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는 금방 연결되었고, 배정우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연다인은 깜짝 놀라 얼어붙은 사람처럼 육문주를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육문주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형수님을 보러 왔는데 상태가 괜찮아서 알려드리려고 전화했어요. 형이 괜히 걱정할까 봐.”“알았어.”갑자기 육문주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런데 마침 연다인이 찾아와서...”육문주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당황해진 연다인은 급하게 그의 휴대전화를 빼앗아 끊어 버리고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당신... 정우랑 무슨 관계야?”감히 배
임슬기가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니, 차희라가 영양제를 들고 서성거리며 서 있었다.“여사님?”“임슬기 씨.”차희라는 영양제를 옆 테이블에 놓으며 말했다.“김현정 씨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영양제를 좀 가져왔어요.”김현정은 김씨 가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김서우가 임슬기를 다치게 한 일을 생각하면 화가 났다.“가져가세요! 당신이 가져온 영양제 같은 거 필요 없어요.”“김현정 씨, 이건 제 마음이에요.”김현정이 다시 거절하려 하자, 임슬기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젓고 차희라를 향해 말했다.“여사님, 왜 오신 건지 용건
차희라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연속으로 사과하며 떠났다.차희라가 떠난 후, 임슬기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이번 생에서 그녀가 가장 후회하는 두 가지가 있었다.하나는 연다인을 임씨 가문으로 데려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배정우와 결혼한 것이었다.만약 그녀가 배정우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빛이었을 것이고, 그녀 마음속의 비밀이었을 것이다.최소한 지금처럼 상처투성이가 되어 서로를 미워하는 관계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그 뒤로 며칠은 비교적 평온하게 지나갔다.
임슬기는 잠깐 멈칫하다 그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확실히 그날의 남자였지만, 머리는 짧게 자르고 수염도 깔끔하게 밀어 전혀 딴 사람 같아 보였다.강재호는 두 사람의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보고 급히 설명했다.“임슬기 씨, 오늘은 진심으로 사과드리러 왔습니다.”의중을 확인한 김현정은 픽 웃으며 말했다.“강재호 씨, 누가 자기소개를 그렇게 해요. 복수하러 온 줄 알았잖아요.”김현정의 말에 강재호는 귀가 붉어지며 사과를 연발했다.“죄송합니다, 정말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진심으로 사과드리려고요. 지난번은 제가 너무 충동적이었어
다음 날, 김현정이 국수를 먹고 싶다고 해서 임슬기가 사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김서우를 마주쳤다.정확히 말하면, 나무 뒤에 숨어서 전화하는 김서우를 발견했다.임슬기는 원래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는데, 지나가던 중 김서우의 말 한마디가 귓가에 들어와 그 자리에 멈춰 섰다.“이 약으로 사람 안 죽는 거 확실해? 난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어.”‘약? 죽음?’임슬기는 김서우가 본인에게 독을 탈 계획이라고 직감하고 몰래 엿듣기 시작했다.“이 약을 매일 타서 먹이면 어떻게 돼?”상대방의 대답을 듣고 김서우는 냉소를 지었다.“안
“임슬기, 무슨 짓이야! 미쳤어?”김서우가 임슬기를 노려보며 마치 그녀를 집어삼킬 듯한 표정을 지었다.차희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왜 이러는 거니?”“이건...”임슬기는 바닥에 흩어진 걸쭉한 액체를 보며 얼버무렸다.“여사님, 이건 드시면 안 돼요.”임슬기의 말에 김서우는 얼굴이 일그러졌다.“임슬기, 무슨 헛소리야? 그냥 흑임자죽이라고! 엄마가 왜 먹으면 안 되는 건데?”“그러게요. 슬기 씨, 흑임자죽도 먹으면 안 되나요?”차희라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급한 상황에 그런 세세
임슬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여사님, 생각이 너무 많으시네요.”하지만 차희라는 물러서지 않고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복도로 끌고 나간 뒤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슬기 씨, 나도 알아요. 예전엔 슬기 씨를 오해했지만, 이제는 슬기 씨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고요. 믿어요.”차희라의 입장에서 임슬기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 만큼,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하지만, 이 문제는 김서우의 출생과 관련된 일이라 임슬기는 정말로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솔직히 말하면, 아까 그냥 모른 척 지나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묘비 주변의 흙은 뒤집힌 흔적이 있었고, 묘비 뒤쪽에는 더욱 뚜렷하게 흙을 파낸 자국이 있었다.마음이 쿵 내려앉은 임슬기는 급히 임현호의 묘를 확인했다. 역시나 흙을 건드린 흔적이 있었지만, 어머니 묘에 비해 덜 뚜렷했다.임슬기는 혹시 과민반응일까 싶어 주변에 있는 묘를 전부 살펴보았지만, 결과는 명확했다.임슬기의 부모님 묘에만 이상이 있었고, 다른 묘들은 모두 멀쩡했으며 오정태의 묘도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순간 정신이 멍해진 임슬기는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누군가가 그녀의 부모님
임슬기도 한때는 이 아이를 지울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결국 이 아이는 그녀의 아이였고 차마 포기할 수 없었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오직 이 아이만이 그녀를 다시 살고 싶게 만들었으니까.가끔은 꿈꿨다. 아이가 태어나면 혹시 배정우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비록 그녀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더라도 마지막 순간만큼은 셋이 함께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그러나 그 아이를 죽인 건 배정우였다. 그는 스스로 그들과의 모든 인연을 끊어버렸다. 이제 더 이상 그를 사랑해야 할 이유도, 그를 용서해야 할 이유도
“언니, 제가 이야기 하나 해줄게요.”김현정은 코를 훌쩍이며 침대에 기대어 앉았고 눈물 맺힌 눈으로 창백한 얼굴의 임슬기를 바라보았다.“17년 전에 저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당했었어요. 작고 어두운 방에 갇혀 있던 그때 언니를 만났는데 그때 언니도 겨우 열 살쯤이었을 거예요. 그런데도 언니는 무서워하기는커녕 저를 보호하려고 했어요.”“기억나요? 한번은 제가 울며 소리를 질렀더니 놈들이 화를 내며 밥을 안 주겠다고 했잖아요. 그러자 언니는 놈들이 떠난 뒤 몰래 언니 빵을 반으로 갈라서 제 손에 쥐여줬어요. 또 다른 날은 그놈들이 절
상처를 다 싸맨 후 배정우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소파에 앉았고 한동안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방 안에 가득한 정적이 답답하고 숨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그렇게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불도 켜지 않은 방 안에서 달빛만이 희미하게 그의 몸을 비추고 있었다. 그 모습은 한층 더 싸늘해 보였다.그러다 갑자기 배정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긴 다리를 뻗으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그런데 문 앞에서 누군가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배정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문
진승윤은 쓴웃음을 지었다.“이제 와서 그게 중요한가요?”그는 임슬기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든 말든 아무 의미도 없다.진승윤은 그저 임슬기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그런데 김현정이 그의 앞으로 다가와 단호하게 말했다.“중요해요.”진승윤은 순간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김현정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다시 말했다.“만약 진 변호사님이 슬기 언니를 사랑한다면 적어도 배정우 그 개자식보단 나은 선택지니까요. 변호사님은 슬기 언니를 다치
“배정우, 너 진짜 비겁한 놈이야!”진승윤은 배정우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 올리더니 바로 또 주먹을 날렸다.퍽.“사랑하지 않으면 그냥 놔줘야지. 도대체 왜 한 여자를 이렇게까지 괴롭히는 거야? 만약 아직도 사랑한다면 슬기를 믿었어야지!”퍽.또다시 강렬한 주먹이 배정우의 얼굴을 강타했다.진승윤은 힘을 아끼지 않았다. 배정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부어올랐고 입가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하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런 배정우의 무기력한 모습이 오히려 더 분노를 자극해 진승윤은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주먹을 날렸다.“거짓말만
배정우의 손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는 연다인을 밀어내고 임슬기를 구하려 했지만 연다인이 필사적으로 그를 붙잡고 늘어져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그 사이 임슬기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자 배정우는 재빨리 연다인을 확 밀쳐내고 황급히 난간으로 달려가 손을 뻗었다.하지만 늦어버렸다. 두 사람의 손끝은 닿을 듯 스치며 멀어져 갔다. 마치 그들의 사랑이 결국 엇갈리고 만 것처럼.“슬기야!”무표정하기만 하던 배정우의 눈동자가 드디어 공포와 무력감으로 물들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만
“그거 참 정말 난처하게 됐네.”임슬기는 옷깃을 여미며 연다인 앞으로 다가와 차갑게 웃었다.“연다인, 내가 죽어도 넌 만족하지 못할 거 같은데? 설마 내 유골까지 팔아서 명혼을 치르려는 건 아니지?”연다인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태연하게 대답했다.“그거 좋은 아이디어네. 한 번 고려해 볼게.”그 태도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임슬기는 어이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그런데 정작 우스운 사람은 자기 자신일지도 몰랐다. 임슬기는 선의를 한 번 베풀었다가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자신의 인생까지 망쳐버렸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초
다음 날 아침.진승윤이 임슬기의 병실을 찾았을 때,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부은 눈은 밤새 울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진승윤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슬기야, 무슨 일 있었어?”임슬기는 고개를 저으며 기침했다.“아무것도 아냐. 어젯밤에 추웠나 봐. 감기 기운이 좀 있어.”“주민규가 왔어. 오늘에는 일단 예비 검사를 진행할 텐데, 너 몸 괜찮아? 부담스러우면 다른 날로 미룰 수도 있어.”“괜찮아. 오늘 하자.”임슬기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네가 아니면 주 선생님 같은 분을 모실 수
임슬기는 예전엔 낮고 매력적인 배정우의 목소리를 좋아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두려움이 밀려왔다.“배정우, 뭐 하는 거야? 당장 일어나.”하지만 배정우는 일어나지 않고 그녀를 꼭 껴안았다.“임슬기, 잠깐만 이러고 있자.”갑작스러운 다정함에 불편해진 임슬기는 배정우의 몸에서 나는 희미한 술 냄새에 서둘러 그를 밀어냈다.“너 취했어?”“윽!”배정우는 가슴을 움켜쥐며 얼굴을 찡그렸다.임슬기는 배정우의 부상이 떠올라 급히 다가가 상처를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다.“상처를 건드린 거야? 피는 안 나?”배정우는 갑자기 그녀의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