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현수는 눈빛이 돌변하며 강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 그의 차가운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지만 그윽한 눈빛에서는 복잡한 감정이 일렁이고 있는 듯했다.강서연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요즘 고객을 만나고 고객의 정보를 연구하는 것 때문에 혹시나 이상한 오해를 하는 건 아니겠지...’“현수 씨, 난, 난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요!”강서연은 다급히 변명했다.“난 절대 우리 혼인을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 내 말뜻은...”강서연은 뜸을 들이다가 입술을 핥더니 아주 나직하게 말했다.“언젠가 당신이 내게 이렇게 잘해줄 가치가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면 어떡할래요?”구현수는 강서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다정하게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안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강서연의 작은 얼굴이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닿았고, 강서연은 그의 힘찬 심장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그 심장박동 소리가 그녀에게 무한한 안정감을 주었다.“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구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만 자.”강서연은 웃으면서 작은 손으로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녀는 그날 밤 푹 잤다.구현수는 홀로 잠드는 것이 익숙해 거의 자지 못했다. 그는 강서연에게 팔베개를 해주었고 또 강수연이 끌어안고 자는 쿠션이 되어 쉽게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새벽이 되어 비몽사몽 깨어난 구현수는 강서연이 문어처럼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걸 발견했다. 하얗고 긴 다리는 그의 허리춤에 걸쳐져 있었고 두 손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으며 이까지 갈고 있었다.잠버릇이 좋지는 않았지만 귀엽고 진실했다.구현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혹시라도 강서연이 잠에서 깰까 봐 부드럽게 그녀를 다른 쪽으로 옮겨놓은 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아침을 만들러 갔다.강수연은 잠에서 깼을 때 옆에 사람이 없는 걸 보고 심장이 철렁해 맨발로 뛰쳐나갔다.“깨어났어?”구현수는 앞치마를 하고 주방에서 나왔다.“잠을 너무 푹 자길래 안 깨웠어. 가서
구현수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옆에 있는 방한서는 그에게 눈짓하더니 멀지 않은 곳을 가리켰다.그는 차창 너머로 작은 여인이 거리 한가운데서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옆에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뒤에 있는 오성의 랜드마크가 바로 최상 그룹의 본사이다.강서연은 전화를 귀가에 갖다 대고 조용히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가볍게 숨을 내쉬더니 살짝 웃으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예전에... 오성에서 사고를 쳐서 한동안 거기서 지냈었어.”강서연은 잠시 말을 멈추고 바로 화제를 돌렸다.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방한서는 전화기 너머로 무슨 말이 오가는지 몰랐다. 어르신이 아주 기뻐하면서 웃었다.그는 한 번도 어르신의 이렇게 부드러운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전화를 끊고 강서연과 동료가 멀리 떠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방한서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어르신, 방금 강서연 아가씨랑 말씀하셨던 그 장소들을 미리 치워둘까요?”“그럴 필요 없어. 편하게 놀게 놔둬.”구현수는 다시 평소의 냉정함을 되찾았다.“며칠 동안 사람 더 보내서 잘 보호해. 꼭 숨어서 몰래 하도록 해. 그 애의 눈에 보이지 않게.”“네, 알겠습니다.”“그리고 또...”그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내가 직접 나서지 않는 한, 최씨 가문의 그 누구도 그녀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최상 빌라는 오성 남부의 명황산 위에 자리 잡고 있다.빌라 전체가 산을 따라 지어져 마치 독립된 왕국처럼 위풍당당하고 매우 호화로웠다. 최씨 가문은 4대 가문의 수장으로 나라 경제의 거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다.최연준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자 방금 전까지 북적거리던 넓은 거실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빳빳한 검은색 정장은 그의 큰 키와 건장한 몸매를 완벽하게 돋보이게 했고, 각진 얼굴은 강인하고 단호해 보였으며, 깊고 차가운 눈빛은 온 세상을 향해 차갑고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그는 차분하게 아첨하는 사람들의 얼굴들을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없이 그들을 내
지난 며칠 동안 프로젝트에 계속 진전이 없었고 강서연과 안이수는 바이 그룹의 대문도 들어가지 못했다.안이수는 슬픈 표정으로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낙담하고 있었다.태양은 땅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고 더위는 사람들을 숨이 막히고 답답하게 만들었다.강서연은 그녀에게 물 한 병을 건네주면서 살짝 웃었다.“우선 어디 가서 점심밥 먹고 오후에 다시 와요.”“서연 씨, 소용없어요.”안이수의 목소리는 흐트러졌다.“보아하니 방진영이 우리를 속인 게 아니라 원래 오성 시장이 열리기 힘든 거였어요. 온 지 며칠이 되었는데 배 도련님의 얼굴은커녕 바이 그룹의 책임자도 보지 못했네요! 제 생각엔 우리 그냥 돌아가요...”안이수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이러다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몰라요!”“불길한 말 하지 마요!”강서연은 긍정적이었다.“이수 씨도 2년 동안 판매해 봤잖아요. 사업이 그렇게 한 번에 성공하지 않는 거 잘 알잖아요. 기회가 생겨서 기획안을 전달할 수 있으면 우린 앞으로 많이 나아가는 거예요!”“그런데 언제 그 기회가 생기겠어요!”안이수가 불만을 토로하자마자 검은색 고급 승용차 한 대가 건물 앞 내부 도로로 천천히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십여 명의 경호원이 정신을 차리고 달려서 마중 나갔다.차에서 젊은 남자가 내려왔다. 연예인처럼 잘생긴 외모에 부잣집 도련님의 오만함이 풍겼다.안이수는 그가 바로 배경원인 것을 알아보고 흥분해서 강서연의 팔을 쳤다.“배 도련님이에요!”안이수의 눈빛이 반짝였다.“와 실물이 사진보다 더 잘생겼네요. 진짜 멋있어요. 스타일도 좋네요... 방진영이 우리를 속인 게 아니었어요!”강서연은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그녀는 안이수처럼 ‘얼빠’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기회는 절대 놓칠 수가 없었다!만약 기획안을 바로 배 도련님의 손에 전해줄 수만 있다면 몇백 번 예약하는 것보다 효과가 있을 것이다.강서연은 이를 악물더니 쏜살같이 달려갔다!하지만 주변에 키가 크고 몸집이 큰 경호원들이 바로 그녀를 막아섰다. 그들은
구현수는 전화 건너편에서 여러 번 가볍게 웃었다.하지만 그 웃음은 결코 명쾌하지는 않았다. 배경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의미를 짐작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뻔뻔스럽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형... 형수님이 도대체 왜 날 찾아온 거야? 일 때문이야?”구현수는 멈칫하더니 강서연이 온밤 컴퓨터 앞에서 배경원에 관한 자료를 연구하던 것이 생각났다. 그런 불쾌한 느낌이 다시 치밀어올랐다.“네가 멋있어서 그렇지!”그는 성질이 더럽게 그 한마디를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배경원은 하루 종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결국 그는 모든 상황에 변함없이 대응하기로 결정하고 강서연이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본 후 다시 움직이기로 했다.......늦은 시간 강서연은 혼자 명황세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오늘 밤 이 성 같이 웅장한 건물은 환하게 불이 켜지고 북적거렸다. 동서남북 모든 방향의 개인 집 앞의 길이 고급 승용차들로 가득 차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전용기를 타고 와서 호텔 뒷마당에 있는 활주로에 착륙했다.연회장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부자이거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수수한 옷차림의 강서연은 이런 장소와 어울리지 않았다.그녀는 인파를 피하기 위해 돌기둥 뒤에 숨으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배경원을 놓칠까 봐 이따금 주위를 둘러보았다.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전부 자태가 아름다웠고 고급 차들도 거의 똑같아 보였다... 이 모든 것의 한가운데서 누군가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강서연은 한숨을 내쉬면서 서류를 들고 계속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강서연은 낯익은 사람들이 그녀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숨기에는 이미 늦었다. 강유빈은 기침을 세게 하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강서연?”강명원과 계모 양연도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강서연은 기둥 뒤에서 천천히 고개를 내밀고 약간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서연아?”강명원은 강서연보다 더 놀라면서 물었다.“너... 네가 여기 왜 있어
“당신... 잘못 말한 거죠?”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고 강유빈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어떻게 쟤일 수 있어!”“혹시 그쪽이 강서연 아가씨이신가요?”남성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강서연 아가씨가 아니시면 뒤로 물러나 주세요!”“당신...”“이곳은 명황세가입니다. 최씨 가문에서 주최한 연회장입니다.”남성은 덤덤하게 말했다.“누구를 들이고 누구를 들이지 않을지는 제가 맡은 일입니다. 아가씨께서 알려주실 필요 없습니다!”강유빈의 얼굴은 분노로 하얗게 변했고 입꼬리가 떨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양연과 강명원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그녀는 강서연이었다! 촌스러운 옷차림의 사생아가 무슨 자격으로 이 자리에 나타난다는 말인가!“강서연 씨.”남성은 강서연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따라오세요.”강서연의 심장은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치는 것처럼 쿵쾅거렸고,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다.“선생님... 착각하신 거죠?”그녀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저는 초대장도 없고, 연회에 참석하러 온 것도 아니고, 그냥 기획안을 전달하러 왔어요...”“강서연 씨, 저를 난감하게 만드시지 말고 따라오는 것이 좋을 거예요.”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봐요!”양연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남자를 잡아당겨 물었다.“그럼 우리는 어떡해요?”남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초대장이 있으신지 여쭤봐도 될까요?”“무슨 초대장이요!”양연은 팔짱을 끼고 무지막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들어가서 물어봐요. 오성에 있는 임씨 집안의 막내 할머니가 내... 내 사촌 이모의 조카예요! 할머니 말 한마디면 우리는 들어갈 수 있어요! 당신이 뭔데 감히 나한테 초대장을 내놓으라고 해요!”“임씨 집안?”남성은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이보세요. 저는 명황세가의 총지배인이고 사대 가문만 섬기고 있습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임씨 가문은 리스트에서 본 적이 없는데,
구현수도 잠시 굳어있었다.그가 그렇게 뻔히 보이는 행동을 한건가...어떻게 아무 이유 없이 배경원을 질투할 수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그를 따라다닌 건 분명 배경원이었다.구현수는 가볍게 기침을 두 번 하고 컵을 집어 들고 물을 마시고 말하지 않았다.대신 작고 부드러운 손이 뒤에서 그를 껴안았다.그러자 강서연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가 다시 불안하게 그의 코를 뚫고 들어갔다.“여보.”강서연의 목소리는 솜사탕같이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그녀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제 일에 대해 듣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을게요.”구현수는 움직이지 않고 입꼬리를 당겼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듣고 싶지 않은 건 아니야.”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당신이 배경원 이름을 여러 번 말해서 그랬을 뿐이야. 온밤 말했는데 이제 바꾸면 안 돼?”강서연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뭐로 바꿔요?”“예를 들면...”그는 잠시 멈칫했다. “그 파티가 최씨 가문에서 주최한 거 아니었어? 그럼 최씨 셋째 도련님에 대해 들어본 적 있지?”강서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구현수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최씨 셋째 도련님 몰라?”구현수는 굴하지 않고 물었다.“그 사람 얘기는 왜 하는 거예요?”그녀는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일어나서 베란다로 나가 빨래를 꺼내 하나씩 개었다.“전 그 사람을 모르고 만난 적도 없는데, 그 사람이 파티를 주최한 게 나와 무슨 상관이에요?”구현수는 가까이 다가와 흥미진진해하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렇지만 그 사람은 엄청 힘이 있다고 들었어. 최씨 가문이 또 오성의 경제를 꽉 잡고 있으니 그 사람이 파티를 열었으면 많은 유명 인사들이 참석했을 거야. 너 그때 호텔에 갔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 않았어? 연회장에 들어가서 보고 싶지는 않았어?”“미쳤어요?”강서연은 가볍게 웃었다.“제가 왜 그 사람을 궁금해야 하죠?”“그 연회가 그 사람 아내를 고르는 자리잖아
제인 호텔의 맨 위층 테라스.구현수는 넓은 안락의자에 반쯤 기대어 있다. 오늘은 좋은 날이 아니었고, 먼바다 위에는 안개가 자욱했는데 풀리지 않는 마음의 매듭처럼 두꺼워 보였다.“최 씨 도련님한테 관심 없어?”“그 사람의 마음에 들게 되면 벼락출세하는 거잖아!”......구현수는 조용히 잔을 들고 있는 손가락을 조였고 관절 마디가 하얘졌다.분명히 그는 그녀와 농담을 하고 싶었지만 강서연이 그렇게 강하게 반응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요즘은 그를 침실에 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와 냉전을 펼치고 있다. 평소와 같이 식사를 하고 집 청소를 하지만 그와 차갑고 정중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이 분위기는 항상 침착했던 구현수를 거의 질식할 듯 미치게 만들었다.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헛소리한 자신의 목을 졸랐을 것이다!멀지 않은 곳에 헬리콥터가 천천히 활주로에 착륙했고, 프로펠러가 돌면서 일으킨 기류가 구현수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고 그의 셔츠 한 모퉁이도 들어 올렸다.배경원은 기쁜 마음으로 비행기에서 내렸고 테라스에 있는 구현수를 보자마자 그를 향해 달려갔다.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구현수의 안색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호텔에 특별히 흰 트러플과 캐비아를 준비시켰지만 구현수는 조금도 먹지 않았다.배경원은 이번에 교훈을 얻은 듯 아무 말 없이 반대편 의자에 앉아 두 눈은 유찬혁을 계속 바라보며 그에게서 힌트나 무언가를 얻으려 했다. 그러나 유찬혁도 구현수의 생각을 알아낼 수 없었고 그저 커피를 마시고 조용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결국 배경원이 이 지루하고 이상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살살 웃으며 아무 말이나 뱉었다. “저기, 셋째 형... 형수님의 기획안은 내가 몇몇 총괄 담당자들한테 보여줬어요. 담당자들이 전부 좋고 프로페셔널하다고 칭찬했어요. 그리고 기획안을 만든 사람이 인재라고 우리 회사에 들여오고 싶다고도 했어요!”원래 이런 말로 구현수의 기분이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그러나 셋째 형님의 안
강서연은 순간 얼어붙었다.방진영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온몸의 세포가 자동으로 긴장 상태에 놓여있게 되고 두 눈은 그녀를 경계하며 응시했다.방진영이 다가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먼저 안이수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넌 퇴근해도 돼. 강서연은 남아있어.”안이수는 걸으면서도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뒤돌아보며 먼저 떠날 수밖에 없었다.강서연을 향한 방진영의 고약한 마음은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다.이렇게 내버려 뒀다가 또 다른 음모가 일어나지는 않겠지?안이수는 회사 문 앞까지 걸어갔다가 걸음을 멈췄다.회사 관행에 따르면 직원들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회사와 파트너에게 비상연락처를 보고해야 한다. 그녀는 강서연이 보고한 것이 남편 구현수의 번호인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안이수는 휴대폰 연락처에서 구현수의 전화번호를 찾아내고 잠시 망설이다가 문자를 보냈다.......사무실에서 방진영은 강서연을 향해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정말 내 후배다워.”그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회사가 몇 년 동안 추적해도 못 접근했던 오성의 배씨 가문인데, 네가 오자마자 기획안을 전달했네! 정말 대단해!”강서연은 무관심한 표정으로 물었다.“방 주관님, 이 말씀 하시려고 저보고 남으라고 하셨나요?”“물론 아니지.”방진영은 목청을 가다듬었다.“저녁에 식사 자리가 있어. 너도 같이 가!”강서연은 역겨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방진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장난스럽게 웃었다.그는 강서연이 이런 자리를 가장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런 자리를 이용해 그녀를 괴롭혀야 했다.그녀를 얻을 수 없지만 그녀를 디딤돌로 삼아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어 괜찮았다.“사실 너를 부르고 싶지는 않았어.”방진영은 사악하게 웃었다.“그런데 회사에 미녀가 너뿐인 걸 어쩌겠어? 여자가 예쁜 것도 가끔은 참 귀찮은 일이야!”“죄송하지만 저는 못 가요.”강서연은 냉정하게 거절했다.“제 남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저는...”“집에 가서 밥 차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
“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정대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결국엔 자기 아들이었기에 정승우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때리고 꾸짖어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대명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는 권온유의 양 갈래머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막아서려는 순간, 자신과 정대명 사이에 힘의 격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작정 나섰다가는 역부족일 터였다.정승우는 이를 악물고 정대명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 정말 이 아이를 팔 생각이에요?”“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영미라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거야!”정대명은 불만스레 대꾸하며 정승우에게 옷장에 있는 헌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정승우가 옷을 가져오자, 정대명은 손을 뻗어 권온유의 예쁜 드레스를 찢으려 했다. 정승우는 급히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이 자식이!”정대명은 정승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조용히 해! 죽고 싶어?”“아빠, 이건...”“이 애한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거야!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잖아.”정승우는 다가가 정대명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제가 갈아입힐게요!”“이놈이...”정대명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정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하, 아빠를 도와주고 싶구나? 역시 아들은 아들밖에 없지! 그래, 네가 손이 빠르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혀. 둘이 함께 가자고!”정승우는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승우는 권온유의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 정대명의 헌 옷을 위에 입혀 단단히 감쌌다. 그런 다음 모자를 씌워 얼핏 보면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정대명은 정승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뒷문에 승합차가 준비돼 있대. 어서 출발하자!”“아빠, 이 소녀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교외지!”정대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빨리 움직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
“엄마, 우리 오늘도 여기서 밥 먹어요?”“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고등어조림 요리잖아.”“그런데...”권온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켰다. 사실 권온유는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어린 권온유도 느낄 만큼 엄마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방금 대답조차 어딘가 건성으로 들렸다.권온유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걸까? 누군가 아빠와 다른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내기만 하면, 엄마는 이렇게 변해버렸다.“엄마...”권온유는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나 조순영은 갑자기 권온유의 손을 놓고는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권온유는 깜짝 놀라 인형을 떨어뜨렸다.“엄마!”“온유야,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조순영은 급히 돌아보며 외쳤다.“엄마 금방 올게!”권온유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엄마는 아빠가 다른 여자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통제력을 잃고 온유를 혼자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고 한참 후에야 멍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정대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이 모녀를 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는 자주 아이와 함께 식사하러 왔는데 가끔 혼자 올 때도 있었다...남편의 외도를 잡으려는 걸까?맞아, 틀림없이 그런 거다!정대명은 매일 호텔에 살면서 듣는 소문도 적지 않았다. 한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있음에도 바람이 잦았다고 하는데 그 회장은 차기 시장의 사위가 될 인물이라는 말도 있었다.정대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이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남자가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정대명은 다시 어린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
정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얼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며칠을 기다린 결과가 고작 최가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럼에도 영미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정대명 씨,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훔쳐 오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젠장! 정대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보석을 훔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하... 영미 아가씨.”마음속으로는 욕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이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 경호원들이 전부 총을 들고 있더라고요. 제가 무턱대고 나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정말 쓸모없네요.”영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사람들까지 매수해 놨는데,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정대명은 억눌린 분노를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말해 두겠는데요!”영미는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이 일 못 해내면,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도 더 이상 못 쓰게 될 테고 돈 한 푼도 못 받는 줄 아세요! 다시 그 작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서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세요!”정대명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호사에 길든 사람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정대명은 오성에서 살아가며 화려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이 잘 먹고 살게 도와줬고 돈까지도 넉넉히 주니 점점 체면이 생기기 시작했다.호텔에서 정대명이 매일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했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이런 삶은 초라했던 지난날에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정대명은 급히 전화기를 붙잡고 외쳤다.“영미 아가씨, 너무 흥분하지 마!”영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정대명은 어영부영 답했다.“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내가
백인서는 웃으며 정승우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정승우는 전혀 망설임 없이 백인서의 그릇에 고기가 많은 걸 보자마자 젓가락을 뻗었다.“너 지금 내 소고기를 뺏어 먹는 거야?”“사장님이 누나만 편애하는 거 아니에요? 고기를 이렇게나 많이 주다니!”“안 돼, 내 거야. 뺏어 먹지 마.”백인서는 웃으며 말했다.“이건 사장님이 특별히 주신 사랑의 소고기야!”“저는 성장기 남자애라 많이 먹어야 해요!”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면을 거의 다 비워가고 있었다. 백인서가 정승우에게 국수를 한 그릇 더 가져다주려고 일어서려는 순간, 달콤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고모!”백인서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예쁘고 앙증맞은 작은 공주가 백인서에게 달려왔다.“온유야?”권온유는 백인서에게 달라붙어 작은 머리로 백인서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정승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정승우는 이렇게 예쁜 여자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두 갈래로 묶은 머리에 공주 같은 퍼프 드레스를 입고, 마치 아까 놀이공원에서 본 백설 공주처럼 보였다.이 아이는 정말 동화 속에서 나온 공주일까?작은 소녀는 고개를 기울여 정승우를 한 번 바라보더니 달콤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백인서를 보며 물었다.“고모, 이 사람은 누구예요?”“이 사람은...”백인서가 대답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권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오빠는 학교에서 우등생이야. 공부도 엄청 열심히 하거든. 온유도 나중에 커서 이 오빠처럼 열심히 공부해야 해.”백인서는 권욱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여긴 어떻게 오셨어요?”“왜? 딸과 단둘이 외식하러 나오는 게 이상해?”“아니요.”백인서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권욱 씨가 이런 작은 가게에서 식사하실 줄은 몰랐어요...”“여기도 꽤 유명한 맛집이야!”권욱은 의자에 앉으며 사장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오늘 주말이라 온유를 데리고 나왔는데, 이 녀석이 배고프다고 해서 핸드폰으로 근처 맛집을 검색해 보니 이곳 평이 좋더라고.
정승우의 머릿속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그 시절, 백인서는 낮에는 그를 등에 업고 다녔고 밤에는 재워주며 보살폈다. 따뜻함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그의 삶에서 백인서는 유일하게 빛을 밝혀 준 존재였다.누가 세 살, 네 살 아이에게 기억이 없다고 했던가? 그 기억은 정승우의 성장 내내 곁을 지켜 주었고 다시 누나를 찾을 수 있도록 지탱해 주었다.“누나, 제발... 울지 마세요. 백 선생님!”백인서는 깜짝 놀라 정승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인서는 정승우의 미소에 눈물을 멈췄다.두 사람은 작은 음식점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우연히도, 이곳은 예전에 최지용이 백인서를 데리고 와 소고기 국수를 먹던 곳이었다.이번에도 그 가게 주인이 반갑게 맞이하며 다가왔다.“오, 이게 누구야! 귀한 손님이 오셨네!”그의 시선이 정승우에게로 멈췄다.“이 아이는?”“동생이에요!”정승우가 먼저 씩씩하게 대답했다.백인서는 미소를 지으며 주인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주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한번 보고는 주방으로 돌아가 푸짐하게 고기가 올라간 소고기 국수를 내왔다.“얼른 먹어!”백인서는 젓가락을 건네며 말했다.“여긴 정직하게 장사하는 곳이라 양도 푸짐하고 맛도 아주 좋아. 지용 씨가 나를 데리고 왔던 곳인데...”최지용을 언급하자 백인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정승우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백인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그 남자, 누나한테 잘해 줘요?”백인서는 모르는 척하며 대답했다.“무슨 남자?”“그러니까, 방금 말한 그 지용이란 사람 말이에요!”정승우는 더욱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숨기지 않아도 돼요. 산에 있을 때, 두 사람이 포옹하는 것도 봤고 그 사람이 누나한테 키스하는 것도 다 봤어요!”“정승우!”백인서는 정승우를 노려보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쏠렸다.“그만해!”백인서는 테이블 아래로 정승우의 다리를 가볍게 툭 차며 말했다.“애가 무슨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저
어느 일요일, 정승우는 돈을 꼭 쥔 채 백인서를 찾아갔다.처음에는 백인서에게 밥을 사주고 싶었지만, 지금의 백인서는 예전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맛있는 건 이미 다 먹어봤을 테니, 한 끼 식사가 백인서에게 그다지 특별할 리 없었다.그럼에도 정승우는 이 돈으로 어떻게든 백인서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결국 정승우는 백인서에게 이렇게 제안했다.“백 선생님, 우리 놀이공원 가요! 제가 살게요.”백인서는 원래 거절하려 했지만, 정승우의 간절한 부탁에 결국 놀이공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사실, 백인서도 놀이공원은 처음이었다.오랜 시간 오성에서 살았지만, 이런 곳에 대해선 왠지 모를 거부감이 있었다. 여긴 웃음과 즐거움이 넘쳐흐르는 곳이었고 왠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상처럼 느껴졌다.늘 자신에겐 잿빛 하늘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왔으니까.최지용을 만난 후에도 이곳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커플들이 관람차를 타면 결국 헤어진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백인서는 최지용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기에 그 소문이 괜히 두려워 오지 않았던 것이다.“백 선생님, 무슨 생각 해요?”맑고 발랄한 목소리가 백인서를 현실로 끌어당겼다.백인서는 정승우의 미소 가득한 눈을 내려다보았다.“제가 이미 자유 이용권을 사뒀어요.”정승우는 백인서에게 자유 이용권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자유 이용권이 뭔지 아세요? 그거 있잖아요, 놀이공원의 모든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 통행증 같은 거요! 따로 사는 것보다 훨씬 저렴해요!”“생각보다 똑똑하네.”백인서는 미소를 지었다.“적응력도 빠르고.”“똑똑하지 않으면 선생님을 즐겁게 해드릴 수 없잖아요!”“그래, 오늘은 네 말에 따를게.”백인서는 정승우를 바라보며 물었다.“먼저 어떤 걸 타볼까?”남자애들은 자극적인 놀이기구를 특히 좋아하곤 했다. 정승우는 백인서를 데리고 롤러코스터, 자이로드롭, 급류타기 같은 놀이기구들을 함께 탔다.하지만 백인서는 오히려 회전목마를 타고 싶었다.두 사람은 떠들썩한 놀이공원에서 땀을
정승우는 정대명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정대명은 문을 열어 정승우를 들여보냈다. 정승우는 방 안을 둘러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이 방은 마치 금으로 뒤덮인 듯 반짝이고 있었다.정대명이 이런 곳에서 살고 있다니.정승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저런 인간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곳에 살고 있는 건가 생각했다.“여긴 왜 온 거야?”정대명은 거칠게 정승우의 등을 밀며 물었다.“지금 학교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정승우는 정대명을 돌아보며 무심하게 말했다.“그냥 좀 보고 싶어서요. 그래서 왔죠.”“네가 날 보러 왔다고?”정대명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소리를 들은 듯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이 개자식이 언제부터 제 아비를 생각했다고! 흥!”정승우는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제정신이라면 주먹만 휘두르는 아버지를 그리워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좋아요, 그러면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아버지 술 마실 시간 뺏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정승우는 정대명의 손에 들린 술병을 힐끔 보고, 시선을 그의 바지 주머니로 옮기며 눈에 장난기가 어렸다.“저, 다 봤어요!”“뭐?”“그 여자가 아버지에게 돈을 준 거요.”정대명은 당황하며 정승우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정승우는 재빠르게 옆으로 비껴가며 비웃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저, 다 봤고, 다 들었어요! 두 분은 아무도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셨나 봐요?”“이 자식아, 헛소리하지 마!”정대명은 부끄러움과 분노에 휩싸였다. 또 영미의 경고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이 일이 절대 밖으로 새 나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다급해졌다.“헛소리 아니에요.”정승우는 이례적으로 침착한 표정이었다.“아버지는 그 여자랑 손잡고 우리 누나를 모함하려는 거잖아요!”“이 자식이!”“아버지, 제 입을 막고 싶으시죠?”“뭐?”정대명은 얼떨떨해졌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이 일은 비밀로 해 드릴게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정승우는 천천히 말했다.“단, 입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