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경섭은 임우정을 지키기 위하여 고의 상해죄로 8년 징역형을 받았다.대학 시절, 임우정은 수없이 감옥에 가서 면회를 시도했지만, 기다린 그녀 앞에는 늘 교도관이 서 있었다.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라는 차가운 말과 함께 말이다.마지막 한 번은 그녀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 제안을 받았을 때였다. 임우정은 육경섭과 이 기쁨을 제일 먼저 나누고 싶었고 면회하러 갔다.그녀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면회실 밖에서 기다렸고 철문이 무겁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육경섭이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났고 투명한 유리창 뒤로 그가 보이자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없이 울었다.“울지 마. 나 같은 놈 때문에 눈물 흘리지 말고.”육경섭이 감방에 들어간 뒤로 그녀에게 했던 첫마디이자 마지막 한마디였다. 말을 마친뒤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 일어서서 문 뒤로 걸어 나갔다.임우정은 그들을 가로 막은 유리창을 미친듯이 두드렸고 교도관은 그런 그녀를 막아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 말을 전해 왔다. 교도관은 엄숙하게 그녀에게 말했다.“육경섭 재소자가 당신한테 더는 찾아오지 말고 밖에서 마주치더라도 모르는 척 지나쳐달라고 전합니다.”임우정은 순간 멍해졌고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그렇게 그녀가 떠난 뒤, 육경섭은 감옥에서 크게 병을 앓았고 죽을 뻔한 경험을 했다. 임우정의 따뜻한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렸고 조직 보스의 음침한 표정이 자꾸 그의 눈앞을 가로 막았다.“육경섭, 평생 지켜준다 했으니, 너가 한 말 지켜야 돼, 알았지!”“경섭아, 이번 물건 반출 성공하기만 하면 삼십 프로 떼줄게!”“육경섭, 나 오성에서 대학교 다니고 싶어. 오성에서 일자리를 찾으면 안 되나? 그러면 우리 매일 같이 있을 수 있는데!”“아, 맞다! 경섭이 너한테 여자친구가 있지? 경섭아, 이번 일 네가 못하면 다른 사람 찾아서 하면 돼. 그런데 밑에 놈들은 그냥 헛수고 시키면 안 되겠지? 네 여자친구를 찾아서 밖에 친구들이랑 같이 놀게 해야겠어. 그걸로 만족시킬 수밖에.”
신석훈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를 건네려 손을 올리던 최연준은 머뭇거리다 말았다....저녁에 집에 돌아간 뒤, 강서연은 최연준의 품에 기대어 있었고 둘은 편하게 침실에서 쉬고 있었다.밤이 깊어지고, 찬란한 별빛이 창문을 통해 침실로 비춰졌다. 강서연은 잠이 오지 않았고, 말똥말똥한 눈으로 창밖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참 오랜만에 이렇듯 조용하게 밤하늘을 느껴보는 시간이었다.최연준은 그녀가 더울까 봐, 살포시 부채질해줬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아름다운 옆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나른하게 반대로 몸을 뒤집었고 그를 향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최연준은 긴장한 듯 목젖이 흔들렸고 몸이 슬그머니 달궈졌다.강서연은 코끝에 땀이 맺힌 남자의 모습을 보고, 전기요금를 아낀다고 에어컨도 마음껏 쓰지 못하게 한 것 같아 못내 미안했다.“현수 씨, 더우면 에어컨을 켜요, 우리. 전기요금 얼마 안 들어요.”“응... 아니야.”최연준은 윗 입술을 여러 번 깨물었다. 그가 몸이 뜨거운 거랑 그녀가 얘기한 더운 거랑 전혀 다른 건데 말이다...최연준은 크게 호흡 한번 하였고 이내 시선이 그녀의 하얀 목 라인에 이어진 앵두같은 입술에 고정되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얌전하지 못하게 그녀의 옷 속으로 손을 넣으려고 했다.그 순간 땅 꺼질 정도로 깊은 그녀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왜 그래?”그는 하려던 동작을 멈추고 걱정스레 물었다. 보아하니 그녀의 주의력이 전혀 둘의 애정행각에 있지 않고 뭔가 걱정이 많은 것 같았다. 그는 표정 변화 없이 그녀를 탐하였다.“여보, 왜 한숨을 쉬고 그래?”“우정 언니랑 육경섭 두 사람 말이에요.”최연준이 입꼬리를 실룩거렸다.“응? 그 두 사람 이미 끝난 거 아니야? 뭘 걱정해?”‘이럴 때 그 둘보다 눈앞에 남편 생각을 더 해보는 건 어때?’최연준은 끊임없이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그냥 둘이 이대로 끝날 것 같지 않아서 그래요.”강서연은 두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우정 언
최연준은 안색이 변하더니 조용히 대답했다.“다 지난 일이지... 그곳은 싸우는 것 빼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곳이니까.”“그 사람을 때렸어요?”“응. 그런 셈이지.”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방에 들어간 사람은 대부분 폭력적인 경향이 있어서 심리적으로도 다소 문제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육경섭같이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구현수한테 맞았으면 앙금이 남았을 수 있겠지 싶었다.그에 반해 현수는 그런 비슷한 문제가 없다고 강서연은 느꼈다. 표정이 차갑고 말수가 적은 것 빼고는 다 괜찮았다. 강서연의 예쁜 두 눈이 미소로 가득 찼고, 조용히 남편을 쳐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이런 남편을 만난 게 로또 맞은 것 같았다.그녀는 작은 손으로 그의 굴곡이 선명한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었고 면도를 하지 않은 터라 수염이 그녀의 손바닥을 찔렀다.“뭘 그렇게 쳐다봐?”최연준은 그녀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물었고 강서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그냥. 내 남편이 애증도 확실하고, 도량까지 넓어 보여서요! 경섭 그자가 당신을 그렇게 대하는데도 무정하고 의리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하니까, 그 정도 포용력을 아무나 갖고 있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최연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당신 눈엔 내가 그래 보여?”“그럼요.”최연준은 그녀를 품에 꽉 안으며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강서연은 대신 불평을 쏟아냈다.“현수 씨. 그 사람 정감 있는 사람이라고 현수 씨가 그래도, 내 생각은 안 그래요. 경섭이 우정 언니한테 그렇게 대하는 건 정말 양심 없어 보여요. 언니가 이제껏 마음 졸이며 줄곧 그 사람만 기다렸는데!”“그 사람도 어쩔 수 없는 게 있나 보지.”최연준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옆으로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자신이 감옥도 갔다 왔고, 또 조직에 몸 담고 있으니, 서로 다른 세계 사람이란 생각에서 우정 씨한테 매정하게 한 것 같은데. 거리를 두는 건, 사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우정 씨를 지켜주는 행동일 수도
배경원은 확신에 찬 모습으로 머리를 끄덕였다.“그러니까 저번주에 계천에서 낚시를 하다가 거기서 정면으로 마주쳤는데 깜짝 놀랬잖아요. 연준 형이랑 구현수 그 사람 얼굴이 너무 닮았어요.”최연준의 안색이 점점 더 그늘져갔다. 배경원은 계속해서 말했다.“생긴 것만 빼고 보면 나머지는 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더라고요. 내가 의심스러워서 몰래 좀 조사해 봤는데 구현수가 살아있는 게 확실해요. 그 인간 감방에서 나온 뒤에 강주 쪽 조직의 몇몇 보스한테 잘못 걸려서 돈 못 갚는다고 손가락 잘리고 강주에서 내쫓겼던 거래요.”최연준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유찬혁은 놀라하며 눈을 크게 떴다.“그래서...”생각에 잠겼던 유찬혁이 뭔가 떠오르는 듯했다.“설마 그 일, 육경섭하고 관련 있을까? 연준 형! 어쩌면 육경섭 그 사람, 형이 구현수가 아닌 걸 진작에 눈치챘을지도 몰라요.”최연준 역시도 듣자마자 그 걱정부터 들었고 그의 눈밑에 차가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육경섭과 몇 번 만나봤지만, 말도 이상하게 하고 참 감 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어서 진작에 알아챘을 것도 같았다.배경원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우물쭈물 말했다.“육경섭... 형네 삼촌 쪽 사람은 아니겠죠?”최연준은 눈을 치켜 뜨고 말했다.“가능성이 없진 않지! 의심스러운 데가 한두 곳이 아니라서 쉽게 결론부터 지으면 안 돼.”지난번 강서연과 같이 온천 리조트에 갔을 적에 그녀가 해변에서 떠돌이 노숙자를 보고 놀라 했던 일이 떠올랐다.그 떠돌이가 구현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최연준은 매서운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구현수가 살아 있으니, 일단 그 사람 우리가 먼저 찾아서 묶어둬야지. 명황산 일대에서 움직이다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잖아.”“그래요.”배경원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아랫사람들한테 소문내지 말고 비밀리에 최선을 다해 찾으라고 시켰어요.”최연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두 사람이 떠난 후, 혼자 남겨진 최연준은 조용히 앉아있는데 마음이 착잡했다. 그는 구
사진의 등장인물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크게 놀랐다.‘구현수?’육경섭은 고개를 번쩍 들어 최지한을 바라보며 믿기지 않는 눈빛을 했다.“뭐야? 설마 그 사람 본 적 있어?”육경섭은 얼굴빛 하나 변함 없이 사진을 내려놓았고 최지한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맡아서 치워줘야 할 사람이야.”최지한은 육경섭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제대로 보고 작업해야 돼. 실수 없이!”“무슨 뜻이죠?”육경섭의 인내심이 바닥날 정도로 최지한은 한참 이상하게 웃어 보이다가 목소리를 내리 깔고 말했다.“빙빙 돌리지 않을게. 바로 얘기하자면, 타킷은 최연준이야. 최씨 가문 셋째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사람! 할아버지가 어제 막 북미로 정계 요인들을 만나러 가셔서 집안이 비었네... 최적의 시기지. 우리가 손보기 가장 좋은.”육경섭은 미간을 찌푸렸다. 강서연의 남편이 최연준 최씨 가문 사람일 줄은 전혀 몰랐었다. 지난 몇 차례 만나본 정황상, 강서연은 최연준의 정체를 모르는 눈치였는데, 여전히 그를 엄청 아껴보였다. 최연준을 해치기라도 하면 아마 목숨 걸고 나설 위인으로 보였다. 여자가 무섭다라기 보단 하필 임우정 그녀의 절친인 게 마음에 걸렸다.육경섭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복잡해진 눈으로 최지한을 바라보았다. 한참 침묵하던 그는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큰 도련님. 이번 건은 어려워요. 심사숙고해 주시는 게 좋겠네요.”최지한은 무심히 손에 든 라이터를 껐다 켰다 하더니 시가 한 대를 태우고 나서 그를 향해 차갑게 웃었다.육경섭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이게 다 도련님을 위해서입니다. 최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이 영감님의 총애를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중요한 인물이 갑자기 사라지는데 영감님이 설마 가만있으시겠어요. 끝까지 조사하고 그러시겠죠. 최씨 가문은 너무 막강해서 결국 저까지 찾아내겠죠... 제가 혼자 감당하긴 벅찬 일이라!”“그게 두려웠던 거네?”최지한의 얼굴에 기괴한 표정이 그려졌고 두 손을 들어 손바닥을
육경섭은 최지한을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할아버지의 의심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내가 시키는 대로 저 사람을 치워주면 돼. 나머지는 걱정말고.”최지한은 육경섭의 눈을 주시하며 말했다. 목소리에 담긴 음침하고 괴상한 느낌은 그로 하여금 최지한이 영감님마저 제거할 수 있다는 생각에 확신을 갖게 해줬다.최지한은 구현수를 물러가게 한 뒤 토지 계획도를 꺼내들었고 오성의 중심부 지역의 황금땅을 그리며 말했다.“여기 이곳이 인파도 몰리고 시중심이라 금싸라기 땅이야. 일이 성사되면 관련 부서에 얘기해서 너한테 이 땅들을 건네줄게. 할만 하지?”육경섭은 입술을 앙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최지한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육경섭, 야망이 있는 사람 아니었나? 일처리 충분히 독하고, 모질고, 깔끔하게 잘하잖아.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서 이렇게 부른 건데. 이번 일, 우리 모두한테 다 남는 장사일 텐데, 잘 따져봐!”육경섭은 손가락으로 펼쳐진 토지 계획도를 툭툭 치며 보았다. 땅이 크고 넓었으며 딱 봐도 앞으로 투자가치가 엄청나 보였다. 오성에서 이 땅을 금싸라기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느낌이었다.‘허허, 최연준 목숨이 꽤나 큰 값하네!'육경섭은 가겹게 웃으며 눈을 들어 최지한을 보며 물었다.“큰 도련님, 그럼 최연준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최지한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확실치 않아 하며 대답했다.“맨체스터에 있다고 듣기는 했는데, 런던일 수도 있고. 아무튼 저번 비행기 사고 뒤로 외가 측에서 지켜주고 있다고 했는데.”“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저 보고 어떻게 없애라는 말인지?”최지한은 웃어 보이며 말했다.“위치는 네가 정확히 조사를 해야지! 아니면 내가 널 왜 불렀겠어.”육경섭은 고개를 끄덕이고 잔을 들어 와인을 단숨에 마셔버렸다.‘이 인간, 아직 최연준이 강주에 있는 것도 모르고, 결혼한 사실도 모르네.'...육경섭은 검은색 007 가방 하나 늘어서 강주로 돌아왔다. 그 안에는 스무 개 묶음으로 된 현찰이 가지런
그는 최연준처럼 잘난 체하는 남자도 이런 평범한 모습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대체 뭐가 잘못됐을까, 강서연이 최연준에게 진지하게 뭔가를 얘기할 때 키가 190cm 정도나 되는 최연준은 그녀 앞에서 마치 잘못을 저지른 초등학생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그 모습에 육경섭은 꽤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최연준이 강서연과 함께 있을 때는 가정적인 남편이었다. 그리고 아내를 무서워했고 돈도 벌어들이는 족족 아내에게 바치는 여느 남편과 다를 바 없이 집안에서 지위도 별로 없었다.많은 이의 존경을 받는 자리에는 관심이 없었고 아내 앞에서 굽신거리는 건 기꺼이 달갑게 받아들였다.가슴이 움찔한 육경섭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커피숍 문이 열려 있어 조금만 가까이 가도 두 부부의 대화가 정확하게 그의 귓가에 들렸다.“여보, 내 말대로 해요. 가격을 조금 더 낮춰야 한다니까요!”“우리가 재료도 얼마나 좋은 걸 쓰는데. 가격을 더 낮춰서는 안 돼.”“밑지면서 파는 것도 아니고 그냥 평소 가격보다 조금 더 낮출 뿐인데요, 뭐. 박리다매하는 게 가장 나아요.”강서연이 고집을 꺾지 않았다.“이런 디저트 같은 건 당일에 채 팔지 못하면 저녁에 할인해서라도 팔아야 해요. 이튿날까지 그대로 뒀다가 팔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그녀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던 최연준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어릴 적부터 최씨 가문에서 항상 보고 듣고 자란 장사 규칙인데 그가 모를 리가 있겠는가?하지만 강서연이 퇴근하고 가게까지 보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일해야 하는데 그녀의 피와 땀으로 만든 음식을 싼값에 파는 게 마음이 아팠다.그가 전부 먹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싸게 팔고 싶지 않았다.“못 팔면 말지, 뭐.”최연준이 나지막이 말했다.“아무튼 난 쭉 가게에 있으니까 내가...”“현수 씨가 뭐요!”강서연이 펜으로 그의 머리를 톡 쳤다.“여보, 우린 장사하려고 가게를 열었어요. 현수 씨가 다 먹어버리면 장사는 어떻게 해요.”최연준이 피식 웃었다
육경섭이 가볍게 웃으며 억울한 척했다.“여기 커피숍 아니에요? 제가 커피숍에서 뭘 하겠어요?”최연준은 그의 표정 하나라도 놓칠세라 자세히 살펴보았다. 지난번처럼 기세가 맹렬하진 않았지만, 그가 선의인지 악의인지는 쉽게 단정할 수 없었다.최연준은 돌아서서 강서연의 어깨를 잡으며 이곳은 그가 알아서 할 테니까 먼저 집에 가라고 했다.강서연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그의 뜻을 굽힐 수 없어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강서연이 멀리 가고 나서야 최연준은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육경섭에게 말했다.“커피 디저트 세트라고 했죠? 제가 해줄게요.”“가능하겠어요?”“제가 여기 사장인데 당연히 가능하죠.”최연준이 카운터 뒤로 걸어갔다. 비록 움직임은 능숙해 보였지만, 도구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아주 요란했다. 그 바람에 육경섭은 평소에도 이렇게 요란한 건지, 아니면 일부러 소리를 내어 그를 내쫓는 건지 구별이 가질 않았다.잠시 후, 최연준이 나름 그럴듯하게 세팅하고 그의 앞에 가져다주었다.예쁜 레드벨벳 케이크와 고소한 향이 풍기는 따뜻한 라테 한잔이었고 쟁반 위에 작은 보라색 아이리스꽃으로 데코까지 했다.육경섭은 아이리스꽃을 잡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이 정도로 꼼꼼한 걸 보면 절대 당신 아이디어는 아니겠군요.”“그래요.”최연준이 손을 닦으며 덤덤하게 말했다.“이게 다 우리 와이프 아이디어이고 전 그저 와이프한테 배웠어요.”케이크를 한입 먹어보던 육경섭이 눈살을 찌푸렸다.“이거 설마 오늘 채 팔지 못한 나머지를 가져온 거 아니죠?”“당연히 아니죠.”최연준이 피식 웃었다.“그저께 팔다 남은 거예요.”말문이 막힌 육경섭은 그를 빤히 보다가 한참 후에야 억지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사모님 솜씨 한번 맛봐야겠어요.”“아, 오해했어요.”최연준이 계속하여 무표정으로 말했다.“이것도 우리 와이프가 한 게 아니에요.”“아이참...”“그저께 어떤 손님이 레드벨벳 케이크를 주문하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서연이가 아직 배우지 못해서 제
결정적인 순간에 배윤아가 나서서 둘 사이를 중재했다.“뭐 어때? 가원이가 그렇게 타고 싶다잖아. 그냥 타게 하자!”배윤아는 웃으며 가방에서 미리 준비해 온 작은 바지를 꺼냈다.“이것 봐, 역시 소아는 다 알고 있었어. 자기 딸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나한테 바지를 챙겨가라고 한 거였어!”최가원은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최가원은 배윤아와 함께 여자 화장실로 향했고 잠시 후 당당하고 씩씩한 모습으로 뛰어나왔다. 즐겁게 말을 타며 음악에 맞춰 손을 흔들고 흥겨운 몸짓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삼촌! 나중에는 진짜 말을 타보고 싶어요!”“그래, 그래!”최군성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른 집 공주님들은 다 얌전하고 우아하던데, 넌 정말...”“저 공주라고 부르는 거 싫어요! 앞으로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그럼, 뭐라고 불러줄까?”“음... 여자 전사로 불러주세요!”최군성과 배윤아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참을 웃었다.이 성격으로 보아 정말 친할머니를 쏙 빼닮았다.보아하니 가원이는 앞으로도 여리고 약한 소녀보다는 할머니처럼 강렬한 존재감을 가진 멋진 여성이 될 것 같았다.회전목마를 다 타고 난 뒤, 최가원은 큰 아이스크림콘을 사서 맛있게 먹고 있었다.최군성과 배윤아는 최가원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세 사람은 놀이공원 속 조용한 숲길을 따라 산책하며 햇볕을 만끽하고 있었다.“여기 정말 예쁘다!”배윤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작은 자갈이 깔린 길은 운치가 있었고 작은 숲에는 오동나무와 은행나무가 가득했다. 가을이 되면 황금빛으로 물드는 곳이었다.“그러게. 좋은 곳이긴 한데 운영이 예전 같지는 않네.”최군성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시설이 낡고 첨단 기술도 없는 걸 보면 오래 유지되긴 힘들겠네.”“그건 몰라!”배윤아가 최군성을 쳐다보며 말했다.“보기엔 이 놀이공원, 만화적인 매력이 있어. 그렇지 않아?”“음, 확실히 그렇네.”최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만화 영화의 촬영지로 쓰인다면 정말 괜
그때, 배윤아가 멀리서 허둥지둥 달려왔다.“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배윤아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가원아, 정말 미안해! 정신없이 그림을 그리다가 시간을 놓쳐버렸어... 그래서 이제야 오게 됐어. 나 용서해줄 수 있을까?”배윤아는 숨을 헐떡이며 허겁지겁 사과했다. 손끝에 묻은 물감 자국도 미처 닦아내지 못한 모습이었다.하지만 최가원은 환하게 웃으며 작은 새처럼 배윤아의 품에 뛰어들었다.최군성도 배윤아 옆으로 다가가며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가원아.”체육 선생님이 배윤아를 가리키며 물었다.“이분도 네 가족이니?”“네!”최가원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배윤아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고 무심결에 최군성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그 순간, 최가원은 갑자기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윤아 이모를 오게 한 이유가 선생님에게 소개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최가원은 둘째 삼촌이 더 좋았다.평소 삼촌이 자신을 자주 놀리곤 했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든든히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었다.최가원은 작은 이마를 찌푸리며 잠시 고민하다 부모님의 말씀을 어기고 체육 선생님에게 이모를 소개하지 않기로 결심했다.체육 선생님은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지만 세상에 단 하나뿐인 둘째 삼촌만큼은 절대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최가원은 한 손으로 최군성의 손을, 다른 손으로 배윤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고는 뽐내듯 고개를 들고 귀여운 목소리로 외쳤다.“선생님, 잘 보세요! 이쪽은 우리 둘째 삼촌이고요, 이쪽은... 우리 둘째 이모예요! 앞으로 둘이 저를 자주 데리러 올 거예요!”체육 선생님은 가볍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하지만 최군성과 배윤아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고 얼굴은 동시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애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네?”최가원은 어리둥절했다.두 사람은 말투부터 표정까지 완벽히 똑같았다.“그만하고 빨리 집에 가자!”최군성은
“저는 이 아이의 둘째 삼촌입니다!”체육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무릎을 굽혀 부드럽게 최가원에게 물었다.“가원아, 이 사람 알아?”최군성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불만스럽게 말했다.“아니, 선생님! 저를 못 믿으시겠단 건가요?”“정말 죄송합니다.”체육 선생님은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건 유치원 규정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저희는 모든 아이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거든요. 평소에 가원이는 보모나 경호원, 때론 부모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데리러 오셨죠. 가끔은 지용 삼촌이나 인서 이모도 오셨는데, 둘째 삼촌이라는 분은 없었던 것 같아서요... 그래서 다시 확인한 겁니다. 아이를 모르는 분께 맡길 순 없잖아요.”최군성은 말문이 막혔다.사실 최군성이 유치원을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만약 ‘경쟁자’를 확인할 일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가원아, 이 사람 알아?”체육 선생님은 다시 물었다.최군성은 조카에게 눈짓을 보내며 도움을 요청했다.하지만 최가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최군성은 조카를 놀리듯 평소처럼 귀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면서 목을 조르는 시늉을 했다.평소에도 삼촌과 조카는 이런 유치한 장난으로 서로를 놀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서로 장난감을 뺏거나 간식을 두고 자주 다퉜다. 심지어 그림 도구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다 서로 몸싸움까지 하는 모습은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최가원은 늘 삼촌에게 밀려 속상해하며 발을 동동 굴렀었다.오늘, 드디어 복수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최가원은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장난스럽게 미소 짓더니 천천히 말했다.“모르는 사람이에요!”“뭐?”최군성은 당황한 나머지 거의 뛰어오를 뻔했다.“이 꼬맹아!”최군성은 조카의 머리끈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체육 선생님은 아이를 납치하려는 줄로 오해해 재빨리 최군성의 손목을 붙잡아 힘껏 비틀었다.“아!”최군성은 고통을 느끼며 몇
하지만 배윤아와 최군성은 지금의 관계에 매우 만족스러워 보였다.지난 2년 동안, 두 사람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저작권을 판매하며 작품을 각색했다. 나아가 함께 애니메이션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두 사람은 함께 바쁘게 뛰어다니며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함께 나누며 예술적 영감도 서로 나눴다.두 예술인이 함께 지내는 만큼, 각자의 예술적 견해를 두고 종종 불꽃 튀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최군형과 강소아는 몇 번이나 두 사람의 관계가 정말 끝나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그러나 방금까지 싸움닭처럼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화해했고 화실 안은 금세 따스한 온기로 가득 찼다.강소아가 딸에게 물었다.“엄마가 알려준 말, 다 전했어?”최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삼촌 반응은 어땠어?”“음...”최가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삼촌한테는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아요!”“뭐라고?”강소아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옆에서 듣고 있던 최군형은 강소아를 끌어안으며 웃었다.“찮아, 천천히 풀어가자. 군성이는 생각보다 고집이 센 편은 아니니까.”“그래도 이렇게 질질 끌고 있으니까...”강소아는 여전히 답답한 표정이었다.“걱정하지 마.”최군형은 딸을 바라보며 물었다.“가원아, 내일 유치원 끝나면 누구 손잡고 나올 거야?”최가원은 크림 케이크를 한입 먹던 중 아빠의 말에 신이 나서 고양이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체육 선생님!”“정답이야!”부녀는 힘차게 손뼉을 마주쳤다.다음 날, 최군성은 유치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유치원 정문에 나타났다.최군성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늘 폴로셔츠와 청바지 같은 편한 옷만 입던 그가 오늘은 세련된 정장을 입고 머리까지 깔끔하게 손질했다.평소 화실에서의 부스스한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최군성의 외모와 체격은 최씨 가문의 젊은 세대 중에서도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외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남양 제일 미남’의
최군형은 방금 다 먹은 닭 날개 꼬치를 들고 최군성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꼬치를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엄마가 항상 옳다니까. 넌 정말...”최군성은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뭐가?”최군형은 이를 악물며 한 마디로 대답했다.“유난이야!”그 말을 내뱉고는 최지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최군성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어리둥절했다. 멀찍이서 바라보니 저쪽은 꽤 북적거리고 있었다. 최군성의 내면 깊은 곳에서 ‘흥겨운 분위기를 즐기는 본능’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최군성은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스케치북을 펴고 빠르게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다른 사람들은 대충 윤곽만 그린 반면, 특정 인물을 그릴 때만큼은 세심하게 한 획 한 획 공들여 그려내어 풍경 속에서도 돋보이게 했다....모든 일이 마무리되었고 이제 남은 건 최지용과 백인서의 결혼식이었다.최군형도 두 사람의 결혼을 돕고 싶어 최근 며칠 동안 집에 머물며 부모님과 함께 세심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지용이와 인서는 둘 다 조용한 걸 좋아하니, 웅장한 것보다는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결혼식이 더 잘 어울릴 것 같구나.”최연준은 상자에서 온갖 보물들을 꺼내며 결혼 선물로 줄 것을 고르고 있었다. 그중 강서연은 분홍빛 진주 세트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이게 딱이겠네! 인서에게 정말 잘 어울릴 거야.”“엄마.”최군형은 살짝 놀라며 말했다.“그건 외할아버지께서 엄마에게 주신 거잖아요. 남양 주변 해역에서만 나는 진주라면서요.”“맞아, 그런데...”강서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분홍색은 젊고 사랑스러운 느낌이잖아. 이제는 엄마한테 조금 안 어울릴지도 모르겠어.”“누가 그래!”최연준은 즉각 반박하며 손을 뻗어 진주 세트를 집어 들려 했다. 그러자 강서연은 그의 손등을 톡 치며 진주를 되찾아왔다.“인서에게 줄 거니까 당신은 끼어들지 말아요!”“우리 다른 선물을 하자고! 이건 당신이 간직해야 할 물건이야!”두 사람은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
강소아가 손짓하자 최지용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백인서에게로 달려갔다.“이제 딸을 보러 가야겠네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저 대신... 인서 좀 돌봐줄 수 있을까요?”최지용은 그 말에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아까는 주저하며 다가가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주변에 권욱과 강소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은 백인서의 오빠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녀의 절친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다가가면 괜히 이상하게 보일까 봐 망설였다.최지용이 어깨를 펴고 당당히 백인서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뭐 해요?”최지용은 깜짝 놀랐다.“너야 말고 뭐해?”권욱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감히 내 눈앞에서 내 동생한테 손대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어?”“...”최지용은 당황해서 말을 잃었다.생각해 보면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뭔가 삐걱거렸던 것 같았다. 서로 영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땐 권욱이 백인서의 오빠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오히려 잠재적 경쟁 상대로 여기기도 했었다.그리고 지금...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렸다.“쓸데없이 귀찮게 하지 말고 물러나!”권욱은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최지용을 흘겨보며 말했다.“동생과 나에겐 나눌 얘기가 산더미처럼 쌓였으니 방해하지 마!”“할 얘기가 뭐가 그렇게 많은데요?”“예를 들면... 인서가 권씨 가문에서 맡게 될 직책 같은 거?”“그나저나!”최지용은 그제야 떠오른 듯 고개를 치며 말했다.“아까 권욱 씨 입으로 직접 말했어요. 최상 그룹과 권오 그룹이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권씨 가문이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동생을 우리 최씨 집안에 시집보내겠다고요!”“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권욱은 태연하게 모른 척하며 말을 돌렸다.“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저기요, 권욱 씨!”두 남자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백인서는 살짝 뒤로 물러나 두 사람의 시야에서 벗어났다.백인서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 과거에는
손님들이 웅성거리며 비명이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백인서?”배윤아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큰 소리를 질러?”“아니야... 난 백인서가 아니야!”백시연은 목이 쉬도록 외치며 갑자기 강소아를 돌아보았다.“말해봐! 아까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내가 백인서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 수 있게 똑똑히 말하라고!”“인서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강소아는 담담하면서도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차분히 백시연의 손을 밀어냈다.“혹시 술이라도 마신 거야? 취한 것 같아.”“강소아 씨!”백시연은 분노에 치를 떨며 외쳤다.강소아는 백시연의 손을 잡고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인서야, 우린 자매잖아. 여기서 소란스러운 모습 보이지 말자. 오늘은 어쨌든 육씨 가문의 중요한 날이기도 하고 내 딸도 여기 있어... 그러니까, 제발 진정해 줘.”“아니야...”“인서야!”“아니라고! 아니라고!”백시연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섰다.“난 백인서가 아니야! 몇 번을 말해야 믿을 거야?”배윤아는 피식 웃으며 백시연의 팔짱을 끼고 태연히 말했다.“어머, 백인서. 왜 그래? 백인서가 아니면, 왜 백인서 얼굴을 하고 있는 건데? 그런데... 굳이 너와 백인서의 다른 점을 꼽으라면... 손목에 그림이 있다는 거?”“비켜!”백시연은 배윤아를 거칠게 밀어내고 다급히 무대를 향해 뛰어갔다.백인서는 고요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마침내 기다리던 이 순간이 왔다.백인서는 천천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눈앞의 백시연을 바라보았지만,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의 이 사람은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백인서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백시연은 진짜 악마일지도 모른다고.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한쪽은 천사, 다른 한쪽은 악마. 그리고 자신과 백시연 같은 쌍둥이의 운명은 그런 인간의 본성을 극대화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가면은 순금으로 빚어졌고 가장자리에는 보석이 촘촘히 박혀 조명이 닿을 때마다 눈 부신 빛을 흩뿌렸다.백시연은 그 자리에 선 채 몸이 굳어버렸다.“이... 이럴 수가!”그 사이, 백인서는 이미 무대 위로 올라가 권욱 옆에 서 있었다.권욱은 이어서 말했다.“이분이 바로 제 이복동생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늘 제 동생을 걱정하며 꼭 찾아달라고 당부하셨죠. 이제야 동생을 찾게 되었습니다!”권욱은 백인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 속에는 진심 어린 애정과 따스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엔 동생의 출생에 대해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죠. 우리는 결국 한 가족입니다. 동생을 찾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동생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요... 우리 권씨 가문이 제 동생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하늘의 뜻일지도 모릅니다. 동생의 존재는 제 딸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이분은 제 동생일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의 은인이기도 합니다!”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고 몇몇은 감동에 겨워 눈가를 붉혔다.하지만 백시연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동생이란 말인가? 그리고 왜 저 여자도 가면을 쓰고 있는 걸까?분명 백인서는 종수가 지하실에 가둬뒀고 곧 처리될 운명이 아니었던가.“그리고 이어서 발표하겠습니다!”권욱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권씨 가문의 재산 중 절반을, 이 세상 유일한 동생에게 넘기겠습니다!”“뭐... 뭐라고?”백시연의 온몸은 떨림으로 굳어졌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갔다.“아니야... 이건 아니야!”“뭐가 아니야?”강소아가 일부러 물었다.“인서야, 어디 아파?”“그게....”“권 대표는 네 직장 상사잖아? 상사가 가족을 찾은 거니 축하해줘야지!”백시연은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강소아는 낮게 웃음을 흘리며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게 백시연의 귀에 속삭였다.“그렇게 백인서의 자리가
“그게... 무슨 뜻이에요?”백시연은 침착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지만, 권욱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이 카드가 제 거 아니면 누구 건데요?”“난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권욱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번졌다.“그냥 문득 우리 아내도 이런 비슷한 카드를 몇 장 가지고 있던 게 떠올랐을 뿐이야. 카드 색깔도 이런 파란색이었고 뒷면에는 대나무 무늬의 홀로그램이 새겨져 있었어. 조씨 가문은 학문을 중시하는 전통을 지닌 집안이라 대나무처럼 강인하고 꿋꿋한 식물을 특별히 아낀다고 하더군. 한번 뒤집어 확인해 볼래?”백시연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창백해졌고 손은 카드 위에서 더욱 굳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백시연은 강소아를 찾아갔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약속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묘안석이 그렇게 비싼 줄 몰라서 서둘러 나오느라 준비가 부족해 지금은 이 카드밖에 없다고 둘러댔다.그러고는 억지로 친근한 미소를 띠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소아 언니, 우리 자매처럼 친한 사이잖아요. 언니 딸은 곧 제 딸이나 다름없죠! 가원이에게 쓰는 돈이라면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강소아는 미소를 머금고 백시연의 손에서 카드를 슬쩍 가져가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정말? 고마워! 나중에 가원이가 크면 널 두 번째 어머니로 생각할 거야.”백시연의 얼굴 근육이 떨렸지만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인서야.”강소아는 다정한 눈빛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권욱의 공익 프로젝트를 도맡아 관리하고 있다면서? 잘한다는 칭찬이 자자하더라. 몇 번이나 넌 정말 유능한 관리형 인재라고 말했어.”“아... 그래요?”백시연은 속으로 긴장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그럼!”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앞으로도 너한테 정말 잘해줄 생각이야.”그 말을 듣자 백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10억 원을 써서 강소아의 호의를 얻은 거라면 나쁘지 않은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아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