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금의 김단은 혼자서 구석에서 조용히 있고 싶을 뿐 제일 좋기는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으면 한다.지금처럼 이런 상황은 너무 눈에 띈다.더군다나 그녀는 이미 이 혼사를 승낙했지만, 아직 주상의 승낙을 얻지 못했으니, 아직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다.참으로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명정대군과 손을 잡지 말아야 했다.다행히도 명정대군은 절에 들어간 후 법화사의 방장을 만났고, 예불할 때 자연스럽게 김단의 손을 놓았다.김단은 급히 손을 거두고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방장은 특별히 명정대군을 맞이하러 왔다, 그는 명정대군을 위해 불법을 강의하려고 한다.명정대군은 몸을 돌려 김단을 바라보았다.“낭자는 밖에서 나를 기다려주시오, 한 시진이면 되오. 조금 늦게 낭자를 데리고 갈 때가 있소.”김단은 오늘 밖에서 오래 머무를 생각도 하지 않고 평안부적을 구하고 돌아갈 생각만 했다. 그래서 명정대군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명정대군은 말을 마치고 가버려서 김단이 도대체 어떤 반응이 있었는지도 보지 못했다.명정대군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뒤에 숙희가 참지 못하고 다가와 작은 소리로 물었다.“아씨, 명정대군자가께서 어떻게 우리가 오늘 올 줄을 알았습니까?”장소까지 찾아서 있다가 아씨를 데리고 간다니!김단은 고개를 저었다.“아마도 오늘 성절이어서 한양의 백성들이 대부분 올 것이기 때문이겠지.”김단은 설마 임원이 명정대군에게 알렸겠느냐고 생각했다.더이상 아랑곳하지 않고 김단은 숙희에게 말했다.“어서 부처님께 평안부적을 구하러 가자.”말을 마치자, 숙희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법화사에서 가장 큰 관음상 앞에 무릎을 꿇고 김단은 두 손을 모으고 진심으로 절을 했다.갑자기 뒤에서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소리가 들려왔다.“언니, 왜 혼자 왔소?”임원이다!김단은 어쩔 수 없이 눈을 떴는데, 임원이 이미 김단의 곁에 무릎을 꿇은 것을 보았다.다만 그녀는 보살에게 절을 하지 않고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김단을 쳐다보았다.“나와 함께
모든 사람이 멍해졌다.김단이 이렇게 예고 없이 소정원에게 따귀를 때릴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그래서 소정원의 곁에 소한과 임학이 서 있더라도 이 따귀가 소정원의 얼굴에 떨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하지만, 이 따귀 역시 침묵하던 사람들을 깨운 것 같다.임학은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 김단의 손을 덥석 잡았다.“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빨리 소낭자에게 사과하지 못해?”김단은 차가운 눈동자로 임학을 바라봤다.“손, 놓으시오! ”목소리는 크지 않았고, 어떤 기세도 차지 않았다.이렇게 아무런 압박이 없는 한마디가 임학의 심장을 갑자기 움츠리게 했다.그는 무의식중에 손을 놓았다.김단은 자기 손을 거두고 임학에게 잡혀 아픈 손목을 주무르고 있는데 옆에 있는 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소낭자의 말은 좀 심했으나, 언니가 정말 손을 대서는 아니 되었소. 그것도 절에서..., 언니가 이러는 것은 보살님께서 탓할 것이오!”김단은 오히려 임원을 보지도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너, 지금 한 마디만 더 하면 너도 같이 때릴 것이다.”임원은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며 억울하게 김단을 바라봤다.그러자, 김단은 소한을 바라보았다.“소장군께서도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그녀는 그들이 할 쓸데없는 말을 다 듣고 한 번에 다 해결할려고 한다.그러나 소한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정원의 불손한 말이 먼저였다. 김낭자가 화를 풀었으면 하오.”의외다.김단은 자기도 모르게 소한을 깊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따귀를 맞은 소정원은 참을 수 없었다.“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소? 김단이 천박한 것이지, 오늘 모든 사람이 김단이 명정대군과 손을 잡는 것을 보았소! 그들이 뭐라고? 주상께서 아직 혼사를 하사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말로 하사했다고 해도 두 사람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다정해서는 되겠소? 내가 김단이 명정대군을 꼬셨다고 하는 말이 어디가 틀렸소?”“조금 전에 내가 소낭자의 귀를 후비는 것을 막지 말아야 했나 보오.”김
그러나 오히려 다른 일로 대답할 수 있다.“소 장군 농담도 잘하시네요. 저는 ‘김’ 씨 인데 아무리 해도 ‘임’ 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가르칠 차례가 아니지오.”“김단!”임학은 진노했다.“너무 제멋대로 굴지 마라!”“제멋대로는 당신들이겠죠!”김단은 오늘 정말 참을 수 없었다.“더는 오로지 조모를 위해 평안부적을 구하러 왔을 뿐인데, 도대체 당신들에게 무슨 방해가 됐다고 그러는 거죠? 당신들이 뭔데 이 사람 저 사람이 내 앞에 와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겁니까? 특히 당신, 임학 도련님! 제가 모욕당할 때는 침묵하더니, 이제 와서는 마치 오라버니라도 된 듯 저를 훈계하려 드는 건가요? 당신이 뭐라고!”“내가 네 오라버니이니 당연히 너를 혼낼 자격이 있어!”임학은 노발대발했다.오늘 비록 소정원이 옳지 않더라도 두 집안의 친분이 꽤 깊어서 모든 것은 집으로 돌아간 후에 다시 이야기할 수 있다. 그 역시 직접 소씨네 부모님을 찾아가 소정원을 잘 관리하라고 고자질할 수도 있다.어쨌든 김단은 손을 대지 말아야 했다!그런데 이 말이 나오자, 김단은 바로 웃음이 터졌다.“뭐라고요? 오라버니? 웃기는 소리 하지 마세요!”“김단!”임학은 큰 소리로 화를 내며 또 무슨 험한 말을 하려고 했다.그러나 김단이 갑자기 차갑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불당 안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똑똑히 들리게 했다.“내 오라버니는 이미 3년 전에 죽었소.”그녀의 마음속에서 그들은 벌써 모두 죽었다.김단의 차가운 눈동자를 보자 임학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분명히 그녀는 그를 저주하고 있었고, 분명히 그는 화가 나서 반박해야 했는데, 지금, 이 순간 그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심지어 옆에 있던 소한조차도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말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솟아올라 순식간에 그의 온몸을 침범하여 그의 온몸의 피를 끓게 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 온몸을 빙산처럼 얼게 하여 제자리에 서서 꼼짝도 할 수 없게 하였다.지금에 와서 송백선과 소정
임학도 당연히 멍해졌다.그래, 김단은 조모의 평안을 구하러 왔는데, 그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왜 이러지?왜 매번 김단을 만날 때마다 멍청한 짓을 하는 건지?임학은 가슴이 두근거리며 조모가 자신의 이 말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면 김단은 커녕 자기 자신도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 할 것으로 생각했다!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일은 김단을 탓해야 하는 것이 아니야?왜 그는 임원을 대할 때 모두 조리가 뚜렷한데, 하필 김단을 만나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건가?이 모든 것이 모두 김단이 일으킨 것이 아닌가?3년 전에 그가 죽었다고? 자기가 그녀를 가르칠 자격이 없다고?그는 오히려 그녀에게 그가 도대체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여줘야겠다고 결심했다.김단이 집으로 돌아온 이래 쌓인 분노가 이 순간에 철저하게 폭발하자 임학은 갑자기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어 김단을 향해 잡았다.김단은 깜짝 놀랐다. 임학이 여기서 그녀에게 손을 댈 줄은 몰랐지만 신속하게 반응하여 몸을 옆으로 피했다.그러나 임학은 그래도 김단보다 몇 살 더 먹었고, 또 어릴 때부터 무예를 익혔으며, 그의 능력은 김단보다 훨씬 뛰어났고, 몇 수 안에 김단을 항복시켰다.김단의 두 손은 모두 임학에 의해 갇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이 상황을 보자, 숙희가 바로 달려왔다.“도련님! 이곳은 절입니다, 대군자가도 아직 계십니다! 허튼짓하지 마시고 아씨를 놓아주세요!”“비켜!”임학은 다짜고짜 숙희를 발로 걷어찼다.숙희가 걷어차서 날아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해냈다.김단의 두 눈동자에 순식간에 피가 충혈되었다.“임학, 이 나쁜 놈아!”“내가 나쁜 놈이라고? 내가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너를 감싸고 싸웠는데, 네가 뭘 먹고 싶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구해다 주고. 직접 내 손으로 너의 성인식(성인식:옛날 15세가 되면 머리에 비녀 같은 장식품을 꽂아 성인이 되었다고 알리는 식) 비녀를 만들어 주고, 멀고먼 곳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야명주를 찾아왔어! 내가 너를 위해 그렇게
“맞아요, 당신은 원래 진산군댁의 친자식도 아닌데, 여러 해 동안 부귀영화를 잘 누렸으면 만족해야 하지 않겠소?”“정말 너무하네요, 자기 오라버니를 죽었다고 저주하다니, 정말 보살님도 화를 낼 것 같네요!”그 몇 사람의 말을 듣고 주위에 김단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모두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김단은 뜻밖으로 모든 사람의 지적을 받았다.그러나 그 3년 동안 얻어맞는 것이 습관이 되었는지 김단은 이렇게 심한 학대를 받고도 일어날 수 있었다.그녀는 몸을 버티고 앉아, 많은 사람들의 비난에도 그저 가볍게 한쪽에 침을 뱉을 뿐이었다.만약 그 침이 붉은색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안색에서 정말 맞은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싼 사람들을 바라보았다.송백선, 소정원, 임원, 소한....그들 중 어떤 사람은 고소해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시종일관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마지막에 김단의 시선은 임학의 얼굴에 떨어졌다.예전에, 이 얼굴은 일부러 못생긴 척 분장하여 그녀의 환심을 사기도 했는데, 오늘날 그녀를 마주하고 있는 것은 끝없는 노여움과 미움뿐이다.김단은 이 얼굴을 보고 마침내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허허, 하하하하...”그녀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자, 주위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맞아서 바보가 된 줄 알았다.김단의 웃음은 임학을 당황하게 했다.김단은 웃으면서 땅바닥에서 기어오르는데 그 모습은 유난히 낭패스러웠다.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웃음소리를 멈추었지만, 여전히 웃으며 임학을 바라보았다.“보아하니 도련님께서 정말 기억력이 나쁜 것 같네요. 당신이 직접 저를 위해 만든 비녀? 그럼, 그 비녀가 지금 누구의 머리 위에 꽂아져 있는지 보실래요?”말을 듣자, 임학은 멍하니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임원을 바라보았다.그는 그제야 김단의 성인식 날이 바로 임원이 집으로 돌아왔던 날이었기 때문에 아직 김단에게 선물하지 못한 그 비녀가 그렇게 임원의 머리에 꽂혔다는 것이 생각났다.
명정대군을 보자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소한은 주상의 뜻을 받고 주상을 만난도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서 지금은 그저 공수해 읍을 올렸다.김단은 무릎을 꿇기도 전에 이미 명정대군이 부축했다.그의 큰 손은 뜨거운 온도를 지니고 있었고 그녀를 부축할 때 그녀 몸의 떨림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그마저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임학의 학대를 평온하게 받아들인 그녀가 이미 이렇게 심하게 떨고 있는지 생각 못 했다.김단도 분명히 이미 방장과 떠났던 명정대군이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명정대군이 옆에 나타난 것에 대해 그녀는 여전히 감사하고 있다.임학이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때리자, 그녀는 결국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만약 명정대군이 제때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마 그녀는 이미 여러 사람들의 앞에서 다시 땅으로 쓰러졌을 것이다.“고맙습니다.”그녀는 낮은 소리로 고맙다고 말했지만, 다른 사람이 듣기에는 목소리가 워낙 가늘었다. 그러나 명정대군은 똑똑히 들었다.이 가늘고 나지막한 한마디는 바늘처럼 그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었다.따라서 그의 노여움도 점점 격해졌다.바로 임학을 향해 노려보았다.“진산군댁 도련님이 참 허세가 작작 하네. 어찌 감히 성지인 절에서 이렇게 심하게 내 사람을 학대하다니, 진산군댁은 정말 이 대군을 안중에 두지 않고 나아가서는 아바마마를 안중에 두지 않은 것이 아니오!”이렇게 큰 죄명을 내리자, 임학은 그 당장에서 멍청해져 마구 절을 했다.“소신이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감히? 이렇게 중요한 절에서도, 자네가 사람을 이렇게 다치게 했는데, 진산군댁의 도련님이 감히 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명정대군은 즉시 명령을 내렸다.“여봐라! 이놈을 죽도록 때려라! 이놈이 일어날 수 없을 때까지 때려라!”“네.”명을 받은 시종들은 바로 나아가 임학을 땅에 눌렀다.그리고 주위에 있는 빗자루를 들고 임학의 등을 향해 호되게 때렸다.갑자기 울려 퍼지는 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당황했다.그러나
명정대군의 매서운 눈동자에 대해 소한도 똑같은 눈빛으로 맞섰다.“소신은 대국을 중시했을 뿐입니다.”명정대군이 진산군댁과 혼인을 맺으려고 한 이상 일을 너무 과분하게 해서는 안 된다.그러나 이 말을 듣자, 명정대군은 오히려 비웃었다.“소 장군은 정말 크게 보시는군. 이런 큰 생각이 있는 사람이 조금 전에 어떻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벙어리가 되었는가?”방금 김단이 맞았을 때, 그의 이 입은 꿰매져 있었나?명정대군이 이렇게 묻는 것을 듣고 김단의 마음은 참지 못하고 아프기 시작했다.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이미 소한에 대해 단념했다. 분명히 이미 소한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하지만, 이 마음, 왜 아직도 이렇게 아픈건지?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자신이 쓸모없다는 것을 미워했다. 눈동자 속에 뭔가 따뜻한 것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녀에게 재빨리 눌려 참았다.소한은 무의식적으로 김단의 안색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각도에서 볼 때 그녀의 몸 절반은 모두 명정대군의 뒤에 숨어있었다. 자태가 친절하여 그의 마음을 더욱 먹먹하게 했다.그래서 말투도 따라서 약간의 포악한 기운을 띠고 있다.“오늘의 일은 도대체 누가 옳고 그른지,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알 수 있사옵니다. 임 도련님은 자신의 여동생을 훈계했을 뿐이고 설령 힘을 좀 무겁게 썼다 하더라도, 기어코 진산군댁의 집안일이지오. 이 일은 소신이 관여할 수도 없고 대군자가마저도 아마 관여할 수 없을 것입니다.”소한이 집안일을 핑계로 대니 명정대군을 좀 난처하게 했다.설령 그가 대군자가라 할지라도 남의 집안일에 끼어들 도리는 절대 없다.더군다나 그가 김단과 결혼한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바로 진산군댁와 관계에 맺는 것인데, 오늘 만약 너무 지나치게 한다면, 아마도...명정대군이 침묵하는 것을 보고 소한은 시종 몇 명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그는 원래 무관이었고, 전쟁터에서 단호하고 살벌한 인물이었기에, 눈빛 하나만으로 그 몇 명의 시종들은 놀래서 분분히 손에 든
명정대군은 직접 김단을 궐로 데리고 들어갔다.김단이 깨어났을 때 이미 덕빈의 궁에 있었다.온 집안의 화려한 장식을 보고, 김단은 그제야 자신이 명정대군에게 마차까지 안아서 가기도 전에 기절했다는 것을 떠올리고, 마음이 다급해져, 무의식중에 몸부림치며 일어났다.공교롭게도 덕빈이 문을 밀고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황급히 다가갔다.“빨리 엎드려 있거라. 상처가 아직 덜 나아서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다.”하지만 김단은 이미 앉았기 때문에 당연히 다시 엎드려 있을 도리가 없다. 그래서 침대에서 내려 덕빈에게 절을 하려고 하는데, 덕빈이 또 말렸다.“이 애가 참,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도 이런 번거롭고 불필요한 예절을 신경 써서 뭘 하느냐?”덕빈은 말하면서 약을 든 나인에게 손을 흔들었다.나인이 약을 들고 오자 덕빈은 받아서 직접 한 숟가락을 떠서 불어 김단의 입가로 향했다.“이것은 내의원에서 처방한 약이다. 외상에 효과가 좋다고 하니, 자, 식기 전에 어서 마셔.”김단은 깜짝 놀랐다.“소인이 직접 먹을게요.”말하고는 바로 손을 뻗어 약을 가지려 했는데 덕빈이 피했다.“넌 아직도 환자야, 어떻게 혼자 한다고 그래? 말 들어, 입 벌려.”덕빈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말투는 온천처럼 김단의 마음을 다 녹이려는 것 같았다.김단은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말을 듣고 입을 열었다.씁쓸한 약이 입에 들어가자, 그녀는 삼켰지만, 머릿속에는 어릴 때 아팠을 때 임씨 부인이 자기에게 약을 먹이는 장면이 떠올랐다.지금처럼 한 입 한 입, 살살 불어서 그녀의 입으로 보냈다, 혹시나 그녀가 데일까 봐....다만 그 기억들은 너무 오래되어 코끝이 찡할 정도로 멀었고, 김단의 눈동자는 약간 붉어졌다.그러자 덕빈은 눈치를 채고 바삐 물었다.“왜 이러는 거야? 상처가 아픈 건가, 아니면 약이 너무 쓴 건가?”그녀의 상처를 생각하니, 덕빈은 여전히 가슴이 아팠다.임씨네 그 녀석도 참 어찌 그렇게 독한가!김단은 머리를 흔들면서 말하지 않았
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곧 이어진 건 덕빈의 날 선 고함이었다.“천한 계집년이!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단 말이냐! 기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동생까지 죽여?”내가 죽였다고?김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본능적으로 서원공주를 힐끗 바라본 후 덕빈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덕빈마님, 부디 진정하세요. 이 일에는 분명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오해!”덕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김단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다행히 이번에는 김단이 몸을 뒤로 빼며 그 손을 피했다.하지만 덕빈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가 거칠게 김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윤이와 나인들이 덕빈을 제지했다.그러나 덕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손헌이 당한 죽음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모욕적이었다.그건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손 씨 가문 전체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몸이 붙잡혀도 그녀는 계속해서 발악했다.마치 그녀의 살갗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이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원공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감히 중전의 침전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니요. 중전마마를 눈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당장 덕빈을 가두거라. 이번 일은 내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 엄벌을 청할 것이다.”“예.”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덕빈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함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김단의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화끈거리는 통증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 서원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소?”김단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그 말에 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단이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오?”김단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
전하가 떠난 뒤 서원공주는 김단과 함께 중전에게 예를 올렸다.중전의 침실을 나선 그들 뒤로 윤이와 다른 나인들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걷고 있었다.김단은 직감적으로 공주가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그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서원공주는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몸을 돌보는 일은 후궁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오늘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낭자 같은 의원이 어찌 아버지의 몸을 돌볼 기회가 있겠소?”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전하를 가까이 뵙기 어려웠겠지만 자신처럼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달랐다.그러나 그 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김단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모두 공주님 덕분입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앞으로도 잘하시오. 아버지께서 만족해 하신다면 낭자를 어의로 만들어 줄 수도 있소.”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러고 보니 수 어의도 나이가 많지 않소? 몇 해 안에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오.”그녀는 마치 김단의 미래를 꽃길로 닦아주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벼슬이나 권세 따위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럼에도 겉으로는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김단의 연기를 공주가 눈치챌 리 없었다.여인으로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의원 원장 자리까지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니 김단이 감격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그녀는 김단을 바라보더니 낮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낭자를 돌봐줄 책임이 있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말을 잘 듣는 자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소.”
소하의 미간에는 어느새 짙은 근심의 스며들었다.소한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거의 다 나아가던 상처를 일부러 뜯어내어 다시 덧나게 하다니...그렇게 자신의 몸을 해쳐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말은 힘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그저 방금 전 김단이 한 말이 소한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시간은 조용히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이날도 김단은 평소처럼 중전의 약을 들고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중전의 문병을 온 전하와 마주치게 되었다.전하는 중전의 곁에 앉아 나인들이 중전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김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중전의 몸은 어떠하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된단 말이냐?”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전마마의 기력은 지난 보름 사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지만 중독된 세월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십여 년간 몸속에 쌓인 독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리 만무했다.다만 최근 소하로부터 중전에게 독을 먹인 자가 중전의 외가 친척인 맹씨 집안이라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전하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그 표정을 본 서원공주는 혹여 김단이 책망당할까 걱정되어 급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의 몸은 정말로 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어요. 제가 직접 지켜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전하는 딸이 김단을 두둔하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그러하냐?”“정말입니다.”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지금 김단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어머니뿐만 아니라 궐 안의 다른 마님들도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소한의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위로 선홍빛 피가 점점 번져가며 그 면적을 넓히더니 이내 붕대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그 모습을 본 소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한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상처가 덧났다. 약 발라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하지만 소한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말했다.“형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소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소한이 또 김단을 귀찮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소한의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기에 굳이 내의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방금 그 잠깐의 실랑이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줄은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다.김단은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소한을 노려보다가 결국 담담하게 말했다.“앉으세요 얼른.”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통과 붕대를 가지러 갔다.소한은 그제야 만족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탄탄하게 다져진 상체를 드러냈다.그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김단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기쁨과 방금 전 그녀의 약병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얽혀있었다.김단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그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김단과 소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한아, 제정신이냐?”그 상처는 단순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었다.누가 봐도 일부러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찢은 흔적이었다.소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하를 노려보았다.소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게 뻔했다.김단은 아무 말 없이 붉게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묵묵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그녀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상처를 다 치료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군이라면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합니다.”김단은 짧게 한마디 뱉어버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소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었다.한때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온갖 꾀를 부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그녀를 볼 수 있는 꼴이라니.한때 자만심으로 빛나던 젊은 장군이 지금은 초라할 만큼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김단은 그를 향해 뭐라 질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차라리 야멸차게 욕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조차 헛되이 들릴 만큼 이 남자의 모습은 너무 진심이었다.그때 소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내가 다치면 낭자가 약 발라주면 안 되겠소?”“안 됩니다.”김단은 단칼에 잘라내듯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때도 한양까지 올라와서 저한테 치료 받으실 겁니까?”그러자 소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낭자가 내 상처를 봐준다고만 하면 난 얼마든지 참고 버틸 수 있소.”그 말에 김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때 마침, 문밖에서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또 다쳤다고?”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을 한 소하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자락이 날렵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허리춤에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힘 있고 절도 있는 그 걸음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그를 발견한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소하 도련님.”반면 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찡그린 얼굴로 소하를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여긴 왜 왔습니까?”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에게 인사한 뒤 소한을 바라보았다.“네가 다쳤다고 해서 말이다. 많이 다친 것이냐?”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한의 옷깃을 젖히려 했다.그러자 소한은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관심 끄세요. 전 김단한테 치료 받으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소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김단은 바빠 보이는데? 네 약은 형
그 두 나인이 집요하게 김단을 괴롭혔던 건 단지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명백히 공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세답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있었던가?모두가 서원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김단을 괴롭히고 짓밟는데 앞장섰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두 나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김단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고통을 즐기던 그 두 나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김단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원공주가 건넨 채찍을 건네받았다.무릎을 꿇은 두 나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팔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도, 감정을 담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단정하고 절도 있게 한 사람당 다섯 대만 때렸다.두 나인은 땅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채찍질을 멈춘 그녀는 채찍을 다시 서원공주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그 얼굴엔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서원공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언의 손짓으로 두 나인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의 얼굴에는 억눌린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렇다면 분노를 터뜨리듯 채찍을 휘두를 줄 알았건만 김단은 여기서 멈췄다.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이걸로 충분한 것이오?김단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공주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저의 원한이 깃든 사람은 저 둘이 아닙니다. 두 나인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 고통의 시작은 결국 진산군 댁과 임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서원공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김단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다.단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뱉
“내가 준다 했으면 그냥 받으시오.”서원공주는 김단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망설임 없이 비녀 위에 보요를 꽂아버렸다.금빛이 찰랑이자 세 알의 붉은 보석들이 더 눈부시게 빛났다.그 반짝임은 오히려 김단의 얼굴을 더 하얗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원공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김단에게 준 보요는 원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준 소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장신구가 김단을 이토록 빛나게 해주니 너무나도 거슬렸다.김단의 머리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요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이미 내어준 물건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서원공주는 얼굴에 가벼운 불쾌감을 띄운 채 말했다.“나는 공주이니 값비싼 장신구들은 많소. 낭자에게 하나 내준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오.”김단은 이 장신구가 예전에 자신이 모욕당하며 손에 쥐었던 공예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보요의 값은 공주에게 있어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김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공주자가의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심을 다해 공주님께 보답해 드릴게요.”그 말은 김단이 의도적으로 뱉은 것이었다.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공주였으니 김단은 그저 그녀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아니나 다를까, 서원공주는 김단의 태도에 만족한 듯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낭자의 의술 실력이 출중하니 내 눈여겨본 게 아니겠소? 기억해시오. 낭자만 잘한다면 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명 받들겠습니다.”김단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서원공주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어화원의 안쪽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김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약 한 시진이 흐른 뒤 김단은 정성껏 달인 약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중전의 방으로 들어섰다.세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중전 곁에는 서원공주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중전은 독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약을 마시자마자 곧 잠에 들었다.서원공주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정히 여며주고 나서야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김단 역시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던 찰나 서원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김 의원의 물건은 네가 대신 내의원으로 가져가거라. 나는 김 의원과 따로 나눌 말이 있다.”윤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김단이 들고 있던 약그릇을 받아든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서원공주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나와 잠깐 어화원으로 가지 않겠소?”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공주의 부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나인들을 뒤로하고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어화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가을 끝자락의 정원은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마른 낙엽이 조용히 발끝에서 사그라들었다.서원공주는 얼마 걷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라버니 때문에 많이 놀랐소?”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세자저하께서 중전마마의 병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김단은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그녀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세자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공주였다.늘 고고하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김단은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 순간 서원공주가 갑자기 김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지만 김단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동안 어머니 곁을 지켜줘서 고맙소. 낭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