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열여섯 살 때 이미 세계 3대 경영대학원 중에서도 탑인 와튼대학교의 파격적인 합격 통지서를 받았고 최씨 가문의 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후계자였다.만약 그 후에 그가 다른 사람의 계략에 당해 비행기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 이미 최씨 가문의 대권을 장악하고 있었을 것이다.강서연의 궁금해하는 눈빛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침묵으로 대응했다.강서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고 뇌리에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설마 열여섯 살 때 첫사랑을 만난 것은 아니겠지? 다들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고 하던데. 그런데 방금 열여섯 살 때 얘기를 하면서 엄청 흥분했는데 결국 제대로 얘기도 하지 않고. 이건 분명히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건데...’그러면 첫사랑 외에 더 좋은 해석은 없다.강서연은 눈가에 쓸쓸함이 스쳐 지나갔고 그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니 그녀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그러나 이 일로 그녀의 마음속에 작은 응어리가 하나 맺혔다.그녀는 묵묵히 침실로 돌아가 새 침대 시트로 바꾸고 또 이불 한 채를 꺼내 거실 소파에 폈다.구현수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순간 이상함을 감지하고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왜... 왜 또 이불을 소파에 펴?”강서연은 고개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문제라도 있어요?”“당연히 있지.”그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최대한 마음이 평온해 보이도록 노력했다.“오늘 저녁에 같이 침실에서 자기로 했잖아. 나랑... 원했잖아...”“제 동생이 지금 학교 폭력을 당해서 저 꼴이 되었는데 지금 그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강서연은 그를 노려보았다.그리고 아까 ‘첫사랑’ 때문에 화가 났던 타라 그녀의 태도는 더욱 좋지 않았다.“오늘 찬이는 분명히 집으로 가지 않을 텐데 누나로서 쟤를 챙겨주지 않으면 누가 챙겨주겠어요?”구현수는 속사정을 모르지만 그녀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는 것만 느꼈다... 좀 많이 빠르게 말이다.“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서 자? 그러면 이 이불은 찬이를 위해서 펴놓은 거야?”“저를 위해서
그날 밤 강서연도 거의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윤찬이 걱정되는 동시에 그 ‘첫사랑’ 때문에 시달렸고, 게다가 처음으로 소파에서 자다 보니 뒤척이며 아무리 자세를 잡아봐도 잠이 오지 않았다.동틀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는데 얼마 자지 못하고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눈을 떠 보니 구현수는 이미 옷을 갈아입고 외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윤찬도 책가방을 챙겨 구현수 뒤를 따랐다.“어디 가?”강서연은 놀라서 물었다.구현수의 옷차림은 괴이했다. 검은 옷에 모자까지 눌러썼고 손에 든 몽둥이는 그가 평소에 집에서 운동할 때 쓰는 것이다.그녀의 마음속에 갑자기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싸우러 가는 거예요?”구현수는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서연은 조급해 났다. 보아하니 정말 싸우러 가는 모양이다. 그들이 결혼한 후 그의 모든 싸움의 이유에는 그녀가 있었고, 그녀도 매번 그가 또 사고를 쳐서 감옥생활을 할까 봐 걱정이 되고 마음을 졸인다...이번에는 절대 무력을 쓰지 못하게 할 것이다.“이번 일은 신경 쓰지 마.”구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학폭 가해자들은 당해봐야 알아.”“꼭 무력으로만 해결해야 되는거예요?”“무슨 다른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차가웠고 확고했다.“만약 대화가 소용 있다면 이 세상은 훨씬 평화롭겠지. 걱정하지 마, 적절한 정도를 알아. 그리고 이번에 학폭 가해자들 앞에서 찬이의 위신을 세워줘야 다시는 찬이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찬이도 내 동생이야, 다른 사람한테 괴롭힘당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강서연은 마음이 따뜻해졌고 가볍게 그의 손을 잡고는 잠깐 침묵하더니 고개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우선 흥분하지 말고, 저한테 해결할 방법이 있어요.”“뭐?”그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무슨 방법?”강서연은 웃으며 휴대폰을 들고 그의 앞에서 흔들거렸다.“이런 일은 폭력으로 해결하면 안 돼요. 그렇게 하면 상황들은 반복만 될 테니 말이죠. 제
강서연은 옆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아주 침착한 모습으로 얘기했고 구현수는 이제야 그녀의 의도를 알게 되었다.그녀는 학교 폭력의 유력한 증거를 찍었고 이 몇 명의 고등학생들은 이미 16세가 넘어 법적으로 형사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이다. 이 증거를 경찰에 제출하고 소송을 제기하면 이 몇 명의 학생들은 평생 학폭 가해자라는 오점을 지니게 된다.강서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너희들이 괴롭힌 사람 윤찬 한 명뿐만 아니지?”그녀는 또박또박 말했다.“나 이미 신고했으니 경찰이 와서 모든 것을 밝혀낼 거야.”이 모든 건 강서연의 예상대로 흘러갔다.그 고등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되었고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심문을 진행 결과, 그들은 자신들의 학폭 사실을 자백하였고 죄명이 성립되어 곧 기분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강서연은 드디어 윤찬 대신 복수를 하였다.“형, 그 아내 분 정말 대단하네요.”유찬혁은 경찰서에 지인이 있어 이 일을 듣게 되었고 그는 그녀가 참 대단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일 처리할 때 형보다 많이 침착하고 법률 지식도 잘 알고 있고요. 확실히 똑똑한 해결 방법이에요.”구현수는 미소를 지었다.결혼 후 지금까지, 강서연은 항상 그에게 서프라이즈를 가져다준다. 그러나...이 일은 그한테 공로가 없다고 하여도 적어도 고생은 하지 않았는가? 마지막에 그 고등학생들을 때려눕힌 사람도 그인데, 강서연의 성격대로라면 분명히 그한테 고생했다며 풍성한 음식을 만들어 줄 것이다.그러나 그녀는 어떠한 표현도 없었고 오히려 요즘 그녀가 그에게 많이 차가웠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침실로 들어가서 자는 것에 대하여도 아무런 언급도 없다. 그는 몇 번이나 암시를 하였고 그토록 똑똑한 강서연은 분명히 그의 생각을 눈치챘을 텐데 그의 앞에서 모르는 척 연기를 하였고 각종 이유를 찾아서 이 일을 어물어물 넘겨버렸다.하여 그는 아직까지도 소파에서 자곤 한다...구현수는 한숨을 쉬었고 차가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깊은 생각에 잠긴 터라 손가락 사이에
강서연은 극심한 생리통으로 하루 휴가를 내고 출근하지 않았다.하지만 집에 누워있어도 조용히 쉬지도 못하고 아침부터 주방에서 이상한 한약 냄새가 풍겨왔다.강서연은 애써 일어나 주방에 가보니 구현수가 안에서 바삐 돌아치고 있었다.테이블 위에 그가 그녀를 위해 준비한 아침 식사가 놓여 있었다. 거의 타버린 구운 계란과 토스트, 그리고 오트밀이 거의 없는 시리얼 한 그릇.부엌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이 남자한테 참 어려웠을 것이다.강서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주방 문에 기댄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할 줄 모르잖아요. 그냥 제가 할게요.”구현수는 멈칫하고 몸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깼어? 계속 아파? 아침 먹고 가서 누워있어. 내가 할게.”“뭐 하고 있어요?”“음... 뭐 좀 끓여주려고.”구현수는 허둥지둥하였다.“빨리 가서 쉬고 있어. 이거 다 되면 내가 가지고 갈게.”강서연은 입술을 오므렸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 뇌리에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혹시 예전에 그 첫사랑에게도 이렇게 잘해줬나?열여섯 살은 한창 혈기 왕성할 나이이니 분명 열정적이었을 것이다...이 생각에 강서연의 입가의 미소는 금세 사라졌고 온갖 잡생각이 들었고 게다가 오래 서 있으니 배가 아파 그녀의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하필 이때 구현수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강서연은 그를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고 심지어 문까지 닫아버렸다.구현수는 종잡을 수 없었다. 생리가 오면 여자들은 모두 이렇게 표정이 순식간에 변하나? 방금까지 그를 보고 웃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말 쉽지 않다!배경원은 제인 호텔 일로 그에게 문자를 보내왔다. 그는 가스를 끄고 강서연한테 얘기하려는 순간 문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문밖에는 임우정이 서 있었다. 그녀는 강서연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외근을 나왔던 참에 그녀를 보러 왔던 것이다.“혹시... 구현수 씨세요?”문을 열자 그녀는 멈칫하였다.오늘 그녀는 처음으로 구현수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우정 언니, 왜 그래요?”강서연은 임우정이 주방에서 한참을 넋 놓고 움직이지 않자 그녀가 데었을까 걱정되어 황급히 일어나 다가가 보았다.그런데 임우정이 탕약과 약 찌꺼기를 보면서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이건...”강서연은 당황했다. 아침 일찍 맡았던 냄새의 근원지가 바로 이것이었다.임우정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의미심장하게 강서연을 바라봤다.“내가 얘기해도 놀라지 마.”“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이건 다 한약재들이야.”임우정은 임의로 몇 가지를 집으며 설명했다.“이건 오수유, 이건 옥죽, 이건 녹각교, 아교, 구판교... 남은 건 흔한 것들이야. 너도 다 알 거야. 구기자, 오디, 백합, 아스파라거스.”강서연은 영문을 알지 못하고 의아한 눈길로 보았다.“이것들이 뭐에 쓰이는 것들인데요? 현수 씨는 왜 이런 약을 달여 저한테 먹이는 거예요?”“이건 여자 기력에 좋은 것들이야!”임우정은 깔깔 웃었다.“네가 아직 안 먹어서 다행이지, 한 그릇 마시면 오늘 밤 호랑이나 늑대가 되어버렸을 거야. 구현수도 네 상대가 되지 않았을걸!”강서연은 흠칫했다. 그녀의 작은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에요?”임우정은 강서연에게 어깨동무했다.“너 생리 때문에 구현수랑 잘 수 없을 텐데, 구현수는 네가 밤에 화끈하게 불타오르길 바라나 봐.”“우정 언니!”강서연은 임우정을 흘겨봤다. 더는 얘기하지 말라는 눈치였다.“알겠어, 알겠어. 장난치지 않을게.”임우정은 그녀를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구현수가 어떤 뜻이었는지는 몰라도 이 약은 마실 수 없었다.임우정은 흑설탕을 탄 물을 건네줬다.“아, 참. 너한테 진지하게 할 얘기가 있어.”강서연은 흠칫했다. 임우정이 미소를 거두어들이고 엄숙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조금 긴장됐다.“뭔데요?”“오전에 손지창 씨 사무실을 지나가다가 손지창 씨가 성소원과 얘기를 나누는 걸 봤는데... 네 얘기가 나온 것 같았어.”강서연의 안색이 달라졌다.손지창은 성소원의 삼
임우정의 안색이 달라졌다. 강서연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 또한 사뭇 달라졌다.임우정은 거기까지 생각지 못했다.입장 바꿔 생각한다면 그녀는 분명 자신의 사심을 더 중요시할 것이다.어찌 됐든 그녀는 성자가 아니기 때문이다.“지금 보니 나는 인성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판단이 부족한 것 같아.”임우정은 웃으며 말했다.“서연아, 너 평소에는 말수가 적더니 입만 열면 일리 있는 말을 하네!”“제 판단도 꼭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어요.”강서연은 싱긋 웃었다.“그런데 구현수 씨가 그러더라고요. 사람을 경계하는 마음은 꼭 필요하다고. 그리고 저더러 매사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했어요.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그곳까지 올라가는 과정이 굉장히 힘들다고. 그냥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고 말이에요.”“어머, 네 남편이 네 인생 멘토가 된 거야?”임우정은 우스갯소리를 한 것뿐인데 강서연은 정말로 남편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그건 당연하죠. 우리 현수 씨는 아는 게 엄청 많다고요!”강서연은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우정 어니, 그거 알아요? 제가 보니까 현수 씨가 자주 해외 사이트를 보더라고요. 여러 나라의 언어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게다가 시사와 경제에도 관심이 많더라고요!”“뭐라고?”임우정은 뜻밖이라고 생각했다.구현수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온몸에서 카리스마와 강한 아우라를 뿜어댔다. 그가 싸웠던 적도 있고 감방살이를 한 적도 있다는 걸 몰랐다면 임우정은 그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서연아, 넌 네 남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강서연은 당황했다.“그건 왜 물어요?”임우정은 입꼬리를 당겼다.“그냥 물어보는 거지! 네가 엄청나다는 듯 얘기하니까 조금 궁금해졌거든!”강서연은 단순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자신이 구현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휘황찬란한 역사와 가족이 없다는 점 외에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다음 날, 강서연은 출근하자마자 손지창의 사무실로
강서연은 당황했다. 방진영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조롱하듯 웃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적개심과 경멸이 가득했다.“하, 후배님 이제 실력 좀 있나 보네. 내 자리까지 넘봐?”강서연은 그와 괜히 말싸움하고 싶지 않아 몸을 비틀어 그를 지나쳐 갔는데 등 뒤에서 방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지창 그 늙은 여우가 진심으로 널 밀어주려는 것 같아? 그 사람은 널 이용하는 것뿐이야!”강서연은 돌아서서 방진영을 바라봤다.방진영은 짜증 난 얼굴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더니 분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천천히 강서연의 곁으로 걸어갔다. 강서연은 그에게서 나는 매캐한 담배 냄새에 구역질이 났다.“강서연 후배, 내 자리가 그렇게 좋으면 내가 양보해 줄게. 이런 수단으로 날 상대할 필요는 없지 않아?”“전 단 한 번도 방진영 씨 자리를 넘본 적이 없습니다.”강서연은 차갑게 그를 바라봤다.“손지창 대표님이 절 불러서 말씀을...”“유능한 자는 바쁘다고 했어?”방진영은 코웃음을 쳤다.“그 늙은 여우는 예전에 내게도 그런 말을 하면서 날 이용했었어!”강서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몸을 살짝 뒤로 기울이며 일부러 그와 거리를 벌렸다.“오성은 수년 동안 성공하지 못한 어려운 임무야. 회장님도 별수 없으신데 네가 어떻게 그걸 성공시킬 수 있겠어?”“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시도해 봐야 알겠죠.”강서연은 또박또박 말한 뒤 맑은 눈으로 말했다.“회사는 나이로 서열을 정하는 곳이 아니에요. 선배님, 제가 선배님 자리를 빼앗는 게 그렇게 두려우시면 정정당당하게 저랑 경쟁하시죠!”방진영은 크게 웃었다.“강서연, 너무 멍청해서 귀엽네! 그래. 그 힘든 임무를 기어코 할 생각이라면 내가 그동안 얻은 교훈을 얘기해줄게! 오성에는 4대 가문이 있어. 그중 하나만 얻어걸려도 넌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거야!”방진영은 음흉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4대 가문 중에서 첫째가는 최씨 가문은 꿈도 꾸지 마. 배씨 가문은 한 번 시도해 보든지! 배씨 가문 도련님은 바람둥이
그러나 이번에 유찬혁은 그를 도와줄 수 없었다.“설마.. 저번에 네가 알려줬던 그 비법에 문제가 있었던 거 아닐까?”배경원은 이마를 ‘탁’ 쳤다.“설마 형수님이 늑대가 되지 않은 걸까?”유찬혁은 쓴웃음을 지었다.“어쩌면 효과가 너무 강해서 형이 내분비 장애를 겪은 거 아닐까?”배경원은 하마터면 그의 얼굴에 술을 뿜을 뻔했다....구현수는 베란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시선을 든 그는 강서연의 놀란 듯한 눈빛과 마주했다.“왜 그래?”구현수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조금 전에 통화했어요?”“어. 예전에... 감방 동기.”구현수는 덤덤히 말했다.“출소한 뒤에 나한테 돈 빌려달라고 연락한 거야. 그래서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어.”“그래요.”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현수 씨가 고함을 질렀군요. 현수 씨 목청에 건물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래도 잘했어요. 앞으로 그런 사람들이랑은 최대한 연락하지 마요. 현수 씨도 이젠 결혼한 사람이고 앞으로 우리는 평온한 삶을 보내야 하니까요.”구현수는 살짝 감동했다.그러나 강서연은 그 말을 할 때 여전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모니터에 배경원의 사진이 떠 있을 거라는 생각에 구현수는 기분이 불쾌해졌다.강서연은 한동안 보다가 눈을 비볐다. 배가 또 아프기 시작한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진통제를 찾았다. 그런데 그때 구현수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노트북을 닫아버렸다.강서연은 움찔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현수를 바라봤다.“뭐 하는 거예요? 나 자료 봐야 한다고요!”구현수의 표정이 가라앉았다.“뭐 볼 게 있다고!”“그... 고객님이라서 먼저 그의 생활 습관과 취미를 알아야 해요. 그리고...”강서연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구현수는 그녀의 베개와 이불을 안고 침실로 향했다. 그는 깔끔한 동작으로 침대 반대편에 이불을 펼쳐놓았다.강서연은 심장이 덜컥댔다.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려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구현수는 굳은 얼굴로 퉁명스레 말했다.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
“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정대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결국엔 자기 아들이었기에 정승우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때리고 꾸짖어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대명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는 권온유의 양 갈래머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막아서려는 순간, 자신과 정대명 사이에 힘의 격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작정 나섰다가는 역부족일 터였다.정승우는 이를 악물고 정대명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 정말 이 아이를 팔 생각이에요?”“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영미라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거야!”정대명은 불만스레 대꾸하며 정승우에게 옷장에 있는 헌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정승우가 옷을 가져오자, 정대명은 손을 뻗어 권온유의 예쁜 드레스를 찢으려 했다. 정승우는 급히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이 자식이!”정대명은 정승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조용히 해! 죽고 싶어?”“아빠, 이건...”“이 애한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거야!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잖아.”정승우는 다가가 정대명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제가 갈아입힐게요!”“이놈이...”정대명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정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하, 아빠를 도와주고 싶구나? 역시 아들은 아들밖에 없지! 그래, 네가 손이 빠르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혀. 둘이 함께 가자고!”정승우는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승우는 권온유의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 정대명의 헌 옷을 위에 입혀 단단히 감쌌다. 그런 다음 모자를 씌워 얼핏 보면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정대명은 정승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뒷문에 승합차가 준비돼 있대. 어서 출발하자!”“아빠, 이 소녀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교외지!”정대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빨리 움직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
“엄마, 우리 오늘도 여기서 밥 먹어요?”“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고등어조림 요리잖아.”“그런데...”권온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켰다. 사실 권온유는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어린 권온유도 느낄 만큼 엄마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방금 대답조차 어딘가 건성으로 들렸다.권온유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걸까? 누군가 아빠와 다른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내기만 하면, 엄마는 이렇게 변해버렸다.“엄마...”권온유는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나 조순영은 갑자기 권온유의 손을 놓고는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권온유는 깜짝 놀라 인형을 떨어뜨렸다.“엄마!”“온유야,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조순영은 급히 돌아보며 외쳤다.“엄마 금방 올게!”권온유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엄마는 아빠가 다른 여자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통제력을 잃고 온유를 혼자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고 한참 후에야 멍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정대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이 모녀를 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는 자주 아이와 함께 식사하러 왔는데 가끔 혼자 올 때도 있었다...남편의 외도를 잡으려는 걸까?맞아, 틀림없이 그런 거다!정대명은 매일 호텔에 살면서 듣는 소문도 적지 않았다. 한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있음에도 바람이 잦았다고 하는데 그 회장은 차기 시장의 사위가 될 인물이라는 말도 있었다.정대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이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남자가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정대명은 다시 어린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
정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얼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며칠을 기다린 결과가 고작 최가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럼에도 영미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정대명 씨,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훔쳐 오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젠장! 정대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보석을 훔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하... 영미 아가씨.”마음속으로는 욕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이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 경호원들이 전부 총을 들고 있더라고요. 제가 무턱대고 나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정말 쓸모없네요.”영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사람들까지 매수해 놨는데,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정대명은 억눌린 분노를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말해 두겠는데요!”영미는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이 일 못 해내면,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도 더 이상 못 쓰게 될 테고 돈 한 푼도 못 받는 줄 아세요! 다시 그 작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서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세요!”정대명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호사에 길든 사람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정대명은 오성에서 살아가며 화려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이 잘 먹고 살게 도와줬고 돈까지도 넉넉히 주니 점점 체면이 생기기 시작했다.호텔에서 정대명이 매일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했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이런 삶은 초라했던 지난날에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정대명은 급히 전화기를 붙잡고 외쳤다.“영미 아가씨, 너무 흥분하지 마!”영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정대명은 어영부영 답했다.“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내가
백인서는 웃으며 정승우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정승우는 전혀 망설임 없이 백인서의 그릇에 고기가 많은 걸 보자마자 젓가락을 뻗었다.“너 지금 내 소고기를 뺏어 먹는 거야?”“사장님이 누나만 편애하는 거 아니에요? 고기를 이렇게나 많이 주다니!”“안 돼, 내 거야. 뺏어 먹지 마.”백인서는 웃으며 말했다.“이건 사장님이 특별히 주신 사랑의 소고기야!”“저는 성장기 남자애라 많이 먹어야 해요!”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면을 거의 다 비워가고 있었다. 백인서가 정승우에게 국수를 한 그릇 더 가져다주려고 일어서려는 순간, 달콤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고모!”백인서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예쁘고 앙증맞은 작은 공주가 백인서에게 달려왔다.“온유야?”권온유는 백인서에게 달라붙어 작은 머리로 백인서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정승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정승우는 이렇게 예쁜 여자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두 갈래로 묶은 머리에 공주 같은 퍼프 드레스를 입고, 마치 아까 놀이공원에서 본 백설 공주처럼 보였다.이 아이는 정말 동화 속에서 나온 공주일까?작은 소녀는 고개를 기울여 정승우를 한 번 바라보더니 달콤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백인서를 보며 물었다.“고모, 이 사람은 누구예요?”“이 사람은...”백인서가 대답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권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오빠는 학교에서 우등생이야. 공부도 엄청 열심히 하거든. 온유도 나중에 커서 이 오빠처럼 열심히 공부해야 해.”백인서는 권욱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여긴 어떻게 오셨어요?”“왜? 딸과 단둘이 외식하러 나오는 게 이상해?”“아니요.”백인서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권욱 씨가 이런 작은 가게에서 식사하실 줄은 몰랐어요...”“여기도 꽤 유명한 맛집이야!”권욱은 의자에 앉으며 사장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오늘 주말이라 온유를 데리고 나왔는데, 이 녀석이 배고프다고 해서 핸드폰으로 근처 맛집을 검색해 보니 이곳 평이 좋더라고.
정승우의 머릿속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그 시절, 백인서는 낮에는 그를 등에 업고 다녔고 밤에는 재워주며 보살폈다. 따뜻함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그의 삶에서 백인서는 유일하게 빛을 밝혀 준 존재였다.누가 세 살, 네 살 아이에게 기억이 없다고 했던가? 그 기억은 정승우의 성장 내내 곁을 지켜 주었고 다시 누나를 찾을 수 있도록 지탱해 주었다.“누나, 제발... 울지 마세요. 백 선생님!”백인서는 깜짝 놀라 정승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인서는 정승우의 미소에 눈물을 멈췄다.두 사람은 작은 음식점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우연히도, 이곳은 예전에 최지용이 백인서를 데리고 와 소고기 국수를 먹던 곳이었다.이번에도 그 가게 주인이 반갑게 맞이하며 다가왔다.“오, 이게 누구야! 귀한 손님이 오셨네!”그의 시선이 정승우에게로 멈췄다.“이 아이는?”“동생이에요!”정승우가 먼저 씩씩하게 대답했다.백인서는 미소를 지으며 주인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주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한번 보고는 주방으로 돌아가 푸짐하게 고기가 올라간 소고기 국수를 내왔다.“얼른 먹어!”백인서는 젓가락을 건네며 말했다.“여긴 정직하게 장사하는 곳이라 양도 푸짐하고 맛도 아주 좋아. 지용 씨가 나를 데리고 왔던 곳인데...”최지용을 언급하자 백인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정승우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백인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그 남자, 누나한테 잘해 줘요?”백인서는 모르는 척하며 대답했다.“무슨 남자?”“그러니까, 방금 말한 그 지용이란 사람 말이에요!”정승우는 더욱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숨기지 않아도 돼요. 산에 있을 때, 두 사람이 포옹하는 것도 봤고 그 사람이 누나한테 키스하는 것도 다 봤어요!”“정승우!”백인서는 정승우를 노려보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쏠렸다.“그만해!”백인서는 테이블 아래로 정승우의 다리를 가볍게 툭 차며 말했다.“애가 무슨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저
어느 일요일, 정승우는 돈을 꼭 쥔 채 백인서를 찾아갔다.처음에는 백인서에게 밥을 사주고 싶었지만, 지금의 백인서는 예전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맛있는 건 이미 다 먹어봤을 테니, 한 끼 식사가 백인서에게 그다지 특별할 리 없었다.그럼에도 정승우는 이 돈으로 어떻게든 백인서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결국 정승우는 백인서에게 이렇게 제안했다.“백 선생님, 우리 놀이공원 가요! 제가 살게요.”백인서는 원래 거절하려 했지만, 정승우의 간절한 부탁에 결국 놀이공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사실, 백인서도 놀이공원은 처음이었다.오랜 시간 오성에서 살았지만, 이런 곳에 대해선 왠지 모를 거부감이 있었다. 여긴 웃음과 즐거움이 넘쳐흐르는 곳이었고 왠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상처럼 느껴졌다.늘 자신에겐 잿빛 하늘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왔으니까.최지용을 만난 후에도 이곳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커플들이 관람차를 타면 결국 헤어진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백인서는 최지용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기에 그 소문이 괜히 두려워 오지 않았던 것이다.“백 선생님, 무슨 생각 해요?”맑고 발랄한 목소리가 백인서를 현실로 끌어당겼다.백인서는 정승우의 미소 가득한 눈을 내려다보았다.“제가 이미 자유 이용권을 사뒀어요.”정승우는 백인서에게 자유 이용권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자유 이용권이 뭔지 아세요? 그거 있잖아요, 놀이공원의 모든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 통행증 같은 거요! 따로 사는 것보다 훨씬 저렴해요!”“생각보다 똑똑하네.”백인서는 미소를 지었다.“적응력도 빠르고.”“똑똑하지 않으면 선생님을 즐겁게 해드릴 수 없잖아요!”“그래, 오늘은 네 말에 따를게.”백인서는 정승우를 바라보며 물었다.“먼저 어떤 걸 타볼까?”남자애들은 자극적인 놀이기구를 특히 좋아하곤 했다. 정승우는 백인서를 데리고 롤러코스터, 자이로드롭, 급류타기 같은 놀이기구들을 함께 탔다.하지만 백인서는 오히려 회전목마를 타고 싶었다.두 사람은 떠들썩한 놀이공원에서 땀을
정승우는 정대명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정대명은 문을 열어 정승우를 들여보냈다. 정승우는 방 안을 둘러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이 방은 마치 금으로 뒤덮인 듯 반짝이고 있었다.정대명이 이런 곳에서 살고 있다니.정승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저런 인간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곳에 살고 있는 건가 생각했다.“여긴 왜 온 거야?”정대명은 거칠게 정승우의 등을 밀며 물었다.“지금 학교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정승우는 정대명을 돌아보며 무심하게 말했다.“그냥 좀 보고 싶어서요. 그래서 왔죠.”“네가 날 보러 왔다고?”정대명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소리를 들은 듯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이 개자식이 언제부터 제 아비를 생각했다고! 흥!”정승우는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제정신이라면 주먹만 휘두르는 아버지를 그리워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좋아요, 그러면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아버지 술 마실 시간 뺏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정승우는 정대명의 손에 들린 술병을 힐끔 보고, 시선을 그의 바지 주머니로 옮기며 눈에 장난기가 어렸다.“저, 다 봤어요!”“뭐?”“그 여자가 아버지에게 돈을 준 거요.”정대명은 당황하며 정승우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정승우는 재빠르게 옆으로 비껴가며 비웃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저, 다 봤고, 다 들었어요! 두 분은 아무도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셨나 봐요?”“이 자식아, 헛소리하지 마!”정대명은 부끄러움과 분노에 휩싸였다. 또 영미의 경고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이 일이 절대 밖으로 새 나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다급해졌다.“헛소리 아니에요.”정승우는 이례적으로 침착한 표정이었다.“아버지는 그 여자랑 손잡고 우리 누나를 모함하려는 거잖아요!”“이 자식이!”“아버지, 제 입을 막고 싶으시죠?”“뭐?”정대명은 얼떨떨해졌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이 일은 비밀로 해 드릴게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정승우는 천천히 말했다.“단, 입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