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단은 마침내 큰 마님은 만났다.그녀가 왔을 때, 큰 마님은 마침 방금 약을 마시고 있었다. 맥없이 침대 머리에 기대어 앉았는데, 수 나인이 김단이 왔다는 말을 듣고서야 큰 마님은 비로소 기력이 생긴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조모!”김단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오기 전에 그녀는 괜히 조모의 기분을 상할까 봐 조모를 만나면 절대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그러나 이때 조모의 이런 수척하고 허약한 모습을 보고 그녀의 눈물은 또 무기력하게 떨어졌다.이제 얼마 지났다고!조모는 그녀가 진산군댁에 돌아왔을 때와 비교하면 완전 다른 사람 같았다. 얼굴에는 아무런 생기도 없고, 곧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배어 있었다.김단은 큰 마님을 보자 자신의 마음이 곧 깨질 것만 같았다.큰 마님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김단의 눈물을 닦았다.“내 귀한 손녀딸, 고생했어...”큰 마님은 김단이 임씨 부인에게 머리를 맞은 일을 모르고 있어, 지금 말한 것은 임학이 그녀를 해친 일이다.김단은 큰 마님을 달래기 위해 얼른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제가 도망쳤어요, 저 엄청 대단해요!”“그래, 그래!”큰 마님은 매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단이가 당연히 제일 대단하지! 절대 그 나쁜 놈에게 헤침을 당하지 않은 거다!”큰 마님은 자신의 유일한 친손자가 나쁜 놈이라고 한다.김단은 마음이 녹아서 참지 못하고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불렀다.“조모...”이렇게 부르기만 해도 그녀가 당한 그 억울함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큰 마님은 김단의 얼굴을 애틋하게 어루만졌다.“나는 네가 조모를 걱정해서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도 알고, 네가 조모를 위해 네 오라버니를 고발하는 것을 포기한 것도 안다. 그러나 조모의 마음속에서 네가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네가 무엇을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나는 단지 네가 평안하고 순조로운 것만 바랄 뿐, 다른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김단은 다소 놀라서 큰 마님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원래 큰 마님이 진산군댁의
또 만나자고 약속하는 편지다.지난번의 약속에 대해, 비록 명정대군의 잘못은 아니지만, 실제로 그녀에게 약간의 안 좋은 기억을 가져다주었고, 그녀는 정말 만나러 가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자신이 그 이후로 명정대군을 만난 적이 없고, 상대방이 자신의 약혼자로서 그녀를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다.가지 않는 것 또한 인정에 어긋나는 것 같았다.머뭇거리고 있는데, 숙희의 소리가 들렸다.“아씨, 곧 봄이 오는데, 아씨께서 별당에 계속 있는 것도 좋지 않아요. 차라리 나가서 구경하고, 기분을 좀 풀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그렇기도 하지, 온종일 이 별당에서 있으면 조용하기는 하지만 확실히 답답했다.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명왕은 그녀와 동쪽에 있는 대수 옆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오늘은 날씨가 좋아 바람도 없고 해가 몸에 비추는데 온기도 느껴졌다.물결이 반짝이는 호수면, 그리고 호수가 옆에는 드문드문 푸른 것이 보였다. 김단은 곧 봄이 올 것이라 확실했다.“아씨, 명정대군님 오셨어요.”숙희가 조용히 알렸다.김단은 그제야 몸을 돌려 명정대군의 마차가 먼 곳에서 천천히 오는 것을 보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호숫가에 멈추었다.명정대군이 차에서 뛰어내리자, 곧 빠른 걸음으로 김단을 향해 걸어왔는데, 걸음걸이가 매우 초조했다.김단은 그의 이런 모습에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명정대군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갑자기 그녀를 안을까 봐 두려웠다.다행히도 명정대군은 자제했다.“며칠 전 일은 다 들었소. 어떻게 됐소? 상처가 아직도 아픈지오?”명정대군의 말투는 걱정이 가득했지만, 목소리는 부드러웠다.부드러운 눈동자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마치 그녀를 녹이려 하는 것만 같았다.어느 순간, 김단은 명정대군이 정말 자신을 걱정한다고 생각할 뻔했다.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이익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그의 관심이 어떻게 진심일 수 있겠는가?김단은 마음속에 계산이 있다. 천천히 몸을 숙이고 인사를 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김단은 사실 명정대군의 뜻을 이해한다.그들 두 사람의 혼인은 진산군댁과의 연결 위에 세워졌다.임학은 진산군댁의 후계자이다. 만약 그녀가 임학과 사이가 너무 나쁘면 명정대군에게도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다만 김단은 그들을 보고 정말 좋은 표정을 짓지 못해 몸을 돌려 다시 호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사실 오늘 임 씨와 소 씨의 두 남매 외에 또 다른 아씨와 도련님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소정온과 관계가 아주 좋은 병부 판서의 둘째 아씨 송백선도 있다.이 사람들은 오늘 모두 명정대군의 체면을 보고 온 것이다.듣기 좋게 말하자면, 봄 나들이지.대놓고 말하면, 명정대 군이 사람이 많은 것을 빌어 김단과 임학의 관계를 완화하려 한 것이다.그러나 예전에 명정대군은 그녀를 위해 임학을 심하게 다치게 하기도 했는데....그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니 김단의 마음속에 한기가 솟아올랐다.도련님과 아씨들이 다가와서 명정대군에게 인사를 하였는데, 다만 오늘은 봄나들이니, 예의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조금이나마 인사가 예의 바르지 못했다.소정온은 명정대군에게 인사를 한 후 곧장 김단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김단의 옆모습을 살펴보다가, 그녀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김 낭자는 왜 돌아서지 않소? 설마 명정대군과 결혼하기도 전에 명정빈의 허세를 부리기 시작한 것은 아니지오?”그녀는 김단을 비웃으려 하는 것이다.그러나 김단은 여전히 그녀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네가 지금 나에게 명정빈의 인사를 하고 싶어도 난 그만한 자격이 있소.”“너!”소정온은 무의식적으로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곁눈질로 옆에 있는 명정대군을 보고 결국 참았다.오늘 오기 전에 아버지와 오라버니 모두 그녀에게 일을 일으키지 말라고 했다.오히려 송백선이 웃으며 소정온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김 낭자는 보아하니 여전히 임 낭자에게 화가 나 있는 것 같소. 우리 여기서 끼어들지 말고 저쪽으로 가서 구경이나 하오!”말하면서 소정온을 끌고
김단이 여전히 자기를 상대하지 않는 것을 보고 소정온은 더욱 화가 났다.마치 자신이 최선을 다한 주먹이 솜에 부딪힌 것처럼 그 무력감은 그녀의 마음속 분노를 갑자기 증폭시켰다.그러자 소리를 높여 물었다.“김 낭자는 도대체 내 오라버니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소? 왜 이미 명정대군과 혼약을 맺었고, 우리 오라버니와 혼인한 사람이 임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여전히 여러 번 내 오라버니의 품에 뛰어든 거지오?”말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거의 놀라 멍해졌다.멀지 않은 곳에서 구경을 기다리던 도련님 아씨들도 하나같이 놀란 기색을 보였다.김단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소정온을 바라보았는데 눈에는 매서운 경고가 배었다.그러나 소정온은 여전히 정의로운 모습으로 턱을 약간 들어올렸다.“김 낭자, 놀랄 필요가 없소. 모두 임원이 직접 본 것이오. 자네가 그날 고의로 임원을 따돌리고, 결국 임원이 가자마자 당신이 내 오라버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지 않았소? 그리고 그날 춘산 거리에서도 자네가...”“조심하세요!”갑자기 들려오는 비명에 소정온의 말이 끊어졌다.이에 따라 물 한 주전자가 모두 소정온의 얼굴에 뿌려졌다.“아!” 소정온이 비명을 지르며 즉시 숙희를 가리키며 욕설을 퍼부었다.“이 천박한 년아, 감히 나에게 물을 끼얹어?”숙희는 무고한 얼굴로 김단의 뒤로 숨느라 바빴다.“아닙니다, 아닙니다, 소인이 하마터면 걸려 넘어질 뻔해서 실수로 뿌렸습니다!”그러나 김단은 숙희의 그 무고한 얼굴에 나타난 교활함을 보았다.이 계집애가 일부러 그런 거다!그녀는 마음속으로는 웃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차갑게 소정온을 주시하고 있었다.“내 시녀가 무심한 실수로 자네에게 뿌렸지만 자네는 고의라고 말하고 있소. 마치 그날 내가 실수로 걸려 넘어질 뻔한 걸 소 장군이 구해줬는데, 당신은 기어코 내가 일부러 소 장군의 품에 뛰어들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소. 소 낭자, 당신도 어쨌든 대갓집 규슈인데, 계속 이렇게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말하면,
이 한마디로 임원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그녀는 소한이 김단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안다.그래서 그날 자신이 본 것은 사실 소한이 주동적으로 김단을 안았단 말인가?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쪽에서는 작은 소리의 조롱이 들렸다.“옛날에 김 낭자가 소 장군의 뒤를 쫓아도 쫓아낼 수 없이 따라다녔는데, 지금 어떻게 염치없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송백선이다.그녀의 말소리와 함께 자리에 있는 아씨 도련님들은 잇달아 웃었다.맞아, 옛날의 김단은 오로지 소한을 따랐고, 눈에도 소한만 보였다.그녀의 사랑은 뜨겁고, 맹렬하고, 광명정대했다!그래서 온 한양 사람들이 그녀가 소한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러나 3년 후, 그녀의 사랑은 우스갯소리가 되었다.슬픈가?당연하다.자신의 그 사랑이 언젠가 웃음거리가 될 줄 알았다면...그녀는 분명히 소한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다!지금은 담담하게 웃기만 했다.“송 낭자도 '옛날'이라는 두 글자를 알고 있군요. 옛날에 송나리가 아직 병부 판서가 아니었을 때 송 낭자가 진산군댁에게 보낸 선물이 하마터면 하인에게 던져버릴 뻔한 것 기억도 있는데...”사람들 앞에서 옛날의 난감한 사실을 들먹이니, 송백선은 김단처럼 굳은 정력이 없어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졌다.김단은 차갑게 그녀를 힐끗 보고, 마지막에 임원을 바라보았다.“더군다나, 너희들은 명정대군의 면전에서 나와 소 장군을 모독하는데, 도대체 무슨 속셈이오?”증거를 내놓지 못하는 일은 모독이다.임원은 그날 김단이 주동적으로 소한의 품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심지어 그날 자신이 본 것이 소한의 주동이라는 것까지 의심하고 있다.김단이 이렇게 묻는 것을 듣고, 그녀는 제 발 저려 고개를 숙였다.그녀 눈 밑의 당황함이 이렇게 분명한데, 임학은 마침내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나섰다.“김단, 너!”다시 또 명정대군을 바라보며 말투가 공손해졌다.“모독을 말하는 것도 너무 심각합니다. 생각해
임원은 오늘 특별히 두 개의 비녀를 썼는데, 하나는 임학이 직접 만든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작년 생일 때 소한이 선물한 것이다.이 두 개의 비녀는 모두 그녀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기 때문에 비록 두 개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어도 그녀는 함께 차고 왔다.임원이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소정온의 말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김단을 한번 보았지만, 김단의 얼굴이 배 밖으로 향해 마치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듣지 못한 것 같았다.임원은 왠지 좀 실망했다.그러자 소정온이 또 말하는 것을 들었다.“생각해 보니, 원이, 네 생일이 곧 다가오는데 올해 오라버니가 너에게 무슨 선물을 할지 모르겠소!”말이 떨어지자, 명정대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단이도 임 낭자와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태어난 것으로 기억하고 있소. 이렇게 말하면 단이의 생일도 곧 다가오는데, 무엇을 갖고 싶소?”명정대군의 말투가 너무 부드러워서 김단도 그를 상대하지 않을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려 명정대군을 향해 살짝 웃었다."소인은 생일을 보내는 것을 싫어합니다. 갖고 싶은 것도 없사옵니다. 대군자가의 관심에 감사할 뿐입니다.”그녀가 말한 것은 사실이다.세답방에 들어간 첫해에 그녀는 생일날 세답방에서 꼬박 하루를 기다렸다.뭘 기다리냐고?임학이 그녀를 데리러 오기를 기다릴 수도 있고, 소한을 기다릴 수도 있다.아니면, 진산군댁에서 보내온 작은 선물을 기다리거나!그것은 적어도 그녀가 잊혀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그러나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부터 자정의 달빛이 그녀에게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으나, 결국 생일 축하 한마디 기다리지 못했다.그녀는 이전의 생일은 모두 그녀의 일방적으로 기대한 것이고, 그 생일의 축복도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이미 그들에게 잊혀졌다..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생일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그러나 이 말은 임학의 귀에는 억지스럽게 들렸을 뿐이다!그는 김단이 생일 쉬기를 가장 좋아한다고 기억한다.매번 거의 보름
맞다, 이것은 소한이 선물한 귀걸이다.4년 전 이 귀걸이 차고 유람선을 탔는데 실수로 호수에 떨어뜨려 마음이 급해 같이 뛰어내렸다가 익사할 뻔했다.뱃사공이 호수 바닥에 가라앉았을지도 모르는 귀걸이를 찾을 줄을 생각도 못 했다!배 안 사람들의 안색은 모두 보기 좋지 않았다. 그러나 뱃사공은 주위의 분위기가 변화된 것을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고 그저 잘 보이려고 애썼다. “그날 소인은 아씨가 이 귀걸이에 애지중지하는 것을 보고,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생각하여 호수 밑으로 내려가 며칠을 찾았는데, 다행히 찾았습니다. 그 후에 다시는 아씨를 보지 못했는데, 다행히 오늘이 돼서야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줄 수 있게 되었네요!”김단의 마음속에 감회가 남달랐다.첫째는 뱃사공이 이렇게 신경을 쓸 줄 몰랐고, 둘째는 언젠가 자신이 또다시 이 귀걸이를 볼 수 있을 줄도 몰랐다.예전에 그녀라면 당연히 매우 좋아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소한이 그녀에게 준 첫 번째 선물이기도 하고, 정식으로 여자한테 주는 선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그녀는 그것이 소한이 마침내 그녀를 받아들이는 증명이라고 생각해서 각별히 소중히 여겼다.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김단의 마음속에는 감정이 얽히고설켜 있었다.그녀는 뱃사공에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또 은자 한 닢을 꺼내 뱃사공에게 건네주었다.“제 것이 맞소. 고맙소.”이 은자 한 닢은 뱃사공의 일 년 품삯과 맞먹는다. 뱃사공은 기쁘게 은을 받고 나갔다.하지만, 뱃사공이 선실에서 물러나기도 전에 뒤에서 풍덩 하는 소리가 들렸다.그가 뒤를 돌아보니 호수에 잔잔한 물결이 출렁이는 것이 보였고, 김단의 손에는 이미 아무것도 없었다.귀걸이와 나무 상자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소정온이 제일 먼저 비명을 질렀다.“김단, 당신 미쳤소? 그것은...”자기 오라버니가 얼마나 신경을 써서 얻은 것인데!그러나 소정온은 끝내 말을 다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소한의 안색은 이미 어둡기 그지없었다.김단은 소정온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그러나 명정대
소정온은 약간 기분이 상한 듯 보였지만,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김단을 향해 소리쳤다.“김 낭자, 봐봐, 정말 큰 물고기가 있소!”김단은 좀 의아했다. 소정온이 이때 자기를 부를 줄은 몰랐다.하지만 불렀으니...김단은 일어나서 소정온을 향해 걸어갔다.“빨리 보시오, 이렇게 큰 물고기가 있소!”소정온은 열정 넘치게 대했다.김단은 소정온의 곁에 서서 몸을 숙여 호수를 바라보았다.“어디에 물고기가 있소?”“바로 저기에 있소!”소정온은 물밑을 가리켰지만, 몸은 김단의 뒤로 물러났다.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감히 오라버니가 준 물건을 버리다니, 넌 좀 혼나봐야 해!”말을 마치고, 바로 손을 뻗어 김단을 밀었다.그러나 김단은 몸을 살짝 옆으로 돌려 쉽게 피했다.오히려 소정온이 자기 힘에 견디지 못하고 호수로 뛰어들었다.물에 빠지기 전에, 그녀는 김단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웃음을 똑똑히 보았다.소정온이 물속에서 파닥거리는 모습을 보고 김단은 냉소를 참지 못했다.이런 머리로 사람을 해치려 한다니?어이가 없군!그리고 물에 빠지는 소리를 듣고 선실에 있던 남자들이 모두 뛰쳐나왔다.소정원이 물에 빠진 것을 보고, 임학와 소한은 모두 놀라서 바로 호수로 뛰어내려 사람을 구하려 했는데 선실 안의 임원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소리쳤다.“안 돼! 오라버니들은 정온의 명예와 절조를 망칠 거야!”그녀가 비틀비틀 선실에서 뛰쳐나오는 것을 보았다.“오라버니들은 내려가면 안 됩니다. 내려간다면 정온의 이번 생을 망치는 것입니다!”예전에 임학과 소한이 물에 뛰어들어 김단을 구했듯이 그 후의 김단은 한동안 유언비어를 많이 들었다.그러나 누가 봐도 소정온은 헤엄칠 줄 모른다. 계속 구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임원도 잘 알고 있고, 바로 김단에게 눈을 돌렸다.심지어 벌써 김단에게 무릎을 꿇고 소정온을 구해달라고 빌려고 했다.김단은 그녀의 이런 행동을 극도로 혐오하여, 먼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호수는 차갑지만 그날 임원을 구하는 것보다 좀 나았다.
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곧 이어진 건 덕빈의 날 선 고함이었다.“천한 계집년이!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단 말이냐! 기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동생까지 죽여?”내가 죽였다고?김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본능적으로 서원공주를 힐끗 바라본 후 덕빈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덕빈마님, 부디 진정하세요. 이 일에는 분명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오해!”덕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김단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다행히 이번에는 김단이 몸을 뒤로 빼며 그 손을 피했다.하지만 덕빈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가 거칠게 김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윤이와 나인들이 덕빈을 제지했다.그러나 덕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손헌이 당한 죽음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모욕적이었다.그건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손 씨 가문 전체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몸이 붙잡혀도 그녀는 계속해서 발악했다.마치 그녀의 살갗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이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원공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감히 중전의 침전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니요. 중전마마를 눈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당장 덕빈을 가두거라. 이번 일은 내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 엄벌을 청할 것이다.”“예.”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덕빈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함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김단의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화끈거리는 통증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 서원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소?”김단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그 말에 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단이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오?”김단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
전하가 떠난 뒤 서원공주는 김단과 함께 중전에게 예를 올렸다.중전의 침실을 나선 그들 뒤로 윤이와 다른 나인들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걷고 있었다.김단은 직감적으로 공주가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그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서원공주는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몸을 돌보는 일은 후궁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오늘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낭자 같은 의원이 어찌 아버지의 몸을 돌볼 기회가 있겠소?”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전하를 가까이 뵙기 어려웠겠지만 자신처럼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달랐다.그러나 그 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김단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모두 공주님 덕분입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앞으로도 잘하시오. 아버지께서 만족해 하신다면 낭자를 어의로 만들어 줄 수도 있소.”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러고 보니 수 어의도 나이가 많지 않소? 몇 해 안에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오.”그녀는 마치 김단의 미래를 꽃길로 닦아주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벼슬이나 권세 따위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럼에도 겉으로는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김단의 연기를 공주가 눈치챌 리 없었다.여인으로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의원 원장 자리까지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니 김단이 감격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그녀는 김단을 바라보더니 낮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낭자를 돌봐줄 책임이 있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말을 잘 듣는 자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소.”
소하의 미간에는 어느새 짙은 근심의 스며들었다.소한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거의 다 나아가던 상처를 일부러 뜯어내어 다시 덧나게 하다니...그렇게 자신의 몸을 해쳐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말은 힘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그저 방금 전 김단이 한 말이 소한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시간은 조용히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이날도 김단은 평소처럼 중전의 약을 들고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중전의 문병을 온 전하와 마주치게 되었다.전하는 중전의 곁에 앉아 나인들이 중전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김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중전의 몸은 어떠하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된단 말이냐?”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전마마의 기력은 지난 보름 사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지만 중독된 세월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십여 년간 몸속에 쌓인 독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리 만무했다.다만 최근 소하로부터 중전에게 독을 먹인 자가 중전의 외가 친척인 맹씨 집안이라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전하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그 표정을 본 서원공주는 혹여 김단이 책망당할까 걱정되어 급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의 몸은 정말로 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어요. 제가 직접 지켜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전하는 딸이 김단을 두둔하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그러하냐?”“정말입니다.”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지금 김단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어머니뿐만 아니라 궐 안의 다른 마님들도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소한의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위로 선홍빛 피가 점점 번져가며 그 면적을 넓히더니 이내 붕대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그 모습을 본 소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한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상처가 덧났다. 약 발라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하지만 소한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말했다.“형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소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소한이 또 김단을 귀찮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소한의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기에 굳이 내의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방금 그 잠깐의 실랑이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줄은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다.김단은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소한을 노려보다가 결국 담담하게 말했다.“앉으세요 얼른.”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통과 붕대를 가지러 갔다.소한은 그제야 만족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탄탄하게 다져진 상체를 드러냈다.그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김단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기쁨과 방금 전 그녀의 약병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얽혀있었다.김단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그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김단과 소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한아, 제정신이냐?”그 상처는 단순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었다.누가 봐도 일부러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찢은 흔적이었다.소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하를 노려보았다.소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게 뻔했다.김단은 아무 말 없이 붉게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묵묵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그녀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상처를 다 치료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군이라면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합니다.”김단은 짧게 한마디 뱉어버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소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었다.한때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온갖 꾀를 부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그녀를 볼 수 있는 꼴이라니.한때 자만심으로 빛나던 젊은 장군이 지금은 초라할 만큼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김단은 그를 향해 뭐라 질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차라리 야멸차게 욕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조차 헛되이 들릴 만큼 이 남자의 모습은 너무 진심이었다.그때 소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내가 다치면 낭자가 약 발라주면 안 되겠소?”“안 됩니다.”김단은 단칼에 잘라내듯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때도 한양까지 올라와서 저한테 치료 받으실 겁니까?”그러자 소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낭자가 내 상처를 봐준다고만 하면 난 얼마든지 참고 버틸 수 있소.”그 말에 김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때 마침, 문밖에서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또 다쳤다고?”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을 한 소하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자락이 날렵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허리춤에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힘 있고 절도 있는 그 걸음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그를 발견한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소하 도련님.”반면 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찡그린 얼굴로 소하를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여긴 왜 왔습니까?”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에게 인사한 뒤 소한을 바라보았다.“네가 다쳤다고 해서 말이다. 많이 다친 것이냐?”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한의 옷깃을 젖히려 했다.그러자 소한은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관심 끄세요. 전 김단한테 치료 받으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소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김단은 바빠 보이는데? 네 약은 형
그 두 나인이 집요하게 김단을 괴롭혔던 건 단지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명백히 공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세답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있었던가?모두가 서원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김단을 괴롭히고 짓밟는데 앞장섰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두 나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김단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고통을 즐기던 그 두 나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김단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원공주가 건넨 채찍을 건네받았다.무릎을 꿇은 두 나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팔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도, 감정을 담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단정하고 절도 있게 한 사람당 다섯 대만 때렸다.두 나인은 땅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채찍질을 멈춘 그녀는 채찍을 다시 서원공주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그 얼굴엔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서원공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언의 손짓으로 두 나인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의 얼굴에는 억눌린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렇다면 분노를 터뜨리듯 채찍을 휘두를 줄 알았건만 김단은 여기서 멈췄다.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이걸로 충분한 것이오?김단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공주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저의 원한이 깃든 사람은 저 둘이 아닙니다. 두 나인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 고통의 시작은 결국 진산군 댁과 임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서원공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김단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다.단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뱉
“내가 준다 했으면 그냥 받으시오.”서원공주는 김단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망설임 없이 비녀 위에 보요를 꽂아버렸다.금빛이 찰랑이자 세 알의 붉은 보석들이 더 눈부시게 빛났다.그 반짝임은 오히려 김단의 얼굴을 더 하얗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원공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김단에게 준 보요는 원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준 소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장신구가 김단을 이토록 빛나게 해주니 너무나도 거슬렸다.김단의 머리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요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이미 내어준 물건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서원공주는 얼굴에 가벼운 불쾌감을 띄운 채 말했다.“나는 공주이니 값비싼 장신구들은 많소. 낭자에게 하나 내준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오.”김단은 이 장신구가 예전에 자신이 모욕당하며 손에 쥐었던 공예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보요의 값은 공주에게 있어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김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공주자가의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심을 다해 공주님께 보답해 드릴게요.”그 말은 김단이 의도적으로 뱉은 것이었다.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공주였으니 김단은 그저 그녀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아니나 다를까, 서원공주는 김단의 태도에 만족한 듯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낭자의 의술 실력이 출중하니 내 눈여겨본 게 아니겠소? 기억해시오. 낭자만 잘한다면 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명 받들겠습니다.”김단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서원공주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어화원의 안쪽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김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약 한 시진이 흐른 뒤 김단은 정성껏 달인 약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중전의 방으로 들어섰다.세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중전 곁에는 서원공주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중전은 독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약을 마시자마자 곧 잠에 들었다.서원공주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정히 여며주고 나서야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김단 역시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던 찰나 서원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김 의원의 물건은 네가 대신 내의원으로 가져가거라. 나는 김 의원과 따로 나눌 말이 있다.”윤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김단이 들고 있던 약그릇을 받아든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서원공주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나와 잠깐 어화원으로 가지 않겠소?”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공주의 부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나인들을 뒤로하고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어화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가을 끝자락의 정원은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마른 낙엽이 조용히 발끝에서 사그라들었다.서원공주는 얼마 걷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라버니 때문에 많이 놀랐소?”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세자저하께서 중전마마의 병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김단은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그녀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세자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공주였다.늘 고고하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김단은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 순간 서원공주가 갑자기 김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지만 김단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동안 어머니 곁을 지켜줘서 고맙소. 낭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