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컴퓨터 앞에 서자 컴퓨터와 스크린이 자동으로 켜졌다.소희는 컴퓨터에서 방금 전 핸드폰에서 본 독수리 모양의 아이콘을 열고 들어가 비번을 입력했고 안에는 3차원의 이미지 파일이 튀어나왔다.소희는 그것을 뚫어지게 보더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보름 전 영국 런던에서 송가 그룹이 반인반수 모양의 청동기를 구매했는데, 운반 과정에 비행기가 몽골 경계에 추락하여 현재 청동기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더군요. 송가네는 우리에게 이 청동기를 찾아주면 22억을 주겠다고 하는데...” 소희는 소식을 읽다 상대방에게 물었다."의뢰 받을까요?”모니터에서 음성변조가 된 아기 소리가 들려왔다. “받으세요. 제가 마침 근처에요. 확인해 보고 연락드리죠.”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컴퓨터 스크린의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청동기의 사진과 관계자의 파일은 당신한테 보낼게요.""푸른 독수리님." 소희가 분부했다. "당신은 하얀 독수리를 돕도록 해요.""네!" 푸른 독수리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나직했다.세 사람은 세부 사항을 다시 상의했고, 11시가 다 되어 소희는 서재를 떠났다.토요일 오전, 소희가 임구택의 저택에 도착했고 임유림은 뜻밖에도 외출하지 않은 상태였다.그녀가 온 것을 알고 임유림은 그녀를 끌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감격에 겨워 말했다."이번 시험에서 유민이의 성적이 많이 올랐다고 삼촌도 매우 만족스러워하더라. 정말 고마워. 우리 가족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해 줬어!""돈을 받고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걸.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소희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임유림은 마침 옷을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 소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그녀는 얘기 도중 목걸이를 몇 개 꺼내 목에 비교하며 소희에게 어느 것이 예쁘냐고 물었다.모두 명품 브랜드인데 몇 개는 한정판으로 나온 것이었다."이것도 있어!"소희에게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 보여주는 임유림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이거는 주민이가 준 건데, 예뻐?"소
소희는 고개를 들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네가 사랑을 알아?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라고 반문했다."저것 좀 봐요, 바보처럼 웃고 있는 모습!" 임유민은 콧방귀를 뀌었다.소희는 위층으로 올라가며 말했다. "사랑의 본질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야."임유민은 연신 흥 거리며 "그럼 나는 앞으로 연애 같은 거는 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도 하지 말아요."소희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물었다, “내가 왜?”임유민은 당당하게 말했다. "사랑에 빠져서 둔감해지면, 나한테 어떻게 공부를 가르쳐줘요?"소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날 오후에 삼촌이 나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둘째 삼촌이 뭐라고 했는데요?"라고 임유민은 궁금해서 물었다."지금 내 아이큐가 너처럼 낮다고 했어!" 소희는 냉소를 지으며 그를 넘어 성큼성큼 걸어갔다.임유민은 어리둥절해서는 그녀를 쫓았다. “우리 삼촌이 그렇게 이야기할 리가 없어요!”한 시간 반의 수업은 금방 지나갔고, 소희가 짐을 챙겨 내려가는 길에 임구택이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지난번 일이 떠올랐는지 못 본 체하고 그냥 지나칠 생각을 했다.뒤따라 가던 임유민은 큰소리로 말했다. "쌤, 오후에 삼촌과 함께 승마장에 가는데, 쌤도 함께 가요!”소희는 멈칫 굳었고 그 소리에 임구택 역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더니 핸드폰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다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수업 끝났나요?""네!" 소희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임유민은 다시 한번 물었다. "삼촌, 선생님도 우리와 함께 가면 안 되나요?""아뇨, 전 괜찮아요."임구택은 "오후에 별다른 일 없으면 함께 가요, 마침 승마장에서 미팅이 있는데 그러면 유민이를 돌봐 줄 사람이 없어요."라고 말했다.그가 이렇게 말하자 소희는 더 이상 거절하기 어려워 고개를 끄덕였다.임구택은 손을 들어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 출발합시다. 장원에서 바비큐를 준비했다고 했으니 거기서 점심을 먹으면 될 거 같네요!"“잘 됐다! 그럼
다행하게도 임유민이 달려와 소희를 깨우는 바람에 그녀는 임구택한테 자신의 이런 창피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세 사람은 마구간에 가서 말을 골랐다.구택과 유민은 모두 스스로 기르는 말이 있었기에 소희 혼자만 임시로 골라야 했다.조랑말 한 마리를 고른 그녀는 유민에게 한바탕 비웃음을 당했다.소희는 그의 비웃음을 태연자약하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어떤 일을 하든 자신이 그 결과를 가늠할 수 있기만 하면 되었기에 처음으로 말을 타는 소희는 차라리 조랑말을 타고 유민에게 비웃음을 당할지언정 무리하게 큰 말을 선택하여 말에서 떨어질 때의 창피함과 고통을 받고 싶지 않았다.구택은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좌우되지 않고 꿋꿋하게 조랑말을 선택하는 것을 보고 보기 드물게 흐뭇해하는 표정을 보였다.조랑말은 소희의 말을 아주 잘 들었다. 말을 타 본 적이 없던 그녀는 조련사의 지도를 받고 안전하게 말 위에 타고 다룰 수 있었다.구택과 유민은 말을 탄 채로 그녀가 비교적 능숙하게 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를 데리고 함께 돌기 시작했다.세 사람은 말을 타고 길을 따라 천천히 달렸다. 길 양쪽에는 높고 큰 메타세쿼이아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복숭아꽃과 벚꽃이 있었다.마침 늦봄이라 봄바람은 얼굴을 스쳤고 꽃보라가 흩날렸다. 속도 내서 달릴 때 꽃잎은 얼굴에 떨어지며 아프지 않고 오히려 살짝 가렵게 느끼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온몸이 홀가분하고 상쾌하게 만들었다.구택은 말을 타고 앞에서 걷다가 소희가 유민과 무슨 말을 했는지 유민이 과장하게 웃는 소리가 뒤에서 전해왔다.고개를 돌리자 그는 조랑말 위의 소녀가 흰 셔츠에 검은색 멜빵바지를 입은 채 머리를 높이 묶으며 햇빛이 그녀의 정교한 이목구비를 비추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평소처럼 내성적이고 온화하지 않고 마음껏 떠들던 그녀는 특별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구택은 멈칫하며 이런 모습이 바로 진정한 소희의 모습이라 느꼈다.세 사람은 말을 타고 10여 분을 달리다가 아스팔트로 된 길로 들어가자 그 끝에는 별장
구택은 그곳에 멈춰 섰다. 그는 유민의 갑작스러운 습격에 놀라지 않고 오히려 갑자기 튀어나온 소녀에게 깜짝 놀랐다.하지만 그는 즉시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소녀의 강렬한 가슴 뛰는 소리를 느꼈기 때문이다. 구택은 약간 고개를 숙이며 낭패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젖은 긴 속눈썹 아래 눈동자가 반짝이며 뜻밖에도 약간의 두려운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소희는 다시 한번 남자의 귀 뒤에 있는 흉터를 보았다. 흉터는 이미 연분홍색으로 변하여 거의 정상적인 피부와 같았다.무려 5초 동안 구택은 말을 하지 않고 소녀의 호흡이 평온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고는 농담을 하며 입을 열었다."소희 씨가 내 품으로 안긴 게 이번이 몇 번째죠? 정말 유민이 둘째 숙모가 되고 싶은 거예요?"소희는 멍해지다 정신을 차리며 갑자기 고개를 들어 희노를 알 수 없는 약간의 비웃음을 띈 남자의 눈과 마주쳤다. 남자의 눈동자에는 숲속의 어두운 빛이 비치며 더욱 어두워졌다.그녀는 얼굴을 붉힌 채 두 걸음 뒤로 물러서며 애써 설명했다."나, 난 그저 물 폭탄 막아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냥 힘을 좀 너무 세게 쓴 거고요."구택은 그녀가 회피하는 모습을 보고 계속 웃었다. 그녀의 귓가까지 빨개지자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부드럽고 낮았다."그만 놀릴게요, 어서 놀러 가요!"마지막 몇 글자를 말할 때, 그 말투는 마치 아이를 달래는 것 같았다.소희는 조금 전의 경솔함에 약간 창피하기도 심지어는 당황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남자의 말투를 주의하지 못하고 침착한 척하며 돌아섰다.몸을 돌리자 갑자기 향기가 전해왔다. 고기 냄새를 맡은 그녀는 갑자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별장에서 하인은 이미 생선을 굽고 있었다. 그리고 레스토랑에서 가져온 절인 쇠고기, 사슴 고기도 있었다.소희는 냄새를 맡자마자 불안한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지며 오직 배고픔만 남았다.유민은 또 물 폭탄을 가득 싣고 와서 구택과 자랑했다."둘째 삼촌, 저 점점 더
소희는 고맙다고 하면서 속으로 오늘 유민이의 덕을 봐서 구택이 자신을 아이처럼 잘 보살펴줬다고 생각했다.유민도 고맙다고 말하며 자신은 소희 덕분에 그의 둘째 삼촌이 이렇게 매너 있게 자신을 아이처럼 잘 돌봤다고 생각했다.세 사람은 각자 생각에 잠기며 묵묵히 식사를 했다. 주위 환경이 너무 좋았는지 아니면 셰프의 솜씨가 좋았는지 어쨌든 소희는 음식을 만족스럽게 먹었다.밥을 거의 다 먹을 무렵, 유민이 요구르트를 마시려 하자 하인은 얼른 방에 가서 가지러 갔다. 이때 구택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두 병 가져와요. "유민과 소희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밥 먹은 뒤 먼저 말을 타러 갈 것인가 아니면 실내관에 가서 배드민턴을 칠 것인가를 상의했다. 오후에는 또 두 차례의 경마가 있다고 한다.하인은 요구르트 한 병을 먼저 유민 앞에 놓자 구택은 자연스럽게 다른 한 병을 소희의 손 옆에 놓았다.......원래 식후 활동에 대한 기대가 엄청 컸지만 고기를 먹고 요구르트까지 마신 유민은 더는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배불리 먹었으니 격렬한 운동을 피할 겸 구택은 그들과 함께 낚시를 하러 갔다.세 사람은 조를 나누어 시합을 했다. 소희와 유민은 한 조, 구택은 스스로 한 조. 진 사람은 저녁 식사를 쏴야 했다.시간이 흐르면서 소희는 처음엔 투지가 불타올랐지만 점점 담담해졌다. 그녀는 구택의 물통에서 팔딱팔딱 뛰어오르는 물고기를 보고 다시 자신의 텅 빈 물통과 물통 옆에서 펄쩍 뛰며 그녀를 응원하는 유민을 보았다. 그녀는 이미 단념했다!구택은 모처럼 이렇게 한가로운 오후를 보냈다. 그의 눈빛은 평소보다 훨씬 부드러웠다."이제 결과가 난 건가요?"소희는 구택을 바라보았다."구택 씨는 혹시 불운의 신이라고 들어봤어요?"유민이 어디 가면 그곳의 물고기가 달아났기 때문에 물고기를 낚지 못한 것은 전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구택은 낮은 소리로 웃으며 눈빛으로 동정을 표시한 후 유민에게 물었다."강에 모두 수컷이라고 하지 않았니?"
세 사람은 오후 내내 승마장에 있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그곳을 떠났다. 구택은 먼저 소희를 강성 대학교로 데려다주었다.원래 소희는 낚시 시합에 져서 저녁을 사야 했지만 구택이 저녁에 일이 있는 바람에 다음에 사기로 했다.가는 길 내내 소희와 유민은 계속 승마장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구택은 묵묵히 차를 운전하며 뒤에서 전해오는 시끄러운 말소리에 전혀 싫증이 나지 않았고 오히려 아주 특별한 느낌이 생겼다. 나쁘지 않고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느낌이었다.차가 강성 대학교 문 앞에 멈추자 소희는 두 사람과 작별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그녀는 교문을 향해 걸어가자마자 맞은편에서 운동복을 입은 한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흥분해하며 달려왔다.유민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승마장에서 만난 그 남자가 같은데요? 이렇게 빨리 만나기로 약속했나 보죠?"그는 엄청 우울해졌다. 소희가 연애하면 아마도 그의 누나처럼 사랑에 눈이 먼 멍청이가 될 것이다.구택은 시동을 걸지 않고 소희가 그 남자와 함께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후 그 남자는 케이크 하나를 꺼냈고 소희는 그것을 받았다......구택은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을 계속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야말로 소희의 나이에 맞는 사랑이었다. 그의 눈빛은 밤처럼 어두웠다. 그는 눈을 떼고 핸들을 돌리며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소희와 말하고 있는 사람은 송장풍이라고 하는데 두 사람은 승마장에서 만나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서야 강성대 동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송장풍은 외국어 학과 3학년 학생으로서 지금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었다. 그는 한창 과제를 하고 있는 가운데 소희가 그에게 자신의 견해를 말해주자 송장풍은 문득 깨치며 자신을 괴롭혔던 난제를 해결하였다.장풍은 소희의 도움에 매우 감격했다. 그는 원래 케이크를 사서 우연이라도 소희와 학교에서 마주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근데 정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소희는 고
소희는 웃음을 거두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청아는 잠시 말을 멈추며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는 듯 천천히 입을 열어 자초지종을 말했다."우리 아빠가 도박꾼이었거든.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는 도박을 했어. 물론 지금까지도 도박을 하고 있지. 전에 그는 한 달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다 보름 전인가, 집에 돌아왔어. 그리고 6천만 원을 빚졌다며 집을 팔겠다는 거야. 우리 엄마는 한사코 집을 내놓으려 하셨지. 그렇게 보름이나 끌었어. 바로 어제 그 사람들이 우리 오빠를 잡아갔어. 지금 나와 엄마는 급하게 우리 집을 팔려고 하고 있어. 빚쟁이들이 오늘 저녁에 돈을 가져오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 오빠 다시는 볼 수 없다고 했어."소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경찰에 신고했어?"청아의 목소리에는 피곤함과 무기력함이 가득했다."우리 엄마는 감히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고 있어. 나보고도 하지 말라고 하면서 말이야!""그럼 네 아빠는?""도망갔어!"이 말을 마치자 청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흐느끼며 울음을 터뜨렸다."울지 마!" 소희는 담담하게 말했다."급하게 집을 팔지 마. 집을 팔면 너와 너의 엄마는 어디에 살라고?""요 몇 년 동안 나는 학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까지 하며 4, 5백만 정도 모았는데 여전히 너무 많이 모자라. 친척들은 우리 아빠 때문에 아무도 우리를 믿지 않고 우리에게 돈을 빌려주려 하지 않고 있어."소희는 줄곧 낙관적이었던 청아한테 이렇게 형편없는 가정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모든 부모가 부모라는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청아야, 집 팔지 마. 내가 대신 방법을 생각해 볼게." 소희는 냉정하게 말했다."너도 아직 학생인데 무슨 방법이 있겠어? 굳이 우리 도와줄 필요 없어. 우리 집은 비록 낡았지만 그래도 돈은 좀 돼." 청아는 다른 사람이 그녀를 위해 걱정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 보름 동안 아무리 절망해도 그녀는 소희를 찾지 않았다. 오늘 소희가
소파에 앉아 여자를 껴안은 남자는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나이는 마흔 좌우에 술에 취해 두 눈이 흐리멍덩한 그는 소희와 청아를 한 번 훑어보더니 입을 벌리고 물었다."누가 우청아야?"청아는 앞으로 나아가 용기를 내어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저요!""형님." 옆에 있던 사람이 이혁에게 담배 불을 붙여주었다.누군가가 룸 안의 플래시를 끄자 빛이 정상으로 변하며 룸 안의 상황도 더 잘 보였다.룸 안에는 남자와 여자 합쳐서 스무 명 정도 있었다. 남자들은 술을 마셔서 얼굴이 빨개졌다. 그들은 조금도 자신의 눈빛을 숨기지 않고 소희와 청아 두 사람을 훑으며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그중 몇몇의 여자는 남자의 품에 기대어 소희와 청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마치 호랑이굴에 들어온 양 두 마리를 보는 것 같았다.이혁은 담배 한 모금 뱉으며 배를 내밀고 소파에 기댔다."돈은 가져왔어?"청아는 소희를 바라보았다.소희는 입을 열었다."우강남을 봐야 돈을 주죠."이혁은 손을 흔들자 두 수하 모양의 사람이 일어나 룸 안의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바로 한 남자를 데리고 나왔다. 남자는 손발이 묶였고 입도 막혔다. 청아를 보자 그는 발버둥을 쳤다."오빠!" 청아가 소리쳤다.이혁은 소매를 잡아당기고 손가락 굵기의 큰 금목걸이를 드러내며 차갑게 웃었다."돈 내려놓고 사람 데리고 가!"소희는 손을 뻗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지만 그것은 은행 카드가 아니라 USB였다.이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이건 뭐지?"소희는 담담하게 말했다."당신이 운영하는 카지노의 CCTV 기록이에요. 사기 치는 장면 모두 똑똑히 찍혔어요. 우임승의 돈은 진 것이 아니라 당신들한테 속은 거죠. 나는 당신한테 줄 돈 단 한 푼도 없어요!""너 지금 죽고 싶어!" 옆에서 한 사람이 강남의 몸을 발로 차자 그는 오열하며 비명을 질렀다."오빠!" 청아는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 강남을 감싸려 했지만 소희는 그녀를 붙잡았다.이혁은 살쪄서 거의 보이지 않은 실눈으로 소희를 쳐다보
유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방으로 돌아가 휴대폰을 챙겼다. 왜냐하면 유진이 가져온 것은 오직 휴대전화뿐이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어둑한 복도에서, 유진은 무의식적으로 서인의 손을 잡았다.그리고 이번에는 서인이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유진은 조금씩 용기를 내어 손가락을 더 깊이 엮었고, 결국 그의 손 전체를 단단히 쥐었다.서인의 손은 크고 뼈마디가 굵었으며, 손바닥에는 거칠지만 단단한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유진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촉감이 이상하게도 더 마음에 들었다.깊은 밤, 조용한 복도에서, 유진은 자기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쿵, 쿵. 긴장과 부끄러움, 그리고 묘한 설렘이 섞여 있었다.민박집을 떠난 뒤, 서인은 차를 몰아 유진과 함께 산을 내려가 도시로 향했다. 그는 자기 외투를 벗어 유진의 어깨 위에 걸쳤다. 어둠 속에서 서인의 날렵한 얼굴선이 더욱 차갑고 도도해 보였다.“잠깐 눈 붙여. 도착하면 깨울게.”하지만 깊은 밤 도로를 달리는 이 순간이, 유진에게는 너무나도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유진은 전혀 졸리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전방을 바라보며 서인과 대화를 나눴다.“그 쥐덫, 아무 소용도 없을 거예요. 쥐는 계속 나올 거라고요.”그곳의 쥐들은 너무 대담했다. 사람을 무서워하기는커녕, 창가에 올라와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까지 했다.서인은 물었다.“그러면 왜 날 안 불렀어?”유진은 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입을 막고 있었거든요!”유진은 서인이 피곤할까 봐 일부러 참고 있었다. 하루 종일 운전했으니, 이미 녹초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침대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냥 밤새도록 그렇게 버틸 생각이었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바로 맞은편 방에서 들려오는 민망한 소리.그 순간, 유진은 차라리 쥐랑 함께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 그때, 서인이 문을 두드렸다. 그 순간이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유진은 본능적
“임유진!”서인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거칠게 떨렸다. 그는 급히 옆방 문을 두드렸고, 문이 열리는 순간, 임유진이 그대로 서인의 품에 뛰어들었다.서인은 방 안을 빠르게 둘러봤으나 별다른 이상은 없는 듯했다. 그제야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지며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유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저, 저기 쥐가 있어요!”서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반쯤 설명하고 반쯤 달래듯 말했다.“이런 곳에서는 쥐가 나오는 게 당연해. 그냥 네 방을 지나간 거야. 널 물지는 않아. 오히려 네가 더 무서울걸?”하지만 유진은 서인의 품 안에서 겁에 질린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제야 서인은 유진의 모습을 제대로 보았다.커다란 티셔츠 한 장만 걸친 채, 하얀 다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창백할 정도로 희고 매끈한 피부가 시각을 자극했다.반면, 서인은 방금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나왔기에, 바지만 입고 상의는 벗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 서인은 목이 바짝 타는 듯했고,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얼굴이 굳어버렸다.손을 뻗어 유진을 떼어내려 했지만, 유진은 겁에 질려 서인의 허리를 더 꼭 붙잡았다. 두 사람은 문 앞에서 그렇게 서 있었다.혹시라도 누가 지나갈까 걱정된 서인은 유진을 가볍게 안아 방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 그러나 유진의 티셔츠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녀의 부드러운 체온이 서인의 맨가슴에 고스란히 닿았다.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이 들자, 서인은 서둘러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고 이불로 감싸주었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유진은 얼굴이 불타오르듯 붉어졌다.그녀는 이불을 꼭 움켜쥔 채 눈을 피했고, 서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안토니한테 가서 쥐 잡을 도구가 있는지 물어볼게.”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자, 서인은 곧장 방을 나섰다. 유진은 그의 넓은 어깨와 탄탄한 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길이 미묘하게 흔들렸다가, 황급히 창밖으로 시
안토니는 서인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부모님이 여기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모든 절차는 다 정식으로 등록된 거예요. 게다가 이 땅은 호텔 부지에 포함되지도 않고요.”“그런데도 그 사람들이 철거하라고 명령할 수 있어요? 보상금도 터무니없이 적고, 우리 부모님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라는 거죠?”“하지만 호텔 뒤에는 권력과 돈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무도 우리 편에 서지 않아요.”임유진은 분통이 터져 소리쳤다.“이건 완전히 강도질이잖아요! 소송이라도 걸어야 하죠!”토니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소용없어요.”“사실, 보상금이 충분하다면 철거를 고려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그 옆에서 안주설이 조용히 말하자, 토니는 즉시 그녀의 말을 끊었다.“얼마를 준다 해도 안 돼. 우리 고향 집도 이미 팔아버렸어. 부모님께 남은 건 이 민박집뿐이야. 여기가 없어지면 어디로 가란 말이야?”주설은 난처한 표정으로 웃으며 변명했다.“그냥 의견을 낸 것뿐이야.”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상황은 알겠으니까 방법을 찾아볼게.”토니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정말 어쩔 수 없어서 서인 형한테 전화한 거예요. 형이 강성에 있는 거 알지만, 흥성 일에는 개입하기 어려울 수도 있잖아요.”토니는 분노에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서인에게 연락을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서인은 그날 바로 달려와 주었다.서인은 단호하게 말했다.“토니 형과 나는 형제나 다름없어요. 걔의 일은 내 일이나 마찬가지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해결할 테니까요.”토니의 부모는 연신 감사를 표했다.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밤 11시가 되었다. 토니는 2층에 서인과 유진을 위한 방 두 개를 준비해 주었다. 계단을 올라가며, 유진은 서인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나 아무것도 안 가져왔어요.”서인은 고개를 돌려 토니에게 물었다.“새 세면도구 있어? 갑자기 오느라 아무것도 못 챙겼어.”“당연하죠! 다른 건 몰라도 세면도구는 넉넉
유진은 뭔가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비싼 건 아니네요!”서인의 품에 안겼으니, 20만원이라도 아깝지 않았다. 서인은 본래 유진을 위로하려 했는데, 그녀의 표정을 보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순간 서인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유진은 기분이 좋아진 듯 미소를 지었다.“이미 산 거니까, 그냥 먹어요. 버리긴 아깝잖아요!”그녀는 티슈로 사과를 닦아내고 서인에게 하나 건넸지만, 서인은 거절하며 고개를 저었다.“난 안 먹어.”“그럼 저 혼자 먹을게요!”유진은 사과를 입에 가져가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사과가 신선해서 아삭하게 씹히며 입안 가득 달콤한 과즙이 퍼졌다.이윽고 차 안에 오직 사과를 씹는 소리만 울렸다. 서인은 앞을 주시하며 운전을 계속했지만, 무심결에 목젖이 한 번 움찔거렸다. 유진은 연달아 몇 입을 베어 물다가 반쯤 먹은 사과를 들고 서인을 바라봤다.“정말 안 먹어요? 진짜 맛있어요!”2만원으로 이 정도 퀄리티라면 완전 대박이었다. 그러나 서인은 도로를 응시한 채 담담하게 말했다.“보통 과수원에서는 사람들이 몰래 따 먹는 걸 방지하려고 사과에 농약을 뿌려 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에 든 사과를 바라봤다가 곧 얼굴이 새파래졌다.“왜 이제야 말하는 거예요?”서인은 태연하게 대답했다.“방금 떠올랐어.”“어떡하죠? 나 중독되는 거 아니에요?”유진은 볼을 불룩하게 부풀리며 억울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내가 만약 중독돼서 장애라도 생기거나, 바보가 되면, 사장님이 평생 책임져야 해요!”서인은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왜 내 탓이지?”“사장님이 산 사과잖아요!”당당한 유진의 태도에 서인은 말문이 막혔다. 물론, 사과에 농약 따위는 없었다. 결국 유진은 바보가 되지도, 장애가 생기지도 않았고, 심지어 배 아픈 일조차 없었다.두 사람이 안토니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10시였다. 토니네 민박집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주변에는 몇 개의 민박집이 듬
산길 위로 가끔 여행객들의 차가 지나갔다. 멀리 보이는 민박집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도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이게 무슨 냄새지? 사과 향 같은데?”임유진은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기쁜 표정으로 돌아보며 말했다.“저기 사과나무가 있어요!”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만 가자. 이제 출발해야 해.”“딱 하나만 따면 돼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사과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무에 열린 사과를 봤다. 달빛을 받아 가장 크고 탐스러운 사과를 골라 따냈다. 그리고 서인에게 줄 사과도 하나 더 따려 했다.사과를 막 손에 쥐려던 찰나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가 내 사과를 훔쳐 가지? 거기 서요!”어둠 속에서 손전등 불빛이 깜박였고,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유진은 얼어붙었다. 사과나무가 야생인 줄 알았는데, 주인이 있는 나무였다니!유진은 처음에는 자리에 서서 주인을 기다려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의 고함과 함께 거친 숨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개 한 마리가 보였다. 커다란 개가 사나운 기세로 유진을 향해 돌진했다.유진은 등골이 오싹해지며 온몸의 털이 곤두서, 본능적으로 뒤돌아 도망쳤다.“사장님!”멍! 멍멍멍! 사람 허리까지 올 법한 덩치 큰 검은 개가 빠르게 움직였다. 유진이 달아나는 것을 보자 더욱 거칠게 그녀를 향해 뛰어들었다. 유진은 손에 사과 두 개를 꼭 쥔 채, 있는 힘껏 서인을 향해 달렸다.서인도 상황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고, 유진을 향해 달려갔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유진은 순식간에 뛰어올라 그의 품에 안겼다. 유진은 겁에 질린 채 서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 순간, 개가 가까이 다가왔고, 서인은 한쪽 다리를 들어 강하게 개를 걷어찼다. 50킬로그램은 나갈 듯한 큰 개가 힘껏 날아가 땅에 쾅 하고 떨어졌다.개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몇 번 뒤틀다가 겨우 일어났지만, 아까의 사나운 기세는 사라지고 멀찍이서
“흥성.”흥성은 강성의 옆도시로, 관광 도시였다. 이에 임유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결정을 내렸다.“나도 같이 갈게요!”꽤 발랄하게 말하는 유진에 서인은 코웃음을 쳤다.“내가 뭘 하러 가는지도 모르면서 따라가겠다고?”유진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사장님이 뭘 하든 상관없어요. 어쨌든 나도 갈 거니까요!”서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안 돼.”“왜 안 돼요?”“오늘 돌아오지 못할 거야. 거기서 이틀은 머물러야 하는데, 네가 따라오면 불편해.”“그냥 여행 가는 셈 치면 되잖아요!”서인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다음 사거리에서 임씨 저택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이에 유진은 여유롭게 말했다.“그러면 집에 데려다줘요. 집에 가서 짐 챙기고 내 차로 흥성으로 갈게요. 어쩌면 거기서 우연히 만날 수도 있겠는데요?”“임유진.”서인은 얼굴을 굳히자, 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그를 바라봤다.“우리 동료들은 다 놀러 갔는데, 난 너 때문에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사장님은 나를 두고 혼자 나가겠다고요? 그게 맞는 거예요?”서인은 설명했다.“나는 노는 게 아니라, 일이 생겨서 가는 거야.”“몰라요. 어쨌든 따라갈 거예요. 나 어린애 아니니까 방해 안 할게요. 그냥 나 없는 셈 치면 되잖아요!”유진은 애타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사장님은 일 보러 다니고, 난 혼자 놀러 다닐게요. 절대 방해 안 할 거예요. 됐죠?”서인은 시간을 확인했는데, 더 미루면 해 지기 전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았다.“그럼 말 잘 들어야 해.”서인이 신신당부했다.“약속할게요!”유진은 신나서 손까지 들며 맹세할 기세였다.서인은 고속도로에 올라탄 뒤 오현빈에게 전화를 걸어 가게를 잘 봐달라고 당부했다. 자신은 이틀 동안 자리를 비울 거라고 했다.유진도 노정순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 설명 없이 친구들과 여행을 가겠다고만 말했다. 노정순은 오전에 여진구가 찾아와 회사 워크숍을 언급했던 걸 기억하고, 그녀가 회사 동료들과 함께 나가는 줄 알고는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당부했다.전화를 끊
강성의 한 묘지.홍복과 표용을 비롯한 전우들의 묘가 모두 이곳으로 옮겨졌다. 전우들은 이제 백랑의 곁에서 다시 함께할 수 있었다.서인은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씩 놓았고, 임유진도 묘지 밖에서 사 온 꽃을 하나하나 올려놓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돌계단에 앉아, 멀리 보이는 산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유진도 서인의 곁에서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이야기 좀 더 해 주세요!”서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다 얘기했잖아.”유진은 묘지를 찾을 때마다 늘 삼각주에서의 과거를 이야기해 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서인이 기억하는 건 이미 다 말해 준 상태였다. 그러나 유진은 질세라 다시 말했다.“이번에 전우들 묘지가 새로 생겼잖아요. 분명 더 많은 이야기가 있을 텐데요!”“없어.”서인은 한쪽 다리를 굽힌 채 느슨하게 앉아 있었고, 말투 역시 어딘가 귀찮아 보였다.이에 유진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그러면 다음에 소희한테 물어봐야겠네!”그제야 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유진을 노려봤다.“진짜 듣고 싶어?”“당연하죠!”유진은 활짝 웃으며 턱을 괴고, 이야기 들을 준비를 했다. 유진은 과거가 늘 궁금했다.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맨날 말하는 내 229명의 여자친구들 얘기, 하나씩 다 해 줄까?”유진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곧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고는 곧장 옆에 있던 꽃을 집어 들어 서인에게 던졌다.서인은 피식 웃으며, 거친 목소리 속에 장난기가 묻어났다.“이야기 듣고 싶다며? 229개의 이야기가 있지. 아마 내년까지도 다 못 들을걸.”“아직도 그 말을 해요?”유진은 씩씩거리며 서인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서인은 가볍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별다른 힘을 쓰지도 않았지만, 유진은 아무리 버둥거려도 밀어낼 수 없었다.마치 큰 회색 늑대 앞에 선 어린 토끼처럼,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채 버둥거릴 뿐이었다.잠시 후, 유진은 숨을 몰아쉬며 결국 포기했다. 그러나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임유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그러면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겠네요!”문신 남자는 점점 짜증이 났다.“겨우 서빙하는 주제에 뭘 그렇게 잘난 척이야? 내가 맞팔 달라는 것도 네 급을 봐준 거라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한층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사장님! 여기서 행패 부리는 사람이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서인이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다부진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기운은 주변 공기마저도 서늘하게 만들었다.서인의 싸늘한 눈빛이 문신 남자를 향하자, 그는 마치 얼음장 같은 시선에 찔린 듯 등골이 서늘해져,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유진은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사람이 돈을 내기 전에 제 SNS 맞팔하라고 요구했어요.”그제야 문신 남자의 일행이 이쪽 상황을 알아차리고 하나둘 일어나 힐끗거리며 지켜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험상궂은 인상이었고, 분위기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그때, 오현빈과 이문이 후원에서 걸어 나왔다.현빈은 본래 덩치가 크고 험악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문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손에 주방칼까지 들고 있었다.문신 남자의 일행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슬그머니 자리에 다시 앉았다.그때, 서인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며 문신 남자를 향해 말했다.“좋아. 내꺼를 추가해요. 나랑 얘기 좀 하자고요.”문신 남자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얼굴이 창백해지며 허둥지둥 휴대폰을 꺼내 결제를 마쳤다. 그러고는 재빨리 동료들을 불러 가게를 빠져나갔다.사람들이 나가자, 현빈이 비웃으며 말했다.“이런 겁쟁이 녀석들. 다음에 또 이런 쓰레기들이 나타나면 말도 필요 없어. 바로 나를 불러.”유진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알겠어요!”서인은 유진을 한 번 쓱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이문은 그를 따라가며 넌지시 물었다.“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임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 찻주전자를 훔쳐 가겠어요? 안심하세요!”서인은 유진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손님이 너 찾으러 왔으면, 할 얘기 끝났으면 나가라. 가게 바쁘다.”유진은 서인의 표정이 더 이상 좋지 않자, 정말로 화를 낼까 봐 서둘러 대답했다.“별거 아니에요. 내가 그냥 먼저 보낼게요!”그렇게 말한 뒤, 유진은 황급히 돌아서서 여진구를 향했다. 그런데 그 순간, 진구가 서인의 찻주전자를 들고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그거 내려놔요!”유진은 깜짝 놀라 뛰어가며 소리쳤다. 놀란 진구는 손을 헛디뎌 찻주전자를 떨어뜨릴 뻔했다.“왜 그래?”유진은 재빨리 찻주전자를 낚아채듯 빼앗았다.“이거 사장님이 2,000만 원 주고 산 거예요. 깨지면 감당할 수 있어요?”“뭐? 2,000만 원?”진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이게 2,000만 원짜리 골동품 같지는 않은데?”유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되물었다.“선배 골동품에 대해 알아요?”“아니?”“그럼 됐죠!”유진은 찻주전자를 소중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2,000만 원인데 한 푼도 깎지 않고 샀어요. 그만큼 애착이 있다는 거죠. 깨지면 당연히 화내겠죠!”진구는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난 잘 모르지만, 우리 작은아버지는 골동품 전문가야. 가져가서 감정받아 볼까?”그리고 그는 서둘러 덧붙였다.“오해하지 마. 혹시라도 바가지를 썼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이 찻주전자가 아무리 봐도 2,000만 원짜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찻주전자를 내려놓더니, 진구를 밖으로 밀어냈다.“무슨 바가지요? 마음에 들면 2,000만 원이든 2억이든 가치가 있는 거고, 마음에 안들면 2천원도 아까운 거죠.”“그러니까 선배도 선배 할 일 하러 가요! 내 일 방해하지 말고요!”진구는 서인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후, 마지못해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나가기 직전,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유진아,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