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억 원에 동주를 되찾아야 하는 비용까지 포함해, 결국 유정연은 그동안 도씨 가문에서 긁어간 돈을 전부 토해 낼 처지가 되었다.“그럼요, 아줌마. 내일 아침에 소식 기다릴게요.”도아영은 웃으면서 계속 말했다.“동주만 돌려주면 지호도 멀쩡하게 돌아올 거예요.”유정연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그래, 그래. 아영아, 나도 빨리 동주를 찾아서 너한테 가져다줄게.”그 말을 듣자 도아영은 만족스럽다는 듯 유정연의 방에서 나갔다.방금까지 웃음을 띠고 있던 유정연의 얼굴은 이내 어두워졌다. 불안과 초조함이 가득했다.사실 동주는 예전에 도박하다가 돈을 잃어 담보로 맡겼었다. 그걸 다시 찾으려면 대체 어디서 돈을 구해야 한단 말인가.‘지독한 년... 돈에 눈이 뒤집혔어!’그렇다고 동주 없이 버티기에는 더 문제였다. 도아영이 경찰에 신고라도 해 버리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테니까.유정연은 하는 수 없이 예전에 함께 도박하던 업자를 떠올리며 전화를 걸었다.“장 사장님, 저번에 제가 맡겼던 동주 말인데요... 다시 찾으려면 얼마면 될까요?”“그 동주는 품질이 아주 좋아요. 한 160억 원은 받아야지. 돈 준비되면 물건이랑 맞교환해요.”“네, 160억이요?!”가격을 듣고 유정연은 기절할 뻔했다. 대체 무슨 동주가 160억이나 하는가 싶었다.동시에 방 안으로 돌아온 도아영은 쓴웃음을 지었다.동주는 그녀의 어머니가 물려준 희귀한 유물이다. 가치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런데 가치를 모르는 유정연이 도박판에 몇천만 원을 위해 팔아넘긴 것이다.동주의 시세가 아무리 떨어졌다고 해도 최소 억 단위는 되는 물건이었다. 유정연이 어떻게 돈을 구해서 동주를 되찾을지 그녀는 자못 기대됐다.이윽고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유정연은 도지호의 문제 때문에 한숨도 못 자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도아영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여유로운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유정연은 꾹 참고 다가가며 말했다.“아영아, 지호... 오늘 밤 안에는 돌
말을 마친 도아영은 이미 준비해 둔 계약서를 유정연에게 건넸다.그녀가 미리 준비를 끝냈다는 걸 알고 유정연의 얼굴빛이 한결 어두워졌다. 그러나 도아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계속해서 말했다.“아줌마, 이 계약서는 제가 꼼꼼히 다 살펴봤으니 사인만 하면 돼요. 그리고 일주일 안에 동주를 제 앞에 갖다 놔주셔야 해요. 그 정도면 아줌마도 동주를 충분히 찾으실 수 있겠죠?”“그야 물론이지...”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유정연은 속으로 떨림을 감추지 못했다.160억이라니, 그 큰돈을 도대체 어디서 마련하라는 말인가? 그녀가 그동안 도씨 가문과 회사에서 긁어모은 비자금을 전부 합쳐도 160억은 되지 않았다.하지만 도지호를 위해 유정연은 결국 계약서에 서명했다.손에 든 계약서를 보고 도아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유정연이 말했다.“아영아, 계약서를 썼으니 절대 너한테 거짓말하지 않아. 그러니 지호를 구해줘. 지호가 수호한테서 무슨 일이라도 당한다면... 나는 어떻게 살라고 그러니!”유정연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이제 반나절 후면 로열 호텔에서 생일 파티가 열리니 도지호를 잘 꾸며서 데려가고 싶었다. 파티에서 재벌가 딸과 이어져야 남은 평생 잘살 수 있었다.“네, 지금 이씨 가문으로 가서 수호 씨한테 지호를 돌려달라고 할게요.”도아영이 일어서자 유정연은 그제야 한숨 돌린 듯 안도했다.“아줌마, 가능한 빨리 송금해 주셔야 해요. 저한테 계약서가 있으니까요.”도아영의 말을 듣고, 유정연은 또다시 속이 쓰렸다.‘재수 없는 계집애!’유정연의 문제를 마무리한 도아영은 도씨 가문 저택의 대문을 나섰다.차에 올라탄 뒤, 그녀는 이씨 가문의 저택으로 갈지 이경 그룹으로 갈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안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곧 전화가 연결되자 도아영은 물었다.“안 비서님, 도지호는 어디 있어요?”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안 비서님?”도아영이 의아해 다시 부르자 전화기 너머로 이수호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렸다.“설마 그
도아영은 금세 차를 몰고 이경 그룹 건물 입구까지 도착했다.회사 밖에 있던 사람들은 도아영이 오자마자 일제히 거리를 두며, 그녀가 맹수라도 되는 것처럼 기묘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도아영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이상한 시선을 뒤로한 채 곧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안지원이 사무실에서 나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아영 씨, 대표님이 지금 회의 중인데... 여기서 잠깐 기다려줄래요?”“여기서 기다리라고요?”도아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모든 직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 분명히 그녀를 비웃으려는 눈치였다.도아영은 이경 그룹에서 여러 소동을 일으켜 화제가 된 적 있었다. 회사 사람들도 도아영이 이수호에게 매달리는 입장이라는 걸 알았다.이번에는 또 무슨 이유로 왔는지, 호기심 반 비웃음 반인 시선들이 곳곳에서 감지되었다.“이경 그룹에는 쉴 만한 방도 없나요?”도아영의 물음에 안지원은 멋쩍게 웃으며 다소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그 휴게실들은... 당분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어요. 그리고 대표님이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요.”“회의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그건 확실하지 않아요. 빨리 끝나면 30분 정도 걸릴 수도 있고, 늦으면... 잘 모르겠어요.”애매한 대답에 도아영은 바로 이수호의 의도를 짐작했다. 그는 일부러 그녀를 여기 세워두고 골탕 먹이려는 것임이 분명했다.예전 같았으면 기꺼이 이런 모욕도 참아냈겠지만 이제는 이수호라고 해도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다. 그가 어떻게 굴든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도아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도지호를 풀어줄 생각이 없으면 됐어요. 사실 저도 정말 데려가고 싶었던 건 아니거든요. 나중에 아줌마한테 직접 데리러 오라고 하면 되겠네요. 저는 신경 안 써요.”도아영이 돌아서자 안지원은 당황한 듯 다시 다가왔다.“그래도 도지호 씨는 아영 씨 동생이잖아요...”“저는 살인미수범을 동생으로 두지는 않아요.”도아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수호 씨가 그렇게 바
도아영은 절대 이수호의 행동을 애정이 있어서 하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여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 말했다.“참, 오늘 저녁 도지호 생일파티가 있는데 많은 사람이 참석할 거예요. 도지호를 잡아 두는 건 상관없지만 생일 파티에서는 이수호 씨랑 차 한잔하는 중이라고 해야 할 것 같네요. 안 비서님은 이 핑계가 어떨 것 같아요?”그 얘기를 들은 안지원의 얼굴은 어둡게 변했다.이수호는 어떤 위치에 있고, 도지호는 또 어떤 처지인가. 이수호가 도지호와 차를 마신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됐다. 그런 소문이 퍼지면 이씨 가문이 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하지만 유정연 모자를 떠올리면 또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고 안지원은 생각했다. 그들은 체면도 모를 만큼 염치가 없기로 유명했으니까.“아영 씨, 이쪽으로 오세요.”안지원은 도아영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주변 직원들은 내심 놀라워했다. 도아영이 안지원과 함께 위층으로 들어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대표님이 약혼녀를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안 비서가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은데?”“도씨 가문 딸이라고 여기저기서 막 나대는 거겠지. 전에는 이경 그룹에 올 때마다 머리 조아릴 줄밖에 모르더니.”“맞아, 전에 우리 회사에 왔을 때는 몇 시간을 기본으로 기다렸잖아.”...직원들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안지원은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도아영의 반응을 살폈다. 아무래도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도아영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앞만 보고 걸어갔다.얼마간 지켜본 결과, 안지원은 도아영이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음을 실감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런 느낌이 더욱 강해졌다.예전 같았으면 누군가 뒤에서 그렇게 말하기만 해도 도아영은 부끄러워하며 얼른 자리를 뜨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도아영의 얼굴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태도가 역력했다.“아영 씨, 다 왔어요.”안지원은 도아영을 널찍한 휴게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찾아오
사람들은 도지호를 이수호의 시동생으로 알고 있다. 만약 도아영이 그런 말을 한다면 손님들은 틀림없이 믿을 것이다.이수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안지원은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이수호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도지호는 어디에 던져놨어?”“대표님, 도지호 씨는 이씨 가문 지하실에 가둬져 있습니다. 벌써 하루가 지났어요.”이씨 가문의 지하실에는 화장실도 없고, 불도 켜지지 않는다. 환풍기만 달린 작은 암실이나 다름없다.보통 사람이라면 몇 시간만 있어도 견디기 힘든 곳인데 하루나 지났다니 제법 긴 시간이다.“도아영한테 동생을 데려가고 싶으면 직접 와서 부탁하라고 해.”이수호는 도아영을 몇 시간 정도 기다리게 해서 두 사람의 격차를 다시금 깨닫게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이제 도아영에게 통하지 않는 수법이었다.그렇다면 할 수 없다. 도지호를 데려가려면 반드시 도아영 본인이 와서 고개를 숙이고 애원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 풀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잠시 후, 안지원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갔다. 도아영은 의자에 기대어 휴대폰을 넘기며 한가롭게 커피 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도지호를 구하겠다고 마음이 급해 보이는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그 모습을 본 안지원은 참다못해 말을 꺼냈다.“아영 씨, 대표님이 아영 씨를 부르십니다.”“네? 아직 회의 중인 거 아니었나요? 저는 그렇게 급하지 않아요.”도아영은 태연히 들고 있던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저 먼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아, 이경 그룹 화장실은 어디에 있죠?”“...”도아영이 여유만만한 태도를 보이니 안지원은 오히려 마음이 조급해졌다.원래는 도아영이 이수호를 기다리는 계획이었는데, 반대로 도아영이 이수호를 기다리게 하고 있었다.“아영 씨, 이쪽입니다.”안지원은 도아영을 화장실까지 안내했다.한편, 대표이사실에서 이수호는 한참 기다려봐도 도아영이 오지 않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때마침 안지
이수호의 얼굴이 도아영에게 가까이 다가왔다.예전의 도아영이었다면 이수호가 접근하는 순간 얼굴이 금세 붉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로 밀어내며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이수호 씨, 여기는 회사예요. 좀 예의를 지켜줘요.”“예의를 지키라고?”이수호는 마치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그는 도아영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전에는 누가 하루에 세 번씩 회사에 찾아와서 나한테 잘 보이려고 온갖 애를 다 썼더라? 그때는 왜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걸 몰랐지? 응?”이수호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도아영은 슬쩍 옆으로 피하며 말했다.“그때는 제가 어렸고 철이 없었어요. 너무 뭐라 하지 마요.”그러면서 도아영은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말했다.“그리고 여기는 여자 화장실이에요. 아무리 할 말이 있어도 여긴 좀 곤란하지 않나요?”그 말을 듣고 이수호는 잠시 도아영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뭔가 살피는 듯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이수호 씨?”“사무실로 가자.”이수호는 다시 예전처럼 냉정을 되찾았다. 도아영은 그 뒤를 따라갔다.사무실에 도착하고, 이수호는 책상 앞에 앉으며 말했다.“도지호는 너를 납치했어. 법대로 하면 감옥에 보내야지.”예전의 도아영은 동생인 도지호를 무척 아꼈다. 도지호가 무슨 짓을 하든 늘 해결책을 찾아주려고 했고, 그가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해달라는 것은 전부 다 해줬다.말을 꺼낸 이수호는 도아영의 반응을 살폈다. 도아영은 덤덤하게 이수호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맞아요. 저도 감옥에 보내고 싶었어요.”도아영이 하는 말은 전부 진심이었다. 유정연 모자를 감옥에 보낼 생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환생한 뒤로 그녀는 그들에게 할 만큼 해줬다고 여겼다.전생에 도아영은 도지호를 지극히 아끼면서 진심이 언젠가는 통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도지호는 아버지의 사업을 망가뜨렸고, 유정연은 도지호와 함께 돈을 들고 도망쳐 버렸다.전생의 어리석었던 자신을 떠올리며 도아영은 미소를 지었다.“원래
“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다른 볼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이수호는 그녀가 어젯밤 서현우의 차에 탔던 일을 적어도 한 번쯤 해명할 줄 알았다. 하지만 도아영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고 설명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때의 상황을 떠올리자 이수호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도아영에게 품었던 감정을 거두기로 했으니 그녀 때문에 흔들릴 수도 없었다.그는 냉정하게 말했다.“가 봐.”속을 알 수 없는 이수호의 태도에도 도아영은 묻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문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지원은 조용히 식은땀을 훔쳤다.‘아영 씨는 정말 대표님 기분이 안 좋은 걸 눈치 못 채는 걸까?’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그 시각, 도아영은 이미 차를 몰고 이씨 가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우미는 도아영이 돌아오자 반갑게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아가씨, 대표님께서 아가씨를 지하실로 모시라고 하셨어요.”“네.”도우미는 곧장 도아영을 데리고 지하실로 내려갔다.지하실 문이 열리자마자 도지호는 미친 듯이 뛰쳐나오려 했지만 도아영이 그를 단숨에 밀쳐 다시 안으로 처넣었다.하루 종일 여기 갇혀 있던 도지호에게는 버틸 힘조차 없었고 도아영의 힘에 그대로 바닥에 나가떨어져 처참한 몰골이 되었다.“내보내 줘! 어서 내보내 줘!”이 순간 도지호는 거의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도아영은 지하실에 진동하는 역한 냄새와 도지호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그가 이곳에서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고생을 많이 한 사람에게도 밀실은 버거운데, 어려움 한번 없이 자라온 부잣집 도련님인 도지호가 하루나 갇혀 있었으니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을 터였다.“나가고 싶어? 안 될 것도 없지.”도아영은 땅에 주저앉은 도지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앞으로 다시는 이런 짓 안 하겠다고 약속해. 그리고 생일파티가 끝난 뒤에는 스스로 경찰에 자수하고, 다시는 집안 재산을 노리지 않겠다고 맹세해.
“도아영! 이게 다 너 때문이야!”도지호가 아무리 악을 써 봐도 소용없었다. 이제는 이수호가 도아영의 뒤를 받쳐 주고 있으니 강주에서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잠시 뒤에야 유정연이 도지호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서둘러 달려와 보니 도지호는 이씨 가문 밖 골목에서 형편없이 서 있었다.“지호야! 어, 어쩌다 이렇게 됐어!”유정연은 도지호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코를 찌르는 지독한 냄새를 맡았다.도지호는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이게 다 도아영 때문이에요! 대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이수호가 사람 시켜서 저를 하룻밤이나 여기 가둬 놨다고요! 엄마! 제발 도아영 좀 혼내 줘요!”도지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유정연은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그 계집애가 전처럼 만만하지 않아. 일단 흥분 좀 가라앉히고 어서 씻고 옷 갈아입자. 오늘 저녁에 네 생일파티 있잖아.”“생일... 이런 상황에 무슨 생일이에요!”도지호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댔지만 유정연은 애써 달랬다.“엄마가 이번 생일파티에 돈 엄청 들여서 거물들을 초대했어. 가서 인사 잘하고 괜찮은 여자애도 좀 만나. 그러면 우리한테도 도움이 될 거야. 여자 쪽 집안 도움을 받으면 도원 그룹 차지하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지.”도지호는 이를 꽉 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원 그룹의 재산을 독차지하려면 그녀의 방법을 따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그 후 도지호가 집으로 돌아가 씻고 정장을 갖춰 입자, 유정연이 깔끔해진 그를 힐끗 보며 말했다.“엄마가 너한테 딱 맞는 아가씨 물색해 놨어. 송희주라고 집안도 좋고 공부도 잘해. 그 집안에서 운영하는 회사도 손에 꼽힌다고 들었어. 오늘 잘만 하면 그 집안 힘을 빌려 도원 그룹을 차지할 수 있을 거야.”도지호는 흔한 부잣집 아가씨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시큰둥했지만 결국 재산을 독차지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한편, 도아영 역시 로열 호텔로 차를 몰고 가는 중이었다. 가는 길에 그녀는 주민서를 태웠다.조수석에 몸을 기댄 주민서는
모두가 구연준이 강이나의 유학 문제로 찾아왔을 거라 여길 때 이 남자는 매우 차분하게 조나린을 가리켰다.“조나린.”불현듯 지명을 당한 조나린은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네...”그녀는 초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연준이 왜 찾아왔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할 때 문밖의 경호원이 긴급하게 프린트한 통지서를 그에게 건넸다.구연준은 통지서를 확인하지도 않고 아예 조나린에게 내던졌다.“넌 오늘부로 퇴학이야.”통지서가 조나린의 발끝에 떨어졌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말도 안 돼!”허겁지겁 통지서를 주워서 봉투를 열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퇴학 조치 서류였다.퇴학이란 두 글자를 본 조나린은 온몸이 경직되었다.‘이럴 수가? 내가 왜? 대체 왜?’그녀는 옆에 있는 강이나에게 시선을 돌렸다.한편 강이나도 안색이 어두웠다.두 여자가 절친 사이란 걸 모르는 이는 없다. 구연준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와서 모든 학생들 앞에서 퇴학 통지서를 내던졌다는 건 대놓고 조나린의 뺨을 때리는 거나 다름없었다.“대표님, 오해예요. 다 오해라고요!”조나린이 횡설수설하면서 해명하려 했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이에 구연준이 차분한 얼굴로 되물었다.“오해? 도서관에서 폭력을 행사한 영상이 모조리 녹화됐어. 병원에서 부상 진단서까지 받았는데 오해라고? 이번 사건은 범법 행위에 속하니 넌 고의상해죄 및 학교 폭력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할 거야. 다른 학생들도 잘 들어. 이제 모두가 성인이라 법적 상식을 갖고 본인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해!”뭇사람들은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어느새 경찰이 안으로 들어왔다.“조나린 씨 맞죠? 저희와 함께 서에 가시죠.”경찰 한 명이 입을 열자 조나린은 사색이 되었다.졸업을 코앞에 두고 퇴학이라니, 게다가 경찰서까지 잡혀갈 신세가 되었다.그녀는 강이나에게 거의 애원하듯 소리쳤다.“이나야, 강이나! 살려줘! 나 좀 구해달란 말이야.”다만 강이나도 감히 꿈쩍하지 못했다.구연준에게 겁먹은 것도 있고
“사태가 워낙 심각하다 보니 무조건 퇴학 조처를 해야 합니다!”“저도 같은 의견입니다!”...회의실에서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손을 들었다.그 시각 학교 통보를 기다리는 조나린은 너무 긴장해서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조나린은 교실 안에서 강이나의 팔을 꼭 잡고 있었다.“이나야, 나 퇴학당하는 거 아니겠지? 뭐라고 말 좀 해봐.”유하영은 바짝 긴장한 그녀를 보더니 얼른 다가가서 위로했다.“괜찮아, 나린아. 부주의로 손을 밟은 것뿐인데 어떻게 퇴학까지 가겠어? 게다가 이나도 이미 이 대표님께 말했을 거야. 이번 일은 꼭 잘 해결될 테니까 너무 걱정 마.”말을 마친 그녀는 줄곧 함구하는 강이나를 바라봤다.“이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강이나는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녀는 조나린을 위해 사정한 적이 없는데 이 사실을 아직 유하영과 조나린에게 알리지 못했다.어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이수호에게 의심을 받았던 터라 본인 문제도 해결 못 한 마당에 조나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었을까?하지만 이건 단지 도아영의 손등을 밟은 간단한 문제이니 너무 심각한 조처는 없을 것 같았다. 강이나는 결국 모든 공로를 본인에게 돌렸다.“그래, 맞아. 어제 수호 씨한테 다 얘기했으니 너도 아무 일 없을 거야. 걱정 마, 나린아.”조나린은 그제야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됐다.‘하긴, 도아영이 대체 뭐라고? 이수호랑 파혼까지 한 마당에 뭐가 그렇게 대단해?’그도 그럴 것이 한성대는 실력과 배경이 없으면 괴롭힘을 당하는 수밖에 없다.손등만 밟았을 뿐이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도아영, 넌 이제 뒤 봐주는 사람이 없어. 학교에서도 이번 사건을 그냥 스쳐 지날 거야.’조나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이나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 딱히 걱정될 건 없었다. 강이나만 나서면 그녀는 무조건 무사할 테니까.이제 한시름 놨다고 생각할 때 교실 밖에서 웅장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구연준이 어느새 정장으로 갈아입고 금테안경까지 착용하니 고귀한 분위기가 저절로 흘러
그녀의 말을 들은 이수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뭐라고?”“대표님, 나 같은 여자애가 투자에 대해 뭘 알겠어요. 게다가 그 땅은 내가 사려던 게 아니라 연준 씨가 사겠다고 해서 낙찰받은 거예요. 대표님도 잘 알다시피 내가 그때 도씨 일가의 실권도 장악하지 못했는데 어디서 천억을 구하겠어요? 그 땅이 정 그렇게 욕심난다면 구 대표님을 찾아가 보세요. 팔지 말지는 구 대표님께 걸렸거든요.”도아영은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이수호는 그녀의 말투에서 선의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지금 장난해? 그 땅은 분명 네가 원해서 산 거잖아. 이렇게 쉽게 줘버렸다고?”“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그 당시 연준 씨가 돈을 대줬고 이제 와서 거둬가겠다고 하니 제가 무슨 권력이 있겠어요? 당연히 연준 씨한테 돌려줘야죠.”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솔직히 저도 후회해요. 이 땅이 이렇게까지 값질 줄 알았다면 애초에 눈 딱 감고 사버리는 건데! 괜히 좋다 말았네요.”“너...”이수호는 그녀를 뭐라고 평가해야 할지 몰랐다.하늘에서 떨어진 횡재를 이토록 홀가분하게 구연준에게 넘겨주다니.구씨 일가와 이씨 일가가 줄곧 앙숙이라는 걸 모르는 자가 있을까?이 땅을 구연준에게 줬다는 건 이경 그룹 하반기 온천리조트 계획이 백 퍼센트 망한다는 것을 뜻한다.이수호가 떠나가려 하자 그녀는 일부러 목을 내빼면서 말했다.“벌써 가게요? 좀 더 있으시지.”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수호가 침실을 나섰다.그가 떠난 후 도아영도 가면을 벗고 편하게 쉬었다.이수호는 그녀가 아빠가 주신 혼수를 전부 끌어모아 남원 교외의 땅을 산 걸 전혀 모르고 있다. 그것참, 모르길 천만다행이지,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원 그룹을 압박하여 그녀의 손에서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이 땅을 뺏어갔을 것이다.‘연준 씨, 미안하게 됐네요. 또 연준 씨를 내세우고 말았어요.’그 시각, 한성대 캠퍼스.“에취!”구연준은 난생처음 학교에서 이미지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재채기를 해댔다.학생들이 전부 쳐다보자
‘이 인간도 알고 있었네!’도아영은 무고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지금 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정부의 결책을 내가 무슨 수로 알아요? 미리 알다니, 말도 안 돼!”“그래? 그럼 이건 뭔데?”이수호는 또다시 신문 기사를 그녀에게 내던졌다.“남원 교외에서 샘물을 파냈다고 하는데 이것도 모른다고 할 거야?”“정말요?”그녀는 일부러 놀란 척했다.“에이, 설마. 나 그냥 대충 한번 땅을 낙찰받은 건데 그럼 이제 부자 되는 거예요?”“도아영!”이수호의 안색이 점점 일그러졌다.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에 잠자코 누워있었다.이에 이수호가 마침내 목소리를 내리깔고 그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이 땅은 우리 이경 그룹에서 가져갈 거야. 추후에 계약서 보낼 테니 넌 사인만 하면 돼.”“죄송하지만 나 아직 허락한다고 안 했는데요?”그녀가 주제도 모르고 날뛰자 이수호는 단호하게 말했다.“우리 회사에서 하반기에 온천리조트를 개발할 계획이란 걸 너도 다 알고 있잖아!”“이경 그룹 향후 계획을 내가 어떻게 알아요?”도아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지금 이 땅이 곧 개발된다고 하니까 나한테서 뺏는 거예요?”“뺏는다고 안 했어. 마땅한 금액으로 보상해줄 거야.”이수호가 차갑게 말했다.“이 프로젝트는 규모가 너무 커서 네가 조종할만한 사이즈가 아니야. 지금 바로 돈도 챙기고 좋잖아?”그의 말을 들은 도아영은 하마터면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이 남자는 늘 이렇게 거만했다.다만 그가 이토록 이 땅에 집착하는 걸 보아 도아영도 한 번쯤 떠보고 싶었다.“그럼 얼마 줄 수 있는데요?”“열 배로 쳐줄게.”이수호가 답했다.“애초에 네가 천억으로 샀으니 열 배로 갚을게. 그 땅 이경 그룹에 넘겨.”그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장사꾼은 역시 장사꾼이라니까.’이 땅은 정부의 보상과 지지를 받고 있고 또한 정부에서 지지하는 중점 개발 구역으로 확정되었으며 거기에 샘물까지 파냈으니 미래 가치는 가늠할 수가 없다.1조 원이 아니라 지금
다음날 이수호는 가정부와 기사를 시켜서 도아영을 집으로 보낸 후 회의하러 회사에 나갔다.그는 회의내용 따위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젯밤에 그녀가 병상에 누워서 한바탕 욕설을 퍼붓던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도아영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생각만 해도 웃겼다. 그는 저도 몰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이 광경을 본 회의실의 뭇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대표님이 왜 이러시지?’“에헴!”옆에 있던 안지원이 마른기침을 하면서 이수호에게 눈치를 줬다.그제야 이수호도 다들 자신을 쳐다보는 걸 알아챘다.그는 곧장 웃음기를 거두고 싸늘하게 말했다.“그럼 이 방안대로 해요.”“대표님,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요.”이때 매니저 한 명이 입을 열었다.“남원 교외의 땅을 며칠째 파고 있는데 어제 그 땅에서 샘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하반기 온천리조트 사업과 충돌하니 이 땅을 빨리 사들여야 합니다. 남원 교외가 우리 회사의 미래 산업에 방해가 돼서는 안되잖아요. 또한 우리도 그 땅을 이용해서 온천리조트 계획을 확장할 수 있고요.”이수호는 처음에 그다지 새겨듣지 않았는데 남원 교외라는 네 글자가 어딘가 익숙했다.“대표님, 남원 교외는 도아영 씨가...”안지원이 가장 먼저 눈치채고 그에게 말했다.도아영을 언급하는 순간 이수호는 경매장에서 그녀가 천억을 주고 남원 교외의 땅을 낙찰받은 일이 떠올랐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지자 뭇사람들은 어쩔 바를 몰랐다.“회의 끝!”이수호가 이를 악물고 회의를 마무리하자 안지원이 재빨리 서류를 정리하고 그를 따라나섰다.회의실에 남은 임원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대표님이 요즘 왜 이러실까?’그가 워낙 빨리 걷다 보니 안지원은 겨우 따라잡았다.차에 탄 이수호는 어두운 표정으로 쏘아붙였다.“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모든 정보를 낱낱이 조사해봐.”“네, 대표님.”안지원은 운전하면서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이경 그룹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모두가 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
‘내가 만약 아영이랑 결혼한다면 몇십 년 후에도 과연 이런 모습일까?’이때 포장을 마친 사장님이 그에게 봉투를 건네면서 활짝 웃었다.“여자친구분 쾌유를 바랄게요.”이수호도 흐뭇하게 웃으며 돈을 꺼냈다.백만 원짜리 수표를 본 순간 사장 부부는 입이 쩍 벌어졌다. 이수호를 쫓아서 밖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병원 병실.도아영은 어느새 죽을 한 그릇 다 비웠다.방에 들어온 이수호는 불을 켜고 텅 빈 죽그릇을 치우고는 찐빵을 선반에 내려놓았다.한가득 포장해온 찐빵을 보더니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뭐가 이렇게 많아요?”“네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몰라서 종류별로 두 개씩 샀어.”이수호는 그녀 대신 재빨리 어수선해진 선반을 치웠다.이때 그녀가 말했다.“너무 늦게 돌아왔잖아요. 나 이미 배부르게 먹었어요.”“그래?”이수호는 별 반응이 없었다.“화 안 나요?”“나 놀리는 거 알아. 네가 지금 환자니까 그냥 참는 거야.”그는 소파에 앉아서 담담하게 말했다.“먹고 싶으면 먹고 못 먹겠으면 다 버려.”“...”너무나도 차분한 이 남자의 모습에 도아영은 포장을 뜯고 찐빵을 한입 물었다.이수호는 침대에 누워서 찐빵을 먹는 그녀에게 물었다.“마지막으로 그 찐빵 가게에 간 게 언제야?”도아영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차갑게 답했다.“기억 안 나요.”“너희 아빠가 입원했을 때 맞지?”순간 그녀의 안색이 확 차가워졌다.“그게 대표님이랑 무슨 상관이죠?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더는 사적인 일에 대해 묻지 말아 주세요.”입맛이 떨어진 그녀는 찐빵을 내려놨다.문득 아빠가 입원했을 때 그녀 홀로 바삐 돌아쳤던 기억이 났다.유정연도 오긴 했지만 아빠가 하루빨리 죽어서 도지호에게 유산을 물려주기만을 바랐다.전에 도씨 일가와 거래했거나 협력했던 대표들도 하나같이 나쁜 심보를 품고 있었다.도아영은 마치 언제든 잡아먹히게 될 토끼처럼 무기력하게 이 모든 걸 마주해야만 했다.그리고 그때 남현숙은 그녀를 손주며느리로 찜했었다.이수호는
야채죽과 삶은 계란, 그리고 밑반찬들까지 전부 담백한 음식인지라 식욕이 당기지 않았다.“음식이 별로네요.”도아영이 힐긋 내려다보며 말했다.“그럼 뭐 먹고 싶은데?”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설명했다.“이 병원 나가서 좌회전하고 백 미터 걸어가면 찐빵 가게가 하나 있는데 24시 가게거든요. 나 거기 찐빵 엄청 좋아해요. 대신 가서 사주실래요?”이수호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그는 곧장 병실을 나섰다.이수호가 떠난 후 도아영은 야채죽을 맛있게 먹었다.‘꽤 맛있네!’병원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심야인지라 주위가 어두컴컴하고 가로등 불빛만 어렴풋이 비쳤다.그는 도아영의 말대로 병원에서 좌회전해서 백 미터를 걸어갔지만 아무것도 안 보였다.이수호는 마침내 도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가 곧장 전화를 받자 이 남자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찐빵 가게가 대체 어디 있는데?”도아영은 일부러 난감한 척하며 되물었다.“실은 나도 이제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냥 휴대폰으로 한번 위치 찾아보시겠어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전화를 꺼버렸다.‘자식, 너 이번엔 제대로 걸려들었어!’이수호는 차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휴대폰을 꺼내 검색해보았지만 근처 1킬로미터 이내에 찐빵 가게라곤 없었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가장 가까운 찐빵 가게로 가려고 해도 택시를 타야만 한다.심야 시간대라 택시를 잡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결국 길거리까지 나가서 힘들게 택시를 잡았다.찐방 가게까지 도착하니 20분이나 소요됐다.한편 가게로 들어갔더니 찐빵 소가 무려 일여덟 가지나 되었다. 이수호는 그녀가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전혀 몰랐다.“손님, 뭐로 해드릴까요?”이때 사장님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새벽이라 가게에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이수호는 또다시 그녀에게 전화해서 어떤 맛으로 사 올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쉬는 데 방해가 될까 봐 휴대폰을 넣어두었다.“종류마다 두 개씩 포장해주세요.”사장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오밤중에 무슨
이수호는 본인 잘못인 걸 알기에 딱히 반박할 자격이 없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욕도 시원하게 했겠다. 무슨 보상을 원하는데? 그냥 얘기해.”“역시 통쾌하네요.”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앞으로 우리 집안을 겨냥하지도 말고 나도 더는 건드리지 말아요. 우리 이미 파혼했으니 각자 갈 길 가요. 내가 다친 건 다 대표님 때문이니 치료비는 전적으로 책임지세요.”“그게 다야?”“네.”도아영이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뭐 대표님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일종의 경제적인 보상을 하고 싶다면 저도 마다하진 않을게요. 이런 건 이별 비용이라고 하죠 뭐.”이별 비용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이수호의 얼굴이 한없이 차가워졌다.그는 왠지 모르게 이 단어가 너무 거슬렸다.“왜요? 돈 아까워요?”“줄게.”이수호가 곧장 대답했다.그녀도 너무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이수호에게 차고 넘치는 게 돈이니까 이별 비용으로 몇십억 정도 주는 건 손해라고 할 것도 없었다.“나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치료받는 동안 전적으로 책임질게.”“오케이.”도아영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양심은 있네, 그래도.’“내일 안 비서 시켜서 퇴원 수속 할 테니 당분간 우리 집에서 병 치료하는 줄 알아.”순간 그녀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내가 왜요? 왜 그리로 들어가야 하는 건데요?”“이미 함 원장한테 말해서 해외 최고의 의료진을 모셔오기로 했어. 너 그 손 치료하지 못하면 평생 오른손을 못 쓸 거래. 그러니까 내 말 들어.”“대표님...”“이것도 다 널 끝까지 책임지는 거잖아. 5개월 후에 손이 다 낫거든 무조건 보내줄게. 만약 그때까지도 회복하지 못하면 대신 보상금 줄게. 금액은 네가 정해.”여기까지 들은 도아영은 그제야 마음이 진정됐다.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금액을 내가 정하라고요?”“응.”“얼마든지 다 오케이?”은근슬쩍 신난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이수호는 덜컥 겁이 났다. 보상금이랍시고 한도 제한이 없다면 이 여자는 이
같은 시각 안지원은 다음날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이수호에게 전송했다.이수호가 힘겹게 휴대폰을 꺼내 들고 내일 회의자료를 훑고 있는데 도아영이 갑자기 악몽을 꿨는지 울면서 소리쳤다.“때리지 마. 날 때리지 말라고!”이수호는 곧장 침대 옆으로 다가가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서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으니까 아무도 너 못 건드려.”그제야 도아영은 조금 진정된 모습이었다.이수호는 안쓰러운 눈길로 그런 그녀를 쳐다봤다.이토록 가녀린 여자애가 오늘 같은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그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려고 할 때 도아영이 갑자기 두 팔을 번쩍 들었다.이를 본 이수호도 화들짝 놀랐다.이어서 도아영은 매우 또박또박하게 쏘아붙였다.“X발, 감히 날 때려? 넌 오늘 뒈졌어!”“...”“이수호 이 개자식!”“...”“널 목 졸라 죽일 거야!”“...”“죽어, 이수호!”“...”이수호는 휴대폰으로 내일 회의자료를 확인하려다가 어느덧 저도 몰래 네이버 검색창에 전신마취가 덜 풀렸을 때 왜 잠꼬대를 하는지에 대해 검색하고 있었다.한편 도아영의 욕설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이수호는 회의자료를 볼 기분이 아닌지라 모두 내려놓았다.‘얘 분명 의도적이야. 틀림없어.’야간 당직을 서는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좀전의 일로 이수호에게 사과하려고 들어왔는데 이 남자가 눈길 한번 안 주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나가.”“대표님, 이건 방금 안 비서가 보내온 음식입니다.”간호사는 음식을 이수호의 옆에 있는 책상에 올려놓았다.“얘 아까까지 계속 잠꼬대했는데 전신마취 때문이야?”간호사는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랐다.“전신마취요?”“왜? 아니야?”“이 환자분은 큰 수술이 아니어서 부분 마취만 했는데요?”“...”이수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침대에 누운 도아영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이때 도아영이 기지개를 켜고 비스듬히 눈을 떴다.“어머?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