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문주는 임슬기를 안고 있는 진승윤의 모습을 보고 잠깐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승윤 형, 형수님한테 약을 탄 거예요?”“그냥 수면제야.”“하지만...”진승윤은 육문주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육문주,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네 자유야. 하지만 네가 배정우를 도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다면, 난 널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승윤 형, 정우 형이 어떤 일들은 정말 잘못한 게 맞지만...”육문주는 슬픈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사실, 정우 형은 진심으로 형수님을 걱정해요. 형도 그건 알고 있잖아요.”“슬기를
“변호사님이 여긴 왜, 왜 오신 거예요?”연다인은 진승윤의 기세에 눌려 계속 뒤로 물러나다가 결국 침대에 주저앉았다.진승윤은 병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연다인을 차가운 눈빛으로 빤히 바라만 보았다.“진승윤 씨, 도대체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예요?”연다인은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 압도당해 마음이 불안해졌다.“연다인 씨, 다행히도 난 여자한테 손은 안대요.”진승윤의 손을 대지 않는다는 말에 연다인은 다시 기세가 올라 냉랭하게 말했다.“그러니까 뭐 하러 온 거냐고요? 임슬기 그년 대신 복수라도 하려는 거예
연다인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아픈 오른손을 움켜쥐고 눈물을 흘리며 배정우를 바라보았다.“정우야...”하지만 배정우는 연다인을 동정하는 마음 하나 없이 오히려 차갑게 질문했다.“기사에 나온 거, 사실이야?”배정우가 묻는 기사는 연다인이 교통사고로 조작해 진승윤을 죽이라고 사주한 일이었다.“정우야, 날 믿지 못하는 거야?”연다인은 억울하다는 듯 울음을 터뜨렸지만, 배정우는 그녀의 우는 모습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당황스러워진 연다인이 울며 그를 끌어안으려 하자, 배정우는 몸을 피하며 말했다.“다인아, 난 지금 네게 솔직
임슬기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다음 날 아침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테이블 위에는 종이 한 장과 보온 도시락이 놓여 있었다.[밥 맛있게 먹어.]보아하니 진승윤이 놓고 간 모양이었다.아무리 반응이 무딘 임슬기라 해도 어젯밤 진승윤이 준 물을 마시자마자 왜 졸렸는지는 알 수 있었다.분명 물 안에 무언가를 탔을 것이고 임슬기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를 추궁하고 싶지는 않았다.그저 진승윤은 임슬기가 편히 쉬기를 바랐을 테니까.김현정을 보러 가려고 외투를 입고 병실을 나서는데, 마침 시비를 걸러 온 연다
전화는 금방 연결되었고, 배정우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연다인은 깜짝 놀라 얼어붙은 사람처럼 육문주를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육문주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형수님을 보러 왔는데 상태가 괜찮아서 알려드리려고 전화했어요. 형이 괜히 걱정할까 봐.”“알았어.”갑자기 육문주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런데 마침 연다인이 찾아와서...”육문주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당황해진 연다인은 급하게 그의 휴대전화를 빼앗아 끊어 버리고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당신... 정우랑 무슨 관계야?”감히 배
임슬기가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니, 차희라가 영양제를 들고 서성거리며 서 있었다.“여사님?”“임슬기 씨.”차희라는 영양제를 옆 테이블에 놓으며 말했다.“김현정 씨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영양제를 좀 가져왔어요.”김현정은 김씨 가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김서우가 임슬기를 다치게 한 일을 생각하면 화가 났다.“가져가세요! 당신이 가져온 영양제 같은 거 필요 없어요.”“김현정 씨, 이건 제 마음이에요.”김현정이 다시 거절하려 하자, 임슬기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젓고 차희라를 향해 말했다.“여사님, 왜 오신 건지 용건
차희라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연속으로 사과하며 떠났다.차희라가 떠난 후, 임슬기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이번 생에서 그녀가 가장 후회하는 두 가지가 있었다.하나는 연다인을 임씨 가문으로 데려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배정우와 결혼한 것이었다.만약 그녀가 배정우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빛이었을 것이고, 그녀 마음속의 비밀이었을 것이다.최소한 지금처럼 상처투성이가 되어 서로를 미워하는 관계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그 뒤로 며칠은 비교적 평온하게 지나갔다.
임슬기는 잠깐 멈칫하다 그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확실히 그날의 남자였지만, 머리는 짧게 자르고 수염도 깔끔하게 밀어 전혀 딴 사람 같아 보였다.강재호는 두 사람의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보고 급히 설명했다.“임슬기 씨, 오늘은 진심으로 사과드리러 왔습니다.”의중을 확인한 김현정은 픽 웃으며 말했다.“강재호 씨, 누가 자기소개를 그렇게 해요. 복수하러 온 줄 알았잖아요.”김현정의 말에 강재호는 귀가 붉어지며 사과를 연발했다.“죄송합니다, 정말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진심으로 사과드리려고요. 지난번은 제가 너무 충동적이었어
아침 식사 시간, 임슬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배정우를 몇 번 흘깃 쳐다보았지만, 별다른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못 들은 건가?’임슬기는 배정우가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식사 후, 배정우는 그녀에게 봉투 하나를 건넸다.“새 옷이야. 갈아입어.”임슬기는 거절하려 했지만, 임종현을 학교에 데려다주려면 옷을 바꿔입어야겠다는 생각에 받아들였다.“고마워요.”방으로 들어가 봉투를 열어보자, 검은색 롱드레스와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이해할 수 없는 배정우의 행동에 임슬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정우야,
임슬기는 눈물을 닦고 침대 옆으로 다가가 이불을 바꾸려던 찰나, 깨끗한 이불이 깔린 걸 발견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곳이 먼지 하나 없이 청소되어 있었다.‘누가 청소한 거지? 지난번에 왔을 때는 먼지가 가득했는데?’책장 옆으로 가던 중 그녀는 갑자기 일기장이 사라진 걸 알아챘다.배정우가 가져간 것 같아 속이 덜컹 내려앉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가 봤다 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일기장에 있던 사진은 이미 임슬기가 가져갔으니, 배정우는 그녀가 쓴 일기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아챌 리도 없었다. 설령 알아챈다 해도, 모두 오래
남자의 몸에서는 희미한 술 냄새와 담배 향이 났다. 또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임슬기는 숨이 막혀 몸을 비틀며 저항했다.“놔요.”하지만 배정우는 놓아주기는커녕 더욱 단단히 끌어안더니, 차가운 입술을 그녀의 귓가에 가져다 대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싫어.”“배정우 씨,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슬기야, 가지 마. 내 곁에 있어 줘.”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에 임슬기는 숨이 턱 막혀왔다.한참 후, 배정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진짜로 날 잊었으면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응?”임슬기는 이를 악물고 냉정하게 말했다
“안 그럴 거야. 이제 종현이 곁을 다시는 떠나지 않을 거야.”임슬기는 코를 훌쩍였다.“누나는 종현이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 졸업하고, 대학 가고, 결혼해서 아이 낳는 모습까지 다 보고 싶어. 누나가 곁에 있을게. 앞으로 계속...”임슬기는 만약 죽지 않는다면, 정말로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다.임종현은 주먹을 꽉 잡으며 말했다.“하지만 난 아직 용서는 못 하겠어요.”“종현아, 누나한테 시간을 줘. 나중에 모든 진실을 알게 될 거야. 알겠지?”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껴안고 있었다.임종현은 임슬기의 손을 떼어내고 돌아서서
임종현이 물을 사 오는 동안, 임슬기는 이미 약을 먹고 벤치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여기 물. 약 먹어요.”임슬기는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고마워.”“대체 무슨 병인 거예요?”임종현은 한 발짝 떨어져 서서 눈살을 찌푸렸다.“대충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요.”임종현의 관심에 임슬기는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폐암에 대한 건 여전히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임슬기는 임종현도 배정우처럼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폐렴이야.”“그냥 폐렴이요?”임종현은 자신의 교복
“너! 너희들!”최민경은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렸다.“너희들 지금 말도 안 되는 억지를 피우면서 사람을 괴롭히는 거야?”마치 진짜 피해자인 양 주저앉아 우는 최민경의 모습에 우현식조차 보기 힘들어 한마디 했다.“엄마, 그만 좀 해요.”한창 체면을 중요시하는 사춘기였던 터라, 우현식은 창피함에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임종현을 고아라고 놀렸어요.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다고.”말을 마친 우현식은 최민경이 쏘아보자, 겁에 질려 바로 덧붙였다.“하지만 내가 먼저 때린 건 아니에요! 임
안 그래도 몸이 허약했던 임슬기는 잡아당기는 힘에 즉시 비틀거리며 배를 책상 모서리에 부딪혔다.“아!”갑작스러운 통증에 임슬기는 숨을 헐떡이며 배를 움켜쥐고 책상에 기댔다.그 순간, 계속 침묵하고 있던 임종현은 갑자기 뛰어와 최민경을 밀치며 소리쳤다.“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우리 엄마는 왜 불러요!”최민경은 눈살을 찌푸렸다.“이렇게 큰 일이 났는데도 엄마가 안 오다니, 임씨 가문의 교육이 어떤지 뻔하네!”“다시 한번 말해봐요!”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은 건 임종현의 영원한 아픔이었다. 예전엔 임슬기가 보호해 줘서
전화를 여러 번 걸었지만, 배정우는 받지 않았다.초조해진 임슬기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었고, 얼굴은 붉어져 평소와 다르게 생기가 돌아 보였다.“아가씨, 임종현과 무슨 관계예요? 몇 반인지도 모르세요?”임슬기는 입술을 깨물며 배정우한테 전화를 계속 걸며 사과했다.“죄송해요. 제 동생이에요. 2년 동안 못 봤어요.”경비원은 비웃듯 그녀를 흘끔 보며 말했다.“2년 동안 못 봤으면 신원 확인이 안 되는데요.”그때 드디어 전화가 연결되었다.“무슨 일이야?”“배정우 씨, 종현이 몇 학년 몇 반이에요? 담임 선생님
‘다시 시작하자고?’임슬기는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이 울었다.왜 이 남자는 항상 술만 마시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걸까. 그들은 정말로 돌아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는데.그리고 임슬기는 진심으로 배정우가 미웠다. 그의 무정함, 어리석음, 냉담함과 그녀를 향한 속박.예전에 배정우는 이혼하지 않는 이유는 절대 사랑 때문이 아니라, 임슬기를 곁에 두고 계속 괴롭히기 위해서라고 말했었다.‘다시 시작하자고? 또 한 번 속이려는 거야? 하지만 정우야, 이번에는 정말로 속지 않을 거야.’“슬기야?”전화기 너머에서 다시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