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아려오고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그래... 이 아이가 이 세상에 처음 왔을 때 난 끔찍한 생각을 했었지... 그런데 이제 겨우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됐는데 아이가...다 나 때문이야. 윤슬을 사랑한다는 걸 조금 더 일찍 눈치챘더라면 아니, 최면에 빠졌다는 걸 좀 더 일찍 눈치챘더라면 윤슬과 이혼할 일도 없었을 테고 이 아이도 무사히 태어날 수 있었겠지.물론... 모두에게 인생은 한 번뿐이고 이미 일어난 일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이 모든 만약 또한 아무런 의미없는 가설일 뿐이다.이때 병실문이 열리고 윤슬, 부시
왠지 모를 우월감에 부시혁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그 모습을 포착한 윤슬이 미간을 찌푸렸다.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니다. 무슨 생각을 하든 나랑 무슨 상관이래.고개를 숙인 윤슬은 불안한 듯 손가락을 움직였다.신우도, 재원이도 그리고 성준영까지 날 좋아한다고? 갑작스러운 애정운에 윤슬은 혼란스러웠다.먼저 육재원과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로 지낸 터라 당연히 서로에게 별 마음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가끔씩 그녀에게 짓꿎은 농담을 하긴 했지만 장난일 뿐이라 생각했는데...그리고 유신우도 마찬가지였다. 남동생이라고 생각했
“그래.”부시혁이 고개를 끄덕이고 임이한 역시 자리를 떴다.잠시 후 윤슬이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나왔다.배를 가르지 않아도 되는 수술이라 가능한 일이었다.하지만 유산도 출산과 마찬가지라고 했던가? 하체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이 복부까지 이어지고 한걸음씩 다리를 옮길 때마다 식은땀이 흘러내렸다.그 모습에 부시혁이 부랴부랴 다가갔다.“제가 할게요.”간호사 역시 부시혁을 윤슬의 보호자라고 생각하곤 별 의심없이 윤슬의 팔을 내주었다.하지만 부시혁의 손길이 닿기도 전에 윤슬은 팔을 치우고는 미약한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
“병원? 왜? 어디 아파?”“아니. 그냥 아이 지웠어.”윤슬이 눈을 질끈 감았다.“뭐? 유산? 왜? 주말에 해외로 나가서 지우기로 했잖아. 병원까지 예약해 놓고 왜... 너 지금 어디야? 내가 바로 갈게.”“세브란스 병원.”윤슬의 목소리에 육재원은 바로 전화를 끊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한편, 정성들여 내린 커피를 들고 가던 박희서는 육재원이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에 선 걸 발견하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대표님, 어디로 가시려고요? 윤 대표님 안 기다리세요?”하지만 머릿속에 온통 윤슬 생각뿐인 육재원은 박희서
“그건 왜 물으시죠?”환자의 개인 정보와 관련된 질문에 간호사가 되물었따.“아, 그게... 제가 방금 나간 남자분 친척 되는 사이거든요. 요즘 집에도 잘 안 들어오고 가족들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마침 여기서 만나서 요즘 뭐하고 다니나 알아 보려고요. 그래야 가족들이 안심할 수 있을 테니까요.”귀부인 같은 우아한 자태에 신뢰감 가득한 목소리에 간호사도 경계심을 풀었다.“아, 아내분이 아이를 지우셨거든요. 그래서 병원에 계신 거예요.”“아이를 지워요?”채연희의 눈이 커다래졌다.“여사님, 여긴 입원 병동이에요. 목소
“아, 병원 검사 보고서야. 아까 간호사님이 보여달라고 하셔서.”“아, 그래?”고개를 끄덕인 육재원이 검사보고서를 건넸다.“고마워.”윤슬이 검사 보고서를 베개맡에 내려놓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유신우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미안. 인포 쪽에 가서 휠체어 하나만 대여해 줄래? 내일 바로 퇴원인데... 나 혼자 움직이긴 좀 불편하고 그렇다고 계속 부축 받으면서 움직일 수는 없으니까.”윤슬이 머쓱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육재원이 흔쾌히 일어섰다.“그래. 신우야, 슬이 잘 지켜보고 있어.”“그래.”육재원이 병실을 나서자
입술을 달싹이던 유신우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벽을 짚고 겨우 움직이던 윤슬이 의자에 앉았다.“부시혁이 말해 준 거야. 아니면 어쩌면 난 영원히 몰랐을지도 몰라. 난 지금까지 우리 둘은 누가 뭐래도 친남매 같은 관계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넌...”윤슬이 말끝을 흐리고 부시혁에게서 알았다는 말에 유신우는 미간을 찌푸렸다.아니야.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몰라. 누나한테 어떻게 내 마음을 표현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것도 골치 아팠으니까.“부시혁이 한 말 다 사실이야. 나 한번도 누나를 단순히 누나라고만 생각한 적 없어. 누
그의 도움이 필요한 줄 알았더니 겨우 계좌 이체라니...만 원 정도도 빚을 지고 싶지 않은 건가 싶어 가슴이 답답해졌다.피곤함이 몰려드는 느낌에 부시혁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대표님, 다음 스케줄은...”뒤에서 장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부시혁은 짜증스럽게 말머리를 잘라버렸다.“중요한 거 아니면 취소하고 중요한 약속이면 뒤로 미루도록 해요.”부시혁이 착잡한 마음을 알고 있기에 장 비서는 태블릿을 끈 뒤 허리를 숙였다.“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병원으로 가실 겁니까?”고개를 끄덕인 부시혁이
“당연히 그런 일에 관한 거지!‘이 구제불능과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이미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의도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게 아니었는데 부시혁은 이것마저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고 있었다.‘골치 아파.처음에 부시혁이 보던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사람들도 충분히 이상한데.거기서 배운 게 아니면 이 구제불능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어?’윤슬이 말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일반적인 선생님이라는 뜻이었다.‘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이렇게 불경스럽다니.’“그만 좀 해요, 부
부시혁의 이런 눈빛을 볼 때마다 윤슬은 마음이 굉장히 평안해졌다. 그녀는 부시혁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을 믿어요. 당신이 부씨그룹의 대표 말고 선생님이 되면 틀림없이 학생들에게 엄청 환영받는 선생님이 될 거예요. 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님은 바로 당신처럼 학생들에게서 잘못을 찾지 않고, 학생들에게 맞추는 선생님이라구요.”부시혁은 윤슬의 머리를 만지며 가볍게 웃었다.“어쩌지? 나는 선생님 되는 건 별로야. 그냥 너만 가르치는 거지, 다른 사람한테는 좋은 선생님이 아니야.”이 말이 너무 웃겨서 윤슬은 자기도
그렇기 때문에 윤슬은 반드시 공부하고 더 공부해서 더욱 강하고 더욱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는 자신에 대한 책임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천강그룹 경영에 대한 책임이며 천강그룹의 수백 수천의 직원들에 대한 책임이다.그렇지 않으면 천강그룹이 무너지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생존해야 하는 이런 종업원들 또한 앞길이 막막해진다.그래서 윤슬은 부시혁이 자신을 가르치겠다는 제의에 매우 감격하고 기뻐하며 기대했다.필경 부시혁과 같은 수준의 인물이 자신을 가르치게 되면 자신은 꿈에서도 좋아서 웃음이 나와 마땅하다. 다른 사람들은 감히
이 점은 틀림없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그러나 그런 학생들과 윤슬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부시혁에게 윤슬만큼은 예외였다.윤슬을 대할 때 부시혁 역시 평소와는 달리 늘 부드러운 남자였다.비록 이 순간 잠시 윤슬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지만 부시혁은 여전히 온화하고 꽤 인내심을 발휘했다.부시혁에게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 윤슬은 배운 내용을 자신이 잘 이해하지 못해서 부시혁이 자신을 너무 멍청하다고 생각하고 인내심을 잃으면 어쩌나 걱정했다.부시혁이 그다지 훌륭한 인내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녀도 잘
부시혁이 말했다.윤슬이 웃으며 말했다.“당신에게 알려준다는 걸 깜빡 잊었네요. 고택에 가져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부시혁이 윤슬이 이마를 살며시 눌렀다. 부시혁에게 윤슬의 이 말은 무엇이든 잊을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 듯했다. “대체 얼마나 큰 뼈길래, 이모께서 직접 친정이 있는 곳까지 가서 구해오신 거야? 우리도 사고 싶다고, 거기가 어디인지 알려달라고 하면 안 되는 건가?” 부시혁이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만년필을 돌리며 호기심을 표시했다.‘혹시 야생동물의 뼈는 아
윤슬이 진지한 표정과 말투로 부시혁을 향해 말했다. 부시혁은 자신이 윤슬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윤슬이 분명 본인의 마음대로 행동할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윤슬을 확실히 그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지금과 같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지라도, 윤슬은 부시혁으로 하여금 어떠한 이득도 취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당신 말대로 하면 되잖아!”부시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윤슬의 사무용 의자에 앉았다. “이제 됐지?”“됐어요.”윤슬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하지만, 이처럼 윤슬의 허락을 구한다는 것은 부시혁이 윤슬에 대한 존중뿐만 아니라, 천강그룹에 대한 존중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부시혁은 회사의 규묘가 작다는 이유로 천강그룹을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시혁은 윤슬이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윤슬의 말을 듣고는 낮은 웃음을 지었다.“왜 천강그룹이 나한테 가치가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당신이 여기 있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천강그룹은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곳이지.” 갑작스러운 부시혁 말에 얼굴이 붉어진 윤슬이 부시
윤슬의 눈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이를 알아차린 부시혁이 윤슬을 놀렸다. “왜? 난 여기 올라오면 안 돼?”“아니에요.” 윤슬은 다가가서 부시혁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우리 천강그룹에 오면 직원들이 나보다 당신을 더 친절하게 대하는 거 알아요? 오죽하면 내가 당신이 여기까지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를 내려도, 직원들은 내 말을 듣지 않을 정도예요. 물론 당신이 몰래 올라오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내가 당신을 올라오지 못하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아무 소용 없지.”부시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전화 너머에서, 윤슬이가 박희서를 언급하자 육재원의 얼굴은 삽시에 굳어졌다.윤슬이 말한 자신이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그 이야기가 바로 박희서에 관한 것이었다니. 육재원은 조금 듣고 싶지 않았다.육재원이 침묵하자, 윤슬은 자신이 박희서를 언급한 것이 육재원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임을 알고는 한숨을 쉬었다.“재원아, 박 비서가 해외로 연수를 간다는 걸 알고 있었어?”물론 윤슬은 이렇게 물었지만, 사실 그녀는 육재원이 그 사실을 알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육재원의 예상외 대답은 윤슬을 놀라게 했다.“알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