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에요. 괜찮아요.”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한숨이 들려왔다.“슬기 씨, 임씨 가문 저택이 필요한 거라면 제가 도와줄 수 있어요. 저희 성진 그룹에 140억 정도는 있거든요.”“아니에요. 변호사님...”임슬기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제 불행으로 다른 사람마저 불행해지는 건 원치 않아요. 돌아가신 제 부모님과 집사님만으로도 충분해요. 게다가 변호사님 교통사고도 그렇고 심지어 저를 도와준 간호사도 병원에서 해고되고 말았는걸요.”“알고 있어요.”“알고 있다고요? 설마 그 간호사... 변호사님이 붙여주신 거예요?”“네, 슬기
“임슬기!”배정우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임슬기를 불렀다. 이미 적응된 임슬기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저 담담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내가 연다인을 챙겨주는 걸 꿈도 꾸지 마.”“임씨 가문 저택이 필요 없나 봐?”그러자 임슬기는 피식 웃었다.“배은망덕한 연다인이 있는 한 내가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연다인 발가락을 핥아도 절대 내가 얻지 못하게 막을 거야.”말을 마친 그녀는 이내 연다인을 향해 웃었다.“그렇지, 연다인?”연다인은 배정우의 품에 꼬옥 기대어 아주 연약한 목소리로 말했다.“정우야, 화내지
그 순간 피가 역류하는 느낌에 바로 욕실로 뛰쳐들어가 토해냈다. 고개를 숙이자 그녀는 지난번처럼 붉은 피가 아닌 검은 피가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수도꼭지를 틀어 피를 흘려보낸 뒤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설령 그날의 비를 맞지 않았어도 매일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니 결국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그녀는 진통제를 꺼낸 먹은 후 배낭에 챙겨 넣고 멨다. 더는 이곳에서 지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배정우와 마주치게 되었고 그는 위압감이 느껴지는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보았다.“어디 가는데?”“상관할 바가 아니잖아.
“조심해요!”말을 마치자마자 누군가 달려오더니 임슬기를 안고 길옆으로 피했다. 이내 귀를 찌르는 브레이크 소리가 들려왔고 운전기사의 욕설도 들려왔다.“눈 똑바로 안 뜨고 다녀?”임슬기는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누군가 자신을 구해줬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상대를 확인한 그녀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그쪽이 왜...?”그녀는 다치지 않았지만 그녀를 구해준 사람은 아니었다. 오른손은 바닥에 쓸려 까져버렸고 피가 조금 새어 나오고 있었다.“어머, 피가 나요. 얼른 병원에 가요.”그러자 여자가 그녀를 붙잡았다.“아니에요.
금원 아파트에 도착한 두 사람은 차에서 내린 후 바로 집으로 올라갔다. 집은 꽤 크기가 있었고 복식이었다.“언니, 이 아파트도 진 변호사님이 직원 복지라고 마련해준 거예요. 정말 괜찮죠?”임슬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정말로 좋네요. 약상자는 어디에 있어요?”김현정은 서랍을 가리켰다.“두 번째 서랍에 있어요.”“그래요. 제가 가져올 테니까 앉아 있어요.”김현정은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임슬기가 약상자를 들고 오자 바로 웃으며 신이 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임슬기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왜 그렇게
김현정은 그런 임슬기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언니, 저도 같이 가요.”임슬기는 원래 바로 찾아가려고 했지만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게다가 서우마을까지 운전해서 2시간 정도 걸릴 것이었다.고민하고 있던 때 김현정이 입을 열었다.“언니,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가요. 만약 도망치려고 했다면 이미 도망쳤을 거예요. 내일 간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을 거예요.”임슬기는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 전 이만 집으로 돌아갈게요.”말은 이렇게 했지만 임슬기는 고민
“알았어.”배정우의 목소리는 너무도 딱딱해 연다인은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응, 그럼 정우야 밥 잘 챙겨 먹고 쉬엄쉬엄해. 난 더는 방해하지 않을게.”그 말을 들은 배정우는 조금 전 자신이 심하게 말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조금 누그러진 어투로 말했다.“응, 그래. 방금 내가 너무 차가웠지? 미안해. 얼른 쉬어.”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다. 비록 어투가 누그러지긴 했지만 연다인의 그의 목소리에서 짜증을 눈치채고 있었다.예전의 배정우는 임슬기의 애교를 아주 좋아했다. 임슬기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럽고 귀여웠으니까. 마치
임슬기는 초음파 사진과 검진 결과지를 들고 비틀대며 나왔다. 머릿속엔 온통 의사가 한 말뿐이었다.‘신장이 하나라고... 정말로 하나라고...'머릿속에 하나의 가설이 떠올랐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김현정은 복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넋이 나간 그녀의 모습을 보곤 바로 달려가 부축했다.“언니, 무슨 일이에요? 아기 상태가 안 좋대요? 아니면 암이 더 악화되었대요?”임슬기는 여전히 넋을 잃은 상태로 고개를 저었다.“아... 아니에요.”“언니 모습을 보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은데요. 혹시 다른 곳에 문제라도 생긴 거
“내가 뭐 도와줄 일 있어?”임슬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미 충분히 도와줬어. 너까지 휘말리면 내가 더 걱정돼.”문득 진성한 쪽 일을 떠올린 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진승윤을 바라보았다.“근데 너야말로 괜찮아? 혹시 김씨 가문 쪽에서...”그 순간 그의 얼굴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너 얼굴 왜 이래?”불현듯 배정우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임슬기는 날카롭게 물었다.“배정우가 그랬지?”진승윤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아냐, 그냥 부딪힌 거야.”“거짓말하지 마.”임슬기는 그의 얼굴을 억
육문주가 아직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응급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다가왔다.“다행히 제때 도착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다만 심각한 출혈이 있어 당분간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임슬기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물었다.“선생님, 현정이 몸에 난 상처들은요?”비록 다리 한쪽밖에 보지 못했지만 온몸이 피투성이였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의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조금 전 이미 전신에 약은 다 발라두었습니다. 다만 계속해서 치료가 필요합니다.”임슬기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임슬기는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점점 초조해졌다.급히 거실로 달려가 서랍과 상자를 뒤져 욕실 열쇠를 꺼냈지만, 마음이 급할수록 손이 떨려 열쇠를 제대로 꽂을 수조차 없었다.“현정아, 현정아, 제발 버티고 있어. 안 돼... 제발...”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결국 임슬기는 어깨로 문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두세 번 들이받자 문이 휘청이며 열렸다.문틈 사이로 보인 광경에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김현정은 욕조 안에 쓰러져 있었고 팔에는 붉은 상처가 길게 나 있었으며 욕조 안
미디어의 자극적인 보도 탓에 상황은 점점 더 왜곡되었고 김현정은 마치 스스로 몸가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사람, 방탕하게 구는 사람으로 몰려버렸다.임슬기는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분노에 휩싸였고 당장이라도 연다인을 찾아가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곧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정신을 다잡았다.이 일은 김현정에게 있어 너무나도 큰 상처다. 절대 감정적으로 행동해선 안 된다.반드시 가장 합리적이고 피해가 적은 방법을 택해야 했다. 무엇보다 김현정이 이런 기사나 사진을 보는 건 막아야 했다. 절대로 보면 안 된다.그 순간 그
주방에서 임슬기는 면을 삶고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딴 데로 가 있었다.한편으로는 김현정의 상태가 걱정됐고 또 한편으로는 연다인이 다음에 무슨 짓을 벌일지 불안했다.생각이 많아지는 그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임슬기는 불을 약하게 줄이고 도어스코프로 밖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문주 씨, 도대체 어디 갔었어요? 아침에 전화했는데 왜 계속 안 받았어요?”육문주는 아직도 어제 입었던 정장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안색은 좋지 않았으며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어젯밤에 좀 일이 있었어요. 현정 씨는 안에 있어요?”“있어요.”육문주가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말해 봐, 연다인!”“난 말이지 네가 무너지는 꼴을 보는 게 제일 즐거워. 임슬기, 네가 미쳐버릴 정도로 무너지고 나면 정우도 너랑 이혼하겠지. 그때쯤이면 나도 자연스럽게 정우의 아내가 되겠네?”임슬기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연다인,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 경고하는데, 더는 함부로 굴지 마!”하지만 연다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도 참 한심해, 임슬기. 그렇게 소리만 질러대고 그 외엔 뭘 할 수 있는데?”“이 비겁한 년!”임슬기가 더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욕실 안에서
임슬기는 순간 멈춰 섰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김현정을 바라보며 물었다.“현정아, 무슨 일이야?”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슬기 언니... 제발 오지 마요!”김현정은 몸을 더 안으로 움츠리며 눈물범벅인 얼굴로 간절히 애원했다.“부탁이에요, 오지 마요... 제발...”김현정의 반응이 너무 격해지자 임슬기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알겠어. 안 갈게. 여기 이렇게 있을게. 괜찮지?”김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임슬기는 김현정이 우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
‘허, 승윤아? 참 다정하게도 부르네.’임슬기는 취기에 휘청이며 배정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중얼거렸다.“너랑 있으면 마음이 좀 놓여. 고마워, 승윤아.”배정우는 그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상대는 술에 잔뜩 취한 상태라 불러도 소용없고 화를 낸다고 바뀔 것도 없었다.결국 그는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주 제대로 한 대 갈겨. 힘 좀 써서.”...다음 날.임슬기는 흐릿한 정신으로 깨어났다. 입안이 텁텁하고 목이 바짝 말랐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중얼거렸다.
그 말을 입에 올리자마자 진승윤은 바로 후회했다.너무 충동적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있었을까.만약...“좋아.”진승윤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임슬기가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좋아요. 진 변호사님께서 내가 몸 약한 것만 안 싫어한다면 말이죠.”진승윤은 어리둥절한 채 말을 잇지 못했고 임슬기는 그의 얼굴 앞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지금 혹시 후회하는 거 아냐?”“아, 아니...”“나도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몰라. 근데 내가 죽고 나면 내 동생이 정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