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읽고 나니 나는 이미 눈물범벅이 되었다. 나는 엄마가 말했던 그 말이 떠올랐다.“네가 내 딸이라는 것 외에는 우리 사이에 무슨 인연이 있는지 모르겠구나.”사실 그 말은 나에게 일부러 하신 말씀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자신의 몸 상태를 이미 알고 계셨기에...그녀는 나와 친해져서 서로 얽히는 걸 싫어했다. 이 세상을 떠난 후 내가 슬퍼할까 봐 걱정됐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늘 나를 멀리하셨고 조금 전까지도 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지 않으셨다.나는 엄마의 깊은 마음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고 그녀의 뜨거운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나는 급히 아까 방으로 돌아갔다. 거의 숨이 끊어질 듯한 그 노인에게 나는 영어로 물었다.“여기서 나가는 방법을 아세요? 아시면 제가 지금 당장 모시고 나갈게요!”나는 엄마를 만나러 가야 했다.지금 당장.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영어로 대답했다.“알아요.”나는 썩은 냄새를 참으면서 휠체어를 밀고 그를 데리고 나왔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포르말린에 담긴 10년 전에 망가졌어야 할 내 신장 두 개는 쳐다보지 않았다.최욱현은 정말 변태였다.노인의 정신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그는 영어로 나를 재촉했다.“아가씨, 빨리 나를 데리고 나가 주세요. 난 그녀를 만나고 싶어요... 내가 제때 가지 못할까 봐 두려워요. 그녀를 잃을까 봐...”그는 아마도 나의 엄마를 말하는 것 같았다.나는 의아한 마음에 그에게 물었다.“욱현이는 당신이 예전에 우리 엄마를 항상 때렸다고 했는데 지금 엄마를 잃을까 봐 두렵다고 할 자격 있어요?”그는 놀라며 물었다.“아가씨가 그녀의 딸이라고?”“네, 저는 그녀의 딸입니다.”이번 생에 하나뿐인 그녀의 딸이었다.노인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조용하고 차분하게 설명했다.“나는 그녀가 내 후계자를 낳아 주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항상 거절했어요. 나는 당시 젊어서 화를 참지 못했죠! 게다가 부부 사이에 다툼은 흔한 일이 아니겠어요? 나는 당신 어머니를 때린 적이 있지만 당신 어머니는 자
엄마는 결국 목숨을 건지셨다. 최욱현은 일어서서 내 옆으로 와 노인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내가 또 장례식 치러줘야 하잖아.”그의 웃음은 차가웠고 소름 끼쳤다.나는 그에게 말했다.“어쨌든 네 친척이고 너도 어릴 때부터 이 사람의 보호 아래 자랐잖아. 좀 착하게 굴어.”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수아 넌 내가 착하지 않다고 생각해?”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적어도 난 그렇다고 생각해.”내 가방 속 휴대폰은 아직 연결되어 있었다. 전화 너머에 석지훈이 있었기에 나는 최욱현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그는 변태적이고 잔인하지만 나를 해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어머니뿐이었다.그는 어머니를 제외하고 내가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했고 나를 소중하게 생각해서 내 신장을 보관해두었다고 했다.하지만 그런 마음은 역겹고 두려웠다.내 말을 듣고 최욱현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의 야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난 착한 사람이야. 근데 내 착한 면은 내가 아끼는 사람들한테만 보여주는 거야. 수아야, 언젠가 네가 날 이해하는 날이 오면 좋겠어. 그럼 넌 날 이해하게 될 거야.”그를 이해한다고?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백한 얼굴의 엄마에게 다가가 그에게 물었다.“방금 왜 거짓말 했어? 엄마가...”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네가 어머니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잃었다가 되찾는 기쁨을 느끼기를 바랐어. 수아야, 어머니는 널 사랑해. 진짜 많이. 그걸 꼭 알았으면 좋겠어.”나는 차갑게 말했다.“네가 말 안 해도 알아.”그때 집사 같은 사람이 와서 보고했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욱현은 눈을 들어 말했다.“석지훈이 도착했어.”웬일로 그는 나에게 숨기지 않았다.나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최욱현이 나를 내쫓는 소리가 들렸다.“가 봐. 어머니가 널 보고 싶어 하면 내가 다시 연락할게.”내가 물었다.“나 엄마 옆에 있으면 안 돼?”“수아야, 어머니는 네가 슬퍼
의외로 그는 나를 꺼리지 않았다...게다가 차 안에는 현정우와 운전기사도 있었다.그는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민망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생각해 보니 그가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키스한 것은 처음이었다.석지훈은 내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손가락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놀리듯 말했다.“나는 윤아의 얼굴이 성벽처럼 두꺼워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줄 알았잖아.”나: “...”조금 전의 역겨운 일은 잊어버렸고 마음속에는 오로지 석지훈뿐이었다.나중에야 나는 석지훈이 일부러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나를 조금 전의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주려고 했던 것이다.그리고 그의 방식이란...그는 내가 자기 얼굴에 환장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석지훈은 언제부터 자기 매력을 무기로 쓰는 걸 배운 거지?...우린 헬기 대신 전용기를 타고 F 국을 떠났다. 넓은 기내에는 나와 석지훈 단둘이 있었다.그리고 작지 않은 침대 하나가 있었다.침대는 매우 호화로웠고 그 위에는 비단 이불이 깔려 있었다.나는 비행기에 탑승한 후 입을 헹구고 석지훈의 품에 안겨 창밖의 야경을 감상했다. 특별히 볼 것은 없었지만 뭔가 기분 좋았다. 아마도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석지훈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내 곁에 있으면 나는 행복했다.석지훈은 내 귀밑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나는 멍하니 있다가 그의 질문을 들었다.“이게 뭐지?”나는 창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그는 부드럽게 물었다.“다쳤어?”나는 거짓말했다.“작은 상처예요.”나는 그에게 내 병에 대해 알리고 싶지 않았다.석지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은 마치 무언가 알고 있는 듯 내가 먼저 솔직하게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나는 얼굴을 그의 품에 묻고 거짓말했다.“실수로 다친 거예요. 자꾸 묻지 마세요. 오빠도 자주 다치잖아요? 그나저나 오빠 상처는 다 나았나요?”내가 화제를 돌리자 석지훈은 더 이상 캐묻지 않
나는 성인이었고 석지훈을 만나기 전 3년간의 결혼 생활을 경험했기에 남자를 유혹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그는 나를 안아 주며 내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고 내가 그의 품에서 무슨 말을 하든 부드럽게 대답해 주었다.이런 생각을 하니 마음속에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뭔가 비밀을 알아낸 것 같았던 것이다.국내에 도착하여 시차에 적응하고 나니 정오였다. 나와 석지훈은 몇 시간 더 차를 타고 운산 별장에 도착했다. 그때 석만호와 낯선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두 아이는 바닥을 기어 다니며 털이 복슬복슬한 작은 장난감을 손에 쥐고 있었다. 아이들은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고 아직 아기였기에 나는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왠지 모를 떨림이 느껴져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을 보니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석지훈은 내 모습을 보고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안아 봐.”석지훈은 손을 뻗어 내 눈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내가 다가가자 석만호가 나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일어나 공손하게 불렀다.“가주님.”눈치 빠른 그 아주머니는 재빨리 아이 하나를 안아 나에게 건네주며 웃는 얼굴로 설명했다.“이렇게 안아 주셔야 해요. 안 그러면 도련님이 불편해하실 거예요.”아주머니가 안고 있던 아이는 석윤민이었다.내 아들.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를 안았다. 그를 품에 안는 순간 마음속에 따스함이 가득 차올랐고 문득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내 모든 것을,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그에게 주고 싶었고 그가 이 세상에서 조금의 고통도 겪지 않기를 바랐다.나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오빠.”내 뒤에 있던 남자가 대답했다.“어?”“나 윤민이 너무 사랑해요.”사랑한다.아주아주 많이.물론 석윤아도 사랑했다.난 내 두 아이를 모두 사랑했다.그들은 내 생명의 연장선이었다.석지훈은 내 어깨를 감싸 안아 나에게 힘을 주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고개
석지훈이 갑자기 연 씨 별장을 언급하자 나는 그가 두 아이를 부모님께 맡기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속으로는 아쉬움과 망설임이 교차했다. 석지훈은 내 주저함을 알아채고는 차분히 설명했다.“아이들을 우리 곁에 두더라도 유모만 시간을 내어 돌볼 수 있을 테니 차라리 아이들을 연 씨 별장에 보내는 게 낫지 않겠어. 부모님 두 분 다 별장에서 쓸쓸하게 계시는데 애들 키우면서 시간도 보내시고 손주들 재롱 보면서 즐겁게 지내실 수 있잖아.”나는 여전히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석지훈은 허리를 숙여 내 눈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안했다.“아가야, 우리 집을 운성에 정하는 건 어떨까? 그러면 네가 시간이 날 때마다 연 씨 저택에 가서 아이들을 볼 수 있으니 곁에 두고 키우는 것과 다름없을 거야.”집을 운성에 정한다라...하지만 석지훈이 좋아하는 건 핀란드였다.그런데 나를 위해 운성에 집을 정하려 한다니.게다가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나와 그에게는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많지 않았으니 부모님께 맡기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였다.더군다나 바로 가까이에 계시니 저녁에는 집으로 데려와 직접 돌볼 수도 있었다. 이 제안은 여러모로 좋은 방법이었다.당시 이 제안을 하는 석지훈은 매우 다정했기에 나는 순진하게도 그가 나를 위해 배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내가 아이들에게만 신경 쓰는 모습에 석지훈은 묘한 감정을 느꼈고 아이들을 곁에 두고 키우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래서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간곡하게 나를 설득하여 아이들을 연 씨 저택으로 보내려 했던 것이다.그는 그녀의 사랑이 두 아이에게 너무 많이 분산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적어도 요 이틀처럼 완전히 무시당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네. 이틀 더 아이들과 함께 있다가 부모님께 맡길게요. 한 번에 두 명의 외손주를 얻으시니 부모님께서는 정말 기뻐하시겠죠.”석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 나도 같이 있어 줄게.”그 후 이틀 동안 운산에 있
“피곤하지는 않은데 앞으로 매일 동성과 운성을 오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무겁네요.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운성에 정착하려고 하니 석씨 가문의 본거지는 동성에 있었다.어떤 일들은 말로는 쉬웠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매우 어려웠다.더군다나 석지훈의 본거지는 유럽에 있었다.“함승윤에게 지시해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운성으로 보내 달라고 해. 동성에서 운성까지 몇 시간 안 걸리니까 매일 한 번씩 보내는 것도 괜찮을 거야. 급한 일 있으면 그때 동성에 가면 되고 최악의 경우엔 내가 뒤에서 도와줄게.”잠시 말이 없다가 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윤아야, 석씨 가문은 석씨 가문 나름대로 돌아가는 방식이 있어. 너무 힘들게 할 필요 없어.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서 조금씩 놓아 봐.”나는 호기심에 물었다.“어떻게 놓아요?”과거 석지훈은 석씨 가문을 장악하는 동시에 유럽의 권력까지 쥐고 있었다. 규모는 컸지만 그는 모든 일을 능숙하게 처리했고 자주 외부에서 활동했기에 석씨 가문의 일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원태웅은 그가 위험 속을 오가는 것을 즐긴다고 말했었다.“착하지, 저녁에 집에 가서 석씨 가문에 대해 이야기해 줄게.”이제 그는 ‘착하지’라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했다.“네. 오빠는 어디에요?”내가 물었다.“너 데리러 가는 중이야. 널 데리고 운성으로 가야지.”나는 전화를 끊고 창밖의 아름다운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모든 것이 보기 좋았다.나는 돌아서서 사무실을 나와 함승윤을 찾아갔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나를 보자 그는 곧바로 일어서서 불렀다.“가주님.”나는 웃으며 물었다.“뭐 해요?”“회사의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고 있습니다.”나는 방금 석지훈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에게 전달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동의하며 말했다.“분명 가능한 방법입니다. 운성에도 석씨 가문의 지사가 있으니 가주님께서 운성에 머무르시고 싶으시다면 강 비서를 그곳에 파견하여 보좌하도록 하겠
공작이 죽었으니 당연히 후계자 문제가 발생할 것이고 왕실에서 나를 초대했다는 것은 내가 그 상속자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F 국 공작자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는 함승윤에게 말했다.“일단 보류해 두세요.”그 노인은 사망한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았으니 아마 며칠 더 걸릴 것이다. 아마도 내가 F 국에 갈 때까지 기다리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를 F 국으로 초대하는 것은 엄마의 생각인 것 같았다.어쨌든 이것은 엄마가 나한테 물려주려고 만든 자리니까.나는 엄마가 의식을 되찾으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알겠습니다, 가주님.”“일보세요. 나는 아래로 내려가서 지훈 씨 기다릴 테니.”함승윤은 공손하게 말했다.“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가주님.”나는 기쁜 마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석지훈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아래층에 서서 휴대폰을 꺼내 트위터의 실시간 검색어를 훑어보았다.모두 현재 유행하는 내용으로 별로 재미있는 것은 없었다.나는 석지훈의 트위터에 들어가 보았다. 그가 올린 게시물은 약혼식 날 올린 단 하나의 게시물뿐이었다...수백만 개의 ‘좋아요’는 그의 인기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나는 원대감이라는 아이디의 트위터에도 들어가 보았다. 그는 매일 게시물을 올리고 있었다.이를테면...[석 대표님은 연수아를 아주 예뻐한답니다~]예뻐한다고는 하지만 증거는 없었다.팬들의 눈에 그는 그저 인터넷 서핑이나 하는 사람이었고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그저 심각한 커플 팬으로 보일 뿐이었다.그는 직접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했다.예를 들어...[몇 년 몇 월 며칠, 연수아는 옆에 있는 잘생기고 차가운 석 대표님에게 물었다.‘지훈 오빠, 나의 어떤 점이 좋아요?'그러자 석 대표님이 되물었다.‘그럼 넌 내 어떤 점이 좋아?'‘나는 오빠가 잘생기고 돈이 많아서 좋아요.'석 대표님의 몸이 굳어졌다.‘그것뿐이야?'연수아는 남자의 차가워진 말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그리고
나는 원태웅에게 쪽지를 보냈다.[오빠, 적당히 하세요.]원태웅은 인터넷을 하고 있었는지 장미꽃 이모티콘을 보내며 말했다.[윤아야, 나 아이디어가 고갈됐어. 내일 이야기는 어떻게 써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연재를 멈출 수는 없잖아!]그는 자신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나에게 영감을 구하고 있었다.나는 잠깐 생각한 후 답장했다.[생각해 볼게요.]사실 나는 원태웅의 이야기들을 꽤 좋아했다. 그래서 나중에 시간이 나면 전부 읽어볼 생각이었다.원태웅이 답장을 보냈다.[역시 윤아가 눈치가 빠르네. 많이 생각해 줘. 형에게는 절대 말 안 할게. 우리끼리 비밀로 하자. 내가 유명한 인플루언서가 되면 맛있는 거 사줄게.]한창 원태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석지훈이 도착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운전 기사에게서 우산을 받아 들고 내 머리 위로 씌워 주었다.석지훈의 다리는 길고 곧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아니지, 아니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그의 길고 하얀 손이었다.하지만 너무 가볍게 보이긴 싫었다.나는 차에 탄 뒤,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는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물었다.“피곤해?”“네. 졸려요.”내가 대답했다.“내 품에서 잠깐 눈 붙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무릎에 누웠다. 그의 손바닥이 내 뺨을 어루만졌다.“자, 내가 여기 있을게.”얼마 자지 못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친엄마의 전화였다. “너를 만나고 싶구나.”나는 휴대폰을 귀에 대고 대답했다.“알겠어요. 하지만 장례식에는 참석하고 싶지 않아요. 며칠 후에 F 국에 찾아뵐게요.”엄마는 내 뜻을 알아들었을 것이다.나는 공작 작위를 원하지 않았다.“수아야, 이건 내 마음이야.”“죄송해요, 하지만 이건 제 것이 아니에요.”이 말에 엄마는 따졌다.“석씨 가문도 네 것이 아니었지만 받아들였잖아. 아빠가 준 건 받으면서 왜 엄마가 주는 건 안 받아? 수아야, 내가 아빠보다 뭐가 부족해? 왜 자꾸 날 거절하는 거야?”나: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