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집에 돌아온 이수호는 거실에 가정부만 보이자 넌지시 물었다.“아영이는요?”“아직입니다.”“그래요?”이수호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면서 되물었다.“10시가 다 됐는데 학교에서 아직도 안 돌아왔다고요?”가정부도 상세한 상황은 잘 몰라서 조심스럽게 물었다.“학교에서 혹시... 혹시 무슨 활동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요?”“대학교에 무슨 활동이 있겠어요?”이수호는 미간을 구기고 도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 연결음이 두 번 울리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전화를 꺼버렸다.‘그래, 아주 좋아!’가정부는 옆에 서서 표정이 확 바뀌는 이수호를 바라보면서 계속 도아영을 위해 말을 거들어주려고 했다.이때 이수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영의 방에 있는 물건들 싹 다 버리세요!”“네... 네?!”가정부는 충격에 휩싸였다.도아영의 물건을 전부 버리라니...이수호가 차갑게 쏘아붙였다.“그렇게 이 집이 싫다면 떠나가라면 될 거잖아요.”전에 심정우의 말을 떠올리자 이수호는 본인이 지금 점점 도아영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그녀도 이런 식으로 서현우와 구연준을 유혹했을 걸 상상하면 이수호는 가슴이 꽉 막히고 답답할 지경이었다.‘싫지만 억지로 사는 거라며? 좋아. 이제 그만 보내줄게!’그녀에게 제대로 본때를 보여줄 때가 온 듯싶었다.자신이 도아영에게 무덤덤하고 보는 척도 안 하면 그녀가 과연 지금처럼 냉랭하게 굴 수 있을까?조만간 먼저 찾아와서 애원하는 날이 올 거라고 굳게 믿는 이수호였다.저녁 무렵, 이씨 일가 가정부는 끝내 도아영에게 전화해서 이 소식을 알렸다.그 시각 도아영은 한창 제 방에서 강이나와 약속 시간을 정하고 있었는데 가정부한테 소식을 듣자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그럼 버리세요. 어차피 중요한 것도 아닌데요 뭘.”그 물건들은 돈만 있으면 다시 살 수 있다. 낡은 걸 버려야 새것도 오는 법이니까.이수호가 대신 버려주니 그녀가 이사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가정부는 그녀가 이수호를 이 정도로
“좋아요. 이번 한 번만 믿을게요. 내일 오후에 조용한 곳에서 만나요, 우리.”“믿어줘서 고마워요. 그럼 내일 오후에 봬요.”도아영이 전화를 끊었다.일을 원만하게 마쳤으니 그녀는 곧장 서현우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도아영은 이제 결정을 내렸다.이수호가 먼저 파혼하도록 조종할 수 없다면 그의 옆에 있는 강이나를 이용하는 수밖에.파혼하고 나면 이수호와 강이나가 아무리 죽을 만큼 사랑해도 더는 그녀와 상관이 없으니까.마치 전생처럼 서현우가 강이나에게 관심을 보이니 이수호는 자연스럽게 위기감을 느꼈다.그렇게 그들만의 사랑과 갈등이 시작될 것이고 도아영은 자유를 되찾아 하늘 높이 훨훨 날 것이다. 또한 서현우 일행과도 등질 필요가 없다.여기까지 생각한 도아영은 자신의 아이디어에 감탄을 유발했다.다음 날, 강주 대학교.“지호야, 도아영 진짜 그렇게 상대하기 힘들어?”도지호와 함께 노는 몇몇 재벌 2세들이 한창 그와 함께 학교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도지호는 혐오에 찬 얼굴로 답했다.“그년만 아니었다면 도씨 일가는 진작 내 거였어! 지금처럼 군색하게 살 필요가 없다고.”“차라리 우리가 방법을 대서 도아영더러 도원 그룹과 전 재산까지 모두 내놓게 하는 건 어때?”재벌 2세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말이 쉽지. 그 큰돈을 쉽게 내놓을 것 같아?”“여자잖아. 겁 좀 주면 바로 내놓을걸! 목숨이 위태로운데 끝까지 돈을 잡고 있을까? 난 절대 아니라고 봐.”도지호는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문득 망설여졌다.‘그렇지. 어쨌거나 도아영은 여자잖아. 여자가 무슨 담력이 있겠어?’그녀에게 겁을 좀 주면 도원 그룹과 유산까지 전부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지호야, 이런 일은 나한테 맡겨. 여자를 상대하는 건 나름 경험이 많거든!”“그래. 우리 몇이 함께 하면 돼. 어차피 뭔 일 생겨도 아빠가 뒷수습해주실 거야. 강도질은 일도 아니야. 우리가 도아영 납치한 영상을 퍼뜨리기라도 해봐. 그년 끝까지 침착할 수 있을까? 어차피 도아영은 조만간
강이나가 물었다.“대표님은... 아영 씨 기다리는 거예요?”한편 서현우는 다른 사람들에게 속내를 들키는 걸 제일 싫어했다.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앉으시죠.”강이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그 시각 도아영은 식당 구석에서 무전기를 들고 종업원과 얘기하기 시작했다.아니나 다를까 종업원이 곧장 두 사람 앞에 메뉴판을 건넸다.“주문하시겠습니까, 손님?”“저는...”강이나가 대답하기도 전에 서현우가 덥석 가로챘다.“아니요. 얘기만 하고 갈 겁니다.”그가 김한빈에게 곁눈질하자 김한빈이 곧장 종업원에게 수표를 한 장 건넸다.종업원은 어마어마한 액수를 보고 넋이 나갔다.돈만 주고 식사는 거부하는 손님이라니, 종업원으로서는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종업원이 난감한 얼굴로 자리를 떠난 후 가까운 곳에 숨어있던 도아영이 허리를 곧게 폈다.‘어떻게 된 거야?!’그녀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고 무전기로 말했다.“두 사람한테 서비스라면서 디저트 드리세요. 아 참, 와인도 서비스라고 드리세요!”‘술까지 차려졌는데 이래도 밥을 안 먹겠어?!’곧이어 종업원이 디저트 2인분과 와인 한 병을 들고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종업원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건 저희 가게에서 서비스로 드리는 디저트와 와인입니다. 두 분 한 번 맛보실래요?”“고마워요.”강이나가 웃으면서 대답했다.종업원이 떠나간 후 그녀는 서현우와의 화젯거리를 찾아 나섰다.“대표님, 이 집 디저트가 꽤 유명해요. 한 번 드셔보세요.”“저는 디저트 싫어합니다.”이 말을 들은 도아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아무리 좋은 환경에 애틋한 분위기를 만들어줘도 서현우가 와장창 무너뜨리고 있었다.강이나도 얼굴에 띈 미소가 그대로 굳었다.서현우는 고개를 숙이고 시간을 확인하더니 김한빈에게 말했다.“아영이한테 연락해봐.”“네, 대표님.”“대표님!”이때 강이나가 덥석 말을 잘랐다.“오늘은 저랑만 얘기하시죠. 아영 씨가 있든 없든 중요하지 않아요. 아직이라면 그냥 안 와도 되죠, 뭐.”서현우는
그녀는 가시방석 같은 의자에 억지로 눌려 앉았다.한편 강이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살펴봤다.“두 분 꽤 친하신가 봐요. 그래서 대표님도 아영 씨를 통해서 저한테 연락한 거겠죠?”강이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뻘쭘함을 숨겨야 했으니까.서현우는 여전히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도아영을 이리로 데려온 것만으로도 불만이 한가득 쌓인 그녀였다.도아영도 이를 곧장 눈치챘다. 항상 오만하던 강이나가 이런 장소에서 체면이 구겨지는 건 견디기 힘들 것이다.그녀는 결국 서현우에게 좀 더 공을 들이기로 했다.“대표님, 이나 씨는 진심으로 대표님과 협력하고 싶어 해요. 이렇게 불쑥 저를 데려오시는 건 좀...”그녀는 말하면서 은근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서현우는 그녀의 꼼수를 진작 알아챈 듯 다시 의자에 꾹 눌러 앉혔다.도아영은 끝내 말문이 막혔다.“...”“네가 이 자리를 만들었으니 여기 있는 건 당연한 거지.”서현우가 느긋하게 말했다.“이나 씨 생각은 어때요?”“맞는... 말씀입니다.”말은 이렇게 했지만 얼굴의 웃음기가 싹 사라진 강이나였다.그녀는 단지 서현우의 체면을 구기지 않으려고 애쓸 뿐 이미 감정이 상할 대로 상했다.다만 서현우는 여전히 보는 척도 않았다.도아영은 가시방석에 앉아서 등에 뾰족한 가시가 콕콕 박힌 것만 같았다.“그럼 두 분이 얘기 나누세요.”그녀는 목을 축이고 말을 이어갔다.“저는 옆에서 듣기만 할게요.”“급할 거 없어.”이때 서현우가 종업원을 불러왔다.“메뉴판 다시 줄래요?”종업원은 어안이 벙벙해졌다.‘아까는 안 먹는다며?’다만 여전히 메뉴판을 그에게 건넸다.서현우는 메뉴판을 바로 도아영 앞으로 내밀었다.이 광경을 본 강이나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아까 그녀가 먼저 식사를 제안했을 땐 극구 사양하면서 곧바로 끝낼 기세더니 도아영이 오니까 선뜻 메뉴판을 건네고 있었다.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 대놓고 강이나에게 꼽주는 걸까?도아영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뭐예요?”
“...”도아영은 못 믿겠다는 눈빛으로 서현우를 쳐다봤다.‘이 자식 일부러 이러는 거야?’‘왜 이렇게 내 계획을 망치려고 드냐고?!’강이나는 안 그래도 도아영이 썩 달갑지 않은데 서현우가 이렇게 말하니 불만이 더욱 크게 쌓였다.초대를 받고 왔는데 본인 것만 쏙 빼놓고 주문하는 건 대체 무슨 경우인가?“여기 스테이크 3인분이랑 와인 석 잔 할게요. 빨리요!”도아영은 재빨리 외치면서 어색한 분위기를 완화하려고 했다.그녀가 빨랐으니 망정이지, 2인분만 올라왔다면 오늘은 정말 수습하기도 어려워질 것이다.“대표님께서 저희 집안의 땅을 봐두셨다고 들었어요.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내드릴 수 있어요.”이때 강이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녀는 미리 챙겨온 땅문서까지 꺼내 보였다.강씨 일가에서 강이나에게 어마어마한 유산을 물려줬다는 건 알고 있지만 서현우의 인심을 사기 위해 공짜로 그에게 땅을 건넬 줄은 몰랐다.그래도 자그마치 시내에서 700평 남짓한 땅인데 이렇게 선뜻 건네다니?!그야말로 통 큰 결정이었다.서현우는 땅문서를 받고 힐긋 살펴봤다.“시가 2천억의 땅을 이렇게 그냥 준다고요? 강이나 씨 성의가 어마어마하네요.”“이렇게 대표님을 알게 된 것도 영광이니 제가 먼저 성의를 보여드려야죠.”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게다가 대표님과 협력할 수 있는 건 저희 가문의 영광입니다. 원하신다면 땅은 당연히 내드려야죠.”강이나는 그에 대한 칭찬을 남발했다.전생에 서현우는 강이나에게 대시하느라고 먼저 이 땅을 사려고 했고 10배 이상의 금액을 주겠다고 했다.그 당시 강주를 발칵 뒤집어놓을 빅이슈이기도 했다.바로 그때부터 강이나와 서현우가 부쩍 가까워졌고 이수호도 위기감이 생겨났다.이어서 두 남자는 무려 3년이라는 긴긴 암투가 벌어졌다.나중에 남현숙이 강이나를 극구 반대했고 이 때문에 상처를 받은 강이나는 서현우와 함께 해외로 나갔다.그런데 이번 생에는 강이나가 먼저 이 땅을 서현우에게 내놓을 줄이야.그녀는 혹시 이수호가 자신을 향한 마음이 흔
도아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이나가 차갑게 쏘아붙였다.“두 사람 꽤 사이좋아 보이네요. 난 또 아영 씨가 진심으로 나랑 현우 씨를 협력하게 해주는 줄 알았는데 일부러 갖고 노니까 기분 좋아요?!”“이나 씨...”“대표님이 협력 의사가 없으시다면 우리도 더는 얘기 나눌 필요가 없겠네요!”그녀는 땅문서를 집어 들고 레스토랑을 나섰다.도아영은 순간 안색이 확 짙어졌다.“서현우 씨, 대체 뭐 하는 거예요?”이에 서현우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넌지시 대답했다.“네가 본 그대로야. 내 의사도 제대로 전달했고.”“선심 써서 그 땅을 얻게 해줬더니 판을 깨트리는 것도 모자라서 저렇게 사람을 보내버려요? 그 땅 진짜 포기한 거예요?”“맞아. 포기했어.”“이런!”서현우는 차분하게 스테이크를 썰었다.“이 집 스테이크 괜찮은데 한 번 맛볼래?”“됐네요!”도아영은 이렇게까지 사리에 어두운 사람은 처음 겪었다.‘2천억짜리 땅을 공짜로 주겠다는데 그걸 거절한다고?! 세상에 어떻게 이런 바보가 있지?’서현우가 김한빈에게 눈치를 주자 그는 곧바로 강이나의 앞에 놓인 식기를 다 치웠다.“강이나랑 협력은 잘 안 됐지만 우리도 이제 우리만의 협력을 상의할 때가 된 것 같은데?”“네?”도아영은 곧장 경계를 일으켰다.서현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절대 좋은 말이 아니니까.“도씨 일가에도 시 중심에 땅이 있다고 들었는데?”“그래서요?”“그 땅에 관한 자료는 이미 다 봤어. 나 그 땅 살 생각이야.”서현우의 말을 들은 그녀는 멍하니 넋을 놓았다.도씨 일가의 땅을 산다고?!그녀는 일부러 도도한 척했다.“우리 집 땅은 엄청 비싸요.”“말해봐. 얼마를 제시하든 10배로 쳐줄게.”익숙한 멘트를 듣는 순간 도아영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뭐지? 어떻게 된 거지?’서현우는 10배 이상의 가격으로 땅을 사서 강이나에게 대시해야 하는 건데 왜 지금 화살이 도아영에게 돌아온 걸까?“그 땅은... 1600억이에요!”“2조 원 줄게.”서현우가 말했다.“
띠리링...이경 그룹.이수호는 사무실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는데 도아영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그는 곧장 전화를 받으려다가 머뭇거리기 시작했다.이렇게 빨리 받으면 그녀에게 단단히 사로잡혔다는 걸 증명하는 꼴이 되니까.‘내가 쉽게 받아줄 것 같아? 천만에!’전에도 도아영의 전화라면 거들떠보지 않았던 그였기에 이번에도 좀 더 뜸 들이려고 했다.결국 그는 곧바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벨 소리가 거의 사라질 때쯤 이수호가 시큰둥하게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안 들리고 자동차 엔진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잠시 후 이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아영아?”곧이어 전화가 꺼졌다.이수호는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이번엔 전원이 꺼진 상태였다.이수호는 표정이 살짝 굳었다.그는 곧장 문 앞에 있는 안지원을 불렀다.“안 비서!”“네, 대표님.”안지원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이수호는 외투를 챙기고 어디론가 나가려 했다.“무슨 일이시죠?”“오늘 아영이가 어디 갔었는지 당장 조사해봐.”“네, 알겠습니다.”안지원은 곧바로 유정연에게 연락했다.이때 이수호가 그의 휴대폰을 낚아채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면서 질문했다.“아영이 지금 어디 있어요?”“아영이?”유정연이 말했다.“오후에 어디 나간 것 같은데. 왜 그래? 너랑 같이 있었던 거 아니야?”유정연은 그녀가 어디 갔는지 아예 모르는 눈치였다. 이에 이수호는 곧장 전화를 끊었다.한편 유정연은 어안이 벙벙해졌다.도아영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지하 1층 주차장에 도착한 후 이수호가 안지원에게 휴대폰을 내던졌다.“다시 조사해봐. 아영이 오늘 백화점이거나 레스토랑 같은 데 다녀왔는지 샅샅이 조사해.”유정연이 그녀가 오후에 나갔다고 했으니 마침 저녁 식사 시간과도 가까운 시간대였다.한편 주차장에서 강이나가 마침 이경 그룹으로 차를 몰고 왔다.이수호가 주차장에 나타나자 그녀가 큰소리로 외쳤다.“수호 씨.”이수호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강이나는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표정이 어색해졌다.“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도아영 씨는 성인이니까 갑자기 사라질 리는 없다고 생각했는데...”강이나가 도아영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하자 이수호는 말했다.“시간이 늦었어. 내가 회사 기사 불러서 널 집에 데려다줄게.”“수호 씨!”강이나는 이수호가 서둘러 떠나려 하자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설마... 도아영 씨를 걱정하는 거예요?”“어쨌든 내 약혼녀고 이경 그룹의 체면을 대표하는 여자야.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할머니를 볼 면목이 없어.”그렇게 말한 뒤 이수호는 곧장 차에 올라탔다. 더 이상 강이나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강이나의 표정은 복잡미묘해졌다.‘정말 그런 이유 때문일까? 아니면 수호 씨가 도아영한테 마음이 생긴 걸까?’강이나는 그런 의심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이수호가 정말로 도아영을 좋아하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그러다 아까 서현우와 함께 있던 도아영의 모습이 떠올라, 강이나는 별안간에 핸드폰을 꺼내 서현우에게 전화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건 서현우 본인이 아니라, 그의 비서 김한빈이었다.“강이나 씨, 무슨 일이신가요?”서현우가 아닌 비서가 받았다는 사실에 강이나는 내심 불만이 일었지만 꾹 참고 말했다.“혹시 서 대표님이 지금도 도아영 씨랑 같이 있나요?”“도아영 씨는 이미 돌아가셨어요.”“아, 그렇군요,,,”강이나는 말했다.“도아영 씨가 안 보여서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요. 별일은 없을 것 같으니 그만 끊겠습니다.”곧 통화가 끊어졌다.한편, 서현우와 김한빈은 다시 강주호텔로 돌아왔다. 김한빈은 전화를 끊고 나서 서현우에게 보고했다.“대표님, 방금 강이나 씨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도아영 씨가 사라진 듯하네요.”“사라졌다고?”서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저희 쪽 사람을 보내서 찾아볼까요?”“레스토랑 CCTV부터 확인해. 도아영이 식당을 나간 뒤 어디로 갔는지 알아봐.”“네.”서현우는 김한빈과 함께 다시
장내에 있는 사람들도 이 광경을 지켜봤다.그는 전에 도아영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인데 오늘은 이토록 긴장한 모습으로 그녀를 부축하다니.도아영은 진작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한 듯 손을 빼냈다.“고마워요.”그제야 이수호는 방금 그녀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알아챘다.전에 이경 그룹에서 도원 그룹을 대하는 태도를 볼 때 다들 이 두 집안이 사이가 안 좋은 거로 여기며 선뜻 도원 그룹과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이제 이수호와 도아영의 사이가 조금은 나아졌으니 도원 그룹에 손 내밀 협력사도 슬슬 많아질 것이다.“감히 날 이용해?”예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이렇게까지 계략이 많은 줄은 몰랐다.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부잣집 딸로만 여겼는데 알고 보니 본인만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대표님이 그러셨잖아요? 서로 이용하는 게 우리 모두에게 좋은 거라면서요?”도아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전에 이수호가 바로 이런 식으로 그녀를 이용했고 이제 와서 전세가 역전됐을 뿐이다.“오늘 파티에 왜 날 초대했는지 모를까 봐요? 도원 그룹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수작이잖아요. 썩 쉽지만은 않을걸요.”도아영이 완전히 오해하자 이수호의 안색이 확 돌변했다.“뭐라고? 집어삼켜?”생각도 참 야무진 그녀였다.할머니는 확실히 그런 생각을 지녔지만 이수호는 절대 아니다.옆에 있던 안지원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그건 정말 오해예요, 아영 씨. 대표님은...”“대표님은 뭐요? 도원 그룹을 넘본 게 아니라고요? 말도 안 돼!”오늘 이경 그룹에서 초대한 사람들은 죄다 강주의 유명 인사들이다. 게다가 언론사까지 불러왔는데 도아영과 이수호의 관계를 널리 떠벌릴 목적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믿을까?도아영은 그저 헛웃음만 새어 나왔다.이수호까지 남현숙과 같은 생각일 줄이야.“잘 들어! 난 절대 너희 집안까지 통째로 집어삼킬 생각 따위 없어!”이수호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요즘 그는 줄곧 도아영을 향한 솔직한 감정을 마주했다. 그가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자 도아영이 뒤로
도아영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외부인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도원 그룹에 유리한 일이니까.“의외네요, 대표님. 할머니 말 한마디에 선뜻 저를 만나주시네요?”도아영이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그녀는 이수호가 마냥 귀찮을 따름이었다.꼭 마치 이전에 이수호가 그녀를 대했던 것처럼 말이다.이제 둘의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할머니가 널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게 좋은 일인 것 같아?”다들 눈치챈 상황을 도아영이 모를 리가 있을까?그는 도아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오늘 그녀는 금빛 롱드레스를 입고 풀메이크업을 장착하여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옆모습을 본 순간 이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그녀의 모습과 전에 봤던 제니의 모습이 완전히 똑같으니까.그의 따가운 시선에 도아영이 미간을 구겼다.“다들 지켜보는데 뭐 하는 거예요?”“조용히 해.”이수호는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한시라도 빨리 본인의 추측을 인증받고 싶은 모양이다.제니는 차갑고 도도한 미인상이라 섣불리 다가설 수 없는 매력을 내뿜는다.외모도 강주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다.어여쁜 도화안은 강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비쥬얼이었다.제니를 처음 볼 때부터 도아영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제니의 모든 제스처가 도아영과 달랐으니까.이수호도 딱히 의심하지 않았지만 한성대 졸업시험에서 도아영의 성적 때문에 또다시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반년 가까이 휴학한 학생이 기말고사에서 이토록 높은 성적을 따낼 수 있을까?그녀가 적은 답안은 명확한 사고와 충분한 이론을 지녔다. 이건 비즈니스 베테랑만이 작성할 수 있는 답안이었다.제니의 학력까지 떠올리자 이수호는 눈앞의 도아영을 더더욱 의심하게 됐다. 그녀가 바로 명성이 자자한 위너 그룹 CEO 제니가 아닐까?“다 봤어요?”도아영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반짝이는 눈동자는 차갑고 도도한 제니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내가 괜한 생각을 했나?’이수호는 미간을 구겼다.“왜 그렇게 봐요
...주위에 온통 쉬쉬거리는 소리뿐이었다.도아영이 오늘 왜 이 파티에 참석했는지 다들 너무 궁금했다.로열 호텔 안, 안지원이 2층 휴식실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손님들 다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요.”“알았어.”이수호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눈만 감으면 어제 도아영이 했던 말만 떠올랐으니까.할머니가 이 파티를 열지만 않았어도 두 번 다시 도아영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아래층.도아영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화려한 드레스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이제 도원 그룹의 유일한 상속자가 됐기 때문이다. 도아영과 결혼할 사람은 자연스럽게 도원 그룹도 차지하게 된다.그녀에게 불의의 사고라도 생기면 도씨 일가의 전 재산이 남편에게 돌아갈 것이다.장내에 있는 남성들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아영아, 얼른 할미 곁으로 와.”남현숙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혐오에 찬 표정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도아영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남현숙에게 다가갔다.남현숙은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우리 아영이 점점 이뻐지네. 수호랑 오랜만이지? 금방 내려올 테니 함께 얘기도 나누고 오붓한 시간 보내. 젊은 사람들끼리 춤도 추고 와인도 마시고 얼마나 좋아?”남현숙은 지금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연기하고 있었다.도아영은 이씨 일가 사람이란 걸 이 자리에서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다.아무도 감히 도아영을 넘보지 말라는 의도였다.이에 도아영이 가볍게 웃었다.“아니요, 대표님을 어제도 만난 걸요. 왠지 나랑 함께하기 싫은 눈치였어요.”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던 이수호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어제 일을 되새기자 그는 또다시 사색이 되었다.“허튼소리! 수호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전에 파혼하려던 건 홧김에 그랬어. 젊은 애들이 그렇지 뭐. 누가 뭐래도 수호는 널 아주 많이 좋아해. 오늘도 너한테 사과하려고 하던데?”남현숙은 웃으면서 이수호를 불러왔다.뭇사람들은 이 광경을 빤히 지켜봤
이수호는 할머니의 말뜻을 너무 잘 이해한다.전에는 단지 도아영의 신분이 적합해서 그녀와 약혼하려던 거라면 지금은 도씨 일가 전체를 거머쥘 기회가 생겼다.그는 또다시 오늘 낮에 도아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다.“할머니는 이번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절대 결혼할 리 없어요.”말을 마친 이수호가 위층으로 올라갔다.남현숙은 손주 녀석의 성격을 잘 알기에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래, 네가 굽히지 못하겠다면 이 할미가 직접 나서야지 어쩌겠어.’다음날, 유정연이 감방에 갇히고 도지호가 집에서 쫓겨난 소식이 이 바닥에 쫙 퍼졌다.도아영은 도씨 일가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이번에 매우 순조롭게 도원 그룹을 이어받았다.학교에 관한 일도 일단락되었으니 그녀는 한창 도원 그룹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아영 씨, 아침에 이씨 일가에서 찾아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아영 씨더러 로열 호텔 파티에 참석하라고 하시네요.”“이씨 일가에서요?”‘이수호가 또 찾아온 거야?’도아영은 잠시 의심했지만 곧이어 남현숙임을 알아챘다.그 어르신은 능구렁이와도 같은 분이니까.도아영이 도원 그룹을 상속받자마자 파티에 초대하다니, 이건 절대 호의일 리가 없다.“아영 씨는 이제 도원 그룹 오너가 됐으니 이번 파티에 당연히 참석하셔야 해요. 게다가 앞서 이씨 일가와 도씨 일가가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 떠돌다 보니 많은 협력사에서 감히 우리와 협력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경 그룹 눈 밖에 날까 봐 두려운 거죠. 이번에 이씨 일가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면 많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 테고 도원 그룹 상황도 훨씬 나아질 겁니다.”주연우가 하는 말을 도아영도 물론 잘 알고 있다.다만 이경 그룹의 파티에 참석하기에 앞서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남현숙에게 득이 돼선 안 되고, 이씨 일가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게 아니라고 외부에 알려야 하니까.하지만...오늘 밤에 이수호를 만날 걸 생각하면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드레스 한 벌
“가시죠, 규리 씨.”“아니요! 대표님 좋은 사람인 거 알아요. 예전에 쌓아온 정을 봐서 우리 이모 한 번만 구해주세요!”“더는 우리 집에 나타나지 말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이수호가 싸늘한 눈길로 쳐다보자 임규리는 등골이 오싹했다.며칠 전에 강이나가 찾아와서 그와 임규리에 관한 스캔들을 일러바쳤는데 고작 여자들의 수작인지라 이수호는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어차피 임규리와 아무 사이도 아니니 똑똑한 사람이라면 둘이 불가능하단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수호와 임규리는 신분 격차가 너무 크니까.그 소문들은 임규리가 지어낸 거로밖에 결론이 나지 않는다.이수호는 이렇게 꼼수가 많은 여자가 딱 질색이다.한편 임규리는 아직 본인이 한 일을 이수호에게 들킨 줄 모르고 계속 유정연을 위해 사정했다.“이모도 도씨 일가 사람인데 대표님 정말 안 도와주실 거예요?”“안 비서! 내 말 안 들려?”“알겠습니다, 대표님.”안지원이 또다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임규리 씨, 계속 이러시면 끌어내는 수밖에 없어요.”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유정연이 감방에 간 일이 한성대에 소문이라도 퍼지면 그녀의 인생도 끝장이다.한성대에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모든 거짓말이 들통나고 더 이상 뒷배가 없다는 게 알려지면 남은 3년은 어떻게 버텨내란 말인가?아마 학자금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대표님, 제발요! 저희 이모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할머니, 제가 요 며칠 시중만 잘 들어줬잖아요. 그러니까 제발요! 우리 이모 구해주세요.”임규리는 눈물범벅이 되었다.한편 남현숙은 이수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그녀가 한심할 따름이었다.“네 이모가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우리도 할 수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도씨 일가의 일이니 정 도움을 구하고 싶다면 아영이 찾아가 보거라.”도아영을 언급한 순간 이수호의 두 눈이 반짝였다.그녀가 도와줄 리 있을까?왠지 유정연이 감방에 들어간 것도 도아영과 연관이 있을 듯싶었다.다만 아직도 그녀 생각 중인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수호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넌 도씨 일가의 상속자도 아니고 우리 아빠 아들도 아니야. 법적으로 볼 때 오늘부로 너희 두 모자는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정신 좀 차려, 지호야!”도아영은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전생에 아빠가 그녀에게 회사를 물려주셨는데 마음 약한 도아영이 유정연 모자에게 고스란히 건넸다. 결국 아빠의 회사는 3년도 안 돼서 부도났고 유정연은 도지호를 데리고 안용준과 함께 도망치려 했다.그러니 이번 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정연 모자와 도원 그룹을 떼어놓아야 한다.“이 자식 끌어내.”도아영이 차갑게 분부하자 도씨 일가의 경호원들이 곧장 도지호를 이 집에서 끌어냈다.그는 슬리퍼를 신은 채 반항할 여지도 없이 처참하게 집에서 쫓겨났다.“도지호랑 유정연 물건들 싹 다 정리해서 밖에 내다 버려요!”“네, 아영 씨.”주연우는 곧바로 위층에 사람을 보내서 도지호와 유정연의 물건을 싹 다 처리했다.도아영은 다 정리한 물건들을 도지호에게 내던졌다.옷과 신발, 책까지 버려진 걸 보더니 도지호는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다들 여기서 잘 지켜. 도지호는 이제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만약 얘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소란 피우면 그 즉시 경찰에 신고해.”“네, 알겠습니다.”도아영은 그가 소란을 피울 걸 염두에 두고 일부러 경비소를 차렸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지호는 미친 듯이 철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도아영! 난 네 동생이야!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당장 문 열어! 나야말로 도씨 집안 아들이잖아!”도아영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게 집으로 들어갔다.유정연 모자의 흔적이 없는 이 집안은 그제야 온화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선사했다.“아영 씨, 다음 계획은?”“유정연 전 재산을 회사 계좌로 입금했어요. 그동안 모자랐던 금액을 채운 셈이죠. 이제 드디어 도원 그룹 협력 프로젝트를 운행하게 됐으니 당분간은 위기를 벗어났다고 보면 돼요.”‘이수호만 잠자코 있다면...’도아영은 이렇게 생각했다.그녀는 오늘 이수호를 가
저녁 무렵, 도지호는 집에서 줄곧 도아영의 연락만 기다렸다.도원 그룹의 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그는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차에서 내리는 도아영을 보더니 도지호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너 뭐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집에 무슨 일 생긴 줄 알아? 당장 나랑 경찰서 가서 엄마 모셔와야지!”도지호가 명령 조로 쏘아붙이며 도아영의 손목을 붙잡고 경찰서로 갈 기세였다.이에 도아영이 그를 힘껏 내팽개쳤다.도지호는 못 믿겠다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너 미쳤어? 감히 날 밀쳐?”이 집에서 줄곧 거만을 떨던 도지호였기에 그녀가 매정하게 밀쳐버릴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이제 막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할 때 주연우가 덥석 막아서더니 가볍게 도지호를 제압했다.“너도 미친 거야? 우리 집안 따까리 주제에! 확 잘리고 싶어?”도지호는 힘으로 안 되니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다.이에 도아영이 차분하게 말했다.“잘 들어. 넌 이제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야. 회사에서도 아무런 직급이 없으니 주 비서는 제쳐두고 이 집안 가정부도 네 멋대로 자를 순 없어.”“이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 도지호야! 왜 이 집안 사람이 아닌 건데? 엄마가 잡혀간 틈에 내 자리를 빼앗으려고? 꿈 깨! 미친X아!”그는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째려봤다.하지만 도아영은 시큰둥하게 쓴웃음만 지었다.“네가 우리 아빠 아들이야? 쥐뿔도 아닌 게 무슨 자리까지 빼앗는다고 그래? 너희 엄마 안용준이랑 바람피운 건 알지? 안용준은 내가 직접 처리했고 너희 엄만 너그럽게 용서했어. 그런데 여태껏 회사 공금을 횡령하고 끊임없이 회사 자산에 손댔더라? 대체 언제까지 우리 집안 재산을 노릴 건데? 너희 두 모자 좀 너무하단 생각은 안 들어?”“개소리 치지 마! 우리 엄마가 어떻게 딴 남자랑 바람을 피워?”도지호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네가 아직 어리니 그동안 나한테 무례하게 굴었던 건 그냥 눈감아줄게. 하지만 너희 엄마는 우리 아빠랑 도원 그룹에 미안한 짓을 너무 많이 저질렀어. 그건
사채업자들은 꽤 모아진 자산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드디어 도씨 저택을 떠났다.유정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채에 딱 한 번 손을 댔더니 아들과 함께 전 재산을 털릴 줄이야.한편 도아영은 도원 그룹에서 사채업자의 전화를 받았다.“아영 씨, 분부하신 일은 다 해결했습니다. 모든 물건을 현금화해서 이체해드리겠습니다.”“알겠어요. 오늘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별말씀을요. 서 대표님 분부대로 했을 뿐입니다.”도아영은 가볍게 웃었다. 이 모든 건 서현우의 공로이니까.그의 조언대로 유정연 모자의 전 재산을 손쉽게 챙겼고 이 또한 아빠 도석진이 받아야 할 몫이다.전화를 끊은 후 도아영은 주연우에게 분부했다.“이제 다 됐어요. 시작해볼까요?”“네, 알겠습니다.”주연우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도씨 저택에서 유정연 모자가 멍하니 넋 놓고 있을 때 문밖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랐고 도지호도 어안이 벙벙했다.‘오늘 무슨 날이야? 경찰차는 또 뭔데?’유정연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경찰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다짜고짜 그녀에게 수갑을 채웠다.“신고받고 왔습니다. 유정연 씨, 당신은 금융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으니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네? 뭐라고요? 금융범죄라니? 그게 대체 뭔 말인데요?”유정연은 몹시 당황했지만 경찰은 그녀의 변명 따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서로 가서 조사받으시죠! 당장 끌고 가!”“당신들 뭐야? 왜 우리 엄마를 잡아가는 건데?”도지호가 쫓아가려 했지만 경찰은 아예 무시한 채 유정연을 차에 태우고 떠나가 버렸다.오늘 발생한 모든 일이 괴이할 따름이었다.도지호는 곧바로 도아영에게 연락했다.평상시에는 그렇게 연락이 잘 되던 도아영인데 오늘은 도통 받지를 않았다.“전화 좀 받아!”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유정연이 경찰에 잡혀가니 그는 가장 먼저 도아영이 떠올랐다.그녀 말곤 엄마를 구해줄 사람이 없으니까.도원 그룹에서 도아영은 쉴 새 없이
“왜 그래요 갑자기? 무슨 일 있어요?”유정연은 사채에 손을 댄 일을 죽어도 도아영에게 고백할 순 없었다.도씨 일가의 가훈이 바로 사채에 손을 대지 않는 거니까.소문이라도 나면 체면이 바닥나고 도아영에게 쫓겨날지도 모른다.한편 도아영은 그녀가 사채를 빌린 걸 진작 알고 있어 입꼬리를 씩 올렸다.“지금 바로 연락해 계약서 보낼 테니까 거기 사인만 하면 효력이 발생할 거예요. 아줌마랑 지호가 우리 아빠 재산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사인만 하면 재무팀에 바로 연락해서 돈 보낼게요.”기세등등한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유정연은 더 이상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알았어! 사인할게. 바로 할게!”도아영이 곧장 휴대폰으로 계약서를 보내왔다.유정연은 꼼꼼히 읽어볼 새도 없이 바로 사인했고 계좌에 거액이 들어왔지만 모든 걸 사채업자에게 털렸다. 2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다만 겁에 질린 유정연은 이 과정의 수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봐! 아직도 돈 있잖아! 바로 내놓으면 될 것이지 왜 이렇게 질질 끌었어? 돈 될만한 액세서리들 당장 내놔!”유정연은 허겁지겁 위층에 올라가 보물처럼 아끼던 액세서리를 모조리 꺼냈다.이것들은 전부 도석진이 생전에 그녀에게 선물한 값비싼 액세서리들이다.수년간 아까워서 제대로 착용하지도 못했고 그저 도지호의 생일날 딱 한 번 치장하고 나갔었다.“여기 있어요. 이거면 되나요?”그녀는 액세서리를 사채업자에게 건넸다.“이년이 감히 내 앞에서 꼼수를 부려? 분명 더 있을 거야! 다 내놔! 이까짓 거로 누구 입에 풀칠하겠어?”앞장선 남자가 그녀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라서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숨긴 건 맞지만 이 사람들이 대체 그것까지 어떻게 알아낸 건지 더는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마지못해 여태껏 보관한 모든 액세서리와 명품 가방, 옷들까지 꺼냈다.“이 새끼도 있잖아! 얘 것도 싹 다 꺼내!”도지호는 평상시에 손이 커서 가격도 안 보고 물건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