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준은 허탈했지만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연신 그녀를 뒤돌아보며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강서연의 똘망똘망한 눈빛이 그를 거절할 수 없게 만들었다.큰 결심을 한 그는 결국 최연희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뗐다.다들 한창 떠들썩하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고는 흠칫했다.“현... 현수 씨.”임우정은 주변 분위기를 훑어보고는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최연준의 표정은 너무도 엄숙했다. 몸도 뻣뻣하게 굳은 채로 그 자리에 한참이나 서 있었다.그러다 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다들 믿을 수 없다는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았다.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커피숍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강서연이 급히 와 보니 모두가 박장대소하고 있었다. 심지어 최연희와 유찬혁은 의자에서 굴러내릴 뻔했다.강서연이 구현수를 쳐다보자 그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왔고 안색은 조금 전보다 더욱 어두워졌다.워낙 무표정하고 무뚝뚝한 사람한테 웃으라니, 누가 봐도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손님 접대는 불가능해 보여 강서연은 난감했다.“그만들 웃어요!”그가 혹여 자존심이 상하진 않았을까, 강서연은 팔을 끌어안으며 체면을 세워주려 노력했다. “현수 씨가 무뚝뚝해 보여서 그렇지, 뭐든 처음이 있는데 이만하면 잘하고 있잖아요!”“현수 씨, 방금 아주 잘 웃었어요! 계속 화이팅!”넋 놓고 있던 최연준이 그녀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임우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강서연의 어깨에 살포시 얹으며 말했다.“그럼, 너의 슈퍼맨 남편은 못하는 게 없는 이 가게 명물이라니까!”“당연하죠!”강서연이 그를 지긋이 쳐다보며 말했다.“현수 씨만 있으면 가게가 나날이 좋아질 거라고요!”“그럼!”신석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우리의 앞날도 꽃길만 걸을 거라고요!”“맞아요!”임우정이 웃으며 말했다.“꽃길을 걸으려면 새 식구가 필요하지 않겠어?”“우정 언니...”강서연의 얼굴이 붉어졌다.“뭐 부끄러운 일이라고! 중요한 일이지, 그래서 언제인데?
최연준은 경계의 눈빛으로 그를 차갑게 노려봤다.육경섭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비웃듯이 말했다.“현수야, 여기 전세금이랑 인테리어가 꽤 비싸 보이네? 이 큰돈이 어디서 났을까?”“신경 끄세요.”최연준은 차갑게 대꾸했다.“내가 그래도 감방에서 동생처럼 잘 챙겨 줬잖아!”육경섭은 잘난 체하며 말했다.“돈 필요하면 언제든지 나한테 얘기해, 형으로서 동생 힘든 꼴을 지켜볼 수 없지!”“괜찮아요, 사양할게요.”“출세했네? 현수야, 소문이 사실은 아니지? 네가 와이프 덕에 먹고산다며?”육경섭은 말을 하면서도 시선은 뒤에 서 있는 강서연에게 가 있었다.주먹을 불끈 쥔 최연준의 팔에는 선명한 핏줄이 보였다.“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마세요.”이때 어디선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한 쌍의 똘똘한 눈망울을 가진 강서연이 최연준 앞으로 다가섰다.어떤 일에서든 앞장서지 않던 그녀지만 누군가 남편을 저격한다면 그녀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경섭 씨, 이 가게는 남편이 저한테 선물로 준 것이고 저희는 돈도 부족하지 않아요! 저희 남편 너무나 착실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에요, 벌어오는 수입은 다 저한테 맡기고요. 제 눈에는 현수 씨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편이거든요! 그러니 앞으로 말조심하세요, 사람 보는 안목이 참 없네요!”육경섭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그러고는 눈앞의 여인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한참을 지나 육경섭은 어색한 기침 소리를 내며 또박또박 말했다.“아가씨, 내가 안목이 없는 게 아니고 당신 남편이 정말 별로라서 그래! 허, 당신 남편이 무엇 때문에 감방에 가게 되었는지 알고 있나?”“육경섭!”임우정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육경섭을 노려보며 말했다.“여긴 당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야! 당장 나가!”움찔한 육경섭은 천천히 뒤돌아서며 선글라스를 벗었다.8년 동안 알고 지냈던 그녀지만 지금은 그가 아는 그녀가 아니었고 두 사람의 눈에서는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육경섭은 입꼬리를 삐죽거리며 억지로 웃었다.“우정아, 여전하네?”임우정은 그
강서연은 최연준을 힐끗 보고는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담담한 표정을 한 최연준이 한발 나서서 말했다.“오늘은 매진되어 재료가 없어요, 커피 드시려면 내일 오세요!”“커피가 없으면 디저트라도 괜찮아!”육경섭은 테이블 위의 쿠키 한 조각을 집어 들며 말했다.그러나 최연준이 한발 앞서 접시들을 치우고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 보았다.어리둥절해 하던 육경섭이 순간 무서운 눈으로 최연준의 손을 잡으려 했고, 최연준은 기다렸다는 듯 옆으로 피한 뒤 되레 그의 손목을 잡았다.두 사람의 대치 속에 분위기는 팽팽해져 주위의 십여 명의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나서려 했다.강서연은 식은땀이 절로 났다.육경섭이 주먹을 휘두르자 최연준이 손으로 막아 힘껏 잡았다. 금방이라도 얼어 붙을 것처럼 차가워 보였다. 육경섭은 그의 기세에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경섭 씨.”최연준은 농담 섞인 말투로 한자 한자 말했다.“복싱을 하고 싶으면 제가 운영하는 체육관에 오세요, 얼마든지 상대해 드리죠! 하지만 보시다시피 커피숍의 개업식날이라 소란 피우지 않으셨으면 해요, 어차피 다들내 상대도 안 되겠지만!”육경섭이 미간을 찌푸리며 최연준의 손등으로 시선을 돌렸다.구현수의 손등에는 화상 자국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손등은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육경섭은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일어나 손을 뿌리쳤다.강서연이 최연준 곁으로 달려와 경계하는 눈빛으로 육경섭을 바라보았다.“하, 와이프 사랑 듬뿍 받아서 좋겠네!”육경섭은 건방진 말투로 말했다.“하지만 서연 씨 정도의 미인이라면 그 누구든 이놈보다 낫지 않겠어요? 저의 부하 중에도 인물값 하는 애들이 많은데, 소개해 드릴까요?”“당신...”강서연이 화가 나 입을 열려던 찰나 임우정이 한발 앞서 묵직하게 뺨을 갈겼다!“우정 언니...”“당장 꺼져.”임우정은 매섭게 그를 노려보았다.“꺼져!”십여 명의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서자 육경섭은 말리는 손짓을 했다.그는 맞은 쪽 뺨을 어루만졌다. 불타듯 뜨거워진
육경섭은 차에 앉아 에어컨을 가장 낮은 온도에 맞춰 놓았지만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그는 머리가 아픈지 미간을 엄지로 힘껏 눌러 마사지를 해주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감방에 들어가는 날부터 임우정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곁에서 지켜주지 못한 채 멀리서 바라보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그녀가 구현수와 아는 사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는 두려웠다.구현수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기에 절대로 그 변태가 그녀를 해치게 놓아둘 수는 없었다!누군가 그녀에게 위협이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막론하고 처리하려 했다.그래서 구현수에게 계속 찾아와 괴롭혔던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그는 절대로 구현수가 아니었다!부하가 전화를 끊고 한껏 엄숙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경섭 형님, 오성 쪽에서 받은 소식인데... 구현수가 아직 살아있답니다.”“사실이야?”“네.”그가 머리를 끄덕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럼 강서연의 남편은 누구지?아무래도 강서연은 자신과 결혼한 사람이 구현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구현수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이 육경섭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출구가 없는 미로를 걷듯이 그는 답을 찾지 못했다.“경섭 형님, 저 사람이 구현수가 아니라면 저희가 손떼도 되지 않겠습니까?”“그렇게 하지.”육경섭이 목소리 낮춰 말했다.“상관없는 사람들이면 이쯤에서 손떼도 되겠어, 그런데 너희들 그자가 누군지 모르는 거야?”“그게...”“됐어!”부하가 난감하게 쳐다보자 육경섭은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전화 진동소리가 났다.부하가 가져다주자 전화 화면에 뜬 ‘최지한’ 세글자가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처음에는 최지한과 접촉하지 않으려 했지만, 아직 그가 강주에서는 입지가 탄탄하지 않은 터라 그 어느 쪽도 미움을 살 수가 없었다.때문에 최씨 가문이 방패막이가 되어준다면, 앞으로 오성이나 강주에서 그가
육경섭은 잠깐 머뭇거리고는 말했다.“도련님은 누구를 처리하고 싶으실까요?”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최지한이 조심스레 말했다.“최씨 가문 셋째 도련님, 최연준!”육경섭의 눈빛이 서늘해졌다.“만나서 얘기하게 시간 나면 오성으로 와!”...강서연은 침대에 웅크리고 있는 임우정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자니 코끝이 시려왔다. 강서연이 그녀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임우정은 집에 돌아와서부터 여태껏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방안에 자신을 가두었다. 혼이 나간 사람처럼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우정 언니, 배 안 고파요?”강서연은 온갖 방법을 써서라도 대화를 이어가려 노력했다.“밖에 석훈 씨와 현수 씨가 있는데 뭐라도 먹을 것을 가져다 달라고 할까요?”임우정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강서연도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녀가 알고 있는 임우정이라면 바다 갈매기처럼 시원하고도 자유분방했고 그 어떤 어려움도 그녀를 막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그러나 지금은...한참 뒤, 임우정은 숨을 크게 내쉬고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그리고 눈물을 닦으며 억지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서연아.”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은 정말 미안해...”“나한테 뭐가 미안해요!”강서연은 이어 말했다.“행패를 부린 건 육경섭이잖아요! 언니가 초대한 것도 아니고!”“그렇지만 나랑도 엮인 일이잖아!”“우정 언니.”강서연이 눈을 크게 뜨고는 말했다.“그 말은 육경섭이 언니 때문에 온 거란 말이에요? 내가 볼 땐 아니에요, 그 사람은 현수 씨 때문에 온 거예요! 전에 그 사람이... 감방에 있을 때부터 현수 씨한테 앙심을 품었대요.”“아, 그래?”임우정은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서연아, 내가 전에는 네가 너무 아까워서 여러 가지로 현수 씨를 배척했는데. 돌이켜보면 내 전 남자친구도 현수 씨와 다를 게 없었어!”“우정 언니...”“경섭이가 감방에 가게 된 건 다 나 때문이야.”임우정은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그녀의 모습에 강서연은
육경섭은 임우정을 지키기 위하여 고의 상해죄로 8년 징역형을 받았다.대학 시절, 임우정은 수없이 감옥에 가서 면회를 시도했지만, 기다린 그녀 앞에는 늘 교도관이 서 있었다.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라는 차가운 말과 함께 말이다.마지막 한 번은 그녀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 제안을 받았을 때였다. 임우정은 육경섭과 이 기쁨을 제일 먼저 나누고 싶었고 면회하러 갔다.그녀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면회실 밖에서 기다렸고 철문이 무겁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육경섭이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났고 투명한 유리창 뒤로 그가 보이자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없이 울었다.“울지 마. 나 같은 놈 때문에 눈물 흘리지 말고.”육경섭이 감방에 들어간 뒤로 그녀에게 했던 첫마디이자 마지막 한마디였다. 말을 마친뒤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 일어서서 문 뒤로 걸어 나갔다.임우정은 그들을 가로 막은 유리창을 미친듯이 두드렸고 교도관은 그런 그녀를 막아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 말을 전해 왔다. 교도관은 엄숙하게 그녀에게 말했다.“육경섭 재소자가 당신한테 더는 찾아오지 말고 밖에서 마주치더라도 모르는 척 지나쳐달라고 전합니다.”임우정은 순간 멍해졌고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그렇게 그녀가 떠난 뒤, 육경섭은 감옥에서 크게 병을 앓았고 죽을 뻔한 경험을 했다. 임우정의 따뜻한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렸고 조직 보스의 음침한 표정이 자꾸 그의 눈앞을 가로 막았다.“육경섭, 평생 지켜준다 했으니, 너가 한 말 지켜야 돼, 알았지!”“경섭아, 이번 물건 반출 성공하기만 하면 삼십 프로 떼줄게!”“육경섭, 나 오성에서 대학교 다니고 싶어. 오성에서 일자리를 찾으면 안 되나? 그러면 우리 매일 같이 있을 수 있는데!”“아, 맞다! 경섭이 너한테 여자친구가 있지? 경섭아, 이번 일 네가 못하면 다른 사람 찾아서 하면 돼. 그런데 밑에 놈들은 그냥 헛수고 시키면 안 되겠지? 네 여자친구를 찾아서 밖에 친구들이랑 같이 놀게 해야겠어. 그걸로 만족시킬 수밖에.”
신석훈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를 건네려 손을 올리던 최연준은 머뭇거리다 말았다....저녁에 집에 돌아간 뒤, 강서연은 최연준의 품에 기대어 있었고 둘은 편하게 침실에서 쉬고 있었다.밤이 깊어지고, 찬란한 별빛이 창문을 통해 침실로 비춰졌다. 강서연은 잠이 오지 않았고, 말똥말똥한 눈으로 창밖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참 오랜만에 이렇듯 조용하게 밤하늘을 느껴보는 시간이었다.최연준은 그녀가 더울까 봐, 살포시 부채질해줬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아름다운 옆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나른하게 반대로 몸을 뒤집었고 그를 향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최연준은 긴장한 듯 목젖이 흔들렸고 몸이 슬그머니 달궈졌다.강서연은 코끝에 땀이 맺힌 남자의 모습을 보고, 전기요금를 아낀다고 에어컨도 마음껏 쓰지 못하게 한 것 같아 못내 미안했다.“현수 씨, 더우면 에어컨을 켜요, 우리. 전기요금 얼마 안 들어요.”“응... 아니야.”최연준은 윗 입술을 여러 번 깨물었다. 그가 몸이 뜨거운 거랑 그녀가 얘기한 더운 거랑 전혀 다른 건데 말이다...최연준은 크게 호흡 한번 하였고 이내 시선이 그녀의 하얀 목 라인에 이어진 앵두같은 입술에 고정되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얌전하지 못하게 그녀의 옷 속으로 손을 넣으려고 했다.그 순간 땅 꺼질 정도로 깊은 그녀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왜 그래?”그는 하려던 동작을 멈추고 걱정스레 물었다. 보아하니 그녀의 주의력이 전혀 둘의 애정행각에 있지 않고 뭔가 걱정이 많은 것 같았다. 그는 표정 변화 없이 그녀를 탐하였다.“여보, 왜 한숨을 쉬고 그래?”“우정 언니랑 육경섭 두 사람 말이에요.”최연준이 입꼬리를 실룩거렸다.“응? 그 두 사람 이미 끝난 거 아니야? 뭘 걱정해?”‘이럴 때 그 둘보다 눈앞에 남편 생각을 더 해보는 건 어때?’최연준은 끊임없이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그냥 둘이 이대로 끝날 것 같지 않아서 그래요.”강서연은 두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우정 언
최연준은 안색이 변하더니 조용히 대답했다.“다 지난 일이지... 그곳은 싸우는 것 빼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곳이니까.”“그 사람을 때렸어요?”“응. 그런 셈이지.”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방에 들어간 사람은 대부분 폭력적인 경향이 있어서 심리적으로도 다소 문제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육경섭같이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구현수한테 맞았으면 앙금이 남았을 수 있겠지 싶었다.그에 반해 현수는 그런 비슷한 문제가 없다고 강서연은 느꼈다. 표정이 차갑고 말수가 적은 것 빼고는 다 괜찮았다. 강서연의 예쁜 두 눈이 미소로 가득 찼고, 조용히 남편을 쳐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이런 남편을 만난 게 로또 맞은 것 같았다.그녀는 작은 손으로 그의 굴곡이 선명한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었고 면도를 하지 않은 터라 수염이 그녀의 손바닥을 찔렀다.“뭘 그렇게 쳐다봐?”최연준은 그녀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물었고 강서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그냥. 내 남편이 애증도 확실하고, 도량까지 넓어 보여서요! 경섭 그자가 당신을 그렇게 대하는데도 무정하고 의리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하니까, 그 정도 포용력을 아무나 갖고 있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최연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당신 눈엔 내가 그래 보여?”“그럼요.”최연준은 그녀를 품에 꽉 안으며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강서연은 대신 불평을 쏟아냈다.“현수 씨. 그 사람 정감 있는 사람이라고 현수 씨가 그래도, 내 생각은 안 그래요. 경섭이 우정 언니한테 그렇게 대하는 건 정말 양심 없어 보여요. 언니가 이제껏 마음 졸이며 줄곧 그 사람만 기다렸는데!”“그 사람도 어쩔 수 없는 게 있나 보지.”최연준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옆으로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자신이 감옥도 갔다 왔고, 또 조직에 몸 담고 있으니, 서로 다른 세계 사람이란 생각에서 우정 씨한테 매정하게 한 것 같은데. 거리를 두는 건, 사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우정 씨를 지켜주는 행동일 수도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
“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정대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결국엔 자기 아들이었기에 정승우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때리고 꾸짖어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대명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는 권온유의 양 갈래머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막아서려는 순간, 자신과 정대명 사이에 힘의 격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작정 나섰다가는 역부족일 터였다.정승우는 이를 악물고 정대명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 정말 이 아이를 팔 생각이에요?”“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영미라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거야!”정대명은 불만스레 대꾸하며 정승우에게 옷장에 있는 헌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정승우가 옷을 가져오자, 정대명은 손을 뻗어 권온유의 예쁜 드레스를 찢으려 했다. 정승우는 급히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이 자식이!”정대명은 정승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조용히 해! 죽고 싶어?”“아빠, 이건...”“이 애한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거야!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잖아.”정승우는 다가가 정대명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제가 갈아입힐게요!”“이놈이...”정대명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정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하, 아빠를 도와주고 싶구나? 역시 아들은 아들밖에 없지! 그래, 네가 손이 빠르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혀. 둘이 함께 가자고!”정승우는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승우는 권온유의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 정대명의 헌 옷을 위에 입혀 단단히 감쌌다. 그런 다음 모자를 씌워 얼핏 보면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정대명은 정승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뒷문에 승합차가 준비돼 있대. 어서 출발하자!”“아빠, 이 소녀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교외지!”정대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빨리 움직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
“엄마, 우리 오늘도 여기서 밥 먹어요?”“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고등어조림 요리잖아.”“그런데...”권온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켰다. 사실 권온유는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어린 권온유도 느낄 만큼 엄마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방금 대답조차 어딘가 건성으로 들렸다.권온유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걸까? 누군가 아빠와 다른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내기만 하면, 엄마는 이렇게 변해버렸다.“엄마...”권온유는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나 조순영은 갑자기 권온유의 손을 놓고는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권온유는 깜짝 놀라 인형을 떨어뜨렸다.“엄마!”“온유야,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조순영은 급히 돌아보며 외쳤다.“엄마 금방 올게!”권온유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엄마는 아빠가 다른 여자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통제력을 잃고 온유를 혼자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고 한참 후에야 멍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정대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이 모녀를 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는 자주 아이와 함께 식사하러 왔는데 가끔 혼자 올 때도 있었다...남편의 외도를 잡으려는 걸까?맞아, 틀림없이 그런 거다!정대명은 매일 호텔에 살면서 듣는 소문도 적지 않았다. 한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있음에도 바람이 잦았다고 하는데 그 회장은 차기 시장의 사위가 될 인물이라는 말도 있었다.정대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이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남자가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정대명은 다시 어린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
정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얼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며칠을 기다린 결과가 고작 최가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럼에도 영미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정대명 씨,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훔쳐 오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젠장! 정대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보석을 훔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하... 영미 아가씨.”마음속으로는 욕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이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 경호원들이 전부 총을 들고 있더라고요. 제가 무턱대고 나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정말 쓸모없네요.”영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사람들까지 매수해 놨는데,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정대명은 억눌린 분노를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말해 두겠는데요!”영미는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이 일 못 해내면,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도 더 이상 못 쓰게 될 테고 돈 한 푼도 못 받는 줄 아세요! 다시 그 작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서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세요!”정대명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호사에 길든 사람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정대명은 오성에서 살아가며 화려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이 잘 먹고 살게 도와줬고 돈까지도 넉넉히 주니 점점 체면이 생기기 시작했다.호텔에서 정대명이 매일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했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이런 삶은 초라했던 지난날에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정대명은 급히 전화기를 붙잡고 외쳤다.“영미 아가씨, 너무 흥분하지 마!”영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정대명은 어영부영 답했다.“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내가
백인서는 웃으며 정승우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정승우는 전혀 망설임 없이 백인서의 그릇에 고기가 많은 걸 보자마자 젓가락을 뻗었다.“너 지금 내 소고기를 뺏어 먹는 거야?”“사장님이 누나만 편애하는 거 아니에요? 고기를 이렇게나 많이 주다니!”“안 돼, 내 거야. 뺏어 먹지 마.”백인서는 웃으며 말했다.“이건 사장님이 특별히 주신 사랑의 소고기야!”“저는 성장기 남자애라 많이 먹어야 해요!”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면을 거의 다 비워가고 있었다. 백인서가 정승우에게 국수를 한 그릇 더 가져다주려고 일어서려는 순간, 달콤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고모!”백인서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예쁘고 앙증맞은 작은 공주가 백인서에게 달려왔다.“온유야?”권온유는 백인서에게 달라붙어 작은 머리로 백인서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정승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정승우는 이렇게 예쁜 여자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두 갈래로 묶은 머리에 공주 같은 퍼프 드레스를 입고, 마치 아까 놀이공원에서 본 백설 공주처럼 보였다.이 아이는 정말 동화 속에서 나온 공주일까?작은 소녀는 고개를 기울여 정승우를 한 번 바라보더니 달콤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백인서를 보며 물었다.“고모, 이 사람은 누구예요?”“이 사람은...”백인서가 대답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권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오빠는 학교에서 우등생이야. 공부도 엄청 열심히 하거든. 온유도 나중에 커서 이 오빠처럼 열심히 공부해야 해.”백인서는 권욱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여긴 어떻게 오셨어요?”“왜? 딸과 단둘이 외식하러 나오는 게 이상해?”“아니요.”백인서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권욱 씨가 이런 작은 가게에서 식사하실 줄은 몰랐어요...”“여기도 꽤 유명한 맛집이야!”권욱은 의자에 앉으며 사장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오늘 주말이라 온유를 데리고 나왔는데, 이 녀석이 배고프다고 해서 핸드폰으로 근처 맛집을 검색해 보니 이곳 평이 좋더라고.
정승우의 머릿속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그 시절, 백인서는 낮에는 그를 등에 업고 다녔고 밤에는 재워주며 보살폈다. 따뜻함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그의 삶에서 백인서는 유일하게 빛을 밝혀 준 존재였다.누가 세 살, 네 살 아이에게 기억이 없다고 했던가? 그 기억은 정승우의 성장 내내 곁을 지켜 주었고 다시 누나를 찾을 수 있도록 지탱해 주었다.“누나, 제발... 울지 마세요. 백 선생님!”백인서는 깜짝 놀라 정승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인서는 정승우의 미소에 눈물을 멈췄다.두 사람은 작은 음식점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우연히도, 이곳은 예전에 최지용이 백인서를 데리고 와 소고기 국수를 먹던 곳이었다.이번에도 그 가게 주인이 반갑게 맞이하며 다가왔다.“오, 이게 누구야! 귀한 손님이 오셨네!”그의 시선이 정승우에게로 멈췄다.“이 아이는?”“동생이에요!”정승우가 먼저 씩씩하게 대답했다.백인서는 미소를 지으며 주인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주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한번 보고는 주방으로 돌아가 푸짐하게 고기가 올라간 소고기 국수를 내왔다.“얼른 먹어!”백인서는 젓가락을 건네며 말했다.“여긴 정직하게 장사하는 곳이라 양도 푸짐하고 맛도 아주 좋아. 지용 씨가 나를 데리고 왔던 곳인데...”최지용을 언급하자 백인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정승우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백인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그 남자, 누나한테 잘해 줘요?”백인서는 모르는 척하며 대답했다.“무슨 남자?”“그러니까, 방금 말한 그 지용이란 사람 말이에요!”정승우는 더욱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숨기지 않아도 돼요. 산에 있을 때, 두 사람이 포옹하는 것도 봤고 그 사람이 누나한테 키스하는 것도 다 봤어요!”“정승우!”백인서는 정승우를 노려보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쏠렸다.“그만해!”백인서는 테이블 아래로 정승우의 다리를 가볍게 툭 차며 말했다.“애가 무슨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