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기는 잠깐 멈칫하다 그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확실히 그날의 남자였지만, 머리는 짧게 자르고 수염도 깔끔하게 밀어 전혀 딴 사람 같아 보였다.강재호는 두 사람의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보고 급히 설명했다.“임슬기 씨, 오늘은 진심으로 사과드리러 왔습니다.”의중을 확인한 김현정은 픽 웃으며 말했다.“강재호 씨, 누가 자기소개를 그렇게 해요. 복수하러 온 줄 알았잖아요.”김현정의 말에 강재호는 귀가 붉어지며 사과를 연발했다.“죄송합니다, 정말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진심으로 사과드리려고요. 지난번은 제가 너무 충동적이었어
다음 날, 김현정이 국수를 먹고 싶다고 해서 임슬기가 사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김서우를 마주쳤다.정확히 말하면, 나무 뒤에 숨어서 전화하는 김서우를 발견했다.임슬기는 원래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는데, 지나가던 중 김서우의 말 한마디가 귓가에 들어와 그 자리에 멈춰 섰다.“이 약으로 사람 안 죽는 거 확실해? 난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어.”‘약? 죽음?’임슬기는 김서우가 본인에게 독을 탈 계획이라고 직감하고 몰래 엿듣기 시작했다.“이 약을 매일 타서 먹이면 어떻게 돼?”상대방의 대답을 듣고 김서우는 냉소를 지었다.“안
“임슬기, 무슨 짓이야! 미쳤어?”김서우가 임슬기를 노려보며 마치 그녀를 집어삼킬 듯한 표정을 지었다.차희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왜 이러는 거니?”“이건...”임슬기는 바닥에 흩어진 걸쭉한 액체를 보며 얼버무렸다.“여사님, 이건 드시면 안 돼요.”임슬기의 말에 김서우는 얼굴이 일그러졌다.“임슬기, 무슨 헛소리야? 그냥 흑임자죽이라고! 엄마가 왜 먹으면 안 되는 건데?”“그러게요. 슬기 씨, 흑임자죽도 먹으면 안 되나요?”차희라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급한 상황에 그런 세세
임슬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여사님, 생각이 너무 많으시네요.”하지만 차희라는 물러서지 않고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복도로 끌고 나간 뒤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슬기 씨, 나도 알아요. 예전엔 슬기 씨를 오해했지만, 이제는 슬기 씨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고요. 믿어요.”차희라의 입장에서 임슬기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 만큼,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하지만, 이 문제는 김서우의 출생과 관련된 일이라 임슬기는 정말로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솔직히 말하면, 아까 그냥 모른 척 지나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묘비 주변의 흙은 뒤집힌 흔적이 있었고, 묘비 뒤쪽에는 더욱 뚜렷하게 흙을 파낸 자국이 있었다.마음이 쿵 내려앉은 임슬기는 급히 임현호의 묘를 확인했다. 역시나 흙을 건드린 흔적이 있었지만, 어머니 묘에 비해 덜 뚜렷했다.임슬기는 혹시 과민반응일까 싶어 주변에 있는 묘를 전부 살펴보았지만, 결과는 명확했다.임슬기의 부모님 묘에만 이상이 있었고, 다른 묘들은 모두 멀쩡했으며 오정태의 묘도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순간 정신이 멍해진 임슬기는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누군가가 그녀의 부모님
임슬기는 즉시 김서우의 목을 움켜쥐고 벽으로 밀어붙였다.김서우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얼굴을 붉히며 임슬기의 손을 마구 때리며 소리쳤다.“임슬기! 너... 너 미쳤어? 놔!”하지만 임슬기는 오히려 힘을 더한 채 김서우의 귀에 입을 대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김서우, 너 우리 엄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너... 너 진짜 미친 거야?”목이 조이는 턱에 숨이 막혀 머리가 어지러웠던 김서우는 임슬기를 공격하려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다행히 임슬기가 손을 풀었고 김서우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
임슬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모르겠어요. 아직 조사 중이에요.”“형수님, 이런 일을 나한테 숨긴 거예요? 나를 너무 못 믿으시네요. 저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알아요. 그래서 지금 말하는 거잖아요.”임슬기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여긴 누구 병실이에요?”육문주가 문을 열며 말했다.“정우 형이요.”‘배정우?’잠시 멈칫하던 임슬기가 고개를 돌리자,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수액을 맞고 있는 배정우가 눈에 들어왔다.“저 사람, 어떻게 된 거예요?”“등을 단단한 물체에 강하게 부딪혀 중상을 입었어요.
“정우야.”깜짝 놀란 연다인은 황급히 뒤돌아 배정우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깨어났어? 너무 걱정했잖아.”하지만 배정우는 즉시 연다인을 밀어내며 차가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정말 네가 아니냐고?”연다인은 얼굴이 굳어진 채 말했다.“정우야, 무슨 말이야? 내가...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그러더니 더욱 크게 울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요즘 네가 자꾸 나를 피하길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돼서 슬기를 따라다녔어. 네가 무슨 일이 있으면 분명 슬기에게 연락할 거니까. 다른 건 정말 한 적 없어.
주방에서 임슬기는 면을 삶고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딴 데로 가 있었다.한편으로는 김현정의 상태가 걱정됐고 또 한편으로는 연다인이 다음에 무슨 짓을 벌일지 불안했다.생각이 많아지는 그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임슬기는 불을 약하게 줄이고 도어스코프로 밖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문주 씨, 도대체 어디 갔었어요? 아침에 전화했는데 왜 계속 안 받았어요?”육문주는 아직도 어제 입었던 정장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안색은 좋지 않았으며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어젯밤에 좀 일이 있었어요. 현정 씨는 안에 있어요?”“있어요.”육문주가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말해 봐, 연다인!”“난 말이지 네가 무너지는 꼴을 보는 게 제일 즐거워. 임슬기, 네가 미쳐버릴 정도로 무너지고 나면 정우도 너랑 이혼하겠지. 그때쯤이면 나도 자연스럽게 정우의 아내가 되겠네?”임슬기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연다인,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 경고하는데, 더는 함부로 굴지 마!”하지만 연다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도 참 한심해, 임슬기. 그렇게 소리만 질러대고 그 외엔 뭘 할 수 있는데?”“이 비겁한 년!”임슬기가 더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욕실 안에서
임슬기는 순간 멈춰 섰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김현정을 바라보며 물었다.“현정아, 무슨 일이야?”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슬기 언니... 제발 오지 마요!”김현정은 몸을 더 안으로 움츠리며 눈물범벅인 얼굴로 간절히 애원했다.“부탁이에요, 오지 마요... 제발...”김현정의 반응이 너무 격해지자 임슬기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알겠어. 안 갈게. 여기 이렇게 있을게. 괜찮지?”김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임슬기는 김현정이 우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
‘허, 승윤아? 참 다정하게도 부르네.’임슬기는 취기에 휘청이며 배정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중얼거렸다.“너랑 있으면 마음이 좀 놓여. 고마워, 승윤아.”배정우는 그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상대는 술에 잔뜩 취한 상태라 불러도 소용없고 화를 낸다고 바뀔 것도 없었다.결국 그는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주 제대로 한 대 갈겨. 힘 좀 써서.”...다음 날.임슬기는 흐릿한 정신으로 깨어났다. 입안이 텁텁하고 목이 바짝 말랐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중얼거렸다.
그 말을 입에 올리자마자 진승윤은 바로 후회했다.너무 충동적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있었을까.만약...“좋아.”진승윤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임슬기가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좋아요. 진 변호사님께서 내가 몸 약한 것만 안 싫어한다면 말이죠.”진승윤은 어리둥절한 채 말을 잇지 못했고 임슬기는 그의 얼굴 앞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지금 혹시 후회하는 거 아냐?”“아, 아니...”“나도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몰라. 근데 내가 죽고 나면 내 동생이 정우보
말이 끝나자마자 임슬기는 그의 손에 들린 맥주를 낚아채더니 고개를 젖혀 단숨에 들이켰다.“또 있어?”진승윤은 잠시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뭐라고?”“술 말이야. 너 아까부터 마시고 있었잖아?”임슬기는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왜 혼자 마셔?”진승윤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등으로 임슬기의 이마를 짚었다.정상 체온보다는 약간 높은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그제야 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 살아 있는 임슬기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슬기야, 지금 뭐 하는 거야? 너 아직 열나고 있잖아.
주민규를 돌려보낸 후 진승윤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이마를 찌푸린 채 침대에 누운 임슬기를 바라보았다.창백한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누가 봐도 방금까지 울었던 얼굴이었다.이렇게나 쉽게 부서질 듯 연약해 보이는데, 배정우는 어떻게 손을 댈 수 있었을까.진승윤은 손을 뻗어 임슬기의 이마에 흘러내린 잔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는 이내 뜨거워진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슬기야,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한 거야. 연다인이 거기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배정우가 어떤 선택을 할지 뻔히 알
연다인은 임슬기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배정우의 품에 고개를 기대었다.“정우야, 나 슬기 밀지 않았어. 정말이야...”분수대를 벗어나자 배정우는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밀었는지 아닌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연다인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그의 허리를 껴안고 울먹였다.“내가 밀 이유가 뭐가 있겠어? 네 눈엔 내가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이야?”그러더니 몇 차례 기침을 했다.“내가 이렇게 몸이 약해진 것도, 다 누구 때문인데...”그 말을 들은 배정우는 조금은 부
진성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는 비웃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정우야, 난 널 돕고 있는 거야.”“아저씨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배정우는 그 말을 남기고 임슬기의 손을 이끌어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내가 분명 진승윤한텐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지? 왜 말을 안 들어?”임슬기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차갑게 웃었다.“승윤이가 아니었으면 난 벌써 몇 번은 죽었을 거예요.”“진성한은 네가 건드릴 만한 사람이 아니야.”“맞아요, 내가 감히 건드릴 수 없겠죠.”임슬기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도 마찬가지예요. 힘도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