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무도 왜 성소원이 잠깐 나갔다 왔을 뿐인데 양쪽 얼굴이 퉁퉁 부었고 입가에는 핏자국이 있는지 모른다.그녀의 초라한 모습은 방진영이 맞은 그날의 모습과 그야말로 똑같다.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일을 연관시켰고 자연스럽게 강서연을 떠올렸다. 그러나 평소 강서연은 인맥도 좋고 성격도 부드럽고 일도 열심히 하는 터라 정말 강서연이 성소원을 때렸다고 한들 사람들은 성소원이 그녀를 몰아붙여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확실한 증거도 없으니 다들 쉬쉬거리기만 했고 이 일은 이렇게 흘러 지나갔다.비록 CCTV에 찍히지는 않았지만 이 모습을 유찬혁이 제대로 목격했다.근처 법률 사무소에서 일 처리하고 있던 유찬혁은 강서연이 사람을 때리는 이 보기 드문 모습을 목격했고 그는 바로 구현수에게 이 사실을 전해줬다.배경원에게 동기화가 된 것인지 그의 어투는 묘하게 배 도련님과 비슷했다.“형, 형 와이프 정말 만만치 않던데요. 뺨 날릴 때도 머뭇거림이 없이 깔끔했어요. 그러면서 만약 다시 자기 남편을 모욕하면 여기서 끝나지 않을 거라고 경고까지 하더라고요.”구현수는 미간을 찌푸렸고 차가운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어쩐지 그날 그녀는 집에 돌아와서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고 계속 그에게 싸움을 하면 몇 년을 선고받을지 물어본다 했더니... 그를 옹호하기 위하여 그녀는 온몸의 가시를 뾰족하게 세웠다.구현수는 마음이 따뜻해졌고 주방에서 바삐 돌아치는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부드러워졌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갔고 강서연은 한창 물고기 한 마리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도마 위에서 거의 숨이 간들간들한 상태의 물고기가 있었고 강서연은 칼을 높이 들었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물고기의 머리를 가격했다. 물고기는 완전히 기절하여 입을 천천히 뻐금 뻐금거리고 있었는데 강서연은 그 틈을 타서 빠르게 비늘을 긁어내고 물고기의 배를 갈랐다.구현수는 웃음이 터졌다. 그는 처음으로 여자가 물고기를 죽이는 이런 피 비린 내 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것도 강서연 같은
구현수는 숨이 막혔고 갑자기 그녀를 품에 안았다.그녀의 가냘픈 허리를 그는 한 손으로 꼭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그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고 두 눈은 샘물처럼 맑았고 조금 벌려있는 연분홍색 입술은 소리 없는 유혹처럼 느껴졌다.구현수는 몸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강서연은 그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피했고 그녀의 작은 얼굴은 붉어졌고 호흡도 가빠졌다. 그녀는 그의 뜨거운 가슴, 힘찬 심장 소리, 뿜어져 나오는 남자다운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몸이 나른해졌고 그가 그녀에게 키스를 하기 전에 가볍게 그를 밀었다.“그러지 마요.”그녀는 부끄러워하며 웃었다.“저 밥 해야 돼요.”구현수는 동작을 멈췄고 그윽한 눈동자에는 약간의 실망감이 스쳤다.“저녁에....”강서연은 낮고 가냘픈 목소리로 힘겹게 이 세 글자를 내뱉었고 순간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졌다.“저녁에 소파에서 자지 말고 방으로 와서 자요. 불편하잖아요.”구현수는 넋이 나갔다.이것은 아마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노골적인 말일 것이다...그는 웃음을 참으며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붉게 물든 귓불을 살짝 만지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그래.”저녁을 먹은 뒤 구현수는 바로 욕실로 향했다.평소 샤워는 10분밖에 안 걸리는데, 이번에는 거의 1시간째 욕실에 있었다.강서연은 과일을 깎고 TV도 잠깐 봤지만 그는 나오지 않았고 간간이 콸콸 흐르는 물소리만 들려왔다.강서연은 볼이 뜨거워졌고 방에 들어가 잠옷으로 갈아입고는 어쩔 바를 몰라 하며 침대 가장자리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그녀의 작은 두 손은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몰라 하며 긴장이 역력했다.이따 그는 그녀에게 어떻게 할까? 그는 키도 크고 덩치도 좋고 근육도 있으니 힘도 보통 사람보다 세겠지?강서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몰래 웃다가도 이런 생각들을 하는 자신이 너무 민망하고부끄러웠다.바로 그때 욕실의 물 흐르는 소리가 뚝 그쳤고 강서연은 순간 멈칫하였고 잠옷 한쪽을 꼭 움켜잡았다.구현수
그가 열여섯 살 때 이미 세계 3대 경영대학원 중에서도 탑인 와튼대학교의 파격적인 합격 통지서를 받았고 최씨 가문의 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후계자였다.만약 그 후에 그가 다른 사람의 계략에 당해 비행기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 이미 최씨 가문의 대권을 장악하고 있었을 것이다.강서연의 궁금해하는 눈빛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침묵으로 대응했다.강서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고 뇌리에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설마 열여섯 살 때 첫사랑을 만난 것은 아니겠지? 다들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고 하던데. 그런데 방금 열여섯 살 때 얘기를 하면서 엄청 흥분했는데 결국 제대로 얘기도 하지 않고. 이건 분명히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건데...’그러면 첫사랑 외에 더 좋은 해석은 없다.강서연은 눈가에 쓸쓸함이 스쳐 지나갔고 그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니 그녀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그러나 이 일로 그녀의 마음속에 작은 응어리가 하나 맺혔다.그녀는 묵묵히 침실로 돌아가 새 침대 시트로 바꾸고 또 이불 한 채를 꺼내 거실 소파에 폈다.구현수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순간 이상함을 감지하고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왜... 왜 또 이불을 소파에 펴?”강서연은 고개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문제라도 있어요?”“당연히 있지.”그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최대한 마음이 평온해 보이도록 노력했다.“오늘 저녁에 같이 침실에서 자기로 했잖아. 나랑... 원했잖아...”“제 동생이 지금 학교 폭력을 당해서 저 꼴이 되었는데 지금 그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강서연은 그를 노려보았다.그리고 아까 ‘첫사랑’ 때문에 화가 났던 타라 그녀의 태도는 더욱 좋지 않았다.“오늘 찬이는 분명히 집으로 가지 않을 텐데 누나로서 쟤를 챙겨주지 않으면 누가 챙겨주겠어요?”구현수는 속사정을 모르지만 그녀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는 것만 느꼈다... 좀 많이 빠르게 말이다.“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서 자? 그러면 이 이불은 찬이를 위해서 펴놓은 거야?”“저를 위해서
그날 밤 강서연도 거의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윤찬이 걱정되는 동시에 그 ‘첫사랑’ 때문에 시달렸고, 게다가 처음으로 소파에서 자다 보니 뒤척이며 아무리 자세를 잡아봐도 잠이 오지 않았다.동틀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는데 얼마 자지 못하고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눈을 떠 보니 구현수는 이미 옷을 갈아입고 외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윤찬도 책가방을 챙겨 구현수 뒤를 따랐다.“어디 가?”강서연은 놀라서 물었다.구현수의 옷차림은 괴이했다. 검은 옷에 모자까지 눌러썼고 손에 든 몽둥이는 그가 평소에 집에서 운동할 때 쓰는 것이다.그녀의 마음속에 갑자기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싸우러 가는 거예요?”구현수는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서연은 조급해 났다. 보아하니 정말 싸우러 가는 모양이다. 그들이 결혼한 후 그의 모든 싸움의 이유에는 그녀가 있었고, 그녀도 매번 그가 또 사고를 쳐서 감옥생활을 할까 봐 걱정이 되고 마음을 졸인다...이번에는 절대 무력을 쓰지 못하게 할 것이다.“이번 일은 신경 쓰지 마.”구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학폭 가해자들은 당해봐야 알아.”“꼭 무력으로만 해결해야 되는거예요?”“무슨 다른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차가웠고 확고했다.“만약 대화가 소용 있다면 이 세상은 훨씬 평화롭겠지. 걱정하지 마, 적절한 정도를 알아. 그리고 이번에 학폭 가해자들 앞에서 찬이의 위신을 세워줘야 다시는 찬이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찬이도 내 동생이야, 다른 사람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강서연은 마음이 따뜻해졌고 가볍게 그의 손을 잡고는 잠깐 침묵하더니 고개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우선 흥분하지 말고, 저한테 해결할 방법이 있어요.”“뭐?”그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무슨 방법?”강서연은 웃으며 휴대폰을 들고 그의 앞에서 흔들거렸다.“이런 일은 폭력으로 해결하면 안 돼요. 그렇게 하면 상황들은 반복만 될 테니 말이죠. 제
강서연은 옆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아주 침착한 모습으로 얘기했고 구현수는 이제야 그녀의 의도를 알게 되었다.그녀는 학교 폭력의 유력한 증거를 찍었고 이 몇 명의 고등학생들은 이미 16세가 넘어 법적으로 형사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이다. 이 증거를 경찰에 제출하고 소송을 제기하면 이 몇 명의 학생들은 평생 학폭 가해자라는 오점을 지니게 된다.강서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너희들이 괴롭힌 사람 윤찬 한 명뿐만 아니지?”그녀는 또박또박 말했다.“나 이미 신고했으니 경찰이 와서 모든 것을 밝혀낼 거야.”이 모든 건 강서연의 예상대로 흘러갔다.그 고등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되었고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심문을 진행 결과, 그들은 자신들의 학폭 사실을 자백하였고 죄명이 성립되어 곧 기분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강서연은 드디어 윤찬 대신 복수를 하였다.“형, 그 아내 분 정말 대단하네요.”유찬혁은 경찰서에 지인이 있어 이 일을 듣게 되었고 그는 그녀가 참 대단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일 처리할 때 형보다 많이 침착하고 법률 지식도 잘 알고 있고요. 확실히 똑똑한 해결 방법이에요.”구현수는 미소를 지었다.결혼 후 지금까지, 강서연은 항상 그에게 서프라이즈를 가져다준다. 그러나...이 일은 그한테 공로가 없다고 하여도 적어도 고생은 하지 않았는가? 마지막에 그 고등학생들을 때려눕힌 사람도 그인데, 강서연의 성격대로라면 분명히 그한테 고생했다며 풍성한 음식을 만들어 줄 것이다.그러나 그녀는 어떠한 표현도 없었고 오히려 요즘 그녀가 그에게 많이 차가웠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침실로 들어가서 자는 것에 대하여도 아무런 언급도 없다. 그는 몇 번이나 암시를 하였고 그토록 똑똑한 강서연은 분명히 그의 생각을 눈치챘을 텐데 그의 앞에서 모르는 척 연기를 하였고 각종 이유를 찾아서 이 일을 어물어물 넘겨버렸다.하여 그는 아직까지도 소파에서 자곤 한다...구현수는 한숨을 쉬었고 차가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깊은 생각에 잠긴 터라 손가락 사이에
강서연은 극심한 생리통으로 하루 휴가를 내고 출근하지 않았다.하지만 집에 누워있어도 조용히 쉬지도 못하고 아침부터 주방에서 이상한 한약 냄새가 풍겨왔다.강서연은 애써 일어나 주방에 가보니 구현수가 안에서 바삐 돌아치고 있었다.테이블 위에 그가 그녀를 위해 준비한 아침 식사가 놓여 있었다. 거의 타버린 구운 계란과 토스트, 그리고 오트밀이 거의 없는 시리얼 한 그릇.부엌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이 남자한테 참 어려웠을 것이다.강서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주방 문에 기댄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할 줄 모르잖아요. 그냥 제가 할게요.”구현수는 멈칫하고 몸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깼어? 계속 아파? 아침 먹고 가서 누워있어. 내가 할게.”“뭐 하고 있어요?”“음... 뭐 좀 끓여주려고.”구현수는 허둥지둥하였다.“빨리 가서 쉬고 있어. 이거 다 되면 내가 가지고 갈게.”강서연은 입술을 오므렸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 뇌리에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혹시 예전에 그 첫사랑에게도 이렇게 잘해줬나?열여섯 살은 한창 혈기 왕성할 나이이니 분명 열정적이었을 것이다...이 생각에 강서연의 입가의 미소는 금세 사라졌고 온갖 잡생각이 들었고 게다가 오래 서 있으니 배가 아파 그녀의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하필 이때 구현수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강서연은 그를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고 심지어 문까지 닫아버렸다.구현수는 종잡을 수 없었다. 생리가 오면 여자들은 모두 이렇게 표정이 순식간에 변하나? 방금까지 그를 보고 웃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말 쉽지 않다!배경원은 제인 호텔 일로 그에게 문자를 보내왔다. 그는 가스를 끄고 강서연한테 얘기하려는 순간 문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문밖에는 임우정이 서 있었다. 그녀는 강서연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외근을 나왔던 참에 그녀를 보러 왔던 것이다.“혹시... 구현수 씨세요?”문을 열자 그녀는 멈칫하였다.오늘 그녀는 처음으로 구현수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우정 언니, 왜 그래요?”강서연은 임우정이 주방에서 한참을 넋 놓고 움직이지 않자 그녀가 데었을까 걱정되어 황급히 일어나 다가가 보았다.그런데 임우정이 탕약과 약 찌꺼기를 보면서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이건...”강서연은 당황했다. 아침 일찍 맡았던 냄새의 근원지가 바로 이것이었다.임우정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의미심장하게 강서연을 바라봤다.“내가 얘기해도 놀라지 마.”“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이건 다 한약재들이야.”임우정은 임의로 몇 가지를 집으며 설명했다.“이건 오수유, 이건 옥죽, 이건 녹각교, 아교, 구판교... 남은 건 흔한 것들이야. 너도 다 알 거야. 구기자, 오디, 백합, 아스파라거스.”강서연은 영문을 알지 못하고 의아한 눈길로 보았다.“이것들이 뭐에 쓰이는 것들인데요? 현수 씨는 왜 이런 약을 달여 저한테 먹이는 거예요?”“이건 여자 기력에 좋은 것들이야!”임우정은 깔깔 웃었다.“네가 아직 안 먹어서 다행이지, 한 그릇 마시면 오늘 밤 호랑이나 늑대가 되어버렸을 거야. 구현수도 네 상대가 되지 않았을걸!”강서연은 흠칫했다. 그녀의 작은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에요?”임우정은 강서연에게 어깨동무했다.“너 생리 때문에 구현수랑 잘 수 없을 텐데, 구현수는 네가 밤에 화끈하게 불타오르길 바라나 봐.”“우정 언니!”강서연은 임우정을 흘겨봤다. 더는 얘기하지 말라는 눈치였다.“알겠어, 알겠어. 장난치지 않을게.”임우정은 그녀를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구현수가 어떤 뜻이었는지는 몰라도 이 약은 마실 수 없었다.임우정은 흑설탕을 탄 물을 건네줬다.“아, 참. 너한테 진지하게 할 얘기가 있어.”강서연은 흠칫했다. 임우정이 미소를 거두어들이고 엄숙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조금 긴장됐다.“뭔데요?”“오전에 손지창 씨 사무실을 지나가다가 손지창 씨가 성소원과 얘기를 나누는 걸 봤는데... 네 얘기가 나온 것 같았어.”강서연의 안색이 달라졌다.손지창은 성소원의 삼
임우정의 안색이 달라졌다. 강서연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 또한 사뭇 달라졌다.임우정은 거기까지 생각지 못했다.입장 바꿔 생각한다면 그녀는 분명 자신의 사심을 더 중요시할 것이다.어찌 됐든 그녀는 성자가 아니기 때문이다.“지금 보니 나는 인성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판단이 부족한 것 같아.”임우정은 웃으며 말했다.“서연아, 너 평소에는 말수가 적더니 입만 열면 일리 있는 말을 하네!”“제 판단도 꼭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어요.”강서연은 싱긋 웃었다.“그런데 구현수 씨가 그러더라고요. 사람을 경계하는 마음은 꼭 필요하다고. 그리고 저더러 매사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했어요.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그곳까지 올라가는 과정이 굉장히 힘들다고. 그냥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고 말이에요.”“어머, 네 남편이 네 인생 멘토가 된 거야?”임우정은 우스갯소리를 한 것뿐인데 강서연은 정말로 남편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그건 당연하죠. 우리 현수 씨는 아는 게 엄청 많다고요!”강서연은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우정 어니, 그거 알아요? 제가 보니까 현수 씨가 자주 해외 사이트를 보더라고요. 여러 나라의 언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게다가 시사와 경제에도 관심이 많더라고요!”“뭐라고?”임우정은 뜻밖이라고 생각했다.구현수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온몸에서 카리스마와 강한 아우라를 뿜어댔다. 그가 싸웠던 적도 있고 감방살이를 한 적도 있다는 걸 몰랐다면 임우정은 그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서연아, 넌 네 남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강서연은 당황했다.“그건 왜 물어요?”임우정은 입꼬리를 당겼다.“그냥 물어보는 거지! 네가 엄청나다는 듯 얘기하니까 조금 궁금해졌거든!”강서연은 단순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자신이 구현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휘황찬란한 역사와 가족이 없다는 점 외에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다음 날, 강서연은 출근하자마자 손지창의 사무실로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