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이든 영광이든, 그것은 모두 그의 세계였다.그리고 그것은 내가 그와 함께 짊어져야 할 몫이기도 했다.하지만 그때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그와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다.답답한 마음으로 별장에 들어가 최욱현의 옆방에 누웠다. 휴대폰을 꺼내 연예 기사들을 뒤적였지만 전부 별거 아닌 가십거리뿐이었다.그러다 문득 석지훈이 예전에 올린 트위터를 찾아봤다. 좋아요는 이미 300만을 넘었고 댓글은 그를 동경하는 팬들로 가득했다.[201X년 11월 27일 저녁 8시, 나는 연수아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약혼을 맺었다. 201X년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으며 이는 내 생에 가장 행복한 하루였다.”나는 이 글을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글을 읽다가 나는 눈가가 붉어지며 조용히 눈을 감고 말했다.“새해 복 많이 받아요, 오빠.”이 말은 깊은 밤, 고요한 순간에만 나 혼자 속삭일 수 있었다....다음 날 아침, 최욱현이 나를 깨웠다. 그는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 위에서 깡충깡충 뛰고 있었다.나는 피곤한 눈으로 그를 보며 험하게 말했다.“또 이러면 너 바로 돌려보내 버릴 거야.”하지만 그는 전혀 겁먹지 않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새해 복 많이 받아, 꼬마 아가씨!”최욱현은 가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소년 같아서 화를 내고 싶어도 내킬 수가 없다.“너도.”그는 침대 옆에 앉아 다리를 꼬고 말했다.“오후 비행기로 미상국에 돌아갈 거야.”나는 일어나 화장실로 걸어가며 말했다.“조심해서 가.”그는 나를 따라오며 물었다.“F국으로 같이 갈래?”“거긴 내 집도 아니야. 그리고 시간 없어.”“나랑 같이 가서 어머니께 새해 인사드리자.”그건 그의 어머니일 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했던 한마디가 아직도 내 마음에 깊게 남아 있다.“너는 내 딸이지만 딸이라는 관계를 제외하면 우리 사이에 무슨 유대가 있는지 모르겠구나.”그녀에게는 나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었다. 내가 새해를 함께 보내든 말든 그녀에게는 아무런 차
안쪽에서 한 남자가 빛을 등지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나는 속으로 애타게 외쳤다.“구해주세요, 현성 씨...”곧 고현성이 다가와 나를 품에 안았다. 그는 단호한 걸음으로 나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려 했고 나는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속삭였다.“핸드폰...”고현성은 방으로 돌아가 내 핸드폰을 챙겨왔다. 차에 올라 조수석에 앉은 나는 간신히 힘을 내어 함승윤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그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주님, 제가 석씨 가문 병원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운성에는 석씨 가문이 인수한 병원이 있었고 이런 병원은 운성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 퍼져 있었다.“알겠어요.”내 대답을 들은 함승윤이 물었다.“현정우는요? 왜 가주님 곁에 없습니까?”나는 고통을 참으며 힘겹게 대답했다.“오늘 하루만 쉬라고 했어요.”함승윤은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주님, 이런 결정을 하시면 곤란합니다. 정우가 저에게 보고도 하지 않았어요.”“죄송해요. 미리 말씀드리면 반대하실 것 같아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산 아래에는 석씨 가문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잖아요. 저는 별장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으니 위험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함승윤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체념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가주님, 곁에 아무도 없는 상황은 너무 위험합니다. 지금처럼 이런 일이 생기면 어쩌실 겁니까? 가주님의 몸 상태를 고려하면 절대 혼자 계셔선 안 됩니다.”그가 내 건강 상태에 대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애써 대답했다.“알겠어요. 병원 주소를 보내주세요.”전화를 끊은 뒤, 함승윤은 곧바로 병원 주소를 보내왔다.나는 핸드폰을 고현성에게 건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을 잃고 말았다.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누구세요?”이때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수아야, 나야.”나는 무의식중에 물었다.“누구죠?”“수아야, 넌 한때 나를 믿고 사랑했던 사람이야.”“제가 사랑했던 사람이요
2년 전, 나는 고현성의 세계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그 일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내가 깨어난 후, 최희연이 그가 얼마나 슬프고 절망했는지 과장되게 이야기해 줬다. 그녀는 그때 그의 무너진 모습을 보고 이후로 계속 그를 편들었다고 말했다.“이번에는 내가 알아.”그가 했던 이 말은 무겁고 낮은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지금의 고현성은 나를 마주할 때마다 끝없이 작아지고 있었다. 마치 과거 내가 그를 대할 때처럼.그 모습은 내 마음을 찌르고 흔들었다. 나는 더 이상 그런 고현성을 보고 있기가 어려워 눈을 감으며 차갑게 말했다.“병원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이제 돌아가세요. 좀 쉬고 싶어요.”그는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수아야.”나는 갑자기 눈을 뜨며 날카롭게 외쳤다.“그러지 마세요!”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는 간절히 말했다.“그렇게 부르지 말아 주세요. 그런 목소리로, 그런 태도로 저를 대하지 말아 주세요. 저를 더 힘들게 하지 마세요!”고현성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떨구더니,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그 순간, 내가 너무 가혹했던 건 아닌가 싶었다.통증이 한참 가라앉고 나서야 나는 멍하니 링거 주사를 바라보다가 문밖에 있는 함승윤을 불렀다. 그리고 그가 들어오자 나는 물었다.“제 상태가 어떤가요?”그는 이미 내가 상황을 짐작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숨김없이 말했다.“가주님의 몸 상태는 현재로선 좋지 않습니다.”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의사는 뭐라고 하나요?”“병세가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약을 제때 먹고 치료를 잘 따라야 병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나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조용히 물었다.“얼마나 더 살 수 있나요?”병이 억제된다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가주님, 그건 의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나는 눈을 감고 진지하게 말했다.“이 일은 절대 외부로 새지 않게 하세요. 고현성 외에 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면 책임을 물을 겁니다.”
‘이걸 왜 인제서야 떠올린 거지? 나도 참 멍청해.’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원태웅에게 물었다.“태웅 오빠, 무슨 일이세요?”“수아야, 석지훈 말이야. 한 달째 실종됐어.”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그가 에르크에도 돌아오지 않았고 우리랑도 연락이 전혀 닿지 않아. 마치 모든 걸 버리고 세상에서 사라진 것 같아.”나는 대략 석지훈이 아직 WT에 머물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하지만 원태웅의 말투로 보아 그는 내가 석지훈과 갈라섰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왜 한 달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이 사실을 내게 말하는 걸까? 그리고 왜 석지훈은 계속 WT에 머물러 있는 걸까?크리스가 말하길 WT는 그의 영역이라고 했고 나는 그 말이 맞다고 믿었다.하지만 석지훈이 왜 원태웅과의 연락을 끊고 한 달이나 자취를 감춘 걸까?이건 그의 평소 행동과는 너무도 달랐다. 가슴 한구석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몰려와 나는 원태웅에게 물었다.“왜 이제야 저한테 말해요?”그는 답답한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며칠 전부터 계속 너한테 전화했는데 연결이 안 됐잖아. 그뿐만 아니라 지훈이도 실종되고 너도 연락 두절이었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어!”며칠 전이라면...나는 그때 계속 의식이 없었다. 며칠 전 깨어났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핸드폰 기록을 볼 여유조차 없었다. 게다가 저장된 통화 기록만 해도 수백 개라 누구한테 전화가 왔는지 확인조차 하지 못했다.“미안해요. 제가 그동안 핸드폰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어요.”원태웅은 석지훈의 행방을 걱정하며 그의 소식을 물었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저도 지훈 오빠와 연락하지 않았어요. 우리 둘은... 이미 헤어졌어요.”그는 충격을 받은 듯 물었다.“헤어졌다고?”“네, 지훈 오빠가 먼저 얘기했어요.”원태웅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지훈 오빠는 너랑 헤어질 리가 없다고!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수아야, 제발 오해하지 마.”나는
아일랜드의 눈은 잠깐만 내렸고 기온은 영하 2도 정도로 크게 춥지 않았다. 하지만 내 몸은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지나치게 쇠약해진 몸 상태 때문일 것이다.WT의 위치는 아일랜드 북쪽의 깊은 숲속이었다. 다행히 우리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6시였다.아직 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 아래, 현정우는 차를 WT 기지로부터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세웠다.나는 두꺼운 옷을 단단히 여미고 차에서 내렸다. 백미러 속에 비친 내 얼굴은 숨이 넘어갈 듯 창백했고 붉게 충혈된 눈은 생기가 없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은 내 창백한 얼굴과 대비되어 더더욱 비참해 보였다. 나는 눈 덮인 땅 위에 서서 숨을 깊게 들이쉬며 정신을 다잡았다. 옆을 돌아보니 석씨 가문의 수백 명이 무기를 들고 현정우를 따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그들이 모두 내 곁을 지나간 뒤에야, 나는 조용히 옆에 있던 함승윤에게 물었다.“제가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걸까요?“더 많은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켜 복수를 한다는 것. 이 방법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 싶었다.내 질문의 의도를 알아챈 함승윤은 차분하게 답했다.“희생은 원치 않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석씨 가문이 복수를 하는 것은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전 세계 권력자들에게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가주님께서 이렇게 결단을 내리신 것은 옳은 선택입니다.“그의 말이 논리적임은 알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메시지가 아니었다. 나는 단지, 죽은 스물세 명의 경호원들에게 최소한의 정의를 돌려주고 싶었다. 그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WT 기지는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눈이 쌓인 길을 걷는 것이 쉽지 않았고 몸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현정우와 나머지 스물세 명의 경호원들은 내 바로 뒤에서 내 안전을 지키며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5분 정도를 걸었을 때, 우리는 눈더미를 돌아 WT 기지
한 달 만에 만난 석지훈의 얼굴은 이전보다 더욱 차가웠고 그의 옆에는 무장한 크리스가 서 있었다.크리스는 두려운 기색 하나 없이 태연하게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곧 내 주머니 속에서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하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받을 필요가 없었다.조소를 담아 크리스를 쏘아보자 그는 움찔하며 휴대폰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나는 눈을 감고 물었다.“끝나려면 얼마나 남았죠?”“가주님, 대략 10분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네.”대답을 마치고 나는 아래에서 벌어질 참혹한 상황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7, 8분쯤 흘렀을 때, 함승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끝났습니다! 가주님, 크리스를 생포했습니다.”“네. 석지훈은요?”내가 물었다.“석 대표님은 스스로 투항했습니다. 지금 저희 요원들이 그들을 끌어오는 중입니다. 곧 도착할 겁니다. 몇십 미터 정도 남았습니다.”함승윤은 시종일관 석지훈을 ‘석 대표님’이라고 불렀다.지금은 우리의 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석지훈에게 늘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송 어르신이라는 작자는 어디 있어요?”“아일랜드에는 없습니다.”눈을 떠보니 아무도 석지훈을 제압하지 않고 있었다. 현정우가 그에게 베푸는 최소한의 예의인 것 같았다. 반면 크리스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온몸이 밧줄로 꽁꽁 묶이고 상처투성이였다.그들은 크리스를 마대 자루처럼 내 앞에 내던졌고 석지훈은 크리스 옆에 서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당연했다. 석지훈 이 남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물며 상대가 나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나는 그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으니까.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추스르고 크리스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는 뻔뻔스럽게 히죽거리며 말했다.“연수아 씨는 지훈의 여자이고 나는 지훈의 친구야. 결국 보면 다 같은 편인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그리고 그날 일은 내가...”나는 가는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
‘내가 천벌 받는 게 두려울까? 잘못은 내가 한 게 아니잖아. 그때 그 칼, 내가 스스로 찌른 것도 아니잖아?’나는 그 칼을 석지훈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지만 막상 이 순간이 되니 두렵고 마음이 약해졌다.나는 그의 앞으로 가서 불렀다.“지훈 씨.”내 눈앞의 남자는 더 이상 내 오빠가 아니었다.그는 너무 키가 커서 내가 올려다봐야 했다.석지훈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담담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지금 무슨 말을 해도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머리가 멍한 상태였다. 나는 그의 앞에 다가가 칼끝을 그의 배에 겨누었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그를 해치지 못할 거라는 걸 확신하는 듯한 당당한 모습이 오히려 내 마음을 더 괴롭혔다.“윤아야, 이 칼은 내가 받아 마땅해.”그 자신도 이 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그에게 되갚아주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게 하고 싶었다.내 의식은 점점 흐릿해졌고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나는 뒤로 물러나 함승윤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몸이 먼저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석지훈은 재빨리 나를 품에 안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석지훈이 동성을 떠나 핀란드로 간 후, 그는 나에게 거의 연락하지 않았고 내 문자에도 거의 답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항상 내가 잘 자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그땐 정말 행복했고 이 남자가 내 운명이라고 확신했다.하지만 한 달 전, 모든 환상이 깨졌다.나는 마치 넓은 바다의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얼음이 산산이 조각나 차가운 바닷속으로 추락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국 나는 차디찬 바다에 빠져 차가운 물에 휩싸여 숨 막혀 죽고 말았다.나는 힘없이 턱을 석지훈의 어깨에 기댔다. 함승윤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고 석지훈은 차갑게 물었다.“왜 이래?”나의 몸 상태에 대해 나는 함승윤에게 함구령을 내렸기에 그는 대충
한참 만에야 여기가 석씨 가문의 저택인 석지훈의 정원이라는 걸 깨달았다. 피곤한 몸을 일으켜 침대 옆 옷을 걸치고 문을 열자 남자의 훤칠한 등이 나를 향해 있었다.등을 보인 남자는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고 검은색은 그의 고독한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도망치는 게 답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문턱을 나서며 그에게 물었다.“내가 왜 여기에 있어요?”마치 눈앞의 사람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내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마음속의 답답함과 슬픔은 너무나도 뚜렷했다.그때 문득 머릿속에 한마디 말이 떠올랐다. 나는 내 세상에서 혼란스럽지만 그는 그의 세상에서 바위처럼 굳건하다.바위처럼 굳건하다니...석지훈은 언제나 바위처럼 굳건했다.정원에는 가랑눈이 내리고 있었고 복도의 등불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남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아. 의사가 요양이 필요하다고 해서 조용하고 경치 좋은 석 씨 저택으로 데려온 거야.”나는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모든 감정과 그에 대한 증오를 억누르고 가볍게 말했다.“아. 그럼 이젠 가셔도 돼요.”석지훈은 움직이지 않았다. 긴 침묵 끝에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물었다.“만약 그날 내가...”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그에게 줄 인내심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짜증스럽게 그의 말을 끊었다.“갈 거예요, 말 거예요?”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윤아야, 나를 원망해?”“지훈 씨, 우리 사이는 이미 끝났어요! 이 말 당신 입으로 직접 한 거잖아요. 난 그 말, 평생 못 잊어요!”석지훈은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무언가 말하려다 결국 침묵했고 그 차가운 눈빛은 마치 나를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일단 좀 쉬어.”석지훈이 떠나자 나는 온몸에 힘이 풀려 문틀을 잡고 간신히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잘못한 건 그였고 헤어지자고 한 것도 그였다.내가 잘못한 건 없었다....석지
최욱현은 갑자기 손을 뻗어 내 뺨을 만졌다. 나는 거부감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눈을 뜨고 말했다.“그 손으로 날 건드리지 마!”나는 그에게 명령했다.“당장 여기서 나가.”내가 돌아서서 가려는데, 그때 최욱현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전화를 받으며 인상을 찌푸렸다.“무슨 일이야?”최욱현은 F 국어로 말했고 상대방의 대답도 F 국어였다.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최욱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는 나를 보며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내 신념은 어머니였어. 내 목숨을 바쳐 어머니를 평생 지켜주는 거였다고. 그런데 수아야, 난 방금 어머니를 잃었어.”‘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하지만 우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지 20분도 안 됐잖아. 어떻게 이렇게 빨리?!’나는 순간적으로 슬픔에 잠겼다.나는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최욱현은 내 손목을 잡고 차갑게 말했다.“나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는데 어머니가 나에게 두 번째 삶을 주셨지. 어머니는 나와 함께 있어 준 유일한 사람이거든.”말을 마친 최욱현은 황급히 달려갔다. 그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고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결국 나는 그를 쫓아갔지만 길을 잃고 말았다.그렇다, 나는 지하 통로에서 길을 잃었다.지하 통로에는 여러 갈래 길이 있었다.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아무리 걸어도 계속 통로 안이었으니까.나는 아까 그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10년 동안 포르말린에 담가 놓은 그 신장과 그 노인을 다시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나는 절망에 빠졌다.그때야 비로소 휴대폰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나는 급히 석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가장 먼저 석지훈이 떠올랐을 뿐, 현정우가 나와 가장 가깝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석지훈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윤아야?”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오빠.”그는 부드럽게 물었다.“윤아야, 무슨 일이야?”“오빠, 나 지하에서 길을 잃었어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욱현이가
부패하는 냄새에 속이 뒤틀렸다. 코를 막아도 메스꺼움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최욱현은 냄새가 좋으냐고 묻다니.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이게 무슨 냄새야?”최욱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노인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나를 보며 계속 F 국어로 말했다. 나는 F 국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 최욱현에게 물었다.“이 사람, 네가 여기에 가둔 거야?”“어. 잘못을 저질렀거든.”최욱현의 말투는 담담했다.나는 다시 물었다.“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여기에 가둔 거야?”최욱현은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고 손을 뻗어 흰 천을 벗겼다. 천 아래에는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신장처럼 보이는 모양의 물건이 담겨있었다.보기에도 역겨웠다.속이 뒤틀려 토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물었다.“내 물건이 있다고 했잖아. 뭐가 있는데?”최욱현은 나와 신장을 번갈아 봤다.나는 충격에 빠져 물었다.“설마...”“이건 너의 예전에 망가졌던 신장 두 개야. 내가 가져왔지. 이 일은 어머니도 몰라. 하지만 난 널 위해 계속 보관하고 있었어. 사실 훨씬 전부터 널 만나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엄하게 감시했어. 내가 네 삶을 방해하는 걸 원하지 않으셨거든.”어쩐지 포르말린 냄새가 난다 했다.나는 결국 바닥에 토하고 말았다. 계속 토하는 나에게 최욱현은 다가와 등을 두드려 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많이 힘들어?”나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너 정말 역겹다.”적출된 내 장기를 직접 보게 하다니...그 생각을 하니 더 심하게 토했다.한참을 토하고 나서야 좀 진정이 되었다. 최욱현은 내 옆에 서서 손바닥으로 내 등을 계속 쓰다듬어 주었다.점심에 먹었던 것을 다 토해내고 나니 담현아가 아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최욱현은 사람을 죽이는 방식이 잔인하다고 했다.그렇다면 그 부패한 냄새는...나는 그 노인을 쳐다보았다.그리고 급히 영어로 물었다.“영어 할 줄 아세요?”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그는 악마예요!”최욱현은 그가 말하
“괜찮아. 약으로 버티면 된대.”그녀가 말했다.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의 얼굴은 비록 창백했지만 꽤나 아름다웠다. 그녀는 우아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에 네 아버지와 약속했었어. 우리 둘이 다시 만나는 건 죽고 난 뒤라고. 이제 그가 나보다 먼저 떠났으니 지금의 나는 그저 그 뒤를 따르는 것뿐이야. 내 바램이기도 하지. 그러니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문득 운산 정상에 있는 그 비석이 떠올랐다.비문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있다.‘인연이 다시 이어질 때 부디 당신은 이미 세상을 떠났기를’그녀는 내 아버지를 미워했지만 또한 깊이 사랑했던 것이다.그리고 내가 그 신장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을 원치 않았다.마음 깊이 감춰져 있던 그녀의 사랑을 깨닫자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모두 그녀 때문이었다.그녀는 내가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최욱현에게 말했다.“욱현아, 알랭이 곧 도착할 거야. 그와 할 이야기가 좀 있으니 먼저 수아를 데리고 밖에 나가서 구경 좀 하고 있어. 30분 후에 다시 오렴.”최욱현은 나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에게 말했다.“편찮은 걸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파. 결국 나 때문에... 나로 인해 시작되었고 결과도 내가 이렇게 만들었어. 다 내 잘못이야.”최욱현은 무심하게 물었다.“그게 전부야?”나는 촉촉해진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내 목숨은 그녀가 준 거야. 결국 나는 그녀에게 빚을 졌어.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넌 어머니가 목숨을 주셨기 때문에 마음이 아픈 거야? 그럼 어머니가 원하는 건 단지 딸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나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무슨 말이야?”“넌 어머니의 딸이고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야. 예전에 나에게 신념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거 기억해?”“네 신념은 뭔데?”내가 물었다.그는 한때 신념이란 ‘목숨’이라고 했다.평생을 바쳐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그는 대답하지 않고 평소답지 않게 침묵했다.최욱현은 나를 데리고 엘
F 국의 초봄은 따뜻했다. 헬기에서 내리자 따스한 기운에 나도 모르게 외투를 벗었다. 최욱현은 내 뒤를 따라 내리더니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성을 가리키며 말했다.“어머니가 안에서 기다리셔.”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병원에 안 계시는 거야?”최욱현은 씩 웃으며 설명했다.“어머니는 개인 주치의가 있거든.”나는 일단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최욱현은 성 주변을 지키는 석씨 가문 사람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수아야, 뭘 그렇게 경계하는 거야?”그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나는 핑계를 댔다.“얼마 전에 안 좋은 일을 당해서 크게 다쳤거든. 그래서 요즘 외출할 때 조심하는 거야. 너를 경계하는 건 아니야.”나는 최욱현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거대한 성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의아한 마음에 물었다.“성에 가정부가 없어?”최욱현은 내 옆에서 함께 걸으며 설명했다.“별로 없어. 어머니와 알랭, 두 사람만 살아.”나는 다시 물었다.“알랭?”“네 계부. 이 나라의 공작이셔.”공작은 귀족 중에서도 최고 등급이었으니 상상하기 어려운 높은 지위였다.그나마 엄마는 좋은 남자를 만난 것 같았다....성에 도착해서야 나는 ‘별로 없다’라고 말한 최욱현의 말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넓은 거실에는 하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2층 복도에도 열 명이 넘는 가정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그들은 화려한 드레스를 맞춰 입고 있었는데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옷 같았다. 게다가 성 내부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였고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음침한 기운이 감돌았다.나는 복도에 서 있는 순간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문득 최욱현을 따라 F 국에 온 걸 후회하며 당장 여길 벗어나고 싶었다. 최욱현은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갑자기 내 손을 꽉 잡았다. 나는 깜짝 놀라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의 손아귀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최욱현은 내 손을 잡고 긴 복도를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방은 50평 정도로 아주 넓었다.방
방금 잠에서 깬 것 같았다.“그 여자가 많이 아프대요. 그래서 지금 F국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요.”나를 낳아 준 엄마는 신부전증이었다. 그리고 그 병은 내 탓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나에게 신장을 하나 줬으니까.신장이 하나밖에 없으면 신부전증에 걸리기 쉬웠다.석지훈은 내가 말하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동의했다. “그래. 정우 씨랑 같이 가. 난 어르신을 뵙고 F국으로 너 데리러 갈게. 그다음에 같이 운성으로 돌아가자.”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사실대로 말했다.“욱현이가 여기 있어요.”나: “...”석지훈은 침묵했다.나는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오빠.”“그래. 네가 결정한 대로 해.”“그럼 F국에서 기다릴게요.”석지훈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최욱현에게 말했다.“가자. 내 헬기 타고 가.”담현아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리를 떴다.그녀가 떠나자마자 문자가 도착했다.그녀는 당부했다.[그 사람을 조심해요.]헬기가 이륙하자마자 석지훈에게서도 문자가 왔다. 그는 좀처럼 하지 않던 당부를 했다.[최욱현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 너랑 어머니 관계 때문에 널 특별 취급하진 않을 거야. 윤아야, 정우 옆에서 떨어지지 마. 안 그럼 F국에 가도 널 바로 못 찾을 수도 있어.]담현아도 걱정하고 석지훈도 걱정했지만 눈앞의 최욱현은 전혀 해가 없어 보였고 예전에도 딱히 나쁜 짓을 한 적도 없었다.기껏해야 날 납치했다가 풀어준 것뿐이었다.그렇긴 해도 나는 마음속으로 경계를 늦추지 않고 휴대폰으로 현정우에게 문자를 보냈다....석지훈은 침대에 앉아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한 시간도 채 못 잤는데 여자 친구가 F국로 가버리다니.최욱현.이름만 들어도 골치가 아팠다.그는 유럽 전체에서 큰 세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왕실의 후원을 받고 있어서 항상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게다가 작년에 석지훈이 사업에 실패했을 때, 최씨 가문은 그 틈을 타 세력을 키웠다. 최씨 가문은 석지훈과 진유겸에게는 눈엣
나는 최욱현이 담현아의 말처럼 무섭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새해 때도 그는 소년처럼 우리 집에 눌러앉아서 설을 쇨 정도였으니까. 그때는 딱히 과한 행동도 안 했고 나름 잘 지냈다.하지만 담현아의 걱정하는 모습에 그냥 따라 나가기로 했다. 콘서트장 출구에 다다랐을 때, 우리에게로 한 줄기 빛이 쏟아졌다. 동시에 최욱현의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두 분, 축하드립니다! 무대에 올라와서 저와 함께 게임을 하시겠어요?”스태프가 마이크를 건넸다. 담현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바로 가 봐야 해요. 죄송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할게요.”담현아는 나를 잡아끌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욱현은 그냥 철없는 애야. 그렇게 무서워할 것 없어.”담현아는 동의하며 말했다.“무섭진 않죠. 그냥 미친놈이니까!”담현아는 최욱현에 대해 좋은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궁금해서 웃으며 물었다.“혹시 욱현이한테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한 적이 있어?”그 말에 담현아는 침묵했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한겨울에 담현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난 최욱현이 사람을 죽이는 걸 봤어요. 그것도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수아 언니, 그 녀석은 순진한 척하는 게 특기예요. 그래서 업계 사람들은 다 그를 싫어하죠! 지금까지 프랑스 왕실의 비호가 없었다면 그는 진작에 제멋대로인 성격 때문에 목숨을 잃었을 거예요. 그러니 언니도 그 인간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예요.”담현아의 표정을 보니 정말 최욱현을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최욱현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는 말하지 않았다.굳이 설명하자면 같은 어머니를 뒀다는 것뿐이었다.나와 담현아가 헬기를 타려고 할 때, 최욱현이 뒤쫓아 왔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수아야, 어디 가?”담현아는 내 팔을 꽉 잡았다.나는 헬
[네. 위치 보낼게요.]담현아는 내 휴대폰으로 주소를 보냈다. 에르크 시내에 위치한 곳으로 오후에 석지훈과 함께 쇼핑몰에 갔던 곳 근처였다. 차로 가면 두세 시간은 걸릴 거리였다.솔직히, 요 며칠 나는 계속 이동 중이었다. 길 위에 있거나 길을 떠날 준비를 하거나. 난 이런 이동에 정말 진절머리가 났다.그래서 현정우에게 헬기를 준비시켰다.30분 후, 나는 현정우와 함께 시내에 도착했다. 담현아는 이미 와 있었지만 한민수는 아직이었다. 담현아가 단톡방에 문자를 보내 물어보자 그의 답장이 왔다.[가는 중이야. 차로 한 시간 더 걸릴 듯. 너희 먼저 놀고 있어. 도착하면 연락할게.][OK.]담현아가 답장을 보내자 원태웅이 문자를 보고 물었다.[너희 어디서 노는데?]담현아가 답했다.[저 수아 언니랑 콘서트 보러 왔어요.]담현아는 폰을 집어넣고 나를 콘서트장 안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입구에서 LED 토끼 귀 헤어밴드 두 개를 사서 각자 하나씩 썼다. 나는 신이 나서 말했다.“나는 정재 씨의 음악회밖에 못 가봤어. 이건 내 생애 첫 콘서트야.”고정재 이야기를 꺼내자 담현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나는 그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왜 그래?”“새해 이후로 연락이 없었어요.”고정재는 아마도 한민수가 새해 첫날 담현아를 핀란드에 데려간 일 때문에 여전히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고정재에게 담현아가 일 때문에 갔다고 설명했었다.나는 문득 고정재가 담현아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에게 설명하지 않고 혼자 속앓이를 하게 만든 것에 화가 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정재는 아마 지쳤을 것이다.이 관계에서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부었으니까.나는 담현아에게 물었다.“실망했어?”콘서트장은 현란한 조명과 사람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담현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나도 신경 쓰이나 봐요.”그 말은 고정재의 마음이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라는 뜻이었다.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둘 사이를 어떻게 할 생각이야? 현아야,
현정우는 잘생긴 외모에 말이 없을 때는 차가워 보였다. 게다가 경호원이라는 직업은 큰 안정감을 주었다. 키도 190cm에 가까웠고 건장하면서도 군살 없는 몸매는 석지훈 못지않게 완벽해서 이런 남자라면 여자들이 줄을 서서 따라다닐 것이었다.하지만 지금 그는 스스로를 겨우 목숨이나 파는 경호원이라고 낮추며 말 한마디마다 자기비하가 가득했다.그 모습을 보니 내 기분까지 가라앉았다.그는 내 사람인데, 내 사람이 이렇게 스스로를 비참하게 여기는 건 내 탓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느 집 귀한 아가씨이기에 그가 이렇게까지 비참한 감정을 느끼는지 알고 싶었다.나는 다시 물었다.“이름이라도 알려 줄 수 있어요?”현정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아꼈다.“저에게는 너무 높은 분이라 그냥 마음속에 간직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나는 자조적인 그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약속했다.“좋아한다면 내가 중매를 서 줄 수도 있어요. 어쨌든 지금 저는 석씨 가문의 대표이니까. 내가...”현정우는 입술을 깨물더니 부드럽게 내 말을 가로막았다.“가주님, 그녀는 눈부신 별과 같은 사람입니다. 석 대표님 같은 남자가 어울리죠. 저는 그저 바닥의 진흙일 뿐이니 가주님이 나서준다 해도 그녀는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녀와 제 마음은 그저 가슴속에 묻어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요.”현정우가 그렇게 말하니 더 이상 묻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중요한 건 좋아하는 마음이에요. 나도 9년 동안 한 사람을 좋아했었어요... 뭔가를 바라서가 아니라 그 사람은 제게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으니까요.”“네. 저도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나는 약속했다.“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요.”“가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훨씬 뒤에야 나는 현정우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정말 그의 마음속 깊이 묻어둔 너무나 멀고 높은 별이었다.그리고 그 별 때문에 그는 깊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강가에서 잠시 시
석나은도 석지훈을 자신의 개인 소유물로 생각했다.그의 주변엔 여자가 많았고 하나같이 그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하지만 그는 능숙하게 상황을 처리했고 누구에게도 헛된 희망을 주지 않았다.나는 석지훈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걱정스럽게 물었다.“한씨 가문은 오빠를 계속 사윗감으로 생각하는데 우리 관계를 알면 어르신께서 오빠한테서 등을 돌리지 않을까요?”석지훈은 태연하게 말했다.“아니. 설령 나한테 등을 돌린다 해도 상관없어. 난 애초에 남 눈치 보면서 살지 않으니까.”석지훈은 사람과 일에 대해 항상 초연한 태도를 보였다.“나 때문에 오빠가 곤란해지는 건 싫어요.”석지훈은 갑자기 달래듯 말했다.“착하지, 조금만 자자.”그는 대화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남자였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잠들지 못하고 그의 체취를 깊이 들이마시며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이렇게만 있어도 충분히 안심이 되었다.석지훈은 피곤했는지 나보다 먼저 잠들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눈썹뼈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그의 눈썹뼈는 정말 아름다웠다.단단하고 하얀 것이 내가 좋아하는 모습이었다.나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그의 눈썹뼈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느낌에 그가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리자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석지훈은 갑자기 손을 뻗어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안 자?”그의 목소리는 낮고 허스키했다.나는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애정 어린 입맞춤을 했다. 석지훈은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껌딱지.”그는 항상 나를 껌딱지라고 불렀다. 하지만 나는 정말 매 순간 그에게 붙어 있고 싶었고 그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런 감정은 고현성에게서는 느껴본 적 없는 것으로 내 마음은 온통 그로 가득했다.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좀 더 자요.”석지훈이 눈을 감자 나는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 앉아 나는 휴대폰으로 현정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현정우는 의사를 데리고 별장으로 들어왔다. 치료가 끝나