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언제?’육재원은 윤슬의 말을 동의할 수가 없어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박했다.하지만 윤슬은 대꾸하지 않고 부시혁을 쳐다보았다.“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재원이가 얌전할 땐 당신도 건드리지 마요. 제가 잘못 말했어요?”부시혁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윤슬은 또 육재원을 가리켰다.그러자 육재원의 입꼬리가 움찔하더니 마찬가지로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두 남자가 대답하지 않자, 윤슬은 팔짱을 끼며 두 사람을 흘겨보았다.“왜 다들 말이 없지? 내 말이 맞는 모양이네. 아무튼 두 사람 중 꼭 누군가 먼저
“네.”윤슬은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몸을 의자에 기대었다. 그리고 기지개를 한번 켜더니 나른한 고양이처럼 의자에 앉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재원이랑 박 비서는 대학 동창이자 몇 년간의 직장 동료였죠. 하지만 두 사람은 아주 단순한 직장 상, 하급 관계였어요. 박 비서도 재원이한테 마음 있다는 걸 드러내지 않았고요. 그땐 재원이도 박 비서를 싫어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일이 생긴 후부터, 두 사람 사이에 갑자기 문제가 생기더니, 재원이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한 거죠.”“내가 보기엔 육재원, 그 비서를 싫어하는 것
부시혁은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똑똑함은 비즈니스 한정이었고 남녀사랑 쪽은 조금 무디다고 얘기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적어도 윤슬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한눈에 알아볼 만큼 예리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조언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더더욱 아니었다.하지만 예상 밖으로 육재원이 박 비서를 좋아하고 있음을 바로 눈치챘고 심지어 얘기해버리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분석할 수 있었다.예전이라면 윤슬은 죽어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분명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을 거야.’윤슬이 믿기지 않다는 표정으로 자
부시혁이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보고 윤슬의 화도 식었다.윤슬은 손을 흔들었다.“됐어요. 앞으로 안 하면 되죠. 그나저나 아깐 왜 갑자기 그랬던 거예요?”부시혁은 입꼬리를 올렸다.“기뻐서.”“기뻐요? 뭐가요?”윤슬은 곁눈질을 하며 물었다.“나랑 약속해 줬잖아.”부시혁의 입꼬리는 더 올라가게 되었다.“내가 잘하면 안 떠난다고 했잖아,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곁에 있어 준다고 해서 너무 기뻤어. 두 번 다시 너한테 상처 주는 일은 없어. 그러면 우리 평생 함께하는 거지, 맞지?”부시혁은 말하면서 가슴을 피고 득의양양한
이런 생각을 하자 고도식은 오히려 컨디션이 좋았고 쓰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평소에는 조금만 자극을 받아도 급히 병원에 호송되고 그랬는데 말이다.지금 사태가 긴급해지니 몸은 오히려 더 잘 버텼다.고도식은 지금처럼 자기의 몸을 증오한 적이 없었다. 쓰러져야 할 땐 멀쩡하고 버텨야 할 땐 힘없이 쓰러져 사람을 짜증이 나게 만들었다.고도식의 얼굴빛이 점점 하얘지고 이마에는 굵은 땀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 팀장의 눈빛은 달라지기 시작했다.정 팀장은 두 직원의 얘기가 사실임을 확정했다.가짜라면 고도식은 절대로 이렇게 급해하지 않
“뭐? 우리 직원이 아니라고?”고도식은 비서의 말에 깜짝 놀랐고 어질어질했다. 오랫동안 약 복용으로 찐 살은 같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비서는 고개를 끄덕이었다.“네. 엘리베이터 CCTV를 확인해서 영상에 찍힌 얼굴을 찾아봤는데 우리 회사 직원이 아니었어요. 임시직일까 싶어 찾아봤는데 그것도 아니었어요. 모든 부서의 책임자랑 다 물어봐도 다들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그 두 사람을 아는 직원이 없는 거 보면 몰래 들어온 게 틀림없어요.”고도식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어금니를 꽉 물었다.“그럼 누가 시킨 게 틀림없어. 정 팀장한테
고도식은 이미 고씨 집안 그리고 회사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다.사실 그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았다. 맞는 신장을 찾을 확률이 너무 낮았기에 완치를 꿈도 꾸지 않았다.고도식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고 길어봤자 2년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부인이랑 고유정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지금은 억지로 부시혁과 윤슬을 상대할 수 있었지만 고도식이 죽으면 그 누구도 그들 모녀를 보호할 수 없게 될 것이다.고도식은 부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고 딸한테는 더더욱 많은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20년 전, 부인이 임신한 순간, 고도식은 그 아이
소성은 부시혁한테 뺏긴 물건을 도로 찾을 능력은 없었다.다만 순순히 당해줄 사람도 아니었다.부시혁은 재력과 세력이 다 대단한 사람이었기에 정면으로 싸우면 승산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암암리에 부시혁에게 공격을 할 수 있었고 부시혁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었다.비서는 소성의 뜻을 바로 캐치하고 흥분하며 고개를 끄덕이었다.“네, 알겠습니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그래, 가 봐.”소성은 손을 흔들었다. 비서는 빠른 걸음으로 떠났다.소성은 리모컨을 들고 방금 잠시 멈춘 연극을 다시 시청하기 시작했다.연극소리가 방안에서 울려
“당연히 그런 일에 관한 거지!‘이 구제불능과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이미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의도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게 아니었는데 부시혁은 이것마저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고 있었다.‘골치 아파.처음에 부시혁이 보던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사람들도 충분히 이상한데.거기서 배운 게 아니면 이 구제불능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어?’윤슬이 말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일반적인 선생님이라는 뜻이었다.‘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이렇게 불경스럽다니.’“그만 좀 해요, 부
부시혁의 이런 눈빛을 볼 때마다 윤슬은 마음이 굉장히 평안해졌다. 그녀는 부시혁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을 믿어요. 당신이 부씨그룹의 대표 말고 선생님이 되면 틀림없이 학생들에게 엄청 환영받는 선생님이 될 거예요. 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님은 바로 당신처럼 학생들에게서 잘못을 찾지 않고, 학생들에게 맞추는 선생님이라구요.”부시혁은 윤슬의 머리를 만지며 가볍게 웃었다.“어쩌지? 나는 선생님 되는 건 별로야. 그냥 너만 가르치는 거지, 다른 사람한테는 좋은 선생님이 아니야.”이 말이 너무 웃겨서 윤슬은 자기도
그렇기 때문에 윤슬은 반드시 공부하고 더 공부해서 더욱 강하고 더욱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는 자신에 대한 책임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천강그룹 경영에 대한 책임이며 천강그룹의 수백 수천의 직원들에 대한 책임이다.그렇지 않으면 천강그룹이 무너지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생존해야 하는 이런 종업원들 또한 앞길이 막막해진다.그래서 윤슬은 부시혁이 자신을 가르치겠다는 제의에 매우 감격하고 기뻐하며 기대했다.필경 부시혁과 같은 수준의 인물이 자신을 가르치게 되면 자신은 꿈에서도 좋아서 웃음이 나와 마땅하다. 다른 사람들은 감히
이 점은 틀림없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그러나 그런 학생들과 윤슬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부시혁에게 윤슬만큼은 예외였다.윤슬을 대할 때 부시혁 역시 평소와는 달리 늘 부드러운 남자였다.비록 이 순간 잠시 윤슬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지만 부시혁은 여전히 온화하고 꽤 인내심을 발휘했다.부시혁에게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 윤슬은 배운 내용을 자신이 잘 이해하지 못해서 부시혁이 자신을 너무 멍청하다고 생각하고 인내심을 잃으면 어쩌나 걱정했다.부시혁이 그다지 훌륭한 인내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녀도 잘
부시혁이 말했다.윤슬이 웃으며 말했다.“당신에게 알려준다는 걸 깜빡 잊었네요. 고택에 가져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부시혁이 윤슬이 이마를 살며시 눌렀다. 부시혁에게 윤슬의 이 말은 무엇이든 잊을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 듯했다. “대체 얼마나 큰 뼈길래, 이모께서 직접 친정이 있는 곳까지 가서 구해오신 거야? 우리도 사고 싶다고, 거기가 어디인지 알려달라고 하면 안 되는 건가?” 부시혁이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만년필을 돌리며 호기심을 표시했다.‘혹시 야생동물의 뼈는 아
윤슬이 진지한 표정과 말투로 부시혁을 향해 말했다. 부시혁은 자신이 윤슬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윤슬이 분명 본인의 마음대로 행동할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윤슬을 확실히 그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지금과 같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지라도, 윤슬은 부시혁으로 하여금 어떠한 이득도 취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당신 말대로 하면 되잖아!”부시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윤슬의 사무용 의자에 앉았다. “이제 됐지?”“됐어요.”윤슬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하지만, 이처럼 윤슬의 허락을 구한다는 것은 부시혁이 윤슬에 대한 존중뿐만 아니라, 천강그룹에 대한 존중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부시혁은 회사의 규묘가 작다는 이유로 천강그룹을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시혁은 윤슬이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윤슬의 말을 듣고는 낮은 웃음을 지었다.“왜 천강그룹이 나한테 가치가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당신이 여기 있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천강그룹은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곳이지.” 갑작스러운 부시혁 말에 얼굴이 붉어진 윤슬이 부시
윤슬의 눈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이를 알아차린 부시혁이 윤슬을 놀렸다. “왜? 난 여기 올라오면 안 돼?”“아니에요.” 윤슬은 다가가서 부시혁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우리 천강그룹에 오면 직원들이 나보다 당신을 더 친절하게 대하는 거 알아요? 오죽하면 내가 당신이 여기까지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를 내려도, 직원들은 내 말을 듣지 않을 정도예요. 물론 당신이 몰래 올라오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내가 당신을 올라오지 못하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아무 소용 없지.”부시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전화 너머에서, 윤슬이가 박희서를 언급하자 육재원의 얼굴은 삽시에 굳어졌다.윤슬이 말한 자신이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그 이야기가 바로 박희서에 관한 것이었다니. 육재원은 조금 듣고 싶지 않았다.육재원이 침묵하자, 윤슬은 자신이 박희서를 언급한 것이 육재원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임을 알고는 한숨을 쉬었다.“재원아, 박 비서가 해외로 연수를 간다는 걸 알고 있었어?”물론 윤슬은 이렇게 물었지만, 사실 그녀는 육재원이 그 사실을 알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육재원의 예상외 대답은 윤슬을 놀라게 했다.“알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