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 지 못하게 숨겨야만 했다.……다음 날 아침, 눈을 뜬 요요는 무의식적으로 우청아를 찾았지만 장시원이 보였다. 엄마가 안 보여도 울지 않은 요요는 장시원에게 기어가서 물었다.“삼촌!”장시원이 눈을 뜨자 햇빛이 눈에 들어왔고 앞에 있는 요요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요요 깼어?”요요가 앉자 하얀 발이 눈에 들어왔고 헤헤 웃으며 장시원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마음이 말랑해진 장시원은 요요를 품에 안았다.“왜 그렇게 좋아해?”“엄마는?”“곧 엄마 만날 거야!”장시원이 부드럽게 웃었다.요요는 우청아와 다른 남자의 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고 그 남자가 밉긴 하지만 요요는 예뻐 죽을 것 같았다.“엄마 찾으러 갈 거야!”요요는 장시원의 몸을 돌리며 우청아를 찾으러 가자고 떼를 썼다.“요요야! 천천히!”장시원은 요요를 두 손으로 번쩍 안아 들어 올리자 깔깔 웃는데 눈이 일자로 변했다. 우청아가 노크하고 들어오자 재밌게 놀고 있는 두 사람에 잠시 놀랐다.“엄마!”요요가 신나서 그녀를 불렀다.장시원은 요요를 안고 일어났고 화이트 핑크의 잠옷에, 어깨까지 내려온 그녀의 머리카락 그리고 느긋함과 여유로움을 띠고 있는 우청아에 두근두근했다.“난 요요 세수시키러 가볼게요.”장시원은 그녀를 쳐다보며 요요를 안고 화장실로 향했다.우청아는 그들에게 길을 비켜주고는 이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우청아는 장시원이 요요와 함께 세면대 앞에서 이를 닦는 모습을 보았다. 장시원은 여전히 핑크색 가운을 입고 있었고 요요는 작은 의자에 서 있었는데 그 둘은 이를 닦으면서도 웃었다. 우청아는 그 모습을 보다가 부엌에 가서 아침을 준비했다. 장시원과 요요가 씻고 나오자 요요의 옷을 갈아입히러 갔고 장시원의 어제 입었던 옷이 아직도 빨래 바구니에 있는 것을 보자 장시원에게 물었다.“뭐 입으세요?”장시원은 거실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주성이 이따가 나한테 옷 보내주기로 했어요.”
“장시원?”임구택은 단번에 알아맞혔고 소희는 여전히 불가사의하다고 느꼈다.“우청아의 목욕가운을 입고 있었어!”구택은 키득거리며 비웃었다.“그 두 사람이 잤다는 말이야?”소희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우청아 답지 않게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느꼈다.“장시원의 수법은 보통 여자들이 당해낼 수 있는 게 아니니 정상이야.”구택이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품에 안았다.“둘 다 성인인데 걱정할 게 뭐가 있어?”“장시원 오빠는 늑대고 우청아는 토끼니까 체급이 맞지 않잖아. 장시원 오빠가 우청아를 갖고 노는 거라면 절대 가만 안 둬!”사실 소희 본인도 굉장히 모순적이었다. 한편으론 우청아가 그녀와 장시원의 아이를 혼자 데리고 있는 것이 아까워 둘이 잘되기를 바라지만 또 한편으로는 장시원이 우청아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다. 장시원의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들 가운데 3개월을 넘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내가 장담할 수 있어!”구택은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나 믿어!”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장시원 오빠가 우청아한테 미안할 짓만 안 하면 나도 끼어들지 않을 거야.”필경 이는 우청아의 문제였기에 그녀가 알아서 잘 처리할 거라고 생각했다.“응, 일단 밥부터 먹자.”“나 먼저 샤워할래.”“그럼 같이해!”구택은 그녀를 안고 욕실로 향하자 그녀는 바로 제지했다.“아니! 그러면 밥부터 먹자.”같이 목욕하면 지각할 게 뻔했는데 그럼 아침을 못 먹을 게 뻔했다. 어젯밤 구택은 만족을 했기에 더 이상 소희를 난처하게 하지 않고 의자에 앉혀 우유를 따라줬다.……아래층우청아가 나왔을 때 식탁 위에 있는 아침을 보고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소희 왔다 갔어요?”“어”“당신을 봤다고요?”“왜? 보면 안 되는 건가?”장시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보았다.우청아는 머리가 굉장히 복잡했다. 아침부터 장시원이 자기 집에 있었고 심지어 자기 목욕가운을 입고 있었기에 틀림없이 소희는 오해했을 것이었다.“그 표정 무슨
하룻밤을 지내도 신경이 엄청나게 쓰였는데 우청아 혼자서 그 긴 시간 동안 요요를 키운 고생을 가히 짐작할 수 없었다. 우청아는 장시원이 갑자기 던진 질문에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습관 돼서 괜찮아요.”“낮에는 출근하고 밤에는 요요 보는 게 시간이 지나면 힘들 거야. 도우미 아주머니를 찾아봐 비용은 내가 지불하지.”“필요 없어요.”우청아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낮에 요요를 볼 수 없으니 저녁에라도 같이 있어 줘야 해요.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어요.”장시원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요요 아빠랑은 언제 헤어졌어? 왜 아빠의 책임을 하나도 지지 않는 거지?”우청아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눈을 깔았다.“그 사람 얘기 안 하면 안 되나요?”장시원도 답답해서 그 남자를 언급하고 싶지 않았으나 우청아의 이런 모습을 보면 아직도 그 남자에게 미련이 있어 보였다.‘아직도 그 남자를 사랑하나?’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두 사람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자 주성이 보낸 장시원의 옷이 도착했다.그리고 이경숙 아주머니가 왔을 땐 장시원은 옷을 갈아입고 요요랑 블록을 쌓고 있었다.즐겁게 놀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이경숙 아주머니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우청아가 주방에서 정리를 하는 틈을 타 그녀의 뒤에서 웃으며 말했다.“내가 할 테니까 출근해요.”“안 급해요.”우청아는 웃으면서 식기들을 치웠고 이경숙 아주머니는 옆에 서서 거들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우청아 씨, 장 선생이 요요를 엄청나게 좋아하네요.”“네.”“장 선생은 잘생기고 돈, 명예, 지위 그 어느 하나 부족하지도 않은 데다가 요요도 좋아하니 이는 보기 드문 인연이네요.”아주머니가 웃으며 말하시자 우청아는 멍했다.“저희는.”“쑥스러워할 필요 없어요. 애를 데리고 시집가는 것도 요즘 세상엔 아무것도 아니고! 잘 생각해 봐요, 혼자서 아이 키우는 게 굉장히 힘들어 보여서 그러니 진심으로 좋은 남자 만났으면 해요.”우청아는 어떻게 설명해야
주성이 차를 몰고 두 사람은 함께 회사 39층에 도착했다. 우청아가 자리에 앉자 하온의 메시지가 왔다.[우청아 씨 어제는 정말 미안했어요.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고 앞으로 우청아 씨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저희 어머니께서 병원에 저를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는 걸 알고 우청아 씨 뒷조사를 하셨나 봐요. 어제도 아마 저를 미행하셔서 당신을 찾은 것 같은데 정말 우청아 씨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줘서 면목이 없네요. 미안해요.]우청아는 하온에 대한 인상이 좋았다. 어제 같은 불상사가 있긴 했으나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기에 우청아 또한 고심 끝에 답장을 보냈다.[괜찮습니다. 하지만 하온 씨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만나지 않는게 좋을 것 같네요.]그녀는 하온을 탓하지 않았고 그저 서로서로 다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하온 또한 우청아의 뜻을 이해했고 시간이 지나서야 그녀에게 답장을 했다.[우청아 씨가 행복하길 바랄게요.][고마워요.]우청아는 한 가지 일을 해결했다는 사실에 많이 홀가분해졌고 정신을 차리고 일에 몰두했다. 점심시간 거의 될 무렵 우청아는 장시원이 보낸 메시지를 받았다.[점심에 토마토 소갈비랑 탕수육, 나머지는 우청아 씨가 먹고 싶은 걸로]우청아는 주체 못 하고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기 위해 입술을 앙다물었다.[알겠어요.]……두세 날이 지나 우청아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파트 밑에서 서영을 다시 만났다. 지난번 포스가 철철 흘러 넘쳤던거와 달리 오늘 서영의 태도는 180도로 변했다. 그녀의 손엔 선물이 들려져 있었고 우청아를 보자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다가갔다.“우청아 씨, 이제 퇴근하셨나 봐요.”우청아의 얼굴은 어두워졌다.“저랑 하온 씨는 아무 사이 아니니까 더 이상 찾아오지 마세요.”“그것 때문에 온 거 아니에요!”서영은 바삐 해명했다.“난 그저 우청아 씨에게 그날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사과하러 온 것이에요. 정말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무턱대고 사람을 끌고 와서 소란을 피워
우청아는 서영을 붙잡았다.“이렇게 하실 필요 없으십니다.”“우청아 씨, 정말 방법이 없어서 염치없이 우청아 씨를 찾아왔어요. 하온의 얼굴을 봐서라도 한 번만 도와줘요.”“사장님한테 잘 말해드릴 테니까 앞으로 이성적으로 행동하셨으면 좋겠어요. 설령 하온 씨가 여자친구를 사귀었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하시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알아요. 제가 한 행위가 타당하지 않다는 거.”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후회하였다.“하온의 아버지가 요 며칠 저한테 뭐라 하더니 직접 가서 사과하겠다고 하는 거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내가 온 거예요.”“사장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우청아 씨!”“이제 돌아가 보세요.”“이 물건들은 꼭 가져가요.”서영은 가져온 선물을 우청아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지만 단호하게 거절하였다.“도로 가져가시지 않으면 부탁은 못 들어줄 것 같네요.”그녀의 말에 서영은 하는 수없이 선물을 도로 가져왔다.“아. 이렇게 마음이 넓은 우청아 씬데 내가 너무 미안하네요.”“돌아가 보세요.”“그럼 사장님께 꼭 잘 말해줘요!”서영은 당부를 하였지만 불안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우청아는 서영이 떠나는 것을 보고 집으로 올라가는 게 아닌 장시원에게 전화를 하였고 전화를 받은 장시원의 목소리는 굉장히 다정했다.“요요가 나 보고 싶다고 합니까?”“아니요.”“그럼 우청아 씨가 나 보고 싶어서?”능글맞게 말하는 장시원에 우청아는 정색하며 말했다.“하온의 어머니가 절 찾아오셨어요.”“왜 또 찾아왔답니까? 괜찮아요?”장시원은 심각하게 물었다.“괜찮아요. 소란 피우러 온 게 아니라 나한테 사과하고 부탁하러 온 거더라고요. 내가 잘 말해주면 일이 해결될 것 같아서 그런가 봐요.”“그렇게 하겠다고 했어요?”장시원의 물음에 우청아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그런 우청아에 장시원은 갑자기 열이 뻗쳤다.“우청아 씨, 다른 사람이 왜 자꾸 우청아 씨를 괴롭히려고 하는지 알아요? 만만해서 그
우청아는 눈을 깔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도 용서한 건 아니에요. 하온 씨한테 짐이 되는 여자랑 결혼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해가 가고요. 오해로 생긴 일이니 그냥 이 정도로 끝내는 게 좋을 거 같아요.”“그 집 아들이 뭐가 대수라고! 그 여자한테 똑똑히 보여줬어야 했는데 아쉽군. 그 집 아들이 아까운 게 아니라 우청아 씨가 훨씬 아깝다는걸. 그리고 우청아 씨도 자꾸 자기를 깎아내리지 마요. 한 번만 더 그러면 하온 씨 집을 박살을 내버릴 거니까.”우청아는 깜짝 놀랐고 장시원은 말을 이었다.“내 밀착 보조가 아니라 내 회사의 직원 그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해요. 이 일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나한테 맡겨요. 계속 지켜보고 있을 거니까 아마 우청아 씨를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그의 말에 우청아는 안심이 되었다.“장시원 씨!”우청아는 장시원의 이름을 부르곤 한숨을 쉬었다.“그만해요. 하온 씨랑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을까 여기서 끝내줘요.”그러나 장시원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이렇게 해요. 네?”장시원은 갑자기 얌전해졌는데 우청아가 다정하게 말하면 모든 나쁜 기분들이 씻기는 듯 사라졌다. 한참 지나서 장시원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알겠어요. 이번에는 우청아 씨 말 듣도록 하죠.”“고마워요!”“요요랑 놀아요!”장시원은 발코니에 서 있었는데 뭔지 모를 답답함에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녀가 머리를 숙이며 자신한테 말을 하는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더욱 복잡했다. 그가 과거에 우청아를 조금이라도 좋아한다 해도 2년 동안 미움을 많이 샀기에 대체된 지는 오래됐을 것이었다.장시원은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고 뱉으며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우청아를 좋아하지 않기로.……수요일 소희는 출근하여 아침에 할 일들을 미리 어레인지 해 놓은 후 마민영이 배달로 보낸 수많은 디저트들과 아이스크림, 밀크티, 주스를 내려놓았다.미나는 유난히 소희를 좋아하는 민영을 알았기에 아무렇지 않아 보였고 웃으면서 말했다.“이거 다
미나는 머뭇거리며 말했다.“하지만 남자 친구가 좋아하지 않아요. 피임약은 부작용도 있고.”소희는 임구택이 자신에게 준 약을 떠올리며 말했다.“내가 먹는 약이 있긴 한데 부작용도 없다니까 한번 먹어볼래요?”“정말요? 어디 브랜드인데요?”미나는 감격스럽다는 듯 물었다.“나도 잘 몰라요. 집에 가서 사진 찍어서 보내 줄게요.”“좋아요.”미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부작용이 없다니, 너무 좋은데요?”스태프들이 몰려오자 일을 하기 시작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소희는 임구택이 준 약통을 찾아 사진을 찍어 미나에게 보냈다. [어 저 이거 본 적 있어요! 고마워요, 소희 씨!][괜찮아요.]소희는 한 가지 일이 마음에 걸렸다. 저녁에 임구택과 밥을 먹을 때도 얘기하지 않았다. 이틀이 지나고 소희가 일하고 있는 도중에 미나가 달려오더니 막대사탕 하나를 소희에게 건넸다.소희는 막대사탕을 받으며 물었다.“왜 이렇게 좋아해요?”탁자 위에 엎드려 방긋 웃으며 말하는 미나였다.“생리가 왔어요.”“어머, 잘 됐네!”미나는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이렇게 임신하는 거 두려워할 바엔 평소에 피임 잘해요.”“꼭 할게요.”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다.“사실 임신이 두려운 건 제가 아니라 남자친구예요. 그래서 계속 저한테 압력을 넣는데 그러고 보니 절 그다지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왜 그렇게 생각해요?”“만약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임신하는 걸 두려워해야 할 게 아니라 임신하기를 바라고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미나는 삐진 어투로 말을 하자 소희가 달랬다.“아마 결혼하지 않아서 그런가 보죠.”“아무 상관없어요. 사귄 지 2년이 지났고 임신하고 결혼하기 딱 좋잖아요.”미나는 속상해하며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그 사람은 절 사랑하지 않거나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사랑하지 않겠죠.”막대사탕이 입에서 사르르 녹자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을 맴돌았다.“참 소희 씨가 추천해 준 약 있잖아요. 제가 여러 약국 다녀보며 물었는데 없더라
책상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울렸다. 하영임을 알자 소희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하영 씨.”“아직도 현장인가요?”“네.”“당신같이 글로벌한 유명 디자이너가 그런 곳에 있는 거, 재능 낭비 아닌가요? 진석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봐야겠네요.”“여기 끝나면 작업실로 돌아갈게요. 그리고 전 어디에 있든지 하영 씨한테 디자인 설계도 늦게 주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말고요.”“제가 왜 소희 씨한테 전화했는지 눈치챘나 봐요.”“이번 가을 디자인 다 나왔으니까 이메일로 보내드릴게요.”“좋아요! 아 참, 강솔씨 돌아왔죠?” “네, 근데 잠깐은 작업실로 돌아가지 않겠다 하더라고요. 예능 프로그램의 예술 감독으로 발탁돼서 한동안 바쁠 겁니다.”“알겠어요. 강솔씨 돌아오면 한 번 모이시죠.”“그래요!”소희는 통화를 끝낸 후 자신이 GK에 보낼 가을 패션 디자인 설계도를 하영에게 보냈다. 오후에는 임구택이 마중을 나왔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소희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어디로 가는 거야?”“너 좋아하는 거 먹으러 가.”붉은 노을이 그의 얼굴을 비추자 눈동자는 더욱 빛이 났다. 소희는 익숙한 거리를 보이자 웃음이 절로 났고 임구택은 방고거리의 길가에 차를 멈추더니 소희를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에 도착했을 때, 날이 막 어두워졌고 안에는 여전히 강성대학을 다니는 대학생으로 가득 찼다. 두 사람은 빈자리를 찾아 앉았고 사장님의 눈에 처음으로 띈 사람은 임구택이었고 반가워하며 그들에게 다가왔다.“또 왔어?”그녀는 말을 마치고서야 그녀를 등지고 있는 소희를 보았고, 더욱 놀라워했다.“둘이 함께 오니 보기 좋네.”소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임구택도 웃으며 입을 열었다.“먹던 대로 주세요.”“오케이!”사장님은 친절하게 대답하고 주방으로 갔다. 가게의 등불이 켜지자 알록달록한 장식용 등의 그림자가 소희의 얼굴에 비쳤다. 소희는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국수 안 좋아하지 않나?”“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유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방으로 돌아가 휴대폰을 챙겼다. 왜냐하면 유진이 가져온 것은 오직 휴대전화뿐이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어둑한 복도에서, 유진은 무의식적으로 서인의 손을 잡았다.그리고 이번에는 서인이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유진은 조금씩 용기를 내어 손가락을 더 깊이 엮었고, 결국 그의 손 전체를 단단히 쥐었다.서인의 손은 크고 뼈마디가 굵었으며, 손바닥에는 거칠지만 단단한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유진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촉감이 이상하게도 더 마음에 들었다.깊은 밤, 조용한 복도에서, 유진은 자기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쿵, 쿵. 긴장과 부끄러움, 그리고 묘한 설렘이 섞여 있었다.민박집을 떠난 뒤, 서인은 차를 몰아 유진과 함께 산을 내려가 도시로 향했다. 그는 자기 외투를 벗어 유진의 어깨 위에 걸쳤다. 어둠 속에서 서인의 날렵한 얼굴선이 더욱 차갑고 도도해 보였다.“잠깐 눈 붙여. 도착하면 깨울게.”하지만 깊은 밤 도로를 달리는 이 순간이, 유진에게는 너무나도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유진은 전혀 졸리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전방을 바라보며 서인과 대화를 나눴다.“그 쥐덫, 아무 소용도 없을 거예요. 쥐는 계속 나올 거라고요.”그곳의 쥐들은 너무 대담했다. 사람을 무서워하기는커녕, 창가에 올라와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까지 했다.서인은 물었다.“그러면 왜 날 안 불렀어?”유진은 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입을 막고 있었거든요!”유진은 서인이 피곤할까 봐 일부러 참고 있었다. 하루 종일 운전했으니, 이미 녹초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침대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냥 밤새도록 그렇게 버틸 생각이었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바로 맞은편 방에서 들려오는 민망한 소리.그 순간, 유진은 차라리 쥐랑 함께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 그때, 서인이 문을 두드렸다. 그 순간이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유진은 본능적
“임유진!”서인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거칠게 떨렸다. 그는 급히 옆방 문을 두드렸고, 문이 열리는 순간, 임유진이 그대로 서인의 품에 뛰어들었다.서인은 방 안을 빠르게 둘러봤으나 별다른 이상은 없는 듯했다. 그제야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지며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유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저, 저기 쥐가 있어요!”서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반쯤 설명하고 반쯤 달래듯 말했다.“이런 곳에서는 쥐가 나오는 게 당연해. 그냥 네 방을 지나간 거야. 널 물지는 않아. 오히려 네가 더 무서울걸?”하지만 유진은 서인의 품 안에서 겁에 질린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제야 서인은 유진의 모습을 제대로 보았다.커다란 티셔츠 한 장만 걸친 채, 하얀 다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창백할 정도로 희고 매끈한 피부가 시각을 자극했다.반면, 서인은 방금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나왔기에, 바지만 입고 상의는 벗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 서인은 목이 바짝 타는 듯했고,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얼굴이 굳어버렸다.손을 뻗어 유진을 떼어내려 했지만, 유진은 겁에 질려 서인의 허리를 더 꼭 붙잡았다. 두 사람은 문 앞에서 그렇게 서 있었다.혹시라도 누가 지나갈까 걱정된 서인은 유진을 가볍게 안아 방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 그러나 유진의 티셔츠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녀의 부드러운 체온이 서인의 맨가슴에 고스란히 닿았다.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이 들자, 서인은 서둘러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고 이불로 감싸주었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유진은 얼굴이 불타오르듯 붉어졌다.그녀는 이불을 꼭 움켜쥔 채 눈을 피했고, 서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안토니한테 가서 쥐 잡을 도구가 있는지 물어볼게.”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자, 서인은 곧장 방을 나섰다. 유진은 그의 넓은 어깨와 탄탄한 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길이 미묘하게 흔들렸다가, 황급히 창밖으로 시
안토니는 서인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부모님이 여기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모든 절차는 다 정식으로 등록된 거예요. 게다가 이 땅은 호텔 부지에 포함되지도 않고요.”“그런데도 그 사람들이 철거하라고 명령할 수 있어요? 보상금도 터무니없이 적고, 우리 부모님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라는 거죠?”“하지만 호텔 뒤에는 권력과 돈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무도 우리 편에 서지 않아요.”임유진은 분통이 터져 소리쳤다.“이건 완전히 강도질이잖아요! 소송이라도 걸어야 하죠!”토니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소용없어요.”“사실, 보상금이 충분하다면 철거를 고려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그 옆에서 안주설이 조용히 말하자, 토니는 즉시 그녀의 말을 끊었다.“얼마를 준다 해도 안 돼. 우리 고향 집도 이미 팔아버렸어. 부모님께 남은 건 이 민박집뿐이야. 여기가 없어지면 어디로 가란 말이야?”주설은 난처한 표정으로 웃으며 변명했다.“그냥 의견을 낸 것뿐이야.”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상황은 알겠으니까 방법을 찾아볼게.”토니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정말 어쩔 수 없어서 서인 형한테 전화한 거예요. 형이 강성에 있는 거 알지만, 흥성 일에는 개입하기 어려울 수도 있잖아요.”토니는 분노에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서인에게 연락을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서인은 그날 바로 달려와 주었다.서인은 단호하게 말했다.“토니 형과 나는 형제나 다름없어요. 걔의 일은 내 일이나 마찬가지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해결할 테니까요.”토니의 부모는 연신 감사를 표했다.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밤 11시가 되었다. 토니는 2층에 서인과 유진을 위한 방 두 개를 준비해 주었다. 계단을 올라가며, 유진은 서인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나 아무것도 안 가져왔어요.”서인은 고개를 돌려 토니에게 물었다.“새 세면도구 있어? 갑자기 오느라 아무것도 못 챙겼어.”“당연하죠! 다른 건 몰라도 세면도구는 넉넉
유진은 뭔가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비싼 건 아니네요!”서인의 품에 안겼으니, 20만원이라도 아깝지 않았다. 서인은 본래 유진을 위로하려 했는데, 그녀의 표정을 보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순간 서인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유진은 기분이 좋아진 듯 미소를 지었다.“이미 산 거니까, 그냥 먹어요. 버리긴 아깝잖아요!”그녀는 티슈로 사과를 닦아내고 서인에게 하나 건넸지만, 서인은 거절하며 고개를 저었다.“난 안 먹어.”“그럼 저 혼자 먹을게요!”유진은 사과를 입에 가져가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사과가 신선해서 아삭하게 씹히며 입안 가득 달콤한 과즙이 퍼졌다.이윽고 차 안에 오직 사과를 씹는 소리만 울렸다. 서인은 앞을 주시하며 운전을 계속했지만, 무심결에 목젖이 한 번 움찔거렸다. 유진은 연달아 몇 입을 베어 물다가 반쯤 먹은 사과를 들고 서인을 바라봤다.“정말 안 먹어요? 진짜 맛있어요!”2만원으로 이 정도 퀄리티라면 완전 대박이었다. 그러나 서인은 도로를 응시한 채 담담하게 말했다.“보통 과수원에서는 사람들이 몰래 따 먹는 걸 방지하려고 사과에 농약을 뿌려 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에 든 사과를 바라봤다가 곧 얼굴이 새파래졌다.“왜 이제야 말하는 거예요?”서인은 태연하게 대답했다.“방금 떠올랐어.”“어떡하죠? 나 중독되는 거 아니에요?”유진은 볼을 불룩하게 부풀리며 억울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내가 만약 중독돼서 장애라도 생기거나, 바보가 되면, 사장님이 평생 책임져야 해요!”서인은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왜 내 탓이지?”“사장님이 산 사과잖아요!”당당한 유진의 태도에 서인은 말문이 막혔다. 물론, 사과에 농약 따위는 없었다. 결국 유진은 바보가 되지도, 장애가 생기지도 않았고, 심지어 배 아픈 일조차 없었다.두 사람이 안토니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10시였다. 토니네 민박집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주변에는 몇 개의 민박집이 듬
산길 위로 가끔 여행객들의 차가 지나갔다. 멀리 보이는 민박집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도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이게 무슨 냄새지? 사과 향 같은데?”임유진은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기쁜 표정으로 돌아보며 말했다.“저기 사과나무가 있어요!”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만 가자. 이제 출발해야 해.”“딱 하나만 따면 돼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사과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무에 열린 사과를 봤다. 달빛을 받아 가장 크고 탐스러운 사과를 골라 따냈다. 그리고 서인에게 줄 사과도 하나 더 따려 했다.사과를 막 손에 쥐려던 찰나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가 내 사과를 훔쳐 가지? 거기 서요!”어둠 속에서 손전등 불빛이 깜박였고,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유진은 얼어붙었다. 사과나무가 야생인 줄 알았는데, 주인이 있는 나무였다니!유진은 처음에는 자리에 서서 주인을 기다려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의 고함과 함께 거친 숨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개 한 마리가 보였다. 커다란 개가 사나운 기세로 유진을 향해 돌진했다.유진은 등골이 오싹해지며 온몸의 털이 곤두서, 본능적으로 뒤돌아 도망쳤다.“사장님!”멍! 멍멍멍! 사람 허리까지 올 법한 덩치 큰 검은 개가 빠르게 움직였다. 유진이 달아나는 것을 보자 더욱 거칠게 그녀를 향해 뛰어들었다. 유진은 손에 사과 두 개를 꼭 쥔 채, 있는 힘껏 서인을 향해 달렸다.서인도 상황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고, 유진을 향해 달려갔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유진은 순식간에 뛰어올라 그의 품에 안겼다. 유진은 겁에 질린 채 서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 순간, 개가 가까이 다가왔고, 서인은 한쪽 다리를 들어 강하게 개를 걷어찼다. 50킬로그램은 나갈 듯한 큰 개가 힘껏 날아가 땅에 쾅 하고 떨어졌다.개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몇 번 뒤틀다가 겨우 일어났지만, 아까의 사나운 기세는 사라지고 멀찍이서
“흥성.”흥성은 강성의 옆도시로, 관광 도시였다. 이에 임유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결정을 내렸다.“나도 같이 갈게요!”꽤 발랄하게 말하는 유진에 서인은 코웃음을 쳤다.“내가 뭘 하러 가는지도 모르면서 따라가겠다고?”유진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사장님이 뭘 하든 상관없어요. 어쨌든 나도 갈 거니까요!”서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안 돼.”“왜 안 돼요?”“오늘 돌아오지 못할 거야. 거기서 이틀은 머물러야 하는데, 네가 따라오면 불편해.”“그냥 여행 가는 셈 치면 되잖아요!”서인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다음 사거리에서 임씨 저택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이에 유진은 여유롭게 말했다.“그러면 집에 데려다줘요. 집에 가서 짐 챙기고 내 차로 흥성으로 갈게요. 어쩌면 거기서 우연히 만날 수도 있겠는데요?”“임유진.”서인은 얼굴을 굳히자, 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그를 바라봤다.“우리 동료들은 다 놀러 갔는데, 난 너 때문에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사장님은 나를 두고 혼자 나가겠다고요? 그게 맞는 거예요?”서인은 설명했다.“나는 노는 게 아니라, 일이 생겨서 가는 거야.”“몰라요. 어쨌든 따라갈 거예요. 나 어린애 아니니까 방해 안 할게요. 그냥 나 없는 셈 치면 되잖아요!”유진은 애타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사장님은 일 보러 다니고, 난 혼자 놀러 다닐게요. 절대 방해 안 할 거예요. 됐죠?”서인은 시간을 확인했는데, 더 미루면 해 지기 전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았다.“그럼 말 잘 들어야 해.”서인이 신신당부했다.“약속할게요!”유진은 신나서 손까지 들며 맹세할 기세였다.서인은 고속도로에 올라탄 뒤 오현빈에게 전화를 걸어 가게를 잘 봐달라고 당부했다. 자신은 이틀 동안 자리를 비울 거라고 했다.유진도 노정순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 설명 없이 친구들과 여행을 가겠다고만 말했다. 노정순은 오전에 여진구가 찾아와 회사 워크숍을 언급했던 걸 기억하고, 그녀가 회사 동료들과 함께 나가는 줄 알고는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당부했다.전화를 끊
강성의 한 묘지.홍복과 표용을 비롯한 전우들의 묘가 모두 이곳으로 옮겨졌다. 전우들은 이제 백랑의 곁에서 다시 함께할 수 있었다.서인은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씩 놓았고, 임유진도 묘지 밖에서 사 온 꽃을 하나하나 올려놓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돌계단에 앉아, 멀리 보이는 산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유진도 서인의 곁에서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이야기 좀 더 해 주세요!”서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다 얘기했잖아.”유진은 묘지를 찾을 때마다 늘 삼각주에서의 과거를 이야기해 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서인이 기억하는 건 이미 다 말해 준 상태였다. 그러나 유진은 질세라 다시 말했다.“이번에 전우들 묘지가 새로 생겼잖아요. 분명 더 많은 이야기가 있을 텐데요!”“없어.”서인은 한쪽 다리를 굽힌 채 느슨하게 앉아 있었고, 말투 역시 어딘가 귀찮아 보였다.이에 유진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그러면 다음에 소희한테 물어봐야겠네!”그제야 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유진을 노려봤다.“진짜 듣고 싶어?”“당연하죠!”유진은 활짝 웃으며 턱을 괴고, 이야기 들을 준비를 했다. 유진은 과거가 늘 궁금했다.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맨날 말하는 내 229명의 여자친구들 얘기, 하나씩 다 해 줄까?”유진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곧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고는 곧장 옆에 있던 꽃을 집어 들어 서인에게 던졌다.서인은 피식 웃으며, 거친 목소리 속에 장난기가 묻어났다.“이야기 듣고 싶다며? 229개의 이야기가 있지. 아마 내년까지도 다 못 들을걸.”“아직도 그 말을 해요?”유진은 씩씩거리며 서인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서인은 가볍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별다른 힘을 쓰지도 않았지만, 유진은 아무리 버둥거려도 밀어낼 수 없었다.마치 큰 회색 늑대 앞에 선 어린 토끼처럼,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채 버둥거릴 뿐이었다.잠시 후, 유진은 숨을 몰아쉬며 결국 포기했다. 그러나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임유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그러면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겠네요!”문신 남자는 점점 짜증이 났다.“겨우 서빙하는 주제에 뭘 그렇게 잘난 척이야? 내가 맞팔 달라는 것도 네 급을 봐준 거라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한층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사장님! 여기서 행패 부리는 사람이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서인이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다부진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기운은 주변 공기마저도 서늘하게 만들었다.서인의 싸늘한 눈빛이 문신 남자를 향하자, 그는 마치 얼음장 같은 시선에 찔린 듯 등골이 서늘해져,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유진은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사람이 돈을 내기 전에 제 SNS 맞팔하라고 요구했어요.”그제야 문신 남자의 일행이 이쪽 상황을 알아차리고 하나둘 일어나 힐끗거리며 지켜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험상궂은 인상이었고, 분위기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그때, 오현빈과 이문이 후원에서 걸어 나왔다.현빈은 본래 덩치가 크고 험악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문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손에 주방칼까지 들고 있었다.문신 남자의 일행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슬그머니 자리에 다시 앉았다.그때, 서인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며 문신 남자를 향해 말했다.“좋아. 내꺼를 추가해요. 나랑 얘기 좀 하자고요.”문신 남자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얼굴이 창백해지며 허둥지둥 휴대폰을 꺼내 결제를 마쳤다. 그러고는 재빨리 동료들을 불러 가게를 빠져나갔다.사람들이 나가자, 현빈이 비웃으며 말했다.“이런 겁쟁이 녀석들. 다음에 또 이런 쓰레기들이 나타나면 말도 필요 없어. 바로 나를 불러.”유진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알겠어요!”서인은 유진을 한 번 쓱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이문은 그를 따라가며 넌지시 물었다.“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임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 찻주전자를 훔쳐 가겠어요? 안심하세요!”서인은 유진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손님이 너 찾으러 왔으면, 할 얘기 끝났으면 나가라. 가게 바쁘다.”유진은 서인의 표정이 더 이상 좋지 않자, 정말로 화를 낼까 봐 서둘러 대답했다.“별거 아니에요. 내가 그냥 먼저 보낼게요!”그렇게 말한 뒤, 유진은 황급히 돌아서서 여진구를 향했다. 그런데 그 순간, 진구가 서인의 찻주전자를 들고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그거 내려놔요!”유진은 깜짝 놀라 뛰어가며 소리쳤다. 놀란 진구는 손을 헛디뎌 찻주전자를 떨어뜨릴 뻔했다.“왜 그래?”유진은 재빨리 찻주전자를 낚아채듯 빼앗았다.“이거 사장님이 2,000만 원 주고 산 거예요. 깨지면 감당할 수 있어요?”“뭐? 2,000만 원?”진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이게 2,000만 원짜리 골동품 같지는 않은데?”유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되물었다.“선배 골동품에 대해 알아요?”“아니?”“그럼 됐죠!”유진은 찻주전자를 소중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2,000만 원인데 한 푼도 깎지 않고 샀어요. 그만큼 애착이 있다는 거죠. 깨지면 당연히 화내겠죠!”진구는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난 잘 모르지만, 우리 작은아버지는 골동품 전문가야. 가져가서 감정받아 볼까?”그리고 그는 서둘러 덧붙였다.“오해하지 마. 혹시라도 바가지를 썼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이 찻주전자가 아무리 봐도 2,000만 원짜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찻주전자를 내려놓더니, 진구를 밖으로 밀어냈다.“무슨 바가지요? 마음에 들면 2,000만 원이든 2억이든 가치가 있는 거고, 마음에 안들면 2천원도 아까운 거죠.”“그러니까 선배도 선배 할 일 하러 가요! 내 일 방해하지 말고요!”진구는 서인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후, 마지못해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나가기 직전,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유진아,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