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해요, 윤 부장님! 하지만 너무 급한 일이라. 혹시 양미나가 입원한 거 기억하시나요?""알아. 근데 왜? 사람을 시켜 병문안 갔잖아. 왜? 또 무슨 짓 했는데?"비서의 말에 그는 순간 양미나가 또 무슨 이상한 짓을 한 게 아닌지 의심이 갔다.유명 모델이 뭔 대수라고. 어차피 CF도 다 찍었고 돈도 이미 줬다. 만약 양미나가 가만있지 않고 이상한 짓을 한다면 회사의 변호사들도 결코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그게 아니라, 지금 양미나 쪽에서 알레르기 때문에 입원했다고 하는데, 알레르기 원인이……."회의를 중단하고 나온 윤소겸의 마음이 급했다. 거기에 우물쭈물 한 비서를 본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발길질했다."뭔데, 빨리 말해!""양미나 말로는 알레르기 원인이 저희 향수 때문이고 그 향수에 위험 성분이 들어있어 사람 몸에 해를 끼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드디어 말을 꺼낸 비서는 행여 또 발길질 당할까 봐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뭐라고?!"윤소겸이 격하게 화를 냈다."미친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네……그럴 리 없죠."자세한 내용을 모르는 비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맞장구를 쳤다."이건 모함이야! 근거도 없이 그런 말을!"그의 표정은 아주 무서웠다."고소해! 당장 변호사 찾아! 이 무식한 여자가!"그는 갔다 왔다 하며 회의실을 힐끗 보았다. 그리고 순간 침착해졌다."일단 이 일을 알리지 마. 그리고 그 여자한테 가서 원하는 게 뭔지 물어봐. 돈을 원하는 거야? 아무튼 입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그래. 그렇지 않으면 가만 안 둘 테니까!"윤소겸은 일단 이 일을 조용히 해결하기로 했다. 일이 커지면 쉽게 해결되지 못할 거니까.하지만 비서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말했다."이미 늦었어요, 부장님! 기자들도 있어서 아마 곧 인터넷에 퍼질 거예요!""누가 기자를 부른 거야?!"그가 화를 내며 물었다."이건 누가 계획한 거야.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빠를 수가 없어!""……."비서가 조
매니저는 말을 마치고 그대로 일보러 나갔다. 윤소겸은 그자리에 멍하니 서서 회의실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러다 두 손으로 얼굴을 툭툭 치더니 정신을 가다듬고 성큼성큼 걸어가서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오늘의 회의는 여기까지 할까요? 다들 의견 없으면 그냥 여까지 합시다."일이 워낙 시급한지라 어쩌면 먼저 헤쳐지는 것이 우선책이라고 생각하였다.다들 윤소겸의 갑작스런 말에 어리둥절하여 윤소겸만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였다."겸아, 그러니깐 ... ...윤부장, 지금 막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자, 여기로 와서 이 향수를 좀 봐봐." 윤중성은 머쓱해서 껄껄 웃어대며 향수를 꺼내들었다."자, 어서 와서 보라니깐. 다들 향내 한번 맡아 봐봐요."윤중성은 손을 휘휘 저으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나 뭔가 문제라도 있는지 윤소겸은 되려 한보 물러나더니 피하려고 하는 것이였다."아니... ...잠시만!"그는 황급하게 향수에 내미는 손들을 밀쳐내며 높게 소리쳤다. 모두들 윤소겸의 예사롭지 안은 행동에 깜짝 놀라했다. "겸아, 지금 뭐하는 거야?!" 윤중성도 화들짝 놀랐는지 얼굴을 찌프리며 꾸중하려 하였다. 술먹고 지각에 이런 행패까지 부리다니! 윤중성은 이런 생각에 성이 나가 시작했다. 그러나 윤소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서 말을 이어 갔다."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깐 내말은 그리 급해할 이유가 없단 얘기죠, 하하... ... 아까 여러분들의 의견도 잘 들었어요, 저한테 시간 좀 주세요, 고민해 봐야 할 것이 많아서... ...""무슨 고민? 할 얘기 있으면 지금 말해야지?" 그순간 저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손에 들려있는 휴대폰을 책상위에 놓으면서 고개를 들고 윤소겸을 아니꼽게 쏘아보며 말했다.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이 아닌 회사의 행정 부사장 장진이였다.장진으로 놓고 말하자면 그는 제일 예전부터 윤백건과 두터운 정을 쌓아왔던 사람이다. 회사에서 30여년동안 윤백건과 같이 일을 해왔으니
"겸아, 이게 대체 무슨일이냐? 이거, 이양반들 이거... ...돈 뜯어낼려고 하는 수작들이네! 맞지, 겸아?"윤중성이 머리를 굴려 재빨리 말을 돌려댔다. 그러자 윤소겸도 금방 눈치를 채고 윤중성을 힐끔 쳐다보도니 맞장구를 쳐댔다."네, 네! 이거 완전 찌라시에요, 보면 모르겠어요, 다들?! 우리 향수는 문제가 없다고요! 이 양미나라는 이분 어제까지 별 말이 없다가 지금 나와서 떠드는거 보세요. 꼭 저한테 무슨 원한을 가지고 이러는게 분명해요."윤소겸은 언성을 높혀 둘둘 대며 설명했다. 그러나 장진한테 결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윤소겸, 너한테 원한이 있다고? 무슨 원한인데?" 장진은 계속해서 캐물었다."... ..."윤소겸은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없는걸 지어 냈으니 장진에 말에 즉각 대답할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버티고 서서 계속 둘러댔다."아니, 내말은 나한테 돈을 좀 뜯어낼려고 수작부린다는 말이에요.""그러면 왜 굳이 기자들한테 찾아갔지? 그냥 자네한테 연락하면 되는거잖아, 아니야?"그러나 장진은 결코 윤소겸을 순순히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게... ... 전 좋게좋게 말하려 했죠. 근데 양미나 이분이 뒤통수를 친거에요."윤소겸은 억울하는 표정으로 울상이 되여 계속 말하였다."장사장님, 저도 피해자에요, 아니, 저한테만 왜 그러세요?!"그말을 들은 장신은 냉소적인 태도로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총구를 윤중성한테 돌렸다. "자네가 보기에도 내가 너무 윤부장만 잡고 있는걸로 보이나?"윤중성은 웬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냐는 듯 다급해서 얼버무렸다."아... ....아닙니다! 다 우리회사를 위한 일인데 누가 누굴 잡는다뇨? 하하하... ...우리 여까지 하고 대책이나 세우는게 어떨가요?"윤중성은 어색하게 웃어보이고는 상황을 잠재우려 하였다. 더 나간다간 진짜 윤소겸이 크게 한방 먹을거 같았기 때문이다."저 그래서 이미 사람을 시켜 양미나한테 찾아 봐가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뭘 원하는지! 그리고 기사도 내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윤설아는 유난히 조용했다.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모두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장진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회의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윤소겸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의 입가에는 냉담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이 난장판이 자기 때문에 벌어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윤소겸은 장진의 태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가 뭔데 자기에게 따지듯 묻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내내 침묵하던 윤설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 씨 아저씨, 이번 일은 마치 계획된 것 처럼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났어요."잠시 생각하다 그녀가 이어 말했다. "저도 그 여자가 의심스러워요.”윤소겸이 그녀의 말이 일리 있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맞아, 그 여자가 이렇게 만든 게 확실해. 분명히 나를 모함하고 우리 회사를 모함한 거야!""어쩌면 우리의 경쟁 회사에서 그녀를 사주한 것일지도 몰라. 그래, 환아! 환아가 그랬을 수도 있지! 지금 바로 그 여자를 조사해야겠어!”윤소겸은 화가 많이 났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는 그를 장진이 쓱 보자 바로 얌전해졌다.마음속으로는 여전히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지만, 윤소겸은 대윤 그룹의 회장 자리에 앉지 못한 지금, 회사 임원들과 싸울 자격조차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조사는 반드시 해야 해."윤설아가 계속 말했다."하지만 지금 가장 시급한 건 자체 조사를 해 봐야 한다고 생각해.”“자체 조사?" 윤소겸은 그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윤소겸 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윤중성도 어리둥절한 표정이다."설아, 그게 무슨 말이냐?“지금 수많은 언론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어요. 더 큰 화를 불러오기 전에, 먼저 우리의 향수에 정말 금지 성분이 있는지, 정말 문제가 있는 게 아닌지 스스로 조사해야 해요. 스스로 조사해서 문제가 없는 것만 확인이 된다면 그 어떤 누군가가 우리를 조사한다 해도 두렵지 않을 거예요. 설령 누군가가 우리를 모
윤설아는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당연하죠!이로써 회의는 무사히 끝마쳤다.윤소겸은 자신의 일생일대 가장 빛나는 순간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 날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쪽은 팔릴 데로 다 팔리고 마지막에 뒷수습까지 남에게 맡기게 되었다.“윤설아,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사무실로 돌아가기도 전에 윤소겸이 달려들어 윤설아의 팔을 잡아당겼다.“윤 부장, 이게 무슨 짓이야?" 윤소겸에 붙잡힌 그녀는 애써 벗어나려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이거 놔, 아프잖아.”그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윤소겸이 씩씩거리며 물었다."모두 다 네가 계획한 거지? 네가 이런 일을 만들어서 날 모함한 거지? 왜 우리가 우리 향수를 조사해야 하는 건데? 무슨 근거로 내 향수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건데!”윤소겸이 큰 목소리로 그녀에게 따지며 물었다. 사무 구역인지라 그의 목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무슨 영문인지 궁금해 머리를 내밀어 쳐다보았다.회사의 높은 분들이 싸우고 있는데 그 누구도 나서서 말리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았다.“윤 부장, 진정해. 지금 이런 문제가 생겼으니 우리 모두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하잖아. 네가 이렇게 소리 질러도 소용없어."그녀가 평온하게 말했다."이제 그만 놔.”“안 놔! 너 똑바로 말해!”“뭘 더 말하란 거야? 이 일은 갑자기 발생한 거잖아. 만약 내가 뒤처리 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면, 좋아, 네가 직접 해결해!”그녀도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손에 든 물건을 모두 그의 품속에 던져버렸다.그것들은 모두 홍보팀에서 정리한 자료다. 이번 위기사건에 관하여 윤설아가 전적으로 책임져서 해결하는 것이기에 모두 그녀에게 준 것이다. 윤소겸이 그런 말을 하자 윤설아는 모든 자료를 다 그에게 던져 버렸다. 당황했던 그가 하마터면 자료들을 받지 못할 뻔했다.“내가 이런 상황을 만든 것도 아니잖아? 향수 프로젝트는 줄곧 네가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터져서 내가 너 대신 뒤처리 하는 거잖아. 그런데 넌 오히려 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위기에 대처하는 면에서 윤설아는 확실히 그보다 경험이 많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마침 문 어귀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노형원과 눈을 마주쳤다. 윤소겸이 막 입을 열려고 하자 윤설아가 먼저 말했다."나 잠깐 봐!”그녀는 노형원을 사무실로 불러들여 방문을 닫았다. 커튼은 닫지 않아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표정이 굳은 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아마도 향수 사건이겠지.밖에서 서성이던 윤소겸의 마음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그 여자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 여자가 누군가의 돈을 받고 일부러 그들을 모함하려 했을 것이다.윤소겸은 윤설아의 사무실 앞에서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이내 자리를 떠났다.사무실에서 노형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윤설아의 시선은 줄곧 바깥을 주시하고 있었다. 윤소겸의 그림자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그제야 엄숙했던 표정을 풀었다. 그녀가 노형원에게 사무실 밖을 보라고 눈짓했다.“그 멍청이가 어디로 갈지 알아맞혀 봐?"노형원이 담담히 물었다.“어디로 가겠어. 그 멍청한 자식이 좋은 아이디어라도 떠올랐을까 봐?"윤설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녀는 윤소겸을 자신의 상대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다음 단계는 네 차례야, 그 조향사 쪽, 아무 문제 없지?”“당연하지. 모두 계획대로 되고 있어." 노형원이 주먹을 주었다 피며 웃었다."이제 성공이 눈앞이야. 이 일만 잘 끝나면 앞으로 윤 부사장이 아니라 윤 사장으로 불러야겠네.”“그만 해, 난 그 멍청이가 아니야. 듣기 좋은 말 몇 마디 했다고 내 처지를 잊어 버리진 않지.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잊지 마. 일 잘하시는 큰아버지가 아직 계시잖아.”그녀는 음산한 기운을 내뿜었다. 윤백건이 아직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은근히 불안했다. 윤백건은 그녀에게 있어서 시한폭탄과도 같은 사람이다.“네 큰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하잖아. 너에게 아무런 위협도 가할 수 없는 게 아닌가?" 노형원은 대
한소은이 과일과 죽을 들고 오이연을 보러 왔다.이 계집애는 직장을 그만둔 후 작업실을 도와주다가 오히려 밥 먹는 시간이 불규칙해졌다. 어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전화를 받고 그녀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서한에게서 아주 경미한 위궤양일 뿐 별일 아니라는 말을 들은 한소은이 그제서야 안심하고 아침 일찍 죽과 과일을 사서 병원으로 달려왔다.“누가 나더러 밥 잘 챙겨 먹으라고 매일 잔소리 했지? 그러는 넌, 밥 먹는걸 잊어버린다는 게 말이 돼?”말은 모질게 했지만, 이내 죽을 덜어 작은 그릇에 옮겨 담았다.“지금 네 위장 기능이 약해서 소화가 잘되는 것만 먹을 수 있대. 이제 아무리 먹고 싶어도 맛있는 걸 못 먹게 됐네."한소은이 병실 침대에 걸터앉아 죽을 후후 불며 오이연을 힐끗 쳐다보았다. 꽃처럼 이쁘게 웃는 그녀를 보고 욕을 해야 할지 같이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웃음이 나와?”“당연하지. 네가 이렇게 잔소리하는 거 정말 오랜만이다." 오이연은 달콤하게 웃었다. 물론 이 달콤함은 한소은이 그녀를 보러 온 것 때문만이 아니다.어떤 말솜씨가 서툰 남자가 전화로 그녀의 목소리가 안 좋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한밤중에 달려와 위가 아파 옴짝달싹 못 하는 그녀를 병원에 데려왔다. 또 밤새 잠도 자지 않고 그녀를 돌보았고, 아침밥도 챙겨준 후에야 병원을 떠났다.그의 보살핌에 오이연은 무척이나 감동했다.“너 진짜 아프구나? 병원에 있는 게 그렇게 좋아?" 한소운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죽을 떠서 오이연의 입 가까이에 가져다주었다."입이나 벌려!얌전히 입을 벌리고 죽을 받아먹던 오이연이 웃으며 말했다."맞아, 나 지금 많이 아파. 안 아프면 왜 병원에 있겠어.”“말은 참 잘해. 내가 지금 말해두는데, 앞으로 또다시 밥 제대로 챙겨 먹지 않으면 그땐 정말......”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실 바깥에서 북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여러 사람이 우르르 달려가는 소리가 전해져 왔다.병실 문을 닫지 않아 문 앞을 뛰어가는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야."한소은이 일어나서 병실 문을 닫고 다시 돌아와 오이연에게 죽을 먹였다.이 바닥은 정말이지 하루도 빠짐없이 일이 터진다. 그녀들과 상관이 없는 이상, 쓸데없는 일에 참견할 필요도 없고 어떤 일인지 궁금해할 필요도 없다.오이연은 죽 두 그릇을 먹고 잠시 쉬었다가 바나나를 먹었다.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아마도 그 기자들이 다시 돌아가는 소리일 것이다. 그제야 병실 밖이 조용해진 것 같았다.“이참에 푹 쉬어. 지금 작업실도 별로 바쁘지 안잖아. 다른 거 생각할 필요도 없어. 네 몸만 회복되면 쉬고 싶어도 못 쉬게 할거야."한소은이 그녀에게 말했다.“언니, 테마 시리즈 프로젝트 진행 중이잖아? 시간이 너무 촉박하지 않아?"리사의 그 테마 향수에 대해 오이연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급해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싶었다.이건 작업실 오픈 후의 첫 번째 주문이기 때문이다. 첫걸음을 잘 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아직 주제를 완전히 정하지 못했지만, 초보적인 계획은 짜두었어.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정할 거야. 그때면 너도 회복됐을 거고, 같이 프로젝트 진행하면 돼 안심해, 너 빼고 하진 않을 테니까!"한소은이 웃으며 오이연에게 농담을 했다. 그녀는 진작에 리사 쪽 회사와 접촉하고 있었다. 다만 그쪽에서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다.이 프로젝트를 넘겨받게 된다면 이런 일들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한 걸음만 잘못 가도 다른 사람이 허점을 파고들어 그녀를 공격하게 될 수 있다.과거의 그녀라면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껏 많은 풍파를 겪고, 한 번 또 한 번의 모함을 당한 후에야 얻은 교훈이다.다행히도 모두 잘 헤쳐 나왔고, 그녀의 곁에는 줄곧 그 사람이 그녀를 가르치고 보호하고 있었다.“이 여자가 미쳤구나......”누군가가 갑자기 병실 문을 걷어차며 힘껏 열었다. 입구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어리둥절 한 세 쌍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