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인은 가문 사람들의 얼굴을 쓱 훑더니 결국 진산군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말했다.“넌 내가 단이만 예뻐한다고 했지? 그러면 너희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다들 원이만 예뻐하고 편애하잖아! 나까지 그 아이를 아끼고 지켜주지 않으면 그 아이가 이 집안에서 숨이라도 편하게 쉴 수 있을까?”말을 하던 노부인은 한숨을 푹 내쉬며 천천히 대문 밖으로 걸어갔다.“아무리 친딸이 아니라고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살았으면 감정이라는 게 생기는 것이야. 감정이 생기면 마음이 쓰이기 마련이고.”집안에 서있던 사람들은 노부인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다가 노부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진산군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물었다.“오늘 이 일을 누가 어르신한테까지 알린 것이냐?”임학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머릿속에는 여전히 조금 전에 자신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던 김단의 모습만 가득 차있었다.임씨 부인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이때,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던 임원이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제, 제 곁을 지키던 시녀가 의원에게 약을 가지러 갔다가 실수로 말을 흘린 것 같습니다.”노부인 곁에 있는 시녀는 거의 매일 의원에게 찾아가 약을 구했기에 거기서 마주쳤을 수도 있다.임원의 말에 진산군이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고 눈치를 보던 임원은 진산군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제가 잘못했습니다. 일부러 할머니께 이 일을 알리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돌아가서 시녀를 제대로 교육하겠습니다. 아버님, 제발 노여움 푸세요.”눈시울이 빨개진 임원이 가여운 모습으로 진산군을 쳐다보자 진산군은 마음이 약해져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너희들 할머니는 이제 몸이 안 좋아서 이런 일들을 신경 쓰게 만들면 안 돼. 그러니까 앞으로 절대 할머니에게 괜한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진산군이 엄숙한 표정으로 경고했고 조금 전 어머니의 말이 떠오르자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단이도 한 달 외출 금지를 받았으니까 이 일은 이쯤에서 마무리 짓고 앞으로
이날 밤, 김단은 꿈을 꾸었다.꿈속에서 김단은 3년 전 임원이 유리잔을 깨트렸던 상황으로 돌아갔고 공주 마마의 질타에 소한과 임학은 김단 앞에 막아서서 김단을 든든하게 지켜주었다.꿈속의 김단이 두 오라버니에게 감동하던 그때, 두 사람 뒤에 서있는 사람은 김단이 아닌 임원으로 바뀌었다.결국 김단은 세답방에 끌려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다른 무수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나인이 휘두른 채찍에 맞고 있었다.화들짝 놀란 김단은 두 눈을 번쩍 떴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으며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고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세답방 그곳은 아직까지도 김단에게 지옥보다 더 두려운 곳이다.인기척에 놀란 숙희가 방으로 달려왔고 침대에 걸터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김단을 보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아씨, 악몽을 꾸신 겁니까?”깊게 숨을 들이마신 김단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조금 안 좋은 꿈을 꾸었을 뿐이야. 이제 괜찮아졌어.”꿈속에서도 소한과 임학이 자신의 편에 서지 않았다는 생각에 김단은 씁쓸하게 웃다가 조금씩 밝아오는 창밖을 보며 물었다.“지금 몇 시인 것이냐?”“이제 묘시 조금 넘었습니다. 조금 더 주무십시오.”숙희가 하품을 하며 대답하자 김단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다 잤어.”조금 전에 꾼 꿈으로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있기에 다시 눕는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숙희는 여전히 졸린 듯 눈을 비비며 물었다.“그럼 지금 일어나시겠습니까?”김단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이고 어차피 그녀는 지금 외출 금지이기에 지금 일어나도 딱히 할 일은 없다.“그럼 뭐 하실 거예요?”숙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묻자 김단은 멈칫했다.그녀는 아직 뭘 해야 할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명정 대군은 이미 사망했고 이대로 진산군 관저에 가만히 있으면 임씨 가문에서는 또다시 그녀에게 결혼 상대를 찾아줄 것이다.이용당하는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기에 김단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며 자신을 위해 뭔가를 시작해야
두 번의 시도에도 입에 댈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이었기에 정암은 바로 돈을 들여 전문가한테서 배우기로 했다.쉬워 보였던 대창 요리는 실제로 만들려 하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며칠 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한 정암은 대창을 사들여 한 그릇을 만들어 보았으나, 식으면 맛이 떨어질까 봐 바로 김단에게 달려온 것이었다.하지만 문을 두드리고 나서야 정암은 자신이 너무 이른 시간에 찾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심지어는 그는 대문이 아닌 담을 타고 몰래 들어온 것이었다.뭐 대단한 것도 아니라 대창을 맛보게 하려고 말이다!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정암은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으나, 이제는 되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한편, 김단도 정암이 이 시간에 대창을 주러 왔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저번에 그저 지나가는 말로 대창을 좋아한다고 하였고, 심지어 그녀는 까맣게 잊고 있었건만, 정암은 그 말을 기억하고 이렇게 직접 만들어 별당에 가지고 온 것이었다.정암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개지자 김단은 참다못해 피식 웃으며 말했다.“종사관 나리께서는 제가 지금 배고프다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말을 하던 김단은 숙희에게 찬합을 받아오라고 눈치를 줬고,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넋을 잃은 채 멍하니 서있던 정암은 숙희가 손을 내밀자 바로 찬합을 건넸다.숙희는 찬합에서 대창을 꺼냈고 김단은 바로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정암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김단을 빤히 쳐다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맛은 어떻습니까?”“너무 맛있습니다.”환하게 웃던 김단은 한 점을 집어 숙희 입에 넣어주었고, 숙희도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정말 너무 맛있습니다!”정암은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안도의 한숨을 살짝 내쉬었고 편한 미소도 지었다.“다행입니다. 제가 이 요리를 며칠이나 배웠는데 낭자의 입에 안 맞을까 봐 엄청 걱정했습니다.”김단은 한없이 조심스러운 정암의 모습을 보며 왠지 마음이 씁쓸했고 정암의 진심을 알 것만 같았다.만약 진심이
정암이 발견된 것인가?김단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씨, 여기 계세요. 소인이 나가보겠습니다.”숙희는 미처 내려놓지 못한 대창 그릇을 김단 손에 쥐여주며 빠르게 밖으로 향했고 그러다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돌아왔다.“아씨! 호위병들이 정사관 나리를 발견한 게 맞아요!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정사관 나리께서 빠르게 도망가셔서 호위병들이 못 잡으셨어요.”숙희의 말에 김단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만약 정암이 김단 때문에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나면 그녀는 큰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하지만 30분도 채 되지 않은 사이, 별당 대문이 벌컥 열리며 임학이 씩씩거리며 들어왔고, 김단은 갑자기 나타난 임학을 보고 미간을 확 찌푸렸다.“도련님, 저는 지금 별당 안에서 벌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모께서는 절대 아무도 이곳에 발을 들이지 마시라고 명확하게 말씀을 하셨고요. 그런데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도련님께서는 무슨 일로 이곳에 오신 겁니까?”임학은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김단을 힐끗 쳐다보며 엄숙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아침 한 남자가 별당 담을 넘어서 도망치는 걸 봤다고 호위병이 나한테 보고를 했소.”김단은 순간 표정이 살짝 굳어졌지만 이내 담담하게 대꾸했다.“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럼 그 남자는 잡혔습니까?”임학은 김단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제 그 일이 있은 뒤로부터 화를 참아야 한다는 생각에 여전히 차분하게 말했다.“아니, 잡지 못했소. 하지만 호위병들은 그 자를 정암 종사관으로 의심하고 있소.”임학의 말에 김단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암은 소한의 부하로써 평소에 호위병들과 마주치는 일이 많기에 호위병들이 정암을 알아봤을 것이다.하지만…김단은 임학을 힐끗 쳐다보다가 이내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종사관 나리께서 이른 아침에 이곳에 올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임학은 뻔히 알면서 묻는 김단을 보며 속으로 어이없어서 코웃음을 쳤지만 결국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그동안 낭자가 서럽고
이런 생각에 임학은 화가 점점 치밀었다.“어찌 됐든 낭자는 여인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더럽히는 일을 저지르는 건 절대 안 되는 일이오. 낭자와 원이는 아직 혼인을 하지도 않은 처녀인데 안 좋은 소문이라도 퍼지면 낭자나 원이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소.”김단이 자신의 별당에서 밤새 남자와 함께 있었다는 소문이 퍼지기라도 하면 사람들이 김단을 어떻게 생각하고 또한 진산군 관저의 딸들을 어떻게 생각할까?그러다가 결국 임원의 명성도 김단 때문에 더럽혀질 수도 있다.한편, 김단은 임학의 말을 조용하게 듣고 있다가 그제야 임학의 본심을 알게 되었다.“어쩐지, 도련님께서는 사람을 시켜 저를 묶어놓고 저에게 약까지 먹였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왜 제 명성을 걱정하시나 의아했는데 결국 도련님께서는 임원을 위해 저를 찾아온 것이군요.”흠칫하던 임학은 예전에 자신이 저지른 황당한 일들이 떠올라 마음이 조금 뜨끔했다.“난 오늘 낭자와 말다툼을 하러 온 게 아니오. 조모께서 낭자에게 벌을 준 건 낭자가 별당 안에서 다른 남자와 몰래 만나라는 뜻이 아니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시오.”그렇게 임학은 있지도 않은 죄명을 김단에게 강제로 씌웠다.임학이 돌아서서 떠나려고 할 때, 뒤에서 그릇 하나가 날아와 그의 왼쪽 어깨에 정확하게 맞았다.미간을 확 찌푸린 임학은 고개를 돌려 손에 그릇을 들고 있는 김단을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미친 것이오?”걱정하는 마음에 충고를 했는데 김단은 그 마음을 알아주지도 못하는 망정, 그에게 이렇게 그릇까지 던지다니!하지만 김단은 멈추지 않고 계속 그릇을 던졌다. 그러다가 식탁 위에 있던 그릇을 전부 던지고 나서야 김단을 임학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제 명성을 가장 더럽힌 사람은 도련님입니다! 그리고 나서 제가 여인의 몸을 잘 간수하지 못했다고 손가락질하는 것도 당신이고요! 뻔뻔하게 저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하지만 도련님께서는 별당에 들어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저에게 괜찮은 지,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전혀 묻지 않았습니다. 되려 저에게
임학이 군영에 찾아갔을 때, 정암은 서재에서 소한에게 군무를 보고하고 있었다.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임학은 다짜고짜 정암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지만 눈치가 빠른 정암은 몸을 옆으로 살짝 돌려 임학의 주먹을 피했다.임학은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정암을 향해 발을 뻗었지만 정암은 여전히 쉽게 쓱 피했다.한편, 돌발 상황에 미간을 확 찌푸린 소한은 책상을 뛰어넘어 정암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임학의 손을 덥석 잡았다.그러고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임학에게 말했다.“지금 이게 무슨 짓이오?”임학은 소한의 손을 홱 뿌리치더니 화가 잔뜩 난 눈빛으로 정암을 노려보았다.“저자에게 물어보시오.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소한은 고개를 돌려 정암을 쳐다보았지만 정암은 당당하게 허리를 쭉 편 채 대답했다.“소인은 임 도련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김단에게 대창 요리를 줬을 뿐인데 그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가?한편, 정암의 대답에 임학은 다시 주먹을 꽉 쥐었다.“오늘 아침 정암 당신이 단이 별당 담을 넘어 도망을 쳤소. 우리 관저를 지키던 호위병들도 당신의 뒷모습을 알아봤는데 계속 모른 척할 셈이오?”임학의 말에 소한도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정암은 소한의 부하로 오랫동안 함께 일을 했기에 임학의 한 마디로 죄를 단정 질 수는 없었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소한의 물음에 정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되레 임학을 쳐다보며 물었다.“설마 김단 낭자에게 찾아가신 겁니까?”정암의 물음에 흠칫하던 임학은 버럭 화를 냈다.“내가 내 동생을 찾아가는 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소!”“낭자에게 무슨 말을 하셨습니까?”정암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임학을 쳐다보며 언성을 높이자 임학도 화가 나서 또다시 정암을 때릴 기세로 말했다.“그건 나랑 내 동생 사이의 일이오! 당신은 끼어들 문제가 아니란 말이오!”정암도 기세 등등한 모습으로 한 걸음 다가가 임학의 멱살을 확 잡았다.“경고하는데 김단 낭자 앞에서 헛소리하시지 마십시오. 안 그러
정암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자신의 오른손을 꾹꾹 누르며 담담하게 대꾸했다.“그럼 혹시 김단 낭자는 그저 장군님이 사줘서 좋아한 게 아닐까요? 만약 정말 다과를 좋아했다면 그렇게 사람들에게 다 나눠줬을까요?”예전에 정암도 김단이 나눠준 다과를 먹은 적이 있다.한편, 임학은 정암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고 자세히 생각해 보니 김단은 늘 남에게 다과를 나눠주곤 했었다.그때 당시에는 김단이 단순히 나눔을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암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만약 정말 다과를 매우 좋아했다면 아까워서 남들에게 그렇게 많이 나눠주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임학만큼 당황한 소한은 정암을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르 놓았다.소한은 지금까지 김단이 다과를 좋아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예전에 김단에게 다과를 선물할 때마다 김단은 잔뜩 신난 표정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을 받은 듯 기뻐했다.하지만 언젠가부터 김단은 소한이 마차 안에 넣어둔 다과를 전혀 입에 대지도 않았고 바로 임원에게 주었다.소한은 김단이 아직 그를 원망하고 화가 풀리지 않아서 그가 준 음식을 먹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김단이 애초에 다과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어렸을 때부터 두 살 어린 김단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그 아이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김단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정암은 말 없는 두 사람을 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장군님도 아실 겁니다. 소인이 어젯밤 군영을 떠났을 때 이미 술시였습니다. 취향각에서 주방장에게 두 시간 정도 요리를 배운 뒤 바로 대창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대창 손질만 해도 꽤 오래 걸렸고 도중에 고기를 태워서 다시 만들기도 했습니다. 소인이 취향각을 떠났을 때 이미 묘시였습니다. 장군님께서 소인을 못 믿으시겠다면 취향각에 직접 찾아가셔서 물으셔도 됩니다. 소인은 겨우 성공한 대창 음식이 식을까 봐 급하게 진산군 관저로 들고 간 겁니다.
임학은 정암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하더니, 순간 격노했다.“네까짓 게 감히 단이를 넘 봐? 종사관이 뭐 대수라고? 잘 들어, 넌 단이를 좋아할 자격도 없어!”임학의 이렇게 얕잡아 보고 모욕하는 말은 틀림없이 정암을 분노시킨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정암은 그저 낮은 소리로 말했다.“알고 있습니다.”그의 표정은 담담하고 말투는 차분했다. 조금의 부끄러워하고 노여워하는 모습이 없었다.임학과 소한은 멍해졌다.침묵 속에서 정암은 말문을 열었다. 눈빛은 땅을 바라보는 데, 마치 아주 오래전을 회상하는 것 같았다.“예전의 김단 아씨는 하늘의 밝은 달이었습니다. 당신들은 모두 그녀를 총애하고 보호했지요. 저는 아씨와 신분 차이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단지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 넘볼 생각은 아예 없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어느 날, 아씨는 구름 위에서 진흙탕으로 떨어졌고, 당신들은 모두 그녀를 버렸습니다!”임학은 눈썹을 찌푸리며 콧방귀를 뀌더니 조롱했다.“그래서 지금은 감히 넘볼 수 있다는 거야?”정암은 그저 고개를 저었을 뿐이다.“저는 단지 김단 아씨를 아낄뿐입니다.”“분명히 장군과 죽마고우인 사람은 김단 아씨이고, 결혼해야 할 사람도 그녀인데, 지금은 오히려 임원 아씨가 되었죠! 도련님은 김단 아씨의 오라버니이시니 언제 어디서나 그녀를 보호하셔야 하십니다. 그런데 이번에 몇 차례 김단 아가씨께서 위험에 처한 것은 모두 도련님이 직접 초래하신 일입니다! 도련님께서 그날 제가 장군댁에 가지 않았더라면, 김단 아씨는 얼마나 처참한 상황에 빠졌을지 아십니까?”모든 말은 임학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정암은 또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저는 아씨를 아끼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마지막 한 마디에는 힘이 없었다.그는 단지 종사관뿐이다...그녀에게 부귀영화를 줄 수 없고, 더군다나 그녀를 잘 보호할 수도 없다.이를 생각하니, 정암의 마음은 너무나도 아팠다.그는 객잔에서 방금 탈출한 김단의 모습과 탈출을 위해 피범벅이 된 그녀의
5일 후.김단은 허약해 보이는 안색을 숨기기 위해 가볍게 치장을 하고 외출하려 했다.그녀는 이미 십여 일 동안 조모께 문안드리지 않았다. 비록 수 나인께서 돌보고 계시지만, 조모는 틀림없이 그녀를 매우 걱정하실 것이다. 그녀는 조모께 안부를 드려야 한다.조모를 만난 후에 그녀는 정암을 찾아가려 한다.그녀는 정암도 틀림없이 자기를 매우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문을 나서자마자, 마당에 서 있는 임씨 부인을 보았다.김단을 보자 임씨 부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다가서려 했으나 김단이 밀어낼까 봐 걱정되어 그 자리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김단은 살짝 한숨을 쉬고 나서야 임씨 부인을 향해 걸어갔다.그녀는 인사를 올렸다.“마님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김단의 부드러운 말투를 듣자, 임씨 부인의 웃음은 그제야 어색하지 않았지만, 눈에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김단을 보고 말했다.“원이가 오늘 침대에서 내려온 것을 보고서야 너를 보러 왔다. 지금 네가 이렇게 잘 회복되는 것을 보니 나도 안심할 수 있다.”김단은 고개를 숙이고 말하지 않았다.분위기가 어색해하자, 임씨 부인은 다시 물었다.“이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외출하려는 것이냐?”김단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네, 정암한테 가려고 합니다.”“뭐?”임씨 부인은 좀 놀랐고,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단이야, 잘 생각했어? 정말 정암과 함께 할 셈이야?”김단은 대답은 하지 않고 단지 조용히 임씨 부인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임씨 부인은 그녀 눈에 담겨있는 확고함을 똑똑히 보았다.이 상황을 본 임씨 부인의 마음은 매우 아팠다.“나는 네 결심을 알고 있지만..., 이번에는 정암의 아버지께 일이 생기고, 그럼 다음은? 앞으로 정암의 가족에게 문제가 생기면 너는 계속 이렇게 너와 원이의 몸을 망가트릴 것이냐?”이 말을 듣고서야 김단은 참지 못하고 비웃었다.임씨 부인이 걱정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정암은 진산군댁에 들어서자마자, 별당으로 곧장 달려갔지만, 김단을 만나지 못했다.숙희가 방문 밖에 서서 정암을 향해 인사하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정암 종사관님의 아버지께서 괜찮으시다니 첨만 다행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아씨께서 휴침 중이시라 아마도 종사관님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 오시지요!” 정암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혹시 아씨께서 날 만나고 싶지 않은 건지?”숙희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가 다시 말했다.“종사관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씨께서는 최근 며칠간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 종사관님 아버님께서 풀려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겨우 안심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제가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정암은 심장이 갑자기 쪼여지더니, 바삐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방해하지 말고, 푹 쉬게 해야지. 그럼, 그럼 내일 다시 오겠네.”그는 말하고는 돌아가려 했다그러나 숙희가 급하게 그를 불렀다.“종사관님!”정암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숙희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미간에는 걱정이 가득했다.“아씨는 종사관님 아버지께서 감옥에서 고생하셨을 거라 생각하셨고, 종사관님께서 요 며칠 동안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시며 아버님의 마음을 달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며칠 지나서 저희 아씨께서 종사관님을 보러 갈 것입니다.”며칠 지나서 김단이 그를 보러 갈 테니, 그는 다시 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정암은 여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알고 있다. 잘 알고 있다.그녀는 며칠 동안 단식을 했으니, 지금은 분명히 매우 허약할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허약한 모습을 보여주면 그가 걱정하고 자책할까 봐, 그녀는 그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다만, 가슴이 찢어지듯이 아파서 그의 두 눈마저 시뻘게졌다.그는 무능한 자신이 너무 밉다.숙희는 정암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바삐 입을 열었다.“종사과님, 아씨의 마음속에는 종사관님이 있어요.”이 말을 듣고 정암이 멍하니 있다가, 계속 고개만 끄덕였다.
정암은 멍해졌다.단식? 찌꺼기를 먹는다고?요즘, 그는 아버지의 일 때문에 바쁘게 뛰어다녔고, 가끔 한가해질 때면 항상 그녀를 그리워했다.그는 그녀가 자기 아버지가 걱정되어 먹지 못하고 잠도 잘 이루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했다.그래서 그는 쉬지 않고 달려왔다.진산군댁의 호위가 그를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 하지만 그도 감히 담을 넘지 못한다. 자신의 경솔한 행동이 그녀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할까 봐 걱정했다.그러나 그는 그녀가 이렇게 큰 희생을 할 줄 몰랐다.그는 그가 찾은 증거가 충분해서 아버지가 석방된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지금은 아버지가 경조부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단식하고, 찌꺼기까지 먹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가슴이 무언가에 찢기는 것 같았다. 정암은 지금처럼 자신을 미워한 적이 없다.무능한 자신이 너무 미웠고, 그녀를 보호해 주겠다고 해놓고, 결국 그녀는 자신을 위해 이 지경까지 괴롭힘을 당했다!임학은 이 틈을 타서 정암의 제한 속에서 벗어났고 정암의 얼굴을 향해 두 주먹을 날렸다.“너 때문이야! 이 썩을 놈아! 네가 뭔데 내 여동생이라 혼인하겠다는 거야!”정암은 비틀거리며 두 발짝 뒤로 물러섰지만, 정신을 차리고 갑자기 임학을 향해 돌진했다. 주먹이 사정없이 임학의 얼굴로 향했다.“당신들은 왜 계속 그녀를 괴롭힙니까? 그녀는 진산군댁의 친딸이 아니더라도 당신 집에서 15년 동안 키운 딸이지 않습니까?”임학은 몇 대 맞고 피를 토했지만, 여전히 물러서지 않고 정암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네가 분수도 모르고 나대지만 않았어도 단이는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정암은 피하지 않았고,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그는 자신이 맞아도 싸다고 느꼈다.자신의 무능함에 주는 벌이라 생각했다.그러나 그는 임학이 자기보다 더 못났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다시 주먹을 휘두르고 차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당신들이 그녀의 살갗을 벗기고 피를 마시고 있습니다!”임학은 쓰러지더니, 발버둥 치며 일어나 바닥에 앉아 거
진산군은 몸을 돌려 시녀들을 향해 화냈다.“다들 멍청이느냐? 빨리 의원을 불러 큰 아씨한테 오라고 해! 어서 제비집 죽 가져와!”이렇게 소리쳤지만 몸을 돌려 김단을 쳐다보지는 못했다.숙희도 그제야 김단 곁으로 다가가 손수건을 꺼내 그의 다른 손을 살며시 닦아주었다.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아씨, 흑흑흑, 방에 들어가요...”그러나 김단은 그저 평온하게 임학을 바라보며 목이 멘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도련님께서는 말한 대로 하시기를 바랍니다.”오늘 이후로, 진산군댁은 더 이상 정암 가족을 괴롭히지 못한다!이 말은 마침내 임학을 자극했다.임학은 김단을 보고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정암이 그렇게 좋아?”얼마나 좋았으면, 정암을 위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한 통의 찌꺼기를 다 먹을 수 있겠어?정암이 도대체 무슨 능력이 있어서 그녀를 이 지경까지 만드는 건가?김단은 그를 상대하지 않고 숙희랑 방 안으로 걸어갔다.그녀는 과연 정암을 그렇게 많이 좋아하나?그녀도 잘 모른다.그녀의 진산군댁 생활은 마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듯했다. 거대한 파도가 밀려올 때면,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허우적대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그러나 정암은 마치 바다에 떠 있는 쪽배처럼 그녀가 익사할 때 나타나 그녀를 배에 태워서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모든 사람이 정암은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고 한다. 작은 쪽배도 바다 위에서는 물결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거센 파도가 밀려올 때면 쪽배도 부서지고 새고 결국 그녀와 함께 바다에 가라앉을 것이다...하지만 그들은 이 쪽배가 그녀의 생명을 구했었다는 것을 모른다.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정암이 그녀를 버리지 않는 한 그녀는 정암을 포기할 수 없다!임씨 부인은 눈물을 훔치며 김단을 따라 방에 들어가려 했지만, 방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김단이 막았다.“숙희만 있으면 돼요, 마님은 돌아가세요!”말이 떨어지자, 김단은 방에 들어가 담담하게
임학은 김단을 노려보았다. 마치 김단이 먹지 않을까 봐 걱정된 듯 또 입을 열었다.“만약 네가 이 통 안의 것을 먹는다면 진산군댁에서 더는 정암을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마.”임학의 말을 듣고, 임씨 부인은 마음이 쪼여졌다.“학아, 네가 어떻게 단이에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 단이는 벌써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네가 어떻게 단이에게 찌꺼기를 먹이느냐?”임학은 몸을 돌려 임씨 부인을 바라보았다.“어머님! 제가 독한 것이 아니라, 정말 김단이 너무 교활해서 그래요! 이번에 원이를 단식하게 하고, 다음에 또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겠어요? 두 분은 정말 더 이상 김단을 믿어서는 안...”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방에서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임학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임원마저 삼키는 동작을 멈추고 모든 사람과 함께 놀라서 그의 뒤를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그제야 임학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온몸이 뻣뻣해져 천천히 몸을 돌렸다.김단은 어느새 찌꺼기 통 옆에 엎드려 두 손을 통에 넣고 통 안의 물건을 잡고 먹고 있었다.임원처럼 게걸스럽게 먹는 것과 달리, 그녀는 천천히 먹고 있었다.그녀는 그저 조용히 먹고 있었다.마치 평범한 음식을 먹는 것 같았다.그런데, 그것은 어젯밤에 남겨진 찌꺼기다!모든 사람이 먹다 남은 것이다!먹기는커녕, 한쪽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찌꺼기 통에서 가끔 풍기는 이상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냄새만 맡아도 속이 쓰리다.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이렇게 맛있게 먹을 수 있지?임원의 눈이 심하게 떨고 있었다.3년 전에 그녀가 김단을 해쳤지만, 그녀가 도대체 김단을 어느 지경까지 만들었는지 잘 몰랐다.지금, 이 순간, 한때 구슬처럼 눈부시게 빛났던 사람이 지금에 와서 길가의 거지처럼 찌꺼기 통을 안고 먹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마침내 자기가 도대체 김단을 어느 지경까지 헤쳤는지 깨달았다!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려 무의식적으로 진산군과 임씨 부인을 바라보았는데, 두 사람은 여전히 놀
김단의 움푹 들어간 검은 눈언저리를 본 숙희는 마음이 깨질 것만 같았다.김단이 힘없이 입을 여는 것을 보았다.“사람을 보내서 경조부에 가서 확인해 봐.”숙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제가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말을 마치자, 숙희는 즉시 사람을 경조부로 보냈다.진산군은 조급했다.“너도 사람을 보냈으니, 내가 속일 수는 없지 않느냐? 빨리 네 여동생에게 좀 먹어라 해!”말하는 사이에 임씨 부인도 왔다. 그녀의 뒤를 바짝 따르던 시녀 두 명이 제비집을 넣고 끓인 죽을 한 그릇씩 들고 있었다.김단과 임원을 보고 임씨 부인은 마음이 아팠고 바삐 시녀에게 말했다.“빨리 두 아씨에게 죽을 먹여라!”그러자 두 시녀는 김단과 임원 앞에 무릎을 꿇고 제비집 죽 한 숟가락을 떠서 두 사람의 입으로 떠넣었다.그러나 김단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김단은 위협하는 눈빛으로 임원을 바라보았다.김단의 시선을 감지한 임원은 가슴이 조여와, 이미 벌린 입을 재빨리 다물고 다시 누웠다.임원은 눈을 감고 어깨를 계속 떨며 우는 것 같았다.그러나 5일 동안 물을 마시지 않아서, 그녀는 지금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못했다.이 장면을 보고 진산군과 임학은 분노했다.임학은 심지어 욕설을 퍼부었다.“양심 없는 년! 아버지께서 이미 사람을 풀어주셨는데, 또 뭐 어쩌려고? 정말 원이를 죽게 만들 셈이야? 정암 때문에 네 눈에는 네 여동생의 목숨도 보이지 않니?”임학은 화가 나서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그러나 김단은 천천히 눈을 감고 그를 보지 않았다.5일 동안 먹고 마시지 않았는데, 그녀는 지금 정말 그와 다툴 힘도 없었다.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꼭 한마디 했을 것이다. 임원은 자기의 여동생이 아니라고!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숙희가 보낸 머슴애가 황급히 돌아왔다.이 머슴애는 별당 사람이다. 김단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떨려 말하는 소리에는 슬픔이 묻어났다. “아씨, 소인은 정암 종사관이 그의 아버지를 데리고 가는 것을 똑똑히 봤습니다.”이
예전에 김단을 위해 별도 달도 따다 주겠다는 사람이 지금은 그녀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한다. 참!김단은 소리 내며 웃더니, 몸을 돌려 계속 풀을 뽑았다. 땅을 바라보는 눈빛 속에는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슬픔이 숨어 있었다.“대감마님께서 정말 임 낭자를 아끼신다면 빨리 무고한 사람들을 풀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임 낭자는 굶어 죽어도 전 계속 살아 있을 것입니다.”이렇게 말하자, 김단은 무언가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어 진산군을 바라보았다.눈빛에 담긴 슬픔은 이미 사라졌고, 오직 비웃음만이 남아 있었다. “임 낭자는 대감마님의 유일한 딸이십니다. 그녀를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진산군은 화가 나서 피가 거꾸로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김단의 득의양양한 모습을 보고, 마음속의 분노는 더욱 솟구쳤다.“좋아! 좋아! 정말 이것으로 나를 쥐락펴락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하니? 너는 정말 이 아버지를 우습게 보는구나! 내가 전쟁터에 나갔을 때, 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어!” 진산군은 김단에게 자기도 고집불통이라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고 알려주고 싶었다.그러나 김단은 가볍게 말을 내뱉었다. “제 아버지의 성은 김씨 입니다. 벌써 죽었다고 들었습니다.”그 말을 들은 진산군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손가락으로 김단을 가리키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소매를 뿌리치고 가버렸다.커다란 별당이 다시 썰렁해졌다.김단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다시 굳게 닫힌 정원 문을 보면서 오랫동안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정원 문이 다시 열릴 때는 3일 후였다.이때 김단은 정원의 흔들의자에 누워 힘이 조금도 없었다.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입구를 바라보니 진산군이 한 무리의 사람을 이끌고 화내며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배고픔이 극에 달했는지, 김단은 눈앞이 흐릿해져도 진산군이 오는 쪽을 힘겹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진산군의 뒤를 따르는 임학과, 뒤에서 누군가에게 이끌려 오는 임원의 모습을 뚜렷이 알아보았다.그녀는 그제야 입꼬리를 올렸다.보
김단은 정원 문 뒤에 서서 어두운 밤 속에 가려진 연못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연못 물은 맞은편에 있는 초롱의 빛을 거꾸로 비추고 있었다. 약한 빛은 마치 언제든지 어둠에 삼켜 버릴 것만 같아 연못의 돌다리조차도 똑똑히 비추지 못했다.김단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나서야 돌다리를 향해 걸어갔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귀밑의 살쩍을 불었지만,연못은 미동도 없었다.김단은 자기가 마치 초롱의 빛이고, 부드러운 바람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망가지든 옛 가족의 마음을 흔들 수 없다고 느꼈다.이렇게 생각하자, 김단은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씁쓸하게 웃었다.이 순간, 그녀는 오히려 임원이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임원이 정말 마시지 않고 먹지 않는 한 진산군은 반드시 마음이 아플 것이다!김단의 짐작이 맞았다.이틀이 지나자, 진산군은 노기등등하여 별당으로 왔는데, 마침, 김단은 정원에서 김매고 있었다.초봄이 되어 화단의 잡초가 매우 빨리 자라서 제때 뽑지 않으면 며칠이 지나지 않아 꽃보다 더 높아질 수 있다.진산군이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걸 본 김단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진흙으로 더럽혀진 두 손을 진산군을 향해 내보이며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대감마님께서 오늘 오실 줄 몰랐습니다.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망할 년!”진산군은 노발대발하더니 손을 휘젓더니 엄하게 명령했다.“뒤져라!”갑자기 두 팀의 호위가 좌우로 나뉘어 줄지어 들어왔다.김단은 그제야 눈살을 찌푸렸다.“대감마님께서 무슨 뜻입니까?”진산군은 대답 없이 김단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팀의 호위는 또 모두 나왔다.“대감마님, 어떤 음식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대감마님, 저희도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그녀가 음식을 숨겨서 먹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김단은 자기도 모르게 콧방귀를 꼈다.진산군이 차갑게 소리치며 물었다.“너는 도대체 먹을 것을 어디에 숨겼느냐!”이틀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서 임원은 침대에서 내려올 힘
진산군은 이 일을 알고 매우 화가 났다.김단이 별당에 도착하기도 전에 진산군댁의 호위들은 벌써 별당을 포위했다.호위장은 때마침 돌아온 김단에게 인사를 올리고 나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대감마님께서 오늘부터 큰 아씨를 별당에 연금하여 외출을 금지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김단은 이미 예상해서 놀라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별당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그러자, 호위장은 또 김단을 막고, 이어서 말했다.“그리고 큰 아씨께서 단식하는 것을 좋아하시니 오늘부터 잘못을 뉘우칠 때까지 마시지 말고, 먹지도 말라고 명하셨습니다.”김단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여전히 담담한 모습으로 말했다.“알겠으니, 이제 들어가도 되겠소?”김단이 이렇게 차분한 것을 보자, 호위장은 의아했다. 김단이 무슨 방법이 있어 연금에서 빠져나갈까 봐 작은 소리로 알려줬다.“대감마님께서 우리더러 별당을 엄격히 지키라 하셨습니다. 이 기간에 별당에는 아무도 드나들지 못합니다. 명을 거역하는 자는 당장 죽이라고 하셨습니다.”이 말은 김단이 이 문을 들어서는 순간, 밖의 사람과 연락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예를 들면, 전에 몰래 그녀를 보러 왔던 정암을 말한다.하지만 지금, 김단이 걱정되는 사람은 정암이 아니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대감마님께서 벌을 내린 사람은 나뿐이오. 내 마당의 하인과는 무관하오. 나를 가둬두기 전에 내 마당에 있는 모든 사람을 나오라 해도 되겠소?”이 말을 듣자, 호위장도 난감했다.“이러면...”“모두 살자고 일하는 것인데, 그들도 집에 살려 먹여야 할 사람이 있는데, 주인인 내가 잘못했다고 그들까지 연루해야 하오?”김단은 말하면서 머리에서 비녀 하나를 뽑아서 호위장 손에 넣어 줬다.“좀 봐주시죠.”이 비녀는 전에 궐에서 하사한 것이다. 비녀 위에 있는 진주만이라도 가치가 어마어마해서 호위장은 바로 마음이 움직였다. 생각해 보면 김단의 말도 도리가 있다.더군다나, 진산군은 큰 아씨를 연금하라 했지, 미리 별당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