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두 가지 큰일이 일어났다. 한가지는 윤설아와 정하진이 좋은 감정을 가지고 만나는 중이라고 발표했다. 기자들 앞에서 애정을 과시하던 그들은 앞으로 결혼 계획이 있는지, 비즈니스 관계로 인한 정략결혼은 아닌지 묻는 물음에는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여지를 내보였다.윤씨 가문과 정씨 가문이 사돈을 맺는 것은 그야말로 큰일이다. 두 재벌 가문이 사돈을 맺는 건 너무도 흔한 일이다. 문제는 최근 일어난 일들이었다. 게다가 두 가문 모두 한소은과 얽혀 있는 상황이다.대윤 그룹은 지금 한소은이 회사 내부 인원과 짜고 쳐 대윤 그룹을 무너뜨리려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조향 협회에서는 그녀가 조향 자격증이 없다며 보이콧을 선언하는 중이다.이 두 가지 일을 합쳐 보면 더욱 재미가 있다. 두 가문이 손을 잡고 한소은을 무너뜨리려 하는 게 아닌지 하는 의심도 제기되었다.물론 최근 조향 협회 내부에 문제가 많아서 사람들의 시선은 한소은이 자격증이 없다는 사실에서 멀어졌었다. 오늘 윤설아와 정하진이 좋은 감정을 가지고 만나고 있다는 소식은 사람들의 시선을 다시 그녀에게로 끌어왔다.다들 제각기 다른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이 진작에 손을 잡고 일부러 한소은을 무너뜨리려는 하는 것이라는 말들이 나왔다.반면, 가문도 배경도 없는 작은 인물을 윤씨 가문과 조향 협회가 손을 잡고 그녀에게 이런 짓을 할 리가 있냐는 물음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된 건 모두 자기의 문제라는 말도 있었다.심지어 자기의 말이 맞는다며 전에 그녀가 향수 첨가제 소동이 있었을 때 내놓은 음성파일을 끄집어내는 사람도 있었다. 음성 파일에는 당시 그녀가 향수에 약품 성분을 추가해 향을 확산하게 한다는 말과 약품을 추가 할 수 있으면 금지 성분도 얼마든지 추가 할 수 있다는 말이 녹취되어 있었다. 이로써 모두 그녀의 문제라고 단정 지었다.네티즌과 대중들이 이것으로 다투고 있을 때 한소은은 하나도 영향받지 않았다. 며칠간 그녀는 향수의 마지막 단계를 진행하느라
그의 말을 들은 윤설아가 고개를 저었다. 마음이 홀가분 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무거워졌다.“아니야. 불안해. 어딘가 이상하단 말이야.”만약 윤소겸이 자기는 억울하다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면 오히려 마음이 놓였을 것이다. 윤설아는 이 배다른 동생을 너무도 잘 알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실종되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모든 죄를 인정한 게 너무도 이상했다.그가 안 하던 짓을 한다는 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말인데. 이 일이 보이는 것처럼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설아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지니 자기의 계획들을 망칠까 걱정이었다.“설마요.”그녀의 수하가 미간을 찌푸렸다.“윤소겸이 모든 죄를 인정했으니 경찰에서 더 이상 조사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그 프로젝트는 전적으로 윤소겸이 책임지고 있었으니, 죄를 인정하는 건 당연하다고 봅니다. 아가씨께서 너무 걱정하신 거 같습니다.”“네가 뭘 알아?”윤설아가 크게 호통을 쳤다.“정말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으면 내가 그렇게 많은 공과 시간을 들이겠어? 노 부장은 어딨어?”“노 부장님은 아프시다며 이틀간 연차 내셨습니다.”“알겠어. 가봐. 경찰 쪽에 가서 뭐가 더 있는지 알아보도록 해.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보고 하고”“네.”윤설아는 지금 이 상황이 불안했다. 그녀는 이 사건에 둘러싸인 기운이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도무지 어디가 이상한지는 알 수가 없었다.윤소겸의 머리로 이렇게 많은 걸 생각해 낼리가 없다. 성격도 불같은 사람이 순순히 자수를 했다는 게 말 같지도 않았다.그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윤중성에게 전화했다.“아빠?”“이제 속이 시원해?”윤중성은 잠시 침묵하다 조롱을 담은 말투로 그녀에게 말했다.“......”윤설아는 아버지의 반응이 어이없었다.“네 동생, 이제 감옥살이해야 해 모든 죄를 인정했으니 이제 속이 시원해? 속으로 기뻐 죽겠지? 축하해, 윤 사장, 윤설아 사장!”윤중성이 분노에 겨워 한 글자 한 글자씩 말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전화를 뚝 끊어 버렸
윤설아는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멀리 가져갔다. 노형원이 목소리가 자기의 귀를 더럽히기라도 한 듯 전화 너머에서 소리가 작아져서야 다시 귀에 가져다 댔다.“조금만 버텨. 요 며칠은 연차 쓰지 말고 출근해. 너에게 맡겨야 할 일이 있어.”“무슨 일인데?”노형원이 재채기를 크게 하고는 이어서 말했다.“기사 난 거 봤어. 곧 결혼한다며? 축하해! 요즘 결혼 준비로 많이 바쁘지? 걱정하지 마! 누나 결혼식은 꼭 참가할게.”“말 돌리지 말고!”윤설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고 엄숙하게 말했다.“내가 결혼한다는 일 말고, 윤소겸 말이야.”“그 자식 자수했잖아.”회사 내부에 윤소겸이 자수한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대윤 그룹 향수 사건이 시끄러웠던 만큼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관심도 뜨거웠다.“그 자식이 자수한 건 맞아.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아?”그녀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분명히 누가 뒤에서 그 자식에게 지시한 거야. 실종되었던 며칠간 어디에 있었는지, 왜 갑자기 자수를 한 건지. 그 자식 성격에 집에 돌아왔으면 날 먼저 찾아와서 따지는 게 정상 아닌가?”“어쩌면 양심에 찔려서 더 이상 누나와 회사를 두고 싸우고 싶지 않았나 보지.”“지금 장난칠 기분 아니야. 정말 중요한 일이란 말이야. 그 자식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무슨 목적으로 자수를 한 건지 빨리 대책을 생각해 두지 않으면 우리가 앞서 했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고!”잠시 머뭇거리다 윤설아가 이어 말했다.“혹시 뒤에서 윤소겸을 지시하는 사람이 내 큰아버지가 아닐까?”“큰아버지? 윤백건 말이야? 그 사람은 지금 병원에 있잖아. 겨우 목숨만 붙어 있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이 그랬다고?”사실 윤설아도 확신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큰아버지는 아직 혼수상태에 빠진 게 아니다. 변호사를 불러 유서를 공증하는 일을 벌일 수 있다면 뒤에서 윤소겸을 지시하는 것도 못할 건 없었다.게다가 그녀의 큰어머니도 계시니까. 보기엔 연약하지만 이런 일을
“어디 갔어? 다들 어디 간 거야?”윤설아는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뒤로 두발 물러났다. 텅 빈 병실을 보니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마침 간호사가 지나가자 다짜고짜 간호사의 멱살을 잡아당겼다.“여기에 입원해 있던 사람 어디 갔어?”간호사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퇴, 퇴원했어요.”“퇴원했다니? 언제 퇴원한 건데, 어떻게 퇴원한 건데 다 죽어 간다고 하지 않았나? 어떻게 퇴원할 수가 있지? 그리고 퇴원하는데 왜 가족에게 알리지 않은 거야? 누가 퇴원해도 된다고 허락했어?”윤설아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벌게진 두 눈으로 간호사의 멱살을 잡은 손에는 힘이 더 들어갔다.겁에 질린 간호사가 오들오들 떨며 대답했다.“저, 저도 몰라요!”“설아야, 설아야......”그녀의 전화를 받은 요영이 이제야 도착했다. 간호사의 멱살을 잡고 화를 내는 딸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이게 뭐 하는 짓이야.”겨우 윤설아 손에서 벗어난 간호사가 겁에 질린 채 황급히 도망갔다.윤설아가 떨리는 손으로 윤백건의 병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엄마, 윤백건이 퇴원했대. 어떻게 말 한마디도 없이 퇴원할 수가 있지? 말도 안 돼! 다 죽어가는 사람이 퇴원하다니! 장례식장에 실려 가야 하는 사람이라고. 어떻게 멀쩡히 퇴원할 수가 있지?”윤설아는 간호사가 한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설아야, 진정해. 분명 뭔가 잘못되었어. 네가 보낸 사람들은?”요영도 사실 이 광경에 많이 놀랐다. 하지만 딸 앞에서 나잇값을 못 하면 안되니 애써 침착하며 생각했다.“몰라. 아무런 소식도 없었어. 아마, 다들 날 배신한 거겠지.”윤설아의 두 눈이 초점을 잃었다. 지금처럼 이렇게 머리가 복잡해진 것도 처음이다.‘어떡하지. 윤백건이 퇴원했어. 이제 더 이상 그를 손에 쥐고 주무르며 회사 경영권을 달라고 할 수 없어. 지금껏 모두 윤백건의 계략이었구나. 윤소겸이 자수를 한 일이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유서를 공증한다
반백 살이 넘은 조 교수가 느릿하게 안경을 슥 밀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윤설아가 이런 무례한 행동을 하는 걸 이미 예상했는지 화가 나 보이지 않았다. “윤설아 씨, 당신 큰아버지의 상황은 특수해요. 제가 퇴원을 허락하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죠.”“조 교수님 말은 큰아버지가 퇴원한 후 무슨 일이 생겨도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건가요?”윤설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환자 보호자께서 퇴원을 요구하셨고 윤백건 씨 본인도 퇴원하길 원했어요. 퇴원 후 발생한 모든 일에 병원이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보증서에 사인까지 했는데 우리 병원에서 무슨 수로 퇴원을 막겠어요?”“언제 퇴원한 건가요?”윤설아가 두 팔로 책상 위에 몸을 지탱하고 서서 이를 갈며 조 교수에게 따져 물었다.“아마 이틀 전쯤 일거에요.”“이틀 전?”‘윤소겸이 다시 나타나서 자수하러 가기 전 이잖아! 그렇다면 그 자식이 자수한 게 큰아버지와도 상관이 있다는 말인데.’“큰아버지가 퇴원하는 날 누가 마중 나왔나요?”윤설아가 이어서 물었다.“그건 잘 몰라요. 아무튼 입원할 때처럼 많은 사람이 왔더군요. 당신도 알다시피 윤씨 가문은 인맥이 넓은 가문이잖아요. 모든 사람을 내가 다 알 리가 없죠. 안 그런가요?”조 교수는 많은 사람이 마중 나왔지만 모든 사람을 다 알지 못한다고 얼버무렸다. 이런 모습을 보고 윤설아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다 하나만 더 물었다.“큰아버지께서 퇴원하고 어디로 가신다는 말 없었나요?”조 교수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그런 일을 의사가 어떻게 알겠어요. 보통 퇴원하면 모두 집으로 가지 않나요? 그렇게 큰아버지가 걱정되시면 집으로 가보는 건 어때요?”“......”윤설아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몸을 바로 했다.“알겠어요. 조 교수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이 늙은 여우 같으니라고. 어쩌면 윤백건이 이미 조 교수를 매수했을지도 몰라. 그가 한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 없어.’다른 건 둘째치고 집으로 가보란 말은 오
윤설아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모두 연결해 보았다. 만약 처음부터 윤백건이 짠 판이라면 최초의 목표는 그녀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도 이 판에 한발 한발 빠져들어 결국 그에게 붙잡힌 격이다.‘정말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야! 너무 간사하고 교활한 사람이야!’윤설아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엄마, 만약 윤백건이 정말 곧 죽을 목숨이어서 잠시 우리를 피해 간 거면 이 일은 해결하기 쉬워. 하지만 아픈 척 한 거라면 난 끝장이야.”윤설아의 눈에는 절망이 가득 찼다. 그녀의 모습을 보던 요영은 마음이 아파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걱정하지 마. 엄마가 있잖아. 우리 딸 꼭 지켜 줄 거야. 잊으면 안 돼. 넌 앞으로 대윤 그룹하고 윤씨 가문 모두 손에 넣어야 해!”“맞아, 난 윤씨 가문의 모든 가업과 재산을 물려받을 거야!”윤설아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사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자기를 지켜준다 해도 윤백건이 죽지 않은 이상,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엄마, 사실 윤백건이 아픈 척 한 것이어도 완전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뭐라고?”“......”윤설아는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 “아니다, 지금은 아직 확실하지 않아. 그저 내 추측일 뿐이야. 나중에 알려줄게!”만약 윤백건이 정말 아픈 게 아니라면 아프게 만들면 되고 당장 죽지 않는다면 죽게 만들면 그만이다. 아픈 척 연기를 이렇게나 잘하는데 신물이 나도록 연기하게 할 생각이다.윤설아와 요영은 윤씨 본가에 가지 않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텅 빈 집이 오늘따라 유난히 그녀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윤중성은 며칠 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젠 진고은 집에 들어가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미 윤중성과 얼굴을 붉힐 대로 붉혔는지라 요영도 그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껏 마음속에 꾸겨둔 실망이 수도 없이 많아서 이제 더 이상 윤중성이란 사람은 요영에게 있어서 중요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게 무슨 뜻이야?”다시 전화를 집어 든 진고은이 느릿느릿하게 물었다.사실 그녀는 요영의 말이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자기 아들과 연관 있는 일이라고 하니 들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아무런 뜻도 아니야. 윤중성보고 전화 받으라고 해. 안 받아도 상관없어. 너한테 말하지 않을 거니까. 지금 네 아들이 경찰에 모든 걸 자백했지? 변호사한테 물어보니 적어도 40살 전에는 나오지 못할 거라고 하네.”진고은은 흠칫 놀랐다. 조금 화가 났지만, 마음속으로는 무섭기도 했다.“요영, 네가 그런 말을 한다고 내가 무서워할 줄 알았어? 내 아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어. 너희 모녀가 겸이를 모함한 거잖아!”말은 이렇게 했어도 내심 걱정하던 진고은이 윤중성을 슥 보더니 전화기를 건넸다.“받아! 한 번만 더 요영이 나한테 전화 걸게 만들면 핸드폰이고 뭐고 다 밖으로 던져 버릴 줄 알아!”전화기 너머에서 윤중성의 목소리가 전해져왔다.“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당신 큰형님 퇴원한 거 알고 있어?”요영은 윤중성과 쓸데없는 말을 단 한마디도 하기 싫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윤백건이 죽은 거야?”윤중성이 흠칫하며 되물었다.“퇴원했다고! 죽은 게 아니고!”요영이 윤중성이 한 말을 바로 잡았다. 그의 반응을 보니 그도 모르는 일인 거 같았다.‘그래, 이렇단 말이지! 윤백건 이 자식이 우리를 속이려 해?’요영은 지금 거의 확신 할 수 있었다. 윤백건이 처음부터 아픈 척한 것 이거나 설령 아팠다 해도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게 다 그가 짠 판이었다.“병문안을 가니 이미 이틀 전에 퇴원했대. 집에도 가지 않았다고 들었어. 지금 당신 형님과 형수님 모두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상황이야. 게다가 설아...... 아니, 내가 감시하라고 보냈던 사람들도 모두 사라졌어. 어딘가 이상하지 않아?”잠시 머뭇거리던 윤중성이 입을 열었다.“사라졌으면 뭐. 형님이 따로 생각이 있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해!”윤중성은 며칠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아들
요영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어갔다.“지금 네 손에 있는 모든 자금을 빼 내올 수 있을 만큼 빼내야 해!”“엄마, 그건 범죄잖아!”윤설아가 흠칫 놀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처리하면 돼. 수를 쓰면 불법인 것도 합법으로 만들 수 있어.”요영은 그까짓 범죄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이 바닥에서 이런 일들을 많이 봐왔어. 서둘러야 해. 네 큰아버지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몰라. 믿을 만한 사람들을 시켜서 회사 문 잘 단속하라고 해. 빈틈으로 쥐새끼가 기어들어 오지 않게!”“알았어.”마치 대전을 앞둔 사람처럼 윤설아는 한껏 긴장한 모습이었다.“설아야, 지금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야! 참, 그리고 형원이보고도 방법을 생각해 보라고 해.”남편과의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졌지만 요영은 딸과 아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족했다.한편, 전화를 끊은 윤중성이 그 자리에서 한참이나 멍해진 상태로 있었다. 진고은이 그의 다리를 툭 쳐서야 정신을 차렸다.“그 여자 생각하는 거야? 그 여자가 보고 싶으면 그 여자한테로 가! 여기서 눈꼴 사납게 이러지 말고!”진고은은 불만이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말 하지 마.”그녀의 모습에 윤중성이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요영이 전화를 한 건 형님이 퇴원했다는 소식을 전하려는 것뿐이야. 형님과 형수님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른대.”“응.”진고은이 대충 대답했다.“사라진 게 뭐. 손발 멀쩡한 사람들이 알아서 잘 갔겠지. 게다가 당신 형님 나이가 얼만데 굳이 당신이 나서서 걱정할 필요가 있어?”“내가 말해도 당신은 몰라.”아무것도 모른 채 푸념만 늘어 놓는 진고은의 모습에 윤중성은 짜증이 났다.진고은은 정말 아름답고 섹시한 여자다. 유일하게 흠이 있다면 생각하지 않고 말부터 내뱉는 것이다.사실 이런 모습도 나쁜 것 만은 아니었다. 평시에 그녀의 이런 모습이 그저 귀엽기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큰일이 발생 했을 때 생각하지도 않고 말을 내뱉는 모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