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은 최연준을 힐끗 보고는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담담한 표정을 한 최연준이 한발 나서서 말했다.“오늘은 매진되어 재료가 없어요, 커피 드시려면 내일 오세요!”“커피가 없으면 디저트라도 괜찮아!”육경섭은 테이블 위의 쿠키 한 조각을 집어 들며 말했다.그러나 최연준이 한발 앞서 접시들을 치우고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 보았다.어리둥절해 하던 육경섭이 순간 무서운 눈으로 최연준의 손을 잡으려 했고, 최연준은 기다렸다는 듯 옆으로 피한 뒤 되레 그의 손목을 잡았다.두 사람의 대치 속에 분위기는 팽팽해져 주위의 십여 명의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나서려 했다.강서연은 식은땀이 절로 났다.육경섭이 주먹을 휘두르자 최연준이 손으로 막아 힘껏 잡았다. 금방이라도 얼어 붙을 것처럼 차가워 보였다. 육경섭은 그의 기세에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경섭 씨.”최연준은 농담 섞인 말투로 한자 한자 말했다.“복싱을 하고 싶으면 제가 운영하는 체육관에 오세요, 얼마든지 상대해 드리죠! 하지만 보시다시피 커피숍의 개업식날이라 소란 피우지 않으셨으면 해요, 어차피 다들내 상대도 안 되겠지만!”육경섭이 미간을 찌푸리며 최연준의 손등으로 시선을 돌렸다.구현수의 손등에는 화상 자국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손등은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육경섭은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일어나 손을 뿌리쳤다.강서연이 최연준 곁으로 달려와 경계하는 눈빛으로 육경섭을 바라보았다.“하, 와이프 사랑 듬뿍 받아서 좋겠네!”육경섭은 건방진 말투로 말했다.“하지만 서연 씨 정도의 미인이라면 그 누구든 이놈보다 낫지 않겠어요? 저의 부하 중에도 인물값 하는 애들이 많은데, 소개해 드릴까요?”“당신...”강서연이 화가 나 입을 열려던 찰나 임우정이 한발 앞서 묵직하게 뺨을 갈겼다!“우정 언니...”“당장 꺼져.”임우정은 매섭게 그를 노려보았다.“꺼져!”십여 명의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서자 육경섭은 말리는 손짓을 했다.그는 맞은 쪽 뺨을 어루만졌다. 불타듯 뜨거워진
육경섭은 차에 앉아 에어컨을 가장 낮은 온도에 맞춰 놓았지만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그는 머리가 아픈지 미간을 엄지로 힘껏 눌러 마사지를 해주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감방에 들어가는 날부터 임우정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곁에서 지켜주지 못한 채 멀리서 바라보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그녀가 구현수와 아는 사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는 두려웠다.구현수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기에 절대로 그 변태가 그녀를 해치게 놓아둘 수는 없었다!누군가 그녀에게 위협이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막론하고 처리하려 했다.그래서 구현수에게 계속 찾아와 괴롭혔던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그는 절대로 구현수가 아니었다!부하가 전화를 끊고 한껏 엄숙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경섭 형님, 오성 쪽에서 받은 소식인데... 구현수가 아직 살아있답니다.”“사실이야?”“네.”그가 머리를 끄덕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럼 강서연의 남편은 누구지?아무래도 강서연은 자신과 결혼한 사람이 구현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구현수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이 육경섭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출구가 없는 미로를 걷듯이 그는 답을 찾지 못했다.“경섭 형님, 저 사람이 구현수가 아니라면 저희가 손떼도 되지 않겠습니까?”“그렇게 하지.”육경섭이 목소리 낮춰 말했다.“상관없는 사람들이면 이쯤에서 손떼도 되겠어, 그런데 너희들 그자가 누군지 모르는 거야?”“그게...”“됐어!”부하가 난감하게 쳐다보자 육경섭은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전화 진동소리가 났다.부하가 가져다주자 전화 화면에 뜬 ‘최지한’ 세글자가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처음에는 최지한과 접촉하지 않으려 했지만, 아직 그가 강주에서는 입지가 탄탄하지 않은 터라 그 어느 쪽도 미움을 살 수가 없었다.때문에 최씨 가문이 방패막이가 되어준다면, 앞으로 오성이나 강주에서 그가
육경섭은 잠깐 머뭇거리고는 말했다.“도련님은 누구를 처리하고 싶으실까요?”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최지한이 조심스레 말했다.“최씨 가문 셋째 도련님, 최연준!”육경섭의 눈빛이 서늘해졌다.“만나서 얘기하게 시간 나면 오성으로 와!”...강서연은 침대에 웅크리고 있는 임우정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자니 코끝이 시려왔다. 강서연이 그녀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임우정은 집에 돌아와서부터 여태껏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방안에 자신을 가두었다. 혼이 나간 사람처럼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우정 언니, 배 안 고파요?”강서연은 온갖 방법을 써서라도 대화를 이어가려 노력했다.“밖에 석훈 씨와 현수 씨가 있는데 뭐라도 먹을 것을 가져다 달라고 할까요?”임우정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강서연도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녀가 알고 있는 임우정이라면 바다 갈매기처럼 시원하고도 자유분방했고 그 어떤 어려움도 그녀를 막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그러나 지금은...한참 뒤, 임우정은 숨을 크게 내쉬고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그리고 눈물을 닦으며 억지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서연아.”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은 정말 미안해...”“나한테 뭐가 미안해요!”강서연은 이어 말했다.“행패를 부린 건 육경섭이잖아요! 언니가 초대한 것도 아니고!”“그렇지만 나랑도 엮인 일이잖아!”“우정 언니.”강서연이 눈을 크게 뜨고는 말했다.“그 말은 육경섭이 언니 때문에 온 거란 말이에요? 내가 볼 땐 아니에요, 그 사람은 현수 씨 때문에 온 거예요! 전에 그 사람이... 감방에 있을 때부터 현수 씨한테 앙심을 품었대요.”“아, 그래?”임우정은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서연아, 내가 전에는 네가 너무 아까워서 여러 가지로 현수 씨를 배척했는데. 돌이켜보면 내 전 남자친구도 현수 씨와 다를 게 없었어!”“우정 언니...”“경섭이가 감방에 가게 된 건 다 나 때문이야.”임우정은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그녀의 모습에 강서연은
육경섭은 임우정을 지키기 위하여 고의 상해죄로 8년 징역형을 받았다.대학 시절, 임우정은 수없이 감옥에 가서 면회를 시도했지만, 기다린 그녀 앞에는 늘 교도관이 서 있었다.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라는 차가운 말과 함께 말이다.마지막 한 번은 그녀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 제안을 받았을 때였다. 임우정은 육경섭과 이 기쁨을 제일 먼저 나누고 싶었고 면회하러 갔다.그녀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면회실 밖에서 기다렸고 철문이 무겁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육경섭이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났고 투명한 유리창 뒤로 그가 보이자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없이 울었다.“울지 마. 나 같은 놈 때문에 눈물 흘리지 말고.”육경섭이 감방에 들어간 뒤로 그녀에게 했던 첫마디이자 마지막 한마디였다. 말을 마친뒤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 일어서서 문 뒤로 걸어 나갔다.임우정은 그들을 가로 막은 유리창을 미친듯이 두드렸고 교도관은 그런 그녀를 막아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 말을 전해 왔다. 교도관은 엄숙하게 그녀에게 말했다.“육경섭 재소자가 당신한테 더는 찾아오지 말고 밖에서 마주치더라도 모르는 척 지나쳐달라고 전합니다.”임우정은 순간 멍해졌고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그렇게 그녀가 떠난 뒤, 육경섭은 감옥에서 크게 병을 앓았고 죽을 뻔한 경험을 했다. 임우정의 따뜻한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렸고 조직 보스의 음침한 표정이 자꾸 그의 눈앞을 가로 막았다.“육경섭, 평생 지켜준다 했으니, 너가 한 말 지켜야 돼, 알았지!”“경섭아, 이번 물건 반출 성공하기만 하면 삼십 프로 떼줄게!”“육경섭, 나 오성에서 대학교 다니고 싶어. 오성에서 일자리를 찾으면 안 되나? 그러면 우리 매일 같이 있을 수 있는데!”“아, 맞다! 경섭이 너한테 여자친구가 있지? 경섭아, 이번 일 네가 못하면 다른 사람 찾아서 하면 돼. 그런데 밑에 놈들은 그냥 헛수고 시키면 안 되겠지? 네 여자친구를 찾아서 밖에 친구들이랑 같이 놀게 해야겠어. 그걸로 만족시킬 수밖에.”
신석훈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를 건네려 손을 올리던 최연준은 머뭇거리다 말았다....저녁에 집에 돌아간 뒤, 강서연은 최연준의 품에 기대어 있었고 둘은 편하게 침실에서 쉬고 있었다.밤이 깊어지고, 찬란한 별빛이 창문을 통해 침실로 비춰졌다. 강서연은 잠이 오지 않았고, 말똥말똥한 눈으로 창밖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참 오랜만에 이렇듯 조용하게 밤하늘을 느껴보는 시간이었다.최연준은 그녀가 더울까 봐, 살포시 부채질해줬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아름다운 옆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나른하게 반대로 몸을 뒤집었고 그를 향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최연준은 긴장한 듯 목젖이 흔들렸고 몸이 슬그머니 달궈졌다.강서연은 코끝에 땀이 맺힌 남자의 모습을 보고, 전기요금를 아낀다고 에어컨도 마음껏 쓰지 못하게 한 것 같아 못내 미안했다.“현수 씨, 더우면 에어컨을 켜요, 우리. 전기요금 얼마 안 들어요.”“응... 아니야.”최연준은 윗 입술을 여러 번 깨물었다. 그가 몸이 뜨거운 거랑 그녀가 얘기한 더운 거랑 전혀 다른 건데 말이다...최연준은 크게 호흡 한번 하였고 이내 시선이 그녀의 하얀 목 라인에 이어진 앵두같은 입술에 고정되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얌전하지 못하게 그녀의 옷 속으로 손을 넣으려고 했다.그 순간 땅 꺼질 정도로 깊은 그녀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왜 그래?”그는 하려던 동작을 멈추고 걱정스레 물었다. 보아하니 그녀의 주의력이 전혀 둘의 애정행각에 있지 않고 뭔가 걱정이 많은 것 같았다. 그는 표정 변화 없이 그녀를 탐하였다.“여보, 왜 한숨을 쉬고 그래?”“우정 언니랑 육경섭 두 사람 말이에요.”최연준이 입꼬리를 실룩거렸다.“응? 그 두 사람 이미 끝난 거 아니야? 뭘 걱정해?”‘이럴 때 그 둘보다 눈앞에 남편 생각을 더 해보는 건 어때?’최연준은 끊임없이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그냥 둘이 이대로 끝날 것 같지 않아서 그래요.”강서연은 두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우정 언
최연준은 안색이 변하더니 조용히 대답했다.“다 지난 일이지... 그곳은 싸우는 것 빼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곳이니까.”“그 사람을 때렸어요?”“응. 그런 셈이지.”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방에 들어간 사람은 대부분 폭력적인 경향이 있어서 심리적으로도 다소 문제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육경섭같이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구현수한테 맞았으면 앙금이 남았을 수 있겠지 싶었다.그에 반해 현수는 그런 비슷한 문제가 없다고 강서연은 느꼈다. 표정이 차갑고 말수가 적은 것 빼고는 다 괜찮았다. 강서연의 예쁜 두 눈이 미소로 가득 찼고, 조용히 남편을 쳐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이런 남편을 만난 게 로또 맞은 것 같았다.그녀는 작은 손으로 그의 굴곡이 선명한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었고 면도를 하지 않은 터라 수염이 그녀의 손바닥을 찔렀다.“뭘 그렇게 쳐다봐?”최연준은 그녀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물었고 강서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그냥. 내 남편이 애증도 확실하고, 도량까지 넓어 보여서요! 경섭 그자가 당신을 그렇게 대하는데도 무정하고 의리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하니까, 그 정도 포용력을 아무나 갖고 있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최연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당신 눈엔 내가 그래 보여?”“그럼요.”최연준은 그녀를 품에 꽉 안으며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강서연은 대신 불평을 쏟아냈다.“현수 씨. 그 사람 정감 있는 사람이라고 현수 씨가 그래도, 내 생각은 안 그래요. 경섭이 우정 언니한테 그렇게 대하는 건 정말 양심 없어 보여요. 언니가 이제껏 마음 졸이며 줄곧 그 사람만 기다렸는데!”“그 사람도 어쩔 수 없는 게 있나 보지.”최연준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옆으로 넘겨주며 말을 이었다.“자신이 감옥도 갔다 왔고, 또 조직에 몸 담고 있으니, 서로 다른 세계 사람이란 생각에서 우정 씨한테 매정하게 한 것 같은데. 거리를 두는 건, 사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우정 씨를 지켜주는 행동일 수도
배경원은 확신에 찬 모습으로 머리를 끄덕였다.“그러니까 저번주에 계천에서 낚시를 하다가 거기서 정면으로 마주쳤는데 깜짝 놀랬잖아요. 연준 형이랑 구현수 그 사람 얼굴이 너무 닮았어요.”최연준의 안색이 점점 더 그늘져갔다. 배경원은 계속해서 말했다.“생긴 것만 빼고 보면 나머지는 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더라고요. 내가 의심스러워서 몰래 좀 조사해 봤는데 구현수가 살아있는 게 확실해요. 그 인간 감방에서 나온 뒤에 강주 쪽 조직의 몇몇 보스한테 잘못 걸려서 돈 못 갚는다고 손가락 잘리고 강주에서 내쫓겼던 거래요.”최연준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유찬혁은 놀라하며 눈을 크게 떴다.“그래서...”생각에 잠겼던 유찬혁이 뭔가 떠오르는 듯했다.“설마 그 일, 육경섭하고 관련 있을까? 연준 형! 어쩌면 육경섭 그 사람, 형이 구현수가 아닌 걸 진작에 눈치챘을지도 몰라요.”최연준 역시도 듣자마자 그 걱정부터 들었고 그의 눈밑에 차가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육경섭과 몇 번 만나봤지만, 말도 이상하게 하고 참 감 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어서 진작에 알아챘을 것도 같았다.배경원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우물쭈물 말했다.“육경섭... 형네 삼촌 쪽 사람은 아니겠죠?”최연준은 눈을 치켜 뜨고 말했다.“가능성이 없진 않지! 의심스러운 데가 한두 곳이 아니라서 쉽게 결론부터 지으면 안 돼.”지난번 강서연과 같이 온천 리조트에 갔을 적에 그녀가 해변에서 떠돌이 노숙자를 보고 놀라 했던 일이 떠올랐다.그 떠돌이가 구현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최연준은 매서운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구현수가 살아 있으니, 일단 그 사람 우리가 먼저 찾아서 묶어둬야지. 명황산 일대에서 움직이다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잖아.”“그래요.”배경원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아랫사람들한테 소문내지 말고 비밀리에 최선을 다해 찾으라고 시켰어요.”최연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두 사람이 떠난 후, 혼자 남겨진 최연준은 조용히 앉아있는데 마음이 착잡했다. 그는 구
사진의 등장인물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크게 놀랐다.‘구현수?’육경섭은 고개를 번쩍 들어 최지한을 바라보며 믿기지 않는 눈빛을 했다.“뭐야? 설마 그 사람 본 적 있어?”육경섭은 얼굴빛 하나 변함 없이 사진을 내려놓았고 최지한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맡아서 치워줘야 할 사람이야.”최지한은 육경섭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제대로 보고 작업해야 돼. 실수 없이!”“무슨 뜻이죠?”육경섭의 인내심이 바닥날 정도로 최지한은 한참 이상하게 웃어 보이다가 목소리를 내리 깔고 말했다.“빙빙 돌리지 않을게. 바로 얘기하자면, 타킷은 최연준이야. 최씨 가문 셋째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사람! 할아버지가 어제 막 북미로 정계 요인들을 만나러 가셔서 집안이 비었네... 최적의 시기지. 우리가 손보기 가장 좋은.”육경섭은 미간을 찌푸렸다. 강서연의 남편이 최연준 최씨 가문 사람일 줄은 전혀 몰랐었다. 지난 몇 차례 만나본 정황상, 강서연은 최연준의 정체를 모르는 눈치였는데, 여전히 그를 엄청 아껴보였다. 최연준을 해치기라도 하면 아마 목숨 걸고 나설 위인으로 보였다. 여자가 무섭다라기 보단 하필 임우정 그녀의 절친인 게 마음에 걸렸다.육경섭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복잡해진 눈으로 최지한을 바라보았다. 한참 침묵하던 그는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큰 도련님. 이번 건은 어려워요. 심사숙고해 주시는 게 좋겠네요.”최지한은 무심히 손에 든 라이터를 껐다 켰다 하더니 시가 한 대를 태우고 나서 그를 향해 차갑게 웃었다.육경섭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이게 다 도련님을 위해서입니다. 최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이 영감님의 총애를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중요한 인물이 갑자기 사라지는데 영감님이 설마 가만있으시겠어요. 끝까지 조사하고 그러시겠죠. 최씨 가문은 너무 막강해서 결국 저까지 찾아내겠죠... 제가 혼자 감당하긴 벅찬 일이라!”“그게 두려웠던 거네?”최지한의 얼굴에 기괴한 표정이 그려졌고 두 손을 들어 손바닥을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