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현수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곧이어 몸을 돌려 방진영을 보더니 살기등등한 기운을 내뿜으며 칼날 같은 눈빛으로 그의 목을 자를 것만 같았다.호텔 입구에서 경호원이 이제 막 앞으로 달려오려다가 구현수의 사나운 눈빛에 뒷걸음질 쳤다.방진영은 그의 강렬한 카리스마에 기가 눌려 몸을 벌벌 떨었다.“너... 대체 누구야?”그는 겨우 바닥에서 기어올라 비틀거리며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대체 정체가 뭐냐고? 허구한... 대낮에 감히 날 때려? 내가...”구현수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목덜미를 덥석 잡더니 호텔 뒷마당으로 질질 끌고 갔다.강서연은 구현수가 피해를 볼까 봐 재빨리 따라갔지만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귀신이 곡할 듯한 괴성과 함께 살려달라는 비명이 전해졌다.방진영은 한바탕 얻어맞아 얼굴이 가득 멍든 채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구현수는 그의 가슴팍에 발길질했고 그가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또다시 매섭게 머리를 가격했다. 방진영은 결국 반쪽 얼굴이 구현수의 발밑에 깔려버렸다!그는 목이 갈라 터지게 울며 애원했다.“사... 사장님! 제발요! 제가 잘못했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다신 이러지 않을게요!”“앞으로 이 여자한테서 멀리 떨어져 있어.”구현수가 무표정한 얼굴로 사납게 쏘아붙였다.“앞으로 두 번 다시 내 와이프한테 집적거렸다가 그땐 이렇게 쉽게 풀어주지 않을 줄 알아!”방진영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마치 벌레처럼 바닥에서 힘겹게 꿈틀거렸고 구현수에게 짓밟혀 턱이 빠질 것만 같았다.구현수는 그의 바짓가랑이로 시선을 옮기더니 그곳이 흥건하게 젖어있는 걸 발견했다.그는 코웃음 치며 얼른 발을 떼고 역겹다는 듯이 쏘아붙였다.“꺼져!”방진영은 아픔도 마다하지 않은 채 바지에 지리며 도망치다가 하마터면 강서연과 부딪힐 뻔했다.강서연은 방진영의 처참한 몰골에 화들짝 놀라 사태가 심각하여 구현수도 다친 줄 알고 부랴부랴 달려갔지만 정작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옷깃을
강서연은 어리둥절하여 영문도 모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안이수는 한숨을 내쉬며 작은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냥 말해줄게요. 지금 회사에 서연 씨가 이미 결혼했고 남편은 감옥살이를 했던 불량배라고 소문이 퍼졌어요... 그리고 어제 방진영을 때린 사람이 바로 서연 씨 남편인데 과거에 싸움에 휘말려 몇 년을 선고받았고 최근에야 감옥에서 석방되었다고...”강서연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안이수는 그녀가 침묵하는 걸 보고 더욱 경악했다.“서연 씨, 정말 결혼했어요? 남편이 정말 그런 사람이에요?”“네, 저 결혼했어요.”강서연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그리고 제 남편은 확실히 출신이 떳떳하지 못해요.”안이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서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저한테 엄청 잘해줘요.”강서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어 하나하나에 힘이 실려있었다.“결혼을 한 것에 대하여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니고 딱히 숨길 필요도 없죠. 그냥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얘기를 하지 않았고 결혼한 사람은 채용할 수 없다는 회사의 규정도 없지 않아요?”안이수는 미간을 찌푸렸다.“그렇긴 한데...”“어쨌든 저의 남편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강서연은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예전에 싸움으로 감옥살이를 했을지는 모르지만 저와 결혼한 이후로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어요. 그건 다 지나간 일들이고 저희가 손잡고 함께 걸어야 하는 길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잖아요.”안이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만약 자신이라면 강서연과 같은 용기가 없을 것 같다.“솔직히 말해서 난 정말 서연 씨가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안이수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고 문득 그녀의 손가락이 허전한 것을 발견했다.“그런데 왜 결혼반지를 하지 않았어요? 손에 아무것도 없으니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거죠.”강서연은 멈칫하였고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때 당시 구현수와 서둘러 결혼했고 그녀도 반지를
성소원은 기가 막혀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그녀는 항상 체면을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사람인데 지금 체면을 몽땅 잃었다. 그녀는 마음속 가득 찬 노여움을 강서연에게 풀 생각으로 손을 들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제지했다.주변 사람들은 천장에 달려있는 CCTV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조금 참으라고 하였다.성소원은 강서연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빈털터리한테 시집가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다이아몬드 반지는커녕, 쇠로 만든 고리 하나도 사주지 못하는데. 빈천한 부부끼리 평생 가난하게 같이 살아.”그녀는 돌아서서 가버렸고 강서연은 노발대발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 보아하니 앞으로 회사 생활은 평온하지 못할 것 같으니 그녀도 일찍 자신을 위해 퇴로를 마련해야 한다.......이튿날, 강서연은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회사에 나타났다. 평소 메이크업을 하지 않던 그녀는 옅은 화장을 했고 손에 새로운 물건이 생겼다. 커다란 에메랄드 반지였다.동료들은 모두 휘둥그레 그녀를 쳐다보았다. 반지의 받침은 순금처럼 보였고 고리에는 섬세한 무늬가 조각되어 있었고 그 위에 있는 에메랄드는 빛깔이 투명하여 매우 화려해 보였다.다만 반지 디자인이 좀 올드했고 오래된 물건으로 보였다.강서연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반지를 어루만졌다. 이것은 어젯밤 그 나무 박스에서 꺼낸 반지이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늘어 반지가 좀 큰 터라 구현수는 고치고 다시 끼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성소원이 어제 그녀의 남편은 반지조차 사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 자신이 손가락에 낀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그녀에게 보여줄 생각이다.“서연 씨, 이거 너무 예뻐요.”사무실 여자 동료들은 그녀 옆으로 다가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반지를 훑어보았다.“이런 스타일의 반지를 본 적이 없는데 개인 맞춤 제작이죠?”“그런데 아주 오래된 디자인 같아요.”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했다.“골동품같이 말이에요.”“서연 씨 남편이 선물해 준 거예요? 이렇게나 큰
강서연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고개를 돌려 안이수와 눈을 마주쳤고 안이수도 긴장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서연 씨를 찾아요?”안이수는 미간을 찌푸렸다.“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요. 서연 씨, 조심하세요.”“네, 괜찮아요.”강서연은 침착하게 성소원의 사무실로 들어갔다.성소원은 일부러 사무실의 블라인드 커튼을 모두 열고 문까지 열어두어 바깥사람들이 사무실 안에서 오고 가는 대화를 제대로 들을 수 있게끔 하였다.강서연은 약간의 의혹이 들었다. 보아하니 성소원은 그녀를 공격하려고 하는 것 같지 않다. 어쨌든 이렇게 많은 눈들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으니 말이다.“강서연,이분은 진광 그룹의 소 대표님이야.”성소원은 미소를 지으며 소개했다.“소 대표님, 저희 회사 이번 달 판매왕이에요.”강서연은 미소를 지으며 소진명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성소원의 표정을 볼수록 안이수가 방금 한 말을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꿍꿍이가 있다...소진명은 점잖고 공손한 중년 남자이고 강서연이 사무실에 들어선 뒤 그의 시선은 줄곧 그녀의 반지에 고정된 채 아예 다른 곳을 보지 않았다.“강서연,오늘 정말 행운인 줄 알아.”성소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소 대표님은 비록 사업을 하는 분이지만 보석 주얼리 감정 방면에서 상당히 일가견이 있는 분이야. 또한 소 대표님은 주얼리 협회의 상무이사로서 많은 보석상들도 소 대표님한테 감정을 부탁하기도 한대. 그러니 소 대표님의 눈은 기계보다 정확해서 한눈에 진품인지 가품인지 알아볼 수 있다는 거야.”“소 대표님.”그녀는 고개 돌려 소진명을 바라보았다.“저희 강서연 씨의 반지 좀 대신 봐주세요.”강서연은 가슴이 두근거렸고 무의식적으로 손의 반지를 막았다. 소진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 바르게 웃으면서 말했다.“강서연 씨, 혹시 한번 봐도 될까요?”강서연은 머뭇거렸고 사무실 밖에는 벌써 동료들이 궁금해하며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성소원은 팔짱을 끼고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좋은 구경거리를 할 생각에 기분
강서연은 소진명을 모시고 회의실로 향했다.성소원 사무실 앞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통쾌하다는 듯 웃었다.“성 매니저님이 그 소 대표님을 모셔 온 이유가 강서연 씨 반지가 유리로 만든 거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잖아. 그런데 반지는 진짜 에메랄드였고 고객까지 뺏겼네.”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안팎으로 밑지는 장사를 한 거지.”“이중으로 손해를 본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하하하...”성소원은 그 자리에 굳어있었고 머릿속은 새하얘졌고 화가 치밀어 온몸이 떨렸다.그녀는 홱 다가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사무실 밖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각자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웃음소리는 여전히 사무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일찍이 방자하고 오만한 성소원에 대하여 불만이 쌓였지만 그녀의 삼촌이 대주주여서 다들 참을 수밖에 없었다.오늘 궁지에 빠진 그녀의 모습을 보니 그들은 내심 통쾌하였다.......강서연은 소진명과 회사 입구에서 웃으면서 작별 인사를 하고 조심스럽게 손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이게 진짜 에메랄드였어?그녀는 행복한 웃음을 지었고 양 볼에 보조개가 깊이 파였는데 그 보조개는 마치 이 세상의 모든 달콤함을 담은 것 같았다.자세히 생각해 보면, 구현수와 결혼을 한 뒤 그녀의 운은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오더도 끊임없이 받고 매번 위급한 상황에 부딪치면 구현수는 나타나 그녀를 도와 해결해 주곤 한다...예전에 점쟁이가 그녀에게 남편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팔자라고 한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구현수가 와이프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 팔자인 것 같다.그녀는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퇴근 시간이 다가왔고 그녀는 오늘 저녁에 남편에게 만두를 빚어 줄 생각이다.그러나 그녀는 돌아서자마자 성소원의 빨개진 눈시울과 눈이 마주쳤다.“성 매니저님.”강서연은 비굴하지도 오만하지도 않게 인사를 하고 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 성소원의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쳇, 무슨 에메랄드. 어디서 훔쳐 온
그날 아무도 왜 성소원이 잠깐 나갔다 왔을 뿐인데 양쪽 얼굴이 퉁퉁 부었고 입가에는 핏자국이 있는지 모른다.그녀의 초라한 모습은 방진영이 맞은 그날의 모습과 그야말로 똑같다.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일을 연관시켰고 자연스럽게 강서연을 떠올렸다. 그러나 평소 강서연은 인맥도 좋고 성격도 부드럽고 일도 열심히 하는 터라 정말 강서연이 성소원을 때렸다고 한들 사람들은 성소원이 그녀를 몰아붙여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확실한 증거도 없으니 다들 쉬쉬거리기만 했고 이 일은 이렇게 흘러 지나갔다.비록 CCTV에 찍히지는 않았지만 이 모습을 유찬혁이 제대로 목격했다.근처 법률 사무소에서 일 처리하고 있던 유찬혁은 강서연이 사람을 때리는 이 보기 드문 모습을 목격했고 그는 바로 구현수에게 이 사실을 전해줬다.배경원에게 동기화가 된 것인지 그의 어투는 묘하게 배 도련님과 비슷했다.“형, 형 와이프 정말 만만치 않던데요. 뺨 날릴 때도 머뭇거림이 없이 깔끔했어요. 그러면서 만약 다시 자기 남편을 모욕하면 여기서 끝나지 않을 거라고 경고까지 하더라고요.”구현수는 미간을 찌푸렸고 차가운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어쩐지 그날 그녀는 집에 돌아와서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고 계속 그에게 싸움을 하면 몇 년을 선고받을지 물어본다 했더니... 그를 옹호하기 위하여 그녀는 온몸의 가시를 뾰족하게 세웠다.구현수는 마음이 따뜻해졌고 주방에서 바삐 돌아치는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부드러워졌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갔고 강서연은 한창 물고기 한 마리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도마 위에서 거의 숨이 간들간들한 상태의 물고기가 있었고 강서연은 칼을 높이 들었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물고기의 머리를 가격했다. 물고기는 완전히 기절하여 입을 천천히 뻐금 뻐금거리고 있었는데 강서연은 그 틈을 타서 빠르게 비늘을 긁어내고 물고기의 배를 갈랐다.구현수는 웃음이 터졌다. 그는 처음으로 여자가 물고기를 죽이는 이런 피 비린 내 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것도 강서연 같은
구현수는 숨이 막혔고 갑자기 그녀를 품에 안았다.그녀의 가냘픈 허리를 그는 한 손으로 꼭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그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고 두 눈은 샘물처럼 맑았고 조금 벌려있는 연분홍색 입술은 소리 없는 유혹처럼 느껴졌다.구현수는 몸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강서연은 그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피했고 그녀의 작은 얼굴은 붉어졌고 호흡도 가빠졌다. 그녀는 그의 뜨거운 가슴, 힘찬 심장 소리, 뿜어져 나오는 남자다운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몸이 나른해졌고 그가 그녀에게 키스를 하기 전에 가볍게 그를 밀었다.“그러지 마요.”그녀는 부끄러워하며 웃었다.“저 밥 해야 돼요.”구현수는 동작을 멈췄고 그윽한 눈동자에는 약간의 실망감이 스쳤다.“저녁에....”강서연은 낮고 가냘픈 목소리로 힘겹게 이 세 글자를 내뱉었고 순간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졌다.“저녁에 소파에서 자지 말고 방으로 와서 자요. 불편하잖아요.”구현수는 넋이 나갔다.이것은 아마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노골적인 말일 것이다...그는 웃음을 참으며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붉게 물든 귓불을 살짝 만지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그래.”저녁을 먹은 뒤 구현수는 바로 욕실로 향했다.평소 샤워는 10분밖에 안 걸리는데, 이번에는 거의 1시간째 욕실에 있었다.강서연은 과일을 깎고 TV도 잠깐 봤지만 그는 나오지 않았고 간간이 콸콸 흐르는 물소리만 들려왔다.강서연은 볼이 뜨거워졌고 방에 들어가 잠옷으로 갈아입고는 어쩔 바를 몰라 하며 침대 가장자리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그녀의 작은 두 손은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몰라 하며 긴장이 역력했다.이따 그는 그녀에게 어떻게 할까? 그는 키도 크고 덩치도 좋고 근육도 있으니 힘도 보통 사람보다 세겠지?강서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몰래 웃다가도 이런 생각들을 하는 자신이 너무 민망하고부끄러웠다.바로 그때 욕실의 물 흐르는 소리가 뚝 그쳤고 강서연은 순간 멈칫하였고 잠옷 한쪽을 꼭 움켜잡았다.구현수
그가 열여섯 살 때 이미 세계 3대 경영대학원 중에서도 탑인 와튼대학교의 파격적인 합격 통지서를 받았고 최씨 가문의 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후계자였다.만약 그 후에 그가 다른 사람의 계략에 당해 비행기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 이미 최씨 가문의 대권을 장악하고 있었을 것이다.강서연의 궁금해하는 눈빛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침묵으로 대응했다.강서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고 뇌리에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설마 열여섯 살 때 첫사랑을 만난 것은 아니겠지? 다들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고 하던데. 그런데 방금 열여섯 살 때 얘기를 하면서 엄청 흥분했는데 결국 제대로 얘기도 하지 않고. 이건 분명히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건데...’그러면 첫사랑 외에 더 좋은 해석은 없다.강서연은 눈가에 쓸쓸함이 스쳐 지나갔고 그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니 그녀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그러나 이 일로 그녀의 마음속에 작은 응어리가 하나 맺혔다.그녀는 묵묵히 침실로 돌아가 새 침대 시트로 바꾸고 또 이불 한 채를 꺼내 거실 소파에 폈다.구현수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순간 이상함을 감지하고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왜... 왜 또 이불을 소파에 펴?”강서연은 고개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문제라도 있어요?”“당연히 있지.”그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최대한 마음이 평온해 보이도록 노력했다.“오늘 저녁에 같이 침실에서 자기로 했잖아. 나랑... 원했잖아...”“제 동생이 지금 학교 폭력을 당해서 저 꼴이 되었는데 지금 그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강서연은 그를 노려보았다.그리고 아까 ‘첫사랑’ 때문에 화가 났던 타라 그녀의 태도는 더욱 좋지 않았다.“오늘 찬이는 분명히 집으로 가지 않을 텐데 누나로서 쟤를 챙겨주지 않으면 누가 챙겨주겠어요?”구현수는 속사정을 모르지만 그녀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는 것만 느꼈다... 좀 많이 빠르게 말이다.“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서 자? 그러면 이 이불은 찬이를 위해서 펴놓은 거야?”“저를 위해서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
“엄마, 우리 오늘도 여기서 밥 먹어요?”“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고등어조림 요리잖아.”“그런데...”권온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켰다. 사실 권온유는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어린 권온유도 느낄 만큼 엄마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방금 대답조차 어딘가 건성으로 들렸다.권온유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걸까? 누군가 아빠와 다른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내기만 하면, 엄마는 이렇게 변해버렸다.“엄마...”권온유는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나 조순영은 갑자기 권온유의 손을 놓고는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권온유는 깜짝 놀라 인형을 떨어뜨렸다.“엄마!”“온유야,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조순영은 급히 돌아보며 외쳤다.“엄마 금방 올게!”권온유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엄마는 아빠가 다른 여자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통제력을 잃고 온유를 혼자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고 한참 후에야 멍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정대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이 모녀를 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는 자주 아이와 함께 식사하러 왔는데 가끔 혼자 올 때도 있었다...남편의 외도를 잡으려는 걸까?맞아, 틀림없이 그런 거다!정대명은 매일 호텔에 살면서 듣는 소문도 적지 않았다. 한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있음에도 바람이 잦았다고 하는데 그 회장은 차기 시장의 사위가 될 인물이라는 말도 있었다.정대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이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남자가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정대명은 다시 어린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
정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얼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며칠을 기다린 결과가 고작 최가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럼에도 영미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정대명 씨,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훔쳐 오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젠장! 정대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보석을 훔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하... 영미 아가씨.”마음속으로는 욕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이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 경호원들이 전부 총을 들고 있더라고요. 제가 무턱대고 나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정말 쓸모없네요.”영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사람들까지 매수해 놨는데,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정대명은 억눌린 분노를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말해 두겠는데요!”영미는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이 일 못 해내면,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도 더 이상 못 쓰게 될 테고 돈 한 푼도 못 받는 줄 아세요! 다시 그 작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서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세요!”정대명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호사에 길든 사람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정대명은 오성에서 살아가며 화려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이 잘 먹고 살게 도와줬고 돈까지도 넉넉히 주니 점점 체면이 생기기 시작했다.호텔에서 정대명이 매일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했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이런 삶은 초라했던 지난날에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정대명은 급히 전화기를 붙잡고 외쳤다.“영미 아가씨, 너무 흥분하지 마!”영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정대명은 어영부영 답했다.“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내가
백인서는 웃으며 정승우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정승우는 전혀 망설임 없이 백인서의 그릇에 고기가 많은 걸 보자마자 젓가락을 뻗었다.“너 지금 내 소고기를 뺏어 먹는 거야?”“사장님이 누나만 편애하는 거 아니에요? 고기를 이렇게나 많이 주다니!”“안 돼, 내 거야. 뺏어 먹지 마.”백인서는 웃으며 말했다.“이건 사장님이 특별히 주신 사랑의 소고기야!”“저는 성장기 남자애라 많이 먹어야 해요!”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면을 거의 다 비워가고 있었다. 백인서가 정승우에게 국수를 한 그릇 더 가져다주려고 일어서려는 순간, 달콤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고모!”백인서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예쁘고 앙증맞은 작은 공주가 백인서에게 달려왔다.“온유야?”권온유는 백인서에게 달라붙어 작은 머리로 백인서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정승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정승우는 이렇게 예쁜 여자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두 갈래로 묶은 머리에 공주 같은 퍼프 드레스를 입고, 마치 아까 놀이공원에서 본 백설 공주처럼 보였다.이 아이는 정말 동화 속에서 나온 공주일까?작은 소녀는 고개를 기울여 정승우를 한 번 바라보더니 달콤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백인서를 보며 물었다.“고모, 이 사람은 누구예요?”“이 사람은...”백인서가 대답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권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오빠는 학교에서 우등생이야. 공부도 엄청 열심히 하거든. 온유도 나중에 커서 이 오빠처럼 열심히 공부해야 해.”백인서는 권욱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여긴 어떻게 오셨어요?”“왜? 딸과 단둘이 외식하러 나오는 게 이상해?”“아니요.”백인서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권욱 씨가 이런 작은 가게에서 식사하실 줄은 몰랐어요...”“여기도 꽤 유명한 맛집이야!”권욱은 의자에 앉으며 사장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오늘 주말이라 온유를 데리고 나왔는데, 이 녀석이 배고프다고 해서 핸드폰으로 근처 맛집을 검색해 보니 이곳 평이 좋더라고.
정승우의 머릿속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그 시절, 백인서는 낮에는 그를 등에 업고 다녔고 밤에는 재워주며 보살폈다. 따뜻함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그의 삶에서 백인서는 유일하게 빛을 밝혀 준 존재였다.누가 세 살, 네 살 아이에게 기억이 없다고 했던가? 그 기억은 정승우의 성장 내내 곁을 지켜 주었고 다시 누나를 찾을 수 있도록 지탱해 주었다.“누나, 제발... 울지 마세요. 백 선생님!”백인서는 깜짝 놀라 정승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인서는 정승우의 미소에 눈물을 멈췄다.두 사람은 작은 음식점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우연히도, 이곳은 예전에 최지용이 백인서를 데리고 와 소고기 국수를 먹던 곳이었다.이번에도 그 가게 주인이 반갑게 맞이하며 다가왔다.“오, 이게 누구야! 귀한 손님이 오셨네!”그의 시선이 정승우에게로 멈췄다.“이 아이는?”“동생이에요!”정승우가 먼저 씩씩하게 대답했다.백인서는 미소를 지으며 주인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주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한번 보고는 주방으로 돌아가 푸짐하게 고기가 올라간 소고기 국수를 내왔다.“얼른 먹어!”백인서는 젓가락을 건네며 말했다.“여긴 정직하게 장사하는 곳이라 양도 푸짐하고 맛도 아주 좋아. 지용 씨가 나를 데리고 왔던 곳인데...”최지용을 언급하자 백인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정승우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백인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그 남자, 누나한테 잘해 줘요?”백인서는 모르는 척하며 대답했다.“무슨 남자?”“그러니까, 방금 말한 그 지용이란 사람 말이에요!”정승우는 더욱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숨기지 않아도 돼요. 산에 있을 때, 두 사람이 포옹하는 것도 봤고 그 사람이 누나한테 키스하는 것도 다 봤어요!”“정승우!”백인서는 정승우를 노려보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쏠렸다.“그만해!”백인서는 테이블 아래로 정승우의 다리를 가볍게 툭 차며 말했다.“애가 무슨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저
어느 일요일, 정승우는 돈을 꼭 쥔 채 백인서를 찾아갔다.처음에는 백인서에게 밥을 사주고 싶었지만, 지금의 백인서는 예전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맛있는 건 이미 다 먹어봤을 테니, 한 끼 식사가 백인서에게 그다지 특별할 리 없었다.그럼에도 정승우는 이 돈으로 어떻게든 백인서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결국 정승우는 백인서에게 이렇게 제안했다.“백 선생님, 우리 놀이공원 가요! 제가 살게요.”백인서는 원래 거절하려 했지만, 정승우의 간절한 부탁에 결국 놀이공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사실, 백인서도 놀이공원은 처음이었다.오랜 시간 오성에서 살았지만, 이런 곳에 대해선 왠지 모를 거부감이 있었다. 여긴 웃음과 즐거움이 넘쳐흐르는 곳이었고 왠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상처럼 느껴졌다.늘 자신에겐 잿빛 하늘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왔으니까.최지용을 만난 후에도 이곳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커플들이 관람차를 타면 결국 헤어진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백인서는 최지용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기에 그 소문이 괜히 두려워 오지 않았던 것이다.“백 선생님, 무슨 생각 해요?”맑고 발랄한 목소리가 백인서를 현실로 끌어당겼다.백인서는 정승우의 미소 가득한 눈을 내려다보았다.“제가 이미 자유 이용권을 사뒀어요.”정승우는 백인서에게 자유 이용권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자유 이용권이 뭔지 아세요? 그거 있잖아요, 놀이공원의 모든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 통행증 같은 거요! 따로 사는 것보다 훨씬 저렴해요!”“생각보다 똑똑하네.”백인서는 미소를 지었다.“적응력도 빠르고.”“똑똑하지 않으면 선생님을 즐겁게 해드릴 수 없잖아요!”“그래, 오늘은 네 말에 따를게.”백인서는 정승우를 바라보며 물었다.“먼저 어떤 걸 타볼까?”남자애들은 자극적인 놀이기구를 특히 좋아하곤 했다. 정승우는 백인서를 데리고 롤러코스터, 자이로드롭, 급류타기 같은 놀이기구들을 함께 탔다.하지만 백인서는 오히려 회전목마를 타고 싶었다.두 사람은 떠들썩한 놀이공원에서 땀을
정승우는 정대명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정대명은 문을 열어 정승우를 들여보냈다. 정승우는 방 안을 둘러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이 방은 마치 금으로 뒤덮인 듯 반짝이고 있었다.정대명이 이런 곳에서 살고 있다니.정승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저런 인간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곳에 살고 있는 건가 생각했다.“여긴 왜 온 거야?”정대명은 거칠게 정승우의 등을 밀며 물었다.“지금 학교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정승우는 정대명을 돌아보며 무심하게 말했다.“그냥 좀 보고 싶어서요. 그래서 왔죠.”“네가 날 보러 왔다고?”정대명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소리를 들은 듯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이 개자식이 언제부터 제 아비를 생각했다고! 흥!”정승우는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제정신이라면 주먹만 휘두르는 아버지를 그리워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좋아요, 그러면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아버지 술 마실 시간 뺏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정승우는 정대명의 손에 들린 술병을 힐끔 보고, 시선을 그의 바지 주머니로 옮기며 눈에 장난기가 어렸다.“저, 다 봤어요!”“뭐?”“그 여자가 아버지에게 돈을 준 거요.”정대명은 당황하며 정승우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정승우는 재빠르게 옆으로 비껴가며 비웃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저, 다 봤고, 다 들었어요! 두 분은 아무도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셨나 봐요?”“이 자식아, 헛소리하지 마!”정대명은 부끄러움과 분노에 휩싸였다. 또 영미의 경고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이 일이 절대 밖으로 새 나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다급해졌다.“헛소리 아니에요.”정승우는 이례적으로 침착한 표정이었다.“아버지는 그 여자랑 손잡고 우리 누나를 모함하려는 거잖아요!”“이 자식이!”“아버지, 제 입을 막고 싶으시죠?”“뭐?”정대명은 얼떨떨해졌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이 일은 비밀로 해 드릴게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정승우는 천천히 말했다.“단, 입 막
영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소리쳤다.“정대명 씨! 말도 안 되는 말 좀 그만해요!”정대명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영미를 바라보았다. 마치 영미가 정신 나간 사람이라도 되는 듯 쳐다보았다.뭐 잘못 말했나? 남자아이가 더 귀한 건 사실이잖아! 이 여자도 참, 돈이 될 만한 건 마다하고 오히려 돈이 안 되는 여자아이를 고집하다니!아휴, 역시 여자는 태생부터 천박한 존재야!정대명의 어리석고 근거 없는 우월감이 속에서 서서히 꿈틀거렸다.“영미 아가씨, 아직도 잘 모르겠어? 하하!”그는 들고 있던 술병을 흔들며 말했다.“여자애는 어차피 자라 봤자 시집가야 할 운명이야. 결국 여자는 남자의...”“닥쳐요! 제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영미는 더는 말로 설득할 여유가 없었다.“당신은 그저 이 아이를 데려오면 돼요. 제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요!”분노에 휩싸인 영미는 이성을 잃고 소리쳤고 여기가 호텔 뒤뜰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렸다.사람이 없다 해도 여긴 엄연한 공공장소였다.“정대명 씨.”영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두 눈을 번뜩이고 정대명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두툼한 돈뭉치를 꺼내 정대명의 얼굴에 내던졌다.정대명은 순간 당황했다. 지폐가 비처럼 흩날리며 땅에 떨어졌다. 돈을 보는 순간 정대명의 두 눈은 탐욕으로 반짝였고, 그는 모든 것을 잊은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지폐를 하나씩 주워 손에 꽉 쥐었다.영미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이제, 그 아이를 데려올 수 있겠죠?”정대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이 찢어지도록 웃었다.“당연하지! 영미 아가씨, 걱정하지 마. 아이 하나가 아니라 열 명이라도 데려올 수 있어!”“말귀를 알아듣기나 한 겁니까?”영미는 정대명을 흘겨보며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오직 그 아이 하나뿐이라고요!”“알았어, 알았어.”돈을 다 주운 정대명은 몸을 일으켜 손가락에 침을 묻혀 돈을 세려다, 영미의 혐오 가득한 시선을 느끼고는 머쓱해졌다.정대명은 멋쩍게 웃으며 손을 옷에 닦고
정대명의 손이 살짝 떨렸다.오성에 오고 나서 정대명은 최씨 가문과 육씨 가문에 대한 소문을 여기저기서 들었다. 육씨 가문은 연예계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폭 배경의 가문이었다.“허허...”정대명은 쓴웃음을 지었다.“어린아이인데도 정말 대단한 배경을 가졌군. 태어날 때부터 복이 터졌어, 이렇게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나다니!”영미는 방금 새로 한 네일아트를 무심히 살펴보며 정대명의 말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영미 아가씨.”대명이 누렇게 변한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저한테 이 사진을 주신 이유가 뭔가요?”“그 아이 어떻게 해서든 훔쳐 오세요.”“네?”정대명은 너무 놀라 휘청거릴 뻔했다.“왜 그러시죠?”영미는 고개를 돌려 정대명을 바라보며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당신네 마을은 인신매매가 심각한 곳으로 소문났잖아요. 아이나 여자를 납치하는 기술쯤은 다들 익혔다면서요? 심지어 당신 아내도 그렇게 끌려온 거 아닌가요? 흥, 아이 하나 훔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그게...”정대명은 말문이 막혀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굳어버렸다.“하하, 영미 아가씨, 너무 쉽게 말하네! 우리 마을에 끌려온 여자랑 아이들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건 전문 인신매매범들이 하는 일이고 난 잘 몰라.”“정대명 씨.”영미는 진지한 눈빛으로 정대명을 쏘아봤다.“여기 호텔에서 지내시기에 편한가요?”“편안하지...”“그러면 계속 여기서 살고 싶다면 제 일을 도와줘야죠. 전에 분명 그렇게 말했잖아요.”“하지만 영미 아가씨...”“이 아이를 훔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영미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정대명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아이는 지금 여덟 달 됐어요. 뒤집고 기어다니기도 하죠. 최씨 가문은 교육을 중요시하는 집안이라 벌써 조기교육을 시작했더라고요.”정대명은 '조기교육'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최씨 가문의 경호원 두 명을 이미 매수해 뒀어요.”영미는 정대명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