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인은 가문 사람들의 얼굴을 쓱 훑더니 결국 진산군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말했다.“넌 내가 단이만 예뻐한다고 했지? 그러면 너희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다들 원이만 예뻐하고 편애하잖아! 나까지 그 아이를 아끼고 지켜주지 않으면 그 아이가 이 집안에서 숨이라도 편하게 쉴 수 있을까?”말을 하던 노부인은 한숨을 푹 내쉬며 천천히 대문 밖으로 걸어갔다.“아무리 친딸이 아니라고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살았으면 감정이라는 게 생기는 것이야. 감정이 생기면 마음이 쓰이기 마련이고.”집안에 서있던 사람들은 노부인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다가 노부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진산군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물었다.“오늘 이 일을 누가 어르신한테까지 알린 것이냐?”임학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머릿속에는 여전히 조금 전에 자신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던 김단의 모습만 가득 차있었다.임씨 부인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이때,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던 임원이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제, 제 곁을 지키던 시녀가 의원에게 약을 가지러 갔다가 실수로 말을 흘린 것 같습니다.”노부인 곁에 있는 시녀는 거의 매일 의원에게 찾아가 약을 구했기에 거기서 마주쳤을 수도 있다.임원의 말에 진산군이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고 눈치를 보던 임원은 진산군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제가 잘못했습니다. 일부러 할머니께 이 일을 알리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돌아가서 시녀를 제대로 교육하겠습니다. 아버님, 제발 노여움 푸세요.”눈시울이 빨개진 임원이 가여운 모습으로 진산군을 쳐다보자 진산군은 마음이 약해져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너희들 할머니는 이제 몸이 안 좋아서 이런 일들을 신경 쓰게 만들면 안 돼. 그러니까 앞으로 절대 할머니에게 괜한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진산군이 엄숙한 표정으로 경고했고 조금 전 어머니의 말이 떠오르자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단이도 한 달 외출 금지를 받았으니까 이 일은 이쯤에서 마무리 짓고 앞으로
이날 밤, 김단은 꿈을 꾸었다.꿈속에서 김단은 3년 전 임원이 유리잔을 깨트렸던 상황으로 돌아갔고 공주 마마의 질타에 소한과 임학은 김단 앞에 막아서서 김단을 든든하게 지켜주었다.꿈속의 김단이 두 오라버니에게 감동하던 그때, 두 사람 뒤에 서있는 사람은 김단이 아닌 임원으로 바뀌었다.결국 김단은 세답방에 끌려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다른 무수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나인이 휘두른 채찍에 맞고 있었다.화들짝 놀란 김단은 두 눈을 번쩍 떴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으며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고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세답방 그곳은 아직까지도 김단에게 지옥보다 더 두려운 곳이다.인기척에 놀란 숙희가 방으로 달려왔고 침대에 걸터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김단을 보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아씨, 악몽을 꾸신 겁니까?”깊게 숨을 들이마신 김단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조금 안 좋은 꿈을 꾸었을 뿐이야. 이제 괜찮아졌어.”꿈속에서도 소한과 임학이 자신의 편에 서지 않았다는 생각에 김단은 씁쓸하게 웃다가 조금씩 밝아오는 창밖을 보며 물었다.“지금 몇 시인 것이냐?”“이제 묘시 조금 넘었습니다. 조금 더 주무십시오.”숙희가 하품을 하며 대답하자 김단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다 잤어.”조금 전에 꾼 꿈으로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있기에 다시 눕는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숙희는 여전히 졸린 듯 눈을 비비며 물었다.“그럼 지금 일어나시겠습니까?”김단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이고 어차피 그녀는 지금 외출 금지이기에 지금 일어나도 딱히 할 일은 없다.“그럼 뭐 하실 거예요?”숙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묻자 김단은 멈칫했다.그녀는 아직 뭘 해야 할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명정 대군은 이미 사망했고 이대로 진산군 관저에 가만히 있으면 임씨 가문에서는 또다시 그녀에게 결혼 상대를 찾아줄 것이다.이용당하는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기에 김단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며 자신을 위해 뭔가를 시작해야
두 번의 시도에도 입에 댈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이었기에 정암은 바로 돈을 들여 전문가한테서 배우기로 했다.쉬워 보였던 대창 요리는 실제로 만들려 하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며칠 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한 정암은 대창을 사들여 한 그릇을 만들어 보았으나, 식으면 맛이 떨어질까 봐 바로 김단에게 달려온 것이었다.하지만 문을 두드리고 나서야 정암은 자신이 너무 이른 시간에 찾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심지어는 그는 대문이 아닌 담을 타고 몰래 들어온 것이었다.뭐 대단한 것도 아니라 대창을 맛보게 하려고 말이다!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정암은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으나, 이제는 되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한편, 김단도 정암이 이 시간에 대창을 주러 왔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저번에 그저 지나가는 말로 대창을 좋아한다고 하였고, 심지어 그녀는 까맣게 잊고 있었건만, 정암은 그 말을 기억하고 이렇게 직접 만들어 별당에 가지고 온 것이었다.정암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개지자 김단은 참다못해 피식 웃으며 말했다.“종사관 나리께서는 제가 지금 배고프다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말을 하던 김단은 숙희에게 찬합을 받아오라고 눈치를 줬고,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넋을 잃은 채 멍하니 서있던 정암은 숙희가 손을 내밀자 바로 찬합을 건넸다.숙희는 찬합에서 대창을 꺼냈고 김단은 바로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정암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김단을 빤히 쳐다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맛은 어떻습니까?”“너무 맛있습니다.”환하게 웃던 김단은 한 점을 집어 숙희 입에 넣어주었고, 숙희도 이내 눈이 휘둥그레졌다.“정말 너무 맛있습니다!”정암은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안도의 한숨을 살짝 내쉬었고 편한 미소도 지었다.“다행입니다. 제가 이 요리를 며칠이나 배웠는데 낭자의 입에 안 맞을까 봐 엄청 걱정했습니다.”김단은 한없이 조심스러운 정암의 모습을 보며 왠지 마음이 씁쓸했고 정암의 진심을 알 것만 같았다.만약 진심이
정암이 발견된 것인가?김단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씨, 여기 계세요. 소인이 나가보겠습니다.”숙희는 미처 내려놓지 못한 대창 그릇을 김단 손에 쥐여주며 빠르게 밖으로 향했고 그러다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돌아왔다.“아씨! 호위병들이 정사관 나리를 발견한 게 맞아요!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정사관 나리께서 빠르게 도망가셔서 호위병들이 못 잡으셨어요.”숙희의 말에 김단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만약 정암이 김단 때문에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나면 그녀는 큰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하지만 30분도 채 되지 않은 사이, 별당 대문이 벌컥 열리며 임학이 씩씩거리며 들어왔고, 김단은 갑자기 나타난 임학을 보고 미간을 확 찌푸렸다.“도련님, 저는 지금 별당 안에서 벌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모께서는 절대 아무도 이곳에 발을 들이지 마시라고 명확하게 말씀을 하셨고요. 그런데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도련님께서는 무슨 일로 이곳에 오신 겁니까?”임학은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김단을 힐끗 쳐다보며 엄숙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아침 한 남자가 별당 담을 넘어서 도망치는 걸 봤다고 호위병이 나한테 보고를 했소.”김단은 순간 표정이 살짝 굳어졌지만 이내 담담하게 대꾸했다.“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럼 그 남자는 잡혔습니까?”임학은 김단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제 그 일이 있은 뒤로부터 화를 참아야 한다는 생각에 여전히 차분하게 말했다.“아니, 잡지 못했소. 하지만 호위병들은 그 자를 정암 종사관으로 의심하고 있소.”임학의 말에 김단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암은 소한의 부하로써 평소에 호위병들과 마주치는 일이 많기에 호위병들이 정암을 알아봤을 것이다.하지만…김단은 임학을 힐끗 쳐다보다가 이내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종사관 나리께서 이른 아침에 이곳에 올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임학은 뻔히 알면서 묻는 김단을 보며 속으로 어이없어서 코웃음을 쳤지만 결국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그동안 낭자가 서럽고
이런 생각에 임학은 화가 점점 치밀었다.“어찌 됐든 낭자는 여인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더럽히는 일을 저지르는 건 절대 안 되는 일이오. 낭자와 원이는 아직 혼인을 하지도 않은 처녀인데 안 좋은 소문이라도 퍼지면 낭자나 원이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소.”김단이 자신의 별당에서 밤새 남자와 함께 있었다는 소문이 퍼지기라도 하면 사람들이 김단을 어떻게 생각하고 또한 진산군 관저의 딸들을 어떻게 생각할까?그러다가 결국 임원의 명성도 김단 때문에 더럽혀질 수도 있다.한편, 김단은 임학의 말을 조용하게 듣고 있다가 그제야 임학의 본심을 알게 되었다.“어쩐지, 도련님께서는 사람을 시켜 저를 묶어놓고 저에게 약까지 먹였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왜 제 명성을 걱정하시나 의아했는데 결국 도련님께서는 임원을 위해 저를 찾아온 것이군요.”흠칫하던 임학은 예전에 자신이 저지른 황당한 일들이 떠올라 마음이 조금 뜨끔했다.“난 오늘 낭자와 말다툼을 하러 온 게 아니오. 조모께서 낭자에게 벌을 준 건 낭자가 별당 안에서 다른 남자와 몰래 만나라는 뜻이 아니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시오.”그렇게 임학은 있지도 않은 죄명을 김단에게 강제로 씌웠다.임학이 돌아서서 떠나려고 할 때, 뒤에서 그릇 하나가 날아와 그의 왼쪽 어깨에 정확하게 맞았다.미간을 확 찌푸린 임학은 고개를 돌려 손에 그릇을 들고 있는 김단을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미친 것이오?”걱정하는 마음에 충고를 했는데 김단은 그 마음을 알아주지도 못하는 망정, 그에게 이렇게 그릇까지 던지다니!하지만 김단은 멈추지 않고 계속 그릇을 던졌다. 그러다가 식탁 위에 있던 그릇을 전부 던지고 나서야 김단을 임학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제 명성을 가장 더럽힌 사람은 도련님입니다! 그리고 나서 제가 여인의 몸을 잘 간수하지 못했다고 손가락질하는 것도 당신이고요! 뻔뻔하게 저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하지만 도련님께서는 별당에 들어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저에게 괜찮은 지,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전혀 묻지 않았습니다. 되려 저에게
임학이 군영에 찾아갔을 때, 정암은 서재에서 소한에게 군무를 보고하고 있었다.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임학은 다짜고짜 정암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지만 눈치가 빠른 정암은 몸을 옆으로 살짝 돌려 임학의 주먹을 피했다.임학은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정암을 향해 발을 뻗었지만 정암은 여전히 쉽게 쓱 피했다.한편, 돌발 상황에 미간을 확 찌푸린 소한은 책상을 뛰어넘어 정암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임학의 손을 덥석 잡았다.그러고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임학에게 말했다.“지금 이게 무슨 짓이오?”임학은 소한의 손을 홱 뿌리치더니 화가 잔뜩 난 눈빛으로 정암을 노려보았다.“저자에게 물어보시오.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소한은 고개를 돌려 정암을 쳐다보았지만 정암은 당당하게 허리를 쭉 편 채 대답했다.“소인은 임 도련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김단에게 대창 요리를 줬을 뿐인데 그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가?한편, 정암의 대답에 임학은 다시 주먹을 꽉 쥐었다.“오늘 아침 정암 당신이 단이 별당 담을 넘어 도망을 쳤소. 우리 관저를 지키던 호위병들도 당신의 뒷모습을 알아봤는데 계속 모른 척할 셈이오?”임학의 말에 소한도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정암은 소한의 부하로 오랫동안 함께 일을 했기에 임학의 한 마디로 죄를 단정 질 수는 없었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소한의 물음에 정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되레 임학을 쳐다보며 물었다.“설마 김단 낭자에게 찾아가신 겁니까?”정암의 물음에 흠칫하던 임학은 버럭 화를 냈다.“내가 내 동생을 찾아가는 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소!”“낭자에게 무슨 말을 하셨습니까?”정암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임학을 쳐다보며 언성을 높이자 임학도 화가 나서 또다시 정암을 때릴 기세로 말했다.“그건 나랑 내 동생 사이의 일이오! 당신은 끼어들 문제가 아니란 말이오!”정암도 기세 등등한 모습으로 한 걸음 다가가 임학의 멱살을 확 잡았다.“경고하는데 김단 낭자 앞에서 헛소리하시지 마십시오. 안 그러
정암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자신의 오른손을 꾹꾹 누르며 담담하게 대꾸했다.“그럼 혹시 김단 낭자는 그저 장군님이 사줘서 좋아한 게 아닐까요? 만약 정말 다과를 좋아했다면 그렇게 사람들에게 다 나눠줬을까요?”예전에 정암도 김단이 나눠준 다과를 먹은 적이 있다.한편, 임학은 정암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고 자세히 생각해 보니 김단은 늘 남에게 다과를 나눠주곤 했었다.그때 당시에는 김단이 단순히 나눔을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암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만약 정말 다과를 매우 좋아했다면 아까워서 남들에게 그렇게 많이 나눠주지 않았을 것이다.한편, 임학만큼 당황한 소한은 정암을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르 놓았다.소한은 지금까지 김단이 다과를 좋아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예전에 김단에게 다과를 선물할 때마다 김단은 잔뜩 신난 표정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을 받은 듯 기뻐했다.하지만 언젠가부터 김단은 소한이 마차 안에 넣어둔 다과를 전혀 입에 대지도 않았고 바로 임원에게 주었다.소한은 김단이 아직 그를 원망하고 화가 풀리지 않아서 그가 준 음식을 먹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김단이 애초에 다과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어렸을 때부터 두 살 어린 김단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그 아이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김단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정암은 말 없는 두 사람을 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장군님도 아실 겁니다. 소인이 어젯밤 군영을 떠났을 때 이미 술시였습니다. 취향각에서 주방장에게 두 시간 정도 요리를 배운 뒤 바로 대창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대창 손질만 해도 꽤 오래 걸렸고 도중에 고기를 태워서 다시 만들기도 했습니다. 소인이 취향각을 떠났을 때 이미 묘시였습니다. 장군님께서 소인을 못 믿으시겠다면 취향각에 직접 찾아가셔서 물으셔도 됩니다. 소인은 겨우 성공한 대창 음식이 식을까 봐 급하게 진산군 관저로 들고 간 겁니다.
임학은 정암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하더니, 순간 격노했다.“네까짓 게 감히 단이를 넘 봐? 종사관이 뭐 대수라고? 잘 들어, 넌 단이를 좋아할 자격도 없어!”임학의 이렇게 얕잡아 보고 모욕하는 말은 틀림없이 정암을 분노시킨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정암은 그저 낮은 소리로 말했다.“알고 있습니다.”그의 표정은 담담하고 말투는 차분했다. 조금의 부끄러워하고 노여워하는 모습이 없었다.임학과 소한은 멍해졌다.침묵 속에서 정암은 말문을 열었다. 눈빛은 땅을 바라보는 데, 마치 아주 오래전을 회상하는 것 같았다.“예전의 김단 아씨는 하늘의 밝은 달이었습니다. 당신들은 모두 그녀를 총애하고 보호했지요. 저는 아씨와 신분 차이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단지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 넘볼 생각은 아예 없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어느 날, 아씨는 구름 위에서 진흙탕으로 떨어졌고, 당신들은 모두 그녀를 버렸습니다!”임학은 눈썹을 찌푸리며 콧방귀를 뀌더니 조롱했다.“그래서 지금은 감히 넘볼 수 있다는 거야?”정암은 그저 고개를 저었을 뿐이다.“저는 단지 김단 아씨를 아낄뿐입니다.”“분명히 장군과 죽마고우인 사람은 김단 아씨이고, 결혼해야 할 사람도 그녀인데, 지금은 오히려 임원 아씨가 되었죠! 도련님은 김단 아씨의 오라버니이시니 언제 어디서나 그녀를 보호하셔야 하십니다. 그런데 이번에 몇 차례 김단 아가씨께서 위험에 처한 것은 모두 도련님이 직접 초래하신 일입니다! 도련님께서 그날 제가 장군댁에 가지 않았더라면, 김단 아씨는 얼마나 처참한 상황에 빠졌을지 아십니까?”모든 말은 임학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정암은 또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저는 아씨를 아끼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마지막 한 마디에는 힘이 없었다.그는 단지 종사관뿐이다...그녀에게 부귀영화를 줄 수 없고, 더군다나 그녀를 잘 보호할 수도 없다.이를 생각하니, 정암의 마음은 너무나도 아팠다.그는 객잔에서 방금 탈출한 김단의 모습과 탈출을 위해 피범벅이 된 그녀의
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곧 이어진 건 덕빈의 날 선 고함이었다.“천한 계집년이!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단 말이냐! 기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동생까지 죽여?”내가 죽였다고?김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본능적으로 서원공주를 힐끗 바라본 후 덕빈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덕빈마님, 부디 진정하세요. 이 일에는 분명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오해!”덕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김단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다행히 이번에는 김단이 몸을 뒤로 빼며 그 손을 피했다.하지만 덕빈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가 거칠게 김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윤이와 나인들이 덕빈을 제지했다.그러나 덕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손헌이 당한 죽음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모욕적이었다.그건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손 씨 가문 전체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몸이 붙잡혀도 그녀는 계속해서 발악했다.마치 그녀의 살갗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이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원공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감히 중전의 침전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니요. 중전마마를 눈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당장 덕빈을 가두거라. 이번 일은 내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 엄벌을 청할 것이다.”“예.”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덕빈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함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김단의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화끈거리는 통증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 서원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소?”김단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그 말에 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단이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오?”김단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
전하가 떠난 뒤 서원공주는 김단과 함께 중전에게 예를 올렸다.중전의 침실을 나선 그들 뒤로 윤이와 다른 나인들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걷고 있었다.김단은 직감적으로 공주가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그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서원공주는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몸을 돌보는 일은 후궁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오늘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낭자 같은 의원이 어찌 아버지의 몸을 돌볼 기회가 있겠소?”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전하를 가까이 뵙기 어려웠겠지만 자신처럼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달랐다.그러나 그 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김단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모두 공주님 덕분입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앞으로도 잘하시오. 아버지께서 만족해 하신다면 낭자를 어의로 만들어 줄 수도 있소.”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러고 보니 수 어의도 나이가 많지 않소? 몇 해 안에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오.”그녀는 마치 김단의 미래를 꽃길로 닦아주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벼슬이나 권세 따위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럼에도 겉으로는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김단의 연기를 공주가 눈치챌 리 없었다.여인으로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의원 원장 자리까지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니 김단이 감격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그녀는 김단을 바라보더니 낮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낭자를 돌봐줄 책임이 있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말을 잘 듣는 자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소.”
소하의 미간에는 어느새 짙은 근심의 스며들었다.소한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거의 다 나아가던 상처를 일부러 뜯어내어 다시 덧나게 하다니...그렇게 자신의 몸을 해쳐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말은 힘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그저 방금 전 김단이 한 말이 소한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시간은 조용히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이날도 김단은 평소처럼 중전의 약을 들고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중전의 문병을 온 전하와 마주치게 되었다.전하는 중전의 곁에 앉아 나인들이 중전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김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중전의 몸은 어떠하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된단 말이냐?”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전마마의 기력은 지난 보름 사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지만 중독된 세월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십여 년간 몸속에 쌓인 독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리 만무했다.다만 최근 소하로부터 중전에게 독을 먹인 자가 중전의 외가 친척인 맹씨 집안이라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전하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그 표정을 본 서원공주는 혹여 김단이 책망당할까 걱정되어 급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의 몸은 정말로 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어요. 제가 직접 지켜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전하는 딸이 김단을 두둔하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그러하냐?”“정말입니다.”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지금 김단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어머니뿐만 아니라 궐 안의 다른 마님들도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소한의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위로 선홍빛 피가 점점 번져가며 그 면적을 넓히더니 이내 붕대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그 모습을 본 소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한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상처가 덧났다. 약 발라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하지만 소한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말했다.“형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소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소한이 또 김단을 귀찮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소한의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기에 굳이 내의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방금 그 잠깐의 실랑이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줄은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다.김단은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소한을 노려보다가 결국 담담하게 말했다.“앉으세요 얼른.”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통과 붕대를 가지러 갔다.소한은 그제야 만족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탄탄하게 다져진 상체를 드러냈다.그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김단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기쁨과 방금 전 그녀의 약병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얽혀있었다.김단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그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김단과 소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한아, 제정신이냐?”그 상처는 단순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었다.누가 봐도 일부러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찢은 흔적이었다.소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하를 노려보았다.소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게 뻔했다.김단은 아무 말 없이 붉게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묵묵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그녀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상처를 다 치료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군이라면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합니다.”김단은 짧게 한마디 뱉어버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소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었다.한때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온갖 꾀를 부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그녀를 볼 수 있는 꼴이라니.한때 자만심으로 빛나던 젊은 장군이 지금은 초라할 만큼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김단은 그를 향해 뭐라 질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차라리 야멸차게 욕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조차 헛되이 들릴 만큼 이 남자의 모습은 너무 진심이었다.그때 소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내가 다치면 낭자가 약 발라주면 안 되겠소?”“안 됩니다.”김단은 단칼에 잘라내듯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때도 한양까지 올라와서 저한테 치료 받으실 겁니까?”그러자 소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낭자가 내 상처를 봐준다고만 하면 난 얼마든지 참고 버틸 수 있소.”그 말에 김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때 마침, 문밖에서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또 다쳤다고?”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을 한 소하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자락이 날렵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허리춤에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힘 있고 절도 있는 그 걸음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그를 발견한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소하 도련님.”반면 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찡그린 얼굴로 소하를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여긴 왜 왔습니까?”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에게 인사한 뒤 소한을 바라보았다.“네가 다쳤다고 해서 말이다. 많이 다친 것이냐?”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한의 옷깃을 젖히려 했다.그러자 소한은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관심 끄세요. 전 김단한테 치료 받으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소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김단은 바빠 보이는데? 네 약은 형
그 두 나인이 집요하게 김단을 괴롭혔던 건 단지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명백히 공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세답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있었던가?모두가 서원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김단을 괴롭히고 짓밟는데 앞장섰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두 나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김단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고통을 즐기던 그 두 나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김단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원공주가 건넨 채찍을 건네받았다.무릎을 꿇은 두 나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팔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도, 감정을 담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단정하고 절도 있게 한 사람당 다섯 대만 때렸다.두 나인은 땅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채찍질을 멈춘 그녀는 채찍을 다시 서원공주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그 얼굴엔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서원공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언의 손짓으로 두 나인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의 얼굴에는 억눌린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렇다면 분노를 터뜨리듯 채찍을 휘두를 줄 알았건만 김단은 여기서 멈췄다.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이걸로 충분한 것이오?김단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공주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저의 원한이 깃든 사람은 저 둘이 아닙니다. 두 나인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 고통의 시작은 결국 진산군 댁과 임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서원공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김단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다.단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뱉
“내가 준다 했으면 그냥 받으시오.”서원공주는 김단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망설임 없이 비녀 위에 보요를 꽂아버렸다.금빛이 찰랑이자 세 알의 붉은 보석들이 더 눈부시게 빛났다.그 반짝임은 오히려 김단의 얼굴을 더 하얗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원공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김단에게 준 보요는 원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준 소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장신구가 김단을 이토록 빛나게 해주니 너무나도 거슬렸다.김단의 머리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요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이미 내어준 물건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서원공주는 얼굴에 가벼운 불쾌감을 띄운 채 말했다.“나는 공주이니 값비싼 장신구들은 많소. 낭자에게 하나 내준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오.”김단은 이 장신구가 예전에 자신이 모욕당하며 손에 쥐었던 공예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보요의 값은 공주에게 있어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김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공주자가의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심을 다해 공주님께 보답해 드릴게요.”그 말은 김단이 의도적으로 뱉은 것이었다.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공주였으니 김단은 그저 그녀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아니나 다를까, 서원공주는 김단의 태도에 만족한 듯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낭자의 의술 실력이 출중하니 내 눈여겨본 게 아니겠소? 기억해시오. 낭자만 잘한다면 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명 받들겠습니다.”김단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서원공주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어화원의 안쪽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김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약 한 시진이 흐른 뒤 김단은 정성껏 달인 약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중전의 방으로 들어섰다.세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중전 곁에는 서원공주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중전은 독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약을 마시자마자 곧 잠에 들었다.서원공주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정히 여며주고 나서야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김단 역시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던 찰나 서원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김 의원의 물건은 네가 대신 내의원으로 가져가거라. 나는 김 의원과 따로 나눌 말이 있다.”윤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김단이 들고 있던 약그릇을 받아든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서원공주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나와 잠깐 어화원으로 가지 않겠소?”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공주의 부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나인들을 뒤로하고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어화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가을 끝자락의 정원은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마른 낙엽이 조용히 발끝에서 사그라들었다.서원공주는 얼마 걷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라버니 때문에 많이 놀랐소?”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세자저하께서 중전마마의 병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김단은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그녀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세자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공주였다.늘 고고하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김단은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 순간 서원공주가 갑자기 김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지만 김단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동안 어머니 곁을 지켜줘서 고맙소. 낭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