못하게 하네요. 두 달 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요? 유씨 저택에 몇 번이나 찾아갔어요.”울먹거리는 주희의 목소리를 듣자 온다연은 마음이 약해졌다.그녀는 주희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왜 아직도 어린애처럼 굴어. 이제 곧 고등학교도 졸업할 텐데.”주희는 계속해서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묻고 몸을 구부린 상태로
주희는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주지 마세요. 달라고 한 적도 없잖아요.”그리고 차 문을 뿌리치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그 여자는 급히 뒤쫓아가며 말했다.“아이고, 그냥 장난친 거야. 내가 잘못했어. 지금 당장 사과할게. 화 풀어.”주희는 그제야 멈춰 섰다.“오늘은 어디예요?”그러자 그 여자는 주희의 교복을 잡아당기더니 뒤꿈치를 들고 그의 볼에 뽀뽀하면서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은 산꼭대기에 있는 별장이야. 누나가 텐트를 준비했어. 저녁에 별을 볼 수 있거든.”주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여자도 곧 차에 탑승했다.차는 곧 낡은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온다연은 임혜린과 예전에 자주 가던 식당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임혜린은 많이 야위어 보였고 정신상태도 좋은 것 같지 않았다.그녀는 온다연이 두 달 동안 사라진 이유를 간단히 묻고 별말을 하지 않았다.온다연은 무슨 문제라도 생겼느냐고 묻자 임혜린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오히려 온다연에게 물었다.“유민준이 아직도 너를 귀찮게 해?”온다연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이효진과 곧 결혼할 것 같아. 이효진은 소유욕도 강하고 성격도 나쁜데 민준 오빠가 불구덩이에 들어간 셈이지, 앞으로 내 일에 참견할 시간조차 없을 거야.”온다연은 말하면서 챙겨온 증명서류를 임혜린에게 주었다.“이건 내 모든 증명서류야. 우리 엄마가 예전에 깨어있을 때 쓰신 유서도 있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안전하지 않아서 잠시만 보관해 줘.”임혜린은 한번 훑어보더니 호적등본과 부동산 증명서가 안에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호적등본과 부동산 증명서는?”그러자 온다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이모한테 있어.”그러자 임혜린은 언짢은 어조로 말했다.“그 여자가 왜 그걸 갖고 있어? 비록 네 집은 좀 낡고 작지만 역세권에 있어서 집값이 꽤 나갈 거야. 네 엄마가 유서에 분명히 썼잖아. 20살이 될 때까지만 집을 지켜달라고. 그다음엔 너
진수현은 유강후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유강후의 배경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나이에 이런 성과를 이룬 건 실로 보기 드문 일이었다.자신의 젊은 시절과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였다.잔을 살짝 흔들며 진수현은 미소 지었다.“유 대표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혹시 결혼은 하셨습니까?”유강후의 시선이 안심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고 그 눈빛에 어두운 기운이 스쳤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결혼은 했지만 지금은 부인이 절 떠나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시는 절 보려 하지 않네요.”이 말에 진수현이 피식 웃었다.“젊은 사람들은 서로에게 더 많은 관용을 기대하죠. 유 대표님처럼 뛰어나신 분이라면 사모님도 틀림없이 대단한 분일 겁니다.”유강후는 다시 한번 안심을 바라봤지만 침묵하며 답하지 않고 대신 잔을 들어 와인을 살짝 흔들었다.“진 대표님은 잃어버렸던 따님을 찾으셨다고 하던데... 정말 축하드립니다.”진수현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유 대표님 소식이 정말 빠르시네요. 그런 일까지 알고 계시다니.”유강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곁에 서 있던 안윤희에게 잠시 시선을 돌렸다.“혹시 이분이 대표님의 따님이신가요?”그는 가슴 깊은 곳에서 실망감이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이 젊은 여자는 진수현의 곁에 서 있었고 안심과도 매우 친밀해 보였다.‘이 사람이 진 대표의 딸인가?’하지만 그녀는 온다연이 아니었다.‘다연이 소식이 또 끊겨버렸네.’그는 속으로 울분을 삼켰다.‘왜 그렇게 매정할까? 왜 나한테 조금의 희망조차 남겨주지 않는 걸까?’진수현은 유강후의 물음에 미소만 지으며 잔을 들어 올렸고 직접적으로 부정하거나 긍정하지 않았다.그는 자기 딸의 정체를 굳이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필요 없는 오해라면 그냥 내버려 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진수현의 태도에 유강후의 마음속에서 간신히 피어오르던 작은 희망의 불씨는 완전히 꺼지고 말았다.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듯한 고통이 다시 찾아왔고 목구멍에는 쇳내가 가득 차올랐다.그는 억지로 고통
‘왜 이렇게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지? 저 사람 누구지? 왜 보자마자 이렇게 괴로운 거야? 가슴이 너무 아파.’극심한 통증 속에 온다연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어떤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갔다.역시 이런 여름날과 비슷한 계단 끝이었다.빛 속에 서 있던 고귀하고 우아한 흰옷의 소년, 너무도 아름다워 그녀의 마음에 수많은 열등감과 동경을 불러일으켰던 그 모습.‘누구지? 왜 내 머릿속에 있는 사람이랑 이렇게 닮은 거지? 왜 내 머릿속에 이런 장면들이 떠오르는 걸까?’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생각할수록 머리가 더욱 심하게 아팠다.심지어 통증은 가슴을 갈가리 찢는 듯한 고통으로 번져갔다.그러나 이런 장소에서 그녀는 소리칠 수도 없었다.진수현은 딸의 이상한 모습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그녀를 안아 옆에 마련된 휴게실로 데려갔다.온다연의 창백한 얼굴과 땀범벅이 된 모습을 본 안심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하여 땀을 닦아주며 그녀는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그냥 돌아갈까? 이런 연회 안 가도 돼.”뜨거운 물을 조금 마시고 나서야 온다연의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그러나 방금 떠오른 장면들을 더는 떠올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그녀는 안심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저 괜찮아요, 엄마. 이번 연회는 정말 중요한 자리예요. 안 갈 순 없어요.”진수현도 몹시 안타까워하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갑자기 머리가 아팠던 거니? 거의 2년 동안 이런 적 없었는데... 혹시 또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거야?”한동안 그의 마음속에는 후회가 몰려왔다.염지훈의 말을 믿고 딸의 과거를 철저히 조사하지 않은 자신을 자책한 것이다.염지훈은 온다연이 과거에 행복하지 못했다고 했고 그녀가 스스로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한다며 과거를 들추면 더 큰 고통을 안길 것이라고 조언했었다.진수현도 딸이 힘든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하길 바라지 않았기에 대충 알아보는 선에서 그쳤다.딸의 양부모는 이미 사망했고 그녀가 살던 동네의 이웃도 모두 떠난 상태
온다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심은 눈에 가득 애정을 담아 말했다.“아무리 바빠도 다음 달 약혼식은 미루면 안 돼. 우리 딸의 일이 가장 중요한 거야.”그러자 얼굴이 붉어지며 온다연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엄마, 그런 얘기 그만 좀 하세요.”안심은 웃으며 말했다.“지훈 씨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네 아버지 젊었을 때와 닮았어. 나도 네 아빠도 그 사람이 아주 마음에 든단다. 너를 그 사람에게 맡겨야 우리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진수현이 방으로 들어오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마음에 들긴? 난 마음에 안 들어! 내 딸은 평생 시집 못 가!”이를 들은 안심이 그를 매섭게 쳐다보았다.“그딴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오늘 밤엔 거실 소파에서 혼자 잘 줄 알아요!”당황한 진수현은 급히 변명했다.“여보, 그러지 마. 우리 딸 듣고 있잖아.”안심은 남편을 쳐다보지도 않고 온다연의 손을 잡아끌며 방을 나섰다.조금 뒤, 진씨 가문의 전용 헬리콥터가 크루즈의 갑판 위에 부드럽게 착륙했다.헬리콥터에서 내리자 온다연은 크루즈의 거대한 규모에 잠시 넋을 잃었다.각 크루즈선은 마치 하나의 작은 도시처럼 넓고 평탄했고 열여덟 척의 크루즈가 연결된 모습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했다.육지와 다를 바 없는 규모였다.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화려한 복장을 입고 있었고 특히 여성들은 하나같이 아름답게 꾸민 모습이었다.그들 사이에서 은밀한 속삭임이 들려왔다.“오아시스 그룹 사람들이야. 이번 해양 프로젝트의 최대 주주라지.”“들리는 말로는 겨우 서른 초반인데 아직도 미혼이래.”“근데 그 사람 얼굴을 본 적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대. 어떻게 생겼는지는 전혀 모르겠네.”“어떻게 생겼든 오아시스 그룹의 대표라잖아. 들은 바로는 화운 그룹과 제경 그룹도 그 사람 소유래.”“세상에... 그럼 진씨 가문도 저 사람보다 못한 거네.”“진씨 가문이 동남아시아에서 강하지만 이쪽에서는 오아시스 그룹 쪽이 더 강해. 단지 영향권이 다른 거지, 서로 비교할
온다연은 난간 옆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석양이 완전히 사라질 때쯤, 집사가 다가왔다.“사모님께서 드레스 갈아입으시고 준비하시라고 전하셨습니다. 곧 저녁 연회가 시작되니 출발해야 합니다.”그제야 온다연은 정신을 차렸다.드레스를 갈아입고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늘 그렇듯 그녀만을 위한 전용 메이크업을 시작했다.이 메이크업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가려버려 단지 청순한 정도로 보이게 만들었다.사실 이 메이크업은 아버지 진수현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그녀를 철저히 보호하기 위해 특별히 의뢰한 것이었다.특히 이 메이크업은 특수 재료로 만들어져 쉽게 지울 수 없고 최대 3개월 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덕분에 지금까지 누구도 그녀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그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진수현의 딸이나 진씨 가문의 금융 천재 소녀와 연결 지으려 하지 않았다.과거에 누군가 진씨 가문의 금융 천재 소녀가 노트북으로 일하는 모습을 몰래 촬영한 적이 있었는데 사진 속의 그녀는 마치 요정처럼 세상에 내려온 듯한 아름다움을 뽐냈다.그 모습은 젊은 시절의 안심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그러나 그 사진은 즉시 삭제되었고 촬영한 사람도 어떻게 사라졌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그 결과 많은 이들이 온다연의 사촌 언니이자 안심의 조카인 안윤희를 진수현의 딸로 착각했다.안윤희는 안심과 약간 닮은 데다 비록 외모가 조금 부족하긴 했지만 그래도 꽤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온다연이 보석을 착용할 때 집사가 그녀의 목에 걸린 호박석 펜던트를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온다연은 이를 막았다.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 펜던트를 한순간도 떼어놓을 수 없었다. 펜던트를 떼어낼 때마다 심장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오늘처럼 중요한 연회에 인공 보석을 착용하고 가는 건 진씨 가문의 명예에 걸맞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펜던트를 떼어내어 다이아몬드 팔찌와 함께 손목에 착용했다. 이로 인해 펜던트는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온다연이 펜던트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모습을 본 안
한 달 전, 신국 근처 공해에서 대량의 신에너지 광물이 발견되었다. 자원이 부족한 신국에게 이는 마치 거대한 노다지를 발견한 것과 같았다.하지만 곧 강력한 자본이 개입하면서 결국 채굴권은 H 국의 오아시스 그룹과 신국의 진씨 가문에게 돌아갔다.오아시스 그룹이 70%의 지분을 차지하며 주도권을 잡았고 진씨 가문은 상대적으로 약간 뒤처진 위치에 머물렀다.석양빛이 번지는 저녁, 온다연은 저택의 난간에 기대어 멀리 보이는 십여 척의 대형 크루즈선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크루즈선들은 그제부터 그곳에 정박해 있었고 움직이지도, 항구에 접안하지도 않았다.크루즈선끼리는 대형 강철판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마치 바다 위에 웅장한 궁전을 세운 듯한 모습이었다.거대한 규모와 웅장함은 단연 압도적이었다.마치 광장처럼 넓은 갑판 위로는 헬리콥터가 끊임없이 이착륙했고 멀리서 비행기 소리도 희미하게 들려왔다.집사 주원의 말에 따르면 저 크루즈선들은 모두 한 대단한 인물을 보호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했다.그 인물은 이번 진씨 가문의 협력 파트너로 북아메리카 대형 재벌의 수장이자 H 국과 같은 초강대국의 고위 정치 가문을 배경으로 둔 권력자라고 한다.오아시스 그룹과 같은 대규모 사업체를 여러 개 거느리고 있으며 그의 권력과 재력은 나라와 맞먹을 정도라고 한다.아직 상륙하지 않았지만 그를 보기 위해 주변의 여러 소국의 정치인들과 기업가들이 빈번히 왕래하고 있었다.그 크루즈선을 멍하니 바라보자 온다연은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마치 그곳에 자신이 찾고자 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지난 3년 동안 그녀는 신국 생활에 완전히 적응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끝없는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었다.심지어 가문의 후계자임에도 불구하고 가업을 경영하기보다는 배후에서 조종하는 역할만 하고 싶다는 무리한 요구까지도 아버지는 너그럽게 받아주었다.그녀는 분명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일이란 없었다.예전의 기억
유강후는 봉투를 열었고 그 안에는 사진 한 장이 담겨있었다.사진을 꺼내 살펴본 그는 곧바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몰래 찍은 것 같은 사진 속에는 남자가 있었는데 모르는 얼굴이어서 염동식이 언급했던 진수현일 거라고 추측했다.그런데 사진 속 여성은 온다연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나이는 30대처럼 보였기에 온다연일 리가 없지만 생김새나 분위기조차 매우 닮았다.유강후는 심장이 마구 뛰었다.‘누구지?’‘왜 다연이랑 이렇게 닮은 거지?’수많은 의문이 떠오른 그때 염동식의 전화가 걸려 왔다.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염동식이 먼저 말을 꺼냈다.“사진 속의 남자는 진수현, 그 옆에 있는 여자는 아내인 안심이에요. 사모님이랑 매우 닮았죠?”“3년 전, 사모님이 실종된 시기와 진씨 가문이 딸을 찾은 시기가 매우 일치합니다. 정말 우연일까요?”유강후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대표님,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요.”염동식이 답했다.“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앞으로 한밤중에 치료해달라고 제 와이프한테 연락이나 하지 마세요.”“아참, 흰머리가 많이 나셨던데 제가 부하를 시켜서 몸에 좋은 물건들 보내드릴게요. 마지막 흰머리 한 올까지 깨끗하게 사라질 겁니다.”“그리고 어르신한테 얘기 좀 해주세요. 제 와이프한테 후원 좀 하지 말라고요. 괜히 이상한 실험만 하고 있잖아요.”유강후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염동식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유강후는 손에 사진을 든 채 로운에게 전화를 걸었다.곧 로운은 진수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진수현 씨는 거의 20년 동안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단한 인물인 건 틀림없습니다. 원래 진씨 가문은 보잘것없는 존재였는데 그분의 통솔하에 불과 2, 3년 만에 신국에서 손꼽히는 최고의 가문으로 성장했습니다.”“그 후 아주 짦은 시간에 거대한 상업 제국을 건설하여 동남아시아의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20년 전에 갑자기 사라졌고
말을 마치자마자 문밖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곽혜진, 말 한마디도 없이 여긴 왜 왔어. 신약 개발이라니?”순간 얼어붙은 곽혜진은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환한 웃음을 지었다.“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평범한 실험이에요.”입구에는 30대로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분위기를 뿜어내며 곽혜진을 노려봤는데 눈에 담긴 분노는 금방이라도 그녀를 불사를 정도였다.남자의 옆에는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예쁜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곽혜진을 보자마자 ‘엄마’라고 부르며 달려가더니 그녀의 다리를 껴안았다.어르신은 손님이 찾아온 걸 보고선 황급히 마음을 다잡고 침착하게 말했다.“염 대표님이 오셨군요. 손자가 많이 아파서 제가 혜진이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너무 탓하진 마세요.”곽혜진의 남편인 염동식은 이 나라에서 가장 권위 있고 부유한 재벌 중 한 명이다. 심지어 그의 손아귀에 있는 산업은 강씨 가문과 맞먹는다고 할 수 있다.염동식은 어르신을 보자마자 분노를 감추더니 곧바로 다가가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유강후의 소식을 들은 그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떠올랐다.“다음 달 신국에서 비즈니스 서밋이 열립니다. 아시아 전역에서 명망 있는 기업인들이 참석하는 자리죠. 그곳에서 유 대표님을 만나면 서부 지역 개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이럴 줄은...”그는 침대에 누워있는 유강후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유 대표님과 사모님의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이런 상황이 발생할줄은 정말 몰랐네요.”염동식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저희 쪽 인원이 최근에 동남아 기밀을 수집했는데 그중 하나가 사모님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려고요. 원래는 부하 동생을 시켜서 전해드리려고 했는데 이왕 온 김에 직접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그 말이 끝나는 동시에 유강후가 눈을 떴다.“대표님, 말씀하시죠.”그러자 염동식은 피식 웃었다.“자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다행이네요.”“신국의 진씨 가문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3
구월이도 놀라서 한쪽으로 도망쳤다.그러자 유강후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구월아, 이리 봐. 나한테 와...”구월이는 그를 힐끗 보더니 작은 비명을 지르고선 갑자기 구멍으로 도망쳤다.유강후는 그가 떠나는 방향을 바라보며 절망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구월’이라는 이름이 입 밖에 나오기도 전에 손이 축 늘어졌다.강현미는 겁에 질린 채로 그를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강후야...”딸을 잃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들까지 보내줘야 할 판이다.강현미는 자식 교육을 잘못시킨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유강후의 극단적인 성격은 끝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강현미는 이 모든 걸 본인의 탓으로 돌렸다.곧 유강후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하지만 모든 의사가 속수무책이었다.겨울에는 가끔 피를 토하는 증상이 나타났기에 어느 정도 대응이 가능했지만 지금처럼 여름에 피를 토하는 건 처음이었다.설상가상 기기로는 아무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유강후는 시도 때도 없이 피를 토했다.온다연의 죽음에 유강후의 모든 정력과 에너지는 바닥났고 남은건 껍데기뿐이었다.이러한 상황은 하루 동안 지속되었다. 피를 토하는 증상은 전혀 완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심해졌다.마음이 급해진 강씨 가문 어르신은 곧바로 당시 치료해 줬던 여의사에게 도움을 청했고 헬기까지 동원하여 그녀를 모셔 왔다.여의사는 유강후의 상태를 살펴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이윽고 유강후에게 침을 놓았고 다행히 피를 토하는 증상이 멈췄다.어르신은 깊게 잠든 유강후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이 나이를 먹고서도 손자 걱정을 할 줄은 몰랐기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이때 여의사가 입을 열었다.“어르신, 대표님의 상황은 제가 3년 전에 예상했던 대로입니다. 오늘까지 버틴 것도 대표님 입장에서는 정말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이제 남은 시간이 없습니다.”어르신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혜진아, 우리 손자 좀 살려줘. 이렇게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 딸아이도 지키지
예전의 유강후는 비록 차가웠지만 그래도 가끔은 다정할 때가 있었다.그러나 지금은 인간미가 아예 사라졌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단어들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듯 좀처럼 기운을 되찾지 못했고 모든 걸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심각한 죄책감에 시달렸다.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순식간에 3년이 지났다.꽃피는 화창한 봄날이 되었지만 한옥은 여전히 그 어떤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강현미가 다가와 유강후의 어깨를 두드렸다.“강씨 가문에서 괜찮은 후배 두 명을 선발했어. 옆에서 일을 배워주며 가문의 중책을 감당할 수 있게 네가 직접 키워봐.”유강후는 넋을 잃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어젯밤에 또 다연이의 꿈을 꾸었어요.”강현미는 말없이 애처로운 눈초리로 아들을 바라봤다.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의 피를 멈추고 상처를 치료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3년 전 온다연의 죽음은 그의 모든 희망을 가져갔다.유강후는 이미 모든 걸 포기해 버린 상태였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에 의해 차단되었고 남은 건 오직 숨이 막히는 고통과 온다연에 대한 그리움뿐이다.손으로 눈을 가리자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다연이가 아이를 안고 강 건너편에서 사람들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어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난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어요.”“엄마,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너무 힘들어요. 다연이랑 아이한테는 내가 필요해요.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아요...”그의 고통은 어느새 경련으로 이어졌다.온다연이 떠난 1075일. 유강후는 완전히 무너졌다.비록 다른 세상이지만 강 건너편에 있는 온다연과 아이를 지키기 위해 그는 떠나기로 마음먹었다.그런데 이때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곧이어 도우미가 헐레벌떡 뛰어왔다.“대표님, 구월이가 돌아왔습니다.”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유강후는 곧장 밖으로 뛰어나갔다.“어디?”온다연이 떠난 후 그녀의 고양이도 함께 사라졌다. 경원의 크고 작은 구석을 수색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