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으로 돌아온 우해영은 곧 심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데일은 옆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고 있다가 결국 물 한 잔을 받으러 갔다. 방으로 막 돌아올때, 그는 그녀가 또 피를 토하는 것을 보았다.피를 토한 후, 우해영은 기력이 많이 허약해져 데일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에 반쯤 기대어 물로 입안을 헹구었다. 얼굴 전체에 핏기가 없이 안색이 창백했다.“아가씨…”데일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그는 원래 우해영에게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다. 모든 것이 그녀 손아귀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도 해민이에게 이런 배짱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우해영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히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요 몇 년 동안 해민에게 경각심을 풀었던 건 맞아. 정말… 해민이를 경계한 적이 없어.”우해영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줄곧 우해민을 경멸하고, 그녀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가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우해영은 우해민보다 항상 우수했고 부모님의 선택을 받은 아이였으니 그녀는 한 번도 우해민을 자신의 라이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우해영은 우해민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기를 바랐다. 어쨌든 자신 덕분에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었고, 목숨을 부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아무리 그녀를 막대해도 그녀는 자신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요즈음, 그녀는 우해민이 자신에게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해민이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짓을 할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독을 넣을 용기가 있는 것도 미처 몰랐다. 심지어 독이 어디서 났는지 전부, 아는 게 없었다. 하마터면, 자칫 잘못하면 우해민의 꾀에 넘어가 버릴 뻔 했다.만약 데일이 목숨을 걸고 지켜주지 않았다면, 그녀가축적한 인맥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정말 우해민 손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요즘 입맛도 별로 없던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김서진이 말했다.“아니면 병원에 가지 마요. 병원에는 고모도 계속 있고 고용인들도 있으니까 충분해요. 이틀 후면 할머니도 퇴원하실 수 있어요.”“할머니 몸으로 퇴원해도 될까요?”“의사가 괜찮다고 했어요. 병이 생긴 게 아니라 그냥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거예요.”그날 이후, 김서진은 김씨 어르신의 건강을 언급해도 기분이 그렇게 충동적이지 않았다. 그가 감당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감정에 지배당할 수 없었다.한소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틀 동안은 가지 않을게요. 할머니께서 집에 돌아오시면 그때 보러 가요.”몸이 피곤했는지 한소은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상의하고 싶은 게 있어요.”“뭔데요?”김서진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우리… 결혼식을 좀 연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왜요? 혹시 어디가 마음에 안 들어요?”한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한 손으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이미 눈에 띄게 부풀어올라 임신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아니요. 그냥 최근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할머니 건강도 별로 좋지 않잖아요. 게다가 지금... 웨딩드레스가 안 들어갈 것 같아서 좀 수정해야 해요.”한소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리고 최근에 오빠랑 통화했는데, 요즘 유럽 쪽이 워낙 바빠서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차라리 결혼식을 미루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시다시피, 전 형식에 그리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잖아요. 차라리 아이가 태어난 후에 다시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한소은은 결혼식을 올리든 올리지 않든 상관이 없었다. 그저 애초에 김서진의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결혼식을 올리는 것에 동의했을 뿐이다.하지만 요즘, 곧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는데 김씨 어르신의 몸도 안 좋고 가문도 조금 안정되었다고는 해도 사람들 기분이 싱숭생숭한 것 같았다. 하긴, 그렇게 큰 일을 겪었는데 어떻게
한소은은 데일을 두 번 정도 만난 적이 있었다. 만날 때마다 그는 우해영의 곁을 따라다녔었다. 그는 숨은 고수였다. 데일은 자신의 무술 실력을 애써 숨기려 했지만 그의 비범함을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었다.다만, 데일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어서, 그냥 조금 인상이 있을 뿐이었다.“대표님.”데일은 김서진에게 공손하게 절을 했다.“아가씨께서 사모님을 내일 초대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데일은 한소은을 쳐다보며 말했다.“저요?”한소은은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김서진에게 볼 일이 있어서 온 줄 알았는데, 자신을 초대한다는 말을 듣고 한소은은 깜짝 놀랐다. 한소은 뿐만 아니라 놀라기는 김서진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람만요?”김서진이 물었다.부부를 함께 초대하는 게 아니라 한 명을 초대한다고 하면 한소은이 아니라 김서진을 초대할 확률이 더 높았다.무술에 대해 토론하는 거 말고는 주로 김서진과 사업 이나 협력에 대한 얘기를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해영과 한소은은 직접적인 연계가 없었다.“네.”데일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돌아가서 얘기하세요. 안 가겠다고요.”김서진이 말했다.그의 대답에 한소은은 예상이나 했단 듯이 평온했다. 그녀에 대한 김서진의 보호욕구는 때때로 끔찍했다. 이제 그녀는 점차 익숙해졌고 그가 모든 일에서 자신을 우선시한다는 것을 깨달았다.“아가씨께서 악의는 없다고 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데일도 우해영의 당부대로 대답했다.“악의가 없으면 직접 와서 이야기하라고 하세요. 우리 부부도 악의가 없습니다.”김서진은 당당하게 말했다.데일은 잠시 망설이더니 이어서 말했다.“그게… 아가씨께서 좀… 불편해서요.”“아무리 불편해도 아이를 임신한 여자보다 가동이 더 불편하진 않을 거 아니에요? 그렇게 안 봤는데 성의가 없군요. 돌아가세요.”김서진은 차갑게 말했다.“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어서 그래요. 내일 가보면 알아요. 악의는 절대 없어요.”데일은 간곡하게 말하며 고개를 떨구었지만 떠날 기색은 전혀 없어 보였다.
잠시 생각한 후, 한소은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네. 그럼 내일 갈게요. 아가씨한테 전해주세요. 오전 10시 쯤에 도착할 거라고요.”그녀의 긍정적인 대답을 듣고, 데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굽혀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맙습니다.”“저기…”김서진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할때, 한소은은 다급히 그의 입을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잠시 후, 데일이 떠난 후, 김서진은 그제야 한소은에게 따졌다.“왜 가겠다고 허락한 거야? 그 여자가 또 무슨 함정을 꾸미고 있을지 어떻게 알아? 아무리 생각해도 내일 가지 않는 것이 좋겠어.”“예전의 우해영이라면야 제가 대처하기 어려웠을 텐데, 잊었어요? 지금의 우해영은 예전의 우해영이 아니에요.”한소은이 말했다.김서진도 우해영의 무력이 바닥으로 떨어져 한소은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걱정이 앞섰다.“다른 곳도 아니고 자기 집이야. 자기 집에서 당신한테 무슨 짓을 하려 할지 어떻게 알아? 만약 당신이 가겠다고 고집한다면, 내일 나랑 같이 가.”김서진이 말했다. 이건 김서진이 용납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당신이랑 같이 가도 되면 아까 그렇게 고집을 피우지 않았겠죠.”한소은은 피식 웃었다.“걱정마세요.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게다가 정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비록 전 천군만마를 상대할 수는 없지만, 무력을 상실한 우해영을 대처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한소은은 김서진이 자신을 쉽게 보내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하지만…”“행여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바로 신호를 보낼게요. 그러면 서둘러 사람을 불러서 저를 구하러 오세요. 어때요?”한소은은 김서진에게 윙크를 하며 가볍게 말했다.그녀의 모습에 김서진은 마음속에 차오르는 걱정을 꾹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가 마음먹은 일을 바꾸기 어렵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김서진은 한소은을 빤히 노려보며 한마디 했다.“당신을 막을 수 없다는 거 잘 알아요. 하지만
“죽는 게 뭐가 무서워?”우해민은 별거 아니라는 말투로 말했다.“사실 너랑 함께 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행복해. 그거 알아? 예전에 난 죽는 게 무서웠어. 죽고 싶지 않았어. 엄마 아빠한테 버림받은 아이가 되고 싶지 않았거든. 하지만 지금은 달라, 나한텐 네가 있고 너랑 함께 있을 수 있음에 만족해. 너와 함께 죽을 수 있다면, 난 기꺼이 죽어도 좋아.”우해민은 부드러운 눈길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마음을 이야기했다.하지만 김승엽은 그런 그녀의 말에 오히려 눈살을 찌푸렸다.“해민아, 그런 생각하지 마. 충분히 살 수 있는데 왜 죽을 생각을 해? 죽는 건 끔찍한 일이야. 살면 얼마나 좋아. 산다는 건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고,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고, 좋은 술도 많이 마실 수 있고, 또 아름다운 경치도 많이 볼 수 있는, 그런 좋은 일이야. 또 살아있으면 언젠가 우리가 다시 일어설지도 모르잖아? 풍수는 돌고 돈댔어. 그러니까 항상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해.”우해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마 살지는 못할 거야. 내가 잘 알아. 난 언니를 독살하려고 했어. 그러니까 날 절대 살려두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난 후회 안 해. 너랑 하루라도 함께 할 수 있어서, 조금도 후회하지 않아.”“하지만 난 죽고 싶지 않다고.”그녀의 부드러운 감언이설에 김승엽은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지금 목마르고 배고프고 두려웠다. 모든 감정이 마음속에 쌓여서 한 번에 폭발했다.“넌 죽고 싶을지 몰라도 난 아니야. 난 죽고 싶지 않아. 나는 아직 충분히 즐기지 못했다고. 우리 그냥 우해영한테 부탁하러 가자. 어쨌든 난 김씨 가문 사람이니까 날 이렇게 죽이진 않을 거야. 본가에 한 번 잘 부탁해봐야겠어.”그의 말에 우해민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 그를 바라보았다. “나랑 함께 죽고 싶지 않은 거야? 나랑 같이 있는 게 싫어?”우해민의 입술이 덜덜 떨려왔다.“너와 함께 있고는 싶지만, 그건 죽는 거랑 다른 문제야. 인생이 얼마나 좋은데 왜 죽으려
“당신도 안 마실 건가요?”“마셔, 마셔, 목말라 죽겠어.”그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밥은 없어?”김승엽이 물었다.데일은 냉소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의 입에 물을 부었다.김승엽은 목이 마른 나머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하지만 물이 입에 들어가자 맛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금물이었다. 심지어 매우 짠, 농도가 높은 소금물이었다. 너무 짜서 나중엔 쓴맛이 날 지경이었다.그는 마시지 않고 고개를 돌려 피하려고 했지만, 데일은 그의 턱을 꽉 잡고 억지로 짠 소금물을 입에 들이부었다.“콜록... 콜록콜록...”김승엽은 사레에 들려 기침을 연발했다. 너무 쓴 나머지 속이 울렁거려 토하고 싶었지만,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여서 되려 조금전에 마셨던 소금물을 전부 토해냈다.“너희들… 어쩜 이렇게 독해?”김승엽은 연신 기침을 하며 말했다.“이정도면 아가씨는 착하신 편이에요.”데일은 그들을 힐끗 쳐다보며 냉소적으로 말했다.만약 데일이었으면 그는 그들을 단칼에 해치웠을 텐데 말이다. 감히 제멋대로 우해영에게 손을 대다니… 지금 우해영이 고생하는 것에 비하면 이런 고통쯤이야 아무 것도 아닐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말을 마치고, 그는 밖으로 유유히 나갔다.원래 목이 말랐는데, 짠 소금물을 벌컥벌컥 들이킨 탓에 목구멍에서 연기가 나고 목이 타는 것 같았다. “해민아, 그 물에 문제가 있는 줄 이미 알았어?”김승엽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난 그저 언니가 우리에게 물을 줄 만큼 착하지 않단 것만 알아.”우해민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왜…”그는 우해민에게 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는지 따지려다가 꿀꺽 말을 삼켰다. 두 사람은 각자 걱정거리가 있었다. 김승엽은 어떻게 하면 탈출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다.원래 본가에서 제명되어 갈 곳이 없는 것만도 이미 충분히 비참할 줄 알았는데, 생사의 고비에 놓이다니… 생사 앞에서 그는 존엄이든 어떤 영욕이든 상관관이 없었다. 그저 살아있
“당신은 지금 내 말을 얼버무리고 있어.”김승엽의 마음이 지금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걸 느낀 우해민은 실망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그럴 리가!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잖아. 우리 둘 다 죽게 생겼어! 죽는 게 뭔지 알기나 해? 죽으면 모든 게 다 없어진단 말이야! 네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노력했는데, 인제 와서 순순히 죽어준다고? 우리 둘 다 죽으면 안 돼!” 김승엽은 짜증 섞인 말투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죽는 게 그렇게 두려워?” 우해민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김승엽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두렵지! 당연한 거 아니야? 난 죽고 싶지 않다고. 난 살고 싶어, 아직 이 세상을 다 누려보지 못했단 말이야! 잘살고 있었는데 내가 왜 죽어야 해?” 그의 말에 우해민은 평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그녀의 말투가 조금 이상했지만, 김승엽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그는 배가 너무 고파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몸도 피곤했고 물을 마시지 못해 목도 아파졌다.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눈을 꼭 감으며 체력을 조금이나마 아끼려 했다. 괴로움 속에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다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에 들었다.———— 오전 10시, 한소은은 약속대로 제시간에 우씨 가문의 집 앞에 도착했다. 김서진은 그녀를 혼자 보내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 결국 따라나섰다. 다만, 차를 대문 밖에 세워두고 따라 들어가지 않았다. 김서진은 한소은의 귀에 미니 이어폰을 끼워 주며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신호를 보내면 당신이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올 거고, 무슨 일이 있어도 무리하지 않고 절대로 그 여자와 정면충돌하지 않으며 결정짓지 못할 일이라면 돌아가서 상의해 보고 결정한다고 말해야 하는 거 잘 기억했어요!” 김서진은 어제부터 이 말들을 계속 반복했다. 하도 여러 번 말했기 때문에 한소은이 다 외울 지경이였다. 그녀의 말에 김서진은 말문이 막힌
정문에 도착하자 데일이 벌써 한소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와 차 문을 열어 정중한 모습으로 한소은을 모셨다. “큰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소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제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데일.” 한소은을 우해영이 줄곧 그를 이렇게 부르는 걸 기억했다. 그녀가 이렇게 부르자, 데일은 눈에 띄게 놀란 모습이었다. 그의 당황한 모습에 한소은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불렀다. “데일, 주인을 항상 큰 아가씨로 부른다는 건 작은 아가씨도 있다는 뜻인가?” “…….” 데인 아무런 말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에 스쳐 간 놀람은 한소은에게 모두 붙잡혔다. ‘역시, 내가 생각했던 거와 다르지 않아. 우해영은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 거야.’ 거실에 들어섰을 때 한소은은 멈칫했다. 그녀를 우해영이 거실 소파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때, 뒤따라온 데일이 그녀에게 말했다. “김씨 사모님, 저를 따라오세요.” 한소은은 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도착한 곳은 뜻밖에도 우해영의 침실이었다. 그녀의 침실에는 한약 냄새가 가득했다. ‘우해영이 한약을 먹고 있는 건가?’ “한소은 씨.” 우해영이 어디 있는지 발견하기도 전에 그녀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한소은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침실 소파에 기대며 앉아 있는 우해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편한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완전히 한소은을 손님으로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우해영 씨.” 한소은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있는 우해영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한쪽으로 길게 늘여진 다리, 발목……. 한소은은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지, 우씨 가문의 큰 아가씨라고 불러야 하나?” 한소은은 ‘큰’이라는 글자를 일부러 힘주어 말했다. 그러자 우해영이 흠칫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