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은 그녀와 무의미한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다.“네가 뒤에서 한 짓거리들 내가 모를 줄 알아?!”성소원이 기고만장하게 말했다.“강서연, 너 이번 오더를 어떻게 따냈는지 누구보다 너 자신이 잘 알겠지!”강서연은 고개 돌려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커다란 두 눈에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그녀는 평소 상냥하게 웃고 늘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는데 지금처럼 차갑고 정색한 얼굴은 극히 보기 드물었다.그런 그녀가 갑자기 딴사람으로 변하자 성소원은 저도 몰래 뒷걸음질 쳤다.“내가 어떻게 땄냐고요?”강서연이 또박또박 말했다.“내 실력으로 따냈죠! 일주일 꼬박 밤을 지새우며 영업 기획안을 수없이 수정해서 만들어냈어요. 그러니까 서 대표님도 만족해하시고 바로 도장을 찍은 거 아닐까요? 매니저님이 3개월을 쫓아다녔는데 성사하지 못한 건 본인이 무능해서예요! 본인한테 원인을 찾지 않을지언정 도리어 딴사람이 저보다 더 노력했다고 질책하는 건가요 지금?”“노력? 네가?”성소원이 그녀를 더 날카롭게 째려봤다.“엄청 노력해서 남자의 침대에나 기어올랐겠지! 총괄님이 네 편을 들어준다고 마음껏 날뛸 수 있을 것 같아?”“성소원 씨,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을 내뱉으면 안 되죠! 총괄님이 여기서 왜 나와요? 오더를 성사하기 전에 난 총괄님과 아예 얘기도 나누지 않았어요!”“누가 알아? 칫, 회사에서 말하지 않아도 사적으로 엄청 만나고 다녔을지도 모르잖아!”“당신 진짜...”강서연은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게졌다. 두 사람의 다툼에 적잖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누군가가 선뜻 나서서 둘을 갈라놓으려 했지만 성소원이 좀처럼 물러설 기세가 없었고 강서연도 억울하게 이런 누명을 뒤집어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한사코 총괄을 찾아가 대질하려 했다.한창 팽팽한 분위기가 감돌 때 방진영이 성급히 달려왔다.“여긴 회사야, 두 사람 지금 뭐 하는 짓이야?!”방진영이 단호하게 질책했다.“싸우려면 밖에 나가서 싸워. 회사에 왔으면 얌전히 일이나 하란 말이야!”성
강서연은 입술을 앙다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잠시 후 그녀는 방진영과 함께 회사 근처의 효성 호텔에 도착했다.아니나 다를까 두 명의 금발의 외국인이 진작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강서연은 유창한 불어로 그들과 인사를 나눈 후 최선을 다해 통역을 해주었다. 프랑스인은 그녀의 업무능력을 매우 칭찬하며 식사 한 끼로 협력 의사를 거의 내비쳤다.강서연도 그제야 홀가분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범하게 잔을 들고 양쪽 협력을 미리 축하했다.마침 이곳을 지나가던 배경원이 그 광경을 목격했다.그는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있다가 인제야 강서연이란 어린 소녀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그도 나름 수많은 미인을 봐왔다고 생각했지만 좀 전에 강서연이 미소 짓는 순간 온 세상이 꽃으로 물 들 것만 같았고 사람 마음을 확 사로잡는 매력이 깃들어있었다.어쩐지 구현수가 오성에 돌아갈 계획을 잠시 뒤로 미루더라니... 미인이 눈앞에 있으니 본업도 잠시 미룰 수밖에 없었다!배경원은 웃으며 구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형, 나 지금 효성 호텔에서 미팅하고 있다가 또 형수님 봤네!”상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침묵은 구현수의 일상이니까.“불어도 할 줄 아셨어? 재능이 대체 몇 개야? 너무 겸손하게 숨기신 거 아니야? 외국인 두 분은 나름 예의 있어 보이는데 형수님 옆에 앉은 남자가 좀 엉큼한 것 같아. 손을 줄곧 형수님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있잖아. 쯧쯧...”“주소 불러.”“응?”전화기 너머로 갑자기 차가운 명령이 날라왔다.“같은 말 두 번 반복하게 하지 마!”배경원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재빨리 구현수에게 위치를 보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서연은 두 외국인을 호텔 입구까지 바래다준 후 예의 바르게 손 흔들며 작별인사를 했다. 이제 막 제 가방을 챙기려고 몸을 돌렸는데 방진영이 갑자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아까 배불리 못 먹었지?”방진영이 취기 어린 말투로 말을 내뱉으며 야릇하게 그녀를 쳐다봤다.“가자, 우리 다른 데 가서 뭘 더 먹자...
구현수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곧이어 몸을 돌려 방진영을 보더니 살기등등한 기운을 내뿜으며 칼날 같은 눈빛으로 그의 목을 자를 것만 같았다.호텔 입구에서 경호원이 이제 막 앞으로 달려오려다가 구현수의 사나운 눈빛에 뒷걸음질 쳤다.방진영은 그의 강렬한 카리스마에 기가 눌려 몸을 벌벌 떨었다.“너... 대체 누구야?”그는 겨우 바닥에서 기어올라 비틀거리며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대체 정체가 뭐냐고? 허구한... 대낮에 감히 날 때려? 내가...”구현수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목덜미를 덥석 잡더니 호텔 뒷마당으로 질질 끌고 갔다.강서연은 구현수가 피해를 볼까 봐 재빨리 따라갔지만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귀신이 곡할 듯한 괴성과 함께 살려달라는 비명이 전해졌다.방진영은 한바탕 얻어맞아 얼굴이 가득 멍든 채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구현수는 그의 가슴팍에 발길질했고 그가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또다시 매섭게 머리를 가격했다. 방진영은 결국 반쪽 얼굴이 구현수의 발밑에 깔려버렸다!그는 목이 갈라 터지게 울며 애원했다.“사... 사장님! 제발요! 제가 잘못했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다신 이러지 않을게요!”“앞으로 이 여자한테서 멀리 떨어져 있어.”구현수가 무표정한 얼굴로 사납게 쏘아붙였다.“앞으로 두 번 다시 내 와이프한테 집적거렸다가 그땐 이렇게 쉽게 풀어주지 않을 줄 알아!”방진영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마치 벌레처럼 바닥에서 힘겹게 꿈틀거렸고 구현수에게 짓밟혀 턱이 빠질 것만 같았다.구현수는 그의 바짓가랑이로 시선을 옮기더니 그곳이 흥건하게 젖어있는 걸 발견했다.그는 코웃음 치며 얼른 발을 떼고 역겹다는 듯이 쏘아붙였다.“꺼져!”방진영은 아픔도 마다하지 않은 채 바지에 지리며 도망치다가 하마터면 강서연과 부딪힐 뻔했다.강서연은 방진영의 처참한 몰골에 화들짝 놀라 사태가 심각하여 구현수도 다친 줄 알고 부랴부랴 달려갔지만 정작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옷깃을
강서연은 어리둥절하여 영문도 모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안이수는 한숨을 내쉬며 작은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냥 말해줄게요. 지금 회사에 서연 씨가 이미 결혼했고 남편은 감옥살이를 했던 불량배라고 소문이 퍼졌어요... 그리고 어제 방진영을 때린 사람이 바로 서연 씨 남편인데 과거에 싸움에 휘말려 몇 년을 선고받았고 최근에야 감옥에서 석방되었다고...”강서연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안이수는 그녀가 침묵하는 걸 보고 더욱 경악했다.“서연 씨, 정말 결혼했어요? 남편이 정말 그런 사람이에요?”“네, 저 결혼했어요.”강서연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그리고 제 남편은 확실히 출신이 떳떳하지 못해요.”안이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서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저한테 엄청 잘해줘요.”강서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힘이 실려있었다.“결혼을 한 것에 대하여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니고 딱히 숨길 필요도 없죠. 그냥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얘기를 하지 않았고 결혼한 사람은 채용할 수 없다는 회사의 규정도 없지 않아요?”안이수는 미간을 찌푸렸다.“그렇긴 한데...”“어쨌든 저의 남편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강서연은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예전에 싸움으로 감옥살이를 했을지는 모르지만 저와 결혼한 이후로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어요. 그건 다 지나간 일들이고 저희가 손잡고 함께 걸어야 하는 길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잖아요.”안이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만약 자신이라면 강서연과 같은 용기가 없을 것 같다.“솔직히 말해서 난 정말 서연 씨가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안이수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고 문득 그녀의 손가락이 허전한 것을 발견했다.“그런데 왜 결혼반지를 하지 않았어요? 손에 아무것도 없으니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거죠.”강서연은 멈칫하였고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때 당시 구현수와 서둘러 결혼했고 그녀도 반지를
성소원은 기가 막혀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그녀는 항상 체면을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사람인데 지금 체면을 몽땅 잃었다. 그녀는 마음속 가득 찬 노여움을 강서연에게 풀 생각으로 손을 들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제지했다.주변 사람들은 천장에 달려있는 CCTV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조금 참으라고 하였다.성소원은 강서연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빈털터리한테 시집가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다이아몬드 반지는커녕, 쇠로 만든 고리 하나도 사주지 못하는데. 빈천한 부부끼리 평생 가난하게 같이 살아.”그녀는 돌아서서 가버렸고 강서연은 노발대발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 보아하니 앞으로 회사 생활은 평온하지 못할 것 같으니 그녀도 일찍 자신을 위해 퇴로를 마련해야 한다.......이튿날, 강서연은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회사에 나타났다. 평소 메이크업을 하지 않던 그녀는 옅은 화장을 했고 손에 새로운 물건이 생겼다. 커다란 에메랄드 반지였다.동료들은 모두 휘둥그레 그녀를 쳐다보았다. 반지의 받침은 순금처럼 보였고 고리에는 섬세한 무늬가 조각되어 있었고 그 위에 있는 에메랄드는 빛깔이 투명하여 매우 화려해 보였다.다만 반지 디자인이 좀 올드했고 오래된 물건으로 보였다.강서연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반지를 어루만졌다. 이것은 어젯밤 그 나무 박스에서 꺼낸 반지이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늘어 반지가 좀 큰 터라 구현수는 고치고 다시 끼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성소원이 어제 그녀의 남편은 반지조차 사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 자신이 손가락에 낀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그녀에게 보여줄 생각이다.“서연 씨, 이거 너무 예뻐요.”사무실 여자 동료들은 그녀 옆으로 다가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반지를 훑어보았다.“이런 스타일의 반지를 본 적이 없는데 개인 맞춤 제작이죠?”“그런데 아주 오래된 디자인 같아요.”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했다.“골동품같이 말이에요.”“서연 씨 남편이 선물해 준 거예요? 이렇게나 큰
강서연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고개를 돌려 안이수와 눈을 마주쳤고 안이수도 긴장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서연 씨를 찾아요?”안이수는 미간을 찌푸렸다.“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요. 서연 씨, 조심하세요.”“네, 괜찮아요.”강서연은 침착하게 성소원의 사무실로 들어갔다.성소원은 일부러 사무실의 블라인드 커튼을 모두 열고 문까지 열어두어 바깥사람들이 사무실 안에서 오고 가는 대화를 제대로 들을 수 있게끔 하였다.강서연은 약간의 의혹이 들었다. 보아하니 성소원은 그녀를 공격하려고 하는 것 같지 않다. 어쨌든 이렇게 많은 눈들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으니 말이다.“강서연,이분은 진광 그룹의 소 대표님이야.”성소원은 미소를 지으며 소개했다.“소 대표님, 저희 회사 이번 달 판매왕이에요.”강서연은 미소를 지으며 소진명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성소원의 표정을 볼수록 안이수가 방금 한 말을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꿍꿍이가 있다...소진명은 점잖고 공손한 중년 남자이고 강서연이 사무실에 들어선 뒤 그의 시선은 줄곧 그녀의 반지에 고정된 채 아예 다른 곳을 보지 않았다.“강서연,오늘 정말 행운인 줄 알아.”성소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소 대표님은 비록 사업을 하는 분이지만 보석 주얼리 감정 방면에서 상당히 일가견이 있는 분이야. 또한 소 대표님은 주얼리 협회의 상무이사로서 많은 보석상들도 소 대표님한테 감정을 부탁하기도 한대. 그러니 소 대표님의 눈은 기계보다 정확해서 한눈에 진품인지 가품인지 알아볼 수 있다는 거야.”“소 대표님.”그녀는 고개 돌려 소진명을 바라보았다.“저희 강서연 씨의 반지 좀 대신 봐주세요.”강서연은 가슴이 두근거렸고 무의식적으로 손의 반지를 막았다. 소진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 바르게 웃으면서 말했다.“강서연 씨, 혹시 한번 봐도 될까요?”강서연은 머뭇거렸고 사무실 밖에는 벌써 동료들이 궁금해하며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성소원은 팔짱을 끼고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좋은 구경거리를 할 생각에 기분
강서연은 소진명을 모시고 회의실로 향했다.성소원 사무실 앞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통쾌하다는 듯 웃었다.“성 매니저님이 그 소 대표님을 모셔 온 이유가 강서연 씨 반지가 유리로 만든 거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잖아. 그런데 반지는 진짜 에메랄드였고 고객까지 뺏겼네.”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안팎으로 밑지는 장사를 한 거지.”“이중으로 손해를 본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하하하...”성소원은 그 자리에 굳어있었고 머릿속은 새하얘졌고 화가 치밀어 온몸이 떨렸다.그녀는 홱 다가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사무실 밖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각자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웃음소리는 여전히 사무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일찍이 방자하고 오만한 성소원에 대하여 불만이 쌓였지만 그녀의 삼촌이 대주주여서 다들 참을 수밖에 없었다.오늘 궁지에 빠진 그녀의 모습을 보니 그들은 내심 통쾌하였다.......강서연은 소진명과 회사 입구에서 웃으면서 작별 인사를 하고 조심스럽게 손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이게 진짜 에메랄드였어?그녀는 행복한 웃음을 지었고 양 볼에 보조개가 깊이 파였는데 그 보조개는 마치 이 세상의 모든 달콤함을 담은 것 같았다.자세히 생각해 보면, 구현수와 결혼을 한 뒤 그녀의 운은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오더도 끊임없이 받고 매번 위급한 상황에 부딪치면 구현수는 나타나 그녀를 도와 해결해 주곤 한다...예전에 점쟁이가 그녀에게 남편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팔자라고 한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구현수가 와이프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 팔자인 것 같다.그녀는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퇴근 시간이 다가왔고 그녀는 오늘 저녁에 남편에게 만두를 빚어 줄 생각이다.그러나 그녀는 돌아서자마자 성소원의 빨개진 눈시울과 눈이 마주쳤다.“성 매니저님.”강서연은 비굴하지도 오만하지도 않게 인사를 하고 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 성소원의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쳇, 무슨 에메랄드. 어디서 훔쳐 온
그날 아무도 왜 성소원이 잠깐 나갔다 왔을 뿐인데 양쪽 얼굴이 퉁퉁 부었고 입가에는 핏자국이 있는지 모른다.그녀의 초라한 모습은 방진영이 맞은 그날의 모습과 그야말로 똑같다.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일을 연관시켰고 자연스럽게 강서연을 떠올렸다. 그러나 평소 강서연은 인맥도 좋고 성격도 부드럽고 일도 열심히 하는 터라 정말 강서연이 성소원을 때렸다고 한들 사람들은 성소원이 그녀를 몰아붙여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확실한 증거도 없으니 다들 쉬쉬거리기만 했고 이 일은 이렇게 흘러 지나갔다.비록 CCTV에 찍히지는 않았지만 이 모습을 유찬혁이 제대로 목격했다.근처 법률 사무소에서 일 처리하고 있던 유찬혁은 강서연이 사람을 때리는 이 보기 드문 모습을 목격했고 그는 바로 구현수에게 이 사실을 전해줬다.배경원에게 동기화가 된 것인지 그의 어투는 묘하게 배 도련님과 비슷했다.“형, 형 와이프 정말 만만치 않던데요. 뺨 날릴 때도 머뭇거림이 없이 깔끔했어요. 그러면서 만약 다시 자기 남편을 모욕하면 여기서 끝나지 않을 거라고 경고까지 하더라고요.”구현수는 미간을 찌푸렸고 차가운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어쩐지 그날 그녀는 집에 돌아와서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고 계속 그에게 싸움을 하면 몇 년을 선고받을지 물어본다 했더니... 그를 옹호하기 위하여 그녀는 온몸의 가시를 뾰족하게 세웠다.구현수는 마음이 따뜻해졌고 주방에서 바삐 돌아치는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부드러워졌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갔고 강서연은 한창 물고기 한 마리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도마 위에서 거의 숨이 간들간들한 상태의 물고기가 있었고 강서연은 칼을 높이 들었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물고기의 머리를 가격했다. 물고기는 완전히 기절하여 입을 천천히 뻐금 뻐금거리고 있었는데 강서연은 그 틈을 타서 빠르게 비늘을 긁어내고 물고기의 배를 갈랐다.구현수는 웃음이 터졌다. 그는 처음으로 여자가 물고기를 죽이는 이런 피 비린 내 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것도 강서연 같은
임지강은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지만, 입이 머리보다 빨랐다. 임지강은 바로 승낙해 버리고 말았다.“가원아,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러 가는 곳이 어디야?”“음...”최가원은 한참 고민하다가 대답했다.“남성이라는 곳이에요. 이름이 뭐더라... 아, 스튜디오였던 것 같아요!”임지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온 뒤, 최가원이 어설프게 짜맞춘 주소를 토대로 검색해 본 끝에 정확한 위치를 찾아냈다. 그곳은 개인 고급 웨딩드레스 브랜드로 디자이너는 오성에서 최고로 손꼽히며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물이었다.임지강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냉소적인 생각에 잠겼다. 이런 곳을 배현진이 직접 찾았을 리 없었다. 아마도 배윤아의 뜻에 따라 이곳으로 예약한 게 틀림없었다.생활비조차 반반 나누는 남자가 이런 고급스러운 장소에 돈을 쓸 리는 없어 보였다....주말에 남성에서.배현진과 송윤지는 약속한 시간에 맞춰 웨딩드레스 매장에 도착했다. 최가원은 화려한 드레스를 처음 본 터라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꼭 궁전에서 뛰노는 작은 토끼 같았다.수석 디자이너인 마리가 두 사람을 직접 맞이했다.“두 분, 오래 기다리셨죠?”화려한 꽃무늬 두건을 두르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독특한 스타일의 디자이너가 나타나자, 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에헴! 저는 Mary... 아니, 마리입니다!”“제 이름의 ‘리’는 날카롭다는 뜻이지, 아름답다는 뜻이 아니에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이고 겨우 웃음을 참았다. 배현진이 간단히 인사를 마친 뒤, 송윤지도 한 발짝 나서서 인사를 건넸다.마리는 송윤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이분은 정말 제가 본 신부 중 가장 아름다운 신부예요! 좋아요, 우선 신부 화장을 먼저 시험해 봅시다. 신랑분은 서두르지 마시고 잠시 밖에서 대기해 주세요.”배현진은 이 모든 일이 자기와는 무관하다는 듯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을 본 송윤지는 웨딩드레스를 입으러 올 때만 해도 설렜던 마음이 한순간에
“원래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잖아.”임우정이 웃으며 강소아를 끌어당겼다.“지강아, 잘 왔어. 오늘 점심은 집에서 먹고 가. 군형이랑 소아한테 기쁜 소식이 있거든!”“뭔데요?”“나, 곧 또 외할머니가 된다니까!”임지강은 순간 멍해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강소아는 얼굴이 붉어져서 최군형의 어깨에 기대어 다정한 모습으로 안겨 있었다.“소아가 또 임신했어요.”최군형은 환한 얼굴로 말했다.“지금 딱 석 달 됐어요. 상태도 안정적이고 특별히 힘든 것도 없어서 모든 게 좋아요!”“아, 축하해.”임지강은 축하의 말을 입에 올리면서도 속으로는 생각했다.정말이지...방금 매형과 누나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나온 것도 모자라, 이번엔 이 두 사람까지. 이 집안 사람들은 도대체 언제까지 이 외로운 싱글을 괴롭히려는 건가?“와! 할아버지다!”땀에 흠뻑 젖은 최가원이 신나게 마당에서 달려 들어왔다.손에는 장난감 총을 들고는 임지강을 향해 두 번 쏘는 척했다.임지강은 맞은 척하며 소파 위로 쓰러졌고 최가원과 장난을 주고받으며 한바탕 웃음소리를 터뜨렸다.“할아버지, 우리 마당에서 놀아요!”가원이는 임지강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손을 잡아끌어 마당으로 데려갔다.임지강은 거실의 온갖 다정함이 가득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오히려 기뻤다.마당에서 최가원은 깡충깡충 신나게 뛰어다녔다. 하지만 뒤따르던 임지강의 표정에는 어딘가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최가원이 임지강의 손을 잡아당기며 얼굴을 들어 물었다.“할아버지, 왜 저랑 안 놀아줘요?”“가원아, 우리 잠깐 앉아 있을까? 응?”“네!”최가원은 얌전히 임지강의 무릎 위에 앉았다.그리고 작은 손으로 그의 이마를 살짝 쓸어내렸다.임지강은 최가원의 행동에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너희 엄마 뱃속에 작은 아기가 있는 거 알고 있어?”“알아요!”“그럼 동생이 남자아이였으면 좋겠어, 아니면 여자아이였으면 좋겠어?”“음... 남자아이가 좋겠어요!”“왜?”“남자아이는 내가 때려도 되잖아
다음 날, 송윤지는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임지강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 송윤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임지강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그녀를 긴장하게 했다.“송윤지 씨?”임지강은 속에서 밀려오는 기쁨을 간신히 억누르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전화하셨어요?”“저... 언니 일에 대해서 들었어요.”송윤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임 대표님이 도와준 거 알아요. 정말 감사드립니다.”“아, 별거 아니에요.”임지강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조 회장이 예전에 우리 형부랑 좀 인연이 있었거든요. 이번에 형부 대신 옛정을 나눈 셈이죠.”“임 대표님, 제가 식사 대접해도 될까요?”송윤지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지난번처럼요. 집으로 오세요. 제가 요리를 준비할게요.”임지강은 심장이 터질 듯했다.너무 기뻐서 당장이라도 아무도 없는 곳으로 달려가 소리치고 싶었다. 송윤지의 초대에 바로 좋다고 대답하고 싶었고 그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그는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고 마음을 진정시켰다.임지강은 감정을 숨기며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괜찮아요.”송윤지는 살짝 실망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사실... 우리 언니가 초대하고 싶어 했어요. 임 대표님이 도와준 일에 정말 고마워하고 있어요. 빚 문제뿐만 아니라 이혼까지 도와주셨잖아요...”“정말 괜찮다니까요.”임지강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겐 별거 아닌 일이었어요. 너무 신경 쓰지 마요.”“임 대표님...”“미안하지만, 제가 지금 일이 좀 있어서, 이만 끊을게요.”전화가 끊기며 화면이 꺼지자, 송윤지의 눈빛도 함께 어두워졌다.임지강은 소파에 앉아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다. 부하가 다가와 흔들어 깨우기 전까지 그는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듯했다.“이 서류, 서명하실 건가요?”“아...”임지강은 정신을 차리고 서류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다. 서명하려고 펜을 들었다. 그리고 서류의 엉뚱한 곳에 서명할 뻔했다.부하는 임지강
“윤지야.”배현진이 송윤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내 말 이해했어?”송윤지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송윤지는 배현진의 말을 이해했다.결혼 후에도 서로 독립적으로 생활하며, 각자의 삶에 간섭하지 않고 생활비도 나눠 부담하겠다는 의미였다. 또한, 가정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도와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돕지 않는다고 해서 잘못은 아니다.물론, 배씨 가문은 명문 가문으로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것이다.반면, 송윤지처럼 소박한 가정에서는 골치 아픈 일이 끊이지 않는다.“현진 씨.”송윤지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결혼 전에 계약서도 작성하자는 건 아니겠지?”“어떻게 알았어?”배현진의 눈이 반짝이며 웃음을 지었다.“송윤지, 네가 드디어 내 말을 이해하기 시작했구나! 정말 너무 기뻐.”“그래... 그렇구나.”송윤지는 멍해졌다. 그저 배현진의 의도를 떠보려고 한 말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긍정적인 대답을 듣게 되었다.“결혼 전 계약서는 반드시 작성해야 해.”배현진은 단호하게 말했다.“요즘 외국에서는 젊은 부부들이 거의 다 이렇게 한다고. 나는 해외에서 오래 살면서 이런 관념에 익숙해서 결혼 전 계약서 작성하는 건 좋은 거라고 생각해. 결혼 전에 모든 걸 명확히 해두면, 나중에 이혼하게 되더라도 불필요한 갈등이나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잖아. 그게 양쪽 모두에게 좋은 일이야.”“너...”송윤지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이혼까지 생각하고 결혼하는 거야?”배현진은 가볍게 웃었다.“그냥 대비하는 거야. 물론 아무도 이혼하려고 결혼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미리 준비해 두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해.”배현진이 덧붙였다.“나는 항상 미리 준비해 두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거든.”송윤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이런 관계를 맺는 방식은 논리적으로는 틀릴 게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독립적이어야 하고 결혼한 후에도 경제적으로 각자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하지만...만약 두 사람이 서로에게 기대지 못하고 함께 고난을 이
며칠 동안, 송윤지는 유치원 앞에서 임지강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다.최가원을 데리러 오는 사람도 최씨 가문의 가정부와 경호원으로 바뀌어 있었다.송윤지는 방과 후 시간이 되면 이유도 모른 채 무의식적으로 임지강을 찾곤 했다.스스로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임지강의 모습이 송윤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그날, 아파트로 돌아온 송윤지가 막 문을 열려고 할 때, 맞은편 문이 열렸다. 문 앞에는 배현진이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와 송윤지와 마주 섰다.“나... 주전자가 없어서 그러는데 혹시 차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을까?”송윤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배현진을 안으로 들였다.송윤지는 자연스럽게 실론 홍차를 우려내어 가져왔지만, 배현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왜 그래?”“나는...”배현진은 송윤지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나는 이런 차를 좋아하지 않아.”송윤지는 놀라서 멈칫했다.사실 송윤지는 배현진이 어떤 차를 좋아하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이 실론 홍차는 며칠 전 임지강이 왔을 때 마셨던 차였다.송윤지는 얼굴이 붉어졌다.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차를 바꿔오려 하자 배현진이 송윤지를 붙잡았다.“송윤지, 우리 진지하게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송윤지는 배현진의 눈을 보며 조용히 맞은편에 앉았다.“지난번엔... 내가 잘못했어.”배현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너와 임지강 씨의 사이를 오해한 것도, 너한테 그렇게 심한 말을 한 것도 다 미안해. 내 약혼자를 믿어야 했었는데...”송윤지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네 형부의 60억은...”배현진이 잠시 말을 멈췄다. 송윤지는 약간의 기대와 함께 긴장한 표정으로 배현진을 바라봤다. 마치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학생처럼 초조한 마음이었다.“내 의견은 여전히 같아.”배현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분명했다.“이 빚은 그 사람의 문제야. 그 사람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
정지한은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생각했지만, 그런 사람은 기억나지 않았다.“제 사업은 모두 부하들에게 맡기고 있습니다.”정지한은 솔직하게 말했다.“매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을 빌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죠.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겁니까?”임지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오강호라는 사람은 놀고먹으며 도박에 빠진 쓰레기 같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분은...”임지강은 잠시 멈춘 뒤 말을 이었다.“그자는 제 아내의 형부입니다.”“아내의 형부라고요?”“그렇습니다.”임지강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오강호이라는 자가 대담하게도 제 아내를 담보로 삼았습니다. 돈을 갚지 못하면 정 회장님의 사람이 와서 제 아내를 데려갈 거라고 말했더군요.”“세상에, 그런 일이 있단 말입니까?”정지한의 표정이 한순간에 심각해졌다.그때, 누군가가 정지한의 귀에 몇 마디 속삭였다.정지한은 문득 깨달은 듯 눈에 서늘한 빛을 띠었다.“며칠 전, 제 부하 둘이 잡아간 게 당신 짓이었군요!”임지강은 여유롭게 대답했다.“그들은 제 아내를 괴롭히러 왔습니다. 경찰에게 넘긴 건 오히려 가벼운 처벌이죠.”“임지강 씨...”정지한은 순간 자신이 경찰과 함께 함정에 빠진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정지한이 눈짓을 보내자, 주위 부하들이 순식간에 총을 꺼내 임지강에게 검은 총구를 겨누었다. 하지만 임지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채 차가운 표정으로 그들을 응시했다.그의 눈빛은 압도적인 위압감을 내뿜고 있었다.“정 회장님, 오늘은 진심으로 대화하러 온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경찰은 데려오지 않았습니다.”정지한은 눈을 굴리며 부하들에게 총을 내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곧이어, 누군가 오강호가 작성한 고금리 대출 차용증을 가져왔다.차용증에는 분명히 쓰여 있었다. 돈을 갚지 못할 경우, 송윤지를 담보로 넘기고 정지한이 원하는 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차용증은 여기 있습니다. 임 대표님, 혹시 제가 이걸 찢어버리길 원하는 겁니까?”
며칠 후, 부하가 초대장 한 장과 함께 정지한이라는 사람의 자료를 임지강 앞에 가져왔다.“정지한이라는 사람은 줄곧 운산시 암흑가에서 활동한 인물입니다. 오성에서 세력은 크지 않지만, 최근 몇 년간 꾸준히 세력을 넓히려 하고 있습니다.”“그래서.”임지강은 자료를 대충 넘기며 말했다.“결국 성공했어?”“그다지 성공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부하가 웃으며 대답했다.“대표님도 아시겠지만, 오성은 원래부터 대표님 매형의 영역입니다. 경섭 형님은 암흑가에서 손을 뗐지만, 그분의 영향력은 여전히 정지한보다 훨씬 큽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뭔데?”“정지한은 사람을 다루는 데 능숙한 사람입니다. 오성의 소규모 세력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죠. 더구나 경섭 형님은 이미 암흑가 일에 손을 뗐기 때문에, 정지한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규칙에 따라 경섭 형님은 아무리 영향력이 있어도 이런 일에는 개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지한의 주요 사업은 카지노와 고금리 대출입니다. 운산시와 오성 양쪽 모두 그의 카지노와 대출 사업이 자리 잡고 있죠. 오강호가 바로 정지한이 운영하는 카지노에서 돈을 잃었고 그 60억도 정지한에게 빌린 돈입니다. 다른 소규모 세력들도 이 일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정지한의 일이기 때문에 암흑가의 규칙을 깨뜨릴 수 없거든요.”“음...”임지강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초대장을 흘깃 쳐다보았다.“이번 주말, 정지한이 새로운 카지노를 개업한다고 합니다.”부하가 말했다.“대표님이 경섭 형님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곳에서 만나자고 한 것 같습니다.”임지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말했다.“알았다.”부하가 물러난 뒤, 임지강은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었다. 니코틴 냄새가 임지강의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임지강은 예전에 담배와 술을 손에서 놓지 않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송윤지와 헤어진 후 모든 것을 끊어냈다.임지강은 송윤지를 위해 바뀐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송윤지를 위해 나서기로 마음먹었다.주말이
임지강은 송윤지가 환하게 웃으며 배현진을 집 안으로 들이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문이 철컥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임지강의 심장은 얼어붙는 듯했다. 그는 복도를 서성이다 결국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분을 삼키지 못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배현진이 왜 여기 살고 있는 거야?”전화를 받은 부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몰랐기 때문이다.임지강은 눈을 감고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깊이 숨을 들이쉰 뒤 천천히 내쉬었다.“그러니까 배현진이 어떻게 마린 광장 아파트로 오게 됐는지, 왜 하필 내 집 바로 건너편인지 그 이유를 묻고 있잖아!”“그게...”“당장 조사해!”임지강은 전화를 끊고 화를 억누르지 못한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하가 다급히 조사 결과를 보고해 왔다.“임 대표님, 배 도련님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배씨 가문의 소유가 아닙니다. 벤처 투자로 번 첫 수익으로 구입한 개인 자산으로 확인되었습니다.”“그런데 왜 하필 여기야?”“그게...”부하는 난감해하며 말했다.“아파트가 워낙 인기 있다 보니, 사고 싶다는 사람을 막을 수는 없죠.”임지강은 가슴속에서 화가 들끓었다. 송윤지 집 앞까지 천천히 걸어가 그곳에서 한참을 서성였다.이 아파트는 최고급 자재로 지어진 데다 방음까지 완벽해서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들리지 않았다.배현진... 오늘 밤 이곳에 머무를까?사람들은 흔히 떨어져 지낸 사이는 더 애틋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아니야!임지강은 즉시 부정했다.송윤지는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결혼하지 않는 이상 절대 자신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예전에 자신과 함께했던 시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머릿속이 복잡한 상념으로 뒤엉키며 부적절한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임지강은 두 주먹을 꽉 쥐었고 팔뚝에는 핏줄이 터질 듯 도드라졌다. 그리고 두 눈은 문에 고정되었다. 이성을 붙들고 있던 끈이 조금이라도 풀리면 당장이라도 문
“뭐라고?”임지강은 고개를 돌려 최가원을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고 품에 살짝 안아 올렸다.“가원아, 집에 데려다줄게.”“그럼, 할아버지는 어디 가려고요?”“나는 놀이공원에 가볼까 해.”최가원은 기쁨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나도 갈래요!”“미안해, 가원아.”임지강은 최가원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오늘은... 함께 갈 수 없어. 할아버지 혼자 있고 싶어.”최가원은 살짝 입을 내밀었지만, 떼를 쓰거나 울지 않았다. 늘 자신을 아껴주던 할아버지의 얼굴에 무거운 고민이 담겨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그의 마음속 고민이 혹시 송 선생님과 관련된 걸까?작은 공주는 반짝이는 눈으로 잠시 고민하더니, 송 선생님 이야기를 할아버지에게 들려주면 항상 기분 좋은 반응이 돌아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비밀을 하나 알려주면 할아버지 기분이 좋아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최가원은 입술을 꾹 누르더니 임지강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할아버지, 제가 송 선생님에 대한 비밀 하나 알려줄게요...”그리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송 선생님이 왕자님이 곧 돌아온다고 했어요!”“뭐라고?”임지강의 얼굴빛이 변했다.“진짜예요!”최가원은 고개를 힘껏 끄덕이며 말했다.“아까 고추장 사러 갔을 때, 송 선생님이 직접 그랬어요. 왕자님이 이번에 돌아오면 결혼 얘기를 하자고 했대요... 할아버지, 결혼하면 아빠랑 엄마처럼 사진도 같이 찍고 같은 집에서 살아야 하는 거죠?”임지강의 손이 힘없이 풀렸다. 최가원이 작은 비명을 지르며 거의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다행히 뒤에 있던 경호원이 재빠르게 최가원을 받아냈다.놀라움에 휩싸인 최가원은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전보다 더 창백했고 눈동자 깊숙이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몇몇 경호원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아무도 임지강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임지강은 주먹을 더 단단히 쥐었다.“임 선생님, 저희가...”경호원 중 한 사람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임지강은 갑자기 몸을 돌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