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결국 목숨을 건지셨다. 최욱현은 일어서서 내 옆으로 와 노인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내가 또 장례식 치러줘야 하잖아.”그의 웃음은 차가웠고 소름 끼쳤다.나는 그에게 말했다.“어쨌든 네 친척이고 너도 어릴 때부터 이 사람의 보호 아래 자랐잖아. 좀 착하게 굴어.”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수아 넌 내가 착하지 않다고 생각해?”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적어도 난 그렇다고 생각해.”내 가방 속 휴대폰은 아직 연결되어 있었다. 전화 너머에 석지훈이 있었기에 나는 최욱현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그는 변태적이고 잔인하지만 나를 해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어머니뿐이었다.그는 어머니를 제외하고 내가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했고 나를 소중하게 생각해서 내 신장을 보관해두었다고 했다.하지만 그런 마음은 역겹고 두려웠다.내 말을 듣고 최욱현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의 야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난 착한 사람이야. 근데 내 착한 면은 내가 아끼는 사람들한테만 보여주는 거야. 수아야, 언젠가 네가 날 이해하는 날이 오면 좋겠어. 그럼 넌 날 이해하게 될 거야.”그를 이해한다고?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백한 얼굴의 엄마에게 다가가 그에게 물었다.“방금 왜 거짓말 했어? 엄마가...”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네가 어머니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잃었다가 되찾는 기쁨을 느끼기를 바랐어. 수아야, 어머니는 널 사랑해. 진짜 많이. 그걸 꼭 알았으면 좋겠어.”나는 차갑게 말했다.“네가 말 안 해도 알아.”그때 집사 같은 사람이 와서 보고했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욱현은 눈을 들어 말했다.“석지훈이 도착했어.”웬일로 그는 나에게 숨기지 않았다.나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최욱현이 나를 내쫓는 소리가 들렸다.“가 봐. 어머니가 널 보고 싶어 하면 내가 다시 연락할게.”내가 물었다.“나 엄마 옆에 있으면 안 돼?”“수아야, 어머니는 네가 슬퍼
의외로 그는 나를 꺼리지 않았다...게다가 차 안에는 현정우와 운전기사도 있었다.그는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민망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생각해 보니 그가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키스한 것은 처음이었다.석지훈은 내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손가락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놀리듯 말했다.“나는 윤아의 얼굴이 성벽처럼 두꺼워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줄 알았잖아.”나: “...”조금 전의 역겨운 일은 잊어버렸고 마음속에는 오로지 석지훈뿐이었다.나중에야 나는 석지훈이 일부러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나를 조금 전의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주려고 했던 것이다.그리고 그의 방식이란...그는 내가 자기 얼굴에 환장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석지훈은 언제부터 자기 매력을 무기로 쓰는 걸 배운 거지?...우린 헬기 대신 전용기를 타고 F 국을 떠났다. 넓은 기내에는 나와 석지훈 단둘이 있었다.그리고 작지 않은 침대 하나가 있었다.침대는 매우 호화로웠고 그 위에는 비단 이불이 깔려 있었다.나는 비행기에 탑승한 후 입을 헹구고 석지훈의 품에 안겨 창밖의 야경을 감상했다. 특별히 볼 것은 없었지만 뭔가 기분 좋았다. 아마도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석지훈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내 곁에 있으면 나는 행복했다.석지훈은 내 귀밑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나는 멍하니 있다가 그의 질문을 들었다.“이게 뭐지?”나는 창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그는 부드럽게 물었다.“다쳤어?”나는 거짓말했다.“작은 상처예요.”나는 그에게 내 병에 대해 알리고 싶지 않았다.석지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은 마치 무언가 알고 있는 듯 내가 먼저 솔직하게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나는 얼굴을 그의 품에 묻고 거짓말했다.“실수로 다친 거예요. 자꾸 묻지 마세요. 오빠도 자주 다치잖아요? 그나저나 오빠 상처는 다 나았나요?”내가 화제를 돌리자 석지훈은 더 이상 캐묻지 않
나는 성인이었고 석지훈을 만나기 전 3년간의 결혼 생활을 경험했기에 남자를 유혹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그는 나를 안아 주며 내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고 내가 그의 품에서 무슨 말을 하든 부드럽게 대답해 주었다.이런 생각을 하니 마음속에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뭔가 비밀을 알아낸 것 같았던 것이다.국내에 도착하여 시차에 적응하고 나니 정오였다. 나와 석지훈은 몇 시간 더 차를 타고 운산 별장에 도착했다. 그때 석만호와 낯선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데리고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두 아이는 바닥을 기어 다니며 털이 복슬복슬한 작은 장난감을 손에 쥐고 있었다. 아이들은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고 아직 아기였기에 나는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왠지 모를 떨림이 느껴져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을 보니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석지훈은 내 모습을 보고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안아 봐.”석지훈은 손을 뻗어 내 눈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내가 다가가자 석만호가 나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일어나 공손하게 불렀다.“가주님.”눈치 빠른 그 아주머니는 재빨리 아이 하나를 안아 나에게 건네주며 웃는 얼굴로 설명했다.“이렇게 안아 주셔야 해요. 안 그러면 도련님이 불편해하실 거예요.”아주머니가 안고 있던 아이는 석윤민이었다.내 아들.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를 안았다. 그를 품에 안는 순간 마음속에 따스함이 가득 차올랐고 문득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내 모든 것을, 심지어 내 목숨까지도 그에게 주고 싶었고 그가 이 세상에서 조금의 고통도 겪지 않기를 바랐다.나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오빠.”내 뒤에 있던 남자가 대답했다.“어?”“나 윤민이 너무 사랑해요.”사랑한다.아주아주 많이.물론 석윤아도 사랑했다.난 내 두 아이를 모두 사랑했다.그들은 내 생명의 연장선이었다.석지훈은 내 어깨를 감싸 안아 나에게 힘을 주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고개
석지훈이 갑자기 연 씨 별장을 언급하자 나는 그가 두 아이를 부모님께 맡기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속으로는 아쉬움과 망설임이 교차했다. 석지훈은 내 주저함을 알아채고는 차분히 설명했다.“아이들을 우리 곁에 두더라도 유모만 시간을 내어 돌볼 수 있을 테니 차라리 아이들을 연 씨 별장에 보내는 게 낫지 않겠어. 부모님 두 분 다 별장에서 쓸쓸하게 계시는데 애들 키우면서 시간도 보내시고 손주들 재롱 보면서 즐겁게 지내실 수 있잖아.”나는 여전히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석지훈은 허리를 숙여 내 눈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안했다.“아가야, 우리 집을 운성에 정하는 건 어떨까? 그러면 네가 시간이 날 때마다 연 씨 저택에 가서 아이들을 볼 수 있으니 곁에 두고 키우는 것과 다름없을 거야.”집을 운성에 정한다라...하지만 석지훈이 좋아하는 건 핀란드였다.그런데 나를 위해 운성에 집을 정하려 한다니.게다가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나와 그에게는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많지 않았으니 부모님께 맡기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였다.더군다나 바로 가까이에 계시니 저녁에는 집으로 데려와 직접 돌볼 수도 있었다. 이 제안은 여러모로 좋은 방법이었다.당시 이 제안을 하는 석지훈은 매우 다정했기에 나는 순진하게도 그가 나를 위해 배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내가 아이들에게만 신경 쓰는 모습에 석지훈은 묘한 감정을 느꼈고 아이들을 곁에 두고 키우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래서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간곡하게 나를 설득하여 아이들을 연 씨 저택으로 보내려 했던 것이다.그는 그녀의 사랑이 두 아이에게 너무 많이 분산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적어도 요 이틀처럼 완전히 무시당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네. 이틀 더 아이들과 함께 있다가 부모님께 맡길게요. 한 번에 두 명의 외손주를 얻으시니 부모님께서는 정말 기뻐하시겠죠.”석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 나도 같이 있어 줄게.”그 후 이틀 동안 운산에 있
“피곤하지는 않은데 앞으로 매일 동성과 운성을 오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무겁네요.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운성에 정착하려고 하니 석씨 가문의 본거지는 동성에 있었다.어떤 일들은 말로는 쉬웠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매우 어려웠다.더군다나 석지훈의 본거지는 유럽에 있었다.“함승윤에게 지시해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운성으로 보내 달라고 해. 동성에서 운성까지 몇 시간 안 걸리니까 매일 한 번씩 보내는 것도 괜찮을 거야. 급한 일 있으면 그때 동성에 가면 되고 최악의 경우엔 내가 뒤에서 도와줄게.”잠시 말이 없다가 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윤아야, 석씨 가문은 석씨 가문 나름대로 돌아가는 방식이 있어. 너무 힘들게 할 필요 없어.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서 조금씩 놓아 봐.”나는 호기심에 물었다.“어떻게 놓아요?”과거 석지훈은 석씨 가문을 장악하는 동시에 유럽의 권력까지 쥐고 있었다. 규모는 컸지만 그는 모든 일을 능숙하게 처리했고 자주 외부에서 활동했기에 석씨 가문의 일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원태웅은 그가 위험 속을 오가는 것을 즐긴다고 말했었다.“착하지, 저녁에 집에 가서 석씨 가문에 대해 이야기해 줄게.”이제 그는 ‘착하지’라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했다.“네. 오빠는 어디에요?”내가 물었다.“너 데리러 가는 중이야. 널 데리고 운성으로 가야지.”나는 전화를 끊고 창밖의 아름다운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모든 것이 보기 좋았다.나는 돌아서서 사무실을 나와 함승윤을 찾아갔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나를 보자 그는 곧바로 일어서서 불렀다.“가주님.”나는 웃으며 물었다.“뭐 해요?”“회사의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고 있습니다.”나는 방금 석지훈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에게 전달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동의하며 말했다.“분명 가능한 방법입니다. 운성에도 석씨 가문의 지사가 있으니 가주님께서 운성에 머무르시고 싶으시다면 강 비서를 그곳에 파견하여 보좌하도록 하겠
공작이 죽었으니 당연히 후계자 문제가 발생할 것이고 왕실에서 나를 초대했다는 것은 내가 그 상속자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F 국 공작자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는 함승윤에게 말했다.“일단 보류해 두세요.”그 노인은 사망한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았으니 아마 며칠 더 걸릴 것이다. 아마도 내가 F 국에 갈 때까지 기다리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를 F 국으로 초대하는 것은 엄마의 생각인 것 같았다.어쨌든 이것은 엄마가 나한테 물려주려고 만든 자리니까.나는 엄마가 의식을 되찾으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알겠습니다, 가주님.”“일보세요. 나는 아래로 내려가서 지훈 씨 기다릴 테니.”함승윤은 공손하게 말했다.“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가주님.”나는 기쁜 마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석지훈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아래층에 서서 휴대폰을 꺼내 트위터의 실시간 검색어를 훑어보았다.모두 현재 유행하는 내용으로 별로 재미있는 것은 없었다.나는 석지훈의 트위터에 들어가 보았다. 그가 올린 게시물은 약혼식 날 올린 단 하나의 게시물뿐이었다...수백만 개의 ‘좋아요’는 그의 인기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나는 원대감이라는 아이디의 트위터에도 들어가 보았다. 그는 매일 게시물을 올리고 있었다.이를테면...[석 대표님은 연수아를 아주 예뻐한답니다~]예뻐한다고는 하지만 증거는 없었다.팬들의 눈에 그는 그저 인터넷 서핑이나 하는 사람이었고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그저 심각한 커플 팬으로 보일 뿐이었다.그는 직접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했다.예를 들어...[몇 년 몇 월 며칠, 연수아는 옆에 있는 잘생기고 차가운 석 대표님에게 물었다.‘지훈 오빠, 나의 어떤 점이 좋아요?'그러자 석 대표님이 되물었다.‘그럼 넌 내 어떤 점이 좋아?'‘나는 오빠가 잘생기고 돈이 많아서 좋아요.'석 대표님의 몸이 굳어졌다.‘그것뿐이야?'연수아는 남자의 차가워진 말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그리고
나는 원태웅에게 쪽지를 보냈다.[오빠, 적당히 하세요.]원태웅은 인터넷을 하고 있었는지 장미꽃 이모티콘을 보내며 말했다.[윤아야, 나 아이디어가 고갈됐어. 내일 이야기는 어떻게 써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연재를 멈출 수는 없잖아!]그는 자신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나에게 영감을 구하고 있었다.나는 잠깐 생각한 후 답장했다.[생각해 볼게요.]사실 나는 원태웅의 이야기들을 꽤 좋아했다. 그래서 나중에 시간이 나면 전부 읽어볼 생각이었다.원태웅이 답장을 보냈다.[역시 윤아가 눈치가 빠르네. 많이 생각해 줘. 형에게는 절대 말 안 할게. 우리끼리 비밀로 하자. 내가 유명한 인플루언서가 되면 맛있는 거 사줄게.]한창 원태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석지훈이 도착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운전 기사에게서 우산을 받아 들고 내 머리 위로 씌워 주었다.석지훈의 다리는 길고 곧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아니지, 아니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그의 길고 하얀 손이었다.하지만 너무 가볍게 보이긴 싫었다.나는 차에 탄 뒤,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는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물었다.“피곤해?”“네. 졸려요.”내가 대답했다.“내 품에서 잠깐 눈 붙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무릎에 누웠다. 그의 손바닥이 내 뺨을 어루만졌다.“자, 내가 여기 있을게.”얼마 자지 못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친엄마의 전화였다. “너를 만나고 싶구나.”나는 휴대폰을 귀에 대고 대답했다.“알겠어요. 하지만 장례식에는 참석하고 싶지 않아요. 며칠 후에 F 국에 찾아뵐게요.”엄마는 내 뜻을 알아들었을 것이다.나는 공작 작위를 원하지 않았다.“수아야, 이건 내 마음이야.”“죄송해요, 하지만 이건 제 것이 아니에요.”이 말에 엄마는 따졌다.“석씨 가문도 네 것이 아니었지만 받아들였잖아. 아빠가 준 건 받으면서 왜 엄마가 주는 건 안 받아? 수아야, 내가 아빠보다 뭐가 부족해? 왜 자꾸 날 거절하는 거야?”나:
그녀를 사랑할 기회...그녀의 삶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고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사랑이었다. 나는 평생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으니까...확실히 난 그녀를 사랑해야 했다.감정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그녀를 사랑해야 했다.“네. 며칠 뒤에 F 국으로 갈게요.”운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나는 아이들을 볼 기력이 없어서 연 씨 저택 근처에 예전에 미리 사둔 별장으로 갔다. 이곳에 내 집이 있는 것을 보고 석지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는 나를 놀리듯 말했다.“교활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판다더니.”연 씨 별장을 제외하고 운성에 내 집은 마침 세 채가 있었다.나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그럼 여기서 살 거예요 말거예요?”내 말투에 석지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또 버릇없다고 잔소리하려는 것 같아서 나는 그의 팔을 잡아끌며 먼저 말했다.“나 피곤하고 배도 고파요. 오빠 뭐 먹고 싶어요?”내가 먼저 약한 모습을 보이자 그는 아까 나의 무례함은 넘어가 주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뭐 먹고 싶어?”나는 웃으며 말했다.“오빠를 먹고 싶어요.”석지훈: “...”그는 침묵으로 답했다.석지훈은 눈치가 빨랐다. 별장에 오자마자 그는 양복을 벗어 놓고는 주방으로 향했고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 흰 잠옷으로 갈아입었다.그러고는 휴대폰을 들고 아래층 주방으로 내려가 분주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채소를 준비하고 있었고 냄비에는 죽이 끓고 있었다.주방 입구에 서 있는 나를 보고 석지훈은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작은 냄비에 데운 후 컵에 따라 건네주었다. 컵을 쥔 내 손은 마치 그의 마음처럼 따뜻했다.석지훈은 항상 아무 불평 없이 나를 위해 요리하고 말없이 나를 예뻐했다. 정말 완벽한 남자였다.과거의 그 전남편과는 완전히 달랐다.이번 생에 그를 만난 건 정말 다행이었다.나는 참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사랑해요. 지훈 씨.”뜬금없는 내 고백에 석지훈은 늘 그렇듯 침착한 모습으로 나지막이 응수하고는 온화한 눈빛으로 말했다.“알고 있어
사람이 있는 곳에는 늘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특히 부유한 집안에 철없는 아가씨들이 넘쳐난다. 지금 김예진을 비꼬고 있는 눈앞에 예쁜 여성은 처음 보는 분이었지만 감히 내 언니를 이런 식으로 대하다니, 나는 차마 용납할 수 없어 곧바로 그녀에게 쏘아붙였다.“어디서 굴러왔죠?”담현아가 얼마 전에 주민솔의 친구를 이 한마디로 받아친 적이 있었다.그 여자는 잠시 멍해지더니 물었다.“너 누구야?”김예진은 그녀와 말다툼할 생각도 없었거니와 내가 이런 일로 화를 내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녀는 내 팔을 잡고 말했다.“민수 씨 어머니 쪽 사람이야. 다른 데로 가자. 신경 쓸 필요 없어.”오빠 어머니 쪽 사람이라니...만약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따지고 들면 분명 순간적으로는 속이 시원하겠지만 그녀가 집에 가서 고자질이라도 하면 피해를 보는 건 김예진이 될 것이다.나는 김예진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그녀와 함께 자리를 뜨려던 참에 그녀는 김예진을 밀치며 말했다.“지금 너랑 말하고 있잖아!”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렇게 오만하고 건방진 여자는 처음이었다. 예전에 임지혜조차도 감히 나한테 이런 식으로 대하지는 못했다.보아하니 김예진이 평소에도 이 여자에게 꽤나 괴롭힘을 당했던 것 같다.나는 즉시 김예진을 내 뒤로 끌어당기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사과해.”그녀는 멍해졌다.“넌 누군데?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나는 그녀의 말을 단번에 잘라버렸다.“사과하라고.”그녀가 누구인지 전혀 상관이 없었고 누구든지 석씨 가문을 넘볼 수는 없었다.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너 내가 조씨 가문의 조민수 사촌 동생인 거 알아? 내가 김예진을 때렸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하겠어? 게다가 처음도 아닌데...”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그녀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이내 주변의 시선은 나에게 쏠렸다. 그녀는 뺨을 감싼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우리 고모가
김예진이 그의 아이를 몰래 지웠다니...그들의 결혼에서 과연 누가 잘못했고 누가 맞는지 나는 알 수 없었거니와 이해하기도 어려웠다.다행히 그들이 있는 곳은 외진 곳이라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아까 대화를 듣지 못했다.조민수는 눈을 꼭 감았다가 깊은 숨을 내쉬며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는 실망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예진 씨, 나도 오랜 시간 참고 견뎌왔어요. 하지만 이젠 지쳤어요. 이젠 그만 놓아줄게요. 더 이상 절 미워하는 여자를 붙잡고 싶지 않아요.”김예진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겠어요. 잘 있어요, 민수 씨.”알겠어요. 잘 있어요, 민수 씨그들은 그렇게 쉽게 헤어졌다.하지만 나는 석지훈과 절대 이렇게 쉽게 헤어질 수 없었다.왜냐하면 그를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이다.그때는 몰랐다. 때로는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정말로 그 지경에 이르게 되면 무력감만 느낄 뿐이었다.사랑이라는 길 위에서 우리는 모두 똑같았다.나는 구석에서 조민수가 떠나는 것을 보고 나서야 김예진을 찾으러 나섰다.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언니.”김예진은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며 말했다.“수아야.”“언니, 아까 오빠랑 했던 얘기 다 들었어요.”“미안해, 너까지 걱정하게 해서.” 김예진이 말했다.나는 망설이며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요?”“방금 전에 남현 씨 형을 만났어. 남현 씨랑 정말 닮았더라고. 그 순간 진짜 정신이 나가버렸어. 네 오빠가 날 부르는 것조차 듣지 못했지.”김예진은 내가 이해하지 못할까 봐 잠시 생각하더니 덧붙여 설명했다.“남현 씨는 이미 세상을 떠났어. 난 그때 진심으로 남현 씨와 함께하고 싶었어. 근데 남현 씨가... 그리고 남현 씨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나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었어. 아주 오랜 시간 외롭고 힘들었는데 그때 네 오빠가 곁에서 함께 있어 줬거든. 그래서 결국 민수 씨를 용서하기로 했어. 근데 나중에 알게 된 거야. 네 오빠랑 남현 씨의 죽음이...”
나는 한성범의 말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에 똑같은 물음을 석지훈한테도 물어본 적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한성범이 그를 한씨 가문의 사위로 삼더라도 그가 나를 선택하고 한성범과 멀어지게 되면 어떨지 물었다.석지훈은 이렇게 대답했다.“괜찮아. 만약 정말로 날 멀리하게 되더라도 상관없어. 난 애초에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니까.”나는 석지훈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와 헤어지는 건 더욱 불가능했다. 그 어떤 것도 내 마음을 흔들 수 없었다.게다가 한성범 역시 그를 바꿀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명확했고 어떤 선택이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웃었다.“한번 해보시죠.”그는 여유로운 내 태도에 갑자기 나를 비꼬듯 말했다.“네가 그동안 해온 일을 들어보니 연씨 가문에서 석씨 가문로 옮겨갔지만 큰 성과는 없더군. 생각만큼 단호하지도 않고. 하지만 운이 좋았지. 연씨 가문이 무너지자 때마침 석씨 가문이 있었고 항상 지훈이가 뒤에서 너를 지켜줬어. 수아 씨, 만약 지훈이를 잃게 된다면 넌 아무것도 아니야. 석씨 가문조차 지켜낼 수 없을 거고 결국 석씨 가문까지 잃게 될 운명이야.”결국 나는 석씨 가문을 잃게 될 운명...나는 순간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어르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죠.”한성범은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었고 나는 차갑게 말했다.“석씨 가문의 일은 어르신께서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게다가 지훈 씨는 절대 한씨 가문의 사위가 되지 않을 겁니다. 어르신 손녀도 별로 대단한 건 없어요.”한민영은 교만하고 제멋대로였다.“적어도 우리 민영이는 이혼한 적이 없단다.”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나는 더 이상 말싸움 하고 싶지 않았다. 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나는 짜증이 솟구쳐서 방을 나갔다.밖으로 나가니 멀지 않은 곳에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현성이 보였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우리 둘이
석지훈은 입꼬리를 휘어올 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르신은 온화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비록 악의는 없었지만 나는 마음 깊숙이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한참 후, 어르신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예쁜 아이로구나.”석지훈이 대답했다.“네, 정말 예쁘죠?”“지훈아, 언제 결혼할 생각이니?”그는 순순히 대답했다.“얼른 하려고요.”“그래, 가능한 빨리 준비해라.”어르신은 나를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말투가 어쩐지 내 마음을 조금 불편하게 만들었다.여자의 본능적인 직감 때문인지 나는 왠지 모르게 눈앞의 어르신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아무리 석지훈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원태웅이 방을 찾아와 밖에 중요한 사람이 찾고 있다고 했고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방을 떠났다. 그리고 나가기 전에 내게 당부했다.“여기서 기다려.”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요.”석지훈은 원태웅을 따라 방을 나섰다. 나는 그들이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나는 알 수 없었고 방에는 나와 어르신만 남게 되었다. 나는 이 상황이 어찌나 불편하고 어색했는지 몰랐다.내가 어색해하는 걸 본 어르신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내가 어렵느냐?”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닙니다, 어르신.”그러자 그는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지훈이가 너를 아주 좋아하더구나.”나는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는 다시 말을 꺼냈다.“나는 지훈이가 자신의 짝을 스스로 선택하는 걸 지지한다. 하지만 내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역시 내 직감이 맞았다.여자의 촉은 언제나 소름 돋게 맞았다. 나는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목소리를 낮추더니 계속해서 말했다.“지훈이는 정말 완벽한 사람이지. 어쩌면 이 세상에서 그와 같은 남자를 찾기는 힘들 거야.그리고 내게는 손녀가 하나 있다. 비록 그 애가 지훈에게 미움을 받고 있더라도 말이다.그 아이는 내 손녀이자 한씨 가문의 미래를 책임질 사람이야.”나
내 모든 사랑을 오직 너 한 사람한테 주고 싶다고...고현성은 한때 내가 사랑했던 남자였다. 그가 지금 이렇게 집요한 모습을 보이니 가슴이 아파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 마음을 다잡고 돌아섰다. 그에 대한 내 마음속 불쾌함은 갈수록 깊어졌다.그는 어떻게 계속해서 나한테 상처 입힌 뒤에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어떻게 내 모든 사랑을 오직 너 한 사람한테 주고 싶다고 말할 수 있을까?이건 나를 조롱하는 거나 다름없었다.그때 나는 그한테 이생은 너 하나뿐이라고 했던 말을, 그리고 내가 또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말이다.하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그때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을 위해 평생을 바쳐야 했을까?고현성을 평생 지키는 게 당연한 건가?나한테 행복을 추구할 권리조차 없는 건가?나는 정말 어렵게 석지훈을 만났다.차갑기 그지없지만 나한테는 따뜻한 남자.평생 함께하고 싶은 남자.석지훈과 2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정말 쉽지 않았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석지훈이 냉랭한 태도로 “아직”, “다시는 없어”, “이생에 너 하나뿐”이라는 말을 하는 것도 좋고 다정하게 “아가”라고 부르는 것도 좋았다.그토록 강인한 남자였고 언제나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명확히 알면서 단 한 번도 나한테 상처 입힌 적 없는 그 남자를 나는 너무도 사랑한다.나는 이생에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그리고 그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도 모른다.그는 말이 별로 없고 뭐든 짧게 말하는 사람이지만 나는 여전히 그가 천사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겉으로는 차갑고 냉혹해 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 따뜻했다.그의 강렬하고 힘 있는 서체와 살짝 문학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말투와 고지식한 성격도 좋다.나는 그의 모든 게 좋았다.나는 귀빈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는 누구도 없었다. 창가에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는 남자를 한참이나 뚫어져라
고민영은 눈치껏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제 친구가 저쪽에 있어서 먼저 갈게요. 언니, 저랑 나중에 다시 얘기 나눠요.”또 나를 언니라고 부르다니...정말 답답했다.지금 자리를 뜬 것도 고현성에게 나와 둘만의 자리를 만들어 주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왜냐하면 그녀가 떠나자마자 고현성은 곧바로 나에게 제안했기 때문이다.“우리 저쪽 가서 얘기 좀 할까?”나는 거절했다.“미안하지만,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어요.”우리 둘의 일은 이미 과거형이었다.내 단호한 태도에 그는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계속해서 너한테 상처 줬어.”고현성의 목소리에는 묵직한 후회가 담겨 있었다.그는 화려한 연회장을 쓸쓸히 바라보며 말했다.“왜 우리가 이렇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너를 다치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하지만... 우리 3년간의 결혼 생활에서 내가 먼저 잘못한 건 맞아. 그 후로도 내가 잘못했고, 물론 다 유서정 때문이긴 했지만... 변명하고 싶지는 않아. 모든 건 내가 저지른 일이니 책임도 내가 져야 해. 네가 나를 원망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그래도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고현성의 진심 어린 고백에 내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나는 그를 바라보며 애써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슬픔에 젖은 그의 옆모습을 보며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삼켜버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연회장을 지나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수아야, 바람이 사는 거리는 너와 고정재의 이야기야.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너한테 안겨준 상처 외에 남은 게 뭐가 있겠어?”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과거 이야기는 그만해요.”“난 그때 오혜원을 시켜 네가 치료를 받게 할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지금도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아. 수아야, 하지만 이건 꼭 말하고 싶어. 내 평생 유일하게 후회하는 게 바로 2년 전 이혼 서류에 그
석지훈이 상주시에 있는 연회에 참석한다면 조민수도 분명 올 텐데 그때면 김예진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녀는 항상 나를 가족처럼 대해줬고 힘든 순간마다 나에게 도움을 주곤 했다.가는 길에 나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요즘 잘 지내세요? 오빠랑 뭐 하세요?]그녀는 놀란 이모티콘을 보내며 답했다.[나랑 네 오빠는 집에 있어. 곧 연회에 참석할 건데 혹시 무슨 일 있어? 수아야, 너 혹시 지금 상주시야?”그녀는 금방 눈치챘다.나는 석지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네, 무슨 연회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지훈 씨가 말 안 했어요. 그냥 지훈 씨랑 함께 가는 거예요. 이따 거기서 봐요.”그녀는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한씨 가문이 상주시에 새로 지사를 설립했어. 그래서 현지 유명 가문들을 초대한 거야.”한씨 가문?혹시 한민영의 가문인가?그러면 석지훈이 상주시에 온 것도 원태웅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도 모두 이해가 됐다.그런데 나는 이 모든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나는 날카로운 옆태의 석지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무슨 일이든 혼자 마음속에 감추고 나한테 알려주지 않았다.심지어 지금 참석할 연회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았다.나는 그의 성격이 과묵한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점점 불안한 감정이 피어올랐다.마치 나와 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대부분 그의 바깥 세계에 있었던 것 같았다.나뿐만 아니라 우리 두 아이도 마찬가지였다.연회장에 도착한 후 석지훈은 먼저 차에서 내리더니 직접 내 차 문을 열어 주었다.그는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나는 그의 팔짱을 끼고 조명 아래로 들어섰다. 연회장에 들어서자 은색 정장을 입은 고현성이 한눈에 들어왔다.그는 지금 고씨 가문의 고민영과 함께 있었다.고민영은 고현성의 사촌 여동생이다. 2년 전 1억 원을 들고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과 연애하겠다고 나섰을 때 그녀와
나는 놀라운 마음으로 현정우를 보며 말했다.“보고 싶대요.”그는 웃으며 말했다.“대표님은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으시죠.”나는 다시 그에게 물었다.[정확히 어디에 있어요?]그는 영리하게 되물었다.[지금 상주시야?][네.]석지훈은 곧바로 나에게 위치를 보내왔다.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현정우와 함께 서둘러 찾아갔다.그곳에 무사히 있는 그를 보자마자 나는 문득 원태웅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나는 가까이 다가가 핑계를 대며 말했다.“셋째 오빠가 절 데리고 왔어요. 이곳 풍경이 좋다면서, 그러더니 여기 도착하자마자 날 버리고 가버렸어요. 그래서 상주시에 있는 김에 오빠한테 연락한 거예요.”석지훈은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너도 상주시에 오고 싶었던 거야?”당연했다. 그가 여기에 있으니 당연히 오고 싶었다.나는 그 앞에서 내 사랑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그의 팔을 끌어안은 채 말했다.“네, 너무 오고 싶었어요. 근데 상주시가 아니라, 상주시에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석지훈은 허리를 굽혀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현정우가 보는 앞에서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아가, 많이 컸네.”나는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왜 여기에 온 거예요?”“개인적인 일 때문에.”석지훈은 자세히 말하려 하지 않았고 나 역시 눈치채고 이내 질문을 바꿔 언제 운성시로 돌아가는지 물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 줄래?”나는 그와 함께 공식적으로 연회에 참석해 본 적이 없었다. 다소 기대되었지만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다.그러나 고민 끝에 나는 따라가기로 했다.그는 나를 데리고 호텔로 갔다. 나는 침대에 기댄 채 지긋이 그를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씻을래?”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러웠다.나는 그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어요.”나는 거절했다.그는 더 이상 나를 강요하지 않았고 그렇게 그 일은 지나갔다.나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라면 충분히 답을 알고 있을 만큼 똑똑했다.나는 침실에서 나오면서 물었다.[넌 어떻게 생각해?]주방으로 가서 우유 한 잔을 따르며 잠시 생각한 뒤 다시 물었다.[너랑 정재 씨, 둘이 관계를 맺은 적 있어?]담현아는 빠르게 답장을 보내왔다.[아직이요.]아직이요...석지훈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아직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나는 우유 한 모금을 들이마신 뒤 다시 물었다.[그럼 원해?]그리고 핸드폰을 옆에 내려놓은 채 냉장고에서 빵 한 조각과 상추 두 장을 꺼내 간단히 토스트를 만들었다.담현아는 다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아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와 정원에서 살구꽃 한 송이를 꺾었다. 그리고 별장 입구에 나와 보니 현정우가 문을 지키고 있었다.나는 호기심에 물었다.“정우 씨는 어디서 사는 거예요?”“석 대표님께서 옆 별장을 매입하셨어요. 매일 밤마다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방금 교대했습니다.”“그렇네요, 그럼 지금 저랑 희연이 만나러 가죠.”나는 최희연의 집으로 찾아갔더니 그녀는 별로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녀를 데리고 가게 계약을 마친 뒤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야.”그녀가 말하지 않으니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계약을 마친 뒤 최희연은 비서 강해온과 함께 가게 인테리어를 논의하러 갔고 나는 석씨 가문의 일을 처리하고 나서야 아이들을 보러 가려고 차에 올랐다. 그때 원태웅이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어디야?][운성시.][둘째 형은 지금 상주시에 있어.][어제 저한테 말했어요.][상주시에서 다치지 않겠지?]원태웅은 의문스러운 말투로 물었다.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뭐가 다친다는 거죠?][상주시에 형의 원수가 있어.]그 말을 듣고 나니 순간 마음이 얼어붙은 듯했다. 나는 석지훈의 안전이 걱정되기 시작했다.그때 원태웅이 나에게 물었다.[나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