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효영의 연이은 물음에 주현철은 침묵했다.그는 감히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프로젝트가 정말 자기의 손에 넣지 못한다면 가서 죽으라는 소리와 마찬가지다!"효영아, 네 아빠는 그런 뜻이 아니라 네 안전을 걱정하는 거야."주 부인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주효영은 무심하게 웃으며 말했다."안전? 내가 네 살 때 진가연과 함께 연못에 빠졌을 때, 진가연을 먼저 구하고 나를 구했을 때 내 안전은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나 봐?""그게 ……."주 부인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딸이 4살 때의 일을 아직 기억할 줄은 몰랐다."널 먼저 구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 당시 가연이가 우리와 더 가까운 곳에 있었어.게다가 널 구하지 않은 것도 아니잖아, 효영아…….""이 말을 꺼낸 건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야. 난 아직 살아있으니까!"주효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그릇을 내려놓았다."다 먹었어요!"그녀는 일어나서 다시 현관으로 걸어갔다. 고개를 숙이고 하이힐에 발을 집어넣으며 무언가가 떠오른 듯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참, 내가 진정기와 거래를 한 건 온전히 내가 필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야. 엄마 아빠를 위한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둬. 그러니까 고마워할 필요도 없고 이 빌미로 모녀 정이니 부녀 정이니…… 그런 쓸데없는 감정 운운하지 말라고!”주 부인은 그녀가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참지 못하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효영아!"안타깝게도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고 주효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이윽고 자동차 소리가 들려오더니 주효영은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집에서 멀어져 갔다."흠!"젓가락을 무겁게 내려놓은 주현철이 화를 냈다."당신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주 부인은 남편을 위로할 기분이 아니었다. 지금은 마음속으로 어떤 핑계를 대도 자기 자신을 위로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무언가에 세게 찔린 것 같았고 매우 고통스럽고 견디기
"돌아왔군!"남자는 그녀를 등지고 있었다. 큰 보스 의자만 보일 뿐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네."주효영이 간단하게 대답했다."일은 어떻게 되었어?""곧 입찰이 다시 열릴 것이고, 그러면 프로젝트는 자연히 주현철의 손에 넘어갈 거예요. 이제 우리 실험 기지는 바로 이 프로젝트 기지 안에 자리 잡으면 돼요"주효영은 잠시 멈칫하며 말을 이어갔다."여기로 오기 전에 그 프로젝트가 진행될 기지로 가보니 장비도 완벽하고 환경도 좋더라고요. 국가가 많은 돈과 물적 자원을 투자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거예요.""아주 좋아!"그가 만족하는 말투로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정말 듣기 거북했다.주효영은 참지 못하고 귀를 한 번 더 후볐다."그런데 왜 이렇게 느린 거야! 그냥 주현철에게 프로젝트를 넘기면 안 되나?"남자는 다시 입찰이 열리면 실험이 조금 더 지체된다는 걸 알았다."그럴 순 없어요. 국가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여서 반드시 절차를 따라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외부에서 의심과 이견을 불러일으켜 우리에게 해를 끼칠 거예요.”주효영이 설명했다.“너희 나라 사람들은 정말 골칫거리야!”남자는 경멸하는 표정을 지으며 콧방귀를 뀌었다.그의 말에 주효영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잊으셨나 본데 전 진작에 이 나라 국적을 포기하고 R 나라의 국적을 땄어요.”"보스와 나야말로 같은 나라 사람인걸요."그 남자는 날카롭고 거칠게 웃으며 의자를 돌렸다.그의 웃는 얼굴은 너무 끔찍해 보였다."너? 넌 그럴 자격도 없어! R나라 국적에 가입했다고 해서 더 높은 혈통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너희는 모두 열등한 사람이야. 나와 함께 서는 것조차도 너희들의 영광이란 말이야!"주효영은 눈썹을 찌푸렸지만 반박하지 않았다."주효영, 내가 널 이끌지 않았다면, 내가 준 데이터와 정보가 없었다면 오늘 네가 여기 있을 수 있었겠어? 이 실험이 성공하면 네 이름 석 자로, 온 세상이 흔들릴 텐데,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까?"남자는
주효영을 노려보던 임상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주효영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한마디 덧붙였다."날 죽이면 보스에게 어떻게 설명할 건데, 충분히 생각한 건가?""당신이 보스한테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마침내 입을 연 임상언은 조롱하듯 되물었다.주효영이 무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그러면 어디 시도해 보던가.""내가 감히 널 죽일 수 없을 것 같아?""그러면 해봐!"엘리베이터 안은 순간 죽음의 침묵이 흘렀다.두 사람의 헐떡이는 숨소리만 들렸고, 모두 상대방의 눈에서 혐오와 분노를 느끼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이 실험이 성공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한참이 지난 후에야 임상언이 입을 열었다.주효영이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이 실험의 가장 큰 투자자인데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이 사업을 실패한 거나 마찬가지네."주효영의 조롱을 무시한 채 임상언은 계속 물었다."원철수는 R18이니 R1, R2 …… 그리고 R17이 있었겠지. 앞에 있는 실험 대상은? 왜 난 본 적이 없는 거지?""상상력이 참 풍부하군!"주효영은 눈을 굴리며 대답하지 않았다."넌 알고 있지!"임상언은 팔로 주효영의 목을 세게 눌렀다. 숨쉬기가 힘들어지자, 얼굴이 빨개진 주효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보스한테 물어보지 그래?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을 말해 줄 거야! 누가 알아? 혹시라도 보스를 기쁘게 해서 당신 아들이 어디 있는지 알려줄지!""어떻게 알았어?!"임상언은 충격을 받은 듯 놀란 눈으로 주효영을 노려보았다.아들이 납치당한 일은 자기와 보스만 알고 있는 일이다. 다른 사람은 이 일을 알지 못했고 경찰에 신고한 적도 없다.그는 감히 신고할 수도 없었고 경찰을 믿지도 않았다. 그저 자기가 믿을만한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아들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더군다나 임상언은 보스가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지 두 눈으로 확인했다. 자기 아들에게도 그렇게 할까 봐 두려워 보스가 하라는 대로
주효영이 보스에게 충성하는 건 그녀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임상언은 달랐다.‘아이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었을까?’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어렸을 때 자신과 진가연을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모두 이익에 의해 주도 되었다.이익을 위해 부모는 자신의 딸을 제쳐두고 조카를 먼저 구하러 갈 수 있었다.그 당시 운이 조금만 덜했다면 자기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을까?‘내가 죽으면 엄마 아빠는 슬퍼하기나 할까? 슬퍼하긴 하겠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하나 더 가졌을 거야.’‘애정과 사랑은 그저 이해관계일 뿐이야.’"당신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사랑받는 것이 어떤 건지 몰라! 이 괴물!"주효영을 노려보며 임상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이 말은 그녀의 가슴을 깊게 찔렀다.원래 주효영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그가 이 말을 하자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바뀌었다.그녀는 차갑게 몇 번 웃으며 말했다."그래, 나는 괴물이야!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랑을 받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인간이 쓸데없이 번거롭게 하는 것이라는걸 알겠어!”“”“고양이는 아기 고양이를 몇 개월만 키우고 버리고, 새는 배고픔에 자기의 알을 먹기도 해! 인간 역사상 인간이 인간을 먹는 일이 없는 건 아니야. 사랑이고 정이고 그런 건 인간에게 가장 필요 없는 것이란 말이야!”“그래, 당신은 사랑이 뭔지 알아서 자기 아들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건가?”“당신이 나보다 고귀하다고 생각해? 나는 나만 생각하는데 당신은 아들을 더 생각해서? 웃기고 있네!”그 말을 들은 임상언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다른 것은 괜찮았지만 "자기 아들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건가?"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할 말을 잃었다.이것은 그가 극복 할 수없는 마음의 장애물이었고 이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을 비난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그리고 이제 주효영은
주효영의 반응은 매우 빨랐다. 그녀는 옆으로 피했지만, 상대방의 반응 속도도 만만치 않았다.그 사람은 재빨리 돌아서서 두 손을 벌리며 주효영을 향해 달려들었다.한 명은 도망치고 다른 한 명은 쫓아가면서 그리 크지 않은 방에서 추격전을 벌였다.따라 잡히려던 순간 주효영이 갑자기 돌아서서 손을 들어 그 사람의 얼굴을 향해 한 줌의 가루를 뿌렸다.상대방의 눈앞이 흐려져 멈칫하던 순간 주효영은 매우 빠른 속도로 그의 몸에 마취제를 찔렀다.불과 몇 초 만에 남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몸은 무너져 내렸지만, 정신은 더 멀쩡해졌다. 남자는 눈을 세차게 비비고 으르렁거리다 나중에는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리가 작아졌다.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잠시 혼란스러워하며 말했다."주효영?""며칠 동안 못 봤다고 내가 보고 싶었어?"주효영은 입술을 치켜올리더니 미소를 지었다.이런 환경이 아니었다면, 다른 장소였다면, 이런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미소는 정말 매력적이었다.원철수는 욕을 하고 싶어서 두 번 끙끙거렸지만, 힘이 없어서 눈을 부라리다 주효영을 노려보았다.그의 연기에 대해 주효영은 만족했다.''왜, 좀 더 편안한 장소로 바꿔 줬는데도 만족하지 않는 거야? 설마 그 지하실이 더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차라리 날 죽여!"이틀 동안의 고문에 원철수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그러지 말고 살려달라고 해! 살아있으면 얼마나 좋아! 당신은 신의잖아. 병을 치료하고 사람들을 구하는데! 왜 죽음을 구걸하는 거지?"주효영은 악마처럼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신의 원철수 씨, 당신이 그렇게 대단한데 왜 자기를 구하지 못하는 거지?""이 악마들, 지옥에 떨어져 버려"그는 낮은 목소리로 저주했지만, 저주조차도 너무 창백하고 힘없이 들렸다.현재 상황으로 볼 때 가장 빨리 지옥에 갈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다.자주 같은 것에 대해 주효영은 항상 신경 쓰지 않았다."상관없어, 지옥이 어떤 곳인지 보고 싶은 정도거
“천박하기는!”주효영은 피식 웃으며 멸시하는 눈빛을 그를 쳐다보았다.그녀는 핸드폰과 펜, 그리고 종이를 넣어두었다.보아하니 당장 나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그녀는 앞으로 두 발짝 걸어가더니 원철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한의학을 배우는 사람들은 다 자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을 거 같고 온 세상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그럼 서양 의학을 배우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자기가 연구해 낸 바이러스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는 건가? 기계를 떠나면 아무것도 못 하면서.”원철수는 냉소를 지으며 그녀를 반박했다.“맞아. 하지만 그쪽도 실험할 때 기계를 사용했잖아.”주효영은 원철수의 말에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그녀는 혀를 차며 그가 반박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그러자 할 말을 잃었지만 여전히 못마땅한 원철수는 콧방귀를 뀌었다.“그냥 궁금해서. 바이러스의 습격과 세계 종말을 마주할 때, 자기의 목숨을 신경 쓰지 않고 나서는 사람이 얼마 있을지.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그녀의 양팔은 아주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는데 그 곡선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이 순간 고개를 갸웃거리고 생각에 잠겨있는 주효영은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 같았다.그녀의 얼굴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가득했다.다만 그녀가 한 말은 너무나도 섬뜩했다.“너…….”원철수는 드디어 깨달았다. 주효영과 도리를 따지는 건 불가능하다는걸.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와 얘기하는 것조차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왜냐면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그녀의 생각을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원철수는 그녀의 생각을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녀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사이코였다!원철수는 고개를 돌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말해봤자 시간 낭비일 테니까.그는 눈을 감고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약 기운이 올라 그를 힘들게 한 바람에
한소은은 이틀 동안 매우 피곤했다. 결국 김서진의 상태는 좋았다 나빴다를 번복했다. 극도의 기밀 유지와 바이러스가 더 이상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한소은은 의사 1명과 간호사 2명을 고집했고 자기랑 경 씨만 옆에서 간호할 수 있도록 했다.한소은은 경 씨가 아직도 건강하다는 점이 의아했다. 오랫동안 김서진 곁에서 간호했는데 경 씨한테서 감염의 흔적을 조금도 볼 수 없었다. 안전상의 이유로 예방 조치를 철저히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방심할 수 없었다.바이러스는 은둔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진화와 분열의 속도가 매우 빨랐다. 이미 회복 중인 듯했던 김서진이 갑자기 피를 토한 것도 이 때문이다.한소은은 김서진이 토한 피를 조심스럽게 처리했다.한소은은 이제야 남아시아에서 이 바이러스가 왜 그렇게 빨리 퍼졌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쪽 나라들은 지금 혼란에 빠졌고 이 나라도 지금 국경 경비가 엄격해졌고 마음대로 출입하기 어려워졌다.하루빨리 이 바이러스를 끝내고 백신과 치료법도 하루빨리 개발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큰 재앙이 될 것이다.병동을 떠난 후 한소은은 김서진의 상태가 어느정도 안정되었음을 확신했고 약간 안도감을 느꼈지만 쉽게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언제 악화될 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소독 처리를 끝낸 후 한소은은 마스크, 장갑, 방호 마스크 등을 벗은 후 다시 소독 및 청소를 한 뒤 2차 문밖으로 나갔다.이곳은 안전을 지키고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통제되었다. 다행히 김서진에겐 충성스러운 경호원들이 있었기에 이런 통제가 가능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까다롭고 번거로울 것이다. 충성스러운 경호원을 생각하면 행방불명된 서한이 떠오른다.살아서 무사히 돌아오긴 힘들어 보였지만 시체를 확인하기 전에 한소은은 믿지 않았다. 한소은, 김서진은 물론이고 오이연도 그런 결과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사복으로 갈아입고 휴대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이나 왔는데 가장 많은 전화가 할아버지에게서 온 전화였다.할아버지는 태평하고 자유분
할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왜, 아들은 안 보고 싶어? 싫어?”“이 전염병은 상상이상으로 더 심해요. 소독도 하고 다 처리는 했지만 그래도 방심할 수 없어요.”한소은은 진지하게 말했고 이런 것에 대해 농담할 생각이 없었다.정확히 말하면 이 기간에 한소은은 더 이상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고 이 바이러스를 하루빨리 통제 못 한다면 그 확산 속도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알았어.”할아버지는 그냥 농담하고 싶었지만 진지한 한소은의 말투를 듣고 더 이상 농담하지 않았다.“알아서 해, 그냥…….”할아버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와보면 알게 될 거야.”한소은은 어리둥절해졌다.“늦지 말고. 저 사람들 시간도 엄청 소중하다고.”한 번 더 주의를 주고 할아버지는 전화를 끊었다.한소은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눈이 높았고 이 업계에서 항상 최고였다. 사람은 높은 곳에 오래 있다 보면 어느 정도 오만해지는 것은 정상이었다.한의학의 대선배, 최고 실력으로서 할아버지가 먼저 사람을 받아들인 사람은 적었고 심지어 이런 태도를 보인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한소은은 궁금해져서 얼른 가보려고 했다.막 나가려고 할 때 경 씨가 밖에서 돌아왔고 문에 들어서자마자 소독제로 손을 씻고 소독용 알코올을 뿌렸다.한소은은 경 씨가 거친 사람처럼 보이지만 일 처리가 꽤 꼼꼼하고 의견도 잘 들어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한소은은 김서진의 일을 자세히 얘기해주지 않았고 그저 회복되도록 하려면 매일 출입 시 소독을 해야 한다고만 얘기했다.그러더니 이유를 자세히 묻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고 순순히 하라는 대로 다 하고 있었다.한소은은 김서진이 사람을 볼 줄 알고 친구를 잘 뒀다고 생각했다.“저 지금 나가봐야 해서요, 한 4시간 뒤쯤에 돌아올 거예요. 그동안 여기 있어 줘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해 주세요.”한소은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예.”경 씨는 한소은이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할 것인지 묻지 않고 대답만 하고 고개를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