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이한이 눈썹을 치켜세웠다.하지만 고유나가 잘못 말한 게 하나 있었다. 윤슬 쪽에 해커가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까.침묵으로 일관하는 임이한의 모습에 자신의 예상이 맞다고 생각한 고유나가 소리쳤다.“임이한! 이 악마 같은 자식! 너도 윤슬 그 계집애한테 넘어간 거지? 그래서 나한테 이러는 거야?”왜! 도대체 왜! 내 편이었던 사람들이 왜 전부 윤슬에게로 넘어간 건데!부시혁도, 부민혁도... 이제 임이한까지...윤슬 그 여자가 도대체 뭐가 그렇게 대단한데! 나보다 나은 게 뭔데!!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이해가 안 되고 질투가
순간 고유나는 이 세상의 시간과 공기의 흐름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우연에 온몸의 털이 쭈볏쭈볏 서고 운명의 농락에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거센 분노가 몰아쳤다.윤슬! 또 윤슬이야!설마 평생 이렇게 윤슬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야 하는 걸까?부시혁의 펜팔 친구가 윤슬이었던 것도 화나는데 임이한을 구해 줬던 사람까지 윤슬이었다니!왜 하필 전부 윤슬인 거야!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는 거냐고!“으아아악!”고유나가 미친 여자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임이한의 얼굴에서는
말을 마친 임이한은 공포에 질린 고유나를 향해 여유롭게 웃어준 뒤 병실을 나섰다.병실 밖,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듯 웃음꽃을 피우던 채연희와 고유정이 임이한을 발견하고 바로 의자에서 일어섰다.“선생님, 저희 유나 좀 어때요?”“아, 별일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우울 증세를 보이긴 합니다만 시간이 지나면 아마 괜찮아 질 거예요.”여유롭게 안경을 올리는 임이한의 얼굴에서 방금 전의 광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임이한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채연희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별말씀을요.
부시혁은 잔뜩 굳은 얼굴로 휴대폰을 끄고 다시 침대로 던져버렸다.상황도 모르면서 속 좋게 전화나 치고 문자나 날리는 육재원이 꼴 사나우면서도 왠지 부럽기도 했다. 육재원은 윤슬의 동의 없이 언제든지 만나러 올 수 있으니까...왜 이렇게 된 걸까? 분명 한때는 내 사람이었는데... 내 손으로 밀어내 버렸어...가슴이 욱신거리고 부시혁은 다시 가슴을 움켜쥐었다. 윤슬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눈물로 살짝 반짝였다.그러니까...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윤슬, 너도 도망칠 생각하지 마!부시혁의 다짐을 안고 밤은 점점 깊
혐오 가득한 윤슬의 말투에 부시혁은 그대로 멈춰 섰다.한편, 윤슬은 머릿속이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부시혁이었다니. 그날 밤 그 남자가 부시혁이었다니!그날 아침 그녀와 함께 누워있던 남자는 분명 부시혁이 아니었는데...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윤슬은 고개를 좌우로 돌리다 휴대폰을 들었다.그리고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HJ라는 이름을 한 “낯선 이”에게 보이스톡을 보냈다.그리고 다음 순간... 부시혁의 호주머니에 담긴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하...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에 손에 힘이 풀리고 스르륵 추락
가슴이 아려오고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그래... 이 아이가 이 세상에 처음 왔을 때 난 끔찍한 생각을 했었지... 그런데 이제 겨우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됐는데 아이가...다 나 때문이야. 윤슬을 사랑한다는 걸 조금 더 일찍 눈치챘더라면 아니, 최면에 빠졌다는 걸 좀 더 일찍 눈치챘더라면 윤슬과 이혼할 일도 없었을 테고 이 아이도 무사히 태어날 수 있었겠지.물론... 모두에게 인생은 한 번뿐이고 이미 일어난 일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이 모든 만약 또한 아무런 의미없는 가설일 뿐이다.이때 병실문이 열리고 윤슬, 부시
왠지 모를 우월감에 부시혁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그 모습을 포착한 윤슬이 미간을 찌푸렸다.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니다. 무슨 생각을 하든 나랑 무슨 상관이래.고개를 숙인 윤슬은 불안한 듯 손가락을 움직였다.신우도, 재원이도 그리고 성준영까지 날 좋아한다고? 갑작스러운 애정운에 윤슬은 혼란스러웠다.먼저 육재원과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로 지낸 터라 당연히 서로에게 별 마음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가끔씩 그녀에게 짓꿎은 농담을 하긴 했지만 장난일 뿐이라 생각했는데...그리고 유신우도 마찬가지였다. 남동생이라고 생각했
“그래.”부시혁이 고개를 끄덕이고 임이한 역시 자리를 떴다.잠시 후 윤슬이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나왔다.배를 가르지 않아도 되는 수술이라 가능한 일이었다.하지만 유산도 출산과 마찬가지라고 했던가? 하체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이 복부까지 이어지고 한걸음씩 다리를 옮길 때마다 식은땀이 흘러내렸다.그 모습에 부시혁이 부랴부랴 다가갔다.“제가 할게요.”간호사 역시 부시혁을 윤슬의 보호자라고 생각하곤 별 의심없이 윤슬의 팔을 내주었다.하지만 부시혁의 손길이 닿기도 전에 윤슬은 팔을 치우고는 미약한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