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가원은 겁먹은 듯 남자를 올려다보았다.작은 머릿속이 순식간에 수많은 질문으로 가득 찼다. 엄마가 항상 예의를 지키라고 했으니, 이분을 ‘아저씨'라고 불러야 할까?하지만 나이가 삼촌보다 훨씬 많아 보이는데... 그러면 ‘할아버지’라고 해야 하나?내가 먹던 아이스크림이 이 남자의 외투에 잔뜩 묻었는데, 먼저 사과를 해야 하는 걸까?이건 내가 좋아하는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이고 아직 몇 입 먹지도 못했는데...“꼬마야.”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마치 첼로 소리처럼 깊었다.“네가 최가원이지?”최가원은 깜짝 놀라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남자는 신비로운 미소를 띠며 자신의 외투에 묻은 아이스크림 자국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그때, 뒤에서 다급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원아! 괜찮아?”최군성과 배윤아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두 사람은 가원이가 다치지 않았는지 확인한 뒤, 남자의 검은 외투에 묻은 하얀 아이스크림을 발견했다.“정말 죄송합니다!”최군성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옷을 더럽혔네요. 혹시 연락처를 남겨 주시면 제가 새 옷을 사서 보내드리겠습니다.”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깊은 눈빛은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했다.최군성은 남자를 자세히 살폈다.비록 중년이지만 여전히 강인한 체격과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있었지만 그만큼 중후한 매력이 풍겨 나왔다.최군성은 만화가로서 젊고 화려한 미소년들만 그려왔고 이런 중년 멋쟁이 스타일은 늘 시도하고 싶었었다. 하지만 늘 도전하지 못했었다.이 멋진 중년 남자는 계속해서 최가원만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아까 물었던 질문, 내가 맞췄지?”최가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속으로 생각했다.삼촌도 이 남자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그런데 이 이상한 아저씨는 가원이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엄마는 낯선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고 항상 조심하라고 했다.최가원은 턱을 당당히 들어 올리고 힘 있는 목소리로 단
최군형은 다가가 동생의 뒤통수를 가볍게 튕겼다. 손끝에서 딱 소리가 났다.“아야!”최군성은 고통스러워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눈과 손은 여전히 휴대전화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형, 너무한 거 아니야? 이렇게 때려서 내 머리가 망가지면 나중에 형이 내 인생 책임질 거야?”“나중에 배씨 가문이 널 책임질 거야. 난 그럴 능력 없어.”“뭐라고?”그때 최군성의 표정이 바뀌더니 갑자기 낮게 소리치며 소파를 주먹으로 쳤다.게임 클리어를 바로 앞두고 실패한 것이었다.“게임만 하지 말고.”최군형은 동생 옆에 앉으며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오늘 내내 배윤아랑 같이 다니면서 어떻게 됐어? 내 딸을 이렇게 피곤하게 해놓고 아무 성과도 없었다고 하면 안 된다?”“그게...”최군성은 머뭇거리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2년 전까지만 해도 최군성은 과거의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신하고 있었다. 마음은 완전히 정리됐고 새로운 감정을 받아들일 용기도 생겼다. 그런데 문제는, 배윤아가 여전히 자신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지금 두 사람은 함께 일하며 훌륭한 파트너로서 호흡을 맞췄지만 그림을 제외한 사적인 대화는 거의 나누지 않았다.“군성아? 대답 좀 해!”최군형은 미간을 찡그리고 동생의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며 말했다.“내가 물어보잖아, 또 딴생각해?”최군성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아, 맞다! 형, 오늘 놀이공원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났어.”“뭐?”최군성은 놀이공장에서 만났던 중년 남자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했다.“그 사람이 가원이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관심을 보이더라고. 형, 요즘 가원이를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아. 혹시 이상한 사람이면 어떡해!”최군형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최가원이 태어난 이후, 최군형과 강소아는 딸을 철저히 보호하며 키웠다.다른 가정에서는 아이를 재산처럼 여겨 어린 나이에 각종 방송이나 행사에 데리고 나가기도 했다. 심지어 몇몇
최군성은 머리를 감싸 쥐며 한숨을 내쉬었다.단지 배윤아에게 작은 깜짝선물하고 싶었을 뿐인데 프로젝트 하나가 이렇게 복잡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리고 몇 가지 미리 얘기해 둘게.”최군형은 일에 있어서 늘 진지했다. 최군형은 신중하고 단호한 태도로 최군성을 대했다. 그리고 컴퓨터를 켜 지도를 띄우고 멍하니 있는 최군성을 억지로 끌어다 컴퓨터 화면 앞으로 앉혔다.“이것 봐... 지리적으로 보면, 그 놀이공원은 신도시와 구도시 경계에 위치해 있어. 위치상 큰 장점은 없지. 요즘 교통이 발달해서 놀이공원을 찾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교외의 대형 놀이공원을 떠올릴 거야. 굳이 교외로 나가기 싫은 사람들은 도심 내 교통이 편리하고 시설이 잘 갖춰진 놀이공원에 가겠지. 그런 놀이공원도 소비자 수요를 충분히 충족하고 있어. 그리고 소비자 심리로 말하자면...”최군형의 설명은 끝도 없이 이어졌고 최군성은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감기는 눈꺼풀과 싸우며 최군형의 말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한참 후에야 그토록 기다리던 마지막 문장이 들려왔다.“그래서 나는 이 프로젝트는 수익성이 없다고 생각해. 이해했어?”“아... 뭐?”멍해 있던 최군성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형, 꼭 수익성이 있어야 해?”“그럼, 우리가 자선 사업이라도 하냐?”최군형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자선 사업이라면 굳이 이런 프로젝트를 할 필요가 없어. 사회적 이미지를 높이고 싶다면 우리 입장에서 놀이공원을 고치는 건 적합하지 않거든.”“형, 나를 좀 응원해 주면 안 돼? 나한테 선물해 주면 안 되냐고!”최군형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동생의 맑은 눈에는 순수한 결의가 가득했다.“군성아, 이제는 철 좀 들어야지.”최군형은 최군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남자답게 행동할 수는 없어? 맨날 애처럼 굴지 말고.”“형 나 무시하는 거지!”최군형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대답했다.“맞아.”최군성은 화가 나서 거의 소파에서 뛰어오를 뻔했다.하지만 최군성은 자
최가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남자를 쳐다보았지만 남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남겼다.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바람에 휘날리는 오동나무 잎은 황금빛으로 반짝였다.석양은 남자의 등 뒤로 부드럽게 내려앉았지만, 그를 감싸는 황금빛은 묘하게 차가운 기운을 풍기며 쉽게 접근할 수 없을 듯한 신비로운 아우라를 뿜어냈다.“가원 아가씨, 이제 집에 가요.”보모가 최가원의 작은 손을 잡았다.“저 아저씨, 누군지 알아요?”최가원이 얼굴을 들어 물었다.보모는 고개를 저었다. 이 남자가 주는 강한 기운은 그저 무서움만 자아냈다.“이제 그만 가자, 여기 너무 외진 곳이니까 앞으로 이런 데는 오지 말아요.”최가원은 보모의 손을 잡고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며 차에 올랐다. 떠나기 직전, 최가원은 무의식적으로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흩어진 몇몇 관광객들만 보일 뿐, 남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최씨 가문의 놀이공원 개조 프로젝트는 회사 이사회에서 결론이 나지 않고 있었다.몇몇 이사들은 이 기회를 잡아 최군성의 환심을 사려는 듯, 프로젝트에 투자해야 한다며 떠밀었다. 작은 액수라 크게 상관없다고 했다.하지만 대부분의 이사는 이 프로젝트가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최씨 가문의 이미지와도 직결된다고 주장했다.최씨 가문은 이런 작은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과거에 했던 공익 프로젝트들은 대개 병원, 요양원, 복지시설 등 규모가 크고 공적인 성격이 짙은 것들이었다.이런 오래된 놀이공원 프로젝트는 노력과 시간을 들일 만한 가치가 없다는 의견이 많았다.더욱이, 만약 놀이공원 개조가 제대로 되지 않아 흥행에 실패한다면 회사의 명성이 손상될 수도 있었다.최군형은 업무에 있어 늘 가족보다는 이성을 우선시했지만 이번만큼은 동생을 위해 뭔가 해주고 싶었다.“놀이공원 개조 프로젝트는 결국 이사회에서 승인받지 못했어.”최군형의 말에 최군성은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소파에 늘어졌다.“하지만...”최군형은 미소를
임우정은 고개를 저었다.임지강과의 연락은 뜸했지만, 어린 시절 동생이 보여줬던 따뜻한 배려는 여전히 기억 속에 선명했다.대학 시절,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임지강이 집안 돈을 몰래 훔쳐 홀로 강주까지 찾아온 적이 있었다. 육경섭이 감옥에 있을 때, 임지강은 누나가 힘들어할까 봐 자주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어린 소년의 마음은 철없지만 순수했다. 힘든 시절, 임지강은 누나에게 가족의 따뜻함을 다시 느끼게 해준 유일한 존재였다.그 후로도 임우정은 종종 운성시로 가 임지강을 만나곤 했다. 운성시의 가장 유명한 먹거리 골목에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임지강이 성장하면서 두 사람 사이의 연락은 점점 끊어졌다.임우정은 단지 소문으로만 임지강의 소식을 들을 뿐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임지강은 가족 내 갈등에 휘말렸고 집안에서 가장 자격이 없다는 평가를 받던 그가 어린 나이에 가족 내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것이었다.임지강은 치밀한 계획과 과감한 수단으로 냉혹한 인물로 자리 잡았다. 그가 결단을 내릴 때는 인정사정 볼 것 없었고 가족 중 많은 이들이 그를 피해 떠났으며 현재 운성시에서는 그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하지만 누나인 임우정에게만큼은 여전히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많지 않은 연락 속에서도 그는 늘 임우정를 챙겼고 특히 임우정이 어린 딸 소유를 잃었던 시기에는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소유를 찾으려 노력했다.“아마도 나쁜 의도는 없을 거야.”임우정은 자기 자신을 달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임지강은 계속 운성시에 머물렀기에 오성과 원한 같은 건 없을 거야. 단지 투자 목적으로 온 걸지도 모르지.”“그랬으면 좋겠네요.”강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카페의 작은 정원은 손님들로 북적거렸고 멀리서 한 사람이 이쪽을 조용히 바라보며 복잡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한편, 놀이공원 개조 프로젝트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속도는 심지어 최군형마저도 놀랄 정도였다.하지만 최군성은 내내 한숨만 쉬었다. 배윤
놀이공원 개조 완공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에서 임우정은 오랜만에 동생 임지강과 마주쳤다.임지강의 모습을 본 순간, 임우정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임지강은 이제 더 이상 기억 속의 그 순수하고 밝은 소년이 아니었다.세월은 그의 모습에 성숙함과 여유를 덧입혔지만, 동시에 그의 눈가에는 차가운 빛을 남겼다. 강렬한 카리스마는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감을 느끼게 했다.임지강은 천천히 다가와 임우정을 오래도록 응시한 뒤,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서연 누나 맞죠?”임지강의 시선이 천천히 임우정 옆에 선 강서연으로 옮겨갔다.“젊었을 때와 똑같으시네요. 하나도 변하지 않으신 것 같아요!”“말을 참 예쁘게도 하네.”강서연은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세월이 흘러 나는 이제 손녀까지 있는 할머니야. 어떻게 예전과 같을 수 있겠어?”“누나들이야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군중 속에서 가장 빛나시죠.”강서연은 몇 마디 주고받고는 자리를 떠났다.임우정은 동생의 눈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이 스쳐 갔다. 바뀐 것이 많았지만, 어쩐지 바뀌지 않은 것도 많았다. 임우정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개조된 놀이공원의 모습을 대형 스크린에 띄워 보여주며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이곳은 아이들에게 정말 인기가 많을 거예요.”임지강이 말을 이어갔다.“보아하니 가원이도 아주 좋아하더라고요.”“가원이한테 들었어.”임우정은 미소를 지었다.“솜사탕처럼 꾸며달라고 했더니 정말 그렇게 만들었더라고. 너무 맞춰주는 거 아니야?”“그 아이는 누나의 외손녀일 뿐 아니라 우리 임씨 가문의 소중한 아이이기도 하죠. 그러니 당연히 예뻐할 수밖에요.”“지강아...”임우정은 무거운 숨을 내쉬며 말을 삼켰다.임우정은 임지강이 이번에 돌아온 이유가 단순한 투자만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임우정이 두려워하던 일이 곧 현실이 될 것 같았다.“누나, 돌려 말하지 않을게요.”임지강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누
임우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경계 어린 눈빛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임지강의 시선은 최가원에게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임지강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미소 아래에는 알 수 없는 파동이 흐르고 있었다.강서연은 임우정을 흘끗 바라보며 차가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우정 언니.”강서연은 임지강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어쨌든 두 사람은 결국 가족이잖아요. 저 아직도 기억해요. 지강이가 어렸을 때, 집안 돈을 몰래 훔쳐서 기차를 타고 강주까지 언니를 보러 왔던 거요. 그때 강주엔 첫눈이 내렸고 지강이는 얇은 옷만 입고 기차역에서 벌벌 떨다가 길 잃은 아이로 오해받아 복지시설로 보내졌었죠.”“언니랑 지강이의 사이는 피보다 진한 정이 있잖아요. 저는 지강이가 진짜 무슨 일을 저리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임지강은 강서연을 스쳐 지나가는 눈길로 흘깃 보았다.“하지만.”강서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사람은 누구나 변하잖아요.”“임지강, 변하는 건 너뿐만이 아니야. 우정 언니도 변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도 있지만, ‘대의를 위해 가족을 벌한다'는 말도 있어.”“육씨 가문이 어떤 세력인지 운성시에서도 소문은 익히 들었겠지? 그리고 우리 최씨 가문은...”강서연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돌렸다.“됐어, 이런 얘기. 오늘 같은 날에는 의미 없지. 오늘은 네 놀이공원 프로젝트 성공을 축하하러 온 날이니까, 즐겁게 보내야지!”임지강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 속 어두운 기운은 점점 짙어졌다.“서연 누나는 여전하네요. 말솜씨가 정말 대단하세요.”“전 같지 않아.”강서연은 깊은 뜻을 담은 눈빛으로 임지강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람은 누구나 변하니까.”임지강은 잔을 들어 술을 삼켰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뜨거운 느낌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그 사람도... 많이 변했겠지?임지강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 채 연회장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바깥에는 서리 같은 달빛이 내리고 있었다.
송윤지의 눈빛은 여전히 맑았고 미소는 순수했다. 마치 5년 전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듯했다.그러나 그녀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임지강을 향한 어떤 의지나 동경, 사랑, 그리고 미움마저도 비치지 않았다.임지강의 가슴이 순간 날카롭게 찔렸다.아저씨라고?하지만 송윤지는 분명 예전에 임지강을 보고 조금도 늙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었다.“아저씨! 아저씨?”송윤지는 임지강이 멍하니 있는 걸 보고 가만히 불렀다.“아저씨, 무슨 일 있으세요?”임지강은 정신을 차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미안하다는 뜻으로 송윤지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사고를 쳤네요. 이 곰돌이 인형을 들고 들어와 아이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했어요.”“이 곰돌이 인형, 정말 귀엽네요.”송윤지가 웃으며 말했다.“아이들뿐만 아니라 저도 좋아해요!”“정말요?”임지강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가 이내 눈빛에 부드러운 빛이 맴돌았다.이 곰돌이 인형은 5년 전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선물했던 것이었다.송윤지는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좋아하신다면, 이 곰돌이 교실에 두고 계세요.”임지강은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면 아이들과 함께 매일 볼 수 있잖아요.”윤지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섦이 서서히 피어올랐다.어딘가 익숙한 사람 같았지만 텅 빈 기억 속에서는 임지강에 대한 어떤 모습도 떠오르지 않았다.“아저씨.”송윤지가 작게 중얼거리며 물었다.“전에 뵌 적 없었던 것 같은데... 누구신지 여쭤봐도 될까요?”“저는 아이를 데리러 왔습니다.”임지강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그때, 최가원이 방방 뛰며 달려와 다람쥐처럼 임지강의 다리에 매달렸다. 임지강은 최가원을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며 애정 어린 미소를 지었다.“이제 하교 시간이네? 우리 이제 집에 갈까?”“잠깐만요!”교사로서의 책임감에 송윤지가 앞으로 나서며 임지강을 막아섰다.“아저씨, 그냥 아이를 데리고 가시면 안 돼요.”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