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군형은 다가가 동생의 뒤통수를 가볍게 튕겼다. 손끝에서 딱 소리가 났다.“아야!”최군성은 고통스러워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눈과 손은 여전히 휴대전화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형, 너무한 거 아니야? 이렇게 때려서 내 머리가 망가지면 나중에 형이 내 인생 책임질 거야?”“나중에 배씨 가문이 널 책임질 거야. 난 그럴 능력 없어.”“뭐라고?”그때 최군성의 표정이 바뀌더니 갑자기 낮게 소리치며 소파를 주먹으로 쳤다.게임 클리어를 바로 앞두고 실패한 것이었다.“게임만 하지 말고.”최군형은 동생 옆에 앉으며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오늘 내내 배윤아랑 같이 다니면서 어떻게 됐어? 내 딸을 이렇게 피곤하게 해놓고 아무 성과도 없었다고 하면 안 된다?”“그게...”최군성은 머뭇거리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2년 전까지만 해도 최군성은 과거의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신하고 있었다. 마음은 완전히 정리됐고 새로운 감정을 받아들일 용기도 생겼다. 그런데 문제는, 배윤아가 여전히 자신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지금 두 사람은 함께 일하며 훌륭한 파트너로서 호흡을 맞췄지만 그림을 제외한 사적인 대화는 거의 나누지 않았다.“군성아? 대답 좀 해!”최군형은 미간을 찡그리고 동생의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며 말했다.“내가 물어보잖아, 또 딴생각해?”최군성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아, 맞다! 형, 오늘 놀이공원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났어.”“뭐?”최군성은 놀이공장에서 만났던 중년 남자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했다.“그 사람이 가원이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관심을 보이더라고. 형, 요즘 가원이를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아. 혹시 이상한 사람이면 어떡해!”최군형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최가원이 태어난 이후, 최군형과 강소아는 딸을 철저히 보호하며 키웠다.다른 가정에서는 아이를 재산처럼 여겨 어린 나이에 각종 방송이나 행사에 데리고 나가기도 했다. 심지어 몇몇
최군성은 머리를 감싸 쥐며 한숨을 내쉬었다.단지 배윤아에게 작은 깜짝선물하고 싶었을 뿐인데 프로젝트 하나가 이렇게 복잡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리고 몇 가지 미리 얘기해 둘게.”최군형은 일에 있어서 늘 진지했다. 최군형은 신중하고 단호한 태도로 최군성을 대했다. 그리고 컴퓨터를 켜 지도를 띄우고 멍하니 있는 최군성을 억지로 끌어다 컴퓨터 화면 앞으로 앉혔다.“이것 봐... 지리적으로 보면, 그 놀이공원은 신도시와 구도시 경계에 위치해 있어. 위치상 큰 장점은 없지. 요즘 교통이 발달해서 놀이공원을 찾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교외의 대형 놀이공원을 떠올릴 거야. 굳이 교외로 나가기 싫은 사람들은 도심 내 교통이 편리하고 시설이 잘 갖춰진 놀이공원에 가겠지. 그런 놀이공원도 소비자 수요를 충분히 충족하고 있어. 그리고 소비자 심리로 말하자면...”최군형의 설명은 끝도 없이 이어졌고 최군성은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감기는 눈꺼풀과 싸우며 최군형의 말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한참 후에야 그토록 기다리던 마지막 문장이 들려왔다.“그래서 나는 이 프로젝트는 수익성이 없다고 생각해. 이해했어?”“아... 뭐?”멍해 있던 최군성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형, 꼭 수익성이 있어야 해?”“그럼, 우리가 자선 사업이라도 하냐?”최군형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자선 사업이라면 굳이 이런 프로젝트를 할 필요가 없어. 사회적 이미지를 높이고 싶다면 우리 입장에서 놀이공원을 고치는 건 적합하지 않거든.”“형, 나를 좀 응원해 주면 안 돼? 나한테 선물해 주면 안 되냐고!”최군형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동생의 맑은 눈에는 순수한 결의가 가득했다.“군성아, 이제는 철 좀 들어야지.”최군형은 최군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남자답게 행동할 수는 없어? 맨날 애처럼 굴지 말고.”“형 나 무시하는 거지!”최군형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대답했다.“맞아.”최군성은 화가 나서 거의 소파에서 뛰어오를 뻔했다.하지만 최군성은 자
최가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남자를 쳐다보았지만 남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남겼다.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바람에 휘날리는 오동나무 잎은 황금빛으로 반짝였다.석양은 남자의 등 뒤로 부드럽게 내려앉았지만, 그를 감싸는 황금빛은 묘하게 차가운 기운을 풍기며 쉽게 접근할 수 없을 듯한 신비로운 아우라를 뿜어냈다.“가원 아가씨, 이제 집에 가요.”보모가 최가원의 작은 손을 잡았다.“저 아저씨, 누군지 알아요?”최가원이 얼굴을 들어 물었다.보모는 고개를 저었다. 이 남자가 주는 강한 기운은 그저 무서움만 자아냈다.“이제 그만 가자, 여기 너무 외진 곳이니까 앞으로 이런 데는 오지 말아요.”최가원은 보모의 손을 잡고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며 차에 올랐다. 떠나기 직전, 최가원은 무의식적으로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흩어진 몇몇 관광객들만 보일 뿐, 남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최씨 가문의 놀이공원 개조 프로젝트는 회사 이사회에서 결론이 나지 않고 있었다.몇몇 이사들은 이 기회를 잡아 최군성의 환심을 사려는 듯, 프로젝트에 투자해야 한다며 떠밀었다. 작은 액수라 크게 상관없다고 했다.하지만 대부분의 이사는 이 프로젝트가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최씨 가문의 이미지와도 직결된다고 주장했다.최씨 가문은 이런 작은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과거에 했던 공익 프로젝트들은 대개 병원, 요양원, 복지시설 등 규모가 크고 공적인 성격이 짙은 것들이었다.이런 오래된 놀이공원 프로젝트는 노력과 시간을 들일 만한 가치가 없다는 의견이 많았다.더욱이, 만약 놀이공원 개조가 제대로 되지 않아 흥행에 실패한다면 회사의 명성이 손상될 수도 있었다.최군형은 업무에 있어 늘 가족보다는 이성을 우선시했지만 이번만큼은 동생을 위해 뭔가 해주고 싶었다.“놀이공원 개조 프로젝트는 결국 이사회에서 승인받지 못했어.”최군형의 말에 최군성은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소파에 늘어졌다.“하지만...”최군형은 미소를
임우정은 고개를 저었다.임지강과의 연락은 뜸했지만, 어린 시절 동생이 보여줬던 따뜻한 배려는 여전히 기억 속에 선명했다.대학 시절,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임지강이 집안 돈을 몰래 훔쳐 홀로 강주까지 찾아온 적이 있었다. 육경섭이 감옥에 있을 때, 임지강은 누나가 힘들어할까 봐 자주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어린 소년의 마음은 철없지만 순수했다. 힘든 시절, 임지강은 누나에게 가족의 따뜻함을 다시 느끼게 해준 유일한 존재였다.그 후로도 임우정은 종종 운성시로 가 임지강을 만나곤 했다. 운성시의 가장 유명한 먹거리 골목에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임지강이 성장하면서 두 사람 사이의 연락은 점점 끊어졌다.임우정은 단지 소문으로만 임지강의 소식을 들을 뿐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임지강은 가족 내 갈등에 휘말렸고 집안에서 가장 자격이 없다는 평가를 받던 그가 어린 나이에 가족 내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것이었다.임지강은 치밀한 계획과 과감한 수단으로 냉혹한 인물로 자리 잡았다. 그가 결단을 내릴 때는 인정사정 볼 것 없었고 가족 중 많은 이들이 그를 피해 떠났으며 현재 운성시에서는 그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하지만 누나인 임우정에게만큼은 여전히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많지 않은 연락 속에서도 그는 늘 임우정를 챙겼고 특히 임우정이 어린 딸 소유를 잃었던 시기에는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소유를 찾으려 노력했다.“아마도 나쁜 의도는 없을 거야.”임우정은 자기 자신을 달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임지강은 계속 운성시에 머물렀기에 오성과 원한 같은 건 없을 거야. 단지 투자 목적으로 온 걸지도 모르지.”“그랬으면 좋겠네요.”강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카페의 작은 정원은 손님들로 북적거렸고 멀리서 한 사람이 이쪽을 조용히 바라보며 복잡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한편, 놀이공원 개조 프로젝트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속도는 심지어 최군형마저도 놀랄 정도였다.하지만 최군성은 내내 한숨만 쉬었다. 배윤
놀이공원 개조 완공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에서 임우정은 오랜만에 동생 임지강과 마주쳤다.임지강의 모습을 본 순간, 임우정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임지강은 이제 더 이상 기억 속의 그 순수하고 밝은 소년이 아니었다.세월은 그의 모습에 성숙함과 여유를 덧입혔지만, 동시에 그의 눈가에는 차가운 빛을 남겼다. 강렬한 카리스마는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감을 느끼게 했다.임지강은 천천히 다가와 임우정을 오래도록 응시한 뒤,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서연 누나 맞죠?”임지강의 시선이 천천히 임우정 옆에 선 강서연으로 옮겨갔다.“젊었을 때와 똑같으시네요. 하나도 변하지 않으신 것 같아요!”“말을 참 예쁘게도 하네.”강서연은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세월이 흘러 나는 이제 손녀까지 있는 할머니야. 어떻게 예전과 같을 수 있겠어?”“누나들이야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군중 속에서 가장 빛나시죠.”강서연은 몇 마디 주고받고는 자리를 떠났다.임우정은 동생의 눈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이 스쳐 갔다. 바뀐 것이 많았지만, 어쩐지 바뀌지 않은 것도 많았다. 임우정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개조된 놀이공원의 모습을 대형 스크린에 띄워 보여주며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이곳은 아이들에게 정말 인기가 많을 거예요.”임지강이 말을 이어갔다.“보아하니 가원이도 아주 좋아하더라고요.”“가원이한테 들었어.”임우정은 미소를 지었다.“솜사탕처럼 꾸며달라고 했더니 정말 그렇게 만들었더라고. 너무 맞춰주는 거 아니야?”“그 아이는 누나의 외손녀일 뿐 아니라 우리 임씨 가문의 소중한 아이이기도 하죠. 그러니 당연히 예뻐할 수밖에요.”“지강아...”임우정은 무거운 숨을 내쉬며 말을 삼켰다.임우정은 임지강이 이번에 돌아온 이유가 단순한 투자만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임우정이 두려워하던 일이 곧 현실이 될 것 같았다.“누나, 돌려 말하지 않을게요.”임지강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누
임우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경계 어린 눈빛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임지강의 시선은 최가원에게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임지강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미소 아래에는 알 수 없는 파동이 흐르고 있었다.강서연은 임우정을 흘끗 바라보며 차가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우정 언니.”강서연은 임지강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어쨌든 두 사람은 결국 가족이잖아요. 저 아직도 기억해요. 지강이가 어렸을 때, 집안 돈을 몰래 훔쳐서 기차를 타고 강주까지 언니를 보러 왔던 거요. 그때 강주엔 첫눈이 내렸고 지강이는 얇은 옷만 입고 기차역에서 벌벌 떨다가 길 잃은 아이로 오해받아 복지시설로 보내졌었죠.”“언니랑 지강이의 사이는 피보다 진한 정이 있잖아요. 저는 지강이가 진짜 무슨 일을 저리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임지강은 강서연을 스쳐 지나가는 눈길로 흘깃 보았다.“하지만.”강서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사람은 누구나 변하잖아요.”“임지강, 변하는 건 너뿐만이 아니야. 우정 언니도 변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도 있지만, ‘대의를 위해 가족을 벌한다'는 말도 있어.”“육씨 가문이 어떤 세력인지 운성시에서도 소문은 익히 들었겠지? 그리고 우리 최씨 가문은...”강서연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돌렸다.“됐어, 이런 얘기. 오늘 같은 날에는 의미 없지. 오늘은 네 놀이공원 프로젝트 성공을 축하하러 온 날이니까, 즐겁게 보내야지!”임지강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 속 어두운 기운은 점점 짙어졌다.“서연 누나는 여전하네요. 말솜씨가 정말 대단하세요.”“전 같지 않아.”강서연은 깊은 뜻을 담은 눈빛으로 임지강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람은 누구나 변하니까.”임지강은 잔을 들어 술을 삼켰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뜨거운 느낌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그 사람도... 많이 변했겠지?임지강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 채 연회장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바깥에는 서리 같은 달빛이 내리고 있었다.
송윤지의 눈빛은 여전히 맑았고 미소는 순수했다. 마치 5년 전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듯했다.그러나 그녀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임지강을 향한 어떤 의지나 동경, 사랑, 그리고 미움마저도 비치지 않았다.임지강의 가슴이 순간 날카롭게 찔렸다.아저씨라고?하지만 송윤지는 분명 예전에 임지강을 보고 조금도 늙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었다.“아저씨! 아저씨?”송윤지는 임지강이 멍하니 있는 걸 보고 가만히 불렀다.“아저씨, 무슨 일 있으세요?”임지강은 정신을 차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미안하다는 뜻으로 송윤지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사고를 쳤네요. 이 곰돌이 인형을 들고 들어와 아이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했어요.”“이 곰돌이 인형, 정말 귀엽네요.”송윤지가 웃으며 말했다.“아이들뿐만 아니라 저도 좋아해요!”“정말요?”임지강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가 이내 눈빛에 부드러운 빛이 맴돌았다.이 곰돌이 인형은 5년 전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선물했던 것이었다.송윤지는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좋아하신다면, 이 곰돌이 교실에 두고 계세요.”임지강은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면 아이들과 함께 매일 볼 수 있잖아요.”윤지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섦이 서서히 피어올랐다.어딘가 익숙한 사람 같았지만 텅 빈 기억 속에서는 임지강에 대한 어떤 모습도 떠오르지 않았다.“아저씨.”송윤지가 작게 중얼거리며 물었다.“전에 뵌 적 없었던 것 같은데... 누구신지 여쭤봐도 될까요?”“저는 아이를 데리러 왔습니다.”임지강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그때, 최가원이 방방 뛰며 달려와 다람쥐처럼 임지강의 다리에 매달렸다. 임지강은 최가원을 조심스럽게 안아 올리며 애정 어린 미소를 지었다.“이제 하교 시간이네? 우리 이제 집에 갈까?”“잠깐만요!”교사로서의 책임감에 송윤지가 앞으로 나서며 임지강을 막아섰다.“아저씨, 그냥 아이를 데리고 가시면 안 돼요.”
“뭐라고?”최가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는 왕자님처럼 잘 생기지 않았다고요!”“이 꼬맹이가!”임지강은 손을 들며 장난스럽게 겁을 주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최가원은 그의 손길을 피할 새도 없이 품에 안겼다. 임지강이 가원이를 간지럼 태우자, 아이는 깔깔거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하지만 불쌍한 아이스크림은 또다시 “전멸”하고 말았다. 아이스크림콘이 임지강의 코트 깃에 그대로 엎어져 버린 것이다.최가원은 멍하니 손에 들린 빈 콘을 쳐다보다가 다시 임지강의 옷을 보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몇 초간 침묵을 지키던 최가원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가원아, 울지 마!”임지강은 난감해졌다. 그는 아이를 달래본 적이 없었기에 몇 살 안 된 소녀가 이렇게 큰 폐활량을 가졌다는 사실에 놀라웠다.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이상한 눈빛으로 임지강을 쳐다보았다.임지강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수치심에 얼어붙었다. 이 사람들이 설마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이상한 아저씨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저기, 가원아! 울지 마!”임지강은 급히 손으로 최가원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최가원은 그의 손을 단번에 쳐냈다.“울지 말라니까!”임지강은 목소리를 높이며 조금 엄하게 말했다.“언제까지 울 거야?”“와아아!”“이까짓 일이 뭐가 그렇게 슬프다고 울어? 아이스크림 먹고 싶으면 할아버지가 다시 사 주면 될 거 아니야!”“너무해!”최가원은 작은 주먹으로 임지강을 마구 두드리며 말했다.“다 할아버지 탓이야! 할아버지가 날 간지럼 태워서 그런 거잖아요!”“이 꼬맹이가!”“새로 사지 마세요! 안 먹을 거예요!”최가원은 고개를 돌리며 고집을 부렸다.“새로 사줘도 소용없어요! 원래 먹던 아이스크림이 아니잖아요. 전 그게 더 좋단 말이에요!”“저는 원래 게 좋아요!”임지강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해졌다.원래 게 좋다...쓴웃음이 번졌다. 어린아이조차도 대체 불가능한 것의 가치를 알고 있는데 과거의 자신은 그걸 왜 몰랐을까?임지강은 더
송윤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결혼?생각해 보니, 송윤지와 배현진은 처음 만날 때부터 결혼을 전제로 교제했던 것 같다.임우정이 소개한 관계이기도 했고 송윤지 자신도 조건이 나쁘지 않았으니 배씨 가문에서도 만족스러워하며 미래의 배씨 가문 며느리로 받아들였다.배현진 역시 부모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배현진은 연애 경험이 없었고 송윤지는 기억을 잃은 후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잃어버린 기억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고 송윤지는 과거에 대해 알 방법이 없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함께하게 된 것이다.배현진은 결혼 상대로 나쁘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일했고 능력도 뛰어난 데다가 배씨 가문의 배경까지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했다.그런데도 송윤지는 늘 그와의 관계에서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다.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윤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때 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윤지야! 대답 좀 해! 무슨 일이야?”“아, 아무것도 아니야.”송윤지는 한숨을 가볍게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언니,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전화기 너머에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한참 지나서야 송윤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난 네가 빨리 배씨 가문에 시집가서 배씨 가문의 보호를 받았으면 좋겠어.”송윤지는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언니, 설마 형부가 언니를 찾아왔어?”“더 이상 묻지 마...”“솔직히 말해봐!”결국 송윤희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그가 60억이 필요하대... 도박하다 고금리 대출까지 써서 총 60억이야! 저 천벌 받을 놈이!”송윤지의 가슴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었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언니, 60억이라고? 그 큰돈을 어떻게...”“그래, 도박하다가 돈을 잃고 고금리 대출까지 썼대.”“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단 침착해.”송윤지는 언니를 안심시키려 애쓰며 말했다.“내가 현진 씨
임지강은 매일 같은 시간에 유치원 정문에 모습을 드러냈다. 겉으론 최가원을 데리러 온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단지 송윤지를 한 번 더 보기 위해서였다.임지강은 송윤지가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지어 보이는 맑고 순수한 웃음을 좋아했다.그 모습은 마치 송윤지가 과거 임지강과 함께 있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임지강은 종종 상상했다. 만약 두 사람의 아이가 아직 살아 있다면 지금쯤 이 유치원에서 뛰놀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때 자신이 조금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쯤 둘은 더 나은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의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갈 용기도 없었고 멀리서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할아버지! 할아버지!”맑고 명랑한 목소리가 임지강의 생각을 현실로 끌어냈다.그는 자신이 아이의 손을 잡고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가원은 반짝이는 눈으로 임지강을 올려다보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할아버지, 우리 여기 오래 서 있었잖아요!”“아... 그렇구나.”임지강은 바짝 마른 입술을 핥으며 최가원의 손을 잡고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할아버지, 매일 이렇게 오는 거 힘들지 않아요?”“뭐?”최가원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 혹시 송 선생님 좋아해요?”임지강은 그 말에 순간 멈칫하며 당황했다. 얼굴은 살짝 굳었고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커졌다.“무슨 소리야! 이 꼬맹아,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흥!”최가원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어리다고 눈이 멀진 않았거든요! 할아버지, 송 선생님 볼 때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거 알아요? 할아버지만 몰라요!”“너...”임지강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내 눈 멀쩡하니까 신경 꺼!”최가원은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할아버지! 할아버지!”“왜 또!”임지강은 짜증을 내듯 말했다.하지만 작은 손이 그의 손을 잡는 순간, 마음은 또 한없이 부드러워졌다.“할아버지.”최가원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이스크림 사주시
“송윤지, 듣고 있어?”송윤지는 정신을 차렸다. 막 대답하려던 순간, 전화기 너머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현진 씨, 아직도 여기서 커피 마시고 있어요?”“리사, 무슨 일이야?”“서류에 서명할 게 있어요!”배현진은 웃으며 대답했고 그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송윤지는 허탈한 마음에 가슴 한쪽이 텅 빈 듯했으며 심장은 빠르게 뛰고 답답함이 온몸을 휘감았다.송윤지는 본능적으로 의심하기 시작했다.저 여자는 누구일까? 왜 배현진은 저 여자의 말을 그렇게 잘 들을까? 어떻게 그 여자가 일하라고 부르자마자 바로 가버린 걸까?그들은 매일 같이 지내며 서로 다른 감정을 키워가고 있는 걸까?방금 배현진은 송윤지에게 인사 한마디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감정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듯했다.송윤지는 침대 가장자리에 기대어 앉아 생각이 엉키기 시작했다. 그때 눈앞에 작은 딸기 곰 인형이 눈에 띄었다.참 아이러니했다. 약혼자인 배현진과 보낸 시간보다 이 작은 곰 인형과 함께한 시간이 더 길었다.송윤지는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인형을 집어 들었다. 인형을 꼭 안고 침대에 누워 천천히 눈을 감았다....송윤희가 오성에 온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그동안 남편인 오강호는 송윤희를 찾지 않았고 전화 한 통도 없었다. 송윤희는 여전히 불안했지만, 적어도 폭력에 시달리지 않는 지금이 비교적 편안한 나날이었다.이날 아침, 송윤지는 출근했고 송윤희는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코너에서 갑자기 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송윤희는 반응할 새도 없이 누군가에게 입과 코가 막힌 채 인적 없는 구석으로 끌려갔다.송윤희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고 가까스로 벗어나 마주한 것은 그녀가 평생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악마의 눈이었다.“오강호? 너...”“흥! 여보, 잘 지냈어?”오강호는 뻔뻔하게 웃으며 눈빛과 표정에 계산된 악의가 가득했다.오강호는 몰락한 모습 그대로였다. 더럽고 낡은 옷에 온몸에서는 악취가 났고 머리는 기름져 보였다.송윤희는 두려움에
임지강은 송윤지를 태운 채 차를 돌려 좁은 골목을 빠져나갔다.차 안은 충분히 따뜻했지만, 송윤지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고 몸도 떨고 있었다.임지강은 대화를 시도하며 송윤지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아, 집이 이 근처인가요?”“여기서 조금 더 가야 해요.”송윤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평소엔 이 길로 안 다녀요. 오늘은 퇴근이 좀 늦어서 여기로 가면 더 가까울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누군가가 따라올 줄은 몰랐어요...”“이런 어둡고 조용한 골목은 조심해야 해요.”“네...”송윤지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뭔가 떠올린 듯 고개를 들어 임지강을 바라보았다.“근데... 임 대표님,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임지강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임지강은 자신이 송윤지를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사실 임지강은 최근 송윤지를 계속 몰래 따라다녔다. 혹시 집으로 가는 길에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돼서였다. 송윤지의 집은 중간 정도의 가격대인 아파트 단지에 있었고 시내 중심가라 주변은 늘 붐볐기에 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오늘은 예외였다.임지강은 입술이 바짝 말랐고 대충 둘러댔다.“제 친구가 근처에서 작은 바를 운영해요. 제가 가서 좀 도와줬거든요. 술을 좀 많이 마셔서, 바람 쐬러 골목에 나갔는데... 우연히 송윤지 씨를 만난 거죠.”“술을 마셨어요?”송윤지는 눈을 크게 뜨고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차 안에서는 술 냄새가 나지 않았다.하지만 송윤지는 여전히 걱정하며 말했다.“술 마셨으면 운전하면 안 되죠!”“아, 뭐...”임지강은 자신이 벌인 거짓말이 허술하다는 걸 깨달았지만, 태연하게 계속 이어갔다.“아니에요. 제가 마신 게 아니라 친구가 마신 거예요. 그래서 친구랑 같이 바람 쐬러 간 거죠.”“그럼, 그 친구분은요?”“그게...”“친구를 골목에 혼자 두고 온 거예요?”“그러니까...”임지강은 더 이상 거짓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자신이 왜 이렇게 허둥대는지 이해
송윤지는 언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쪽에서 다가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임지강이었다.하지만 송윤지는 왜 언니 송윤희가 임지강을 보고 겁먹은 듯한 표정을 짓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송윤희는 본능적으로 송윤지를 뒤로 물리며 자신이 앞에 섰다.“언니, 왜 그래요?”송윤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안색이 좋지 않았다.임지강도 송윤희를 보고 시선이 약간 흔들렸다. 하지만 이전의 냉랭함과는 달랐다. 오히려 임지강의 눈빛에는 어딘가 간절한 느낌이 담겨 있었다.송윤희는 당황스러웠다.강렬하고 단호한 인상만 풍기던 임지강에게서 이런 간절한 눈빛을 본 건 처음이었다.“언니.”송윤지가 조용히 말했다.“이쪽은 임 대표님, 임지강 씨야. 우리 반 아이의 가족분이셔.”“아... 그래?”송윤희의 목소리가 떨렸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임 선생님은 아이가 있으신가 봐요? 그럼... 결혼하셨겠네요?”“그런 거 아니야.”송윤지가 설명했다.“이분은 아이의 외종할아버지셔.”“네, 맞습니다.”임지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결혼은 하지 않았습니다.”임지강은 단어 하나하나를 꼭꼭 씹어 말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송윤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송윤지는 임지강의 말에서 어떤 의미도 읽지 못했지만, 송윤희는 송윤지를 옆으로 끌고 가서 망설이며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윤지야, 너... 조심해.”송윤지는 송윤희가 남편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송윤지는 언니를 안심시키려 말했다.“걱정하지 마. 여긴 국제 유치원이야. 보안이 철저해서 형부가 여길 찾아와도 나를 어쩌지 못할 거야.”“내가 말하는 건 네 형부뿐만이 아니야. 그리고...”송윤희는 말끝을 흐렸다.송윤희는 몰래 고개를 돌려 멀리 서 있는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송윤지의 손을 꼭 쥐었다.2년 전, 송윤지가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송윤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비록 나약한 성격이지만 모든 걸 걸고 동생을 지키고 싶었다.동생이 간신히 과거를 잊고 새 삶을 시작한 지금, 임지강이라는 남
이날은 송윤지가 처음으로 지각한 날이었다.송윤지는 허둥지둥 유치원 정문을 향해 달렸다. 평소 같았으면 경비 아저씨께 인사를 건넸겠지만, 오늘은 그럴 틈조차 없었다.전력으로 달려 출근 체크를 위해 지문을 찍었지만 이미 출근 시간이 1분 지나 있었다.송윤지는 몹시 아쉬웠다.단 1분의 지각으로 이번 달 개근 보너스를 놓치고 말았다.사무실로 돌아온 송윤지는 다른 선생님들이 수업 중이라 자리에 없음을 확인했다.오늘 오전에 마침 수업이 없었던 송윤지는 깊게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아 있었고 어젯밤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송윤지는 자신의 부주의함을 자책했다. 임지강의 차에서 잠들었던 것도 모자라 그렇게 오래 자다니... 눈을 떠보니 이미 아침이 밝아져 있었다.송윤지는 임지강의 외투에 싸여 있었고 차의 좌석은 어느새 평평하게 눕혀져 있었다. 임지강은 차 밖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새벽의 여명은 그의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한층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송윤지는 황급히 차에서 내려섰다. 전날의 드레스를 갈아입지도 못한 상태였다. 임지강은 송윤지를 근처에 있는 우성 호텔로 데려갔고 운전 중에 이미 송윤지가 갈아입을 방을 예약해 두었다.방 안에 들어가 보니 백화점 매니저가 여러 브랜드의 옷을 들고 송윤지를 기다리고 있었다.지금 송윤지가 입고 있는 옷은 바로 임지강이 골라준 크림색 투피스였다.세련된 샤넬풍의 디자인으로 단정하면서도 발랄했고 색상은 송윤지의 피부 톤과도 잘 어울렸다.그 옷은 마치 그녀를 위해 특별히 맞춘 듯 완벽하게 잘 맞았다.송윤지의 심장이 쿵쾅거렸다.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모습과 미소가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송 선생님, 오셨군요?”원장이 문을 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하며 들어왔다.송윤지는 당황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출퇴근 기록을 확인해 보니 오늘 1분 지각하셨더군요.”원장은 부드럽게 말했다.“사실 큰 문제는 아닙니다. 평소에 성실히 일하시고 헌신적으로 일해 주시는 분이니
“괜찮아요?”임지강은 약간 굳은 표정으로 송윤지를 바라보았다.송윤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송윤지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고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분위기는 다시 어색해졌다.임지강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굴렸다.“저... 제가 농담 하나 해 드릴까요?”“토마토가 끓는 국물에 뛰어들었어요. 그래서 토마토수프가 됐죠. 그런데 그 친구 계란이 구하려고 같이 뛰어들었는데, 그 결과는... 토마토 계란 수프! 하하하...”송윤지는 멍하니 임지강을 바라보았다.임지강은 두 번 웃다가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송윤지를 바라보았다.송윤지의 얼굴에는 웃음기 하나 없고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이 가득했다.“어... 재미없었어요?”송윤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농담은 별로 재미없었지만, 임지강이 너무 웃겼기 때문이다.분위기는 조금 부드러워졌다. 차는 도로 옆에 멈춰 있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엔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송윤지는 의자의 머리받침에 몸을 기댔고 피로가 몰려와 눈꺼풀이 무거워졌다.하루 종일 피곤했던 송윤지는 따뜻한 차 안에서 결국 잠이 들고 말았다. 임지강은 시동을 끄지 않은 채 히터의 온도를 적당히 조절했다.임지강은 송윤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송윤지의 얼굴을 쓰다듬고 싶었고 이마와 입술에 키스하고 싶었다.그러나 임지강의 손은 송윤지의 얼굴 가까이 가기도 전에 다시 멈춰졌다. 몇 번이나 손을 멈췄던 임지강은 결국 그 욕망을 억누르기로 결심했다.송윤지를 깨울까 봐 두려웠다.만약 송윤지가 깨어난다면 이 순간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게 될 테니까.송윤지가 잠든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사실 두 사람 사이에 다시는 어떤 접점도 생기지 말아야 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은 임지강의 삶에 어렵게 찾아온 선물 같았다.송윤지가 몸을 조금 뒤척이자, 임지강은 숨을 죽였다. 임지강은 조심스럽게 외투를 덮어주며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저는...”송윤지는 거절하려 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남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송윤지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임지강의 말을 거스를 수 없을 것 같았다.송윤지에게 어떤 나쁜 짓도 하지 않을 거고 나쁜 사람이 절대 아닐 거라는 믿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올라왔다.이상하게도 송윤지는 임지강에게 본능적인 신뢰를 느꼈다....임지강은 운전해서 송윤지를 놀이공원으로 데려갔다.오늘은 휴업일이라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송윤지가 놀이공원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마치 마법이 펼쳐진 듯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송윤지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밑에서 불빛이 반짝였고 곧 주변의 조명들이 송윤지의 발걸음을 따라 하나씩 켜지며 동화 속 세계처럼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커다란 눈을 뜨고 이 모든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멀리 하늘 높이 솟아오른 대관람차는 형형색색의 네온 불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가까이에서는 회전목마에서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왔다.그 옆에는 솜사탕 모양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송윤지의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했고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여기 마음에 드나요?” 임지강이 부드럽게 물었다.“네!”송윤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눈앞의 남자가 바로 이 꿈같은 놀이공원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여기서 좀 놀지 않을래요?” 임지강은 송윤지를 따스하게 바라보며 말했다.“이 순간부터 모든 놀이기구는 송윤지 씨만을 위해 운행할 거예요.”“아니에요... 너무 부담스러워요.” 송윤지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그냥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그럼... 제가 사진 몇 장 찍어드릴까요?”송윤지는 잠시 멍하니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의 깊은 눈빛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번져 나오는 듯했다.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이 감정에 송윤지는 살짝 당황했다.송윤지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이걸 설렘이라고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배현진과 함께 있을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
환호와 축복 속에서 배윤아는 감동과 약간의 수줍음을 담은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최군성은 그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배윤아를 공주님처럼 안아 올렸다. 그 순간 밤하늘을 가득 채운 형형색색의 불꽃이 터지며 파티장은 꿈같은 황홀함으로 물들었다.연회는 떠들썩하게 흘러갔다. 모두가 최군성이 평소처럼 활발하고 외향적인 모습을 보여줄 거라 기대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온전히 곁에 있는 배윤아에게만 집중했다. 어색한 미소를 짓거나 배윤아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것 외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평소 친구들과의 유쾌한 소란도 없었다. 최군성은 조용하고도 차분한 매력을 발산하며 온전히 배윤아에게만 시선을 맞췄다.하객들을 응대하는 일은 자연스럽게 최군형과 강소아의 몫이 되었다.두 사람은 부부답게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며 절도 있고 품격 있게 하객들을 맞았다.한편, 임지강은 구석에 서서 연회의 활기와 웃음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 듯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임지강은 와인을 천천히 삼키며 입안에 퍼지는 씁쓸한 맛에 잠시 눈을 감았다.이번 연회를 위해 배현진 역시 귀국했다. 배현진은 송윤지의 곁에 서 있었다. 배현진은 송윤지에게 어깨를 감싸는 숄을 걸쳐주며 송윤지 손에 있는 와인을 포도 주스로 바꿔주었다.송윤지는 배현진을 향해 미소 지으며, 그 눈빛엔 반짝이는 빛과 함께 어딘지 모를 온기가 스며 있었다.임지강의 가슴이 조여 오는 듯했다. 예전에 이런 눈빛은 오직 임지강을 향해 있었었다.연회는 젊은이들의 무대였고 어른들은 각자 목적에 따라 자리를 잡고 있었다. 최연준과 강서연 부부는 배경원 부부와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고 최씨 가문과 배씨 가문에 어떻게든 엮이려는 사람들이 아첨 섞인 대화를 이어갔다.육경섭은 술기운이 오르자, 농담을 주고받으며 친구들과 작은 방에서 카드 게임을 하자고 제안하고 있었다.임우정은 육경섭을 대신해 사람들을 응대하며 상황을 정리한 뒤, 구석에 서 있는 임지강을 발견했다.“오늘 정계 인사들도 꽤 많이 왔어.”임우정은 임지강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