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은 낯빛이 살짝 변하더니 심장이 쿵쾅댔다.그가 뭘 알아낸 걸까?아니면 딴 사람들에게 강씨 일가에 사생아가 한 명 있는데 강유빈을 사칭하여 이 혼약을 이행했다고 엿들은 걸까? 그와 결혼한 여자는 사실 짝퉁이고 강씨 일가에서 애지중지 키운 딸이 아니란 걸 알게 된 걸까?남자들은 다 허영심이 있다 보니 자신과 결혼한 배우자가 예쁜 재벌 집 딸이길 바라지 그녀처럼 못생기고 촌스러운 신데렐라길 원치 않을 것이다.강서연은 살며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옷깃을 잡아당겼다.그녀는 절대 인정하면 안 된다고 되뇌었다. 구현수는 싸움을 벌여 감방까지 갔던 사람이다...그런 그가 작정하고 화를 내면 후폭풍은 아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네? 할 얘기라니요?”그녀는 맑고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쳐다보며 애써 화제를 전환하려 했다.“아 참, 나 이번 달에 실적이 별로 없어서 다음 달에 더 분발해야 해요! 그래서... 집에 돌아가 함께 밥 먹을 시간이 별로 없을 거예요. 현수 씨 혼자 잘 지낼 수 있죠?”“내가 애야? 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구현수가 웃으며 그릇에 담긴 랍스터 볶음밥을 절반 덜어서 그녀에게 줬다. 강서연이 기어코 안 받으려 하자 구현수가 음침한 눈빛으로 목소리를 내리깔고 물었다.“내가 먹여줘?”그녀는 결국 목을 움츠리며 그에게 수긍했다.잠시 후 구현수의 휴대폰이 진동했는데 배경원한테서 온 문자였다.그는 몰래 주변을 살피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사악한 미소를 날리고 있는 배경원과 그의 옆에 서서 입을 틀어막고 있는 유찬혁을 발견했다.“나 화장실 다녀올게.”구현수는 담담한 말투로 그녀에게 말하고는 레스토랑 복도 모퉁이로 걸어갔다.배경원은 끝내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부부가 애틋해 죽던데요?! 랍스터 볶음밥 1인분을 서로 한 숟가락씩 나눠 먹다니, 심지어 머리까지 맞대고요... 형이 이렇게 로맨틱한 사람인 걸 난 왜 전에 몰랐죠?”구현수가 힐긋 째려보자 배경원은 애써 입을 다물고 더는 나불거리지 못했다.“형, 경원이 뭐라 할
배경원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배씨 가문이 강주에서 세력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깨알만 한 작은 회사까지 조사해낼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신분으로 조사를 시작한다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을 수가 없다.만에 하나 또 저번처럼 강명원을 처리하다가 누군가에게 오해를 받는다면...배경원은 마른기침을 해대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형, 알아볼 순 있는데 미리 부정적인 얘기부터 해둘게요. 이 기간에 누군가가 헛소문을 퍼뜨리며 내가 형수님과 바람났다고 떠들어대도 절대 믿으면 안 돼요... 악!”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유찬혁이 그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입사한 지 2개월이 되어가니 강서연은 더 열심히 일에 전념했다. 사회초년생의 생존 법칙도 거의 파악했고 성소원의 괴롭힘에도 원만하게 해결할 줄 알게 되었다. 방진영이 대놓고 또는 은밀하게 집적거려도 그녀는 저 자신을 지키는 법을 터득하여 업무상에서 그와 최대한 적게 접촉하려 했다.다만 이 또한 엄청난 정력을 소모하기에 그녀는 매일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집에 돌아와 하이힐을 벗고 소파에 누우면 가끔은 너무 피곤해 새벽까지 잠들기가 일쑤였다. 깨어나 보면 몸에 얇은 담요를 덮고 있고 구현수가 옆 마룻바닥에서 팔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그녀가 구현수의 소파를 차지하고 잠들었을 때 구현수는 침실에 있는 그녀의 침대에 들어가 자지 않았다.강서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불안감을 느끼는 동시에 가슴에 따뜻한 전류가 흘렀다.구현수가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회사 다니기 그렇게 힘들면 그냥 관둬, 하지 마.”“어떻게 그래요?”강서연이 그를 쳐다보며 되물었다.“일을 안 하면 무슨 돈으로 집세를 내고 밥을 먹어요 우리?”“이까짓 돈에 연연하는 거야?”“이까짓 돈이요?”강서연이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양반 납셨네요. 집안 살림을 안 하니까 쌀이 귀한 줄도 모르겠죠? 내 월급으로 우리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어휴, 오더를 많이 내리지 못하고 보너스를 받지 못하면 우리 앞으로 엄청 고생해야 할
임우정은 강서연이 회사에서 성소원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게 안쓰러워 그녈 위해 업무를 더 뛰었고 본인의 거래처들도 그녀에게 소개해주며 발주를 내리는 데 관한 기교를 많이 전수해주었다.“너 기억해. 오더는 한 번에 성사되는 게 아니야. 주문 건 한 건도 수차례 상의해야 성사할 수 있어. 이 또한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야.”강서연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평소에 바이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해. 네가 그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야 그 사람들도 너에게 오더를 한 건이라도 내릴 것 아니야!”“네, 그건 저도 알아요.”“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임우정이 웃으며 말했다.“영업을 뛰려면 뻔뻔스러워져야 해! 체면을 다 내려놓아야 지갑이 두툼해질 수 있다고! 알겠어?”강서연은 예쁘고 커다란 두 눈을 반짝이며 반달웃음을 지었다. 이때 스크린에 그녀들의 식번이 떴고 강서연은 재빨리 음식을 가지러 카운터로 향했다.점심은 아주 간단한 패스트푸드인데 강서연은 가장 저렴한 야채 요리만 한 개 들고 왔다. 이에 임우정은 참지 못하고 질문을 건넸다.“그걸로 배부르겠어?”“문제없어요.”강서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저 원래 적게 먹어서 이거면 돼요.”“되긴 뭘 돼?! 영업을 뛰려면 안 그래도 체력 소모가 엄청날 텐데 너 그 작은 체구로...”임우정은 말끝을 흐리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집에 남편이 너 돈을 못 쓰게 감시하고 있어?”강서연이 해명하려고 할 때 구현수한테서 문자가 한 통 날라왔다.그녀는 문자를 확인하고 한동안 침묵했다. 임우정은 어두운 표정의 강서연을 보더니 휴대폰을 뺏어와 힐긋 보고는 화가 나서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너무했네 진짜!”임우정은 화가 나서 말까지 더듬거렸다.“아니 어떻게... 쇼핑을 할 수 있어? 벨트 하나에 60만 원이라고?”“언니, 목소리 낮춰요!”강서연이 재빨리 그녀를 말렸다.다만 요즘 들어 구현수가 이상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매일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즐겼는데 어느 하루는 강서연이
“언니는 몰라요.”강서연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사실 현수 씨 나한테 엄청 잘해줘요...”“잘해줘?”임우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결혼 둘째 날 강서연이 드레스를 돌려주러 가게에 갔다가 점원에게 굴욕을 당했을 때 구현수가 홧김에 가게에서 제일 비싼 드레스를 구매했고 그 점원더러 강서연에게 무릎 꿇고 사이즈를 재게 했다. 임우정도 그녀에게서 이 얘기를 전해 들었다.그땐 이 남자가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허영심이 차서 체면만 중히 여기며 심지어 성격이 매우 난폭하다고 생각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강서연의 적금으로 제멋대로 즐긴다는 것이다!“서연아, 현수 씨가 드레스 가게에서 널 위해 앞장 서주고 집에서 전해 내려온 가보까지 너에게 줬다고 널 엄청 잘해주는 거라고 여긴다면 네가 아직 너무 단순하고 결혼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밖에 해석이 안 돼! 결혼은 두 사람이 함께 꾸며나가는 거야. 너 혼자 죽어라 애쓰는데 남편이란 자는 정작 집에 앉아 양반다리를 하고 네가 벌어온 돈이나 마구 써대는 게 아니야! 그건 잘못된 거야.”임우정은 화가 나서 손가락으로 강서연의 머리를 살짝 찔렀다.강서연은 참 좋은 여자아이였다. 그저 심성이 너무 착한 게 탈이었다.누군가가 조금만 잘해줘도 평생 기억하며 여력을 다해 보답하려고 한다.구현수처럼 감방까지 갔다 온 사람을 만나니 착하고 순진한 그녀는 등골이 빼 먹혀 뼈도 추스르지 못할 정도였다!“사내대장부가 나가서 돈 벌 생각은 안 하고 종일 마누라 돈만 써대는데 대체 뭐가 좋다는 거야! 그런 사람은 남자가 될 자격도 없어!”임우정이 한마디 보태자 강서연은 순간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음침한 눈길로 정색하며 쏘아붙였다.“내 남편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임우정은 놀라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요, 난 항상 남편을 맞춰주고 보호해주려고 애써요!”강서연이 작정하면 말로 그녀를 이길 자가 없다.“그 사람은 내 남편인데 지켜주고 맞춰주는 게 뭐가 잘못됐죠? 단점이 얼마나 많은지도 다 알아요. 이
구현수는 제인 호텔 맨 위층 테라스에 앉아 있었고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는 거의 타들어 갈 듯싶었다. 먼 곳의 해수면에 파도가 반짝이고 바닷새가 공중에서 선회하며 하얀 덫을 수놓아 절경을 이루었다.이때 탁자 위의 휴대폰이 진동하더니 카드에 60만 원이 입금되었다는 문자가 도착했다.배경원과 유찬혁은 서로 마주 보며 껄껄 웃었다.“형 진짜 여복이 터졌네요! 형수님이 예쁜 데다가 흔쾌히 돈까지 주잖아요, 하하하!”“여태껏 살아오면서 여자 돈을 써보긴 형도 처음이죠? 느낌 어때요? 짜릿해 죽겠어요?”구현수가 둘을 힐긋 째려보며 휴대폰을 다시 원위치에 내려놓았다.비록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마음속에서부터 따뜻한 전류가 흐를 것만 같았다.강서연이 진짜 계좌 이체할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 그녀의 은행카드에 기껏해서 60만 원 정도 남아있다는 걸 구현수는 잘 알고 있었다.그는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몇 번 털면서 복잡한 눈길로 먼 곳을 바라봤다.“아 참, 형.”유찬혁이 나지막이 말했다.“경원이가 직접 나서기 불편해서 내가 호정 무역회사를 조사했어요. 성소원 씨는 회사 임원 층인데 주주인 외삼촌을 믿고 안하무인 격이래요. 게다가 또...”유찬혁은 계속 더 말해야 할지 망설였다.구현수의 눈빛이 확 어두워졌다.“얘기해.”“게다가 또 방진영 씨의 여자친구예요.”유찬혁이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방진영 씨는 강서연 씨 부서의 매니저이자 대학교 선배이기도 해요. 학교 때 서연 씨를 쫓아다니기도 했고요...”구현수의 얼굴은 굳어버린 얼음처럼 아무런 파동이 없었지만 책상 위에 놓인 두 손은 어느샌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유찬혁이 마른기침을 해댔다.“형, 사실 학교 때 일은 별 거 아니에요.”“그래.”구현수가 그를 쳐다보며 되물었다.“내가 뭐라고 했어?”유찬혁은 실소를 터트렸다.아무 말도 안 했지만 말을 내던진 것보다 더 심각했으니까.“계속해.”“회사에서 성소원 씨가 항상 서연 씨를 괴롭히고 있대요. 그래서 서연 씨는 입사한 첫 달에 오더를 한 개도
그는 허리를 숙여 물건을 주웠다.부드러운 순면 텍스처와 그 위에 묻어난 은은한 체취가 불쑥 그에게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그건 강서연의 속옷인데 지극히 심플한 기본 아이템이었다.구현수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그는 목이 바짝 말라 혀로 입술을 살짝 핥고는 옷들을 세탁기에 넣으려 하는데 이때 마침 문이 열리고 강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현수 씨 집에 있어요? 오후에 물을 너무 많이 마셨더니 화장실이 급해 죽겠어요...”불현듯 서로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어안이 벙벙해졌다.강서연은 충격에 휩싸인 채 그를 쳐다보다가 그의 손에 쥔 옷 바구니와 그 안에 담긴 더러운 옷들과 이미 열린 세탁기와 그리고...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귀까지 빨개졌다.“그걸 왜 들고 있어요?!”강서연은 냉큼 다가가 재빨리 그의 손에서 속옷을 뺏어왔다. 지금 이 순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뻘쭘한 건 구현수도 마찬가지였다.그녀의 반응만 보면 집에 도둑이 들었다고 착각해도 모자랄 판이었다...‘잠깐, 설마 지금 날 도둑 취급하는 건 아니겠지? 여자 속옷만 훔치는 변태 도둑 말이야?!’구현수는 낯빛이 확 돌변했다. 그는 마른기침을 하며 애써 담담한 말투로 그녀에게 대답했다.“집에서 할 일 없어서 옷 좀 빨려고 했어.”강서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했고 심장은 여전히 마구 쿵쾅댔다.“그냥... 놔둬요 일단. 이따가 내가 씻을게요.”“이 집은 두 사람이 함께 가꿔나가는 거니까 집안일도 서로 분담해야지.”“아니에요, 정말 그럴 필요 없어요! 이건 내 물건이라 내가 알아서 씻을게요...”강서연은 황급히 머리를 흔들었다. 부끄럽고 난처한 그 모습이 실로 귀여울 따름이었다.구현수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좀 전에 억눌렀던 설렘이 또다시 부풀어 오를 것만 같았다.“난 당신 남편이야.”그가 중저음의 목소리로 일부러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부부 사이에 네 거 내 거가 어디 있어? 당신 속옷을 빨아주는 건
배경원은 식겁하여 목이 바짝 말랐다.휴대폰을 사이에 두고도 빅 보스의 살기가 충분히 느껴졌다.‘내가 설마 좋은 일 망친 건가?’배경원은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불쑥 머리를 탁 내리쳤다.‘내가 미쳤지!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는데 누가 날 건드렸어 봐, 나 같아도 그 사람 아작을 내고 싶을 거야!’“형...”그는 아양을 떨며 해명에 나섰다.“나도 급한 일 아니면 이 시간에 전화하지 않으려 했어요. 형이 이렇게 빨리 잘 줄 누가 알았겠어요...”“할 말 있으면 빨리해!”구현수가 귀찮다는 듯이 쏘아붙이고는 베란다로 걸어가 촤르륵 문을 열었다.“오성 쪽에 형이 한 번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배경원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형이 아직 살아있다는 소문이 쫙 퍼졌거든요. 어르신도 무척 흥분해 하시고 삼촌, 이모들도 다...”“그래, 알았어.”구현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내가 사석에서 연락할 테니까 오성에 돌아가는 건 잠시 미뤄야 할 것 같아.”배경원은 이해되지 않았지만 결국 알겠다며 대답했다.“참 그리고 형, 오늘 자세히 조사해봤는데 형수님이 만난 바이어가 마침 성소원 씨가 3개월 동안 쫓아다녀도 따내지 못한 케이스더라고요! 내가 살짝... 손을 써서 형수님이 오더를 따게 했어요. 이 한 건에 인센티브가 적지 않을 거예요. 2천만 원은 가질 수 있을걸요...”구현수는 가슴에 불길이 활활 타올라 배경원이 마저 떠들어대기도 전에 전화를 꺼버렸다.배경원은 또다시 어리둥절한 채 옆에 있는 유찬혁에게 술 한 잔 따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내가 또 무슨 말실수 했어?”유찬혁은 웃다가 쓰러질 뻔했다.“네가 분위기를 다 망쳤는데 형이 친절할 리가 있겠어?”배경원은 후회막심하여 쉴 새 없이 제 입을 내리쳤다.“그리고 서연 씨가 오더를 내린 일에 네가 굳이 왜 끼어들어?”“그건...”배경원은 두 눈을 부릅떴다.“설마 또 내가 아양을 떨다가 심기를 건드린 거야?”유찬혁은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성소원이 3개월을 쫓아다녀도 따내지 못
강서연은 그녀와 무의미한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다.“네가 뒤에서 한 짓거리들 내가 모를 줄 알아?!”성소원이 기고만장하게 말했다.“강서연, 너 이번 오더를 어떻게 따냈는지 누구보다 너 자신이 잘 알겠지!”강서연은 고개 돌려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커다란 두 눈에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그녀는 평소 상냥하게 웃고 늘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는데 지금처럼 차갑고 정색한 얼굴은 극히 보기 드물었다.그런 그녀가 갑자기 딴사람으로 변하자 성소원은 저도 몰래 뒷걸음질 쳤다.“내가 어떻게 땄냐고요?”강서연이 또박또박 말했다.“내 실력으로 따냈죠! 일주일 꼬박 밤을 지새우며 영업 기획안을 수없이 수정해서 만들어냈어요. 그러니까 서 대표님도 만족해하시고 바로 도장을 찍은 거 아닐까요? 매니저님이 3개월을 쫓아다녔는데 성사하지 못한 건 본인이 무능해서예요! 본인한테 원인을 찾지 않을지언정 도리어 딴사람이 저보다 더 노력했다고 질책하는 건가요 지금?”“노력? 네가?”성소원이 그녀를 더 날카롭게 째려봤다.“엄청 노력해서 남자의 침대에나 기어올랐겠지! 총괄님이 네 편을 들어준다고 마음껏 날뛸 수 있을 것 같아?”“성소원 씨,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을 내뱉으면 안 되죠! 총괄님이 여기서 왜 나와요? 오더를 성사하기 전에 난 총괄님과 아예 얘기도 나누지 않았어요!”“누가 알아? 칫, 회사에서 말하지 않아도 사적으로 엄청 만나고 다녔을지도 모르잖아!”“당신 진짜...”강서연은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게졌다. 두 사람의 다툼에 적잖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누군가가 선뜻 나서서 둘을 갈라놓으려 했지만 성소원이 좀처럼 물러설 기세가 없었고 강서연도 억울하게 이런 누명을 뒤집어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한사코 총괄을 찾아가 대질하려 했다.한창 팽팽한 분위기가 감돌 때 방진영이 성급히 달려왔다.“여긴 회사야, 두 사람 지금 뭐 하는 짓이야?!”방진영이 단호하게 질책했다.“싸우려면 밖에 나가서 싸워. 회사에 왔으면 얌전히 일이나 하란 말이야!”성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
소피아는 약속한 시간에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창가에 앉아 있는 낚시 모자를 쓴 중년 여성을 발견했다.소피아는 조용히 걸어가 밝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혹시... 허운주 선생님이신가요?”허운주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다.소피아는 직원에게 뜨거운 우유 한 잔을 주문하고 허운주 앞에 놓인 진한 커피를 치우며 부드럽게 말했다.“허 선생님, 이 나이에 이렇게 진한 커피는 드시면 안 돼요. 건강을 꼭 챙기셔야죠.”“고맙습니다...”허운주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절 찾아오신 이유가 뭘까요?”허운주는 천천히 눈을 들어 소피아를 바라봤다.소문에 따르면, 소피아는 현재 배현진의 연인이며 이혼 후에 아이를 키우면서도 배현진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사람이었다.허운주는 소피아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직감했고 소피아가 도움을 준다면 송윤지 같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건 쉬운 일이라고 확신했다.“제가...”허운주는 입술을 핥으며 머뭇거렸다.“어떻게 말씀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요.”소피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허 선생님은 현진 씨의 선생님이시잖아요. 그 특별한 인연은 현진 씨도 평생 기억할 거고 저 또한 마찬가지예요. 저희는 모두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어요. 그러니 무슨 일이든 편하게 말씀하세요.”“저는 국제 유치원에서 어쩔 수 없이 사직하게 됐어요.”허운주는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깊이 찡그렸다.소피아는 놀란 듯했지만, 최근 일어난 상황을 대략 알고는 있었다. 우수 교사 선발에서 허운주가 송윤지에게 패했다는 소식은 소피아에게도 전해졌다. 자존심 강한 허운주로서는 그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소피라는 눈을 굴리며 허운주를 어떻게 이용할지 계획하고 있었다.“허 선생님,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소피아는 부드럽게 허운주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저를 딸이라고 생각하시고 속상한 일 있으면 다 털어놓으세요. 제가 도울 수 있
회의실은 단숨에 고요 속에 잠겼다. 강렬한 존재감의 인물이 문턱을 넘어서자, 방 안은 서늘하면서도 압도적인 기운으로 가득 찼다.원장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단숨에 그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왜 이제야 온 거야?”임지강의 눈가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러나 그의 시선이 허운주에게 닿는 순간, 그 미소는 천천히 사라지고 대신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이 자리 잡았다.“으흠!”원장은 자세를 가다듬으며 목소리를 높였다.“오늘 이 자리에서는 투표 결과를 발표하는 것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원장은 한 장의 서류를 꺼내 들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유치원의 공식 도장과 함께 임지강의 힘찬 서명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임 대표님께서 우리 유치원에 10억을 투자해 주셨고 국제 유치원의 최대 주주가 되셨습니다. 유아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초심을 잃지 않고 임 대표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송윤지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굴에 붉은 기운이 번지자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입가에 번진 미소는 감추기 어려웠다.임지강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제가 이 유치원의 주주가 된 이상, 앞으로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 국제 유치원의 이익을 위해서일 것입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허운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래서 오늘, 교사 팀을 정비하려고 합니다.”허운주는 본능적으로 두 걸음 물러나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이곳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임지강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자신의 가치관조차 바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아이들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겠습니까?”허운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가요?”“여기 있는 사람 중
원장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졌다.“허 선생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오늘 표 집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투명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조작이라니, 그 말은 제가 개입했다는 뜻인가요?”“원장님, 제가 어떻게 감히 원장님을 의심하겠습니까?”허운주는 억지 미소를 띠며 비꼬듯 말했다.“하지만 표 차이가 이렇게 크게 나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원장님께서 관여하지 않으셨더라도, 누군가 뒤에서 무슨 일을 꾸몄을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허 선생님...”원장은 화나 치밀어 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막무가내인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허 선생님, 하신 말씀에 대해 책임지셔야 합니다.”송윤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윤지는 허운주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저는 단 한 번도 허 선생님께 폐를 끼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우수 교사 선발 역시 모든 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정말 무슨 일을 꾸몄다면, 이렇게 공개적으로 표를 집계했겠습니까?”허운주는 송윤지를 노려보며 속으로 분노를 억눌렀다.평소 조용하고 소극적인 송윤지를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의 송윤지는 논리 정연한 주장으로 상대의 도발에도 굴하지 않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송윤지를 새롭게 보게 되었고 문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임지강의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임지강은 회의실 밖에서 모든 상황을 눈여겨보고 있었다.특히 송윤지의 표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임지강은 마치 자신이 상을 받은 것처럼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곁에 있던 부하 직원조차 그의 변화를 놀라워하며 말했다.“송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 송윤지는 변하지 않았다. 그저 예전에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너무 조심스러워 본래의 자신을 숨겼을 뿐이었다.“임 대표님, 허 선생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지난번에 내가 해외 시장을 축소하라고 했지만, 당신 아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임수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결국 문제는 그 여자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거야... 그 여자는 현진이를 부추겨 또 다른 일을 꾸밀 거고 현진이는 분명히 그 여자의 말을 들을 거야.”“그러니까 그들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임수정은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윤아야, 네가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회사들을 꽉 잡고 있어야 해! 너 혼자 힘들면 군성이랑 의논해도 되고 군형이나 소유의 도움을 받아도 돼. 네가 동의하지 않는 한, 네 오빠는 너한테서 단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어. 이해했지?”“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꼭 잡았다.“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이 모든 재산은 우리 조상들이 쌓아온 거야. 절대 우리 세대에서 무너져선 안 된다!”“네, 저 이해했어요.”배윤아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가 하루빨리 제정신을 차려서 우리가 예전처럼 가족으로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임수정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기침하며 숨을 고르는 임수정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했다.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소피아가 복도 모퉁이에 숨어 임수정의 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벽을 짚고 있던 소피아는 주먹을 꽉 쥐었고 마치 벽을 뚫을 듯 힘을 주고 있었다.방 안에서 나눈 대화는 모두 소피아의 귀에 생생히 들렸다.오늘 소피아가 임수정을 찾아온 건, 회사 본사에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을지 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은행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지금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재산 전부가 이 어린 소녀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여보세요, 소피아!”그때, 배현진이 전화를 걸어왔다.“지금 엄마 집에 있어? 나 일이 아직 안 끝나서 조금 있다가 가려고. 엄마한테 전해줘.”“그럴 필요 없어.”소피아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임수정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배경원은 막 씻은 딸기를 가져왔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딸기의 끝부분을 잘라 임수정의 입에 넣어주었다.결혼한 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도, 두 사람의 애정과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여전히 처음과 같았다. 그들의 관계는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배윤아는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엄마를 위해 영양제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새로 그린 그림도 품에 안고 있었다.“엄마, 아빠, 저랑 군성이가 이번에 현실적인 내용을 담은 만화를 하나 출간하려고 해요. 내용은 한 부부가 젊었을 때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다룬 거예요... 사실 주인공 부부가 바로 엄마, 아빠예요! 보세요, 이렇게 그렸는데 괜찮죠?”임수정과 배경원은 딸이 그린 그림을 보며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부부는 원래 대부분의 기대를 아들에게 걸고 있었다. 이는 남녀 차별 때문이 아니라 배윤아의 성격이 어릴 적부터 세상일에 무심하고 경쟁을 피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계승자로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딸이 오히려 아들보다 더 믿음직스럽다.“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잡으며 눈빛에 깊은 의미를 담아 말했다.“엄마가 너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게 있어.”“뭔데요?”배윤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임수정은 베개 밑에서 갈색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는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핵심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이것뿐만 아니라, 본사의 도장도 있어.”배경원은 도장까지 꺼내 배윤아에게 건넸다. 배윤아는 깜짝 놀라 귀중한 물건들을 손에 들고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아빠, 엄마, 이건 도대체...”“우리도 이제 나이가 들었고 몸 상태도 좋지 않아. 요양원에 머무는 동안은 회사로 돌아가 직접 관리할 수도 없을 거야.”배경원은 평소 장난스러웠던 모습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배윤아를 바라보았다.“윤아야, 엄마, 아빠는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맡기기로 했다. 네가 책임을 져야 해.”배윤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