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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3화

Author: 무안안
“박유진, 네가 여긴 왜 왔어? 누가 오라 했는데?”

박시훈의 목소리는 싸늘했고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평소의 건들건들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한겨울 찬바람처럼 차가웠다.

“할아버지께서 네가 다쳤단 소식을 들으시고 나더러 대신 보러 가라고 하셨어.”

박유진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박시훈, 너도 박씨 집안의 핏줄이야. 이젠 집으로 돌아와야 하지 않겠어?”

언제나처럼 점잖고 느긋한 말투였다.

“뭐야, 한원 그룹이 무너질 것 같으니까 이제 와서 나한테 돈 좀 달라는 거야? 감정 팔면서 접근하겠다는 거지?”

박시훈은 조소를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

“딱 잘라 말할게. 설령 한원 그룹이 망한다 해도 난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할 거야. 나는 재밌게 구경이나 할 거라고.”

그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는데 어머니는 그를 수없이 때렸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늘 말했다.

‘왜 넌 죽지도 않고 살아 있니?’

그 말은 어린 박시훈의 가슴속에 깊게 파였고 그때부터 그는 박씨 가문 전체를 증오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맹세했었다. 평생 다시는 그 집안에 발도 들이지 않겠다고.

예전에 잠시 심미연과 결혼하려는 마음에 집안에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그 생각도 곱씹어본 끝에 접어버렸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박유진이 이런 얘기를 꺼낸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박유진은 여전히 한결같은 미소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표정과 따뜻한 말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한원 그룹이 망해도 너한테 손 벌릴 생각은 없으니까. 그런데 할아버지가 연세가 많으시잖아. 넌 할아버지에게 남은 유일한 손주고 평생 할아버지 마음속에 있는 존재야. 그러니 이번 한 번만 곰곰이 생각해 보라는 거야. 지금 당장 대답하라는 것도 아니고.”

박시훈은 코웃음을 쳤다.

“그럴듯하게 포장하려 들지 마. 내가 안 간다고 했으면 진짜 안 가.”

그는 박씨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후 오히려 바깥세상에서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냥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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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유진은 병원 복도 끝에 서 있었다.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그를 환히 비추고 있었지만 그의 가슴속은 먹구름이 드리운 듯 어두웠다.세상은 여전히 눈부시게 밝았지만 그의 눈에는 아무런 색도 담기지 않았다.그는 숨을 들이켰다가 가슴 속 답답함을 털어내듯 다시 내쉬며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박시훈... 왜 하필 너야.”그 시계가 천근만근의 무게로 가슴에 내려앉았다. 정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오늘은 분명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고 하늘은 푸르렀으며 햇살은 따뜻했다. 하지만 박유진의 세상은 마치 무너져 내린 듯 캄캄했다. 어둠이 그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었다.그는 외투를 꼭 여몄고 텅 빈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묘한 감정들이 그의 마음속에서 교차했다.병원으로 오기 전 그는 왜 그렇게 무심하게도 박시훈이 어떤 상황인지, 어떻게 다쳤는지부터 알아보지 않았을까?갑작스레 들려온 이 소식은 날이 선 칼처럼 예고도 없이 맹렬하게 그의 심장을 찔렀다. 너무나도 아팠다.그는 당장이라도 병실로 돌아가 박시훈을 붙잡고 따지고 싶었다. 왜 심미연에게 다가갔냐고, 도대체 무슨 이유냐고.하지만 그의 발은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사슬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듯했다.왜냐하면 그는 묻을 자격이 없었다. 심미연과는 약속만 한 사이지, 서류 한 장 없는 관계였다. 약속이라는 것은 시간 앞에서 가장 무력한 것이었다. 어쩌면 당장 내일 그 약속이 산산이 부서질 수도 있으니까.그런 생각이 들자 수많은 개미가 가슴속을 물어뜯는 듯한 괴로움이 엄습했고 돌덩이가 가슴 위에 얹힌 것처럼 숨이 막혔다.어지러운 감정을 억누른 채 박유진은 서둘러 병원을 나와 차에 올랐다.회사 건물 앞에 도착하자 박유진은 바로 차에서 내려 분주한 인파 속을 가르며 큰 걸음으로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그리고 사무실 문을 닫자마자 그는 책상 위 전화기를 들고 재빠르게 버튼을 눌렀다.“박시훈이 다친 일에 대해 전부 조사해. 단서

  • 다시, 너를 붙잡다   제714화

    강지한은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잘생긴 얼굴은 평소와 달리 유난히 지쳐 보였다.“상미의 혈액형이 RH 마이너스래.”그의 낮고 힘없는 목소리엔 어쩔 수 없는 체념이 묻어 있었다.“그런 혈액형은 워낙 드물어서 혈액 보유량이 부족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심미연의 가슴이 갑자기 턱 하고 내려앉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움켜쥔 듯 숨이 막혔다.“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어? 상미가 RH 마이너스 혈액형이라고?”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믿기지 않는 소식에 목소리도 제어가 되지 않았다.상미가 자신과 같은 혈액형이라니, 이 세상에 이런 우연이 정말 있을 수 있는 걸까?“왜 그래?”강지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그녀가 이토록 놀라는 이유는 뭘까? 설마...심미연의 머릿속에 수많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상미의 웃는 얼굴, ‘언니’라고 부르던 그 맑은 목소리, 그리고 해맑게 뛰놀던 모습들. 그 모든 것들이 지금 이 순간 한꺼번에 그림자에 덮여버린 듯 어두워졌다.“나도 RH 마이너스야.”심미연은 말을 하면서도 자신도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녀와 강상미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인데 혈액형이 같았다.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감춰진 진실이 있는 걸까?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문득 그녀는 강상미와 심태하의 얼굴을 동시에 떠올렸다. 두 아이는 생일도 비슷했다. 외모가 닮은 건 우연일 수 있어도 생일까지 겹치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강지한은 멍하니 서 있었다.“너랑 상미의 혈액형이 같다고?”결혼한 지 3년이 지났는데 그는 지금 처음으로 심미연의 혈액형을 알게 된 것이다.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심미연에게 얼마나 무심했는지를.심미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왜, 믿기지 않아?”그들은 한때 부부였다. 그런데 그는 그녀의 혈액형조차 몰랐다.강지한의 마음은 온지유라는 첫사랑이 늘 차지하고 있었고 그는 늘 그녀만 바라보았지, 심미연에게 관심을 준 적이 없

  • 다시, 너를 붙잡다   제713화

    “박유진, 네가 여긴 왜 왔어? 누가 오라 했는데?”박시훈의 목소리는 싸늘했고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평소의 건들건들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한겨울 찬바람처럼 차가웠다.“할아버지께서 네가 다쳤단 소식을 들으시고 나더러 대신 보러 가라고 하셨어.”박유진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박시훈, 너도 박씨 집안의 핏줄이야. 이젠 집으로 돌아와야 하지 않겠어?”언제나처럼 점잖고 느긋한 말투였다.“뭐야, 한원 그룹이 무너질 것 같으니까 이제 와서 나한테 돈 좀 달라는 거야? 감정 팔면서 접근하겠다는 거지?”박시훈은 조소를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딱 잘라 말할게. 설령 한원 그룹이 망한다 해도 난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할 거야. 나는 재밌게 구경이나 할 거라고.”그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는데 어머니는 그를 수없이 때렸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늘 말했다.‘왜 넌 죽지도 않고 살아 있니?’그 말은 어린 박시훈의 가슴속에 깊게 파였고 그때부터 그는 박씨 가문 전체를 증오하게 되었다.그리고 스스로 맹세했었다. 평생 다시는 그 집안에 발도 들이지 않겠다고.예전에 잠시 심미연과 결혼하려는 마음에 집안에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그 생각도 곱씹어본 끝에 접어버렸다.그런데 이제 와서 박유진이 이런 얘기를 꺼낸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하지만 박유진은 여전히 한결같은 미소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표정과 따뜻한 말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 한원 그룹이 망해도 너한테 손 벌릴 생각은 없으니까. 그런데 할아버지가 연세가 많으시잖아. 넌 할아버지에게 남은 유일한 손주고 평생 할아버지 마음속에 있는 존재야. 그러니 이번 한 번만 곰곰이 생각해 보라는 거야. 지금 당장 대답하라는 것도 아니고.”박시훈은 코웃음을 쳤다.“그럴듯하게 포장하려 들지 마. 내가 안 간다고 했으면 진짜 안 가.”그는 박씨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후 오히려 바깥세상에서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나는 그냥 할

  • 다시, 너를 붙잡다   제712화

    박시훈의 상처가 너무 깊어 봉합이 필요해서 심미연은 곧장 그를 수술실로 데려갔다.수납 창구로 가 요금을 지불하려던 찰나 갑자기 어디선가 한 사람이 휙 튀어나오더니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채 도망쳤다.요금을 받던 직원조차 그런 장면은 처음이었는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대낮에 병원에서 휴대폰을 털다니!’그런데 정작 휴대폰을 빼앗긴 심미연은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고 오히려 침착하게 가방을 열어 그 안에서 또 다른 휴대폰을 꺼냈다.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번호를 눌렀다.“내 휴대폰 위치 추적해. 그리고 혹시 상황이 심상치 않으면 바로 폭파해 버려!”그녀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폭파’라는 단어는 등골이 오싹해질 말이었다.그런데도 그녀는 마치 친구랑 날씨 이야기나 하는 듯 가볍게 내뱉었고 일말의 살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심미연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이 여자... 보통이 아니네.’‘멀리 있어야 괜히 엮이지 않겠지...’한편 병원 밖에서 한 남자가 외투를 벗어 근처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후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도련님, 심미연 씨의 휴대폰을 확보했습니다.”“지정한 장소에 놔둬. 내가 사람 보낼게.”“예,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남자는 재빨리 택시 한 대를 세우고 주소를 불러주었다.그 시각 요금을 다 내고 수술실 쪽으로 돌아가던 심미연의 휴대폰이 울렸다.“방금 위치 전송해 드렸습니다. 그런데요... 무슨 묘지 근처 같습니다.”심미연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바로 사람 몇 명 보내. 나도 직접 갈 거야.”전화를 끊고 나니 그녀는 어느새 수술실 문 앞에 도착해 있었고 막 자리에 앉으려던 순간 수술실 안의 불이 꺼졌다.그리고 곧 문이 열렸고 박시훈이 스스로 걸어 나왔다.심미연을 발견한 그는 두 눈이 환히 빛나며 달려왔다.“아직 안 갔네요!”그는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동안 심미연이 자신을 두고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줄

  • 다시, 너를 붙잡다   제711화

    심미연은 고개를 홱 돌렸다. 시선이 옆에 서 있는 박시훈에게 닿는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피 한 방울 남지 않은 듯 창백한 얼굴과 이마를 뒤덮은 땀방울이었다. 지금 박시훈은 극심한 고통을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이때 심미연의 눈빛이 번뜩였고 그녀는 즉시 깨달았다. 박시훈의 상처가 다시 벌어진 것임을.그녀가 가늘고 가지런한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강지한 쪽을 돌아보니 그는 마치 온 세상이 자기에게 빚이라도 진 듯 분노로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 순간 심미연의 얼굴은 단숨에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강지한을 바라보는 그 맑은 눈동자 속엔 두 줄의 칼날이 담겨 있는 듯 단숨에 사람의 심장을 찌를 것 같은 날카롭고 매서운 눈빛이 드러났다.그녀는 단단한 결심을 품고 한 걸음 한 걸음 강지한에게로 다가갔다.그리곤 망설임 없이 그를 밀쳐냈다.“박시훈 씨 다쳤는데 왜 그렇게 세게 잡아당겨! 상처가 다시 벌어지면 어쩌려고!”심미연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고 눈빛은 칼끝처럼 예리했다. 그녀는 강지한을 똑바로 응시하며 외쳤다.“이 정도 상식도 없어, 강지한?”심미연이 밀치자 강지한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났고 얼굴에 더 짙은 분노가 어렸다.차가운 얼굴로 자신을 밀어낸 심미연을 바라보며 강지한은 그제야 뼈아프게 깨달았다. 그녀와 자신 사이에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강이 생겼다는 것을. 그리고 마음 한편이 텅 비는 듯한 좌절감이 밀려왔다.‘안 돼. 심미연을 이렇게 그냥 보낼 순 없어!’“박시훈 씨, 가요.”심미연은 금세 감정을 가라앉히고 평온한 얼굴로 박시훈을 바라보았다.박시훈은 여전히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그녀가 미소를 머금고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아픔이 누그러지는 듯했다.‘미연 씨의 미소가 설마 치유하는 힘이라도 있는 걸까?’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를 끌고 자신의 차로 향했다.“타요.”박시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심미연은 운전석에 앉자마자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강지한이 다급히 달려와 차 문을 잡

  • 다시, 너를 붙잡다   제710화

    강지한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나랑 지유는...”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시훈이 불쑥 끼어들었다.“미연 씨... 가슴이... 마치 수천 개의 바늘이 박힌 것처럼 아파요.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예요. 혹시... 병원에 좀 데려다줄 수 있어요?”그의 목소리에 진한 고통이 묻어났고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이었다.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박시훈, 너... 정말로 내 사람을 가로채려는 거야?”하지만 강지한의 여인이 그렇게 쉽게 빼앗길 리가 있는가?박시훈은 더 이상 그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오직 심미연만 쳐다보았다.“이제 가도 될까요?”그가 보기엔 심미연과 강지한의 언쟁은 겉으로는 날이 서 있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오래도록 꺼지지 않은 감정의 불씨가 바람에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그만큼 지극히 위험하고 치명적이었다.반면 자신과 심미연 사이에는 언제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얇은 장막 하나가 가로놓여 있었고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에서 가까워질 기회를 잡기도 전에 늘 놓쳐버리고 만다. 심지어 다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을 만큼의 간극이었다.그래서 박시훈은 절대 저 둘이 더 오래 함께 있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심미연은 잠시 강지한을 바라보다가 이내 눈길을 거두었다.그리고 단호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그래요. 지금 바로 같이 병원으로 가요.”그 말에 박시훈의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같이’라는 단어가 마치 봄바람처럼 그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 싸늘하던 마음에 조그마한 온기를 남겼다. 이 순간만큼은 그녀와 그는 ‘심미연과 박시훈’이 아니라 ‘우리’였다.심미연은 더 이상 강지한을 돌아보지 않았고 박시훈을 부축하며 걸음을 옮겼다.잠시 뒤 강지한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빠르게 그들을 뒤쫓아왔다. 그러고는 박시훈의 팔을 붙잡으며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부축할게. 그래야 더 빨리 갈 수 있지.”그러자 박시훈은 속으로 욕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이 자식, 진짜 사람 속 뒤

  • 다시, 너를 붙잡다   제709화

    박시훈은 심미연의 부축에 힘을 빌려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리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걸치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좋아요.”그러면서도 시선의 끝자락으로는 살짝 떨어진 거리에서 강지한이 보이는 반응을 조심스레 훔쳐보았다.강지한의 얼굴은 마치 폭풍 전야의 하늘처럼 어두컴컴했다. 그의 날카롭기로 유명한 눈빛은 이 순간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고 깊고 검은 눈동자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박시훈의 마음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섞였다. 사업가로서 냉정하고 치밀하게 ‘전장’을 지휘하던 강지한은 언제나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냉철한 인물이었고 사람들에게 감정이라곤 없는 기계처럼 여겨졌었다.하지만 지금 심미연은 그런 강지한을 화나게 만들었고 심지어는 질투하게 만들었다.‘그러네, 질투하는 거였어!’박시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겉보기엔 이번 무언의 대결에서 자신이 우세를 점한 듯 보였지만 정작 마음속 깊은 곳엔 조금의 기쁨도 없었다. 오히려 뭔가 답답하고 찝찝했다.“박시훈 씨, 가요.”그 순간 부드럽고 따뜻한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며 그의 흩어진 생각을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 고개를 돌려 심미연을 바라보니 그녀는 여느 때처럼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강지한을 앞에 두고도 저토록 태연한 모습이라니, 아무래도 강지한을 마음에 두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미연 씨는... 지한이를 사랑하지 않는구나.’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박시훈의 기분은 조금 가벼워졌다.그러나 바로 그때 날카롭고 매서운 목소리가 정적을 찢고 들어왔는데 그 말 한마디가 박시훈의 가슴팍을 정통으로 찔렀다.“박시훈, 너 다리가 부러졌어, 아니면 팔이 나갔어? 왜 여자한테 부축까지 받는 거야?”그 말투엔 감춰지지 않는 조롱과 위압이 섞여 있었고 박시훈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지한과 눈을 마주치자 그 검고 깊은 눈동자 속에 얼음장 같은 서늘함이 서려 있는 것이 보였다.박시훈은 저도 모르게 등을 곧게 폈다.심미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강지한을 노려보았다.

  • 다시, 너를 붙잡다   제708화

    강지한은 두려웠다. 자신의 고집과 독단이 심미연과 아이를 더 멀어지게 만들고 심지어는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게 될까 봐.그래서 그는 인내를 배웠고 절제를 익혔다. 비록 그 절제가 칼로 심장을 도려내듯 괴롭고 아팠을지라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심지어 박시훈일지라도 그와 심미연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하고도 위태로운 경계를 함부로 넘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심미연은 강지한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를 관통해 아무 상관 없는 이방인을 보는 것처럼 먼 곳 어딘가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그 무심하고 차가운 시선 속에는 짙은 조소가 스며 있었고 그건 어떤 말보다도 상처로 깊이 박혔다.“강지한, 잊었나 본데...”그녀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그 말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정교하게 세공된 날카로운 칼끝처럼 정확히 그의 가슴을 찔러왔다.“우리 사이는 4년 전에 끝났어. 네 입에서 ‘내 여자’라는 말이 나오는 건 너의 비정상적인 소유욕일 뿐이야.”그녀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단호했고 그 말은 마치 갑작스레 몰아친 폭풍처럼 강지한이 오랫동안 쌓아 올린 모든 신념과 자존심을 산산이 무너뜨렸다.강지한은 당황했고 분노했으며 그보다 더 큰 좌절과 무력감이 가슴을 짓눌렀다.바로 그 순간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보여온 사랑은 빼앗고 움켜쥐는 방식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는 결국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이때 박시훈의 시선은 심미연의 작고 예쁜 얼굴에 꽂혀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맑고도 냉정했으며 세상의 모든 거짓을 꿰뚫어 보는 듯했지만 동시에 사람들과의 거리감이 너무나도 분명해서 넘을 수 없었다.그 순간 박시훈은 가슴 깊은 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짜릿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건 어쩌면 ‘권력’이라 불리는 존재에 도전하는 듯한 일종의 쾌감이었다.‘강지한’, 그 이름은 오랫동안 그의 세계를 짓누르는 거대한 그림자였다. 모든 것을 손에 쥐고 흔들던 절대자, 사람들조차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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